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由主義者 민경국 교수의 '歷史교과서 國定化 반대론'에 대한 반론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은 한마디로 말 안 듣는 좌파세력에 대한 苦肉之策이었다.

<주> 아래 글을 외부 <뉴스 사이트>로 옮기지 마십시오.

記者는 오랜 동안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의 주장을 비판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대한민국에서 反共을 폐기하자”는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궤변(詭辯)이었다.

이는 북한이 붕괴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실상 국보법을 폐지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는 주장이다. 현실과 괴리된 이론은 실천영역에서 탁상공론(卓上空論)이 된다.

記者는 자유주의의 대의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자유주의 학자들의 현실과 거리가 먼 주장에는 명확한 선을 그어야 한다. 책상에서 책만 보는 사람들은 늘 현실을 망각하고 도그마(dogma)에 빠지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민경국 강원대 명예교수가 28일 <문화일보>에 <자유주의 입장서 본 역사교과서 논쟁>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아래와 같이 기고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27일 국회 국정연설로 한국사교과서 국정화(國定化) 강행이 재확인됐다. 국정화의 바탕에는 국사교과서 발행을 시장에 맡겼더니 사실 왜곡과 친북적 좌편향의 극히 ‘불량상품’이 독점하게 됐다(시장실패)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는 당장의 어려움 때문에 ‘자유의 원칙’을 포기하는 보수주의의 해법이다.

현행 불량 교과서로는 웅대한 대한민국 역사(歷史)를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개인적·정치적 삶을 개척할 지적 힘을 키울 수 없다는 보수 진영의 진단은 전적으로 옳다. 그렇다고 역사 해석을 국가가 독점하는 국정화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자유로운 교과서 시장이야말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위한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키울 수 있는 교과서 체제라는 자유주의의 해법을 직시해야 한다.

기사본문 이미지
민경국 강원대 교수

우선, 국정화의 논거로 이용한 시장실패 개념부터 틀렸다. ‘특정 시점’에 분배, 경제력 집중, 독점 등 원하지 않는 시장 결과가 생기면 무엇이든 시장실패로 낙인찍는다. ‘스냅샷의 오류’를 범하는 쓸모없는 개념이다. 시장실패 논리라면 좌편향이 심각한 교육 출판 미디어도 국유화해야 할 것이다. 그 논리는 보수 논리이지 자유 논리가 아니다.

검정제의 교과서 경쟁에서 좌파에 완전히 패하고 말았다. 그것은 첫째로 좌파 집단들이 조직적으로 강압과 폭력을 이용해 교학사 교과서의 자유 선택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런 강압을 방지하고 선택의 자유를 보호할 책임이 있음에도 정부는 이를 방관했다. 둘째로, 좌파의 사실 왜곡과 좌편향을 체계적으로 밝혀 교과서 수요자들을 설득하고 경쟁력 있는 멋진 여러 종의 교과서를 공급할 우파 사학계의 능력 부족 때문이리라.

보수 진영은 취약한 경쟁력을 극복하기 위해 싱크탱크나 훌륭한 역사학자를 양성하는 등 다방면의 노력 대신 정치권력과 손잡고 말았다. 정부의 힘을 얻어 이념적 승리를 거두겠다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정부에 손을 벌리는 게 보수적 국가주의가 아닌가. 물론 국정화를 통해 사실 왜곡과 좌편향이 완화된 교과서를 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좌파정권이 들어서면 맨 먼저 교과서를 손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를 막을 방도가 없다.

검정제는 바른 교과서를 만들어 좌파와 경쟁할 가능성이라도 있다. 그러나 국가 독점은 그 가능성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자유 경쟁의 싹을 도려내는 게 국가 독점 체제다. 단기적 편익을 위해 자유를 포기한 결과는 치명적이다. ‘정치가 역사를 주무르는’ 상황이 오게 될 건 뻔하다. 그래서 중요한 게 정치와 독립적인 시장의 경쟁이다. 이것이야말로 역사 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고 새로운 해석을 발굴하는 생산적 절차임을 명심해야 한다.

