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어부 데려오는 기자와 없다는 기자

[同行 취재기] 납북어부 김병도, 사스가 창궐하는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귀환하다
[同行 취재] 납북어부 김병도, 사스가 창궐하는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귀환하다 (2003년 6월호)




한국 정부로부터 임시여행증을 발급받아 30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 순전히 한 민간인의 노력으로 2000년 李在根, 2001년 陳正八에 이어 2003년 납북어부 金柄淘씨가 세 번째로 북한을 탈출해서 살아 돌아왔다. 북한에 남아 있는 납북어부는 470명으로 추산된다.
● 북한 공작원에 의해 1973년 11월 유인 납치된 대영호 선원 5명은 북한에 모두 살아 있었으나, 이들은 정부의 납북자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 남기고 간 딸은 결혼, 아내는 病死

金演光 月刊朝鮮 편집장 (yeonkwang@chosun.com)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다음날 脫北 시도


<정부의 임시 여행 증명서를 받고 기뻐하는 김병도씨(오른쪽). 왼쪽은 귀환을 주선한 최성룡「납북자가족 모임」회장.>


魯迅(노신)은 이렇게 묻는다.

『쇠로 된 방이 하나 있다. 창문이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가 없다. 안에는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래잖아 그들은 숨이 막혀 모두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혼수상태여서 죽음의 괴로움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지금 큰 소리를 질러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운다면, 살아날 가망도 없이 죽음의 괴로움만 주게 된다. 그들을 소리쳐 깨워야 할 것인가』

魯迅은 『몇 사람이 깨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깰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自答(자답)했다.

함경남도 함주군 상창리 「함흥시 청년 염소 목장」 목장원 金柄淘(김병도·50)씨는 쇠로 된 방 안에서 말라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지난 4월17일 한국에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 편지가 그를 죽음 같은 체념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고기잡이 배의 기관장으로 일하던 그는 30년 전인 1973년 11월24일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에 납치됐다.

경상남도 통영에 살고 있는 그의 어머니 李周順(이주순·78)씨가 2002년 11월에 쓴 편지가 해발 1760m인 황봉 산자락에서 살고 있는 그에게 도착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다. 편지는 어머니와 두 남동생과 네 누이가 모두 잘 살고 있고, 그가 납북될 때 백일이 채 되지 않았던 딸 영아(30)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연길로 나오면, 어머니와 동생을 만날 수 있다」는 소식도 함께 왔다.


사람보다 염소가 더 잘 먹는 북한

편지를 받기 1주일쯤 전부터 그는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납북되기 전 부르던 한국 유행가 가락을 흥얼거리자 부인(50)이 『아바이, 요새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묻기까지 했다. 편지를 받던 날 아침에는 까치가 집으로 몰려와 울었다.

편지를 가슴에 품고 염소 방목을 나간 그는 산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편지 안에 동봉된 가족 사진을 보며 변해 버린 어머니와 누나 동생들의 얼굴에서 옛 모습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金씨는 산길에 쓰러진 餓死者(아사자)들의 시체를 보면 「그나마 나는 안 굶어 죽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주민을 굶겨 죽이고 있는 것이 金正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보다 염소가 더 잘 먹는 게 당연하다』는 목장 지도원의 말에 그는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았다. 외부의 정보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강철 감옥」 안에서 그는 죽은 듯 살아 있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그 쇠로 된 방에 구멍을 냈고, 金씨는 강철 감옥 밖에 희망의 세계가 있다는 기억을 힘겹게 되살려냈다.

지난 4월18일 아침, 중국을 향한 그의 탈주는 시작됐다. 편지를 받은 지 딱 하루 만의 일이었다.

아내에게는 『연길에서 동생을 만나면 돈을 좀 주지 않겠나. 쌀을 사 가지고 오겠다』고 했고, 그의 부인은 『아바이 생각대로 하시오』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백 리 길을 걷고, 화물 열차 위에 올라타고, 지나가는 화물차에 몸을 싣고 무작정 북쪽의 국경지역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통행증도 신분증도 없었다. 어린 시절 길거리의 점쟁이에게서 들은 『당신은 아무리 객지에 멀리 나가 있더라도 어머니 臨終(임종)은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한 가닥 위안이었다.

4월21일 저녁, 그는 두만강 물에 발을 담갔다. 오싹할 정도로 물이 차가웠다. 팬티만 입고, 겉옷은 비닐에 싸서 머리 위에 이었다. 여울목을 물어서 그곳으로 나왔지만, 물은 한 길 이상이나 됐다. 며칠 전 비가 와서 물살도 거셌다. 수영을 잘하는 어부 출신이지만, 서너 차례 시도 끝에 겨우 강을 건넜다.

어둠 속에서 강을 건넌 그는 延吉(연길) 주변으로 이동해 몸을 숨겼다. 네 차례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그는 통영의 가족들과 한 차례 전화통화를 했다. 그는 구원의 손길이 다가오기를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어머니 이주순씨와 金씨의 동생 柄魯(병노·45)씨는 인천공항에서 4월27일 오전 延吉(연길)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30년을 기다리던 장남을 만나러 가는 老母(노모) 李씨는 곱게 립스틱을 바르고, 귀고리까지 한 차림이었다.

