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現代史의 막후 秘話] 13년 만에 밝혀진 韓·中수교의 두 밀사 趙利濟-宋健
盧泰愚 대통령 친서를 趙박사가 1990년 겨울 宋健 부총리에게 전달, 宋부총리가 江澤民에게 전달
조갑제
1년 6개월뒤 중국 최고지도부는 錢其琛 외교부장을 金日成에게 보내 韓·中수교가 결정됐음을 최후 통첩했다.
趙利濟
936년 경남 함안 출생. 한국외국어大 영문학과 졸업. 美 시카고大 사회학 박사, 일본 도쿄大 인구학 박사, 일본 게이오大 경제학 박사. 美 시카고大 교수, 서울大 연구교수, 美 미시간 주립大 연구교수, 말레이시아 수상 고문, 美 East-West Center 총장 등 역임. 現 East-West Center 수석고문, 동북아 경제포럼 창립의장.
宋健
1931년 중국 山東省 출생. 모스크바 국립기술大 공학박사. 우주항공부 부부장(차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주임(의장). 국무원 부총리. 중국기술원 원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역임.
趙利濟
936년 경남 함안 출생. 한국외국어大 영문학과 졸업. 美 시카고大 사회학 박사, 일본 도쿄大 인구학 박사, 일본 게이오大 경제학 박사. 美 시카고大 교수, 서울大 연구교수, 美 미시간 주립大 연구교수, 말레이시아 수상 고문, 美 East-West Center 총장 등 역임. 現 East-West Center 수석고문, 동북아 경제포럼 창립의장.
宋健
1931년 중국 山東省 출생. 모스크바 국립기술大 공학박사. 우주항공부 부부장(차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주임(의장). 국무원 부총리. 중국기술원 원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역임.
경악한 金日成
<1992년 7월15일 오전 11시. 평안남도 연풍호숫가의 金日成(김일성) 별장. 중국의 錢其琛(전기침) 외교부장은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金日成 앞에서 江澤民(강택민)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조선반도와 국제 형세의 변화에 근거해 중국과 한국이 수교할 시기가 이미 성숙했다. 지금 특별히 錢其琛 동지를 파견해서 당신에게 우리의 고려와 결정을 전달하는 바 이해와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집행하면서 여러 면으로 한국과의 거래가 갈수록 많아지는 상황에서 쌍방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이미 피할 수 없게 됐다. 중국은 예나 다름없이 中·北 친선관계에 힘을 들이고 조선의 사회주의 건설과 자주 평화통일을 지지한다』
통보가 끝난 뒤 회담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血盟(혈맹) 중국의 냉정한 외교적 선택에 金日成을 포함한 북측 참석자들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회담장은 정적에 빠졌다. 모든 사람들이 金日成의 발언을 기다렸다.
金日成이 입을 열었다.
『중국과 남조선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 중국에서 이미 결정했으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라. 우리는 계속 사회주의 건설을 진행할 것이고 무슨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 스스로 극복할 것이다』
錢其琛 외교부장은 그날 평양 순안공항을 떠나 오후 5시 北京에 도착했다.
錢외교부장에게 『즉시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중앙 영도동지들에게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中南海 회의실에서는 江澤民 총서기, 李鵬(이붕) 총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초대 駐韓 중국대사를 지낸 張庭延 대사가 지난 10월 「延靜(연정)」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에세이 中에서)
韓·中수교 행사는 중국의 당초 계획에 따라 1992년 8월24일 北京에서 이뤄졌다.
盧泰愚 정부는 어떻게 敵性(적성)국가인 중국 최고 지도부에 접근해서, 혈맹인 북한과의 결별을 무릅쓰고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나서도록 설득할 수 있었을까? 누가 그런 외교적 주도권을 행사했을까?
盧泰愚와 강택민 『趙利濟, 宋健이 밀사였다』
중국 최고 지도부가 金日成의 별장에서 金日成에게 결별을 공식 선언하기 1년 6개월 전 盧泰愚 대통령은 江澤民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게 親書를 보내 「국교 정상화 교섭을 개시하자」고 요청했다.
盧泰愚 前 대통령은 지난 9월20일 열린 14차 동북아 경제포럼에서 鄭元植(정원식) 前 총리가 代讀(대독)한 연설에서 두 밀사의 존재를 확인했다.
『1990년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 나는 趙利濟(조이제) 박사에게 두 나라 고위 당국자 사이의 대화채널을 열어 줄 것을 요청했다. 중국의 副주석을 지낸 宋健(송건) 박사와 趙利濟 박사 두 분이 수행했던 역사적인 역할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최근 발간된 江澤民 前 주석의 공식 傳記(전기)는 趙利濟 박사와 宋健 박사의 역할을 좀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를 맺고 한달 후인 1992년 8월, 江澤民은 내방한 한국의 盧泰愚 대통령을 위해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었다.
4週 이후 북한의 金日成이 北京을 방문했을 때 그가 요구한 원조는 거절당했다. 2대의 잠수함, 5대의 탄도 구축함, 18대의 J-8 비행기 대신 아주 제한된 경제적·기술적 원조에 대한 미약한 약속만을 얻어 내는 데 그쳤다.
과학 교육을 받은 江澤民 자신은 副총리급 국무위원으로서 탁월한 과학자이며 수학자인 宋健 박사를 존경했다. 그는 중국 우주항공계획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江澤民은 총서기로 당선된 지 얼마 안 되어 宋健 박사에게 『당신 생각에 제가 읽어야 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 집무실로 보내 주십시오』라고 했다.
