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14년 침묵 깬 수사 책임자 이인규 회고록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14년간 침묵했던 수사책임자 李仁圭 대검 前 중수부장, 회고록 통해 정면승부에 나섰다! 문재인 정조준!!



*"이 부장, 시계는 뺍시다. 쪽팔리잖아."(노무현 검찰 출석 때)
*"문재인은 노무현의 주검 위에 거짓의 제단을 쌓아 대통령이 되었다"
*'문재인은 노무현을 변호하는 의견서 한 장 낸 적이 없고, 자살 직전 7일간 곁을 비운 무책임한 변호인이었다.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한 희생양으로 검찰을 공격하고 있다.'
*'논두렁 시계'에 대한 오해: 피아제 시계 두 개를 뇌물로 받은 것은 사실이고 노 전 대통령이 '밖에 버렸다'고 한 것도 사실
*박연차로부터 640만 달러 받은 것 확인. 미국 주택구입 자금으로 100만 달러를 받은 것이 심리적 결정타

*노무현의 자살은 종북좌파 세력을 되살리고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5년간 대한민국을 체제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이었다. 이인규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장은 이 사건의 진실을 국민들에게 보고할 역사적 책임을 진 사람이고 책쓰기를 통하여 그 책임을 완수한 셈이다.


趙甲濟(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핸드폰 벨 소리

토요일 이른 아침. 핸드폰 벨 소리가 그를 깨웠다. 임채진(林采珍) 검찰총장의 전화였다. 이 아침에 무슨 일일까?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이 부장! 날세. 노 대통령이 새벽에 등산 나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상태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았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떻게 절벽에서 떨어졌습니까?”
“부산지검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르네. 지금 사무실에서 봄세.”
경호원이 있었을 텐데 절벽에서 떨어지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는 옆에서 잠을 깬 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사무실에 나가 보아야겠다고 말했다.
‘최악의 상황은 없어야 할 텐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부인에게 “별일 없을 거야”라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사실 이 말은 그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도망자 프레임

이인규(李仁圭) 대검 중수부장은 2009년 5월23일 노무현(盧武鉉) 자살 직후 검찰을 떠나 법무법인 바른에서 변호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2017년 5월10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대표 변호사가 그의 사무실로 찾아와 “세상이 바뀌었으니 로펌을 나가 달라”고 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로펌을 그만두느냐”고 거절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캠프 핵심 인사에게 들었는데, 당신은 꼭 손을 보겠다고 합니다. 같이 죽자는 말이오?”
말문이 막혔지만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文在寅) 정권에 잘못 보인 죄로 로펌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돌아 국내에서 변호사 활동을 계속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는 중소기업중앙회 법률고문으로 홈앤쇼핑의 주식회사 설립에 관여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홈앤쇼핑의 사외(社外)이사를 지내기도 했었다. 어느 날 중소기업중앙회 간부로부터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이인규 변호사와 관련된 홈앤쇼핑 자료를 모두 제출해 달라’고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홈앤쇼핑 대표이사 강남훈(姜南焄)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 강 대표는 경찰 수사를 받는 등 핍박을 받다가 탁월한 경영실적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회사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검찰·경찰은 홈앤쇼핑을 수사해서 李 변호사와 관련된 비리를 찾으려고 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자, 별건수사로 강 대표를 취업 비리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1심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까지 되었다. 2020년 10월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데 이어 2021년 4월29일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강 대표는 그때 받은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무고한 사람들이 가깝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는 것을 지켜보며,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해 2017년 8월25일 2년 예정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더니 일부에선 그에게 ‘도망자’ 프레임을 씌웠다.


이젠 진실과 마주할 때


미국에 사는 일부 좌파인사들은 그가 식당에서 가족과 식사하는 장면을 몰래 찍어 한국 언론에 제보하고, 살고 있는 아파트 안 현관문 앞까지 들어와 인증샷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거나, 아파트 앞에서 “‘논두렁 시계’로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수사를 받으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미국에 유학 중인 딸의 신상털이를 하고 페이스북에 “살인자의 딸, 노 전 대통령을 죽인 대가로 공부하는 것임을 명심하라”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인규 변호사는 <이러한 광기에 찬 행동들은, 문재인 변호사가 '운명'에서 “말투는 공손했으나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고 나에 대해 소위 ‘좌표’를 찍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인규는 당하면서도 글을 썼다. 이 사건 관련 공소시효(15년)가 완성된 직후에 발간하기로 결심했다. 532페이지 책이 되었다.

역사를 위한 정면승부

이인규의 이 책은 역사의 진실을 위한 정면승부이다. 그 결과로 노무현의 신화가 무너지고 문재인의 위선이 벗겨져도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은 진실과 마주할 시간이고, 사실보다 위대한 진실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결정한 책 제목부터가 진검승부이다.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조갑제닷컴)
그는 책을 쓰면서 실명(實名)을 원칙으로 했다. 동료, 선배를 가리지 않고, 호불호(好不好)를 따지지 않고 사실에 충실했다. 교정과 편집 과정에서 그처럼 철저하게 확인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검사 시절의 그를 만난 적이 없는 나는 책을 만들면서 "아, 이런 검사였겠구나"라고 짐작하면서 대한민국이 그런 검사를 24년간 가졌다는 것은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주도한 굵직한 수사들로 해서 이 나라 지도부가 상당히 깨끗해질 수 있었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부패한 정치권력과 돈많은 사람들, 이른바 거악(巨惡)을 수사대상으로 삼는 특수부 검사의 표상이 될 만한 인물이지만 상처가 있다. 이 책은 아직 아물지 않은 그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아물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검사생활을 수필류가 아닌 본격적인 기록물로 정리한 이는 이인규 검사가 처음일 것이다. 한국 부패 구조의 저수지 역할을 해온 재벌과 권력의 결탁을 정조준한 수사로 역사적 결과를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긴장감이 넘친다. 단편적 언론보도로는 드러나지 않는 검찰 내부의 수사 비화(秘話)는 드라마적 요소가 있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과 재벌의 유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는 국가적 과제이기도 했었다. 이인규 검사가 SK 그룹 분식회계 수사를 통하여 단서를 확보, 기획과 실무를 책임졌던 2002년 대선자금 수사는, 선거를 매개로 한 권력과 재벌의 유착을 단절, 한국의 정치부패를 몇 단계 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의 두번째 큰 수사인 노무현 전 대통령 건은 피의자의 자살로 한국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는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 책은 강골검사가 2000년대의 시대적 고민을 정면돌파하면서 상처 받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그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약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특수부 검사로 유명하지만 주미 한국 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2년 여를 근무하는 등 6년6개월 동안 국제업무에 종사,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인데 특히 미국 공무원들과 상대하면서 청렴한 공직 자세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이회창을 낙선시킨 검찰의 김대업 비호 수사