전날 통영에서 먼 길을 올라온 李씨는 피곤했는지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 증후군) 예방용 마스크를 쓴 채 곧 잠이 들었다. 기자의 옆자리에 앉은 동생 병노씨는 3년에 걸친 「김병도 구출작전」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얘기했다.

병노씨는 月刊朝鮮 2000년 7월호를 통해서 형 병도씨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납북자 가족 모임」 崔成龍(최성룡·45) 회장과 月刊朝鮮 金容三 기자가 구출해 온 납북어부 李在根(이재근)씨가 『김병도는 함흥에 살고 있다』고 증언한 것이다.

병도씨 가족들은 장남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했다.

병노씨와 어머니, 김병도씨의 딸 영아씨는 기사를 보고 곧바로 충남 서천의 崔成龍 회장 집을 찾았다. 딸 영아씨는 『제발 아버지를 데려와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2001년 여름 납북어부 陳正八(진정팔)씨가 두 번째로 귀환하자, 병노씨 가족의 발걸음은 더 자주 서천으로 향했다.

崔회장은 이재근씨의 증언을 토대로 여러 번 사람을 보내 함흥시 사포에 살고 있다는 김병도씨를 수소문했다. 누구도 주소를 확인하지 못했다. 두 번째로 귀환한 陳正八씨는 『김병도는 살기가 어려워 당에서 염소를 몇 마리 얻어 산골로 들어갔다』고 증언했다.

비슷한 시기 崔회장은 북한에 있는 납북어부 한 사람과 선이 닿았다.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와 김병도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 왔다.

崔회장은 지난해 11월 김병도씨의 정확한 주소를 알아냈다. 가족들이 편지를 썼지만, 너무 궁벽한 산골이어서 조선족들이 선뜻 북한으로 들어가려고 나서지를 않았다.


입국 심사에 걸린 崔成龍 회장

4월27일 낮 12시.

延吉공항 입국 심사장에서 崔成龍 회장이 붙잡혔다.

입국 심사대의 公安(공안:중국 경찰)은 崔회장의 여권을 보고 컴퓨터에 뭔가 입력을 하더니, 곧바로 다른 공안들을 불렀다. 공안들은 崔회장을 「公安 分室」이라는 팻말이 붙은 사무실로 데려갔다.

먼저 입국 심사를 마치고 崔회장을 기다리던 기자는 「崔회장이 강제 추방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초조하게 입국 심사대 주변을 서성였다. 김병노씨 母子는 멀찌감치 떨어진 입국 심사 통로에 서 있었다.

10분쯤 지나 崔회장이 무사히 풀려 나왔다.

崔회장은 『조선족인 공안이 우리말로 「납북자 가족 모임」에 대해서 묻더니, 상부에 뭔가 보고를 했다. 한참 있다 지시를 받고 풀어 주더라』고 했다. 나중에 北京(북경)에서 만난 우리 정보기관 관계자는 이런 설명을 해주었다.

『중국 정부가 「우리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 조심하라」고 경고를 한 것이다. 계속 지켜보다가, 일정한 선을 넘었다 싶으면 강제 추방한다. 그게 중국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이다. 崔회장이 한국 주민인 납북어부를 구출한다는 사실을 감안해서 추방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병도가 맞나?』, 『어머니가 옳습니까?』

延吉공항에는 崔회장의 일을 돕고 있는 조선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崔회장과 기자 단 둘이 단출하게 나섰던 2001년의 「납북어부 진정팔 구출」 때와 달리 이번에는 미국과 일본 언론의 기자 두 명까지 따라 나서서 일행이 6명으로 불어났다. 두 대의 택시에 나눠 타고, 김병도씨가 숨어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목적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내려 분산해서 움직였다.

뜻밖에도 은신처는 연길 시내 한복판이었다. 『시골로 가면 너무 쉽게 눈에 띌 것 같아서,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번잡한 곳을 택했다』는 게 崔회장의 얘기였다.

병노씨 母子가 다른 방에 짐을 푸는 사이, 崔회장과 기자 일행은 곧바로 김병도씨가 있는 방으로 갔다. 새까만 얼굴에 바짝 마른 몸, 굵은 손가락 마디 마디가 평생 험한 노동일을 해 왔음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키는 170cm에 몸무게는 58kg이라고 했다.

악수를 하면서 보니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보통 사람의 두 배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崔회장이 먼저 인사를 했다.

『전화로 얘기 나눴던 崔成龍입니다. 납북어부 가족들을 대신해서 선생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밖에 어머니와 동생이 와 계십니다』

김병도씨는 며칠 사이 자신의 주변에서 폭풍처럼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5분쯤 지나서 어머니 이주순씨와 동생 병노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30년은 긴 시간이었다. 병도씨는 어머니를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

『나를 못 알아보겠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병도가 맞나?』

『어머니가 옳습니까?』

어색한 시간이 길어지자, 옆에 서 있던 동생 병노씨가 나섰다.