宋健 박사가 江澤民의 집무실 책상에 올려놓은 것은 과학 기술에 관련된 자료들이었지만, 예외적인 것도 있었다.
1990년 겨울, 宋健 박사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趙利濟 박사는 宋박사를 방문했다. 趙利濟 박사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 사회학자이며, 당시 하와이 대학에 위치한 저명한 연구소 동서센터의 총장직을 맡고 있었다.
盧泰愚 대통령은 趙박사에게 중국과 정치·경제적 관계를 이룩하고 싶다는 한국 쪽의 의도를 알리고, 이를 위해 중국 고위 지도자층과의 내밀한 통로를 모색하고 싶다는 한국 측의 뜻을 표하도록 요청했다. 盧대통령의 제안은 趙利濟 박사를 거쳐 바로 宋健 박사에게 전해졌고, 宋健 박사는 늘상 그랬듯이 이를 江澤民에게 전달했다>
人口문제로 처음 만나
韓·中 수교과정의 막후 채널이었던 宋健 박사와 趙利濟 박사를 지난 11월3일 오전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모스크바 기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宋박사는 우주항공 기술, 제어 이론, 시스템 공학 전문가이다. 중국의 미사일 개발, 有人 우주선 프로젝트를 지휘했으며 과학담당 副수상을 지낸 중국과학기술계의 代父이다.
그는 1980년대 초반 하와이에서 세계적인 인구학자인 趙利濟 박사와 처음 만났다. 과학자들의 실용주의는 이념으로 날카롭게 맞선 한국과 중국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동력이 됐다.
趙利濟 박사와 宋박사는 중국어와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宋박사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宋박사는 인터뷰 전날인 11월2일 서울 연희동의 盧泰愚 前 대통령을 예방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제는 털어놓을 수 있게 됐다』며 웃음을 지었다.
―韓·中 수교과정에서 두 분이 중요한 역할을 맡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분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이 어떻게 시작했는지부터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趙利濟 『人口(인구) 문제 때문이었죠. 개혁·개방을 시작한 鄧小平 정부는 중국의 인구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 엥겔스 경제학에 익숙한 중국의 사회과학자들은 인구를 억제할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宋박사는 중국의 NASA(中國航天工業部·중국항천공업부)를 이끌어 왔습니다. 鄧小平 정부가 「당신은 미사일을 개발할 때 탄도가 어떻게 날아가는지 제어하지 않느냐. 인구문제를 제어할 로드맵을 마련하라」며 宋박사를 인구문제에 끌어들였다고 합니다.
제가 인구문제 전문가였기 때문에 宋박사를 만나게 된 거죠. 1981년부터 우리는 알고 지냈습니다. 宋박사가 1982년 하와이 호놀룰루의 동서센터에 6개월간 오기로 했는데, 과학기술 담당 부서의 차관으로 진급하는 바람에 그 해에는 오지 못했습니다』
全斗煥 시절 韓·中 인사 교류
―한국에 대해 宋박사는 당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던가요.
『宋박사는 산동성 榮城(영성) 출신입니다. 장보고의 적화원이 있던 곳으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宋박사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한국과 어떤 분야에서건 평화적인 교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을 위해 그리고 산동성을 위해… 인구 문제 외에 중국의 수자원 확보, 電力공급 등의 문제에 대해 함께 일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1980년대에 「중국과 한국의 人材들이 서로 교류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고,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全斗煥 정권 시절에 초대 駐韓 중국대사를 지낸 張庭延(장정연)씨가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당시 그는 중국 외교부 아주국의 副국장이었는데 北京대학 한국어 교수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그 당시 중국 국가 부주석 榮毅仁(영의인)의 아들 榮智健(영지건·현재 CITIC·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 회장), 李瑞環(이서환) 정협 의장의 비서실장 方放(방방)씨 등의 한국 방문을 주선했습니다.
1984년 10월 全斗煥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許三守(허삼수)씨가 全대통령의 밀명을 받고(저와 宋健씨의 주선으로)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宋健 박사는 許三守의 방문을 위해 趙紫陽(조자양) 총리의 재가를 맡았습니다. 우리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같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산아제한 주장하다 공격당한 北京大 총장
―宋박사님은 趙利濟 박사의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당시 중국에 인구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趙利濟 박사가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이고, 인구문제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趙박사는 하와이의 동서센터를 이끌면서 1980년대에 동북아시아의 지식 교류를 선도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중국의 과학자·언론인이 동서센터에서 공부했습니다』
―우주공학자가 중국의 인구문제 해결에 나섰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저는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하고 1960년에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첸 쉬에센(錢學森) 박사가 1955년 파사디나의 칼텍(캘리포니아 工大)에서 돌아와 우주항공 로켓 분야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저는 중국의 로켓 추진체 개발에 참여했습니다. 로켓의 궤도를 추적하고, 그 궤도를 어떻게 제어하느냐가 저의 전문분야입니다.
그런데 먹고 살기 힘들었던 1970년대에 중국의 출산율이 가임 여성 1인당 6명이었습니다. 인구가 이렇게 배가해 가면 먹여살릴 수 없다는 게 명백했습니다. 당시 北京대학의 총장 馬寅初(마인초) 교수가 인구폭발을 억제할 수 있는 모델을 산출했습니다. 산아제한을 주장한 그는 공산당의 공격대상이 돼 버렸습니다(웃음).
