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포의 고래잡이들 이야기

그들중 20여명이 눈 밝은 죄로 日本 海軍에 「미하리」(見張) 요원으로 끌려갔다
東海의 捕鯨戰

東海에서의 露·日捕鯨戰은 露·日전쟁의 試演이었다. 이 시합에 조역으로 등장한 것은 「흠·링어」商會. 이 회사는 日本 「나가사키」에 있었는데 英國인과 「러시아」인이 손잡고 이 회사안에 포경조합을 설치, 1899년엔 부산과 元山항에 근거지 허가를 받아 동해에 출어했다. 「러시아」포경선단은 포경선 2척 운반선 4척, 사무취급선 1척, 모두 7척, 총 「톤」수는 1천t 이상이었다. 日本선단은 포경선 1척, 처리선 1척, 저장선 1척, 대형운반선 1척, 소형운반선 7척, 모두 11척에 총「톤」수는 5백여t으로 「러시아」에 뒤졌다. 「흠·링어」는 포경선 1척, 처리선 1척, 운반선 3척 모두 5척에 총「톤」수는 약 6백t. 이 3개 선단의 포수는 모두 「노르웨이」포수끼리의 기량경쟁이기도 했다.

1899∼1901년 사이 「러시아」선단은 동해에서 고래 389마리를 잡아 「흠·링어」(61두)와 日本(57두)을 압도했다. 1901년 여름 「흠·링어」는 경영적자로 동해포경에서 손을 뗐다. 日本遠洋漁業(株)은 1902년부터 급진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 그해 고래잡이철엔 89마리를 잡았다. 이것은 이 회사가 「노르웨이」에서 사들인 최신포경선 「렉스」호의 활약 덕분이었다. 1903년엔 「렉스」호의 자매선 「레기나」호를 또 구입, 이젠 「러시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한 日本의 선전포고는 「러시아」포경선단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日本해군은 재빨리 太平洋捕鯨선단을 덮쳤다. 마침 출어중이던 「게올기」호만 上海로 달아나고 나머지 선박은 日本에 나포됐다. 「러시아」가 이 전쟁에서 패하자 太平洋捕鯨(株)도 폐업했다. 1905년 4월 18일엔 포경기지조차약정서도 폐기되고 말았다. 이제 東海는 日本포경선단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日本遠洋(株)의 후신인 東洋漁業(株)은 포경기지조차약정서가 폐기되자 太平洋捕鯨(株)의 3개 기지를 인수했다. 1904년부터는 長崎捕鯨(株), 1906년부터는 日韓捕鯨(株)이 동해에 진출, 3개 日本회사는 동해의 고래자원을 메말리기 시작했다. 日本선단은 동해에서 1904년에 373마리를 잡은 것을 비롯, 다음해에 324마리를 죽이고, 1906년엔 428마리를 포획, 최고기록을 남겼다. 1965∼74년 韓國포경선이 잡은 대형고래가 연평균 20여 마리였던 것과 비교하면 당시의 마구잡이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만하다.

1907년 韓國정부는 고래자원보호 목적으로 捕鯨業관리법을 공포, 여름철의 포경을 금지시켜야 했다. 동시에 기선포경 선수를 30척 이내로 제한하고, 사업근거지 설치도 허가제로 했다. 1908년엔 韓國에 진출한 12개 포경회사(포경선 25척)들이 과열경쟁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해 東洋漁業(株)등 4개 회사가 합동으로 東洋捕鯨(株)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전체포경선의 70%를 소유하고 있었다. 합방 뒤엔 韓國에서의 포경을 독점했다.

외국포경선단의 東海고래자원에 대한 약탈적인 마구잡이는 현재의 자원고갈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고래 포획수 통계에서도 자원감소현상은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4∼15년까지는 매년 3백 마리 이상 잡히던 큰고래가 1916∼30년 기간엔 연평균 2백 마리, 1931∼44년 사이엔 연평균 1백 마리 線으로 떨어졌다. 해방뒤엔 다시 1백 마리線 이하로 전락하여 1972년엔 1마리, 73년엔 4마리가 잡히는 황폐상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1900년대에 집중살륙된 것은 귀신고래였다. 세계 1백여종의 고래중 유일하게 韓國産이란 명칭이 붙은 이 순박한 고래(The Korean Gray Whale)는 곧 멸종상태에 이르게 된다. 합방전 日本인의 수산자원남획은 비단 고래에 그치지 않았다. 19세기말 일본의 潛水器어업자들은 濟州島에 몰려와 전복을 쓸어갔다. 이 때 잠수기 1대로 하루 5백관의 전복을 따갔다는 전설같은 기록이 있다.

