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웃는 얼굴 김동길 선생 별세, 향년 94세!

몇 가지 에피소드
늘 웃는 얼굴이라 만나면 힘이 나는 金東吉 선생이 어제 밤 호흡기 질환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했다. 자신의 屍身을 의과대학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28년 평남 맹산에서 출생,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 사학과 교수, 국회의원, 조선일보 논설고문을 지냈다. 신문, 잡지, 방송, 유튜브, 대중집회를 넘나들며 수많은 글과 말, 그리고 웃음을 남겼다. 반공자유민주주의 정신에 투철하되 투쟁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신 분이다. 애국집회 주최자는 인기폭발의 김 선생을 연사로 모시는 경쟁을 했다. 2019년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조국 규탄 집회에서 연설한 것이 마지막이 아닌가 한다. 그때 김 선생은 전광훈 목사를 향해 정치를 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충고하기도 했다.

각박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늘 익살과 여유를 보여주었다. 신촌의 어리숙한 집은 손님으로 가득했고 냉면이 맛 있었다. 김 선생은 특히 말년의 황장엽 선생을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옷을 잘 입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누님은 이화여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낸 金玉吉. 나는 김 선생과 강연, 궐기대회, 해외여행에 여러 차례 동행하여 일화를 많이 안다. 몇 개를 소개한다.

*2011년 1월 金東吉 선생을 新村(신촌) 사무실로 찾아가 새해 인사를 드렸다. 金 선생은 年末에 목과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고 회복중이었다. 의자에 앉아 유쾌하게 德談(덕담)을 하였다.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수술을 하겠다는 의사도 대단하고 수술을 받겠다는 환자도 대단하다고."

그는 다섯 시간 수술을 받았는데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수술실로 옮기는 도중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저의 기도를 들어주신 적이 있었거든요."

金 선생은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하였다. 1950년 가을 金 선생은 부산에서 미군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주로 항만에서 일하였다.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하였다는 뉴스를 듣고 빨리 신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마침 影島(영도)에서 인천으로 출발하는 아주 작은 경찰 경비정이 있었다. 여기에 동승하였다. 배는 아직 수복되지 않은 전라도 海岸에서 상당이 멀리 나간 航路(항로)를 잡았다. 풍랑이 거세졌다. 배는 파도위의 낙엽처럼 흔들렸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23세이던 金 선생은 갑판에서 마스트를 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제게 사명이 있다면 살려주십시오.”
그 뒤 풍랑이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인천항에 들어갈 때는 바다가 잔잔하고 하늘은 맑았다. 경비정 선장이 실토하였다.
“엔진이 꺼지지 않아 살았습니다.”

수술실로 가는 病床(병상) 위에서 金 선생은 그때 기도를 생각하였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신 덕분에 60년을 덤으로 살았습니다. 그 동안 강연, 집필, 인터뷰 등 각종 행사와 활동을 약 5만 번이나 했어요. 책은 100권을 넘게 썼고요. 이만하면 되었다. 하나님께 더 부탁할 일도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수술하는 다섯 시간 동안 저는 잠시 죽었던 거죠.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났습니다. 죽음과 삶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실감하였습니다. 돈 많은 富者(부자)나 권력이 센 사람에게도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오지요.”

金 선생은 “오늘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만나니 행복하다. 양심 있는 사람들을 알게 된 것은 내 생애의 축복이다. 인간은 인간을 믿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게 되면 세상이 무너진다. 시간은 영원한 것이고, 인간은 그 영원 속에서 잠시 머물다가 가는 존재이다”라고 덧붙였다. 金東吉 선생은 올해 84세이다.

金 선생은 찾아온 분들에게 관례대로 5000원짜리 한 장씩을 주었다. 5000원짜리는 색깔도 그렇고 액수도 그렇고 참 편안한 돈이다.