이인규 검사는 이 책에서 노무현 당선에 기여한 검찰의 수사 비화(秘話) 하나를 소개한다. 2002년 대선 국면에서 김대중 정권 검찰 내 특정 인맥이 사기꾼 김대업 관련 수사로 이회창 후보의 낙선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일종의 폭로이다. 그해 7월 김대중 대통령은 고향이 같은(전남 신안) 김정길(金正吉) 전 법무장관을 다시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민주화 이후 같은 정권에서 두 번 기용된 이는 처음이라고 한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병풍(兵風) 공작을 위한 인사라고 비판했다. 저자(著者)는 법무부 검찰 1과장으로서 인사실무를 맡고 있었다. 김대업 사건 담당 박영관 서울지검 특수1부장은 신안 출신으로 '검찰 호남 인맥의 핵심 중 한 사람'이었다.
박 부장은 2001년 6월경부터 2002년 2월경까지 사기죄로 복역 중인 김대업을 검찰청으로 불러 수사보조요원으로 병역 비리 수사에 활용했다. 김대업이 병무 비리 수법 등을 잘 알고 있어 수사에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정도(正道)가 아니었다. 김대업은 병역 비리 수사를 보조하면서 수사관 행세를 하기도 했고, 검사실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해 8월 검찰 인사를 앞두고 이인규 검사는 그런 박 부장이 대통령 선거라는 민감한 시기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을 수사하는 것은 공정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장윤석(張倫碩) 검찰국장과 상의했는데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 검사는, 박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이 계속해서 병역 비리 수사를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논란거리가 될 뿐 아니라 선배님에게도 좋지 않으니 이번 인사에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박 부장은 “나도 수사에 지쳐 지방에서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내일 아침 일찍 기자실에 가서, 이번 인사에서 떠나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선배님에 대한 인사가 기정사실화될 것이고, 이번 인사에서 고향 근처에 있는 큰 규모의 지청장으로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박 부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
“이 과장, 미안하게 되었는데, 윗사람하고 상의해 보았더니 너 혼자 살겠다는 것이냐고 핀잔만 들었다.”
“제가 선배님께 기자실에 가서 이동 사실을 말해 달라고 했지 윗분들과 상의해서 하라고 했습니까?”
“미안하다. 없던 일로 하자.”
이 검사와 김각영 차관은 야당이 박영관 부장을 지목, 공세를 펼치고 있으니 인사발표를 하루 늦추자고 김정길 장관에게 건의했다. 일단 승락했던 장관은 밤 늦게 청사로 돌아와 인사발표를 지시했다. 박영관 특수1부장은 유임되었고, 그는 쉽게 결론을 낼 수 있는 김대업의 황당한 주장을 수사하는 데 시간을 끌었고 결과 발표도 문제였다.

역사에 큰 오점 남긴 ‘병풍’ 수사

2002년 10월25일 서울지검 정현태(鄭現太) 3차장검사는 김대업이 제기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에 대해 이를 사실로 인정할 근거와 증거가 없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수사의 출발점이 된 1·2차 녹음테이프에 대한 감정 결과, “성문(聲紋) 분석을 했으나 판독 불능이며, 편집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업은 1999년 3~4월경 녹음테이프에 이회창 후보 아들 이정연에 관한 병역 비리 진술을 옮겨 담았다고 주장했는데, 그 녹음테이프는 1999년 5월12일과 2001년 10월10일 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전과자가 제기한 근거 없는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엄청난 수사력을 낭비한 것이다.
검찰은, 병풍 의혹에 대해 무혐의로 결론을 내리면서도 김대업을 감쌌다. 한나라당과 김대업 간 맞고소·고발 사건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했으며, 김대업의 사법처리도 추후 결정하기로 했다.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에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특히 발표 과정에서 “이정연이 당시 체중을 고의로 감량한 증거는 없지만 병무청 직원 등과 접촉하면서 체중으로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해 노력했을 가능성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것은 문제였다.>
증거는 없는데 가능성은 있다? 수사 결과 ‘혐의 없음’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왜 하는가? 저자는 <이는 검찰이 예단(豫斷)을 가지고 수사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고 비판했다.
수사 결과가 발표된 후에도 한나라당은 ‘병풍 공작’의 배후를 밝혀야 한다고 추가 수사를 요구하고 나섰고, 민주당은 특검제 도입과 ‘1000만인 서명운동’ 재개 방침을 밝히는 등 정치권의 공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검찰이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업의 허위 병역 비리 의혹 제기 및 KBS, MBC 등 언론의 대대적 보도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지지율이 10%p 이상 추락해 2002년 12월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약 2.3%p 차이로 낙선했다. 이 검사는, <김대업의 의혹 제기는 허위 사실로 국민의 정당한 투표권 행사를 침해한 사건이었고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면서 <박영관 특수1부장은 본인의 검사 경력은 물론 대한민국 역사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고 했다.
그때 박 부장을 교체하고 다른 검사로 하여금 불편부당하게 수사하게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검사는 <대통령 선거가 김대업의 허위 주장에 영향을 받는 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고 했는데 당락이 바뀔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2002년 대선 자금 수사는 한국 정치부패의 뿌리를 잘랐다

요사이 대기업 간부들을 만나 보면 이인규 검사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인정하는 게 있다. "그때는 대선자금 수사로 혼이 났지만 그 뒤 돈 달라는 정치인이 없어져 편하다"는 것이다. 2003년 이인규 검사가 대선자금을 준 대기업 수사를 처음으로 밀어붙일 때 "이렇게 하면 경제가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던 이들도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의 정치부패는 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 6년 뒤의 노무현 수사는 대통령의 부패에 대하여 한국 사회의 눈높이가 그 사이 달라진 것과도 관계가 있다.
하지만 2003년 대선 자금수사의 가장 큰 수혜자는 '우리가 받은 돈이 한나라당 불법자금의 10%를 넘기면 사퇴한다'고 승부수를 던졌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만남에선 그런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인규 검사는 서울중앙지검 형사9부장이던 2002년 12월 YTN 뉴스를 보다가 힌트를 얻어 SK 부당거래 수사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SK가 2002년 대선 때 여야(與野)에 자금을 뿌린 단서를 잡았다. 그는 SK 수사를 반대하는 노무현 정권 및 검찰 수뇌부와 맞서는데 송광수 신임 검찰총장의 결단으로 대선자금 수사를 SK, LG, 삼성, 현대차 등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그는 원주지청장으로 있으면서 대검 중앙수사부 기업수사팀장으로 파견되어 삼성 등 10개 대기업 의 불법대선 자금제공 사실을 밝혀냈다).
SK 수사는 검찰 역사상 최초의 살아 있는 재벌에 대한 수사였으며, 기업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고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기업과 국가의 신인도를 제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주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재벌의 경영 행태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최후의 勝者는 노무현