1883년 朝日通商章程의 체결에 따라 全羅, 慶尙, 江原, 咸鏡 4도 연안에서 조업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日本은 1904년 忠淸, 黃海, 平安도 연안의 통어권(通漁權)도 강탈해 갔다. 韓國해안에 몰려온 저질의 일본선원들은 그들의 조업을 막으려는 우리 어민들을 살해하고 濟州島에선 마을을 습격, 부녀를 강간하고 살상했다. 日本 어부들에게 어장을 뺏긴 韓國어민들은 그 어장에 출어하기 위해 日本인들에게 通稅를 바치기도 했다.(『皇城新聞』1902년 1월 26일자)

합방직전 韓國海에서 조업중인 日本어선은 3천4백여척, 어민수는 1만9천여명에 달했다. 1910년 日本 어부들의 韓國海에서의 어획고는 약 394만圓으로 韓國인의 어획고 약 3백92만9천圓을 앞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 땅을 뺏기기에 앞서 바다를 먼저 앗겼던 것이다. 천년에 걸친 집권층의 끈질긴 어민수탈이 가져온 역사적인 귀결이었다.

南氷洋에 진출하는 韓國人

『흰색이 공포를 상징하는 줄 그때야 깨달았죠. 雪氷이 뻗어나간 저쪽 지평선, 다시는 떠오를 것 같지 않는 夕陽. 南極은 황량해요. 無의 大陸같아요』 1963년 韓國人으론 맨 먼저 남극 대륙을 밟았던 이병돈(李秉暾)박사(한국선박해양개발연구소부소장)의 남극인상이다. 이 南極대륙을 둘러싼 南氷洋은 인류의 마지막 「프런티어」라고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이 바다는 단백질의 보고. 사람도 먹을 수 있는 대형 「플랑크톤」인「크릴」의 1년 어획가능량이 2억7천만t. 美國 인구의 2년분 단백질 소모량이며 세계어획고의 약 3배나 된다. 세계의 식량부족문제가 부각될수록 南氷洋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南氷洋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뉴질랜드」, 호주의 최남단을 연결하는 線으로부터 남쪽바다를 가리킨다. 대강 남위 50도 이하의 해양이 된다. 면적은 세계전해양의 약 10%, 용적 즉 해수의 총량은 세계해양의 약 23%다. 南極의 극점에 맨 먼저 도달한 사람은 「노르웨이」人이었지만 南氷洋에 맨 처음 포경선단을 보낸 것도 「노르웨이」였다. 1905년 「노르웨이」정부는 연안포경을 금지시켰다. 남획으로 고래의 연안회유가 줄어들자 고래떼에 쫓겨 연안에 접근하던 청어떼가 감소, 청어업자들이 고래잡이 금지를 요구했던 탓이었다.

「노르웨이」포경업자들은 할 수 없이 원양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래가 와글댄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南氷洋에 「노르웨이」 포경선단이 도착한 것은 1905년. 1910∼11년 사이의 漁期엔 52척의 포경선이 1만 마리 이상의 고래를 잡았다. 「노르웨이」포경선단은 「사우드·세틀랜드」섬 등에 기지를 두고 조업했다. 그러나 英國이 이들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노르웨이」에 대해 工船 1척만을 허가, 남빙양 포경을 견제하자 궁지에 몰렸다. 「노르웨이」人 「젤러」가 고안한 斜路(Skid way) 가 이 위기를 벗어나게 했을 뿐 아니라 南氷洋에서의 母船식 포경을 가능케 했다.

斜路는 工母船에서 「캐처보트」가 잡아온 고래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만든 경사진 통로에 불과하다. 이 간단한 고안으로 工母船上에서 고래처리가 가능해져 육상기지가 필요없게 됐다. 「스벤·포인」포경포, 「커베너·보일러」와 함께 斜路발명은 포경업의 발전과 확대에 박차를 가한 기술 혁신이 된 것이다.

韓日합방 이후 韓國의 포경권을 독점한 東洋捕鯨(株)은 그 뒤 日本産業(株) 日本捕鯨(株), 共同漁業(株), 日本水産(株)으로 변천하면서 江原道 長箭, 慶北 九龍浦 慶南 長生浦 濟州島의 西歸浦 全南의 大黑山島 黃海道 大靑島에 처리장과 기지를 두고 조업을 계속했다. 기지주변의 한국인들이 포경선에 많이 고용된 것은 물론이다. 특히 최대포경기지인 長生浦에선 눈밝고 힘센 젊은이들이 대거 日本 포경선을 타기 시작했다.

1936년 봄 長生浦의 日本水産(株) 사무소에선 南氷洋에 갈 포경선원들을 회사 내에서 뽑기 시작했다. 남빙양에 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고 주저하는 선원들이 많았다. 대가 찬 金달호씨 徐인규씨 등 10여명이 월급 많은데 혹해서 남빙양 파견을 자원했다.

