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에 닥친 ‘아랍의 봄’…‘사막의 장미’ 아스마는 쇼핑에 빠져 있었다

‘다마스쿠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아스마의 삶(2편)/“친구야, 인생은 공평하지 않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현실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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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마 알아사드(출처: 시리아 대통령실 페이스북)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격월간지 1843에 실린 기사를 요약, 시리아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의 부인 아스마에 대한 기사를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 순서는 런던 출신의 모범생 여성이 시리아의 독재자와 결혼, 시리아에서 영부인으로 인정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두 번째로는 시리아는 물론, 집안에서마저 무시받던 영부인이 어떻게 영향력을 쟁취해 ‘사막의 장미’,  ‘그림자로 가득한 나라의 빛을 밝히는 여성’과 같은 별명을 얻게되는 과정을 소개한다. 그러다 시리아에 닥친 ‘아랍의 봄’으로 긴박하게 바뀌는 시리아 정국과 아사드 가문의 상황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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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아스마 알아사드는 서방세계와의 인터뷰를 통해 바샤르의 좋은 점을 부각시키려고 했다(바샤르는 유대인들을 예수를 살해한 자들이라고 불렀는데 아스마는 이런 언어를 순화해 전세계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다). 아스마는 가정에서의 부부 이미지도 개선하려 노력했다. 일종의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이들은 사우디가 아사드를 위해 지어준 10억 달러 상당의 대리석으로 된 호화로운 궁전을 피하고 근처의 3층짜리 작은 집에서 생활했다. 아스마는 매일 집 근처 몬테소리 학교로 가 아이들을 직접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아사드 부부의 친구인 와픽은 이들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사치스러운 것이 없어서 놀랐다고 했다. 그는 “어떤 하인도 볼 수 없었고 아사드와 그의 부인이 저녁 식사를 직접 대접했다”고 했다.


아스마는 새로운 미용사의 도움을 받아 외모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구두 굽과 귀걸이는 몇 인치 정도씩 길어졌다. 손톱에는 매니큐어가 칠해졌다. 아스마나 바샤르 모두 결혼 반지를 끼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스마의 목에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보석이 걸려 있었다. 런던에 위치했던 시리아항공 지상사 직원들은 런던의 최고급 백화점의 옷들이 실린 상자가 끝없이 실려오던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시리아 외교관들은 아스마를 구두 수집에 중독됐던 필리핀의 퍼스트레이디 이멜다 마르코스에 비유했다.


매력적인 모습으로 남의 마음을 움직이겠다는 전략은 성공했다. 과거 아사드 부부의 유럽 방문 의전을 담당하다 현재는 망명한 전 외교관은 “당시 나는 황홀했다”고 했다. 그는 “아스마는 보는 순간부터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바샤르는 중동의 다른 독재자와는 다른다. 바샤르는 현대적이고 세련되어 보인다. 이것이 그가 무서운 이유다”라고 했다.


아스마의 다음 과제는 시리아였다. 아스마는 수십 년간 이어진 중앙집권 제도와 수입 제한의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시리아에 원기를 불어넣으려 했다. 아스마는 금융 전문 언어로 남편의 눈을 멀게 했고 금융계가 민간과 외국계 기업에 개방되도록 했다. 당시 상황을 가까이에서 접한 시리아의 경제학자는 “아스마는 다마스쿠스를 세금과 금융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역내(域內)의 두바이로 만들려고 했다”고 했다.


불행하게도 경제 개혁은 시리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위협했다. 시리아의 사업 구조를 바꾸기 위해 아스마는 바샤르의 사촌인 라미 마클로프와 맞서야 했다. 일부 추정치로는 마클로프가 운영하는 회사가 시리아 경제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스마는 2007년 자신의 지주회사를 설립해 마클로프의 패권에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시리아 산업계의 거물급들의 투자를 충분히 끌어낼 수 없었다. 이들은 여전히 마클로프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아스마의 시리아 경제 개혁 계획은 한동안 시간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스마는 얼마 후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그녀는 결혼 초창기부터 자선 사업을 만지작거렸다. 아스마는 여러 단체를 시리아 개발 신탁이라는 이름의 단체로 통합시키기로 했다. 그녀는 해외에 있는 영어가 능숙한 시리아인과 전직 유엔 당국자, 보스턴의 컨설팅 회사인 모니터 그룹의 전략가들, 심지어는 독일 외교관의 딸까지 영입해 이 신탁 재단을 시리아와 세계를 연결하는 창구로 만들기로 했다. 당시 다마스쿠스에서 활동하던 외교관은 “다른 단체는 외국인들과 교류를 할 수 없었지만 아스마의 신탁 재단만큼은 이것이 허용됐다”고 했다.