『형님, 아버지 제삿날을 음력으로 압니까』

『음력으로 유월 초사흘날 아이가』

『그래 맞다. 니 아버지 이름은 김삼주고』

그순간 병도씨는 어머니를 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며 『아이고 내 새끼』,『아이고, 병도야』라는 말만 계속했다.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살아 계시다니. 어머니, 30년 만에 처음 어머니를 불러 봅니다』

병도씨는 어머니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계속 울기만 하자, 『어머니 몸 생각하셔서 그만 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저도 살아 있고, 어머니도 살아 있으니 됐습니다. 제가 남은 여생이라도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습니다』라고 위로했다.

병도씨는 어머니에게 30년 만에 처음으로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 앞으로 100년, 200년 오래오래 사십시오』

어머니 이주순씨는 아들의 손을 잡고 납북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네가 북한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네 책상 서랍을 뒤지니까, 「태양 담배」가 있더라. 담배가 딱 한 개비 남았는데, 그 담배를 보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아나. 네가 무사히 돌아오라고 굿도 하고, 치성도 드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돌린 딸의 애절한 편지

병노씨는 한국에서 가져온 가족들의 사진 20여 장을 형 앞에 펼쳐 놓았다.

병도씨는 연길에서 산 돋보기를 꺼내 쓰면서, 『어머니가 쓰시는 안경을 제가 쓰네요』라며 미안해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딸의 결혼식 기념사진을 집어 들었다.

『이 아이가 우리 영애인가요. 어머니 저는 영애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름을 바꾸셨나요?』

『네가 납치되고 나서 「영애라는 이름이 안 좋다」고 해서, 영아로 바꿨다』

동생 병노씨는 『형수는 형이 납치되고 3년 후에 再嫁(재가)를 했고, 얼마 안 돼서 병으로 죽었다』, 『어머니와 내가 영아를 키웠다』고 얘기해 줬다. 병도씨는 동생의 손을 잡고 『네가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이제 어머니는 내가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영아씨는 아버지를 그리는, 애절한 편지를 할머니 편에 보냈다.

<너무나 많은 한을 쌓고 쌓으며 살아왔지만 영아에게도 이제 우리 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고부터 새로운 세상과 행복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딸 영아의 30년 한을 풀어 주시고 이제는 딸 영아를 품에 안아 주시겠지요. 너무나 불러보고 싶었던 아버지. 한 세상 언젠가 불러 보고, 사랑받고 싶었던 아버지.

이제는 저의 소원을 좀 풀어 주세요.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며 지금의 마음은 세상 어디라도 달려가고 싶어요. 딸 자식의 마음을 알아주시겠지요.

지금은 만삭이라서 만나러 가지도 못하는 이 마음을 알아 주세요. 아버지 곧 며칠 있으면 세상에 한 생명이 탄생합니다. 바로 아버지의 손자요.

아버지.

30년 동안 멀고도 가까운 북녘땅에서 몸 편안히 잘 계셨는지요. 어머니와 동생들도 건강한지 모두들 보고 싶어요.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영아. 우리 다 같이 상봉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요. 그 날을 하루 속히 기원합니다.

아버지.

저의 남편은 작은삼촌의 기술(금·은 세공업)을 전수해 귀금속 기술자로서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사위도 아버지를 무척이나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한답니다. 지금은 대구에서 작은삼촌 집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작은삼촌을 수십 년 지켜보니, 술만 드시면 아버지를 생각하며 「대동강 편지」라는 노래를 울부짖는데, 제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삼촌의 마음도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하루 빨리 아버지를 뵙기를 천지신명님께 기도하며, 아버지 품에 안길 그날을 생각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2003년 4월25일 새벽.

아버지 딸 영아 올림>

사진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세 모자의 이야기는 끝 없이 이어졌다.

客(객)들이 오래 끼어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崔회장이 『金선생한테 딱 한 가지만 여쭤 보고 가족들만의 시간을 드리겠다』고 했다. 김병도씨 일행이 자진 월북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기관 고장으로 백령도 인근에서 표류



김병도씨가 납북 당시 타고 있던 대영호의 선원 6명은 정부의 공식 납북어부 명단에 등록돼 있지 않다. 한국의 정보당국은 이들이 대영호 船主(선주)의 아들 김영두씨와 모의해서 월북했다는 혐의를 갖고 있었다. 출항증을 끊지 않고 배가 항구를 떠났고,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20代였다는 점 등이 그 근거였다.

기관장이었던 김병도씨는 『기관이 고장 난 상태에서 표류하다가 북한 경비정 세 척에 예인돼서 끌려갔다』며 「자진 월북」을 부인했다. 그는 『해주와 평양을 오가면서 1년4개월간 사상교육을 받는 동안 「한국으로 가겠느냐, 남겠느냐」는 물음에 한 번도 「남겠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선원이었던 김영두(50)와 조민철(53)은 청진에, 김양훈(51)은 평남 양덕에, 김동호(49)는 청진 나남구역에 생존해 있다고 한다.

통영(당시는 충무) 선적의 대영호는 피조개 잡이를 위해 1973년 10월 초부터 충남 안흥항에 머물고 있었다. 바람이 거세서 출항을 하지 못했고, 船主 측과 선원들 사이에 이익금 배분을 놓고 싸움이 났다.