저는 그의 논문을 연구했지만 아무것도 잘못된 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관측과 논리는 사회과학에 바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인구수를 조절하는 수학적 접근과 분석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1978년 헬싱키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인구정책에 관한 서구 사회과학자들의 견해를 접한 저는 한 방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저게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들의 책은 趙利濟 박사의 이론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후 趙利濟 박사가 어디에 있는지 찾았고, 하와이의 동서센터에 그가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趙利濟는 美 CIA 스파이다」는 풍문
―趙利濟 박사가 한국 사람이라는 게 접촉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물론 「趙利濟 박사가 美 CIA의 에이전트」라는 얘기가 돌아다녔죠. 하지만 그의 연구 업적과 인생을 알기에 「趙박사는 과학자이고 절대 CIA 에이전트가 아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 중국은 꽉 닫혀 있는 나라로 국제적으로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친구가 둘 있었는데 소련과 알바니아였습니다. 소련은 국경 분쟁으로 중국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다른 하나는 알바니아였습니다. 알바니아는 너무 작은 나라죠. 1960년대 1970년대에 알바니아는 「중공의 꼬마동생」이라고 불렀습니다(웃음)』
―韓·中수교 당시 외교부장이었던 錢其琛과 宋박사가 절친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錢其琛은 저와 친한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같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2년간 공부를 하고 외교관 생활을 모스크바의 중국 대사관에서 했습니다. 내가 副수상으로 일할 때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錢외교부장, 『공식관계 여는 길 찾자』
―錢其琛 외교부장에게 한국과의 국교정상화 아이디어를 얘기했습니까.
『얘기했더니 대단히 긍정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국가 간에 공식관계를 여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남한이나 중국이나 다시 전쟁으로 가기 원하지 않는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어요. 이런 아이디어들이 趙利濟 박사에게서도 나왔습니다. 물론 이건 인구문제를 넘어선 얘기였습니다(웃음).
1980년대에 趙박사가 주도하는 두만강개발계획을 통해 중국이 동북아 지역국가들과 긴밀하게 협의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갖게 됐습니까.
『鄧小平은 「중국이 전진하기 위해 우호적인 국제 경제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한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얘기를 외교부 쪽에 했죠. 「왜 우리가 한국과 비공식적 관계를 유지하면 안 되는가? 한국과의 비공식적 人材교류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1980년대에 한국은 중국인의 눈에 기적이었습니다. 한국은 후진 농업국가에서 수십 년 내에 산업화를 이뤄 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갈 수 있을까, 쫓아갈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한국은 敵이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중국 군인들이 50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미국의 전상자가 10만 명 정도일 겁니다』
趙利濟 『저는 1981년 3월 중국 사회과학원장 馬洪(마홍) 박사를 초청하기 위해 중국에 갔습니다. 馬洪 박사는 등소평과 조자양의 오른팔이었던 朱鎔基 前 총리를 부하로 거느리고 중국 경제의 개방과 개혁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제가 中共에 공식적으로 들어간 첫 한국인이었습니다. 중국을 떠날 때 광주역을 통하는데 省정부 관리와 출국 관리담당 인민해방군이 「당신은 敵國(적국) 사람인데 어떻게 중국에 들어왔느냐」고 해요. 30분 동안 기다리게 하면서, 10여 군데 전화를 걸더군요』
趙利濟, 중국 고관들에게 朴正熙 경제 강의
―중국과 한국 간에 비공식 人材교류가 활발히 이뤄졌다고 했는데 趙박사께서는 중국에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1980년대 동서문화센터는 중국의 인구를 비롯한 경제발전·에너지·자원 등에 관한 연구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중국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부총리급)이었던 宋박사는 제가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중국 지도자들을 상대로 朴正熙의 경제개발 노력을 얘기한 건가요.
『당과 정부의 고관들에게 강의를 했죠. 맨 처음엔 北京에서 강연을 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하게 됐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朴正熙 이야기는 터부였습니다. 중국 지도자들이 「朴正熙는 독재자다, 미국과 한통속이다」라는 정도로 생각을 했습니다. 宋박사가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중국이 朴正熙의 장점을 배울 수 있게 길을 연 거죠. 그게 宋박사가 한 또 다른 공헌입니다.
1984년 10월 許三守씨와 함께 중국 여러 지역 특히 북한 접경지인 연변을 여행할 때 저는 제 친구인 宋박사가 곤경에 처할까 봐 걱정이었죠. 宋박사가 「상부에서 허가를 받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중국을 방문했던 許三守씨가 귀국해서 全斗煥 대통령에게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宋健 『중국의 지도자들이 서서히 趙利濟 박사에 대해 알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사회과학자들이 趙박사와 공동 연구사업을 하길 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진실성과 헌신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趙利濟 박사는 북한을 포함한 韓·中·日 3國에서 저명했습니다』
―그 무렵에 중국 민항기 춘천 불시착 사건이 난 거죠.
趙利濟 『그렇죠. 그리고 비슷한 무렵에 서해에서 船上반란으로 납치된 중국 어뢰정이 한국 측에 나포됐죠. 全斗煥 민항기와 어뢰정을 대만으로 안 보내고 중국으로 돌려보내,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낸 거죠. 許三守씨의 보고를 토대로 그런 조치가 나온 걸로 압니다. 宋박사가 당초 생각했던 대로 人的 교류가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북한의 신경질적 반응
宋健 『1988년 올림픽 때는 제 아내까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국이 어떻게 저런 성공적인 올림픽을 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었고, 의문은 전폭적인 관심이 됐습니다. 사회과학자들과 정치인들이 대거 한국을 방문했고, 한국의 성공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88서울올림픽이 국교 정상화의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 정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金日成은 중국의 움직임에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교섭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때 趙利濟 박사가 비밀리에 친서를 가지고 北京에 왔죠』
―盧泰愚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기 전에 중국 외교부 쪽에 정지작업을 해 놓으셨습니까.