아스마는 시리아의 울퉁불퉁한 지형과 고고학적인 풍요로움이 훌륭한 관광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녀는 다마스쿠스 중심부를 재설계하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大英) 박물관의 큐레이터를 채용했다. 한 시멘트 공장은 런던의 ‘테이트 모던’을 모델로 한 갤러리로 탈바꿈될 계획이었다. 도시를 흐르는 더러운 강둑은 문화공원으로 바뀔 계획이었다. 다마스쿠스에서 개발이 되지 않은 북동부의 고대 아시리안 도시들을 연결하는 철도가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다마스쿠스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서방 외교관들은 아스마가 운영하는 신탁 재단에 협조적이었다. 아스마는 유럽연합과 유엔, 세계은행, 그리고 카타르를 매혹시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백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아스마가 사용하던 ‘문화 르네상스’를 축하하는 신문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바샤르는 “극단주의와 싸우는 방법은 이렇게 싸우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서다”라고 했다.


아스마의 동료들은 그의 여러 면모를 보게 됐다. 한 전직 직원은 “아스마는 기분이 좋은 날에는 엄청나게 호기심이 많고 놀라울 정도로 순응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컨설턴트는 아스마가 ‘공주 같은 성질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그는 8개월을 일한 뒤 사표를 냈다.) 이 컨설턴트는 “그녀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데 있어 광적(狂的)인 모습이 있었고 무서운 사람이었다”고 했다.


아스마의 추진력을 높이 산 사람들도 있었다. 다마스쿠스에서 6년간 아스마를 위해 일했던 한 사람은 “아스마가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어’라고 말한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 많았는데 매우 놀라웠다”고 했다. 아스마의 직원들은 아스마가 JP모건에서 익숙해진 강행군을 수행해야 했다. 사무실 업무는 오전 6시에 시작해 저녁까지 계속됐다. 당국자들은 주요 이슈에 대해 문화부장관이 아닌 아스마와 논의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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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마 알아사드를 ‘사막의 장미’로 묘사한 보그 잡지 기사

 

아스마는 영국과 미국의 홍보 회사들을 고용해 그녀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세계의 정치인 및 유명인을 초청해 아스마가 하고 있는 선행을 홍보했다.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 스팅과 데이먼 앨번 등 유명 인사들이 다마스쿠스를 찾았다. 종교계 최고 지도자는 수십 년 전 박해를 피해 도망친 시리아 출신 유대인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미국의 홍보 회사인 브라운 로이드 제임스는 2011년 3월 보그 잡지에 아스마의 기사가 실릴 수 있도록 했다. 이 기사는 아스마를 시리아를 새로운 브랜드로 만드는 데 전념하고 있는 ‘사막의 장미’라고 묘사했다.


이 신탁 재단의 역량은 제한돼 있었다. 한 직원은 “이슬람 사원이나 종교, 정치와 관련된 일들은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경계를 지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런던 과학 박물관의 전 고위 관계자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시리아의 시설에 여러 학자들이 관광을 왔다. 이들은 아이들이 청정한 공기를 누릴 수 있는 권리 등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질문에만 집중하기로 했지만 어느 순간 대화가 시리아 정권의 학대 문제로 불거졌다. 당시 참여한 한 관계자는 “한 아이가 인권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며 그가 체포돼 옷이 벗겨진 뒤 병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어야 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퍼스트레이디에게 보고해야 했고 나는 당시 지역 보안 담당자 중 한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이 신탁 재단에서 근무하던 외국인 컨설턴트들은 다마스쿠스의 호화 생활에 젖었다. 룸서비스로 초밥을 주문하고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많은 월급을 타갔다. 재무부의 자문으로 활동하는 사미르 아이타는 “많은 마을이 제대로 된 하수도와 전기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아스마는 컨설턴트들과 함께 나타나 기업가 정신, 시민 사회, 지속가능한 개발, 치즈 생산 훈련 등을 얘기했다”고 했다. “아스마는 시리아 신탁이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멍청한 사람들이 불쌍한 농민들 앞에서 영어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고 했다.