선장과 선원들이 떠나 버려서, 현지에서 선장(이민우)을 구하고, 세 명의 선원을 새로 채용했다. 대영호에 남은 것은 선주의 아들 김영두와 김병도 두 사람뿐이었다. 병도씨는 『선장이었던 이민우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나이를 스물여섯이라고 했다가, 서른여섯이라고 하는 등 믿기 어려운 사람이었다』며 『납북된 직후부터 이민우는 사라졌고, 다시 볼 수 없었다』고 했다.

1973년 11월23일 밤 11시쯤 백령도 인근 해역에서 기관이 고장 났다. 3기통 가운데 2개만 움직여서 기관이 과열돼 김이 나고 있었다. 병도씨는 엔진을 식히기 위해서 엔진을 껐다. 그는 기관실에서 잠깐 눈을 붙인 뒤 새벽에 기관 수리를 끝냈다. 시동을 걸었지만 위치와 방향을 확인할 수 없었다. 나침반이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어슴푸레하게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고 동이 틀 무렵 세 척의 북한 경비정이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빠르게 다가왔다. 경비정 조타실 위의 붉은 글씨를 읽고 나서 김병도씨는 맥이 빠졌다고 한다.

「김일성 원수님을 수반으로 하는 당 중앙위원회를 목숨을 걸고 사수하자」

멀리 한국 군함이 지나가기에 웃옷을 벗고 흔들었으나, 한국 군함이 다가오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북한 경비정에서 기관총을 든 군관 한 명과 전사 한 명이 대영호로 올라 탔다. 김병도씨는 기관실에, 선장과 다른 선원들은 선실에 갇혔다.

11월24일 아침 9시쯤, 대영호는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軍港에 예인됐다.

선원들은 대영호 안에서 밥을 지어 간장하고만 먹었다. 이날 1차 심문이 이뤄졌고, 다음날(11월25일) 다시 심문이 진행됐다. 이날 밤 선원들은 한 시간 정도 배를 타고 이동해 해주항에 도착했다.

해주항에는 이들을 위해 작은 버스가 하나 대기하고 있었다. 선원들은 해주호텔과 평양의 금수산 여관을 오가면서 강도 높은 세뇌교육을 받았다. 「미제 식민지하의 남조선 경제」, 「혁명 역사」, 「사회주의 철학」등의 강좌를 들었다.

1974년 한 해 내내 사상교육이 계속됐고, 1975년 3월16일에야 김병도씨는 함흥의 「6월1일 전기공장」의 선반공으로 배치됐다. 고향 후배이자 선주의 아들인 김영두는 함흥의 「함흥 자동차 부속품 공장」으로 갔다.

공장에 배치되기 직전 「공화국에 남으라」는 회유가 이틀에 한 번 꼴로 계속됐다고 한다. 북측 담당 요원들은 『지금 박정희는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 동무들은 내려가는 즉시 죽는다』고 설득했다. 김병도씨는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함흥行은 결정됐다.


한국 정보당국 『북한 공작원이 유인 납치』

崔회장은 우리 정보기관이 의심하고 있는 자진 월북 가능성에 대해서 물었다.

―왜 出港證(출항증)을 끊지 않고 항구를 떠났습니까. 전과자나 對共 혐의자들이 배를 탈까 봐 단속이 심했을 텐데.

『작은 배라서 나도 정식 자격증이 없었고, 선장도 자격증이 없었어요. 출항증을 끊지 않고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기관이 고장 나면 닻을 내리는 게 상식인데, 왜 닻을 안 내렸습니까.

『나는 엔진을 고치느라고 기관실 안에서 밤을 샜어요. 밖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선주 아들 김영두의 외삼촌이 북한에서 고관으로 살고 있다고 하던데.

『모르겠어요. 김영두한테 그런 얘기를 못 들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우리 정보기관 관계자로부터 「대영호 피랍」에 관한 결정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납북된 김영두가 2000년 여름부터 통영의 가족들을 접촉하려고 시도했다. 그때부터 대공 혐의점을 두고 대영호 사건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우리는 선장 이민우를 의심하고 있다. 이민우를 접촉한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이민우는 한국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북한 공작원인 이민우가 젊은이들을 유인 납치해서, 월북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 인차 서울 간다. 가서 만나자』

4월27일 밤 9시쯤 김병도씨는 통영시 인평동에 모여 있는 가족들과 전화통화를 했다.

딸 영아씨도 이곳에서 아버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金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영아냐, 아버지가 30년 만에 이름을 불러 보는구나』

金씨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아버지 인차(곧) 서울로 간다. 그때 만나자. 너 보고 싶어서 가야겠다. 대구에 가 있어라. 아버지가 이제 간다』

金씨는 가족들과 통화를 끝내고 『죽어도 살아도 어머니 곁에 있겠다. 집에 가서 아버지 묘소부터 찾아야 하겠다』고 결심을 밝혔다.

