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참전을 비판하고 한국전 참전을 긍정한 미국 반골기자 핼버스탐 추억!

戰後 한국의 발전을 명치유신이나 '라인강의 기적'보다 더 높게 평가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탐 기자는 미국 언론계의 전설적 인물이다. 그는 뉴욕타임스 특파원으로서 초기 월남전을 취재, 퓰리처상을 받았고, 전쟁을 망친 미국 엘리트 관료들을 비판하는 책을 써서 출세했는데 놀랍게도 한국전을 다룬 遺作에선 180도 다른 평가를 했다. 그는 戰後 한국의 기적적 발전을 일본의 명치유신이나 유럽의 戰後 부흥보다 더 극찬하면서 미군과 한국군 장교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흥분조로 썼다.

*2007년 4월25일, 핼버스탐의 事故死 소식을 듣고 쓴 글

방금 전 CNN 뉴스 자막에서 '핼버스탐 기자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이란 글이 나갔다. CNN 기사를 검색했더니 이 老기자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 언론학 전공 학생이 모는 차를 타고 가다가 충돌당한 차속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향년 73세였다. 핼버스탐 기자의 부인은 '남편은 동료하고는 그렇게도 경쟁적인데 후배 젊은 기자들에겐 그렇게 너그러울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핼버스탐 기자는 버클리에서 '저널리즘의 기술'에 대한 강연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변을 당했다. 기자는 10년 전 하버드 대학의 니만 프로그램에서 연수할 때 20세기의 미국 정통언론을 대표하는 이 대기자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써두었던 기사를 인용한다.

<니만 세미나에 초청된 연사 중에는 [최고의 천재들](The Best and The Brightest)의 著者 데이비드 핼버스탐 기자도 있었다. 니만의 책임자인 빌 코바치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핼버스탐을 [금세기 최고의 기자]라고 소개했다. 마침 그때 기자는 케네디 스쿨에서 [역사로부터의 추론](Reasoning from History)이란 과목을 수강하고 있었다. 1963년에 있었던 월남 대통령 고 딘 디엠 축출 쿠데타를 다루는 시간에 교수는 [누가 고 딘 디엠을 죽였는가]라는 문제를 칠판에 쓴 다음 이름을 써내려갔다. 미국 CIA, 월남 장군들, 케네디 대통령, 당시 국무부 차관 힐스맨, 당시 駐사이공 미국 대사 헨리 캐보트 롯지…

이런 명단들 가운데 핼버스탐의 이름이 들어갔다. 당시 20대 후반으로서 뉴욕 타임스 월남 특파원이었던 핼버스탐은 월남 정부의 부패와 이런 정통성 없는 정부를 지원하는 미국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이 보도로 1964년에 그는 퓰리처賞을 받았다. 핼버스탐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젊은 기자들이 쓴 反고 딘 디엠 기사가 미국의 여론을 움직여 케네디 정부가 그를 제거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키가 거의 1백90㎝나 될 것 같은 핼버스탐은 아직도 반골기질이 강한 사회부 기자 같았다. 앉자마자 그는 요사이 미국 방송국의 보도 경향을 경멸조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그처럼 피상적이고 그림을 중시하는 보여주기 위주의 보도행태가 과연 저널리즘으로 불릴 수 있는가 하는 개탄이었다. ABC의 프로그램을 지칭하여 민망할 정도로 비판하는데 그 ABC의 프로듀서인 테리가 참다 못해 손을 들더니 '선배 기자가 이런 자리에 와서 한다는 말씀이 동료들에 대한 비판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핼버스탐은 더욱 목청을 높이더니 '그러면 당신은 그런 보도를 하는 사람이 기자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취지로 한바탕 비판을 쏟아부었다. 옆에서 구경하면서 나는 [저러니 발로 뛰어 대작(大作)을 쓰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핼버스탐은 하버드대학의 학보사 기자 출신이다. 테네시州의 지방지에서 출발하여 뉴욕 타임스에 발탁되어 갔다. 10여 년간 근무한 뒤에 1967년엔 월간 잡지 하퍼誌의 전속기자로 옮겼다. 1968년에 그는 이 잡지에 [맥 조지 번디의 비싼 교육]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왜 천재들은 거지들에게 패했나

