동북아경제공동체를 구상하고 韓中수교의 막후 매개 역할도 한 趙利濟 동아시아경제연구원(API) 이사장(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총장)이 1일 오전(한국시간) 미국 하와이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87세(호적상으로는 1936년생).
1934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趙 이사장은 16세 때이던 부산 원예중학교 재학시절 미군에 차출되어 北進대열에 참전, 중공군과 싸운 적도 있는 소년병 출신이다. 그는 한국외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미국 시카고대 사회학 박사, 일본 도쿄대 인구학 박사, 게이오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시카고대 교수와 서울대·미시간주립대 연구교수를 지냈다. 'Own children methodology'라는 인구추계법을 창안, 세계적 인구학자로 평가된다.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근무하면서 한국의 학자, 중견 공무원, 학생들에게 교육과 연수기회를 제공했고, 동북아경제공동체 구상과 두만강지역개발계획을 주창했다. 1991년 동북아의 경제·사회발전을 위한 비정부 국제기구인 동북아경제포럼(NEAEF)을 설립했고, 1992년 4월에는 북한 평양에서 '두만강개발 국제학술대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두만강개발계획은 유엔개발계획(UNDP)의 공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1992년 10월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을 받았다.
그는 1992년 韓中수교의 막후 역할을 맡기도 했다.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 주석이 존경하는 중국의 과학자 쑹젠(宋健) 전 국무원 부총리가 조 이사장의 오랜 친구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2005년 9월 제14차 동북아경제포럼에서 정원식 전 총리가 대독한 연설에서 "1990년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 나는 조이제 박사에게 두 나라 고위 당국자 사이의 대화채널을 열어 줄 것을 요청했다. 중국의 부주석을 지낸 송건 박사와 조이제 박사 두 분이 수행했던 역사적인 역할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었다.
'한글 지킴이'로 유명한 전택부(1915∼2008) YMCA 명예총무의 사위이기도 한데 조이제 자신은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한자 한글 혼용주의자였다. 1994년 1월호 월간조선이 선정한 '세계적 한국인' 73명의 한 분으로 뽑히기도 했다. 최근엔 박정희 개발 모델을 국제적 시각에서 분석, 정리한 '한국의 근대화, 기적의 과정'(조갑제닷컴 출판)을 編著하였다. 유족은 부인 전은자씨와 딸 조윤경(미국 언론인), 아들 조상문(교수)·조 제레미(교수)씨가 있다. 장례식은 미국 하와이에서 있을 예정이다. 국내 연락처는 ☎ 02-779-3247(동아시아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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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1993년 10월호 인터뷰 기사 중에서.
미국 이스트 웨스트 센터 부총장으로서 미국·중국·일본·북한·동남아의 고위층에 넓은 인맥을 갖고 잇는 세계적인 인구학자. 두만강 개발계획의 발상자이기도 한 趙박사는 유동적인 동북아정세를 한국이 주도적으로 활용하고 향후 10년간 경제성장에 국력을 집중하면 21세기의 강자가 될 수 있지만 지금의 찬스를 놓치면 주변강국의 종속국으로 전락해버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1부 趙利濟의 국제인맥
거창한 인맥의 국제인
하와이에 있는 동서문화센터 부총장 조이제(趙利濟) 박사(57)는 남북한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이 참여하는 두만강 개발 계획을 처음 구상하고 이를 구체화하는 「동북아 지역 경제 희외」를 주관하고 있는 거물급 국제 학자이다. 한국의 상부 인사는 물론 중국, 일본, 미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아시아권의 저명한 학자 및 고위관료들과 인맥을 구축하고 있으며 북한에도 다녀왔고 한중수교과정에서도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주지는 하와이이나 경제기획원산하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월간조선이 趙박사의 비전을 들어보기 위해 그를 만난 것은 지난 10월7일 정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였다.