2001년 중국으로 탈출한 납북어부 陳正八씨가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해, 한국行을 설득하느라 진을 뺐던 崔成龍 회장은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崔회장은 陳正八씨가 북한에서 얻은 아들 진용규(32)를 2002년 6월에 추가로 북한에서 구출해 온 과정을 설명하고, 『金선생님 북한 가족들도 한국으로 구해 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그를 안심시켰다.

4월28일 아침 7시.

은신처 주변은 새벽부터 아파트 공사장의 소음으로 시끄러웠다.

김병도씨 방으로 갔더니 세 母子는 잠을 한숨도 못 잔 표정이었다. 어머니 이주순씨가 마신 우황청심원 빈 병 세 개가 방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던 金씨는 『눈물로 세수를 했습니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딸 편지를 읽고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핏덩이를 남겨 두고 갔으니 영아가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30년 만에 아버지라고 나타났으니…』

밖으로 나가기가 불편해 방 안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조선족 안내인이 밖으로 나가서 만두를 몇 판 사 가지고 왔다.

金씨는 『「꼬부랑 국수」(라면)를 처음 먹어 본다』고 했다.

金씨는 북한에서 모범적인 노동자였다.

1980년 8월8일 노동당에 가입했고, 1983년부터 12년간 작업반장으로 일했다. 국기훈장 2급을 하나, 국기훈장 3급을 하나, 공로메달을 1개 받았다. 1978년 1월2일에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고난의 행군」은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1994년 초 조금씩 나오던 배급이 완전히 중단됐다. 옥수수죽에 소금으로 연명했다. 그나마 배불리 먹지 못했다. 유일한 재산이던 자전거와 북한산 흑백 TV를 장마당에 내다 팔았다. 그는 1995년 5월 「유정 농장」으로 직장을 바꿨다.

중앙당에 신소를 하고, 월북자를 담당하는 市·黨담당 부서에 찾아가서 『공화국을 찾아왔는데 굶겨 죽일 거냐』고 수십 차례 탄원을 한 결과였다.

金씨는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하지만, 식량 사정은 나아진 게 거의 없다. 외국에서 식량지원이 늘어나 그나마 죽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었다』며 『외국의 지원이 끊어지면 「고난의 강행군」을 다시 해야 할 거라는 얘기가 돈다』고 했다.

韓·美·日 3國의 기자들은 오전 내내 金씨를 붙잡고 취재에 열을 올렸다.

워낙 궁벽한 산골에 산 탓인지 金씨는 북한의 핵개발이나 이라크 전쟁, 북한의 최근 전쟁 대비 상황들을 상세하게 알지 못했다. 그래도 북한의 최근 소식에 목말라 하는 세 기자의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지난해 7월1일 경제개혁 조치를 취했는데, 생활에 무슨 변화가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더 힘들어졌어요. 인민들이 원망을 많이 합니다. 월급이 열 배 올랐으면, 물건값은 20배, 30배 올랐습니다. 국가에서 공급해 주는 쌀이 1kg에 8전 하던 것이 40원으로 올랐습니다. 잡곡은 6전에서 29원으로 올랐습니다』


『장마당에서 한국이 보낸 비료 산다』

―식량 사정은 어떻습니까.

『작년 농사가 완전히 흉년이어서 올해 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나는 텃밭으로 200평을 가지고 있는데, 보통 옥수수를 400kg 수확했습니다. 지난해에는 70kg 밖에 수확을 못 했어요』

―비료와 농약은 어떻게 조달합니까.

『다 장마당에서 삽니다. 한국에서 보낸 비료가 장마당에서 팔립니다. 한 해에 비료가 70kg 정도 필요한데, 1kg에 130원 합니다. 농약도 비슷한 가격이구요』

―식량배급은 나아졌나요.

『우리 목장에서는 성인 1인당 450g을 주는데, 한 끼에 150g이니까 아껴서 겨우 먹고 삽니다. 염소 몰고 산길을 다녀야 하니까 늘 허기가 들어요. 북한 사람 70~80%는 지금도 옥수수죽을 먹고 삽니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했다는 것을 압니까.

『TV에서 이라크와 전쟁을 시작했다, 마지막에 이라크 수도가 점령됐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미국이 곧 쳐들어온다,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습니까.

『지난해 연말부터 「미국 대통령 부시는 전쟁광이다. 꼭 전쟁을 한다. 모든 경각심을 높여서 미제가 전쟁을 일으키면 맞받아 싸우자」고 얘기를 했습니다. 이라크 전쟁 나고서 그런 얘기를 더 했습니다』

―미군의 폭격에 대비해서 훈련을 한 적이 있나요.

『없었습니다. 다들 「전쟁이 일어나도 우리 염소 목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 산다」고 수군수군 얘기를 합니다』

―인민군이 미국에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믿나요.

『「전쟁 나면 미국이 반드시 핵무기를 쓴다. 전쟁은 핵무기로 결판 나는 게 아니다. 주체사상으로 일심단결하면 반드시 이긴다」고 교육을 합니다』

―북한에 핵무기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나요.

『미국이 전쟁을 먼저 일으키고, 전쟁이 나면 핵전쟁이 난다고 합니다. 일반 인민들이 「우리라고 핵무기가 어찌 없겠는가」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金正日은 딸만 넷이 있다. 아들을 보려고 부인을 많이 얻었다』

노동당원인 김병도씨는, 노동당 총서기이자 국방위원장이며 북한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인 金正日의 사생활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金正日에게 부인이 네 명 있다는 사실을 압니까.

