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를 만든 독서 습관

박정희 대통령의 집무실은 서재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군인 출신이었지만 책 속에서 살았다. 이 서재 겸 집무실에는 약 600권의 책이 꽂혀 있었는데 소설이나 수필집, 시집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세계대백과사전, 파월한국군전사, 난중일기, 박정희 대통령(중국어 판), 불확실성의 시대, 감사원 결산 감사 보고서, 성경, 성경사전, 崔水雲 연구, 단재 申采浩 전집, 白斗鎭 회고록, 지미 카터 자서전, 자본론의 誤譯(오역)(일어판), 金日成(일어판), 사상범죄론, 한국 헌법, 다국적기업, 정경문화(잡지)…….

 

《암살사 연구》란 책도 있었다. 朴鐘圭 경호실장 시절인 1973년에 경호실의 연구발전실에서 펴낸 상하권으로 된 책이었다. 세계 각국의 암살 사례를 분석, 암살을 예방하는 방법을 개발하자는 취지로 쓰인 책이었다.

 

이 도서목록이 풍기는 분위기는 실용주의자의 그것이었다. 관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실무적이고 물질적인 소재로 꽉 차 있었다. 집무실 비품들을 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있었다. 계산자, 돋보기, 은단통, 소독솜통, 라디오, 정원수 整枝用 톱, 그리고 부채와 파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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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박정희와 그의 우상 나폴레옹의 생애를 비교하면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박정희가 나폴레옹을 숭배하다가 그의 생애마저 복사하고 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식민지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필두로 하여 두 사람의 공통점을 뽑아 보면 10여 가지나 된다. 훌륭한 어머니의 큰 영향력, 어린 시절의 병정놀이, 작은 키(박정희는 1m64cm, 나폴레옹은 1m67cm 정도), 사관학교 교육(나폴레옹은 두 곳의 사관학교를 다녔고, 박정희는 세 곳의 사관학교를 이수), 포병 출신, 쿠데타로 집권.

 

쿠데타란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이 나폴레옹이다. 1799년 11월 9일 30세 장군이던 그는 군병력을 동원하여 의회(500인회)를 해산하고 제1통령에 취임했다. 그가 1815년에 엘바 섬을 탈출하여 프랑스 왕정을 뒤엎은 것까지 치면 두 번 쿠데타를 한 셈이다.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3세도 쿠데타를 통해서 대통령에서 황제로 승격했다. 박정희도 유신 선포까지 포함하면 두 번 쿠데타를 했다. 집권 기간도 나폴레옹은 16년, 박정희는 18년. 두 사람은 각기 근대 국가의 초석을 놓았다. 이혼 경력, 비극적 죽음 뒤의 재평가도 공통점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뒤에 과격파이던 로베스피에르의 동생과 친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여 처형당하자 나폴레옹도 과격파로 몰려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가 親知의 운동에 의해 풀려난 것은 박정희 소령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이후에 남로당과 연루되어 구속된 다음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가 선배들의 구명 운동에 의해 살아난 경우와 비슷하다.