여야를 불문한 2002년 대선 불법자금 수사를 통해 검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약점을 많이 알게 되어 정치적 중립성 및 수사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검찰 수사에 간섭하려고 했다면, 검찰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쳐 파국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물론 대통령의 절대적 권력을 고려하면 이판사판 검찰 수사에 개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이용해 내 생살을 도려내 주고 정적(政敵)의 목을 칠 요량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노무현 대통령보다는 야당인 한나라당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2004년 4월15일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50.83퍼센트를 얻어 156석으로 원내 제1당이 되었다.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덮어쓴 한나라당은 40.46퍼센트로 12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로써 노무현 정권은 안정적인 국정 운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대법관 출신으로 국민에게 대쪽 이미지로 알려졌던 이회창 후보는 부패한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재기불능이 되었다. 노 대통령 자신도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검찰에 약점을 잡힌 셈이 되어 검찰에 이래라저래라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영(令)이 안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적을 죽이기 위해 나의 팔다리를 하나쯤 내어준 것에 불과했다. 바둑으로 치면 「위기십결(圍棋十訣)」 중 ‘사소취대(捨小取大)’에 해당한다.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라는 전장(戰場)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승자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이 검사는, 노 대통령은 재직 중 내란·외환죄를 제외하고는 기소당하지 않는 특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회창 후보는 기소해야 했었다고 생각한다. 불법 자금 수수 액수가 더 많은 李후보의 불기소는 盧대통령을 의식한 것으로, 그 순간 노 대통령의 처벌도 (퇴임후에도) 물 건너간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피아제 시계와 640만 달러

이 책의 부제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는 자신을 좌표 찍었던 문재인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노 전 대통령 수사는 대한민국의 정의와 법질서 수호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검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당시 수사 기록은 영구보존 중이니, 수사를 지휘했던 나 자신의 개인적 명예는 물론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위해서도 더 이상 거짓에 침묵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국민의 알 권리, 올바른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도 이제 진실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다>고 선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뇌물 수수 혐의 등 사건은 본인, 부인 권양숙, 아들 노건호, 딸 노정연, 조카사위 연철호, 총무비서관 등이 관련된 가족비리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도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2억원이 넘는 명품시계를 받고, 아들 등의 사업자금 명목으로 뇌물 500만 달러, 미국에서의 주택구입자금으로 140만 달러를 받는 등 개인비리 혐의가 主이다. 수개월 간의 수사로 박연차 회장의 진술은 사실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반박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검찰이, 사실을 감추면서 언론전을 펴는 노무현을 상대로 숨바꼭질 같은 수사를 하면서 복잡하게 되었지만 그의 죽음 때는 사실관계가 거의 정리되었다.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이번 책에서 수사의 최종상황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1.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피아제 남녀 시계 세트 2개(시가 2억550만 원)를 받은 사실은 다툼이 없고, 이 시계는 재임중(2006년 9월경)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뇌물로 전달되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2. 권양숙 여사가 2007년 6월29일 청와대에서 정상문 총무비서관을 통하여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100만 달러, 그해 9월22일 추가로 홍콩에 있는 임윙 계좌로 40만 달러를 받은 사실은 인정된다. 박 회장의 진술 등 각종 증거를 종합하면 노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와 공모, 아들 노건호의 미국 주택 구입 자금 명목으로 140만 달러를 수수(收受)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
3. 2008년 2월22일 노무현 대통령 재임 때 아들 노건호, 조카사위 연철호가 박연차로부터 500만 달러를 받았고, 노건호 등이 이를 사용한 것은 다툼이 없다. 이 돈은 박연차 회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 주기로 약속한 환경재단 출연금 50억 원을 500만 달러로 쳐서 노건호 등의 사업자금 명목으로 준 뇌물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4. 2006년 8월경 정상문 총무비서관이 박연차로부터 현금 3억 원을 받은 사실은 다툼이 없고 정 비서관은 기소되어 유죄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관여하였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5. 정상문은 2004년 11월경부터 2007년 7월경까지 사이에 자신이 관리하던 대통령의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횡령하고 국고를 손실한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확정 판결을 받았다. 단독 범행 주장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과 정 비서관이 공모한 범죄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6.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직후인 2008년 3월20일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이자 연7%, 변제기한을 2009년 3월19일로 하여 15억 원을 빌린 사실은 다툼이 없다. 차용증 작성 사실에 비추어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7.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소, 유죄를 받아낼 수 있는 충분한 물적 증거를 확보했다.


"문재인은 노무현의 주검 위에 거짓의 제단을 쌓아 대통령이 되었다"


저자(著者)는 수사기록을 읽어본 적도 없는 문재인 변호사가 무슨 근거로 "수사기록이 부실하다"고 단정하는지 어이가 없다고 썼다. 그는 변호인으로서 무능했던 문재인이 노무현 자살 직후엔 검찰 수사에 대하여 원망도 비난도 하지 않다가 정치를 결심하면서 돌변, 검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다. "문재인은 노무현의 주검 위에 거짓의 제단을 만들어 대통령이 되었다"고도 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무책임했으며 이것이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한 원인이라고 했다. 文 변호사는, 수사 책임자인 자신은 물론 수사팀 누구도 찾아오거나 연락을 해온 적이 없었고, 노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사실을 주장하고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서 한 장 제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극단적 선택 직전 1주일 동안 文 변호사는 盧 전 대통령을 찾지 않았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미국 주택 구입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자신의 거짓말이 드러나는 등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고 하소연할 만큼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른바 진보언론은 그를 가혹하게 비판, 저주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가까운 사람들 모두 등을 돌리고 믿었던 친구이자 동지인 문재인 변호사마저 곁에 없었다. 이것이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비극적 선택을 하기 직전 노 전 대통령은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형국이었다>고 표현했다. 당시 검찰 수뇌부의 방침은 '불구속 기소'였고 이 방침을 노무현 전 대통령도 알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구속되지 않더라도 남은 것은 법정에서 날카롭고 집요한 검찰의 공격에 구차한 변명을 하는 일뿐이었다. 유죄판결이 날 경우 최소 10년 이상의 징역을 사는 것 외에 뇌물로 받은 640만 달러를 몰수 추징당하고, 뇌물 수수액의 두 배 이상 다섯 배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도 있었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노 전 대통령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이인규 전 검사는, 문재인 변호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1주일 동안 곁을 비운 점을 지적한다. 문재인 변호사는 '운명'에서 '굳이 가야 할 현안이 없었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주택을 구입한 사실을 확인하고, 자금 출처 조사를 하고 있었으며, 5월24일엔 권양숙 여사를 부산지검으로 다시 불러 조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文 변호사는 '현안이 없어서' 봉하마을에 가지 않았고 아무런 변호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인규 전 검사는 권양숙 여사에게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몰아붙이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고 멍에를 씌우는 것이라고 썼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을 권양숙 여사의 탓으로 돌린 노무현의 변호 전술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라고 혹평했다. 그가 2009년 4월7일 '사람세상'을 통하여 "저의 집(주-권양숙)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입니다"고 권양숙 여사의 뒤에 숨은 게 더욱 집요한 검찰 조사를 불러 전직 대통령 자신을 수렁에 깊이 빠뜨린 결정적 전략미스라고 했다.

