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자매지인 격월간지 ‘1843(注: 이코노미스트 창간 연도)’은 최근호에서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의 부인인 아스마 알아사드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기사 제목은 “은행원, 공주, 군사 지도자: 아스마 아사드의 여러 인생(Banker, princess, warlord: the many lives of Asma Assad)”이다. 부제는 “런던 서부 출신의 한 소녀가 어떻게 시리아 전쟁에서 예상 밖의 승자가 되었는가(How a girl from west London became the unlikely winner of Syria’s war)”이다.
1843은 이 기사에서 흥미로운 추측을 하나 내놓는다. 각종 제재로 손발이 묶인 바샤르 알아사드를 대신해 영부인인 아스마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자란 그녀는 여전히 영국 시민권을 유지하고 있고 영어도 완벽하다. 국제사회와 시리아가 모종의 합의를 맺고 서방세계에 우호적(?)으로 비칠 수 있는 아스마를 시리아 대통령 자리에 앉히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관측 역시 나오고 있다. 최근 들어 시리아와 관련된 언론 보도와 신간 도서가 자주 나오고 있는데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들은 ‘아랍의 봄’ 10주년을 맞아 단순히 준비된 특집 기사들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스마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해볼 수 있는 1843의 기사를 요약해 3부로 나눠 게재한다. 1부는 런던 출신의 모범생 여성이 시리아의 독재자와 결혼, 시리아에서 영부인으로 인정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
시리아의 퍼스트레이디 아스마 알아사드의 차분함 뒤에는 남을 기만하는 모습이 있다. 중동 지역의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폭압적인 정권에 항거한 아랍의 봄이 발생한 지 10년이 흘렀다. 이런 과정에서 시리아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가문은 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했는데 이에 따른 대가는 참혹했다.
시리아 정권은 수십만 명의 시리아인들을 죽이고 1만4000명 이상을 고문해 숨지게 만들었다. 인구의 절반은 집을 떠나 피난살이에 나섰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난민 사태로 이어지게 됐다. 이란과 터키, 미국과 러시아는 시리아 영토에서의 영향력을 위해 대리전을 치러왔다. 중동 지역의 경우 10년 전 희망에 찼던 꿈이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시리아보다 피를 많이 흘린 곳은 없었다.
아스마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갖게 됐다. 폐허가 된 국가에서 권력을 잡게 되는 과정은 험난했고 그는 여러 길을 밟아 그 자리에 오르게 됐다. JP모건 은행원으로서 밤 늦게까지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 사회 구조 개혁과 고립된 국가를 현대화하겠다는 매력이 넘치는 영부인, 국가가 불에 타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쇼핑을 계속한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남편의 군대가 반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암(癌)과의 사투를 벌인 국모(國母)로서 말이다.
이 여정은 어떻게 끝이 날까? 아사드 가문에서의 그의 지배력은 더 이상 시리아 전문가들 사이의 가십 수준이 아니다. 지난해 미국 정부는 아스마가 시리아에서 “전쟁으로 이득을 본 사람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라고 했다. 그녀가 그의 남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 아스마 아사드는 그가 자란 영국 런던의 연립주택으로부터 먼 길을 떠나온 것이 확실하다.
그녀가 독재자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아스마 아크라스(注: 결혼 전 가족 이름)는 1975년 런던 서부에 있는 액턴 지역에서 태어났다. 매우 부유한 동네에 위치한 곳이었다. 대다수의 시리아인처럼 그의 부모 역시 수니파 무슬림이었다. 수니파는 1960년대까지는 시리아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시아파의 소수 과격단체인 알라위트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바샤르 알아사드의 아버지인 하페즈 아사드가 이 음모에 가담했다. 하페즈 아사드는 1970년 자신을 지도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스마의 가족은 (영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에도 종교 생활을 계속했다. 아버지는 금요일마다 기도를 했고 어머니는 아스마가 결혼을 한 뒤에야 히잡을 벗었다. 아스마의 친구들은 그의 가족이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자식들이 서방 문화에 동화되기를 원했다고 했다. 아스마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엠마로 불렸다. 한 이웃은 “그녀가 시리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고 했다.
아스마는 런던에서 돈 많은 엘리트층의 삶을 살 운명이었다. 10대의 아스마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인 퀸스 컬리지를 다녔다. 이 학교는 아버지가 개인 병원을 운영하던 할리 스트리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아스마는 런던의 킹스 컬리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당시 그의 친구들은 아스마가 매우 총명하고 열심히 생활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어느 누구도 아스마가 중동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스마는 가족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가게 되면 쉐라톤 호텔의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족끼리 친한 관계를 맺었던 한 지인은 “아스마는 매우 영국인 같았고 시리아와 관련된 어떤 일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고 했다.