국정화는 국가의 독점적 역사 해석이 옳다는 믿음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그건 치명적 자만이다. 역사 해석에는 항상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또 개선의 여지가 늘 있다. 오류나 개선의 길이 자동적으로 밝혀지는 게 아니다. 자유로운 경쟁이 필요하다. 그래서 역사교과서 독점을 포기하는 게 옳다. 국가가 할 일은, 교과서 수요자들의 선택의 자유를 방해하는 좌파 집단의 행동을 엄격히 억제하는 일이다. 이 과제야말로 국가의 정당한 책무다.

단기적 이익을 위해 원칙을 버리면 기다리는 건 자유의 상실이요 ‘노예의 길’이라는 하이에크의 경종을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자유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미 가진 자유를 버리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양비론적이라 할 수 있는 민 교수의 위 글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빠져있다. 그동안 교육부가 좌편향 교과서에 대해 법적으로 수정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키지 않은 7종 교과서 집필진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는 책임을 수반한다.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은 한마디로 말 안 듣는 좌파세력에 대한 苦肉之策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좌편향 교과서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지 아래에 자료를 게재한다.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자료1] 護憲 세력의 승리로 끝난 美國의 '歷史교과서 논쟁'
美상원 '정부지원 받는 연구자들, 자유와 번영 증진시킨 美國史 존중해야'
  “조지 워싱턴은 지나가는 인물로 묘사될 뿐이다. 미국 헌법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대(大)불황은 세 차례나 언급된다. 학생들이 토머스 애디슨, 알버트 아인슈타인에 대해 배우지 않게 된다. 전 세계를 보다 낫게 만든 미국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중략) ‘매카시즘’은 19차례나 언급하면서 미국이 자유국가의 방패가 되고자 했던 ‘냉전의 본질’은 언급하지 않았다” (美상원 역사표준서 논쟁, 1995년 1월18일 슬레이드 고튼 美상원의원)
  
  조지 부시(George Bush) 美대통령은 1989년 미국을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국가로 만든다는 목표를 수립하고, 역사학을 포함한 5개 교과의 표준서 개발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91년 ‘전국 역사표준서 프로젝트’(National History Standards Project)가 수립되어 초등 및 중등학교에서의 ‘역사교육을 위한 표준서’(이하 ‘역사표준서’, National History Standard) 개발 작업이 추진됐다.
  
  1992년 봄부터 시작된 역사표준서 개발 작업은 당면한 역사교육의 현안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 및 논의과정을 거친 뒤 1994년 완성됐다. 역사표준서는 그러나 출간-공표되기도 전에 미국사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애국적 인물들을 누락시키고, 소수의 관점을 지나치게 대변하고 있다면서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역사표준서 출간을 위해 거액을 지원했던 린 체니(Lynne Cheney) ‘전국인문학기금’(NEH) 前의장은 “역사표준서가 정치화된 역사를 통해 반란을 꾀하는 기성학자(좌파)들의 작품”이라고 비판했다. 린 체니의 뒤를 이어 미국의 보수 진영은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언론매체를 통해 역사표준서를 비판하고, 표준서를 작성한 학자들의 정치적 의도를 문제 삼는 등 표준서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역사표준서를 비판한 미국 내 보수인사들의 입장을 요약하면 표준서를 통해 좌파세력이 미국의 역사를 정치화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특히 역사표준서에서 서양문화의 위상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인문주의우파’(The Humanist Right)로 알려진 교육비평가 집단의 윌리엄 베넷, 앨런 블룸, 린 체니, 저투르드 힘멜파브 등의 인물들이 “인문학 교육은 서양문화에 뿌리를 둔 이상과 지식을 전수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유럽의 정치적, 철학적 문학적 유산이 미국의 다원(多元)적인 국민을 결속 시킨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문화적 통일성이 1960년대 이후 대학을 장악하고, 서양 대신 인종, 계급, 성(性)에 관한 교과목을 가르치는 ‘막시즘’(Marxism)과 ‘페미니즘’(Feminism) 성향의 좌파들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고 ‘인문주의우파’ 인사들은 경고했다.
  
  서양에 관한 교육을 강조하는 두 번째 집단은 앨버트 섄커가 의장으로 있는 ‘미국교사연합’(American Federation of Teachers)의 전국본부가 그 중심이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냉전(冷戰)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살아남은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며, 민주주의의 지속여부는 미국인을 결속시키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치적 비전(vision)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해주는데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서양 민주주의의 역사가 교과과정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문주의우파’와 ‘미국교사연합’은 모두 학생들이 고대 아테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17세기 영국 등지의 고전 문헌에서 언급한 정치-철학-미적 진리를 탐구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세계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커다란 사건이나 변화도 그 중요성이 고전(古典)의 진리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역사표준서 문제 제기와 더불어 1994년 11월14일 미국의 저명한 보수논객인 존 레오(John Leo)는 ‘미국 역사의 납치’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미국의 표준서가 1960년대 학생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에 의해 반(反)문화적 관점에서 쓰였다”고 비판했다.
  