趙利濟 『宋박사, 馬洪씨를 통해 미리미리 좀 했죠. 중국 외교부에서는 편지가 올 거라는 걸 조금 짐작을 했을 거예요』
―宋박사는 盧泰愚 대통령의 친서를 중국 외교부를 통하지 않고, 직접 江澤民 총비서에게 전달한 겁니까.
宋健 『1989년에 내 사무실이 中南海로 옮겨졌어요. 北京 한복판이 아니고. 당시 李鵬 총리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제 사무실이 江澤民의 사무실에서 가까웠습니다. 최고 비밀문서들을 다루곤 했습니다. 아무도 거치지 않고 바로 江澤民의 사무실로 보내곤 했습니다.
키신저가 1971년 파키스탄에서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밀을 유지했습니다. 키신저가 중국에 간다는 사실을 당시 부토 파키스탄 대통령만 알았습니다. 만약 趙박사가 盧泰愚 대통령의 편지를 가지고 온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趙박사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북한이 한국과 중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니까요』
江澤民의 역사적 결단
韓·中수교를 막기 위한 북한의 對中압박은 필사적이었다.
북한은 『중국과 한국의 수교는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으며, 받아들일 수 없다. 중국은 양국의 생명과 피로 이루어 낸 군사적 우호를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宋健·趙利濟 두 사람에 따르면 『北京에 포진한 북한 요원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宋박사는 盧泰愚 대통령의 편지를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그때 편지를 열지도 않았고, 복사할 생각을 못 했습니다. 복사할 걸 그랬나요(웃음). 그 편지는 외교부에 보관되고 있지만,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국가 기밀이었습니다. 북한 쪽 첩보원들이나 (江澤民의) 반대파들에게 노출됐다면 우리가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당시 江총서기는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권력 장악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편지를 어떻게 전달했습니까.
『아무도 없을 때 江澤民의 사무실 책상 위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 편지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니까요. 그 편지가 알려졌다면 나는 스파이로 몰려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다행히 저는 중국內에서 과학자 그룹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오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趙利濟 『鄧小平의 딸 鄧楠(등남)에게 (盧泰愚 대통령의) 편지를 전했다는 뜻을 비쳤더니, 등란이 그러더군요. 「나는 알고 싶지 않다」고(웃음). 그녀는 위험을 알고 있어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江澤民 총서기가 盧泰愚 대통령의 친서를 읽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江澤民 총서기가) 2~3일 후 나를 개인적으로 불러 조용히 「감사합니다. 당신이 취한 이니셔티브에 감사합니다. 외교부에 (한국과의) 교섭을 개시하라는 메모를 내려보냈다」고 하더군요』
―그 편지가 江澤民에게도 위험한 것이었군요.
『당시만 해도 북한의 외교관들이 중국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고, 막강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으니까요』
―중국 외교부가 교섭에 착수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짐작은 했죠. 現 駐韓 중국대사인 寧賦魁(영부괴)는 全 교섭과정에 참여했습니다. 寧대사가 이번에 趙利濟 박사를 처음 만났는데 「아, 그 趙利濟 박사시군요.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웃음). 그는 趙利濟 박사가 韓·中수교 과정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기록한 비밀파일을 본 게 분명합니다』
―최근에 김치 문제로 외교마찰이 빚어지고 있는데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김치 문제는 鷄毛蒜皮(계모산피), 즉 마늘껍질과 닭털과 같은 사소한 문제이고, 외교관들은 큰 원칙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趙利濟 『고구려史 문제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어느 한 나라의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주변국들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宋박사가 어제 盧泰愚 대통령을 만나 한 얘기가 흥미 있었습니다. 한국은 중국이 할 수 없는 것들, 즉 조선산업·반도체를 하고, 중국은 한국이 할 수 없는 우주항공산업을 분화해서 서로 보조적인 관계를 할 수 있다는 거죠』
『달에 사람 보내는 게 목표』
―중국은 우주인을 달에 보낼 계획입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기는 합니다. 한 15~20년 후쯤? 아직 계획이 잡혀 있지 않습니다』
―연초에 중국 사회과학원이 중국의 장기 개발계획을 발표했는데 「지금 중국의 수준은 미국의 19세기 정도다. 일류국가가 되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다」고 했습니다. 겸손한 전망입니까, 사실에 가까운 겁니까.
『중국이 단기간 안에 일류국가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너무나 인구가 많고, 과학기술의 한계가 있습니다. 15년 후라야 우리의 국민소득이 지금의 3배 정도인 3600달러 정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느리지만 안정적인 성장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 정도면 좋은 거죠(웃음)』
―중국의 물 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합니까.
『엄청난 물 부족에 직면할 겁니다. 양자강의 물을 북쪽 北京으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황사로 인한 대기오염이 심각한데.
『이게 물보다 더 큰 문제일지 모릅니다.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5~10년내에 사막화를 막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겁니다』
―지난번에 발사된 有人 우주선에는 한 명이 탄 건가요.
『두 명입니다. 세 명이 탈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1~2년 후 다시 발사할 때는 우주선 밖으로 나와 우주 유영을 하고, 과학 실험을 할 겁니다』
중국은 한반도 非核化의 강력한 지지자
―북한의 核능력이 어느 정도 위협적이라고 보십니까.