아스마가 투자 회사인 JP모건(런던 사무실)에 취직했을 때 놀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 이 회사의 직원들은 48시간을 연이어 일하기도 했고 잠도 사무실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수습사원들은 자신만만했고 야망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아스마의 사수(射手)였던 폴 깁스는 아스마는 조금 달랐다고 했다. 아스마는 단정한 검정색 정장을 입었으며 “얌전하고 공손했고 명령을 잘 따랐다”고 했다. 아스마는 인수합병 문제를 전문으로 했다(이는 그가 시리아로 돌아왔을 때 유용한 경험으로 작용했다). 아스마는 다른 은행원과 연애를 했고 청혼도 받았다고 한다. 아스마는 충분한 연봉을 받았지만 런던에서 일하는 동안은 부모와 함께 살았다.
아스마의 어머니인 사하르는 딸에 대한 야심찬 계획이 있었다. 사하르의 종조부(從祖父)는 하페즈 아사드가 권력을 잡는 것을 도운 인물이다. 사하르는 이런 인맥을 사용해 런던에 있는 시리아 대사관에 일자리를 구했다. 사하르는 아스마와 하페즈의 둘째 아들인 바샤르를 엮기 위해 노력했다. 아스마와 바샤르는 바샤르가 1990년대 런던에서 의대를 다닐 당시 여러 차례 만났다. 당시의 바샤르는 꺽다리에 마른 의대생이었다.
바샤르는 그의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자랐고 6남매 중 유일하게 유학을 했다. 바샤르는 피를 아주 싫어했는데 이 때문에 안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이는 의학계에서는 명망이 덜한 전공이었다. 바샤르의 지도 교사였던 에드먼드 슐렌버그는 바샤르가 낭종 제거에 재능이 있었다고 했다.
바샤르의 큰 형인 바시르는 시리아 군대에서 복무했다. 스포츠카를 타고 여자들을 쫓아다니곤 했다. 부유한 시리아 출신의 이민자인 와픽은 “바샤르는 반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시간 약속을 잘 지켰으며 매일 수업에 가는 등 방탕한 삶과는 거리를 뒀다”고 했다. 바샤르는 필 콜린스와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의 노래를 들었고 녹차를 마시며 동네를 자전거로 누볐다. 바샤르는 농부 출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다마스쿠스의 엘리트다운 세련된 말투를 가졌다.
바샤르 역시 여자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그의 형이 차버린 여자들과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그 자신만의 선택이 아니었다. 1994년 교통사고로 형 바시르가 숨지자 아사드 가문의 운명은 갑자기 바샤르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됐다(바시르는 벤츠를 타고 다마스쿠스 공항으로 질주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샤르는 그의 아버지가 2000년 숨질 때까지도 미혼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두 달 후 실시된 엉터리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아스마는 이 무렵 JP모건 사무실 책상에 2년 동안 묶여 있었다. 아스마는 어떤 보고도 없이 3주간 사라졌었다. 아스마는 돌아온 뒤 직장 상사에게 멋있는 시리아인을 만나 발이 묶여버렸다고 말했다. 이 남자가 아스마를 리비아로 급하게 데려가 사하라 사막의 한 텐트에서 계약을 맺었다고 했다. 아스마는 곧바로 사표를 냈고 하버드 경영대학원 입학도 포기했다. 그녀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런 결정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스마는 “누가 사랑보다 하버드를 선택하겠는가”라고 답했다.
쉐라톤 호텔 밖에 있는 시리아에서의 생활은 복잡한 일이다. 시리아의 산과 사막은 서로를 억압해온 여러 민족과 종교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프랑스는 오토만 제국으로부터 이 나라를 떼어내 세계전쟁 당시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통치 기간은 짧았지만 여러 분노를 낳았다. 시리아 독립 초기에는 쿠데타가 거듭 반복되는 등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혼란은 집권 바트당의 공군 장교 출신 하페즈 아사드의 등장으로 막을 내렸다. 그는 정보국을 통해 공포정치를 폈다. 정보원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전화를 도청하며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고문했다. 시리아 바트당이 추진하는 바트주의에 반대하는 수니파 이슬람 세력이 1982년 하마에서 봉기를 했다. 당시 하페즈는 이 도시의 전 지역을 완전히 파괴시켰다.
하페즈는 아스마가 2000년 말 다마스쿠스로 이주했을 때에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모든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소련식 건축물에서부터 그의 얼굴이 새겨진 광고판까지 많은 것들이 하페즈를 연상시키게 했다. 하페즈가 역내(域內) 테러 조직들을 지원함에 따라 시리아는 서방세계로부터 단절됐다. 바샤르의 부상(浮上)은 이런 관계를 재설정하는 기회였다.
바샤르는 취임사에서 부패와 싸우고 진정한 다당제 선거를 허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얼마 후 시리아에서 가장 큰 교도소를 폐쇄했다. 다마스쿠스의 커피숍에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정치 얘기를 할 수 있게 됐다.