『여러 명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에서는 뭐라고 설명을 합니까.

『뭐라고 얘기하질 않습니다. 돌아다니는 얘기는 「아들이 없어서 아들을 얻으려고 부인을 여럿 얻었다」는 거예요』

―김정남, 김정철이라는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걸 모릅니까.

『딸만 넷이라고 들었습니다. 모든 인민들은 (金正日에게) 아들이 없는 걸로 압니다』

―金正日이 권력을 아들에게 3代째 대물림하면 북한 인민들은 어떻게 반응을 보일까요.

『3代를 물려 주면 북조선이라는 존재는 없어질 겁니다. 모든 인민들이 말은 안 해도 의견과 불만이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의 손자이자, 경애하는 지도자의 아들이 권력을 물려받는 건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요.

『염소보다 못한 인민들이라도 그렇게 권력을 물려 주면 참지 않을 겁니다』

―金正日이 코냑과 곰 발바닥 요리를 좋아하는 천하의 한량이라는 걸 아나요.

『정말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지도자 동지는 끊임없이 인민을 위해 현지지도를 하고 다니신다」고 얘기합니다. 나는 金正日을 좋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지고 있지만』

―金正日이 염소 농장을 현지 지도한 적이 있나요.

『2001년 5월24일에 했습니다』

―金正日을 봤나요.

『현지지도 와 있는 동안 목장원들은 다 갇혀 있었습니다』

―주민들을 보지 않는 현지지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한국, 미국에서 보내는 쌀을 본 적이 있습니까.

『동네 배급소에서 「대한민국 기증」이라는 글이 쓰인 한국 쌀, 「미국에서 보내는 선물」이라는 한글이 쓰인 미국 쌀, 일본 글이 쓰인 일본 쌀을 봤어요』

―한국 쌀 포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내 고향에서 온 쌀이구나」 하고, 밖에 내놓고 얘기는 못했지만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미제 승냥이」라고 욕하는 미국이 쌀을 보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이나 일본이 어떻게 적국인 북한에 쌀을 보냈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고맙다고 생각하지 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요즈음은 「미제 승냥이」 이런 얘기를 별로 안 해요』

―北에 있을 때 아버지 제사를 지내셨습니까.

『예』

―식량난인데 무얼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냈습니까. 조기는 올려 놓았나요.

『물고기 잡으러 나왔다가 납치돼 왔는데, 30년 동안 조기 한 마리 못 먹었어요. 오징어는 1년에 한두 마리 먹을까. 제사 지낼 때 옥수수밥 올려 놓고, 밀가루전 부쳐 놓고, 나물 두어 가지 올려 놓았어요』

점심을 먹고 나자 병도씨는 『어제 한숨도 못 자서 잠을 자야겠다』고 요청했다.


사스 때문에 북경行 열차 이용이 막혀

崔成龍 회장은 다른 방에서 휴대전화로 통일부 직원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崔회장은 김병도씨가 연길로 탈출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 4월24일 통일부 장관 앞으로 김병도씨의 귀환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4월27일 인천공항을 떠나기 직전 통일부 측에서는 『관계당국 사이에 협의가 잘 진행됐다. 중국의 한국공관에서 崔회장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할 것이다』고 알려 줬다.

崔회장은 『우리 공관원이 연길로 와서 김병도씨를 데려갈 모양』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4월28일 정오까지 崔회장의 휴대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김병도씨를 北京의 한국 대사관으로 안내해 가는 일은 서천 水協(수협) 직원 崔成龍씨의 몫이 돼 가고 있었다.

문제는 「사스」였다.

2001년 가을에 귀환한 陳正八씨의 경우는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는 일반 열차를 타고 北京으로 이동했다. 延吉역에 확인을 해보니, 사스 예방을 위해 北京으로 가는 승객들은 전원 신분을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겨 둔다고 했다.

北京으로 가는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4월28일 저녁, 다음날 아침 한국으로 떠나는 김병노씨와 어머니를 위해 송별연이 열렸다. 어둠 속에서 가까운 식당으로 옮겨 갔다. 시커먼 얼굴의 병도씨는 누가 봐도 「북조선 사람」으로 여길 만큼 눈에 띄었다.

4월29일 새벽 4시, 김병노씨와 어머니는 長春(장춘)으로 떠나기 위해 일어났다. 이틀 밤을 세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 탓인지, 어머니와 병도씨는 담담하게 방 안에서 인사를 나눴다. 마음이 바빠진 것은 崔成龍 회장이었다.

崔회장은 오전 8시(한국 시각 9시), 마지막으로 통일부 직원과 전화통화를 하더니, 『北京은 너무 멀고 瀋陽(심양)의 한국 영사관으로 가자』고 했다. 심양行 기차도 이용하기 어려워, 봉고형 승용차를 하나 빌렸다. 비용은 500달러(60만원).

崔회장은 정부의 무신경에 흥분했다.