*10년 전인 2012년 1월1일 세배 풍경

오늘 아침 서울 신촌 金東吉 선생 宅을 찾아가 세배를 했다. 서재엔 손님들이 많았다. 세배를 한 사람들은 옆방으로 가서 맛있는 떡국을 먹었다. 金 박사는 어린이 어른 가리지 않고 1만원짜리 한 장씩을 세뱃돈으로 건넸다. 매년 5000원짜리였는데 "올해는 100% 인상하였다"는 것이다. 올해 한국나이로 85세가 된 金 박사는 2010년말 허리와 목 디스크 수술을 일곱 시간에 걸쳐 받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은 사명이 있으면 죽지 않는다. 자기가 원해서 사는 게 아니다"고 했다. 늘 낙관적이고 유머를 잃지 않는 金 박사는 김정일의 사망을 언급하면서 한반도의 大勢가 독재세력의 종말로 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韓民族이 위태위태하면서 여기까지 온데는 그래도 선비 정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선비정신이 뭡니까? 공부 많이 한 게 아닙니다. 물론 공부 많이 하고 머리도 좋아야지만 용기가 중요합니다. 선비정신은 正義를 위해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용기입니다."

金 박사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고려의 鄭夢周와 조선의 成三問을 든다. 그는 링컨이 남북전쟁을 사실상 유도해가면서도 美 연방을 수호한 '비타협적 정신'을 일종의 미국판 선비정신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은 세상을 내려다 보는 일종의 '우주적 감수성(cosmic sense)'을 가졌던 분들이라면서 김정은 장례식 때 '살기 위하여 울부짖는' 북한사람들을 보면서 김일성 3代 독재세력의 종말이 다가온다는 느낌이 든다고 이야기하였다.

캐나다에서 온 한 세배객을 향하여 金 교수는 "한국이 캐나다보다 더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니 두고 보라"면서 웃었다. 金 박사를 만나거나 연설을 들으면 늘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惡談 같은 신년사에 기분을 잡친 게 많이 풀렸다.

*몇년 전 金東吉 선생과 함께 기차를 타고 대전에서 열리는 강연장으로 가면서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삼성 그룹 창립자 李秉喆 회장을 수십 년간 모셨던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탄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늙은 기사는 金 박사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 한다.

"李秉喆 회장님은 삼성보다도 나라를 더 생각하신 분입니다."

1983년 12월 초 李秉喆 三星그룹 회장은 조선일보 鮮于煇(선우휘) 논설고문과 對談(대담)하였다. 필자가 정리하여 月刊朝鮮 1984년 1월호에 실었던 對談錄중 일부를 소개한다. 운전기사의 말이 실감 날 것이다.

李秉喆은 먼저 자신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재미 삼아 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가정에 돈이 많아 돈을 꼭 벌어야 할 사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놀기는 심심하고 갑갑하고. 그래서 사업을 하였는데, 이게 재미 있더란 말입니다. 재미, 그래서 재미 있게 살기 위하여 사업을 한 셈입니다."

그는 "한 십년쯤 사업을 하고 나니까 해방이 되어 이제는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사업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 7~8년이 지나니 이제는 나라에도 도움이 되고 人類(인류)에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뭐 돈에 욕심이 있다, 삼성을 키워야겠다, 그런 욕심이 없어졌어요. 나라 전체를 위하여 도움이 된다면 微力(미력)이나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현재 갖고 있어요. 제가 회의 때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삼성이 중요하냐, 국가가 중요하냐. 국가가 중요하다. 국가가 부흥하면 삼성 같은 건 망해도 또 생길 수 있다. 국가가 망하면 삼성은 영원히 없어진다. 그러니 국가가 우선이다. 그걸 투철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人生 최후의 도박으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나라 생각에서였다고 말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4000만 국민을 가진 우리나라가 어떻게 하든지 경제적으로 부흥이 돼야 우리나라가 유지되겠는데… 경제력 없는 국방, 정치는 무의미하다, 물론 국방 없는 경제도 있을 수 없지만… 4000만 국민을 가장 잘 관리할 수 있는 데 제가 미력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게 뭐이냐고 고심했십니다. 제가 5년 더 살지, 10년 더 살지 모르겠지만… 제가 유전 공학, 반도체 이렇게 찾아보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반도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십니다.