아스마는 새로운 시리아 지도자를 위한 유망한 협력자처럼 보였다. 요르단의 라니아 여왕, 카타르의 셰이카 모자 왕비, 심지어는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일종의 비교 사례가 됐다. 매력이 넘치는 영부인이 개혁의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시리아의 세속주의적인 바트당은 다른 아랍 국가와는 달리 여성이 공식적인 역할을 맡는 데 우호적이었다. 시리아 출신의 부유한 이민자이자 바샤르와 아스마와 친구였던 와픽은 “이 둘의 조합이 시리아를 천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전의 많은 여성들처럼 아스마 역시 시댁 식구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바샤르의 어머니인 아니사는 그의 아들이 같은 종파(시아파)와 결혼해 사우디처럼 오랫동안 지속되는 왕족을 만들기를 바랐다. 일부 친척들은 바샤르가 수니파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대통령직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샤르의 어머니는 결혼식 자체를 막지는 못하자 이를 숨기기로 했다. 조용히 치러진 이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는 없었다. 공식 사진 역시 공개된 적이 없다. 아스마는 그의 임무는 자리를 물려받을 아이를 낳고 언론으로부터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바샤르의 어머니는 영부인이라는 호칭은 유지하자고 했다. 그러나 언론은 아스마를 대통령의 배우자라고 칭했다. 어느 누구도 아스마를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스마의 가정 생활은 비참했다. 당시 바샤르의 참모였던 아이만 압델 누르는 “이들은 그녀를 증오했다”고 했다. “이 사람들은 그녀를 몇 년간 집 안에 가둬 놨다”고 했다. 아스마는 당시만 해도 아랍어에 능숙하지 못했다. 가족끼리 모여 식사를 하는 날이면 이들은 아스마가 알아듣지 못하는 알라위테 사투리를 써가며 얘기를 했다.
다른 지배 엘리트 계층 역시 아스마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바샤르의 개혁은 여러 방해를 받았다. 특히 그의 아버지의 측근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아사드 정권과 일을 하고 있는 한 사업가는 “하페즈 아사드는 (국가의) 촉수를 통제하는 문어였다”고 했다. “바샤르는 촉수에 의해 조종되는 문어로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나자 바샤르의 개혁과 관련된 약속은 허황된 것임이 드러났다. 그의 대통령직 승계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목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와픽은 “바샤르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말한 뒤 이와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바샤르는 다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감옥에 갇혔다. 바샤르의 포스터가 곳곳에 붙었다. 이들은 아버지의 그림보다 훨씬 크게 제작됐다. 대중 집회의 권리는 크게 제한됐다. 예비 부부가 호텔에서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시리아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번번이 무산됐다. 9.11 테러 이후 바샤르는 미국인들에 테러 용의자들을 심문할 수 있는 시설을 제공했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것에 대한 맛을 본 상태였다. 미국은 시리아가 다음 타깃일 것이라는 신호를 줬다. 그러자 바샤르는 지하디스트들을 국경지역으로 보내 이라크 반군이 미국과 싸우는 것을 도왔다.
바샤르가 권력을 공고히 하는 동안 아스마는 자식을 낳는 역할에 충실했다. 그녀는 세 명의 아이를 잇달아 낳았고 이 중 두 명은 아들이었다. 아스마는 아직도 아이들을 얌전한 은행원처럼 옷을 입힌다. 그녀가 기사 헤드라인을 장식한 유일한 일은 그가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다. 그럴 때도 아스마의 시댁 식구들은 분노했다.
집안 내에서의 잔인함은 외부의 난폭성을 반영하게 됐다. 2005년 발렌타인 데이에 레바논의 가장 유명한 정치인 중 한 명인 라피크 하리리가 차량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시리아는 이 문제를 조용히 묻어뒀으나 많은 사람들은 바샤르가 이 공격을 지시했다고 추측했다. 국제제재와 대규모 레바논 시위의 위협에 직면한 바샤르는 한 발 물러섰다. 그는 레바논 점령 30년 만에 처음으로 시리아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는 시리아 강경파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바샤르에게 이때만큼 동맹이 필요했던 적은 없었다. 영국인 부인이 서방 국가들을 달래는 것을 도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바샤르는 아스마에게 시댁 식구들의 입을 막을 것이며 영부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했다(시리아 국영언론은 2016년 바샤르의 어머니인 아니사가 죽고 난 다음에야 영부인이라는 호칭을 썼다). 아스마는 마침내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게 됐다.
하리리가 암살된 지 두 달 후인 2005년 4월, 아스마는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장례식에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바샤르에게 악수를 청하러 오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하지만 검정색 레이스 베일을 쓴 아스마는 더 큰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사진들은 그녀가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아사드 부부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외국인 부인인 아스마는 항상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제 바샤르의 국제 관계 회복 노력에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바샤르의 전 참모인 압델 노르는 “그녀는 그(바샤르)가 함께 어울리고 섞일 수 없는 모든 나라에 대한 그의 대사(大使)였다”고 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