번디는 30代에 하버드 대학의 학장을 지낸 정치학자로서 역시 하버드 출신인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서 안보 보좌관으로 발탁되어 월남전에 관한 전략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하퍼誌 기사는 번디 같은 천재가 어떻게 월남전 확대 같은 바보짓을 할 수 있었던가에 대한 심층취재였다. 이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핼버스탐은 케네디가 발탁했던 당대의 천재들이 어떻게 월남전을 이 지경으로 몰고갔는가 하는 주제로 결정판적인 책을 써보겠다는 충동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쓰는 데 4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취재에 2년 반, 집필에 1년 반. 그는 취재와 집필 기간 중에 자신의 기명(記名)이 신문과 잡지에 나오지 않게 되는 그 고독과 소외감이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기자는 하루하루 숨가쁘게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자신을 불태우면서 이 사회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그로 해서 유명해지곤 하는 쾌감으로 살아가는 직업인이다. 핼버스탐은 이런 저널리즘의 세계로부터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파티에 참석하면 '요사이는 뭘 하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취재하고 있는 책에 대해서 설명하노라면 그들은 흥미를 잃고서 눈동자가 희미해지는 것이었다'

핼버스탐은 그러나 취재 그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에 평균 두 사람씩을 2년 반 동안 거의 매일 인터뷰했다고 한다. 신문기자 시절에는 인터뷰가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이었는데 마감시간과 지면의 제약에서 벗어나니 서너 시간 계속되기도 하는 인터뷰가 좋은 교육이 되더라는 것이다. 핼버스탐은 [나는 역사가 내어 뿜는 흥분에 감염되었다. 나는 과거가 잡아당기는 힘을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은 월남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 과정과 실패를 분석한 책으로는 가장 많이 팔렸고 지금도 팔리고 있는 고전(古典)이다. 1972년에 간행되어 양장제본으로 약 20만부, 페이퍼 북으로 약 150만부가 팔렸다. 이 책의 판매에 공헌한 것은 [The Best and The Brightest]란 제목이었다. 이 문구는 이제는 미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상용(常用)되는 단어가 되었다.

핼버스탐은 케네디가 끌어 모았던 주로 하버드 대학 출신의 일류 엘리트를 이런 신조어(新造語)로 지칭했다. 이 책의 주제는 그러한 천재들이 어마어마한 과학병기를 동원하고서도 왜 촌로(村老)같은 호지명(胡志明)과 교장선생님처럼 생긴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거지같은 정글 게릴라에게 패배했느냐 하는 물음이다. 그 물음에 대해서 30년만에 답한 사람이 월남전을 지휘했던 당시 국방장관 맥나마라로서 2년 전에 자서전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의 실수는 월남의 역사와 민족성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개입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월남전에의 본격적인 개입을 결정한 1965년 여름 존슨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록을 읽어보면 미군의 전쟁수행 능력에 대해서만 논의하지 월맹측의 상황에 대한 진지한 검토는 없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제1조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다]는 무시되고 있다. 이는 英美계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감과 여기에서 비롯된 자기 중심적인 思考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핼버스탐은 [최고의 천재들]에서 당시 미국의 對월남전을 지휘했던 엘리트들이 가진 약점을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주재하는 최초의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나온 부통령 린든 존슨은 자신의 정치적 대부(代父)인 샘 레이번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장관들이 그렇게 명석할 수가 없어요. 누가 더 머리가 좋은지 분간하기 어려운데 내 생각으로는 맥나마라가 최고인 것 같아요'
한때 미국의회를 주름잡았던 레이번은 점잖게 충고한다.
'린든, 자네 말이 맞을지 몰라. 다 모두 똑똑한 사람들이겠지. 그러나 말이야, 그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보안관으로 출마해서 당선된 경력이 있다면 다소 안심이 될 텐데 말일세'