일부 직원들 역시 이 신탁 재단이 아스마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인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참모들은 아스마를 ‘각하’로 부르게 됐고 그녀가 방에 들어오면 모두 기립했다. 한 전직 직원은 아스마가 시리아를 실제로 자유화하기 위해 헌신했다고 주장한다. 일부는 이를 믿지 않는다. 당시 다마스쿠스에서 근무했던 한 서방세계 대사(大使)는 “진짜였을까라는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고 했다.


아스마의 출세로 득을 본 사람 중 한 명은 그의 아버지 파와즈 아크라스이다. 아크라스는 아스마와 바샤르가 결혼한 직후 영국-시리아 협회를 설립했다. 이는 런던에 위치한 협회로 시리아에 대한 정치적 재정적 지원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이 협회의 활동을 아스마의 신탁과 연계시켜 부유한 시리아인들을 끌어 모았다.


아크라스는 자신이 권력 핵심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그는 연설을 시작할 때 “대통령의 장인으로서…”라는 말로 시작하기를 좋아했다. 런던에서 시리아 정부의 커뮤니케이션 임무를 담당했던 아야 알아리디는 “아크라스와 비교하면 시리아의 대사(大使)는 버스보이에 불과했다”고 했다. 시리아의 총리마저 아스마의 아버지에게 바샤르에게 메시지를 전달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켄싱턴에서 개인병원 심장전문의로 활동한 아스마의 아버지는 돈에 대한 집착으로 유명했다. 환자들은 그가 미리 현금 결제를 요청했다고 말한다.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수십 년 동안 런던 서부의 혼잡한 고속도로 근처에 있는 소박한 주택에서 살아왔다고 말한다. 앞마당은 잡초로 가득하고 현관의 페인트도 벗겨지는 집이라고 한다. 하지만 폭력 정치의 오랜 역사는 시리아인들로 하여금 부(富)를 숨기도록 가르쳤다.


아스마라는 별이 떠오름에 따라 시리아의 국제적 인지도 역시 향상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 당국자들이 다시 다마스쿠스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가 2008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더욱 그런 상황이 이어지게 됐다. 워싱턴을 방문하라는 초대장이 보류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프랑스인들은 훨씬 더 호의적이었다. 파파라치들은 아사드 부부가 파리를 방문하면 거의 스토킹을 했다. ‘파리 매치’라는 매체는 아스마가 “그림자로 가득한 나라의 빛을 밝히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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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마 알아사드(출처: 시리아 대통령실 페이스북)

 

2010년 12월 10일, 아스마는 파리에 있는 싱크탱크인 국제외교아카데미에서 프랑스 엘리트들을 앞에 두고 연설을 했다. 아스마는 노트도 없이 “나의 조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라는 주제에 대해 얘기했다. 며칠 뒤 튀니지의 한 채소 장수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이는 북아프리카와 중동 일대에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민중 봉기로 이어지게 됐다. 아사드가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력이 아닌 문화 예술 등을 사용하는 것을 뜻하는) 소프트 파워나 높은 구두 힐로는 역부족이었다.


2011년 첫 두 달간 중동의 상황은 크게 요동쳤다. 수십 년간의 교착과 탄압 이후 튀니지에서 리비아, 알제리에서 바레인, 요르단에서 예멘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카이로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약 30년간 이집트의 독재자로 군림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몰락했다. 혁명의 물결은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시리아인들은 다른 곳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보며 도취됐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길거리로 나오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던 중 2월 어느 날 밤 다마스쿠스 남쪽에 있는 데라라고 불리는 한 농경 마을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벽에 페인트로 낙서를 했다. “의사 선생님, 다음은 당신 차례입니다.” (注: 바샤르 알아사드는 의사다)


이 지역 보안 책임자는 바샤르의 사촌이었다. 그는 시리아 비밀경호국의 기준으로 봤을 때도 깡패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아이들을 모아 놓고 고문을 했다. 아이들의 아버지들이 제발 풀어달라고 간청하자 이 보안 책임자는 부인들을 넘기면 더 많은 아이들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군중들은 데라 마을의 이슬람 사원 앞에 모여 존엄성과 자유를 요구했다. 군대는 이들을 향해 발포했다.