'문재인은 변호를 맡지 않았어야!'

*문재인 변호사는 노무현이 '사람세상'을 통하여 수사중인 혐의에 대하여 거짓말로 검찰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검찰이 이 거짓말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피의사실 공표 논란에 휘말리고 더욱 철저하게 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이나 계좌추적은 하지 않았다.
*이 전 검사는 문재인이 노무현의 죽음 직후인 2009년 6월1일 한겨레 신문과 한 인터뷰에서는 검찰 수사를 원망하고싶지 않다고 해놓고 2년 뒤 '운명'에선 검찰이 증거 없는 수사를 했다는 식으로 표변한 것을 집중비판했다.
<도대체 문재인 변호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인으로서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제대로 된 변호전략도 없이 검찰을 비난하고 막무가내로 범죄를 부인한 것밖에 없다. 검찰을 찾아와 검찰의 입장을 묻고 증거관계에 대한 대화를 통해 사실을 정리해 나갔더라면 노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재인 변호사의 말과 행동에선 검찰에 대한 증오심이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변호를 맡지 않았어야 한다. 어떻게 증오하는 대상과 수사관련 문제를 논의하고 선처를 부탁할 수 있겠는가.>
정상문 전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기 전 검찰에서 "이렇게 부인해서 될 일이 아니다. 변호사를 통해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방안을 건의하겠다"고 말했고, 일이 터진 후 진작 그러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면서 힘들어 했다고 한다.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저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좋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혐의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면서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지키는 방향으로 진술하였다면 형사처벌 수위도 낮아지고 검찰과 사실관계를 놓고 다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신속하게 수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가장 부끄러운 혐의'가 된 '노건호 미국 주택 구입 자금 명목 100만 달러 수수(收受)'도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했다면 검찰이 굳이 미국에서 집을 샀느냐의 여부는 확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40만 달러를 추가로 받은 사실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100만 달러를, 빚을 갚기 위하여 빌렸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검찰은 "빚을 갚기 위하여 외화를 빌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면서 더 철저한 수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주택구입 과정과 40만 달러 추가 수수까지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李 전 검사는 노무현 죽음 직후 '정치적 타살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던 문재인 변호사가 그 2년 뒤의 책에선 '정치적 타살이나 진배 없었다'고 말을 바꾼 것은 대통령으로 출마,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친구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과거 자신의 말까지 뒤집어가면서 검찰에 대해 정치적 타살 운운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고 표현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주검 위에 거짓의 제단을 쌓고 슬픔과 원망과 죄책감을 부추기는 의식(문재인의 '운명' 발간)을 통해 검찰을 악마화하고 지지자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에게 '정치는 하지 말라'고 했다던 노 전 대통령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의 죽음으로 문재인 변호사가 후에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사의 시작은 국세청의 박연차 조사


이인규 전 검사는 노무현 수사는 검찰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2008년에 있었던 국세청의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 세무조사와 이에 따른 검찰고발이 출발점이었다고 썼다. 국세청은, 2008년 7월30일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을 동원한 강도 높은 태광실업 세무조사, 그해 10월 노건평이 경영하는 정원토건 세무조사로 확인한 박 회장의 세금포탈 혐의를 검찰에 고발하고 수집한 자료를 넘겼다. 박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가 청와대의 지시인지 국세청의 자체 판단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청와대는 박연차 회장 고발 사건이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정치인들의 금품 수수 사건으로 확대될 것임은 알았을 것이라고 했다. 저자가 2009년 1월 중앙수사부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중수부는 박연차 회장 등을 구속기소한 상태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의 계기는 국세청이 검찰로 보낸 자료 중 '500만 달러 송금 지시서'였다. 박연차는, 검찰이 '박 회장 아들에게 송금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자 "노 대통령 아들 노건호 등의 사업자금으로 넘겨준 것"이라고 실토했다. 이인규 신임 중수부장은 전임 수사팀으로부터 노 전 대통령의 시가 2억 원 상당 명품 시계 수수와 500만 달러 수수 자료를 인계받고 수사를 계속해나갔다. 그는 "전직 대통령의 재임중 금품 수수 비리를 발견하고서도 이를 수사하지 않는다면 검사로서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부장으로 있던 우병우(禹柄宇)를 수사주임 검사로 데리고 온 것은 자신이 법무부 검찰 1과장으로서 인사를 맡았던 경험상 그가 청렴하고 강직하며 유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법무부는 禹 검사를 정책기획단장으로 기용하려고 했으나 李 중수부장의 반대로 뜻을 접었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는 선동"

저자는, “검찰이 무리한 수사로 압박해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비판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
*“검찰이 노 전 대통령 피의사실을 공개했다” — 노 전 대통령은 수시로 자신의 ‘사람세상’ 홈페이지를 통해 피의사실 중요 내용을, 허위 사실을 포함해 공개하며 여론몰이에 나섰다. 노 전 대통령이 피의사실을 ‘셀프 공표’했고, 이에 따라 언론이 취재와 보도에 나선 것이다.
<수사 진행이 검찰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게 된 것이다. 검찰의 당초 계획은 모든 수사를 다 마친 후에 마지막으로 노 전 대통령 수사를 하려고 했던 것인데 스텝이 꼬인 것이다. 더 이상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미룰 수 없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보안을 우려해 박 회장의 진술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 특별하게 수사를 진행시키지 않고 있었다. 검찰이 갑자기 바빠졌다.>
*“검찰의 정치적 수사였다” — 검찰이 인지(認知)한 수사가 아니고 국세청이 박연차의 탈세혐의 조사중 발견한 증거들을 검찰에 넘김으로써 수사에 착수할 수 밖에 없었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수사 초기부터 이인규 중수부장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불구속 수사 방침을 지시했고 "총장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는데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망신 주려고 ‘논두렁 시계’ 지어냈다” — 박연차가 노 전 대통령에게 2억원이 넘는 고급 시계 2개를 선물한 것은 사실이다. 노무현이 그 시계를 밖에 버렸다고 한 것도 사실이다. 검찰 수사 기록 어디에도 ‘논두렁 시계’라는 표현은 없다. 이것은 최초 보도한 SBS가 처음 쓴 말로, 그 배후에 국정원과 이명박 청와대가 있을 개연성이 매우 크나, 당사자인 SBS는 취재 경위를 밝히지 않고 있다.
*“신문(訊問)을 직접 담당한 우병우 중수1과장이 ‘노무현 당신은 대통령도 아니고…’ 운운하며 모욕했다“ — 신문에 함께 한 문재인 당시 변호인이 노 전 대통령 타계 직후 인터뷰에서 “조사하는 검사들도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충분히 했다”고 인정했고, 2017년의 기자간담회에서도 “그런 발언은 없었다”고 재확인했다. 2009년 4월 30일의 피의자 신문 과정은 고스란히 CCTV로 녹화되어 영구보존 중인 수사 기록에 첨부됐다.

