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族과 韓族의 역사적 친선 관계에 대하여

역사학장 孫晉泰의 주장
아래 글은 역사학자 孫晉泰가 쓴 '韓國民族史槪論'에서 뽑은 것이다. 韓民族과 漢民族의 역사적 친선 관계를 요약한 글이다. 韓美, 韓日, 韓中 관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데, 참고가 될 만한 견해라고 판단되어 소개한다. 이 글은 한국전쟁 이전에 써졌다.


朝鮮民族과 中華民族과의 永久的 親善


孫晉泰('韓國民族史槪論'에서 발췌)


두 國家가 國境을 相接하여 있을 때, 거기에 不斷히 鬪爭이 생기는 것은 全世界를 通하여 共通한 歷史的 事象이었으니, 그것은 貴族國家의 本質이 決코 種族的이나 民族的이 아니요, 無制限한 領土와 人民과 財物의 占倂·略奪에 依하여 王室과 그 周圍의 貴族階級의 權力과 地位와 財産의 强化·擴充에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면 有史 以來 二十數世紀에 亘한 漢民族과 朝鮮民族 사이의 關係는 어떠하였던가. 朝鮮民族史에 賦課된 이 重大問題의 하나를 여기서 잠깐 回顧하여 보고자 한다.

槪述한 바와 같이 두 民族의 最初 鬪爭이었던 衛滿의 奪國(西紀 前 一九四年)後에 衛氏王朝는 漢民族에 依한 民族的 支配를 避하고 王室自身이 朝鮮化하고자 努力하였다. 다음의 漢도 民族的 支配政策을 避하고 樂浪國과의 사이에 親善政策을 極力 遂行하여 高句麗 勢力의 西侵을 防禦하기에 努力하였다. 樂浪國과는 비록 그러하나 樂浪國 以外의 다른 古代 우리 種族들과의 사이에 衝突이 全然 없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高句麗와의 關係는 뒤에 쓰려니와, 南쪽의 漢族과의 사이에도 때때로 小衝突이 있었던 모양이니, 例하건대, 樂浪國 初期에 있어 山林을 盜伐하는 漢民 一千五百人을(그 全部가 漢民이었는지는 疑問이나)辰韓人이 捕虜하여 强制로 斷髮하고 奴隸로서 酷使한 까닭에 數三年 사이에 五百人의 死者가 생겼다는 事實로 보아 그 一端을 推測할 수 있다.

그런데 漢人은 이러한 重大問題에 處하여도 威脅과 賠償과 生存者의 送還으로써 妥結하는 寬大한 政策을 取하였고 報復的 殺傷은 行하지 아니하였다. 그뿐 아니라 漢人은 恒常 朝鮮民의 純朴 仁厚한 長點만을 擧言하여 朝鮮民을 尊敬하였으니, 當時의 漢人들의 記錄을 보면 朝鮮은 北西 南 三方의 外民族과는 殊異하여 天性이 柔順하고 仁賢의 邦이며 禮儀의 民이라, 朝鮮民에게는 盜賊이 없으매 門戶를 잠그는 일이 없고, 婦人이 貞信하매 姦通이 없고, 婚姻에 代價를 要求하는 買賣結婚의 陋風이 없어, 그 法律이란 것이 겨우 八條에 지나지 못하되 오히려 犯法을 羞恥로 생각하는 醇良한 民族이 樂浪의 內郡 賈人들이 頻繁히 往來하게 되어, 그들이 밤으로 가만히 盜賊질을 함으로 因하여 民心이 惡化되어 六十餘條의 禁法이 생기기에 이르렀다고 도리어 自己民族을 自責하였다. 서로 短處를 찾는 두 民族은 不和하고, 서로 長處를 찾는 두 民族은 親和하는 것이요, 壓迫과 支配를 企圖하는 두 民族은 反目하고, 敬愛와 平等을 理想으로 하는 두 民族은 親善하는 것이니, 漢民族과 朝鮮民族의 사이는 恒常 이 兩者 中 後者를 取하였다.

이것은 實로 兩民族 사이의 有史 以來의 傳統이었으니, 우리는 그들을 大國·上國이라 尊崇함에 對하여, 그들은 唐·宋時代에 우리를 仁賢之邦·仁義之鄕·君子之國 等이라 하고, 明代에는 周圍의 外民族을 比較하여 「莫禮義於朝鮮·莫狡猾於日本」이라 하여, 우리를 敬仰하였다. 新羅統一 以後 一千二百七十餘年 間 두 民族은 한 번도 流血의 鬪爭을 한 일이 없다. 두 民族이 國境을 相接하여 있으면서 이대도록 長久한 平和를 持續한 史實을 어느 民族의 歷史에서 求할 수 있는가. 이것은 人類史上 大書할 可驚事이며, 두 民族의 平和愛好性의 不動한 證據이다. 두 民族은 現在도 그러하거니와 將來에도 永久한 友好關係가 持續될 것이다.