『힘 없는 통일원 직원만 전화로 닦달해서 뭐가 되겠어요. 연락할 사람들 같으면 우리가 연길 도착했을 때 어떻게 하라고 했겠지… 제 백성 구하러 특공대는 못 보내더라도, 민간인이 꺼내 오면 데려는 가야 할 것 아니에요. 언제까지 내가 납북어부를 북한에서 꺼내 와서, 대사관까지 데리고 가는 일을 해야 합니까. 대사관 영사관의 외교관들은 뭐하러 나와 있는 사람들입니까.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오전 9시 급하게 구한 봉고 승용차를 타고 심양으로 출발했다.

창궐하는 사스 바이러스로 중국은 초긴장 상태였다. 고속도로 이용료를 받는 아가씨들은 마스크를 두 개나 겹쳐 쓰고 일하고 있었고, 도로변의 마을 입구에는 예외 없이 의료진과 공안들이 길목을 막고 있었다.


중국 경찰, 吉林省 차량 심양 진입 봉쇄

길가 주유소의 재래식 화장실에 다녀온 타임紙의 김유성 기자는 기가 질린 모습이었다. 사스 예방용 마스크는 악취 예방용 마스크로 잘 이용됐다. 눈부신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중국은 공중 위생에서만은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격이 싼 딱딱한 좌석의 硬臥(경와) 열차를 타면, 가래침을 바닥에 뱉고 발로 슬쩍 문지르는 승객들이 적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객차 바닥은 물 청소를 한 듯 번들거린다. 그 위에 호박씨·해바라기씨 껍질을 끊임없이 뱉아 댄다.

연길 시내 길거리에 마구 버려진 음식 찌꺼기들, 시궁창처럼 질퍽거리는 길거리, 검은 물이 흐르는 개천이 이번에는 무심하게 보이지 않았다.

중국 출장을 오면서 주위의 걱정하는 분들에게 『연길은 서울보다 더 안전하니까 안심하라』고 얘기를 했다. 사스를 피해가는 발걸음이 공교롭게도 사스의 진앙지로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었다.

오후 8시쯤. 고속도로에서 심양으로 빠져 나갔다.

공안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吉林省(길림성) 번호판(吉자가 맨 앞에 쓰여 있음)을 단 차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심양은 遼寧省(요녕성)의 州都다. 조선족 안내원이 다가서자 공안은 『3m 뒤로 물러가라』고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길림성 州都 장춘에서 이날 「첫 사스 환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와서, 「길림성 차량의 심양 진입을 막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공안들은 우리 차를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시켰다.

그렇다고 연길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속도로변에서 내려, 걸어서 심양으로

우리 일행은 심양 교외로 보이는 지역의 고속도로가에 차를 세웠다. 차는 연길로 보내고 어두컴컴한 비탈을 걸어 내려가 큰길을 찾아냈다.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심양의 西塔(서탑)에 있는 한국 식당으로 갔다.

여행용 가방을 든 崔회장 일행을 보자 식당 여종업원은 『우리는 北京에서 온 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손을 내저었다. 『우리가 北京에 갔다올 만큼 용감한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하자 여종업원은 방을 하나 내주었다.

식당에 비치된 4월29일자 遼寧日報社의 「朝鮮文報(조선문보)」 1면 헤드라인은 「심양서 첫 사스 의심 환자 발견」이었다. 그 밑에는 「심양시 인민정부가 시민들에게 고함」이라는 사스 예방법이 큰 활자로 소개돼 있었다.

우리 일행이 짐을 푼 모텔 앞에는 커다란 재래식 「공중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사스가 화장실을 통해 번진다」는 이야기가 기억 나 일행이 모두 찜찜한 표정들이었다.

4월30일, 취재기자 3명은 낮 12시20분에 심양을 떠나는 인천行 비행기표를 끊었다. 「어차피 오전 중에 우리 공관 직원이 김병도씨의 신병을 인수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崔회장은 아침 일찍부터 다시 통일부 직원을 들볶았다.

『기다리라고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직장에서 휴가 얻어서 나온 사람이오. 내가 왜 납북어부를 모시고 숨어다녀야 합니까. 정부가 이재근씨나 진정팔씨 때와 달라진 게 뭐가 있어요』

崔회장은 한국 공관 담당자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전화통화를 했다.

『본국에서 아무런 통보를 받은 것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부처 간에 협의가 다 끝났다」는 통일부 쪽의 얘기와는 딴 판이었다. 崔회장은 통일부와 심양의 한국 공관 측과 계속 연락을 했다. 「심양 공관에서는 김병도씨를 받아들일 수 없다. 崔회장이 김병도씨를 北京까지 데리고 가달라」는 게 심양 공관 측의 최종 입장임을 확인했다.

결국 기자들은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이날 밤 9시25분에 北京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사스 진앙지로 崔회장 혼자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김병도씨에 대한 신분증 검사는 『같이 심양에 여행 온 한국 사람인데, 여권을 잃어 버려 北京으로 여권을 만들러 간다』고 둘러대기로 했다.