"이 부장, 시계는 뺍시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09년 4월30일 노무현 전 대통령 조사과정을 생생하게 소개했다. 이인규 중수부장은, 대검 7층 집무실 앞에서 노 전 대통령을 맞아 안으로 안내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는 "먼 길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안타깝습니다"고 인사한 뒤 부산 근무 시절의 인연을 꺼냈다고 한다.
“1983년 겨울 제가 부산지방검찰청에서 검사직무대리로 수습 중일 때, 대통령님께서 제가 맡은 업무상과실치사사건의 변호인이셨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사무실로 찾아와 수사 기록을 열람하고 돌아가신 일이 있었지요….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는 저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고 한다.
“이 부장! 시계는 뺍시다. 쪽팔리잖아.”
저자는 당황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무어라 답변해야 좋을지 난감했다고 한다.
이인규 중수부장은, 집무실 컴퓨터에 연결된 CCTV 화면으로 11층 특별조사실에서 우병우 검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신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검사들은 신문과정에서 '대통령님'이라 했고 철저히 준비하여 '심리적으로 압도했다'고 썼다.
우 검사가 “왜 생활비를 달러로 빌렸습니까? 100만 달러를 어디에 사용하였는지 내역을 제출해 주실 수 있습니까? 100만 달러를 (과테말라행) 출국 전날 받았고, 원화가 아닌 달러로 받은 것으로 보아 빚을 갚기 위해 빌린 것이 아니라 노건호의 미국 주택 구입 자금으로 받은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노무현은 충동적 답변을 한다.
“검사님! 저나 저의 가족이 미국에 집을 사면 조중동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시계는) 처가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9월27일 형 노건평을 통하여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2억 원대 피아제 시계 두 개를 받은 혐의에 대하여 '퇴임후 형 노건평의 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사실을 4월22일 KBS 9시 뉴스 보도 후 아내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고 했다. 박 회장이 노건평을 통하여 대통령 생일선물로 준 시계를 노건평의 처가 1년5개월 동안 갖고 있다가 퇴임 후 전해 주었으며 권 여사는 이 사실을 1년 넘게 남편에게 숨겼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인규 부장이 보기엔 "너무 작위적이어서 설득력이 없었다."
李 중수부장은, 퇴임 후에 받은 것으로 만들어 직무 관련성을 흐리려는 거짓말로 본 것이다. 우병우 검사는 "박연차 회장이 2007년 봄경 대통령 관저 만찬에서 노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감사 인사를 받았다고 진술했다"고 해도 "그런 기억이 없다"고 부인했다.
곁에 있던 문재인 변호사는 "김해공항 검색 직원 등을 조사해보면 노건평이 시계를 가지고 비행기에 탔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는데 이 장면을 모니터로 지켜보던 저자는, "어이가 없었다"고 썼다. 노건평도 검찰에서 권양숙 여사에게 시계를 전달했고, 동생에게도 이 사실을 말했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우병우 검사는 같은 종류의 시계 사진을 보여주며 "이 시계가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우 검사가 "시계를 제출해주십시오"라고 하자 노 전 대통령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처가 이 사건 수사가 시작된 후 겁이 났던지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고 했다. '논두렁'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감옥 가면 통방합시다"


2009년 4월 30일 오후 11시경 조사가 거의 끝날 무렵 우병우 과장이 “대통령님과 박연차 회장 두 사람의 진술이 중요 부분에 차이가 있어서 대질하겠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질을 거부했다. 문재인 변호사도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아니고,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거들었다. 범행을 부인하는 피의자는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오히려 대질을 해 달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피의자 입장에서는 대질신문을 거부할 경우 수사기관에 무엇인가 숨기고 거짓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어, 특별히 불리한 상황이 아니라면 대질 거부는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이인규 부장은, 우 과장에게 메신저로 지시했다.
"대질은 무산되었지만,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을 만나게라도 하라."
노 전 대통령은 이것까지 거절하기는 어려웠는지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잠시 후 박 회장이 변호인인 공창희(孔昌喜) 변호사와 함께 조사실로 들어왔다. 박 회장은 뒷짐을 진 상태로 걸어 들어오면서 원망 섞인 목소리로 노 전 대통령에게 말했다.
“대통령님! 우짤라고 이러십니까!”
“박 회장! 고생이 많습니다. 저도 감옥 가게 생겼어요. 감옥 가면 통방합시다.”

사실보다 위대한 진실은 없다!

저자는 노무현의 대응전략이 그 자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누구의 조언을 받았는지 몰라도(물론 그 자신 변호사이기도 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피의자 방어권’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구차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시인하라는 것이 아니다. 피의자의 방어권을 포기하라는 것도 아니다. 부인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검찰의 수사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인정할 것은 인정했어야 한다. 국민 앞에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했어야 한다. 형사처벌을 받게 될 위험에 처할 수 있었을 것이나 적어도 비굴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인규 변호사는 책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간 큰 책임이 이른바 진보언론의 저주에 가까운 비판에도 있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이 개인 홈페이지 ‘사람세상’에서 수사내용을 '셀프 중계'한 후부터 검찰에 출석해 수사를 받고 돌아간 직후까지 계속해서 그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쏟아졌는데, 특히 <미디어오늘>·<한겨레>·<경향> 등 이른바 진보 언론의 강도가 훨씬 셌다.
*<“지도자답게 산화하라”, “당신이 죽어야 이 땅에 민주주의와 사회정의가 부활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노 전 대통령의 자진(自盡)을 강요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한때 자신들이 지지했던 사람에 대해 어쩌면 이렇게 잔혹할 수 있는지, 인간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다.>
한 좌파 신문은, “노무현 당신 패밀리가 한 일로 민주화 세력이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받았으니, ‘알았느니 몰랐느니’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사라지라”고 했다. 저자는 묻는다. 칼럼의 마지막 문장 “자신이 뿌린 환멸의 씨앗을 모두 거두어 장엄한 낙조 속으로 사라지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적에게 받는 것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지지했던 사람들에게서 받는 비난이 더욱 가슴 아픈 법이다. 이들의 언사는 비판을 넘어 인격 모독이요, 저주였다. “노무현 당신 때문에 우리(진보 세력)가 망하게 생겼으니 죽어 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인규의 역사적 책임 완수