식사 도중 金永三 신정부의 司正활동을 소재로 한 대화가 오고 갔다. 金永三 대통령의 개혁정책에 대한 지지도가 최근 80, 90%대를 기록하고 있는 것에 대해 趙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반공 분위기는 대단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전쟁 발발 3일 만에 미군을 파병하자 80%의 미국민이 대통령의 결단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미군이 후퇴하자, 미국민의 85%가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당장 미군을 철수시켜라」는 의견을 보였습니다. 여론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때 트루먼 대통령은 「나는 대중여론조사를 따르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져서 결정하겠다(I don't follow opinion poll. I only follow what is right or wrong for the country)」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지도자는 대중적 인기에 매달려서 국정을 결정하면 안됩니다』
화제는 金永三 대통령이 「신한국건설」과 「신한국군의 원년」을 선언한데로 흘러갔다. 趙박사는 『이북의 金日成도 주체를 강조하면서 「새역사의 창조」를 선언했다. 북한은 6·25전쟁사를 새로 기록하면서 중국 팔로군이 참전한 것을 빠뜨려 버렸다. 한국인은 너무 새것을 좋아하는 것이 문제다. 새것만 찾다보면 왜곡이 생긴다』면서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링컨 다음으로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는 트루먼도 「과거의 대통령이 아무리 잘못한 것이 많더라도 단절시켜버리면 혼란이 온다. 그들의 장점을 살려서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어서 경제발전과 부패의 함수관계가 화제가 되었다.
봉급장이들은 원천징수를 당하기 때문에 세금을 다 내지만 돈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절세, 탈세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 아닌가란 질문에 趙박사는 『미국의 재정학 교수들은 수업 첫시간에 「지도자가 소득이 많은 상위 5%의 사람들로부터만 세금을 거두어 정치하겠다고 하면 90% 이상의 국민이 찬성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자본주의가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본격적인 인터뷰는 호텔 근처에 있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자문위원실로 옮겨서 시작했다. 趙박사의 특징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빙빙 돌리지 않고 쉽게 설명한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趙박사가 경제학, 사회학, 언어학의 용어를 구사하면서 영어, 일어, 중국어까지 구사했지만 이해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오후 5시쯤 일행은 趙박사가 묵고 있는 남산의 타워호텔로 옮겨가서 인터뷰를 계속했다. 중간에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인터뷰를 하다가 헤어진 것은 저녁 10시30분이 넘어서였다.
전통적 교양에 국제적 감각
趙利濟 박사는 1936년 7월5일 일본에서 태어나 만 아홉 살 때 해방을 맞아 가족과 함께 고향인 경남 함안군으로 돌아왔다. 국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정치행정학 석사, 시카고대학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시 일본으로가 도쿄(東京)대학에서 인구학 박사, 게이오(慶應)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부산 동아대학에서 명예 경제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바 있다. 그가 박사학위논문을 발전시켜서 만든 인구구조 예측 모델은 세계적인 학설로 인정돼 각국의 인구정책에 활용되고 있다. 정치학, 행정학, 사회학, 인구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전 분야에 대해 관심을 넓혀가는 도중 그는 부흥부에서 관료로 근무했고(1958년), 국세(國稅)조사위원회 간사(1959)를 지내기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시카고대학 조교수, 하와이대학 사회학·경제학교수(겸직)를 지냈으며 시카고대학 조교수, 하와이대학 사회학·경제학교수(겸직)를 지냈으며 동서문화센터(East West Center)총장서리와 부총장(현재까지)을 지냈다. 1966년에는 서울 문리대에서 초청연구교수로 강의한 바 있고 다음해엔 말레이시아 수상실 고문으로 근무했으며 중국 길림대학의 명예교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趙박사가 여러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던 배경엔 탁월한 외국어 습득 능력이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한국어, 영어, 일어 외에도 중국어, 말레이시아어, 인도네시아어,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 구사력과 학자적 명성, 전통적인 교양과 국제적인 감각,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다국적 인맥이 있었기 때문에 두만강 개발 계획과 같은 국제적인 프로젝트를 주도할 수 있었다. 그는 朴正熙 대통령 재임중 한국의 경제 개발 정책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공로 등으로 국민훈장 동백장(1977년)을 받았고 한중수교의 막후에서 양국정상간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맡아 국민훈장 무궁화장(1992년)을 받았다. 가족은 1973년 결혼한 전은자(全恩慈)씨(전택부.全澤鳧 YMCA 명예회장의 딸)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주 생활 근거지는 미국의 하와이이나 한국 국적을 고수하고 있다.
朴正熙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약점을 알았다
―趙박사께서 지난 80년대 초 중국에서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발전 모델을 연설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시기가 중국이 개방을 한 것과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1982∼83년 제가 중국에서 연설할 때 「朴正熙는 사회주의자였다」라고 했더니 단박에 그들은 관심을 표현했습니다. 이어서 「그러나 朴正熙는 사회주의의 약점을 알았다. 동시에 그는 자본주의를 알았고 자본주의의 약점도 알았다」라고 했습니다. 또 「朴正熙의 리더십은 그가 청렴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은 朴正熙의 이러한 점들을 배워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朴正熙의 생각은 시장경제적 자본주의와는 차이가 있나요.