『중국은 한반도 非核化의 강력한 지지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게 중국의 정책이라고 북한에 대해 수없이 얘기했습니다』
―「중국이 북한 核무기 개발능력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북한은 중국과 직접적인 연결 없이 核개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누구도 (북한의 核개발 능력을) 모릅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제가 조용히 물었더니, 「아무도 모른다」고 해요.
중국은 북한의 核개발 능력에 대해 기술적으로 조사하지를 않았습니다. 북한은 우리 몰래 비밀리에 파키스탄과 核개발을 했습니다.
나는 1981년 차관일 때 파키스탄의 核개발 책임자 칸 박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중국의 장거리 미사일을 구입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칸 박사에게 「나 같은 사람은 논의할 권한이 없는 너무나 큰 이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중국은 「북한의 核보유를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 건가요.
『(북한의 核보유를) 어떤 경우든 장려하거나 지원하지 않는다는 게 원칙입니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核보유로 가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한다는 뜻이 포함되는 거죠. 중국은 「북한이 核을 보유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늘 주장합니다』●
『조선반도와 국제 형세의 변화에 근거해 중국과 한국이 수교할 시기가 이미 성숙했다. 지금 특별히 錢其琛 동지를 파견해서 당신에게 우리의 고려와 결정을 전달하는 바 이해와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집행하면서 여러 면으로 한국과의 거래가 갈수록 많아지는 상황에서 쌍방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이미 피할 수 없게 됐다. 중국은 예나 다름없이 中·北 친선관계에 힘을 들이고 조선의 사회주의 건설과 자주 평화통일을 지지한다』
통보가 끝난 뒤 회담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血盟(혈맹) 중국의 냉정한 외교적 선택에 金日成을 포함한 북측 참석자들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회담장은 정적에 빠졌다. 모든 사람들이 金日成의 발언을 기다렸다.
金日成이 입을 열었다.
『중국과 남조선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 중국에서 이미 결정했으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라. 우리는 계속 사회주의 건설을 진행할 것이고 무슨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 스스로 극복할 것이다』
錢其琛 외교부장은 그날 평양 순안공항을 떠나 오후 5시 北京에 도착했다.
錢외교부장에게 『즉시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중앙 영도동지들에게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中南海 회의실에서는 江澤民 총서기, 李鵬(이붕) 총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초대 駐韓 중국대사를 지낸 張庭延 대사가 지난 10월 「延靜(연정)」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에세이 中에서)
韓·中수교 행사는 중국의 당초 계획에 따라 1992년 8월24일 北京에서 이뤄졌다.
盧泰愚 정부는 어떻게 敵性(적성)국가인 중국 최고 지도부에 접근해서, 혈맹인 북한과의 결별을 무릅쓰고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나서도록 설득할 수 있었을까? 누가 그런 외교적 주도권을 행사했을까?
盧泰愚와 강택민 『趙利濟, 宋健이 밀사였다』![]() |
| 趙利濟 박사 |
盧泰愚 前 대통령은 지난 9월20일 열린 14차 동북아 경제포럼에서 鄭元植(정원식) 前 총리가 代讀(대독)한 연설에서 두 밀사의 존재를 확인했다.
『1990년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 나는 趙利濟(조이제) 박사에게 두 나라 고위 당국자 사이의 대화채널을 열어 줄 것을 요청했다. 중국의 副주석을 지낸 宋健(송건) 박사와 趙利濟 박사 두 분이 수행했던 역사적인 역할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최근 발간된 江澤民 前 주석의 공식 傳記(전기)는 趙利濟 박사와 宋健 박사의 역할을 좀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를 맺고 한달 후인 1992년 8월, 江澤民은 내방한 한국의 盧泰愚 대통령을 위해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었다.
4週 이후 북한의 金日成이 北京을 방문했을 때 그가 요구한 원조는 거절당했다. 2대의 잠수함, 5대의 탄도 구축함, 18대의 J-8 비행기 대신 아주 제한된 경제적·기술적 원조에 대한 미약한 약속만을 얻어 내는 데 그쳤다.
과학 교육을 받은 江澤民 자신은 副총리급 국무위원으로서 탁월한 과학자이며 수학자인 宋健 박사를 존경했다. 그는 중국 우주항공계획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江澤民은 총서기로 당선된 지 얼마 안 되어 宋健 박사에게 『당신 생각에 제가 읽어야 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 집무실로 보내 주십시오』라고 했다.
宋健 박사가 江澤民의 집무실 책상에 올려놓은 것은 과학 기술에 관련된 자료들이었지만, 예외적인 것도 있었다.
1990년 겨울, 宋健 박사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趙利濟 박사는 宋박사를 방문했다. 趙利濟 박사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 사회학자이며, 당시 하와이 대학에 위치한 저명한 연구소 동서센터의 총장직을 맡고 있었다.
盧泰愚 대통령은 趙박사에게 중국과 정치·경제적 관계를 이룩하고 싶다는 한국 쪽의 의도를 알리고, 이를 위해 중국 고위 지도자층과의 내밀한 통로를 모색하고 싶다는 한국 측의 뜻을 표하도록 요청했다. 盧대통령의 제안은 趙利濟 박사를 거쳐 바로 宋健 박사에게 전해졌고, 宋健 박사는 늘상 그랬듯이 이를 江澤民에게 전달했다>
人口문제로 처음 만나![]() |
| 宋健 박사 |
그는 1980년대 초반 하와이에서 세계적인 인구학자인 趙利濟 박사와 처음 만났다. 과학자들의 실용주의는 이념으로 날카롭게 맞선 한국과 중국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동력이 됐다.
