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서장은 시위 현장에 있었다
사고 당일인 10월 29일 오후 6시 조선닷컴이 올린 기사는 용산경찰서장이 그날 신경 쓴 곳은 이태원이 아니고 용산 대통령실 주변일 수밖에 없었으리란 점을 짐작게 한다.
기사는 지난주에 이어 29일 오후에도 광화문과 용산 등 서울 도심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있고 보수·진보 성향 단체들이 이른 오후 광화문 일대에서 집회를 마치고, 대통령실이 있는 서울 용산구로 행진하면서 도심 교통체증이 용산 일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날 오후 5시쯤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일대 도로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 노총 공공부문 공동대책위원회 행진으로 통제돼 있었고 반대편 차선에선 신자유연대가 이들에 대항해 맞대응 집회를 열고 있었다.
신자유연대는 그날 오후 4시부터 삼각지역 11번 출구 앞 인도와 3개 차로 140여 m를 점거하고 집회를 진행했다. 집회 진행자는 “곧 있으면 민주노총이 온다”며 “국민들은 윤석열을 지지한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자”고 했다.
조선닷컴 기자는 신자유연대 측과 공대위 측 간의 집회 방송 음량 대결이 시작됐다고 전했다. 경찰은 집회 소음이 계속해서 커지자 방송으로 이를 줄여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임재 용산경찰서장은 이태원이 아니라 시위 현장에 있었다. 이태원에 인파가 몰려도 평화적 행사를 하는 사람들이라 사고가 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대통령실 주변으로 몰려드는 좌우 진영 시위대가 더 걱정되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태원 사고를 막지 못한 직접 원인을 현장에 나가 있는 경찰의 태만으로 몰았는데 경찰은 사고 당일의 광화문·용산 시위 관리에 수천 명의 경찰력이 집중되어 대응 능력이 분산된 점을 더 무겁게 보려고 할 것이다.
‘예상하기 어려웠던 사고’
지난 11월 7일 《한겨레》는 용산구의 한 설렁탕집 및 인근 가게 CCTV 에 잡힌 용산서장을 소개했다. 이임재 서장은 밤 9시24분 설렁탕집으로 들어왔고 식사는 밤 9시44분 끝났다. 이 신문은 “식사를 하던 도중 이태원 현장이 긴급 상황이라는 보고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그러나 식사 중이나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다급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받은 긴급 상황 보고도 압사 사건이 아니라 인파가 많이 몰렸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사고 이후에 되돌아보고 그때 ‘인파=압사 위험’이라고 판단했어야 한다고 비판은 할 수 있겠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유형(類型)의 압사가 그 순간 일어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1959년의 부산공설운동장 압사 사건, 그 이듬해 서울역 압사 사건, 그리고 최근의 인도네시아 축구장 압사 사건은 군중이 달리다가 밟혀 죽은 사고였다. 이런 사고를 영어권 언론은 ‘stampede’라고 하는데 이태원은 ‘crush’라고 했다. 오렌지 주스를 짜낼 때처럼 군중이 압착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예상하기 어려운 사고였다.
《한겨레》는, 밤 9시45분 서장의 관용차 운전기사가 먼저 식당을 나와 골목에 주차됐던 차를 빼 식당 앞으로 댔고 서장은 밤 9시47분 웃옷을 벗은 채 맨 마지막으로 식당을 나왔으며, 식당 직원은 “(이 전 서장 등이) 따로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식사를 시킨 뒤 평범하게 먹고 나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식사 중 무전을 받기도 했느냐’는 질문에는 “그런 건 없었다”고 했다.
《한겨레》는 “이 전 서장은 참사 당일 밤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 관리를 마친 뒤, 함께 업무를 본 정보·경비 과장과 늦은 저녁 식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서장은 그날 피곤하고 배고픈 상태였을 것이다.
언론, 용산서장이 뒷짐 지고 걸었다고 힐난
그는 관용차를 타고 10분 뒤인 밤 10시쯤 녹사평역 근처에 도착했으나 교통정체로 이태원 현장에 진입할 수 없었다. 사고 15분 전의 일이다. 차는 여러 우회도로로 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서장은 오후 10시55분에서 11시1분 사이 사고 현장 근처인 앤틱가구거리에서 차에서 내려 걸어서 이태원 파출소로 갔다. ‘녹사평역에서 걸어서 약 15분이면 사고 현장인 이태원역까지 갈 수 있는데 왜 차 안에서 40분을 더 보냈느냐’는 게 언론의 힐난(詰難)이다.
차 안에서 사고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지시를 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연합뉴스TV가 공개한 CCTV 영상을 보면 오후 10시59분 한 무리의 인파가 앤틱가구거리를 지나고 있었고, 그 뒤를 걸어가는 서장의 모습이 나온다. 이때 뒷짐을 지고 한가하게 걸었다고 또 비판을 받았다. 그는 밤 11시5분경 이태원 파출소에 도착했고 3층 옥상으로 올라가 현장을 보며 사고 대응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경찰청 특별감찰팀은 서장이 당일 행적을 허위 보고했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용산경찰서 상황보고서에는 사고 발생 5분 뒤인 밤 10시20분 현장 인근에 도착했다고 적혀 있다는 것이다.
