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호 前 국정원장 “대통령 지시로 고치면 될 일을 억지로 형사처벌하는 게 법 정의인가?”

“검찰 논리라면 문재인의 국정원 활용한 대북교섭도 불법”
이병호 원장이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 全文

존경하는 대법관님께, 


3번째로 탄원의 글을 드립니다. 그만큼 제 사건과 관련하여 말씀드릴 소견이 많기 때문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지적대로 적폐청산은 광풍이었습니다. 그 광풍은 국정원장 3명을 감옥에 보내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정보책임자 3명을 정보예산을 잘못 사용했다는 혐의로 한꺼번에 감옥에 보내는 사례는 어떤 문명국가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엄정한 법치가 이루어지는 모범 국가이기 때문일까요?


이 사건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사건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결코 간단치 않습니다.

대통령이 “국정원 예산을 갖다 쓴 것은 나쁘다. 이런 적폐는 단죄되어야 한다”라는 예단 하에서 단선적 법리 해석으로만 접근할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의 국가안보지휘권을 제한하는 헌법적 문제점도 함축되어 있어 심도있는 심리가 요구되는 중차대한 의미의 사건입니다. 국격에 관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2018년 “먼저 일어나 죽여라(Rise and Kill first)”라는 제하의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관한 책이 미국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이스라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인물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 표적암살(Targeted Killing) 해온 사례를 수록한 글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의해 암살된 인원의 수는 수천 명에 이릅니다. 이 암살임무는 이스라엘 수상의 직접 지휘 하에 이루어집니다. 암살대상이 수록된 레드페이지(Red Page)라는 문서는 반드시 수상이 서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수상과 정보기관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이스라엘의 국가안보를 지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대통령과 국정원은 국가안보를 위해 한팀인 공동체 관계입니다. 


이 책 589쪽에 당시 이스라엘 수상인 사론이 모사드 부장에게 지시한 사례가 등장하는데, 이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사론 수상은 아라파트(당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의 비리를 국제사회에 폭로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수 명의 저널리스트(이 책의 저자 포함)와 책 발간과 관련 홍보 프로젝트를 협의했습니다. 당시 아라파트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중동 평화의 상징적인 인물로 암살시 엄청난 역풍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암살보다는 비리 폭로를 통하여 아라파트의 국제적 영향력을 실추시키는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론 수상은 모사드 부장에게 배당된 비밀자금(Secret Fund)을 전용(轉用)해서 이 프로젝트 비용을 지원하라는 지시(Directive)를 내립니다. 사론 수상의 지시는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어떤 비난도 없었습니다.


모사드 부장 사례에서 보듯이 전 세계 모든 정보기관장은 자신이 비밀리에 집행할 수 있는 비밀자금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정원장이 가지고 있는 특별사업비가 이에 해당됩니다. 국정원장 특별사업비는 국가안보업무에 사용하는 사업예산이라고 포괄적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어떤 세부사용 규정이나 지침이 없습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국정원장 사업비는 현시점에서는 특정할 수 없지만 장차 발생할 수도 있는 국가안보 업무 수요에 대비하는 예비비적 성격의 예산입니다. 다른 나라 정보기관장의 비밀자금도 같은 성격입니다. 


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는, 사론 수상의 지시와 같은 맥락의 지시임에도 불구하고, 형사처벌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3명의 국정원장이 모두 감옥에 갔습니다. 정보기관장의 비밀자금에 대한 지시가 한국과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이렇게 판이하게 취급받게 되었는지 세계의 어느 정보기관도 이를 이해하거나 납득치 못할 것입니다. 세계 모든 정보기관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정보운영 상식과는 너무 동떨어진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혹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는 사론 수상 지시와 다르다. 사론 수상의 지시는 그 사용 용도가 이스라엘 국가안보와 직결되어 있으나, 박 대통령의 지시는 국가안보와 관련이 없다. 정보예산을 청와대에 지원하라는 행정적 성격의 지시다. 따라서 이 지시는 국가정보예산을 남용한 국고손실 범죄다. 국정원장들은 대통령의 지시라 해도 국가안보 업무와 관련이 없는 지시를 따지지 않고 따랐기 때문에 공범자들이다. 국정원 예산을 용도외 사용한 것이다”라고 반론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에는 다음과 같은 근원적 문제점이 있습니다.


대통령은 국정원 예산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가 국가안보와 전혀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대통령의 지시를 따른 국정원장들에게 형사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대통령은 국가안보 수호자로서의 헌법적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나라의 유일한, 대체 불가능한 궁극적 국가안보 책임자입니다. 