趙利濟 박사와 宋박사는 중국어와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宋박사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宋박사는 인터뷰 전날인 11월2일 서울 연희동의 盧泰愚 前 대통령을 예방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제는 털어놓을 수 있게 됐다』며 웃음을 지었다.
―韓·中 수교과정에서 두 분이 중요한 역할을 맡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분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이 어떻게 시작했는지부터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趙利濟 『人口(인구) 문제 때문이었죠. 개혁·개방을 시작한 鄧小平 정부는 중국의 인구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 엥겔스 경제학에 익숙한 중국의 사회과학자들은 인구를 억제할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宋박사는 중국의 NASA(中國航天工業部·중국항천공업부)를 이끌어 왔습니다. 鄧小平 정부가 「당신은 미사일을 개발할 때 탄도가 어떻게 날아가는지 제어하지 않느냐. 인구문제를 제어할 로드맵을 마련하라」며 宋박사를 인구문제에 끌어들였다고 합니다.
제가 인구문제 전문가였기 때문에 宋박사를 만나게 된 거죠. 1981년부터 우리는 알고 지냈습니다. 宋박사가 1982년 하와이 호놀룰루의 동서센터에 6개월간 오기로 했는데, 과학기술 담당 부서의 차관으로 진급하는 바람에 그 해에는 오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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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3일 신라호텔에서 對談을 하고 있는 趙利濟 박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宋健 박사(맨 오른쪽). 이 자리에 月刊朝鮮 趙甲濟 편집위원, 金演光 편집장이 동석했다. |
全斗煥 시절 韓·中 인사 교류―한국에 대해 宋박사는 당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던가요.
『宋박사는 산동성 榮城(영성) 출신입니다. 장보고의 적화원이 있던 곳으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宋박사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한국과 어떤 분야에서건 평화적인 교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을 위해 그리고 산동성을 위해… 인구 문제 외에 중국의 수자원 확보, 電力공급 등의 문제에 대해 함께 일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1980년대에 「중국과 한국의 人材들이 서로 교류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고,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全斗煥 정권 시절에 초대 駐韓 중국대사를 지낸 張庭延(장정연)씨가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당시 그는 중국 외교부 아주국의 副국장이었는데 北京대학 한국어 교수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그 당시 중국 국가 부주석 榮毅仁(영의인)의 아들 榮智健(영지건·현재 CITIC·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 회장), 李瑞環(이서환) 정협 의장의 비서실장 方放(방방)씨 등의 한국 방문을 주선했습니다.
1984년 10월 全斗煥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許三守(허삼수)씨가 全대통령의 밀명을 받고(저와 宋健씨의 주선으로)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宋健 박사는 許三守의 방문을 위해 趙紫陽(조자양) 총리의 재가를 맡았습니다. 우리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같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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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2일 盧泰愚 前 대통령과 함께 저녁을 하면서 韓·中수교 과정에 대해 환담을 나누는 宋박사(왼쪽)와 趙박사. |
산아제한 주장하다 공격당한 北京大 총장―宋박사님은 趙利濟 박사의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당시 중국에 인구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趙利濟 박사가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이고, 인구문제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趙박사는 하와이의 동서센터를 이끌면서 1980년대에 동북아시아의 지식 교류를 선도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중국의 과학자·언론인이 동서센터에서 공부했습니다』
―우주공학자가 중국의 인구문제 해결에 나섰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저는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하고 1960년에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첸 쉬에센(錢學森) 박사가 1955년 파사디나의 칼텍(캘리포니아 工大)에서 돌아와 우주항공 로켓 분야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저는 중국의 로켓 추진체 개발에 참여했습니다. 로켓의 궤도를 추적하고, 그 궤도를 어떻게 제어하느냐가 저의 전문분야입니다.
그런데 먹고 살기 힘들었던 1970년대에 중국의 출산율이 가임 여성 1인당 6명이었습니다. 인구가 이렇게 배가해 가면 먹여살릴 수 없다는 게 명백했습니다. 당시 北京대학의 총장 馬寅初(마인초) 교수가 인구폭발을 억제할 수 있는 모델을 산출했습니다. 산아제한을 주장한 그는 공산당의 공격대상이 돼 버렸습니다(웃음).
저는 그의 논문을 연구했지만 아무것도 잘못된 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관측과 논리는 사회과학에 바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인구수를 조절하는 수학적 접근과 분석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1978년 헬싱키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인구정책에 관한 서구 사회과학자들의 견해를 접한 저는 한 방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저게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들의 책은 趙利濟 박사의 이론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후 趙利濟 박사가 어디에 있는지 찾았고, 하와이의 동서센터에 그가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趙利濟는 美 CIA 스파이다」는 풍문![]() |
| 1992년 8월 北京에서 만난 韓·中수교를 축하하며 파안대소하는 盧泰愚 대통령과 江澤民 총서기. |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물론 「趙利濟 박사가 美 CIA의 에이전트」라는 얘기가 돌아다녔죠. 하지만 그의 연구 업적과 인생을 알기에 「趙박사는 과학자이고 절대 CIA 에이전트가 아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 중국은 꽉 닫혀 있는 나라로 국제적으로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친구가 둘 있었는데 소련과 알바니아였습니다. 소련은 국경 분쟁으로 중국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다른 하나는 알바니아였습니다. 알바니아는 너무 작은 나라죠. 1960년대 1970년대에 알바니아는 「중공의 꼬마동생」이라고 불렀습니다(웃음)』
―韓·中수교 당시 외교부장이었던 錢其琛과 宋박사가 절친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錢其琛은 저와 친한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같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2년간 공부를 하고 외교관 생활을 모스크바의 중국 대사관에서 했습니다. 내가 副수상으로 일할 때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錢외교부장, 『공식관계 여는 길 찾자』![]() |
| 錢其琛 외교부장. |
『얘기했더니 대단히 긍정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국가 간에 공식관계를 여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남한이나 중국이나 다시 전쟁으로 가기 원하지 않는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어요. 이런 아이디어들이 趙利濟 박사에게서도 나왔습니다. 물론 이건 인구문제를 넘어선 얘기였습니다(웃음).