심양 영사관의 임시여행증 발급에 감격

오후 4시쯤. 심양의 공관에서 『김병도씨의 임시여행증을 만들어 주겠다. 사진을 두 장 가져오라』는 연락이 왔다. 심양시내의 사진관에서 속성 사진을 찍어 공관 관계자에게 전달해 준 것이 오후 6시, 한 시간쯤 뒤 여권과 똑같이 생긴 임시여행증이 발급됐다.

여행증에는 김병도씨의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가 정확하게 기재돼 있었다.

崔회장은 심양 도심의 한 음식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병도씨에게 『이 순간부터 金선생님은 대한민국 정식 국민이 되셨다. 축하한다』며 여행증을 전했다. 마음을 졸이던 金씨는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며 고마워했다.

동행한 外信 기자는 여행증 발급에 감격해하는 崔회장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自國 국민이 북한을 탈출했으면 심양의 공관에서 당연히 받아줘야지, 왜 北京으로 데리고 가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우리 공관의 직무유기잖아요. 여행증이야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건데, 그렇게 좋아할 일이 되는 건가요』

어쨌든 「북한 주민」 김병도씨의 탈출은 그 자리에서 사실상 끝이 난 셈이다. 사스만 아니었다면….

북경行 밤열차는 인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리가 탄 열차는 4인용 침대칸이었다. 모두 32명이 탈 수 있는 12호 객차 안의 승객은 우리 일행 4명을 포함해 모두 5명이었다. 식당열차는 폐쇄됐고, 복도의 유리창은 환기를 위해 모두 열려 있었다. 바람에 하얀 커튼이 마구 날려 「유령 열차」같은 분위기였다.

세 객차 앞쪽에 심양 철도국 소속의 의사 3명과 간호사 4명이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의사가 기자를 보더니 『北京으로 가느냐. 어제까지 159명이 중국에서 사스로 죽었다. 너무 위험한데 안 가는 게 좋을 거다』고 충고를 해줬다. 한 의사는 체온을 측정하는 붉은색 빔을 기자의 이마에 쪼이더니 『아직은 괜찮은 것 같다』고 농담을 했다.

―그러는 당신들은 왜 北京으로 가나.

『우리는 심양 철도국 소속 의료진이다. 승객들 중에 사스 환자가 있는지 점검을 한다. 기차의 위생상태도 점검한다』

―北京에 가서 사스 퇴치하는 일도 할 건가.

『아니다. 우리는 철도에서 일한다. 내일 저녁 北京을 떠나 심양으로 돌아간다. 당신은 무슨 일로 北京에 가나』

―나는 한국에서 중국의 사스를 취재하러 왔다.

『당신 정말 대단한 용기다』

―사스하고 싸우는 당신들이 진짜 용감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열차에는 승객이 얼마나 탔나. 다 합쳐서 50명도 안 되는 것 같다. 혹시 의료진이 승객보다 많은 것 아니냐.

이때 한 여성 승무원이 다가와 의사들에게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캐물었다.

의사들은 『승무원이 「사스에 대해 너무 많은 얘기를 하는 건 좋지 않다」고 한다. 나중에 보자. 몸조심하라』며 객실로 들어갔다.

5월1일 오전 7시20분.

北京역에는 주로 外信을 위해 일하는 프리랜서 사진기자가 마중 나와 있었다.

중국계 미국인인 그는 『北京이 요새처럼 안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길거리 깨끗해졌지, 가래침 안 뱉지, 교통 뻥뻥 뚫려서 교통사고 안 나지, 술집·당구장·PC방 다 문 닫아서 싸움 안 나지, 얼마나 좋아』

사스 발생지인 廣東省(광동성)에서 사스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사진 찍었다는 그는 『사스 걸린다고 다 죽는 것도 아니다』며,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사스 환자, 중국의 사스 풍경을 사진 찍어 미국 통신사들에 보내느라 정신이 없다는 그는 『4월부터 매달 1만 달러(1200만원) 이상씩 벌고 있다』고 했다.

사스로 온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는 한 편에서는 「사스 특수」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재미 있었다.


북한 주민, 납북어부를 어찌할 것인가

北京에서의 일도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오후 6시쯤 한국 공관원에게 김병도씨를 인계해 주면서 다시 한 번 『굶어 죽을 지경이 돼서도 金正日이 정말 원망스럽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다.

『金日成·金正日 덕에 이만큼이나 유지된다고 생각했어요. 「미국만 남조선에서 나가면 통일이 된다, 통일만 되면 잘 산다, 군수공업에 쓰는 돈의 1%만 인민 생활에 쏟아도 잘 사는데 미국 놈들 때문에 못 산다」 그렇게 믿었어요』

그와 헤어져서 北京의 한 호텔에 들어갔다. 여기도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어져서 한적한 절간 같았다. CNN을 켜니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항모 에이브러햄 링컨 호에서 이라크 전쟁 종식을 선언하는 광경이 생방송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自由(자유)를 위한 전쟁을 얘기하고 있었다.

강철 감옥 속에서 질식해서 숨져 가는 북한 주민들에게 과연 누가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그런 각오가 있는 것일까?

지금 북한에는 납북어부 470명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조용히 숨져 가도록 방치하고, 그걸 한반도의 평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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