이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 대통령은 두 가지 특별한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군 통수권과 국가정보기관입니다. 물론 다른 정부부처도 국가안보와 유관되어 있습니다만 이 두 가지 장치는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위해 직접 활용하는 특수한 장치입니다. 이는 모든 나라가 공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국가안보체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국가안보체계를 법적으로 구체화하여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하고 국정원은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국정원법 제2조). 이 법에 따라 대통령은 인사, 편제를 포함 국정원의 운영전반을 직접 지휘, 감독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정원에 대한 지휘권은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총체적인 국가안보지휘권의 일환입니다. 국정원 자금을 청와대에 지원하라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는 국정원을 지휘하는 대통령의 합법적인 권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대법원은 국정원예산에 대한 대통령의 지시가 국고손실을 가져온 범죄라고 판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판결은 국정원에 대한 대통령의 지휘권 중 예산 지휘는 안 된다는 제한을 가한 것입니다. 헌법이 보장된 대통령의 총체적 국가안보지휘권에 제한을 가한 형국이 된 것입니다. 


물론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정원 예산을 청와대로 전용토록 지시한 후 이 자금을 개인적으로 착복했음이 분명하다면 이는 범죄일 것입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시 자체가 대통령이 할 수 없는 불법적인 지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대통령이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가가 범죄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관건일 것입니다. 


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 자금을 어떻게 사용되었지는 제대로 조사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 자금이 대통령만이 아는 외교업무나 주한미군 장병을 포함한 안보관계자에 대한 격려금, 또는 사론 수상의 조치와 비슷하게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는 프로젝트 추진 (자신만이 아는 소스를 통해) 등으로 사용되었다면 과연 이를 국가안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국고손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원된 자금 전부가 사적 용도로 쓰여졌을까요? 이중 최소한 일부는 국가안보를 위해 쓰여지지 않았을까요? 


대통령의 국가안보책무는 국정 전반에 걸쳐 포괄적입니다. 대통령이 관장하는 국가안보개념은 군사안보 사안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좋은 경제정책을 포함 국정운영을 잘해서 나라가 부강해지면 이는 바로 튼튼한 국가안보로 연결됩니다. 때문에 대통령의 어떤 특정 국정운영 행위를 국가안보와 무관하다고 함부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국가안보는 대통령에게 맡겨진 절대적 책무이고 이를 어떻게 수행하느냐는 대통령만이 결정할 수 있는 배타적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그 직 자체가 국가안보입니다. 대통령의 개인적 건강이 국가기밀이고 국가안보인 것이 이를 방증합니다. 대통령의 개인적인 이미지가 올라가면 이 또한 국가안보에 도움이 됩니다. 


때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를 국가안보와 무관하다고 누구도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저간의 사정은 대통령만이 알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통령이 그 자금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몫입니다. 국정원장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국정원장은 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지시를 따랐다는 이유로 국정원장 모두를 감옥에 가는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이런 판결이 과연 공정한 재판 결과일까요? 


특히 이 문제에는 우리나라 특유의 역사적 사정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이 국정원의 예산을 활용해 온 것은 오랜 관행이었습니다. 그 관행은 중앙정보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 아시는 대로 중정은 보통의 정보기관으로 출범한 것이 아닙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의 비상시국 상황에서 당시 국가리더십이 산업화를 위한 강력한 통치수단으로 중정을 출범시켰습니다. 때문에 중정은 정치를 포함 모든 전 국정분야에 관여토록 디자인되었고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발전하고 민주화가 되면서 점차 통치기구로서의 역할은 사라지고 보통의 선진국형 정보기관의 모습으로 진화했습니다. 그러나 그 진화과정에서도 대통령이 국정원 예산을 할용해 온 것은 묵시적 관행으로 계속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는 관료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는 팩트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대통령직에 취임하자마자 한 경제부처 장관으로부터 국정원 예산을 역대정부가 활용해 왔다는 브리핑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박 대통령의 국정원에 대한 예산전용지시의 직접적 배경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부임 초부터 개인적으로 돈을 유용할 목적으로 국정원 예산의 전용을 지시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대통령으로서 국정운영을 잘 운영해 보려고 취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역대 대통령도 방식은 다르지만 국정원 예산을 활용해 왔습니다. 그간 이런 관행이 문제된 바 없어 구체적 사례들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김대중 정부에서도 국정원 예산의 활용이 있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국가안보활동은 투명할 수 없습니다. 불가피하게 비밀 활동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활동에 소요되는 비용도 국가기밀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정원장 특수활동비는 그런 소요에 대비하기 위한 자금입니다.