1980년대에 趙박사가 주도하는 두만강개발계획을 통해 중국이 동북아 지역국가들과 긴밀하게 협의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갖게 됐습니까.
『鄧小平은 「중국이 전진하기 위해 우호적인 국제 경제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한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얘기를 외교부 쪽에 했죠. 「왜 우리가 한국과 비공식적 관계를 유지하면 안 되는가? 한국과의 비공식적 人材교류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1980년대에 한국은 중국인의 눈에 기적이었습니다. 한국은 후진 농업국가에서 수십 년 내에 산업화를 이뤄 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갈 수 있을까, 쫓아갈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한국은 敵이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중국 군인들이 50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미국의 전상자가 10만 명 정도일 겁니다』
趙利濟 『저는 1981년 3월 중국 사회과학원장 馬洪(마홍) 박사를 초청하기 위해 중국에 갔습니다. 馬洪 박사는 등소평과 조자양의 오른팔이었던 朱鎔基 前 총리를 부하로 거느리고 중국 경제의 개방과 개혁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제가 中共에 공식적으로 들어간 첫 한국인이었습니다. 중국을 떠날 때 광주역을 통하는데 省정부 관리와 출국 관리담당 인민해방군이 「당신은 敵國(적국) 사람인데 어떻게 중국에 들어왔느냐」고 해요. 30분 동안 기다리게 하면서, 10여 군데 전화를 걸더군요』
趙利濟, 중국 고관들에게 朴正熙 경제 강의![]() |
| 1980년대 중반 중공과 하와이를 오가며 활발하게 교류하던 때의 趙利濟 박사와 宋健 박사. 두 사람은『20여 년이 지난 일이라 정확한 시기와 장소를 기억하기 어렵다』고 했다. |
『1980년대 동서문화센터는 중국의 인구를 비롯한 경제발전·에너지·자원 등에 관한 연구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중국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부총리급)이었던 宋박사는 제가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중국 지도자들을 상대로 朴正熙의 경제개발 노력을 얘기한 건가요.
『당과 정부의 고관들에게 강의를 했죠. 맨 처음엔 北京에서 강연을 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하게 됐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朴正熙 이야기는 터부였습니다. 중국 지도자들이 「朴正熙는 독재자다, 미국과 한통속이다」라는 정도로 생각을 했습니다. 宋박사가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중국이 朴正熙의 장점을 배울 수 있게 길을 연 거죠. 그게 宋박사가 한 또 다른 공헌입니다.
1984년 10월 許三守씨와 함께 중국 여러 지역 특히 북한 접경지인 연변을 여행할 때 저는 제 친구인 宋박사가 곤경에 처할까 봐 걱정이었죠. 宋박사가 「상부에서 허가를 받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중국을 방문했던 許三守씨가 귀국해서 全斗煥 대통령에게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宋健 『중국의 지도자들이 서서히 趙利濟 박사에 대해 알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사회과학자들이 趙박사와 공동 연구사업을 하길 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진실성과 헌신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趙利濟 박사는 북한을 포함한 韓·中·日 3國에서 저명했습니다』
―그 무렵에 중국 민항기 춘천 불시착 사건이 난 거죠.
趙利濟 『그렇죠. 그리고 비슷한 무렵에 서해에서 船上반란으로 납치된 중국 어뢰정이 한국 측에 나포됐죠. 全斗煥 민항기와 어뢰정을 대만으로 안 보내고 중국으로 돌려보내,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낸 거죠. 許三守씨의 보고를 토대로 그런 조치가 나온 걸로 압니다. 宋박사가 당초 생각했던 대로 人的 교류가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북한의 신경질적 반응宋健 『1988년 올림픽 때는 제 아내까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국이 어떻게 저런 성공적인 올림픽을 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었고, 의문은 전폭적인 관심이 됐습니다. 사회과학자들과 정치인들이 대거 한국을 방문했고, 한국의 성공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88서울올림픽이 국교 정상화의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 정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金日成은 중국의 움직임에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교섭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때 趙利濟 박사가 비밀리에 친서를 가지고 北京에 왔죠』
―盧泰愚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기 전에 중국 외교부 쪽에 정지작업을 해 놓으셨습니까.
趙利濟 『宋박사, 馬洪씨를 통해 미리미리 좀 했죠. 중국 외교부에서는 편지가 올 거라는 걸 조금 짐작을 했을 거예요』
―宋박사는 盧泰愚 대통령의 친서를 중국 외교부를 통하지 않고, 직접 江澤民 총비서에게 전달한 겁니까.
宋健 『1989년에 내 사무실이 中南海로 옮겨졌어요. 北京 한복판이 아니고. 당시 李鵬 총리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제 사무실이 江澤民의 사무실에서 가까웠습니다. 최고 비밀문서들을 다루곤 했습니다. 아무도 거치지 않고 바로 江澤民의 사무실로 보내곤 했습니다.