반도체 산업이 없다는 건, 이거 석유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이 첨단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될지 안될지 모르지만 가부간 이걸 맹글어 봐야겠다, 그것이 경영자의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한 게 암매, 작년(1982년) 여름이었지.

그걸 하려고 여러 가지로 반도체 산업 실태를, 조사를 해보았는데 구라파는 아주 쇠퇴해서 문제가 안 되고 제일 기술이 발전한 것이 미국이고 양산 체제로 제일 이익을 많이 보고 있는 것이 일본이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에 교섭을 해봤더니 설계 기술은 낼 수 있다고 해.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안되제. 기업이 이익을 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일본의 양산 기술을 교섭하게 되었십니다. 반도체는 로봇, 티비 등에 널리 쓰이는 데 이것을 기초로 해서 제2차 3차 제품을 맹글지요. 그런데 이것이 모자라서 각종 전자제품 만드는 데 지장이 있십니다. 안 준다고요. 사려고 해도 일본 사람들이 안 주어요. 이번에 그걸 알았는데. 일본에 교섭이 들어갔는데 어림도 없어요. 이들이 안준다는 이야기는 안해. 지금 바빠서, 어쩌고 하면서 자꾸 피합니다. 제가 20년 동안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NEC의 그 사람… 그래서 제가 농담을 했십니다.

지금 바쁘다는 데 언제 끝나느냐, 10년 걸리는가, 20년 걸리는가. 그랬더니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건 아니지만 하는데 속으로는 한국 네까짓 게 무슨 반도체냐, 냉소하는 것이 비쳐. 환하게 보이더라고. 화나게 됐제… 그렇지요? 지는 우리를 무시하고 나는 또 지를 무시한다, 그게 부딪쳤어. 애… 반년 이상 갔제, 아매. 더 적극적으로 나갔지. 대사관에 부탁한다, 일본의 政客(정객)을 동원한다, 각료회담에 의제로 삼는다, 심지어 頂上(정상)회담에까지 정부에서 이 문제를 갖고 논의하고… 그래도 안 돼요. 아무래도 일본 기술이 와야 하는데 설계 제조 기술은 미국이 쥐고 있거든요. 업계, 政界(정계) 동원하고 이만저만 힘쓴 게 아닌데 그것만은 안된다는 게야. 그러다가 다행히 일본에 샤프라는 회사를 찾았제. 이 회사는 방침이 기술을 전부 공개하고 다른 데 파는 거예요. 돈받고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기술을 널리 보급하자는 게 그 회사의 社風(사풍)인 깁니다.

기술을 사가지고 간 쪽에서 돈을 벌어야 좋아하고 안 벌면 싫어하는 이상한 회사라. 여기에 교섭이 들어갔제. 몇 달 시간을 달라는 거에요. 그 동안 여러 가지 애로 사항이 참 많았십니다. 교섭하는 게 탄로가 났어요. 샤프가 아주 곤란하게 됐지. 기자들이 찾아가서 왜 너그만 주려고 하느냐, 딴 업자들로부터도 공박을 많이 받았지요. 國賊(국적)이다, 그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그 이야기 듣고도 샤프에서는 태연해. 기술을 줄 테니까 당분간 좀 조용히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기술은 얕은 기술이지. 그래도 우리에게는 필요하고. 그리고 미국에서 또 고급 기술이 들어오고 해서 일단 기술 도입은 성공했십니다."

좌편향 한국사 교과서엔 노동운동가 전태일과 관련된 기사는 많지만 李秉喆은 완전히 무시하여 이름 석 자가 실리지 않았다.

*2003년 10월

오늘 오후 2시부터 서울 잠실 향군회관 2층 대강당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주로 60대, 70대의 노인들이 장내를 꽉 메웠습니다. 한 800명으로 추산되었습니다.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 대령연합회장)가 주최한 이 모임에 나온 분들의 인상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순박하고 건강하며 아직도 젊은이들 못지 않게 투지가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일부 철부지 젊은이들도 결국은 대한민국 품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절로 들었습니다.