자살 이후 그를 비판했던 이른바 진보세력이 표변, 노무현 우상화에 골몰하고 있는 데는 비뚤어진 죄의식이 있을지 모른다. 그는 책의 끝에서 '사실보다 위대한 진실은 없다'는 제목을 달고 문재인 변호사의 책임을 재차 강조했다.
<노 전 대통령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의 자살을 막지 못한 문 변호사가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한 희생양으로 검찰을 공격하고 있다.>
이인규 전 검사는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될 선택이었다>고 썼다. 후세를 위해서도 미화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선진국에선 수사받던 피의자가 자살하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죽음을 택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동정부터 하고 보는 경향이라고 비판한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에도 수사는 계속되었으나 박연차 회장은 더 이상 협조하지 않았고 법무부와 청와대에서도 조기종결하라고 압박했다. 2009년 6월12일 이인규 중수부장은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혐의는 인정되지만 사망하여 공소권 없음 결정을 하였고 수사기록은 영구보존물로 지정한다.>
2009년 7월14일 이인규는 24년 6개월 동안의 대한민국 검사 생활을 끝내고 퇴임하였다. 그는 퇴임사에서 "부정부패 척결은 당위의 문제일 뿐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면서 "부정부패에 관대한 사회는 문명사회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불의와 부정부패에 대한 투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검찰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인규 변호사는 <내가 떠난 후 힘든 여건 속에서도 우병우 검사가 최선을 다하여 기소된 21명 중 19명에 대하여 유죄가 확정되었다>고 썼다.
노무현의 자살은 종북좌파 세력을 되살리고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5년간 대한민국을 체제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이었다. 이인규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장은 이 사건의 진실을 국민들에게 보고할 역사적 책임을 진 사람이고 책쓰기를 통하여 대한민국 검사로서의 책임을 완수한 셈이다.
그렇다면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답은 독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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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대한민국 검사 이인규

저자 이인규(李仁圭)는 1958년 1월 22일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했다. 경동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법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14기)을 수료하고 1985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0년 칠성파 두목 이강환 사건 등을 수사하여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수사 유공 표창을 받았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검찰연구관 등을 거쳐 1992년 미국 코넬 대학교 로스쿨(LLM 과정)에 유학하고, 워싱턴 주미 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근무하며 1998년 6월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법무부 검찰국 검찰4과장, 검찰2과장으로 근무하며 2000년 12월 한미 SOFA 형사재판권 분야 개정 협상, 2001년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입법 등을 주도했다.
‘검찰의 황태자’라는 검찰1과장을 거쳐 서울지검 형사9부장과 초대 금융조사부장으로 있으면서 SK 분식회계 사건 등 기업 수사로 ‘재계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2003년 서울지검 출입 기자단이 뽑는 ‘올해의 주임검사’에 선정됐다. 중앙수사부 불법 대선자금 수사 기업수사팀장으로 SK·삼성·LG·현대차·롯데·한화·대한항공 등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사실을 밝혀냈다.
대검 범죄정보기획관, 검찰미래기획단장을 거쳐 2006년 서울지검 3차장 검사로서 ‘황우석 가짜줄기세포사건’, ‘윤상림·김홍수 법조비리사건’등을 수사했다. 2006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대전고등검찰청 차장검사(2007년 검사장 승진), 대검 기획조정부장을 거쳐 2009년 1월 중앙수사부장으로 임명되어, 노무현 前 대통령이 포함된 세칭 ‘박연차 게이트’ 사건을 수사했다. 2009년 5월 노 前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한 직후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마무리하고 2009년 7월 검찰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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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인연과 악연
저자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악연까지는 아니더라도 짧지만 얄궂은 인연의 시작은 저자가 SK그룹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부당 내부거래 사건을 포착하고 최태원 회장을 구속하는 초강경 수사에 나선 2003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마침 김대중~노무현 정권인수기였고, SK 수사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대선 때 정치자금으로 137억 냈다”는 진술을 확보하자, 검찰은 저자를 수사팀장으로 하여 SK 외에 삼성·LG·현대차·롯데·한화·대한항공그룹 등 재벌들을 상대로 전방위로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확대한다. 책은 당시 수사가 “대한민국 고질병인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계기를 마련했다. 재계는 더 이상 정치자금을 달라는 요구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242쪽)며, 우리나라 정치자금 투명성 제고에 마중물이 되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대선자금 수사는 막 출범한 노무현 정권에는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문고리’ 최도술·여택수·안희정의 비리까지 터지자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10퍼센트 넘게 받은 것으로 나타나면 국민의 재신임을 묻겠다”는 폭탄 선언으로 강성 지지 세력을 결집시켰다(물론 “계산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은 것을 저자는 “내(노무현) 생살을 도려내고 적(敵)의 목을 치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로 평가한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노무현 대통령보다는 야당인 한나라당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돼지저금통 등 깨끗한 정치를 표방한 노 대통령도 구시대 정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대통령비서관 최도술·여택수 등이 검은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는 등 대통령으로서 권위에 상처를 입었다. 노 대통령 자신도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검찰에 약점을 잡힌 셈이 되었다. 자신의 비리로 인해 검찰에 이래라저래라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영(令)이 안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적을 죽이기 위해 나의 팔다리를 하나쯤 내어준 것에 불과했다. 바둑으로 치면 「위기십결(圍棋十訣)」 중 ‘사소취대(捨小取大)’에 해당한다.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라는 전장(戰場)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승자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제2장_16대 대선 불법 자금 수사, 243~244쪽)

그럼에도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 임기 후반기에 홍조근정훈장을 받고, 검사장으로 승진하며 이례적으로 임지(任地)까지 손수 고르라는 배려를 받는다. 법무부 검찰1과장 경험에 비추어 “노무현 대통령이 나의 검사장 승진에 관심을 갖고 배려를 한 것”이라 직감하면서, “불법 대선자금 수사 등으로 정권을 힘들게 했음에도 나를 검사로서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 아닌가 한다. 노 대통령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293쪽)고 술회한다.
인연의 끝은 다 아는 대로 악연이었다. 노 대통령은 퇴임 후 뇌물사건 피의자가 되어 저자가 부장으로 있는 대검 중수부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고, 20여 일 후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검사로서 승승장구하던 저자의 인생에도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4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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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위한 정면승부

이인규의 이 책은 역사의 진실을 위한 정면승부이다. 정면승부의 결과로 노무현의 신화가 무너지고 문재인의 위선이 벗겨져도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은 진실과 마주할 시간이고, 사실보다 소중한 진실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결정한 책 제목부터가 진검승부이다.
"나는 대한민국 검사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그는 책을 쓰면서 실명을 원칙으로 했다. 동료, 선배를 가리지 않고,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사실에 충실했다. 교정과 편집 과정에서 그처럼 철저하게 확인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검사 시절의 그를 만난 적이 없는 나는 책을 만들면서 "아, 이런 검사였겠구나"라고 짐작하면서 대한민국이 그런 검사를 24년간 가졌다는 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로 해서 이 나라 지도부가 상당히 깨끗해질 수 있었다는 점에는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동의할 것이다. 부패한 정치권력과 돈많은 사람들, 이른바 거악을 수사대상 삼는 특수부검사의 표상이 될 만한 인물이지만 상처가 깊다. 이 책은 아직 아물지 않는 그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아물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검사생활을 수필류가 아닌 본격적인 기록물로 정리한 이는 이인규 검사가 처음일 것이다. 한국 부패 구조의 저수지 역할을 해온 재벌과 권력의 결탁을 정조준한 수사로 역사적 결과를 만들어낸 이야기는 긴장감이 넘친다. 단편적 언론보도로는 드러나지 않는 검찰 내부의 수사 비화(秘話)는 드라마적 요소가 있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과 재벌의 유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는 국가적 과제이기도 했었다.
이인규 검사가 SK 그룹 분식회계 수사를 통하여 단서를 확보, 수사의 기획과 실무를 사실상 지휘하였던 2002년 대선자금 사건은 대선을 매개로 한 권력과 재벌의 유착을 단절, 한국의 정치부패를 몇 단계 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의 두번째 큰 수사인 노무현 전 대통령 건은 피의자의 자살로 한국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는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 책은 강골검사가 2000년대의 시대적 고민을 정면돌파하면서 상처 받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2003년 대선 자금 수사는 한국 정치부패의 뿌리를 잘랐다