오직 高句麗와 漢民族 사이만은 決코 親和하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漢民族의 侵攻에 由因한 것이라 하기보다 차라리 高句麗國家의 積極的 好戰的 發展政策에 由因함이었으니, 兩者 間에는 二世紀 初로부터 戰爭과 平和가 反覆되다가 六世紀 末로부터 高句麗 末年에 이르는 七十年 間에(五九八-六六八年)高句麗 對 隋·唐의 鬪爭은 極潮에 達하여 高句麗王朝는 드디어 唐·新羅 聯合軍에 依하여 滅亡하였다. 이 高句麗와의 關係를 除外한 朝鮮民族과 漢民族의 사이에는 前述한 바와 같이 恒久的 親善關係가 持續되었다. 或은 新羅統一 以後로 明 初에 이르기까지 約 七世紀 間은 北方에 渤海·遼·金·元 等이 일어나 兩民族은 國境을 接하지 아니하였고 完全히 國境을 接한 것은 一三八二年 明의 建國 以後의 일이 아니냐고도 하겠지만 만일 兩者가 好戰的 民族이었더라면 黃海를 通해서도 싸울 수 있었을 것이요, 적어도 海寇的 互相衝突(倭寇 처럼)은 頻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그러한 事象조차 일어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그와는 反對로 恒常 文化的·經濟的 親善 互助關係만이 繼續되었던 것이다.

往年의 日本 帝國主義는 이 偉大하고도 儼然한 歷史的 事實을 隱蔽하고자 卑怯하게도 우리들의 歷史的 論述을 彈壓하고 그들의 奴僕學者들로 하여금 朝鮮·中華 兩民族의 離間과 朝鮮民族의 自尊心 抹殺을 꾀하고, 甚至於는 高句麗를 우리와 異民族이라 하여 朝鮮史로부터 拔出하고, 通古斯民族인 高句麗가 朝鮮民族의 北半의 地을 支配하였다는 怪說을 發한 者까지 出現하였으며, 이보다 더 噴飯할 일은 古代 朝鮮의 여러 國家가 오래 동안 日本에 朝貢 服屬하였다는 것이니, 良心과 科學을 無視하는 國家에 長久한 榮華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의 日本民族은 道義的 科學的으로 再生하여야 할 것이다. 有史 以來로 우리는 民族的으로 漢民族의 支配를 받은 일이 없고 漢民族이 우리를 民族的으로 支配하고자 한 일도 없었다. 다만 王室만은 비록 形式上이나마 오래 동안 中國에 臣屬하였고 따라서 支配階級은 大體로 事大思想의 所有者이었었다.

王室과 支配貴族層은 或은 外交的 方便으로서 또 或은 그들의 地位와 權力을 維持하기 爲하여 稱臣 從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民族大衆은 그러한 關係가 없으므로 두 民族은 恒常 平等한 地位에서 嚴然히 兩存하였다. 그 證據로서는 漢民族으로서 中國帝王의 任命에 依하여 朝鮮의 王이나 官吏된 者가 絶無하였으며(衛滿과 麗·濟 末年의 一時的 事象은 姑置之하고) 貴族階級 以外의 朝鮮民衆에게 果然 漢民 尊仰思想이 있는가? 나는 없다고 斷言한다. 이것은 民族的 支配와 壓制를 받지 아니한 明白한 證據이다. 그 實例로 不過 三十六年間의 民族的 支配 壓制에 因하여 우리 民性이 얼마나 卑屈하여졌으며 日民仰視의 心理가 얼마나 發芽되었던가.

만일 우리가 外民族으로부터 迫害를 받은 史實을 찾는다면, 그것은 漢民族과의 사이에 決코 求할 수 없고, 차라리 高麗時代의 蒙古民族關係에서 그것을 求할 수 있으니, 비록 主權은 잃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民族的 迫害는 자못 甚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第五編 高麗史에서 詳述하겠거니와, 三十六年 前까지의 우리는 極히 自尊心의 强한 民族이었다.