1회 出漁기간은 6개월

1925년부터 斜路를 장치한 세계 각국의 母船式 포경선단이 南氷洋에 몰리기 시작했다. 1등은 못해도 모방을 잘하는 日本이 빠질 리가 없었다. 1934년 日本水産(株)은 「노르웨이」에서 9천866t의 工母船을 사들여 圖南丸이라 이름짓고 南氷洋에 보냈다. 이 처녀수출에서 대왕고래 125마리를 포함한 213마리의 고래를 잡았다. 몇년 뒤엔 大洋漁業(株)이 1만6천764t급의 工母船 日新丸을 신조, 南氷洋에 파견했고 1938년엔 극양수산(極洋水産. 株)이 極洋丸(1만7천548t)을 가지고 南氷洋에 출어했다.

長生浦의 한국인들은 모두 日本水産 소속의 포경선단을 탔다. 金달호씨 등이 맨 처음 南氷洋에 갔다가 개선장군처럼 살아 돌아와 남빙양에서 이름 날린 활약상을 자랑하자 長生浦 사람들은 1937년부터는 앞다투어 南氷洋行 선단을 타게 됐다. 梁금식씨는 1937년에 南氷洋에 출어했다. 『蔚山군수봉급의 2배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들 선원들은 월급으로 85원을 받았다. 울산군수의 월급이 35원, 쌀 한 가마니가 5원하던 때였다.

日本水産(株)의 南氷洋포경선단을 탄 한국인이 몇이나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8·15 해방 뒤 퇴직금을 받으려고 모여보니 한국선원들은 361명이더라고 한다. 南氷洋포경은 1회 출어에 6개월이 걸리는 지겹고 고된 작업이었다. 日本 선단은 매년 10월 5∼6일쯤 南氷洋으로 출항했다. 도중 호주남단에 잠시 기항, 보급품을 싣고 남위 60∼70도의 남빙양에 도착하면 11월초순, 늦은 봄이다.

남위 40도부터 빙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극에서 관측된 최대빙산은 1927년 「노르웨이」포경선「오쯔도」號가 목격한 것. 높이 31m, 길이·너비 각각 160km, 면적 3만4천289km. 慶尙南北도를 합친 것과 맞먹는 넓이다. 빙산과 「펭귄」을 배경으로 인간들은 11∼3월 사이 4개월간 이 침묵의 바다에서 비정한 고래살육전을 되풀이했다. 12월 31일부터 3일간은 해가 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밤낮없는 고래 몰죽임이 자행된 것이다.

여름이라고 해도 南氷洋의 12월 평균수은은 섭씨0·08도, 정오의 평균기온0·03도. 바다로 떨어지면 익사하기 전에 凍死를 먼저하는 살벌한 환경. 이곳에서 안개가 끼거나 폭설이 쏟아지고 강풍이 불면 포경선들은 氷原의 만입부(灣入部)나 氷山밑으로 피난한다.

長生浦의 노인들은 1938∼39년의 南氷洋을 잊지 못한다. 1939년 3월 10일 바다가 워낙 사나워져 각국 포경단들은 조업을 중지하고 避港(피항)에 바빴다. 日本大洋漁業(株)의 新丸선단소속 포경선 3척도 氷原의 오목한 곳에 접안했다. 이때 일이 터졌다. 氷山이 해류와 바람에 실려 氷原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밀려오는 게 아닌가. 남빙양에선 고래떼가 이런 상황에서 목만 드러낸 채 끼어 죽는다. 빙산 접근이 너무 빨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경선 3척은 氷原과 氷山에 꼭 끼여 포로가 됐다. 냉장될 위기에 놓인 선원 57명은 배를 버리고 빙원을 20km나 걸어 탈출했다. 이 포경선 3척은 그 다음해 李任用씨가 타고 있던 「캐처보트」에 발견됐다. 별다른 고장이 없어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미하리」의 悲哀

韓國선원들은 승진 땐 민족차별을 당했다. 포수나 선장은 될 수 없었다. 갑판장 기관장이 上限이었다. 韓國人으로 「캐처보트」의 선장이 됐던 사람은 日本人으로 귀화한 姜모씨뿐이었다고 고래전문학자 全찬일 당시 부산수산대 교수는 증언했다. 왕복항해에만도 2개월 걸리는 南氷洋 포경에서 돌아온 한국 선원들은 長生浦로 1∼2개월 휴가를 받아와선 신나게 놀았다. 주민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고 영웅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휴가를 같은 기간에 함께 받아 집에 다녀가곤 했기 때문에 다음 해엔 며칠 간격으로 長生浦의 여기 저기에서 아기 울음이 터지곤 했단다.