군사력 對 정치력

핼버스탐은 레이번의 이 지적이 핵심을 찌른 것이라고 했다. 머리만 좋은 이 엘리트들은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선거를 치른 사람들이 체득(體得)하는 인간관계나 인간심리에 대한 통찰력도 결여된 사람이었다. 상아탑이나 최고경영자의 사무실에서 길들여진 안목과 감(感)으로 월남전을 치르다 보니 역사, 문화, 민족성, 혁명적 정열, 희생정신과 같은 무형적 요소에 대해서는 등한하게 되었다. 수치화할 수 있는 병력수, 폭탄투하량, 병참, 전사자수, 무기 생산량 같은 지표를 기준으로 해서만 전쟁을 생각하니 그들에게 있어서 월남전쟁은 컴퓨터로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숫자놀음이었다.

미국 엘리트의 이런 함정을 간파한 것이 핼버스탐이었다. 그는 1967년 월남을 방문했을 때 월남전의 본질적인 성격을 정확히 파악했다. 월남전은 미국의 군사적 우월성과 월맹측의 정치적 우월성 사이의 대결인데 시간은 월맹측의 편에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미국은 언젠가는 철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전투에서는 이기고 있었지만 월맹은 즉각 인명손실을 보충할 수 있어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하는 아주 결정적인 부문에서는 항상 미군에 대하여 우위에 서 있었다.
맥나마라의 수학 對 지압의 심리학이 대결한 꼴이었다. 1969년 2월 이탈리아의 인터뷰 전문기자 올리아나 팔라치가 월맹의 국방장관 보 구엔 지압과 나눈 대화는 핼버스탐의 문제의식과 그 궤(軌)를 같이 하고 있다. 지압은 '미국은 앞으로 10년, 또는 15년간이나 월남에 60만 대군을 주둔시킬 수는 없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데 그러려면 괴뢰정권, 그것도 강력한 괴뢰정권을 남겨놓고 가야 하는데 이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 월남 괴뢰정권은 미국의 노예로서의 가치도 없다'라고 했다.

'미국은 모든 것을 달러로 해결하려고 한다. 자주독립 정부도 달러만 투입하면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산수 같은 전략은 여기서 먹히지 않는다. 미군은 달러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인민의 정신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군인의 머리수는 이곳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25대 1, 6대 1, 3대 1이니 하는 병력비율은 의미가 없다. 이 전쟁은 全인민이 그들과 싸우는 전쟁이다. 全인민이 들고일어났을 때는 이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몽골군대도 세 번이나 물리쳤다. 모든 전쟁 수단에서는 그들이 앞섰지만 우리는 저항했고 견뎠으며 우리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모든 인민이 함께 싸워야 한다. 13세기에 유효했던 것이 20세기에도 유효하다. 문제가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월남 사람이기 때문에 모두가 뛰어난 전사들인 것이다'

지압은 당시 파리에서 진행되고 있던 평화회담에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모든 것은 군사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미국은 제2의 디엔 비엔 푸를 겪게 될 것이다'고 예언했다. 지압은 또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얻어야 한다는 식은 아니다. 우리는 타협에 의한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평화는 완전한 승리, 즉 미군의 완전 철수를 뜻한다'라고 못박았다.>

핼버스탐 기자는 20여권의 책을 남겼다. 언론과 야구를 다룬 책도 있고 자동차 회사, 1950년대를 해설한 책도 있다. 2002년에 쓴 '평화 속의 전쟁'은 퓰리처 상 심사 때 차석을 했다. 권력과 사실을 파고든 그의 용기와 열정도 자동차 사고를 당하진 못했다. 명복을 빈다.


*遺作에서 한국전과 전후 발전을 극찬하다!