이날 연사로 나온 金東吉교수는 명언들을 남겼습니다.

'간첩을 안 잡는 나라는 앉아서 죽기로 결심한 나라이다.'
'대한민국은 아무 뜻이 없는 나라가 아니다.'
'나는 살 만큼 살았는데 김정일 세상 아래서야 어찌 살겠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니 무서운 것이 없다.'
'우리 조국은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사명이 있는 개인은 죽지 않고, 사명이 있는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李東馥 연사(전 남북고위급회담 대변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정일은 절대로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은 핵개발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한미동맹을 파괴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 정부가 지금처럼 동맹국 미국에는 반대하고 북한정권 편을 들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것이다. 한미동맹은 와해되고 북한 핵무장은 허용하고.'

'김정일 정권이 요구하는 체제보장이란 것이 뭣인지 알고나 하고 받아주자고 하는가. 김정일이 요구하는 체제보장의 핵심은 미국이 북한정권에 관한 적대자세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이는 주한미군의 주둔 이유를 없애려는 속셈이다. 한국정부는 이것을 미국이 지지하여야 한다고 졸라대는데 한미동맹을 해체하고 자살하자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제 늙은이의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젊은이들을 찾아내 밀어주고 키워주어야 한다. 특히 20, 30대를 우리 편, 즉 대한민국 편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저도 강사로 나섰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애국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손발과 지갑과 머리로 하는 것이다.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체력 있는 사람은 거리로 나가서, 머리 좋은 사람은 슬기로써 구체적인 행동을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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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선생은 1980년대 김대중, 김영삼을 향해 은퇴하고 낚시나 하라는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1987년 김영삼 총재를 만났을 때 이런 질문을 했다.

―두 金씨는 권력욕이 너무 강하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많은데요.

'흔히 정부에서 나와 김대중씨에게 정권욕에 사로잡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영원히 자기들이 정권 잡겠다는 말하고 똑같습니다. 남이 잡으면 정권욕이고, 그거 참 부끄러운 말인데 우째 사용하는지 모르겠어. 남이 잡으면 정권욕이고 지가 잡으면 정권욕 아닌가.'

―그 정권욕이라는 게 사실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참 한심한 일이지. 안 잡고 있는 사람은 욕심 있다고 하고 즈거들은 그럼 뭐야, 잡고도 안놓고.'

―金東吉교수가 兩金씨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낚시나 하라는 낚시론을 신문에 쓴 다음에 만난 적 있습니까.

'안 만났어요.'

―기분이 어땠습니까.

'김대중씨는 기분 나빠 하더군요.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요. 나나 김대중씨라고 절대 욕 안먹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비판받는 것도 좋지요. 그렇게 생각해서 여러 사람 있는 데서 코멘트 안했어요. 그런 사람 있을 수 있지 않나 그런 정도 생각했지요.'

―김동길씨와는 친합니까.

'친하지는 않지만 잘 알지요. 그의 누님 김옥길씨와 잘 압니다. 우리 딸 梨大 다녀 학부형이기도 하고, 우리집 애들과 거기 가서 저녁에 냉면도 먹고 점심도 먹고 했지요. 연금 해제되고 수안보에 서너 번 갔습니다.'

―김동길씨와 합석했나요.

'가끔 했지요.'

―김동길씨가 쓴 거 기분 좋지는 않죠.

'좋을 리는 없지만 굳이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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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학산 2022-10-06 오전 11:44

    드릴 말씀은 아니오나,
    이왕 94세까지 정정하셨으니
    상수(上壽)라도 채우지 않으시고......
    극락왕생하소서

  • naidn 2022-10-05 오후 12:08

    너무나 존경스러운 애국실천가시며
    따뜻한 인정이 넘치셨던
    영원한 신사
    김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 bestkorea 2022-10-05 오전 10:14

    많은 지혜와 유머 웃음과 함께
    기쁨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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