요사이 대기업 간부들을 만나 보면 이인규 검사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인정하는 게 있다. "그때는 대선자금 수사로 혼이 났지만 그 뒤 돈 달라는 정치인이 없어져 편하다"는 것이다. 2003년 이인규 검사가 대선자금을 준 대기업 수사를 처음으로 밀어붙일 때 "이렇게 하면 경제가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던 이들도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정치부패가 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 6년 뒤의 노무현 수사는 대통령의 부패에 대하여 한국 사회의 눈높이가 그 사이 달라진 것과도 관계가 있다.
이인규 검사와 그를 뒷받침한 송광수 검찰총장의 작품이라고 할 만한 2003년 대선 자금수사의 가장 큰 수혜자는 "우리가 받은 돈이 한나라당 불법자금의 10%를 넘기면 사퇴한다"고 승부를 걸었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었지만 두번째 만남에선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인규 검사는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장이던 2002년 YTN 뉴스를 보다가 힌트를 얻어 SK 분식회계 및 부당거래 수사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SK가 2002년 대선 때 자금을 뿌린 단서를 잡았다. 그는 SK 수사를 반대하는 노무현 정권 및 검찰 수뇌부와 맞서는데 송광수 신임 검찰총장의 결단으로 대선자금 수사를 SK, LG, 삼성, 현대차 등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그는 원주지청장으로 있으면서 대검 중앙수사부 기업수사팀장으로 파견되어 수사의 실무를 지휘하였다). 그가 이 역사적 수사를 관철시킨 과정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검사와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인간적 반응이 흥미롭다.

최후의 승자는 노무현

여야를 불문한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검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약점을 많이 알게 되어 정치적 중립성 및 수사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검찰 수사에 간섭하려고 했다면, 검찰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쳐 파국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물론 대통령의 절대적 권력을 고려하면 이판사판 검찰 수사에 개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당시 이렇게 상상했다고 한다.