핼버스탐 기자가 교통사고로 죽기 전에 완성한 원고가 그해 책으로 나왔다. 제목은 《가장 추운 겨울-미국과 한국전쟁》(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Korean War)였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엔 월남전 비판으로 유명해진 그가 한국전을 좌파적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을까 하는 선입견을 가졌다. 읽어보니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는 《가장 추운 겨울》의 결론 부분에서 한국의 전후(戰後) 발전에 대하여 최상급의 찬사를 보낸다. 읽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의 칭찬인데 물론 사실과 부합한다. 그는 한국의 발전은 마셜 플랜에 의한 유럽의 부흥보다 더한 성공이라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유럽을 재건하기 위한 미국의 경제원조는 독일, 프랑스 등 이미 산업적 전통의 기반이 있는 나라에 준 것이었다. 한국은 정치적, 문화적, 산업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전란(戰亂)으로 폐허가 된 가운데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였기에 더욱 빛난다는 것이다.

그는 개화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잠재력을 간파한 점에 주목하였다. 교육에 대한 유교적 존중심, 잘살아 보려는 열망, 제한된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는 능력, 그리고 일본인에 못지않은 근로 윤리. 하지만 이런 잠재력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제약으로 구현될 수가 없었다. 해방과 전쟁으로 미국이 한반도에 등장함으로써 이 숙명이 깨진다.

한국을 괴롭혔던 주변 국가와 미국은 달랐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한국에 대한 무지(無知)였다. 오히려 이 점이 도움이 되었다고 핼버스탐은 평한다. 미국은 한국 땅에서 기꺼이 자국(自國)의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정복자로 온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지도하에서 한국은 처음엔 군사적으로, 다음엔 기술적으로, 그 다음엔 산업적으로 근대화되기 시작하다가 민주화까지 이르게 되었다.

핼버스탐은 한국전을 계기로 커진 장교단이 이런 놀라운 속도감으로 전개된, 혁명과 진화가 혼합된 한국형 근대화의 주체세력이었음을 높게 평가한다.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를 본딴 한국의 사관학교 교육이, 젊은이들을 모아서 능력 위주로 가르치고, 사회적 제약을 돌파할 수 있는 개혁 세력으로 키워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장교단이 새롭고 현대화된 사회를 만들어낸 요람이었다고 했다. 어떤 의미에선 새로운 한국을 이끌 새로운 계급이기도 하였다.

“장교단이 근대화 개혁의 주체 세력”

그들은 먼저 군대를 개혁하였다. 그들을 가르친 미국 장교들의 영향이 컸다. 한국군 장교단은 계급사회 속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개인적 자유를 누렸다. 그들은 교육, 사회, 경제, 그리고 정치를 근대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에서 최초의 결정적 발자국을 내디뎠다는 것이다. 장교단 주도의 근대화는 한국인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국제무대에서 경쟁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가 밀어주었다. 핼버스탐은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근대화보다도 더 큰 성공이라고 평한다. 일본의 성공엔 전례(前例)가 있었지만 한국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1960, 70년대 한국의 발전은 역경(逆境)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위대한 교훈을 남긴 경이로운 인간 드라마>라고 표현하였다. 한국 현대사의 발전 속도는 너무나 빨라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李承晩)까지 퇴장시키고 달려갔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李 박사를 존경하지만 역사가 그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런 사태 발전을 지켜본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핼버스탐은 한국의 민주화에 끼친 미국의 영향 중 하나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미국에 유학간 한국 학생들은 충성스러운 시민이 되는 것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국에 충성하면서도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는 점을 배운 것이다.”

19세기에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감지(感知)할 수 있었던 한국인의 장점들-어려운 일을 해내는 능력, 엄청난 규율, 그리고 교육에 대한 열정이 거국적(擧國的) 차원에서 폭발하면서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대세(大勢)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눈부신 발전으로부터 득을 본 이들이 바로 미국의 한국전 참전자였다. 한국을 찾은 그들은 자신들이 싸워서 지켜준 나라의 발전에 놀라면서 자랑스러워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의 감사에 감동하였다. 미국에서 받아본 적이 없는 감사를 한국에서 확인하였으니.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