그들이 製作한 美術·工藝品을 보라. 그들의 日用家具를 보라. 飮食·衣服·住居를 보라. 民風·土俗을 보라. 모두가 獨自的이다, 事大的 模倣이 없을 뿐 아니라, 中國 以上으로 나아가려는- 아니 確實히 그 以上으로 나아간 證跡까지 歷然히 있지 아니한가. 이러한 事象은 精神的으로 完全히 獨立한 民族이 아니면 決斷코 있을 수 없는 일이요, 精神的 獨立이란 것은 政治的 自主獨立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갑제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新羅의 統一과 民族의 決定
孫晉泰('韓國民族史槪論'에서 발췌)

新羅는 唐과 聯盟에 依하여 百濟와 高句麗를 征服하였다. 그러나 實質上으로 大同江·元山 以南의 半島를 統一한 것은 六七六年 頃이었으니, 新羅는 이 統一大業의 完成을 爲하여 約 十六年 間 唐軍과 鬪爭하는 苦難을 겪었던 것이다.
唐은 百濟·高句麗王朝를 顚覆한 後 羅·唐 同盟 當初부터 가졌던 內凶心를 暴露하여, 그 占領地를 모조리 自己의 所有로 하였다. 그래서 百濟에는 態津 以下 五箇所에 都督府를 두어 이것을 統治하였는데 王文度를 初代의 態津都督으로 하고, 部將 劉仁願으로 하여금 唐兵 一萬으로써 사비성에 駐屯하게 하였으며 新羅에게 준 것은 王子 金仁泰로서 그 副將의 地位에 둔 것뿐이었다.
어디까지나 新羅를 利用의 方便으로서만 弄絡하고자 하는 政策이었다. 이에 順從하는 것은 新羅의 統一理想의 蹂躪을 意味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唐은 그 傳統政策에 基하여, 民族的인 支配政策을 取하지 않고, 漢의 樂浪郡 同樣으로 다른 四 都督府와 府 州 縣의 都督·刺史·縣令에는 모두 百濟人을 任用하였다. 一方으로 高句麗에는 西域地方의 土耳其民族에 對한 安西都護府·北庭都護府와 同格으로 平壤에 安東都護府를 두고, 薛仁貴를 그 都護使에 任命하여 二萬兵으로 이에 駐屯하게 하였으나 餘他의 府 州 縣에는 亦是 高句麗人을 任用하여 그 都督 刺史·縣令 等에 任命하였다.
이것은 民族的 支配에 依한 無用한 民族感情의 挑發을 回避하고, 將來 適當한 機會에 親唐的인 다른 臣服王朝를 再建하여 唐室의 安全과 商業的 利益을 꾀하려는 政策이었으니, 果然 未久에 六七七年 義慈王子 抉餘隆을 帶方王으로, 또 寶藏王을 朝鮮王으로 封하여 兩國의 再建을 計劃하였다. 이것이 비록 成功하지는 못하였으나 樂浪國에 對한 그것과 全然 同一한 思想과 方法이었음을 알 수 있다.

唐의 獨存思想은 同盟國인 新羅에 向해서도 一方的으로 强制適用되어, 新羅도 唐의 屬領視하여, 慶州에 鷄林都督府라는 것을 두고 新羅의 文武王을 그 都督에 任命하였다. 新羅는 一時 이에 忍從하지 아니할 수 없었으나 이것은 決코 新羅의 堪耐(감내)하지 못할 바이었으니, 첫째 이것은 新羅의 自尊心을 害하는 侮辱이었으며, 둘째 이것은 新羅의 統一理念에 背馳(배치)되는 것이었고, 셋째 唐은 少數 兵力으로써 遠隔(원격)한 麗·濟 二國을 永久統治하기는 不可能한 일이므로 唐의 兵力의 衰弱과 함께 二國은 當然히 謀叛 獨立하여 다시 新羅의 敵이 될 것이었고, 넷째 이 二戰役에 있어 新羅는 多大한 犧牲을 내밀었음에 不拘하고 唐은 新羅에게 一片의 領土도 割讓(할양)하지 아니하였으므로서이었다.
三國이 中國의 王室로부터 王·公 等의 爵位를 받는 것은 單純히 外交上의 方便에 不過한 것이요. 또 許多한 境遇에 그것은 中國王室의 强制 贈與이었고, 三國은 모두 內心으로는 民族自尊心에서 恒常 對等的 思想을 所有하였으므로 未開時代와 달라 그러한 外民族의 爵位(작위)에는 關心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이에 關해서는 前에도 말한 바 있었지마는 新羅가 一時 親唐에 勞力하였을 時代에 있어서도 그들은 金春秋에게 唐 太宗과 同一한 太宗武烈王의 謚號(시호)를 加하여 唐의 問責을 받은 일이 있었고, 또 唐·羅 聯合軍이 百濟를 挾攻하였을 때, 金庾信이 黃山平野에서 百濟將 階伯軍에게 阻止되어 唐軍과 約束한 期日에 扶餘에 到達하지 못하였다는 理由로 唐將 蘇定方은 新羅將 金文永을 處斷하고자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金庾信은 怒髮(노발)이 衝天하고 腰間(요간)의 寶劍이 스스로 躍出하여 「唐軍과 一戰을 決한 다음에 百濟를 殲滅하리라」라 절규하여 蘇定方으로 하여금 唐慌 狼狽(낭패)하여 金文永을 釋放하게 하였다고 한다.