『순수한 시장경제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가 통제하고 계획해서 국부축적을 우선시한 자본주의였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통합을 꾀한 것이라는 의미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내용의 연설을 저는 테크노크래트들이 다수인 중국의 당간부들에게 했습니다. 연설을 듣고 난 다음 그들은 우리도 상품경제·시장경제의 매커니즘을 도입해도 성공할 수 있겠다고 좋아했습니다. 鄧小平이 최근의 남방강화(南方講話)에서 「계획 없는 시장경제가 없고, 시장경제가 없는 계획경제가 없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혹시 趙박사의 연설을 듣고 나서 朱鎔基나 江澤民 등 중국의 지도부가 朴正熙에 대해 코멘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까.
『중국 각료급 인사들이 朴正熙 대통령을 거론하는 것은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의 모델이 중국의 개방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라고 보십니까.
『좋은 영향을 많이 주었지요. 특히 한국의 초기 경제개발에 영향을 받아서 만든 것이 대련 지역의 공단입니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
―동서문화센터에서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책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목과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朴正熙 재임 18년 간의 한국 경제 개발 정책의 성공사례와 실패사례 18개를 정리한 것입니다. 1991년 출판했는데 제목은 「한국 경제 정책론 : 정책 측면에서 본 한국 경제론 (Economic Development in the Republic of Korea : A Policy Perspective)」입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책은 어떤 내용입니까.
『한국의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본 朴正熙 개발모델에 관한 것입니다. 독일학자, 일본학자들도 참여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한국개발원(KDI)과 함께 남북경제 통합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이북에 갔다 온 중국 갈림대 교수들이 참여할 계획입니다. 이 작업은 북한에 관한 자료가 적어서 굉장히 어렵습니다. 길림대 교수들의 관찰을 통해 중국과 북한의 경제체제를 비교해 보고 이어 북한과 한국의 경제체제를 비교해 보는 방법으로 북한의 경제 체제를 분석할 예정입니다』
―북한의 1인당 주민소득이 1천달러쯤 된다고 하는 데 어떻게 보십니까.
『1천 달러는 과대평가한 금액입니다. 오만 가지를 다 넣어서 평가한 금액이었겠지요』
―趙박사께선 70년대부터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모델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성공사례가 되겠다고 느끼셨다고 하셨지요.
『미국과 영국식의 모델은 시장경제의 원리에 의해 정부는 뒤로 빠지는 것이었으나 한국의 예는 경제 개발에 있어서의 정부 역할을 중요시한 것이었습니다. 과거 일본이 경제개발에서의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제일 먼저 증명했었고 한국은 저개발 국가에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증명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중요한 모델이 되겠다고 본 것입니다』
―최근 세계은행에서 동아시아 8개국의 고도성장을 분석한 보고서를 보니까 동아시아 국가가 빨리 성장한 이유로 정부의 개입, 높은 교육수준, 비교적 깨끗한 관료집단 등등을 꼽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아시아의 모델을 남미 등의 다른 지역에 적용시켜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더군요.
『문화권이 다르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경제발전 모델은 유교―한자문화권, 가부장적인 사회라야 가능합니다. 孟子의 덕치국가 이론은 지도자가 현자(賢者)를 모아야 국가가 융성한다는 것입니다. 국운이 있어야 좋은 임금이 나타난다는 철학인 것이지요. 권위있는 리더십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타이밍을 안 朴正熙
―趙박사께선 朴대통령이 경제개발을 할 때 조언을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참여하셨습니다. 때문에 직감적으로 한국의 경제 개발 성공 이유를 분석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朴대통령의 리더십 때문입니다 리더십이란 국민의 마음을 잘 아는데서 나옵니다. 우리 국민의 어디가 강점이고 어디가 약점인가를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는 독서를 많이 했기 때문에 역사의 시원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역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타이밍을 알았습니다. 대신 朴正熙는 민주주의 사회를 산 적이 없었다는 것이 약점이었습니다. 그가 대구사범학교를 나왔다는 것은 모범생적인 자세를 갖게 된 것과 관련있을 것입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다니면서 기율을 몸에 익혔습니다. 일본이 명치유신을 치르면서 봉건국가에서 현대적인 국가로 탈바꿈할 때의 지도자 역할을 독서를 통해 터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이끌어주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국가 자본주의라는 말을 썼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과 10월유신은 함수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권위에 의한 체제를 확립한 것이 10월유신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민주주의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는 원래 모순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유신 때 두 번의 오일쇼크가 있었습니다만 한국은 극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까지 하였습니다. 그때는 왜 무리한 투자를 하느냐고들 했는데 그 혜택을 우리는 80년대부터 누려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불경기라고 해도 중화학공업만은 연 10% 이상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항상 그 시기의 시각으로만 사물을 보면 안됩니다. 朴대통령의 중화학공업 투자는 20년, 30년 후의 세상을 내다보면서 국가에 플러스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이냐를 내다보고 한 것입니다. 사무엘슨의 제자인 일본의 계량경제학자 이치무라(市村) 교수는 「과거엔 朴正熙 대통령의 8·3조치(사채동결 조치)를 비판했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8·3조치는 계량경제학 방식으로 분석해야 할 것이 아니라 20, 30년이 지난 후 역사관을 가진 역사가들이 평가해야 할 것 같다. 朴正熙 대통령은 일본을 봉건사회에서 합리화 사회로 이끌어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발전엔 반드시 희생 따라