  존 레오는 당시 “역사표준서가 크든 작든 모든 봉기와 반란을 언급했는데, 이는 그들이 미국을 억압적인 국가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백인에 대항해 점점 더 많은 반란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밖에 이야기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역사표준서는 다문화주의가 과도해서 백인이나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온데간데없고, 인디언, 흑인, 여성(페미니즘)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미국이 이제껏 자유와 평등을 강조해 온 것은 엘리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서 인디언 학살과 흑인의 노예화만을 강조했다”고 존 레오는 비판했다. 이 같은 이유로 존 레오는 역사표준서를 공식표준서로 채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 내 보수진영의 적극적 대응은 결국 의회 논쟁까지 이어졌다. 공화당의 슬레이드 고튼(Slade Gorton) 상원의원은 1995년 1월18일 상원 연설을 통해 “표준서가 반(反)서양적이고 미국 역사교육에 위협적인 것”이라고 규정했다. 고튼 의원의 문제 제기로 이날 상원은 99대 1로 역사표준서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사실상 여야 ‘만장일치’(滿場一致)였다.
  
  당시 역사표준서는 상원으로부터 비(非)미국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정부 지원을 받는 연구자들은 세계 자유와 번영을 증진 시킨 미국 역사에 대해 존중해야 한다”는 권고까지 받았다. 미국에서 공교육이 시작된 이래 줄곧 주(州)정부의 소관이던 교육문제에 상원이 관여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큰 것이었다. 1994년 가을부터 시작된 역사표준서에 대한 보수진영의 문제 제기는 1996년 봄까지 무려 18개월이나 지속됐다.
  
  이로 인해 좌파 성향의 표준서 개발자들은 어쩔 수 없이 수정(修正)주의 사관(史觀)에 입각해 작성된 역사표준서를 개정, 1996년 4월 새로운 표준서를 출간해 역사교과서 논쟁은 막을 내렸다. 당시 역사표준서 개정작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초교육회의(Council for Basic Education)를 비롯한 몇몇 재단이 구성한 패널의 권고에 따라 문제가 됐던 ‘학습예제’를 삭제했다.
  
  둘째, 과학, 기술, 경제사, 지성사를 강화했다. 논란이 됐던 ‘헌법’이라는 단어가 포함됐고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제임스 메디슨 등의 이름이 삽입됐다.


[사례2] 保守의 대(大)승리로 끝난 '英國의 역사논쟁'
'역사논쟁'의 최종 승리를 가져온 대처 수상의 애국심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前 영국 수상.
  영국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역사교육이 위기에 처했다’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에는 역사교과목의 비중 축소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으나, 무엇보다도 사회 일각의 역사교육무용론이 위기감을 부추겼다.
  
  영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보수진영이 이념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대(對)좌파 공세를 취하는 일이 벌어졌다. 특히 신(新)보수 논객들은 역사학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지하고 ‘역사학의 위기’를 나름의 방식대로 해석해 대안을 마련하려 했다.
  
  당시 영국의 교육현장 일반이 역사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을 위기로 받아들였다면, 신(新)보수는 좌파적 급진사학, 곧 수정주의에 입각한 현대역사학의 대두를 위기의 징후로 판단했다.
  
  신(新)보수는 또 1960~70년대의 비판사학과 이른바 ‘밑으로부터의 역사’의 득세를 우려했으며, 이 같은 좌파적 현대역사학의 성과가 교육현장에서 반영되고 있음을 비판했다.
  
  일례로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견해와 정치적 소신은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항상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과거의 경험은 바람직한 정책이나 제도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영향을 주고 색깔을 입힌다”고 지적했다.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경제사가인 하트웰(Ronald M. Hartwell)의 경우 “지식인들은 계몽시대 이후 진보적인 관점을 가졌다. 그들은 18~19세기에는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관점을, 그리고 20세기에는 개입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관점을 가졌다”면서 좌파를 공격했다.
  