두 사람의 본질적인 유사성은 그들이 상징하는 시대정신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高揚(고양)된 국민의 에너지를 결집시켜 국민군을 조직하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전 유럽에 혁명정신을 전파하는 전쟁을 벌였다. 박정희는 4·19혁명으로 부풀려진 국민들의 기대와 열정을 張勉(장면)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정권을 탈취, 국가 근대화를 향해서 이 국민적인 에너지를 동원한 사람이다.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가 박정희의 생애에 끼친 큰 영향은 소년기에 읽는 위인전의 영향이 평생을 간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백지 상태의 어린 마음에 최초로 발자국을 만드는 위인들의 삶은 신선한 충격, 흥분, 상상력을 제공하고 인생 설계의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영웅들의 전기에 심취했다는 것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사회과학의 종합인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이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 즉 經世(경세)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초등학교에서 틀을 잡은 이런 관심과 독서 경향이 그의 인격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청와대 집무실 도서목록이다. ‘書齋(서재)’라고도 불렸던 이 방에는 약 550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그의 사후에 청와대 직원들이 서재를 정리하면서 작성한 도서목록을 살펴보니 역사, 戰史(전사), 傳記(전기)와 관련된 책이 거의 전부이다. 특히 傳記가 많았다. 일본에서 나온 金日成(김일성) 전기를 비롯하여 《以堂(이당) 金殷鎬(김은호)》, 《鶴峰(학봉)전집》, 《난중일기》, 《栗谷集(율곡집)》, 《崔水雲(최수운) 연구》, 《安重根(안중근) 의사 자서전》, 《申采浩(신채호) 전집》, 《홍의장군 郭再祐(곽재우)》, 《천추의 얼 尹奉吉(윤봉길)》, 《退溪學(퇴계학) 연구》, 《롬멜 戰史錄(전사록)》, 《포드 대통령》, 《지미카터 자서전》, 《朴殷植(박은식) 전서》 등등.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알렉산더 대왕 전기 등 위인전을 많이 읽었다. 권력의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독과 보람을 그는 전기를 매개로 한 역사적 대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나폴레옹 전기, 플루타르크 영웅전, 삼국지를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었다. 권력과 인간의 장대한 드라마를 몇 번이고 곱씹어 읽어감으로써 어떤 원리를 뽑아 내려는 독서법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인격과 교양을 만든 지식의 원천은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이어진 독서습관이었다. 그의 死後(사후) 수습된 청와대 본관 1층 집무실의 도서 목록에는 시집과 소설이나 성경이 보이지 않았다. 詩心(시심)이 없고 信心(신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다. 2층 침실 앞에도 서재를 겸한 거실이 있었다. 시집, 수필류 같은 부드러운 책들은 주로 여기에 꽂혀 있었다. 겉으로는 차디차게 보이던 박정희였지만 가슴속으로는 시심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조국’ ‘새마을 노래’, ‘금오산아 잘 있거라’의 가사를 썼고 작곡도 했다. 국민들을 噴起(분기)시키고 신바람나게 만드는 데 있어서 노래와 시의 힘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일기에 실린 시만 모아도 작은 시집이 하나 만들어질 것이다. 먼저 떠나보낸 아내를 그리워하는 시들을 읽어 보면 박정희는 퍽 感傷的(감상적)인 인간이란 느낌까지 받을 정도이다. 아내를 잃은 지 20일 뒤에 쓴 시의 한 구절.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이 앉았던 의자

당신이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 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한 번 부르지 못했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 년 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 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 수가 있으리>

<1974년 9월 30일. 당신이 이 곳에 와서 고이 잠든 지 41일째.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마디 없소. 아니야,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아. 당신도 잘 있었소. 홀로 얼마나 외로웠겠소.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옆에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올 테니. 그럼 안녕!>

 

그는 시인들과 친했다. 6·25동란 때 정훈장교였던 시인 李容相(이용상)은 1951년에 《아름다운 생명》이란 제목의 시집을 내려고 했지만 돈이 없었다. 李(이) 시인의 사정을 전해 들은 박정희 대령(당시 육군 정보학교장)이 ‘우리 집에 좀 와 달라’는 연락을 해 왔다. 이용상은 정훈부장으로서 박정희 참모장과 함께 9사단에 근무한 적이 있고 계급 차를 넘어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박 대령 부부가 세들어 살던 대구 봉산동 집에 갔다. 육영수가 대문을 열어 주더니 대경실색.

 

“아이고, 조금 전에 王學洙(왕학수·박정희와 대구사범 동기) 교수가 방바닥에 오줌을 싸고 가셨는데 이 대위님이 또 오셨네요.”

이 대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육영수가 풋고추에 소줏상을 들고 들어왔다. 박 대령은 장롱 속에서 꺼낸 신문지 뭉치 하나를 이용상에게 아무렇지 않게 던져 주는 것이었다. 이 대위가 “이게 뭐지요?”하고 물었다.

“시집 출판에 보태 쓰시오.”