―그 비슷한 시각으로 이인화라는 젊은 작가가 「영원한 제국」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정조를 주인공으로 한 것인데 작가는 소설 중 정조의 모델이 朴正熙였다고 했습니다. 정조와 朴正熙는 권력을 강화해서 그 당시 지식층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무시하고 개혁을 한 공통점이 있다고 작가는 말했습니다.
『국민의 의식구조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2백년 걸려서 민주주의를 만들어 왔습니다. 일본도 명치유신을 시작으로 1백년 동안 국민을 훈련시켰지만 지금도 완전한 민주주의를 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 뜻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우리 국민의 의식구조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수 국민의 욕구는 언제나 놀고 싶어 하고, 일어서서 민주화를 외치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국민적 요구를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경제개발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봅니다.
이점에선 鄧小平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발전이 먼저 되어야 제도적으로 민주발전이 따라옵니다. 이를 거꾸로 하다간 폭동이 일어나 할 일도 다 못하게 됩니다. 언제나 「희생적인 간격」은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려다간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가 중국의 지도자가 위대하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국은 미국과 비슷한 면적이나 인구는 네배가 넘는다. 그런데도 국민을 굶기지 않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겉만 볼 것이 아니라 속을 살펴보아야 한다」 필리핀식의 민주주의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희생적 간격」이란 용어는 趙박사께서 개발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영어로는 sacrificial gap 또는 sacrificial lag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金泳三 대통령의 개혁을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제력이 없으면 문화고 뭐가 없습니다. 먼저 배가 불러야 합니다. 항산(恒産)에서 항심(恒心)이 나옵니다』
―朴대통령을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은 침착하고 뭔가 뜻이 있고 비전이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상 대화를 해보니깐 부드럽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역사의 時運을 타야 한다
―이석제 전 감사원장은 朴正熙 대통령과 가깝게 지낸 분이었습니다. 이석제씨의 말이 『朴正熙 대통령은 「김일성은 내가 직접 상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80년대에 중국의 조선족 교포들 대다수가 「朴正熙가 이겼다. 김일성이 졌다」고 심판을 내리더군요』
―朴正熙 대통령은 조국근대화라는 비전으로 경제 개발을 하면서 한편으론 의료보험제도의 틀을 만들고 국민교육헌장을 만드는 등 全방위로 국가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 점은 金泳三 대통령과 비교된다고 생각합니다. 金대통령께서 지금 개혁을 한다고 司正바람을 일으키지만, 國政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좁게 보면서 이 나라를 끌고 나가는 것 같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朴대통령은 가난을 절실히 느끼면서 어렵게 컸으니 빈곤으로부터 해방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金대통령은 독재체제에 대한 反작용으로 「우리도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우리는 말로만 민주주의 한다고 해놓고 한번도 민주주의를 못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먼저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쌓아온 경제기반을 정비해 나가면서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당시의 시운(時運)을 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정을 하더라도 주위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感知해가면서 해야 합니다. 경제는 경제대로 밀고 나가면서 司正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경제는 물 흐르듯 이어져 가는 것인데, 司正을 한다고 과거와 단절시켜서는 안됩니다. 중국말에 「소사화 무(小事化 無)」라는 것이 있습니다. 작은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과거 것이 좀 잘못되었더라도 좋은 것은 그대로 이어나가야 합니다』
소년병 출신의 세계적 인구학자 趙利濟 박사 별세!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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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1, 18: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