  당시 정권의 담당자였던 ‘철의 여인’ 대처 수상 역시 발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사(National History)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 절하하는 교육을 받아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진 바로 그 시기(산업혁명, 빅토리아 시대)를, 영국이 다른 국가보다 가장 앞서 나갔던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고 했다.
  
  영국은 대처 수상의 취임과 함께 그동안 보수진영이 우려해온 역사학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역사수정주의’(History Revisionism) 운동을 전개하고, 이를 제도화하는데 힘썼다.
  
  대처 수상은 81년 보수당의 실세 정치가였던 키스 경(Sir Keith Joseph)을 교육부 장관에 임명했으며, 장관은 보수성향 역사학자인 엘튼(Geoffrey Elton), 토머스(Hugh Thomas) 등의 도움을 받아 중등 교육과정에서 역사 교육과정에서 역사 교과과정의 국정화를 추진했다.
  
  이들은 모두 영국사를 긍정하는 역사 서술을 교과과정에 도입하는데 주력했다.
  
  핵심요소는 祖國과 祖國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을 함양하는 애국주의, 역사적 변화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보수주의, 참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도덕주의 등이었다. 이들은 노예무역, 제국주의, 외국에서 저지른 악행 등에 대해 지나치게 자세히 기술하는 것을 ‘자학사관’으로 여겼다.
  
  영국의 이 같은 ‘국가교육과정’(역사)은 권위, 규율, 위계질서, 국가, 강력한 정부를 강조했다. 국가교육과정을 통해 영국의 보수세력은 종래의 영국교육, 즉 교사가 마음대로 주제를 선택해 가르쳐 왔던 것을 중지시키고 국가가 교육에 개입할 것을 주장했다.
  
  역사교육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과목에 대한 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1986년 케니스 베이커(Kenneth Baker) 교육부 장관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됐다. 보수성향의 베이커 장관은 정부 중심의 교육통제와 국가교육과정의 도입을 강력히 추진했다.
  
  1987년 1월 베이커 장관은 한 모임에서 영국 교육의 실패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개별학교와 교사에게 교육과정을 맡긴 데 있다고 주장하며, 국가교육과정을 영국에 도입할 계획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베이커 장관의 이 같은 계획은 결국 ‘역사논쟁’을 일으켰다.
  
  좌파 성향 역사가와 교사들, 정치인들과 일반인들이 역사논쟁에 참여했다. 전문 역사가들은 내용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역사교육의 중요한 목표인 ‘역사적 탐구 기능’ 위축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좌파 성향 교사들은 교육현장에서 자율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노동당 정치인들 그리고 일부 일반인들은 ‘편협한 민족주의’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1988년 ‘교육개혁법’(Education Reform Act 1988)이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1989년 1월 새로운 교육과정을 초안할 ‘역사분과 초안그룹’(History working Group)이 정부에 의해 임명되어 작업에 들어가 1990년 1월 최종보고서가 완성됐다.
  
  이후 국가교육과정은 1995년 그 첫 번째 개정을 보았고, 두 번 째 개정이 1999년 9월9일 확정되었으며, 11월에 각 학교로 보내져 2000년 9월부터 시행됐다. 대처 수상을 이어받은 새로운 보수당 출신의 존 메이저는 교육에 관한한 대처 보다 더 보수적 경향을 보였다.
  
  그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제2차 국가교육과정은 영국사 부분이 더 강화됐다. 제3차 교육과정은 영국사 중심의 학습내용을 계속 지켜 나가면서 교사들에게도 많은 재량권을 주었다.
  
  영국 역사 교육의 성공은 잘 구성된 국가교육과정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으로 하여금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학습 성취 목표와 학습 프로그램, 그리고 양자 사이의 체계적인 연결이 영국 역사교육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대처 수상 집권 이후 지금까지 영국의 역사교육은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고 있다. 초등학교 뿐 아니라 중등학교에서 역사교육은 타 교과목에 비해 두드러진 성취를 보이고 있으며, 교사들은 이에 고무 받아 自國史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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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신 2015-10-30 오전 11:21

    진리에 무슨 다양성이 필요하고
    역사에 무슨 자율성이 필요한가?
    한민족은 1945년에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1948년에 건국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무슨
    다양성 자율성이 필요하지?
    전부 거짓말장이들의 궤변이요 억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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