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장 판매…“전등 없는 곳은 있어도, 백년설 레코드 없는 곳은 없다"

김장실의 트로트 이야기(11)나그네 설움(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 1940년)
1937년 일제는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중일(中日)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 소요되는 물자의 수송을 위해 일제는 혜산진 철도를 그해 서둘러 개통하였다. 조경환이 이끄는 태평악극가무단은 이 철도의 개통을 축하하는 공연의 허가를 1939년 봄에 받았다. 그해 3월에 서울에서 출발한 이 악극단은 5월 함흥에 도착하였다. 이 악극단에 참여한 백년설의 인기로 가는 곳마다 공연이 연장되었다. 그래서 혜산진 공연은 순연(順延)되었다.

그런데 혜산진 철도 개통 무렵 동북항일연군이 갑산군 혜산진에 있는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국에 경계령을 내린 일제(日帝)는 의심이 가는 사람을 무차별하게 잡아들여 닦달을 하였다. 이에 따라 1939년 가을 작사가 조경환(예명 고려성, 작곡가 나화랑의 형)과 가수 백년설은 종로경찰서에 불려가서 왜 5월에 허가해준 공연을 정해진 날짜에 하지 않았는지 취조당했다. 특히, 그들은 보천보 습격사건과 이 공연의 연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의심하고 단서를 찾기 위해 혈안이었다. 경찰이 아무런 연관관계를 찾지 못하자 그들은 풀려나왔다.

고향이 경북 성주인 백년설은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인 경북 금릉 출신 조경환의 도움으로 가수가 될 정도로 가까운 사이었다. 일제 고등계 형사에게 심문당한 뒤의 찜찜한 기분을 날리기 위해 그들은 광화문의 어느 주점에서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형님, 당분간 쉬십시오. 저도 도쿄에 나가 연극 공부나 할까 합니다. 언제부터 이 경성이 이국(異國)보다 더 차가워졌지”라고 백년설이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듣는 순간 술을 먹으며 울분을 삭이던 작사가 조경환은 담뱃갑에 즉흥적으로 가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 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가랴 흘러갈소냐

이렇게 쓴 1절 가사를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그는 가사를 부드럽게 순화하여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 현재의 가사로 바꾸었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일제의 대륙침략에 도움이 된다며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였다. 그러나 고향을 잃은 나그네의 설움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는 이 노래는 사실은 나라 잃은 백성이 바로 나그네이며,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한(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수작(秀作)이다. 이 때는 식민통치 30년째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희망 없는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 지도자들의 쓰라린 삶을 연상시키기는 노래이기도 하다.

1940년 2월에 발매된 <나그네 설움>은 그 당시로는 드물게 10만 장의 음반이 팔릴 정도로 엄청나게 히트하였다. 예를 들어 1936년 조선 전역에서 1년간 판매된 레코드가 100만 매이며, 그 중에서 조선어로 된 음반은 30만 매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그럴 때 백년설의 노래 한 곡이 10만 매의 음반을 팔았으니 그 인기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40년 10월에 발매된 <번지 없는 주막>, <산 팔자 물 팔자>는 물론 1941년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도 히트하여 그의 인기와 몸값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래서 “전등 없는 곳은 있어도, 포터블 축음기가 있으면서 백년설 레코드가 없는 곳은 없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41년에 그는 입사 축하금 3000엔, 전속 계약금 2000엔, 월급 350엔의 최고수준의 대우를 받고 오케레코드사로 이적했다. 이 시절 보통 가수의 급료가 80엔, 대우가 좋다는 부립(府立) 병원장 월급이 220엔 정도였으니, 백년설이 이적시 받은 금액은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었다.

본명이 이창민인 백년설은 성주농업학교와 한양부기학교에서 수학하며 문학과 연극에 몰두하였다. 그는 23세 때 테너 안기영의 소개로 콜롬비아레코드에 작사가로 입사하였다. 그러다 1939년 태평레코드에서 <유랑 극단>으로 데뷔하였다. 한 시절을 풍미하는 인기가수였던 그는 1958년 가수협회장을 역임하고, 1978년 <한강>을 부른 그의 부인 심연옥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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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설움>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땅 밟아서 돈 지 십년 너머 반평생
사나이 가슴 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거워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가랴 흘러갈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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