南氷洋 포경은 세계 포경사의 절정이었다. 1938년 南氷洋엔 6개국의 41개선단 256척이 출어, 1만4천900 마리의 대왕고래를 포함한 4만6천39마리의 고래를 죽여 55만6천721t의 기름을 빼냈다. 포획두수에서 南氷洋은 세계의 84%, 産油量에선 91%를 차지했다. 日本은 1940∼41년 「시즌」에 고래 9천948마리를 잡아 최고기록을 남겼다. 아무리 기름진 南氷洋이지만 이런 대량살륙을 계속, 지탱할 순 없으리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명백해졌다. 1941년 12월8일의 진주만공격은 다행히 수난의 고래가족들에게 잠시나마 숨돌릴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된다.

日帝에 끌려간 捕鯨선원들

태평양전쟁의 전단이 열리자 日本 海軍은 6척의 포경모선을 포함한 60척의 포경선을 징발했다. 南氷洋포경은 중단됐다. 모선 6척은 전쟁중 몽땅 격침됐다. 南氷洋에 나다니던 韓國선원들은 더욱 비참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팔팔한 30대 초반의 그들은 전장으로 끌려갔다. 捕鯨선원들의 눈밝기는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고래의 噴湖를 발견하려면 視力1·5이상의 눈이 필요했다. 그들은 쌍안경을 視野가 좁다고 팽개치고 맨눈으로 고래숨기둥을 찾아내던 이들이다. 그들중 20여명이 눈 밝은 죄로 日本 海軍에 「미하리」(見張) 요원으로 끌려갔다. 3개월간의 교육을 받곤 주로 수송선에 배치됐다. 「마스트」꼭대기의 둥지같은 관측대에서 적함이나 잠수함을 찾아내는 게 일이었다. 20여명중 4명이 수송선 격침으로 수중고혼이 됐다.

얼굴의 뼈대가 확실하여 순박하고 건강하게만 보이는 金철쇠씨는 長生浦에선 전설적인 인물이 돼 있다. 그도 「미하리」로 징용됐다. 원유수송선 第3總同丸(8천900t)에서 長生浦의 고향 친구인 李화수씨와 함께 12시간씩 교대로 눈을 두리번거려야 했다. 1943년 12월 8일 하오 5시40분, 金씨는 「마스트」의 관측대에 있었다. 總同丸은 日本을 떠나 목적지인 「사이판」섬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金씨는 왼편 저쪽 해상에서 갑자기 흰거품이 부글 일더니 總同丸을 향해 4條의 흰 線이 부채처럼 퍼져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경보 「보턴」을 누른 金씨는 『좌현, 4천m, 어뢰다!』고 보고했다. 總同丸은 죽을 힘을 다해 避雷선회를 했지만 좌현 복판에 한방을 맞았다. 기관실이 폭파되고 기관부원 8명이 즉사했다. 배엔 화재가 발생했다. 승무원들은 진화작업에 死力을 다했다. 밤새워 불을 끄고 보수작업을 벌인 결과 겨우 항해를 할 수 있게 됐다.

다음날 새벽 2시50분께 美國잠수함이 또 나타나 「必殺의 어뢰」를 발사했다. 기름「탱크」의 대폭발, 金씨는 본능적으로 물에 뛰어들었다. 기름 섞인 물을 잔뜩 마시고 떠오르니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장기판 3개를 붙여놓은 정도의 판자였다.
『그날은 풍랑이 셌어요. 기름을 마셔 속이 타서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저 판자만 죽어라고 붙들었습니다』

金씨는 표류했다.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죠. 꿈에 허깨비를 보는듯 몽롱한 상태였어요. 떠다니다가 기진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그게 잠이었습니다』
金씨는 바닷물을 마시지 않았다.

표류3일째 날치가 金씨의 목에 부딪쳐 판자 위에 뚝 떨어져다.
『이놈아 네가 나를 살리는구나』―金씨는 이것을 그대로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표류 4일째 밤에 金씨는 日本海軍 第301艦에 구조됐다. 總同丸승무원 126명중 120명이 죽고 6명만이 구조됐다. 李화수씨도 죽었다. 金씨는 구조되고 나서야 오른쪽 갈비뼈 2개가 부러져 있는 것을 알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가 한창 몸이 좋았을 때야. 상어떼가 덤벼들지 않았기에 살 수 있었지요. 「훈도시」가 찢어져 너풀거렸는데 이것을 보고 자기보다 더 센 친구로 생각하여 상어가 달려들지 않았는지 모르지』

金씨는 「사이판」해군병원에서 40일간 치료를 받았다. 눈은 바다에서 새어나온 기름에 묻어 20여일간 보이지 않았고 폐염까지 앓았으나 살아났다. 金씨는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는 퇴원하여 제대하자 목발을 짚고 長生浦로 돌아왔다. 집에서 푹 쉬는 사이 옛날의 건강을 되찾게 되자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그는 다시 日本水産에 취직, 해방 전까지 日本연안포경에 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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