아스마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은 바샤르가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처음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장군 중 한사람은 지역 보안 책임자를 감옥에 집어넣고 데라에서의 유혈사태에 대해 사과하라고 충고했다. 시리아의 대도시들은 여전히 평온했기 때문에 대중의 비난을 수용하고 새롭게 변화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면 이 문제를 통제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워싱턴 주재 시리아 대사는 바샤르가 새로운 개혁을 발표하는 연설문 초안을 작성하는 것을 도왔다. 서방세계에 있는 아사드의 친구들이 이와 관련된 내용들을 접하게 됐다. 아스마 역시도 군중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랍의 봄 움직임이 계속 커짐에 따라 아스마는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스마의 전 측근에 따르면 아스마가 야당 측과 대화를 하려고도 했다고 한다. 3월 30일, 바샤르는 형식적인 기관에 불과한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바샤르는 “시리아는 엄청난 음모에 직면해 있다”고 하며 사람들이 갖고 있던 기대감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보안당국이 시위대를 향해 발표하는 장면이 “가짜 정보”라고 했다. 그는 불특정 외국인들의 음모를 은폐하려는 시도라며 개혁 요구에 반대한다고 했다. 아스마의 이사들 중 한 명은 “이는 옛날 정권식 연설이었다”고 했다. “화해의 말 한 마디도 없었고 상황이 다르게 진행됐을 수도 있다는 말도 없었다. 내가 바샤르를 만났을 때 그는 개혁에 대해 얘기를 하곤 했다. 이것이 모두 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이사는 연설 직후 시리아를 떠났다.)


이 연설 이후 시위 횟수와 규모는 매주 증가했고 특히 금요일 기도 후에 사람들이 많이 집결했다. 장례식과 시위, 폭력이 모두 늘어나게 됐다. 한 달 동안 시리아 정부의 대응은 계속해서 악랄해졌다. 처음에는 총기를 겨누던 수준에서 저격수가 나타나더니 중화기가 등장했다.


지난 10년 동안 시리아의 군 장성, 정보국장, 바트당의 영향력은 모두 줄어들었다. 그러던 이들이 다시 복수심을 가득 품고 돌아오게 됐다. 바샤르의 어머니인 아니사도 단호한 대응을 촉구했다. 아니사는 바샤르에게 너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며 비웃었다. 1982년 바샤르의 아버지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는 이를 잔인하게 진압했었다. 前 다마스쿠스 주재 프랑스 대사는 이 무렵 바샤르가 이런 말을 했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하마에서 발생한 수천 명의 죽음이 우리에게 30년간의 안정을 가져다줬다.”


시리아가 혼란에 빠지자 아스마가 만들어 낸 성(城)도 공중분해되기 시작했다. 국립박물관의 재개장을 기념하는 행사는 취소됐다. 그녀의 문화 재생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않았다. 런던의 과학 박물관을 모델로 한 7년에 걸친 박물관 사업은 콘크리트 상태로 남게 됐다. 자금이 고갈되고 컨설턴트들은 시리아를 떠났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력서에서 시리아 신탁 근무 내용을 삭제했다. 당시 서방세계에서 방문한 사람 중 눈에 띄는 사람은 극우성향의 영국 국민당 대표 닉 그리핀 등 외톨이들뿐이었다.


아사드 부부와 친분을 갖고 있던 와픽은 바샤르에게 온건한 노선을 추구해 줄 것을 간청했다고 했다. 그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당신과 당신의 부인을 사랑한다. 당신은 무바라크와 다르다”고 말했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사람들에게 약간의 권리, 약간의 존엄성을 주면 당신은 영원히 사랑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바샤르의 진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는 6월에 한 두 번째 연설에서 시위대들을 ‘병균’에 비유했다. 어두운 장(章)이 막 시작되려 했다.