용산서장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여당의 실력자 장제원 의원은 지난 7일 세월호의 이준석 선장과 비교하며 “참사를 고의로 방치한 것 아닌가. 언론에 드러난 상황을 보면 업무상 과실치사로, 살인 방조 세월호 선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며 긴급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인 그는 윤희근 경찰청장을 상대로 “‘검수완박’ 때문에 경찰이 경찰을 수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1차적으로 참사 현장 관할 서장의 책임을 밝히는 게 첫 순서다. 그런데 이임재 이분의 수상한 행적은 미스터리 수준”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용산서장은 1시간20분 동안 뭘 하고 서울청장에게 11시36분에 보고를 하나. 제정신인가.”
10월 29일 전 누가 “40m 좁은 골목에서 156명이 깔려 죽을 확률과 핵미사일이 서울 상공에서 폭발할 가능성 중 어느 것이 높을까”라고 물었다면 나는 후자(後者)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11월 초 북한이 신경질적으로 미사일을 쏘아대는 가운데도 윤석열 정부는 핵 민방위 훈련을 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안보 태업을 따라가고 있다.
핵·미사일 대비 훈련은 대통령 책임
2017년 12월 19일 김부겸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은 국회 재난안전대책특별위원회에 나와 ‘북핵 대피 훈련을 할 경우 국민들 사이에 위기감, 불안감을 조장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아래는 당시 김부겸 장관이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과 나눈 질의응답 일부다.
〈강효상: 최근 북핵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미국의 선제타격 얘기가 지금 거론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선제타격 시에 예상되는 북한의 보복 공격 시에, 우리 정부도 대비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그런 대책이 있습니까?
김부겸: 위원님 말씀하신 게 워낙 파장이 큰 문제여서 저희가 비상대비계획이라고 계획은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정부가 집행에 옮기기에는 너무 부담이 큰 문제입니다. 사실 이런 토론은 국회에서 조금 일어나서 국민들이 그 논의를 지켜보면서 국민들이 그 상황을 납득해주시고 그런 필요성을 공감할 때에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정부가 나서서 오히려 여러 가지 위기감을 조장한다든가 이런 국민들 사이에 큰 오해나 불안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위원님께서 말씀하신 그건 국회에서 좀 토론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자 김 장관은 2019년 1월 초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 발언의 취지는 정부는 비상대비계획을 갖고 있으나, 북한의 핵공격을 상정한 정부의 대응과 훈련은 국민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이에 따른 파장이 큰 사항이므로 국민과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추진하겠다는 의미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전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매월 하는 민방위 훈련에서 핵·미사일 대피 훈련에 역점을 기울여 실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제대로 해야 하고, 모든 국민이 대피 장소를 숙지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정부 방침에는 변화가 없었다.
만약 김정은이 핵미사일을 발사, 서울 주민 10만 명이 죽었다고 치자. 윤석열 정부가 일본 정도의 대피 훈련만 했어도 그중 5만 명은 살릴 수 있었다며 윤 대통령이 제2의 세월호 선장처럼 살인방조를 했다는 비판을 장제원 의원이 할지 모른다.
세월호 사고 수사의 再版이 안 되어야
이태원 사고 수사가 세월호 사고 때처럼 무리할 경우, 그 부담은 윤석열 정부로 돌아갈 것이다. 세월호 사고 때 박근혜 대통령은 ‘해경 해체’라는 무리수를 두고, 검찰은 무리한 기소를 하여 무죄(無罪)선고가 많이 나왔다. 권력이 경멸과 원한을 동시에 산 것이다.
작년,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초동 대처를 잘못해 세월호 승객 445명을 숨지거나 다치게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이 1심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김 전 청장을 포함해 이 사건으로 기소된 해경 전·현직 간부 10명의 ‘구조 실패’ 혐의에 대해서도 전부 무죄를 선고했다. 일부 간부가 초동 대처 관련 기록을 사후 조작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했다. 그간 검찰·감사원 등 7개 기관이 8차례에 걸쳐 세월호 관련 조사와 수사를 벌인 바 있다.
법원은 김석균 전 청장 등 해경 지휘부의 기소 사실에 대해 “업무상 과실에 대해 유죄가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사후의 전지전능적 시각을 배척한 것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세월호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49분 침몰하기 시작했다. 해경은 오전 8시52분쯤 이 사실을 알게 됐고 오전 9시30분 전후로 해경의 구조 헬기와 선박이 침몰하는 현장에 도착했다. 승객을 구조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은 오전 9시50분쯤까지로 해경에 주어졌던 구조시간은 사실상 20분 정도였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재판부는 “당시 세월호와 직접 교신한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파악한 것 이상으로 상황을 알 수 없었던 김 전 청장 등으로서는 결정이 쉽지 않았고, 세월호 선원이 승객들에게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상황까지 예상할 수 없었다고 보인다”고 했다.
재판부는 세월호 사고에서 많은 사상자를 낸 원인에 대해 선장·선원의 무책임뿐만 아니라 세월호의 침몰 속도가 배의 구조적 결함 때문에 예상보다 빨랐다는 점도 지적했다.
재판장은 선고 말미에 “세월호 사고는 모든 국민께 큰 상처를 준 사건이었고, 여러 측면을 살펴야 하고 법적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며 “재판부 판단에 여러 평가가 있을 것이 당연하고, 그에 대해서는 판단을 지지하든 비판하든 감수하겠다”고 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