“이 뭉치가 다 돈입니까? 이 돈 어디서 났습니까?”

“세상이 다 도적놈들인데 난들 도적질 말라는 법 있소?”

옆에서 육영수가 거들었다.

“저 분 마음 변하시기 전에 어서 갖다가 좋은 시집 내세요.”

박 대령은 대구사범 동기인 인쇄소 사장에게 소개장까지 써 주었다.

《용금옥 시대》의 저자이기도 한 이용상에 따르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마당에서 아름다운 생명을 찾느라 애쓴’(趙芝薰·조지훈의 발문) 이 시집은 ‘전란 중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유일한 시집’이란 것이다. 앞으로 이 전기에서 발견하게 될 박정희의 균형감각과 교양, 그리고 여기에 바탕을 둔 결단력과 통찰력은 구미보통학교에서부터 내면화된 독서와 사색의 오랜 축적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었다.

 

‘日帝교과서’로 배우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에서 배웠던 《보통학교 국사》, 《보통학교 修身書(수신서)》, 《唱歌(창가)》 교과서들(조선총독부 발간)을 三省出版博物館(삼성출판박물관)에서 구해 읽어보았다. ‘국사’, 즉 일본역사 교과서는 戰國(전국)시대에서 명치유신까지의 시대를 이끈 인물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전국시대의 세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많은 무사들, 그리고 학자들이 등장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 이야기도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明(명)을 치기 위해서 길을 빌려 달라고 조선에 요청했더니 조선이 명을 두려워하여 이를 거절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는 식이다. 13만의 원정군이 출항하는 장엄한 모습을 나고야 城(성)에서 바라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그림이 실려있다. 원정군은 석 달 만에 조선을 거의 점령한다. ‘조선은 당파싸움으로 防備(방비)가 허술하여 日軍(일군)은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함락시키면서 善政(선정)을 통해서 백성들의 민심도 얻었다’는 것이다.

明軍(명군)이 개입하여 일단 후퇴하던 일본군이 碧蹄館(벽제관)에서 6, 7배나 되는 명군을 격파한 이야기도 자랑스럽게 쓰여 있다. 水軍(수군)만이 이순신에게 격파되어 육군을 지원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기술했으나 조선으로부터의 철군도 안전하게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 전쟁은 주로 明軍과 日軍 사이의 전쟁이고 조선군은 오직 달아나는 존재였다는 식이다.

이어서 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게 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對(대) 이시다 미쓰나리의 세키가하라 결전의 장면이 장엄하게 묘사되고 있다. 소년 박정희는 이순신과 나폴레옹을 알기 전에 먼저 일본역사의 영웅들 이야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예컨대 이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도쿠가와 幕府(막부)시대의 무사 오이시 요시오 이야기를 읽고서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오이시 요시오는 억울하게 배를 갈라 자살한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46명의 동지들을 규합한다. 이들은 눈덮인 심야에 주군을 죽게 했던 봉건영주 요시나카의 집으로 돌입하여 그의 목을 베고 주군의 무덤 앞에 목을 바친 뒤에 자수하여 모두 할복 자살한다.

이 일본 역사의 영웅들 사이에 ‘李退溪(이퇴계)와 李栗谷(이율곡)’, ‘英祖(영조)와 正祖(정조)’, ‘한국병합’ 이야기가 끼여 있다. 이 교과서는 이율곡을 설명하면서 그가 선조 때 金孝元(김효원)과 沈義謙(심의겸) 사이의 당파싸움을 막아 보려고 했으나 실패함으로써 ‘정권을 잡기 위하여 상대에게 죄를 씌우고 정치를 어지럽히는 폐해가 생겨 지금도 조선인들 사이에는 노·소·남·북의 차별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 교과서는 또 영·정조 시대에 두 賢君(현군)이 당파싸움을 누르려고 노력했으나 후대에 가서는 수포로 돌아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의 國情(국정)’이란 항목은 ‘우리나라에서는 征韓論(정한론)까지 대두할 정도인데도 조선은 여전히 鎖國攘夷(쇄국양이)의 방침을 계속하고 있었다’로 시작된다.