아랍의 봄이 1년 지난 2012년 2월, 시리아의 제4기갑사단은 시리아 서부 홈즈에서 포병 훈련을 실시했다. 이 사단은 바샤르의 남동생인 마헤르가 지휘했다. 이 지역은 아스마의 부모가 자란 곳이다. 이제 이곳 시위대들의 항의는 무장 폭동으로 커져가고 있었다. 군인들은 반란군으로 이탈하기도 했고 시위대 전역에서 약 7000명의 민간인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아스마는 탱크들이 가족의 고향으로 돌진할 무렵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아스마는 “뭐 눈에 들어오는 거 있어?”라고 했다. 그녀는 크리스찬 루부탱 구두의 한정판 정보를 보낸 것이었다. 아스마는 시위가 시작된 이후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여러 추측이 제기됐다. 이러한 환경에 포로로 잡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남편의 행동을 지지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녀가 해외로 도피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시위 초기 아스마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은 그녀가 공식 노선을 엄격하게 따랐다고 했다. 민중 봉기가 외국의 음모라는 것이다. 아스마의 한 친구는 아침에 그녀와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린 뒤 떠났다고 했다. 그는 “모든 것들은 항상 거짓말이었다. 나는 이용당했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바샤르의 난폭성이 커지자 아스마가 경악했다고 주장한다. 2011년 11월 무아마르 카다피의 훼손된 시신이 리비아의 거리를 질질 끌려다니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론적으로 아스마는 런던으로 떠날 수 있었다. 걸프 지역의 여러 국가들은 안전과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영국 정부는 아스마가 영국 시민인 관계로 그가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거듭 밝혔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는 아스마를 비밀리에 보호해주겠다는 제안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하지만 런던의 분위기도 좋지만은 않았다. 시위대는 액턴에 있는 아스마의 부모 집 앞에 모여 문에 붉은 페인트 칠을 했다. 퀸스 컬리지는 명예 동문 명단에서 아스마의 이름을 삭제했다.


아스마가 이미 떠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런던 주재 시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한 관리는 2011년 말 경호국이 VIP를 영접하거나 파견하는 준비를 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아스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다마스쿠스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아이들을 데리고 간 심복에 의해 저지당했고 그녀는 아이들 없이 여행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몇 달 동안 아스마는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아스마의 옛 친구들은 그녀가 2012년 1월에 있었던 친(親)정부 집회를 통해 오랜만에 얼굴을 드러내게 됐는데 매우 수척해 보였다고 말했다. 아스마와 아이들은 해안가 인근의 아사드 가문 여름 궁전으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폭탄이나 최루탄을 피해서다.


대중적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아스마는 집안을 다시 꾸미는 일에 전념했다. 봉기 첫 해에 그녀는 정원사를 고용하기 위한 광고를 냈고 가구 구입비로 25만 파운드를 썼다. 제재를 피하기 위해 그녀는 두바이에 미용사를 보냈고 ‘해롯’에서 주문할 때는 가명을 사용했다. 런던에 있는 아사드 가족의 해결사는 아스마가 요청한 샹들리에 구입 문제를 해결했다. 아스마는 우스갯소리로 자신을 아사드 가문의 ‘진정한 독재자’라고 불렀다.


아스마의 광적인 쇼핑 내역은 2012년 시리아 반정부 운동가들에 의해 가디언에 유출된 아사드 가문 내부에서 주고받은 수천 통의 이메일과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다른 내용들을 통해 공개됐다. 이때 공개된 메시지들을 보면 아스마가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추측해볼 수 있다. 2011년 12월 아스마는 카타르의 공주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카타르가 시리아 반군과 손을 잡기 전까지 친구 사이를 유지해왔다. 카타르 공주는 아스마에게 “현재 상황을 성찰하고 이를 부인하는 상태에서 빠져나오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그녀는 자신이 선을 넘은 것이라면 사과한다고 했다. 카타르의 공주가 아스마의 망명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다.


아스마의 답장은 놀라울 정도로 애매모호했다. 아스마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한 뒤 “친구야, 인생은 공평하지 않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현실이 있어”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시리아에 남아있도록 강요하는 어떠한 힘에 대한 암시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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