新羅人의 意氣와 唐에 對한 心的 態度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態度는 何必 三國에 限한 것이 아니요, 若干 强弱의 差는 있을망정 高麗·李朝를 通해서도 大體로 同一하였다.
新羅의 唐에 對한 不滿과 憤怒는 當然한 일이었다. 그러나 新羅는 淵蓋蘇文式 輕動을 警戒하고 隱忍自重하여 外柔內剛 唐에 對하여 外交的으로는 恭順을 表하면서, 或은 唐·契丹·靺鞨의 聯合軍과 八年 間에 大小 五十餘戰을 敢行한 後 實力으로써 半島 內의 唐兵을 漸次的으로 驅逐하여 六七六年頃(文武王 十六年) 겨우 大同江 以南과 元山 以南의 半島를 完全히 占領 統一하고 그 以上의 北進을 斷念하였으니, 百濟 滅亡 後 實로 十六年의 歲月을 要하였다.
이러한 唐과의 鬪爭은 新羅가 唐과 同盟하였을 當初부터 이미 覺悟하였던 바 있었을 것이다. 新羅의 이 壓迫에 놀란 唐은 安東都護府를 平壤으로부터 遼東에 移轉하지 아니할 수 없었고, 또 一方으로는 麗·濟 兩國을 復興하여 新羅를 牽制하고자 하여 前述한 바와 같이 扶餘隆을 帶方王에, 寶藏王을 朝鮮王에 封하여, 百濟·高句麗 代身에 帶方國·朝鮮國의 新建을 꾀하였으나, 新羅와의 衝突이 不利함을 깨달았을 때에는 구태여 이것도 武力으로 强行하려고까지 하지 않고 斷念한 모양이다.
그리고 未久에 高句麗의 故土에는 渤海王國이 일어나(六九九年) 新羅와 唐은 黃海를 隔하여 相隣하게 되었고, 그 뒤로도 北方에는 遼·金·元 等이 繼起하여 漢民族과 朝鮮民族은 約 七百年 間 平和를 持續하였으며 明·淸時代에 있어서도 두 民族 사이의 衝突은 없었다. 이리하여 朝鮮과 漢民族 間의 親善平和關係는 實로 一千二百七年에 亘(긍)하여 繼續되었다.

高句麗에 依한 民族統一이 成就되지 못하고 新羅에 依하여 民族과 領土의 半分的 統一이 遂行된 것이 民族的으로 커다란 不幸事이었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何如間, 新羅의 이 統一에 因하여 朝鮮의 民族은 이에 決定되었던 것이니, 비록 未久에 高句麗 故地에 渤海國이 高句麗 遺民에 依하여 建設되기는 하였으나, 二百三十餘年 間 新羅와의 사이에 注目할 만한 아무 交涉도 없이 極히 平穩 無事히 지내다가 九二六年 遼(東蒙古民族)에게 亡하였다.
이리하여 時間의 經過에 따라 滿洲의 土地와 住民은 朝鮮民族 系列로부터 漸漸 離脫하게 되었다. 遼(九一六年-一一二四年)가 亡한 뒤 滿洲에서 金帝國(一一一四年-一二三四年)이 渤海 遺民에 依하여 建設되었을 때까지는 그래도 高句麗와의 사이에 兄弟之誼가 持續되었으나, 그 以後로 兩者間에는 血緣的 關係조차 全然 忘却되어, 後世의 滿洲民族(女眞民族)과 朝鮮民族은 別個의 民族으로 되고 만 것이다.
오랜 동안의 政治的·經濟的·社會的 分離生活은 地理的 別異를 招來하고, 또 血緣的 別離와 文化 및 言語의 別離와 歷史의 別離 等을 재래하였다. 이렇게 되면 同一種族이라는 意識과 感情을 일으키게 하는 모든 要素가 除脫되어, 元來는 비록 同一血族에 屬하지마는 民衆의 感情과 意識은 서로 異民族視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지금 朝鮮民族의 母體는 當時의 新羅 領土로써 一但 決定되었으니, 그것은 大禮로 大同江 以南과 元山 以南의 土地와 約 八百萬의 人口로 構成되었다. 이 民族은 高麗朝와 李朝 初期 世宗朝까지에 西北과 東北으로 漸漸 領土와 人民을 獲得하여 現在의 國境線을 이루게 되고, 또 若干의 蒙古民族과 女眞民族을 包攝 同化하여 그것을 朝鮮民族化하였다. 그리하여 李朝 末年까지 約 一千萬의 人口를 가졌던 것이다. 現 朝鮮民族의 完成은 一四三四年(世宗 十六年) 金宗瑞將軍의 咸鏡北道 回復으로부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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