<조선인 가운데는 청국에 의존하려는 사람들과 우리나라에 의존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명치 17년, 청국에 의존하려고 하는 세력이 淸國兵(청국병)의 힘을 빌려서 우리나라에 의존하려는 세력을 치고…>

 

교과서는 이 章(장)에서 ‘조선은 자력으로서는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항상 타국의 압박을 받아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는 불씨가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았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凶徒(흉도)에게 암살되었으나 한민족 가운데서도 한·일 합병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드디어 합병을 보게 되었고 그 뒤 조선은 크게 발전하고 있다’고 끝맺고 있다.

이 ‘국사’ 교과서를 읽은 소년 박정희의 뇌리에는 아마도 무사의 나라 일본사람들의 의리, 상무정신, 애국심과 양반의 나라 조선지배층의 사대성, 당파성, 문약성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그 뒤에 읽은 춘원 이광수의 《이순신》은 그 내용으로 보아 왜적에 대한 적개심보다는 애국적 군인을 모함하는 조선의 양반 정치인들에 대한 경멸감을 더 강화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역사관을 잘 보여주는 책은 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이다. 이 책에서 박정희는 당파싸움을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원인은 불교에서 유교로 문물제도가 바뀌어 민족자주의 기개를 좀먹게 된 데서 연유한다고 했다. 그는 이를 민족사의 惡遺傳(악유전)이라 불렀다. ‘言(언)으로는 首(수)를 가고 行(행)으로는 末(말)을 차지하면서 거기다가 시비와 패거리라면 창자를 움켜쥐고 달려들었던’ 조선조 양반정치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地主(지주)정당인 한민당과 그 雙生兒(쌍생아) 자유당과 민주당, 즉 이른바 舊(구) 정치인들이라는 것이다.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의 혁명적 논리, 그 핵심은 李承晩(이승만) 정권과 張勉(장면) 정권을 다 같이 ‘李朝의 당파정치 전통을 이어받은 봉건적 수구 세력’으로 규정한 점이다. 그는 장면 정부의 민주성까지도 실현 불가능한 서구민주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대주의라고 평가 절하했다. 심지어 ‘장면 정권은 민주당이란 가면을 쓴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이라 규정하기도 했다. 조선조 양반정치-한민당-자유당-민주당계열을 당파적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봉건정치 세력이라 해석하고 이를 애국적 엘리트로 교체한 것이 바로 5·16이라는 박정희식 혁명 논리, 그 역사관의 씨앗을 우리는 구미보통학교의 교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씨앗이란 소년의 마음속에 뿌려진, 조선조의 양반정치 행태에 대한 경멸과 증오심일 것이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인 소년에게는 조선조적인 봉건 질서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고 체험이었다.

 

‘修身(수신)’은 요사이의 도덕 과목에 해당한다. 교과서의 제목을 보면 동양적인 미덕과 황국신민으로서의 공덕심을 기리는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님을 존경하라’, ‘친구들’, ‘황태후 전하’, ‘효행’, ‘형제’, ‘건강’, ‘규율’, ‘예의’, ‘근로’, ‘인내’, ‘저축’, ‘신을 존경하라’, ‘미신에 빠지지 마라’, ‘公正(공정)’, ‘사람의 명예를 중히 여겨라’, ‘진심으로 임하라’, ‘공덕’, ‘공익’, ‘은혜에 보답하라’, ‘忠君愛國(충군애국)’.

 

‘제17·공덕’을 읽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일화가 나온다. 런던의 한 공원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지나가던 신사가 이유를 물었더니 소년이 하는 말, “바람에 날린 모자가 잔디밭에 들어갔습니다. 잔디를 밟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러고 있습니다.”

신사는 지팡이로 모자를 꺼내준다. 그리고는 이런 설명이 따른다.

‘이런 소년이 길에서 종이공을 가지고 논다든지 나무를 당겨서 휘게 한다든지 학교의 물건을 상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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