앞으로도 대통령이 국정원 자금을 활용하는 사례는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은 국가안보를 위해 모든 국가의 자산과 자원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국가안보활동에 대한 제한은 극도로 자제되어야 합니다. 세계 모든 국가가 그런 기조 하에서 국가안보체제를 운영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도의 잘못과 사람의 잘못은 구분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제도나 관행이 잘못된 것이라면 고치면 됩니다. 대통령이 청와대 자금을 활용해 온 관행은 모두 대통령의 이니셔티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라면 대통령의 지시 한 마디면 고쳐집니다. 대통령의 지시를 어길 국정원장은 없습니다.


이처럼 고치면 될 사안을 억지로 형사범죄화하여 국정원장들을 형사처벌한 것은 법 정의가 아닐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존경하는 대법관님, 

또한 국정원예산을 청와대에 지원한 것은 국정원의 직무와 무관한 예산의 사용임으로 용도외 사용이고 그래서 불법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로서 검찰은 국정원법 제3조의 국정원 직무규정을 지적했습니다. 직무규정은 “국정원은 국내외(대공·대테러·방첩·국제범죄 등) 정보 수집, 작성, 배포의 직무를 수행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국정원은 이 직무규정에 따라 정보활동해야 하며 이 활동을 위해 예산을 써야 하는데 청와대 자금지원은 국정원의 직무규정과는 무관함으로 불법적인 용도외 사용이라는 것이 검찰의 논리 입니다.


이 논리에는 2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대통령의 국가안보책무는 국정원직무와 직접 연계되어 작동되고 있다는 현실을 간과했습니다.


국정원법 제2조는 국정원이 대통령 소속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조직법은 “국가안전보장 사무를 위해 국정원을 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법에 따라 국정원의 직무는 국가안전보장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의 판단과 지휘에 따라 작동합니다. 대통령의 국정원에 대한 지휘는 국정원 직무규정 문구에 나타난 활동에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5억 불에 달하는 대북 송금에 국정원을 활용했습니다. 현 문재인 정부도 대북교섭에 국정원을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국정원 직무 규정에는 없습니다. 국정원의 직무활동은 국정원법 제3조에 나와 있는 규정에 한정해야 한다는 검찰의 논리라면 이런 활동은 모두 불법활동입니다. 또한 이런 활동을 위해 쓴 자금은 모두 용도외 사용예산이 됩니다. 


두 번째로. 검찰의 논리는 국정원의 직무활동이 외교, 안보현장에서 실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실상을 잘 모르고 규정 문구에만 집착한 논리입니다. 


국정원의 직무, 즉 국정원의 정보활동은 단독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외교부, 국방부, 통일부, 검찰, 경찰등 모든 정부 부처와 연동되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국정원이 외국에서 정보수집 시 외교부 또는 국방부 등 부처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집니다.


또한 국정원의 직무는 정보수집활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국가안보를 지키는 모든 활동을 포함합니다. 해적에게 납치된 우리 선원 구조에 국정원은 정보제공뿐만 아니라 필요시 예산도 지원합니다. 외교부의 비밀외교시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비용이 필요시 자금지원도 합니다. 동계올림픽 게임과 같은 국제행사 성공을 위해 국정원은 다양한 지원활동을 전개합니다. 국정원의 직무는 이처럼 국가 전체의 국가안전보장 활동의 일환이며 정부의 모든 안보부처와 공동체를 이루어 그 직무가 전개됩니다. 


국가안보활동의 최종 책임자는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은 국가안보를 위해 국정원의 활동방향도 정하고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립니다. 이러한 대통령의 지시는 국정원의 직무규정 문구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국정원이 대북교섭업무를 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그 사례입니다. 이러한 대통령 지시에 대해 국정원장이 국정원 직무규정을 들어서 국정원이 할 일이 아니라면서 대통령 지시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원 예산 전용지시를 국정원 직무와 무관함으로 용도외 사용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국정원장은 이 지시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용도외 사용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데 어떻게 따지거나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탄원서에서도 지적했습니다만 박지원 현 국정원장이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를 따른 이병기, 이병호 원장을 형사처벌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대통령과 국정원간 관계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 소견은 국정원을 포함한 우리 국가안보 공동체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다룬 국정원장으로서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검찰은 안보현장의 작동현실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검찰의 주장은 현실을 잘 모르면서 규정 문구만을 해석한 무리한 이론일 뿐입니다. 정보업무를 경험한 그 누구도 검찰의 이런 논리에 수긍치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저의 소견을 재판과정에서 계속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소용없었습니다. 검찰과 법원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헌법학의 대가이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최대권 교수는 문화일보 2018년 10월16일 기고문에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형사처벌에서는 증거의 엄격한 해석이 요구된다. 합리적 의심도 불가능한 증거가 요구된다. 유추해석도 안되고 반대의견이 가능한 증거도 안된다.” 