키신저가 1971년 파키스탄에서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밀을 유지했습니다. 키신저가 중국에 간다는 사실을 당시 부토 파키스탄 대통령만 알았습니다. 만약 趙박사가 盧泰愚 대통령의 편지를 가지고 온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趙박사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북한이 한국과 중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니까요』
江澤民의 역사적 결단![]() |
| 金正日이 2001년 9월5일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2박3일의 북한 방문을 끝내고 돌아가는 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을 포옹하며 배웅하고 있다. |
북한은 『중국과 한국의 수교는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으며, 받아들일 수 없다. 중국은 양국의 생명과 피로 이루어 낸 군사적 우호를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宋健·趙利濟 두 사람에 따르면 『北京에 포진한 북한 요원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宋박사는 盧泰愚 대통령의 편지를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그때 편지를 열지도 않았고, 복사할 생각을 못 했습니다. 복사할 걸 그랬나요(웃음). 그 편지는 외교부에 보관되고 있지만,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국가 기밀이었습니다. 북한 쪽 첩보원들이나 (江澤民의) 반대파들에게 노출됐다면 우리가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당시 江총서기는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권력 장악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편지를 어떻게 전달했습니까.
『아무도 없을 때 江澤民의 사무실 책상 위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 편지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니까요. 그 편지가 알려졌다면 나는 스파이로 몰려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다행히 저는 중국內에서 과학자 그룹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오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趙利濟 『鄧小平의 딸 鄧楠(등남)에게 (盧泰愚 대통령의) 편지를 전했다는 뜻을 비쳤더니, 등란이 그러더군요. 「나는 알고 싶지 않다」고(웃음). 그녀는 위험을 알고 있어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江澤民 총서기가 盧泰愚 대통령의 친서를 읽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江澤民 총서기가) 2~3일 후 나를 개인적으로 불러 조용히 「감사합니다. 당신이 취한 이니셔티브에 감사합니다. 외교부에 (한국과의) 교섭을 개시하라는 메모를 내려보냈다」고 하더군요』
―그 편지가 江澤民에게도 위험한 것이었군요.
『당시만 해도 북한의 외교관들이 중국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고, 막강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으니까요』
―중국 외교부가 교섭에 착수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짐작은 했죠. 現 駐韓 중국대사인 寧賦魁(영부괴)는 全 교섭과정에 참여했습니다. 寧대사가 이번에 趙利濟 박사를 처음 만났는데 「아, 그 趙利濟 박사시군요.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웃음). 그는 趙利濟 박사가 韓·中수교 과정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기록한 비밀파일을 본 게 분명합니다』
―최근에 김치 문제로 외교마찰이 빚어지고 있는데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김치 문제는 鷄毛蒜皮(계모산피), 즉 마늘껍질과 닭털과 같은 사소한 문제이고, 외교관들은 큰 원칙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趙利濟 『고구려史 문제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어느 한 나라의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주변국들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宋박사가 어제 盧泰愚 대통령을 만나 한 얘기가 흥미 있었습니다. 한국은 중국이 할 수 없는 것들, 즉 조선산업·반도체를 하고, 중국은 한국이 할 수 없는 우주항공산업을 분화해서 서로 보조적인 관계를 할 수 있다는 거죠』
『달에 사람 보내는 게 목표』―중국은 우주인을 달에 보낼 계획입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기는 합니다. 한 15~20년 후쯤? 아직 계획이 잡혀 있지 않습니다』
―연초에 중국 사회과학원이 중국의 장기 개발계획을 발표했는데 「지금 중국의 수준은 미국의 19세기 정도다. 일류국가가 되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다」고 했습니다. 겸손한 전망입니까, 사실에 가까운 겁니까.
『중국이 단기간 안에 일류국가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너무나 인구가 많고, 과학기술의 한계가 있습니다. 15년 후라야 우리의 국민소득이 지금의 3배 정도인 3600달러 정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느리지만 안정적인 성장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 정도면 좋은 거죠(웃음)』
―중국의 물 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합니까.
『엄청난 물 부족에 직면할 겁니다. 양자강의 물을 북쪽 北京으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황사로 인한 대기오염이 심각한데.
『이게 물보다 더 큰 문제일지 모릅니다.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5~10년내에 사막화를 막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겁니다』
―지난번에 발사된 有人 우주선에는 한 명이 탄 건가요.
『두 명입니다. 세 명이 탈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1~2년 후 다시 발사할 때는 우주선 밖으로 나와 우주 유영을 하고, 과학 실험을 할 겁니다』
중국은 한반도 非核化의 강력한 지지자―북한의 核능력이 어느 정도 위협적이라고 보십니까.
『중국은 한반도 非核化의 강력한 지지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게 중국의 정책이라고 북한에 대해 수없이 얘기했습니다』
―「중국이 북한 核무기 개발능력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북한은 중국과 직접적인 연결 없이 核개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누구도 (북한의 核개발 능력을) 모릅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제가 조용히 물었더니, 「아무도 모른다」고 해요.
중국은 북한의 核개발 능력에 대해 기술적으로 조사하지를 않았습니다. 북한은 우리 몰래 비밀리에 파키스탄과 核개발을 했습니다.
나는 1981년 차관일 때 파키스탄의 核개발 책임자 칸 박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중국의 장거리 미사일을 구입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칸 박사에게 「나 같은 사람은 논의할 권한이 없는 너무나 큰 이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중국은 「북한의 核보유를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 건가요.
『(북한의 核보유를) 어떤 경우든 장려하거나 지원하지 않는다는 게 원칙입니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核보유로 가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한다는 뜻이 포함되는 거죠. 중국은 「북한이 核을 보유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늘 주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