결국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이용해 내 생살을 도려내 주고 정적(政敵)의 목을 칠 요량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노무현 대통령보다는 야당인 한나라당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2004년 4월15일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50.83퍼센트를 얻어 156석으로 원내 제1당이 되었다.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덮어쓴 한나라당은 40.46퍼센트로 12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로써 노무현 정권은 안정적인 국정 운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대법관 출신으로 국민에게 대쪽 이미지로 알려졌던 이회창 후보는 부패한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재기불능이 되었다. 노 대통령 자신도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검찰에 약점을 잡힌 셈이 되었다. 자신의 비리로 인해 검찰에 이래라저래라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영(令)이 안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적을 죽이기 위해 나의 팔다리를 하나쯤 내어준 것에 불과했다. 바둑으로 치면 「위기십결(圍棋十訣)」 중 ‘사소취대(捨小取大)’에 해당한다.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라는 전장(戰場)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승자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이 검사는, 노 대통령은 재직 중 내란·외환죄를 제외하고는 기소당하지 않는 특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회창 후보는 기소해야 했었다고 생각한다. 불법 자금 수수 액수가 더 많은 李 후보의 불기소는 盧 대통령을 의식한 것으로, 그 순간 노 대통령의 처벌은 물 건너간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 2월20일경 김각영 총장이 SK글로벌 분식회계 수사 문제에 대해 의논하자고 유창종 서울지검장, 박영수 2차장과 나를 총장실로 불렀다. 총장실로 가기 전에 유 검사장과 박 차장에게 SK 측 요구가 말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SK글로벌 분식회계 수사 연기는 불가능하니 총장을 잘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오후 총장실에서 네 사람이 마주 앉았다. 불법 대북 송금사건 논의를 위해 만난 지 불과 보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다. 불편했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김 총장은 불법 대북 송금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수사를 유보하는 결정을 했다.
김 총장은 SK그룹이 변호인을 통해서 한 요구사항과 같은 취지로 말하면서, “수사와 기소를 늦추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누가 부탁을 해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단지 SK 측의 부탁만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론에서 이상수(李相洙) 민주당 사무총장이 검찰총장에게 전화했다고 하더니, 혹시 이 문제 때문이었나? 아무튼 새로운 집권 세력의 부탁을 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나는 강력하게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SK 측의 요구는 수사와 기소를 늦추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수사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0년간 분식액이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고, 그 액수도 4조 7000억 원에 이르러 해결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SK글로벌의 부도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 최태원 회장 일가 및 주요 임직원들은 주식을 처분하고 재산을 은닉하는 등 이익을 취하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선량한 투자자들만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SK글로벌의 분식회계에 대한 수사를 늦추는 것은 부당합니다.”
도와줄 것으로 기대했던 유 검사장과 박 차장은 특별한 언급 없이 듣고만 있었다. 김 총장이 다시 요구했다.
“나도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검찰 수사로 경제가 파탄 날까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니 다시 검토하라.”
나는 거듭 반대했다.
“형사9부 소속 검사나 직원뿐 아니라 금감원 파견 직원들도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실을 알고 있어서 보안 유지도 불가능합니다. 나중에 검찰이 SK 측의 로비로 분식회계 수사를 연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검찰 수사의 엄정성과 공정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것입니다. SK 수사는 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총장님, 지난번 대북 송금사건 유보 결정으로 검찰이 입은 상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며 강력하게 반대하니 김 총장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던지, “더 검토해 보라”면서 회의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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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금융감독원에 SK글로벌 분식회계 조사를 이첩하고 다시 고발을 받아 처리할 수는 없나?”
“이미 수사가 다 끝나서 그것은 불가능하며, SK 측의 설명은 과장되었고, SK글로벌 분식회계 사실이 공개된다고 해서 SK글로벌이 부도 처리될 수는 있어도 우리 경제 전체가 위기에 처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이미 2월27일 <한국일보>에서 ‘SK글로벌이 1조 4000억 원 회계 분식을 했다’고 보도했고, 조사를 받은 SK글로벌 직원 10여 명, 금감원 파견 회계사 8명, 수사팀 등 최소 50명 이상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SK글로벌 분식회계 수사를 연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사를 유보할 경우 ‘재벌의 압력에 굴복하고 재벌을 비호했다’는 등의 비난이 쏟아질 것입니다.”
말을 듣고 있던 김 총장이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러면 내가 사표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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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검사장 승낙까지 받았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바로 구속 중인 최태원 회장을 불렀다. 최 회장을 내 책상 왼쪽에 앉히고, 교도관더러는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최 회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가 최 회장에 대해 계속해서 수사할 경우 최 회장은 SK그룹의 경영권을 잃을 수도 있지요?”
“그렇습니다.”
최 회장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시 영국계 소버린자산운용그룹이 최 회장이 구속된 틈을 타서 지주회사 격인 SK주식회사 주식 14.99퍼센트를 매집해, 2대 주주가 되어 경영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1대 주주와의 보유 주식 수 차이도 얼마 되지 않았다. 경영권 분쟁으로 SK주식회사 주가는 급등했으며 불안한 상황이었다.
“최 회장에 대한 수사는 더 이상 확대하지 않을 테니, SK그룹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 제공한 불법 정치 자금 내역을 밝혀 줄 수 있겠습니까?”
최 회장은 내 말뜻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정치자금은 손길승 회장과 김창근 구조조정추진본부장이 상의해 처리했고 저는 사후에 보고만 받았습니다. 자세한 것은 김 본부장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최 회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 즉시 구치소에 있는 김창근 본부장을 내 사무실로 불렀다. 김 본부장은 최 회장이 먼저 와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역시 따라온 교도관은 밖에서 기다리도록 했다.
“나와 나눈 얘기를 김 본부장에게 말해 주세요.”
“김 본부장과 이야기를 좀 할 수 있도록 둘만 있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보는 앞에서 하세요.”
그들은 소파로 가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약 15분쯤 걸린 것 같다. 처음에는 김 본부장이 안 된다고 부정적인 의사를 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최 회장이 뭐라고 했는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설득이 된 모양이다. 최 회장이 나에게 “이야기가 잘 되었다. 협조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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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수사는 검찰 역사상 최초의 살아 있는 재벌에 대한 수사였으며, 재벌 오너의 편법 증여, 부당 내부거래를 수사해 처벌함과 동시에, 대기업의 국내 최대 규모 분식회계를 적발한 것이었다. 기업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고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기업과 국가의 신인도를 제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주가 아닌 대주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재벌의 경영 행태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SK 수사 직후 두산그룹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재벌 일가에게 편법적으로 저가 발행했던 신주인수권부사채(新株引受權附社債·BW: 발행 기업의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사채) 150억 원 상당을 무상 소각했고, 집단소송제 도입을 반대해 오던 전경련이 태도를 바꾸어 이를 수용하는 등 자발적인 재벌 개혁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불철주야 혼신의 노력을 다해 수사한 뛰어난 검사들이 없었더라면 SK 수사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검사들은 나의 지시가 없어도 스스로 찾아내 일하는 등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었다. 오랫동안 수사 업무에서 떠나 있어 부족한 점이 많았던 나를 믿고 따라 준 검사들에게 모든 공을 돌리고 싶다. 차동언·이석환·유일준·이동열·양호산·한동훈·이시원 검사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나는 덕이 부족하고 성격도 까다로워 함께 근무하기 편한 사람은 아니다. 나의 끊임없는 요구와 질책에 불평 한마디 없이 잘 따라 준 검사들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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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빤히 보고 있는 송 후보자에게 SK그룹의 대선 관련 정치자금 제공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SK그룹에서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에 100억 원, 민주당에 25억 원, 선거가 끝난 뒤 노무현 대통령 부산 캠프 인사에게 12억 원을 주었다고 합니다.”
송 후보자가 깜짝 놀라며 자세히 말해 보라고 했다. 진술을 받게 된 경위, 진술받은 선거자금 제공 내용, 손길승 회장실에서 압수된 9000억 원짜리 차용증서 등에 관해 자세히 보고했다. 보고를 받고 난 송 후보자는 “누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제가 김창근 본부장의 진술을 직접 녹음했고 문서로는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유창종 전임 서울지검장과 박영수 2차장에게 구두로 보고했으며, 서영제 검사장에게는 아직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보고하지 마시오.”
송 후보자는 나의 보고에 대해 걱정하거나 불편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의 태도에 적지 않게 안심이 되었다.
2003년 3월28일 국회 법사위에서 송광수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송 후보자는 예상대로 특별한 문제 없이 청문회를 통과하고 검찰총장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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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 중앙수사부는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가 끝난 다음 날인 2003년 10월7일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에 대해 10월10일 출석할 것을,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에 대해 10월13일 출석할 것을, 국민참여통합신당(가칭) 이상수 의원에 대해 10월14일 출석할 것을 각각 통보하였다”고 발표했다. SK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0월10일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인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소환 전에 사임)의 비리에 대해 대(對)국민 사과와 동시에, 재신임을 묻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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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은 2003년 11월3일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삼성·LG·현대차 등 다른 재벌로 확대하고, 원주지청장인 나를 중앙수사부 직무대리로 발령해 기업 수사를 맡긴다고 발표했다. 모든 언론에서 내가 SK 분식회계 수사검사로 최태원 회장을 구속시킨 것에 주목하면서, 수사 대상인 삼성·LG·현대차 등도 긴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나의 수사팀 합류가 이틀 연속 만평으로 나가기도 했다. <중앙일보> 김상택 화백의 만평이었다. 11월4일자 가판에 ‘천군만마’라는 제목으로, 내가 대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안대희 중수부장이 뛰어나오며 맞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아침 최종판에서는 만평이 교체되었다. 연이어 11월5일 ‘매 먼저 맞은 자의 여유’라는 제목으로, 최태원 회장이 부하 직원과 함께 전날 가판에 실렸다가 교체된 만평의 그 장면을 TV 보도로 보면서 “날 구속시켰던 애지?” 하며 삼성·LG·현대차·롯데 등 다른 그룹을 돌아보고 웃고 있는 모습을 그려 내보냈다. 나를 대선자금 수사팀에 합류시킨 사실만으로도 삼성·LG 등 대기업을 압박하기에 충분한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11월3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로 출근했다. 1991년 대검찰청이 덕수궁 옆에 있을 때 중수부에 근무한 적이 있고 이번이 두 번째 근무였다. 서울지검 금융조사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유일준·김옥민(金玉珉)·한동훈 검사와 수사관 2명, 금융감독원에서 파견된 김진성 검사역 등을 차출해 기업수사팀을 꾸렸다. 한동훈 검사는 천안지청으로 발령이 났으나 SK 수사와 재판 마무리를 위해 계속 서울지검 금융조사부에 남아 근무하고 있었다. 김진성 검사역은 기업회계 분석에 출중한 능력을 보유한 자원이었다. 그는 파견 직원이었음에도 검찰청에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으며 주말도 없이 일했다. “소신껏 일할 수 있어 금융감독원에서 일하는 것보다 검찰청에서 일하는 것이 더 즐겁고 보람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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