저는 법률가라면 누구나 최 교수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고손실범, 뇌물, 정치관여를 했다는 국정원법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국정원 예산의 청와대 전용이라는 단일 사건이 이처럼 여러 가지 범죄로 분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저는 저의 유죄판결에 최 교수가 지적한 명확한 증거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증거의 엄격한 해석의 원칙이 모두 외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의 증거는 검찰이 만든 이헌수 기조실장과 저의 진술내용이 담긴 조서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조서에 담긴 진술내용은 대부분 자금이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그 경위에 대한 것입니다. 


원장인 제가 국정원 예산책임자인 이헌수로부터 언제 어떻게 청와대 자금지원 보고를 받았는지, 이헌수는 청와대 누구와 어떻게 지원 문제를 협의해 왔는지, 그리고 돈은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지원과정에서 원장으로서 저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등에 관한 자금지원 경위 내용이 거의 전부입니다. 1심과 2심 모두 청와대 자금지원과정에서 제 역할이 수동적이었다고 명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진술조서에는 제가 청와대 자금지원으로 어떤 이익과 대가를 받았는지, 제가 어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국정원예산을 청와대에 지원하게 되었는지 등에 관한 진술도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건의 유일한 증거가 되는 검찰조서에는 저의 유죄를 입증할 어떤 증거도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진술조서에는 국정원장으로서 제가 회계관계직원으로서 역할을 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저는 8차에 걸쳐 강도 높은 검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검찰은 제게 한 번도 회계업무관련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혐의에 대해서는 조사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국정원 회계책임자인 기조실장 이헌수를 포함하여 어떤 국정원 직원도 국정원장이 회계업무와 관련한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검찰은 조사도 하지 않고 증거도 없이 국정원장을 회계관계직원이라고 본다고 판단하고 국고손실 혐의로 기소한 것입니다. 그것도 뇌물혐의로 기소한 후에 공소장 변경을 통해 예비 혐의로 추가한 것입니다.


다 아는 대로 항소심은 검찰의 법리를 뒤집고 국정원장은 회계관계직원이 아니라고 판결했습니다. 적페청산의 사나운 기세 속에서도 항소심은 그래도 상식에 입각한 합리적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그 대신 횡령죄를 적용하였는데, 이것조차도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다시 뒤집었습니다. 국정원장이 회계관계직원이라고 판결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을 부정한 놀라운 판결이었습니다. 기관장을 회계관계직원이라고 판단한 헌정사상 처음 있는 판결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국정원장이 회계관계 활동을 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전 현직 국정원 직원 누구도 원장이 회계업무에 관계하는 직원이라고 생각치 않습니다. 전직 국정원장을 포함 어떤 정부 공직자도 국정원장이 회계관계직원이라고 생각치 않습니다. 법조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형법정주의는 법 해석만으로 범죄를 확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오직 명확한 증거에 입각하여 범죄를 명확하게 적시해야 하는 것이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 알고 있을 대법원이 특히 법치의 전범이 되어야 할 나라의 최고 법원인 대법원이 어떻게 증거도 뒷받침되지 않은 혐의를 자의적 해석만으로 국정원장을 회계관계직원으로 본다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국정원장의 회계관계직원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원장 특별사업비에만 선택적으로 해당된다는 것인지 아니면 전 국정원 예산에 해당된다는 것인지도 불분명합니다


판결문에 원장이 특별사업비의 지출행위를 단독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회계관계직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사실 청와대 자금지원의 지출행위의 원인은 대통령의 지시였습니다. 저는 국정원장 부임시 그런 지원이 2년간 지속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전부입니다. 지출행위의 원인은 이미 2년 전부터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를 제가 지출원인행위를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경위를 다 무시하고 저를 국고손실범죄자라고 단죄하는 것이 공정한 판결일까요? 


나머지 뇌물범죄혐의나 국정원법 위반 혐의도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지난 탄원서에서 그리고 재상고 변론서에서 그 이유를 상세히 밝혔으므로 다시 언급치 않겠습니다. 


어떻게 대법원이 이런 이상한 판결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조심스런 생각이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연계되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을 맡은 대법원 재판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원예산 사용을 국고손실죄로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에 구색을 맞출 정치적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그 구색을 위해 대통령의 지시를 따라 돈을 지원한 국정원장들을 공범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국정원장이 회계관계직원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항소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갑자기 뒤집어지게 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같은 맥락에서 제가 갑자기 대법원에 의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 바친 뇌물범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 추정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대법원은 정치를 한 셈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제 추정이 틀리기를 바랍니다. 


저는 앞에서 소개한 최대권 교수의 엄격한 증거주의는 어떤 재판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형사법의 대원칙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원칙이 이번 대법원 재상고심에서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박재균 논설위원이 5월17일자로 쓴 동아일보 칼럼에 “취임하자마자 적폐몰이로 이전 정권사람들을 초토화시키고”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5월22일자 중앙일보는 최장집 원로 진보학자의 인터뷰기사를 게재하였는데, 이때 최 교수는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 정부를 자임했다. 이는 스스로 도덕적이고 정당하다고 자임함을 의미하며 상대방은 개혁의 대상이 되고 척결의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험한 발상이었다”라는 요지로 말했습니다.


 헌법학의 대가인 경희대 허영 명예교수는 5월5일자 조선일보 칼럼에서 “법원이 사조직에 장악되었다. 법 적용의 생명력은 일관성과 공정성이다. 이를 잃어버리면 위헌적 재판이다. 생명력을 잃은 재판은 국가폭력이다”라는 요지로 대법원을 포함 현 법원의 실태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저는 어느 날 갑자기 척결대상이 되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척결의 대상이 된 이상 제가 그간 여러 번의 탄원서에서 제시한 억울한 주장의 근거를 아무리 호소해도 다 외면 되었습니다.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저로서는 사법체계 전체가 적페청산 취지에 맞게 답이 정해진 상태에서 작동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톱 지성인이라는 명망을 지닌 위에서 인용된 저명한 인사들이 표출한 견해들은 결코 허튼소리가 아닙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우려의 목소리입니다. 저는 지난 4년여에 걸친 재판 과정을 통해 이를 충분히 체험했습니다.  


지난번 탄원서에서도 지적했듯이 파기환송심 재판장마저 자신은 대법원의 판결과 달리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법원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여 저에게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재상고를 통해 다시 판결을 받아보라는 취지로 법정구속은 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3년 6개월의 형량은 푸틴의 정적인 나발니가 받은 형량입니다. 제가 이런 무거운 형량을 받은 근본적인 이유는 단 하나, 박근혜 정부하에서 국정원장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정적을 척결키 위해 법은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동원될 수 있습니다. 나발니도 그렇게 해서 3년 6개월을 받았을 것입니다. 21세기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하고 있다면 참으로 슬프고 개탄스런 일일 것입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최근 “법치”와 “정의” “공정”을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너진 법치와 상식을 복원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진정한 법치 복원의 가장 무거운 책임은 사법부에 있을 것입니다. 사법부가 어떤 경우에도 헌법과 법률 그리고 양심에 따른 공정한 재판을 해 나갈 때 법치는 복원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근 퇴임한 박상옥 대법관의 퇴임사가 신문에 보도된 바 있었습니다. 


“사법부 구성요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정치적 중립과 정의를 향한 굳건한 의지로 열의와  정성을 다해 묵묵히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번 대법원 재상고심에서 박 전 대법관이 말한 정의를 향한 굳건한 의지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번 탄원서, 그리고 이번 보충 탄원서를 통해 지난 대법원 판결에 많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법 문외한의 무식한 아전인수의 억지 주장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대법원은 하급심에서 적용한 법리를 심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문제점에 대한 법리를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건의 본질적 성격은 정부예산의 전용입니다. 이 점에 대한 법원 심리가 없었습니다. 이는 법리적용의 근원적 과오가 아닌지? 


이 사건은 대통령의 예산 전용지시에 의해 발생했고 전용된 자금은 대통령이 사용했는데 사용처를 모른 채 대통령의 지시를 따른 국정원장에게 형사책임을 물었습니다. 적용한 법리가 정당한 것인지? 


국정원장이 회계관계직원이라는 판결에 적용한 법리가 기존 회계관계법령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헌법이 정한 증거의 명확성 원칙에 반하는 것은 아닌지?


국정원장들의 지원행위에는 사익을 추구와 같은 범죄의도성이 없었는데 이를 간과하고 형사처벌하는 것이 정당한 법리적용인지?


국정원예산의 청와대 활용은 오랜 관행인데 이를 형사범죄화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법리 적용인지?


존경하는 대법관님, 

공정하지 않은 재판은 국가폭력이라고 허영 명예교수는 말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 재판이 국가폭력의 재판이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염원을 담아 저는 탄원서를 절절한 마음으로 썼습니다. 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이지만 이 사건에 관한 진실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대법관님들께서 저의 문제 제기 내용에 다소 불편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면치 마시고 끝까지 살펴 보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1. 6. 1. 


피고인  이 병 호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