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북'을 외치며 북한의 참담한 인권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일주일간의 북한체험을 권유하고 싶다
[탈북수기①] 너희가 '자유'를 진정 아느냐
출처: 데일리엔케이
나는 2003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다.
나는 요즘도 세계지도를 보며 동남아 탈북루트를 되짚어 볼 때가 많다. '하나원'(남한정착 재교육기관)을 수료하고 제일 먼저 교보문고에서 구입해 벽에 붙인 것이 바로 이 세계지도다.
평소 지리공부를 하지 않았던 내가 깨알 같은 글씨가 아물거리는 세계지도를 먼저 구입한 이유는 자유를 찾기 위해 헤쳐온 수만리 장정과 언어,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들과 만났던 추억 때문이다.
그 넓은 지도에 한반도는 아시아 극동지역에 한마리 토끼마냥 중국대륙에 옹크리고 있다. 서울서 내 고향까지 차를 타면 불과 4시간 거리.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를 장장 수만리를 돌아 왔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다. 나의 경우처럼 중국과 베트남, 태국을 거쳐 자유를 찾은 탈북자들이 수천 명에 달한다. 자유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목숨 건 집착력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이다.
2003년 12월 20일 아침 8시. 방콕-서울행 대한항공이 인천공항에 내리던 날, 우리 6명 일행은 속으로 ‘자유만세’ ‘대한민국만세’를 불렀다. 과연 비행장에 내리니 땅 생김새도 기후도 이북과 비슷했다. 약간 상냥한 서울말씨를 쓰는 것 외에 사람들의 생김새도 거의 비슷하다.
‘이 땅이 과연 60년 동안 숙적으로 생각했던 남조선인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던 불가사의한 남한의 궁금증을 떨치기에는 그리 시간이 많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북한과 해외를 떠돌 때 남한방송을 즐겨 들은 탓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연세대학교에서 배움의 꿈을 펼쳐간다. 폐쇄된 북한의 세뇌교육만 받다가 남한의 개방교육, 글로벌 세상의 지식을 배워가는 대학생활이 얼마나 보람차고 재미있는지 모른다. 실로 이 모든 자유를 준 대한민국 국민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또 사생결단하고 자유를 찾은 보람이 얼마나 컸던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자유의 눈을 틔어준 남조선 방송
내가 신의주 모 대학에 재학 중이던 90년대 초 세계는 많은 변화를 맞았다. 소련과 동구권이 해체되고 92년에는 한중수교가 맺어졌다. 신의주 주민들은 자고 일어나면 개혁개방을 떠들었고, 시내 곳곳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자본주의 상업요소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단둥(丹東)과 접한 신의주 주민들은 압록강 건너편에 우후죽순처럼 솟는 고층 빌딩과 밤에 대낮처럼 밝은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중국의 개혁개방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개혁개방에 가장 호감을 가진 이들은 역시 대학생들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남조선 일인당 GDP가 1만달러를 넘었고, 자가용이 1천만대를 돌파했다’고 수군거렸다. 그중 사회가 민주화 되었다는 소리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남한방송을 듣기 위해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화교 왕가(王家)로부터 소형 반도체 라디오 하나를 구입했다. 단파 라디오 수신기는 자정이 넘으면 남한방송이 잘 잡혔다.
당시 신의주에는 자본주의 황색바람을 단속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내려져 당, 안전, 보위부 합동으로 비(非)사회주의 그루빠('그룹'의 러시아어)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여기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다.
다행히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가 남한방송을 듣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신의주에는 중국TV도 잘 잡힌다. 나는 틈만 나면 '아지트'(어느 가정집)에 가서 중국TV를 보았다. 대학당국은 학생들에게 기숙사에 모여 숙식하라고 하지만, 학생들은 사품(私品)을 보관하고, 개인생활 공간을 갖기 위해 학교 근처에 가정집을 아지트로 정한다.
물론 창문을 가리고, 볼륨을 최대한 낮추고 본다. 단둥TV, 선양TV, 베이징TV 등 여러 채널에서 무협, 디스코, 뉴스 등 다양한 프로들이 방영되었다. 특히 리샤오룽(李小龍), 청룽(成龍), 리렌제(李連杰)의 무협영화를 즐겨 시청했고, 뉴스는 화교들의 번역을 빌어 듣곤 했다.
97년 노동당 비서 황장엽씨가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을 통해 망명한 사실도 화교들이 뉴스를 보다가 알려주어 우리가 평양보다 먼저 알았다.
그 과정에 자유를 구속하고 폐쇄적인 수령우상화 교육만 시키는 북한 대학교육이 싫었고, 내 마음속에는 자유세상에서 배우고 싶은 욕망이 자라고 있었다.
90년대 중반 식량난이 겹치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때 우리 부모님도 굶어 세상을 떠났다. 굶주린 사람들은 행여나 국경지역에 먹을 것이 있을까 하는 희망으로 신의주에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기차지붕과 화물열차에 매달려 신의주로 흘러든 사람들은 역전 대합실에 노숙하면서 중국에서 넘어오는 옥수수와 밀가루를 훔쳐먹었다.
97년 여름, 북-중 국경 ‘조중 친선다리’(우의교)로 중국으로 탈출했다 북송 되는 주민들이 부쩍 늘어났다. '중국은 어딜가나 먹을 걱정 없고, 하루 일해도 인민폐 20원은 벌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귀가 솔깃했다. 평소 중국TV와 남한방송을 들으며 자유를 동경해오던 터라 울타리를 박차고 자유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허무하게 썩어갈 청춘이 아까웠다.
산산이 부서진 '차이나 드림'
나의 첫 번째 탈출은 2000년 11월에 있었다. 신의주 앞 압록강은 너무 넓고, 겨울이어서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첫 탈북 행선지로 정한 곳이 혜산이었다. 평양-혜산행 열차를 타고 가던 중 신성천역에서 열차 안전원(승무경찰)의 단속에 걸렸다.
북한에서 열차를 타자면 공민증(주민등록증)과 보안서에서 발급하는 통행증을 같이 소지해야 한다. 통행증도 없고, 더욱이 내 짐에서 중국지도가 나오자 열차 안전원들은 확인할 게 있다며 나를 단속한 것이다.
검열관실에 갇힌 나는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열차가 정전되어 멈춘 틈을 타서 차창을 열고 뛰어내렸다.
이렇게 혜산에 도착한 나는 먼저 압록강 폭이 좁은 지역을 선택하고, 국경수비대의 초소 위치도 알아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나는 고향을 향해 기도했다. ‘성공하여 조상의 무덤이 있는 이 땅을 다시 밟게 해주소서…’ 나는 서서히 강물에 들어섰다.
창바이(長白)현에 들어선 나는 빨리 국경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산속으로 들어갔다. 길을 잃으면 나무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될수록 마을을 피해 북쪽으로 들어갔다. 밤에는 낙엽을 덮고 자고 사흘 밤, 나흘 낮을 산속에서 헤맸다. 정작 국경을 넘기는 했지만, 말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영하 30도 추운 날씨의 산속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며칠 굶은 나는 비틀거리며 인가를 찾았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불렀지만, 중국인들은 북한사람을 잠 재우면 벌금을 내야 한다며 문전박대했다. 다행히 혼자 사는 조선족 아저씨의 집에 들어가 오래간만에 토장국과 쌀밥을 먹었다. 얼었던 마음도 녹고, 밀렸던 잠도 푸짐하게 잤다.
조선족들의 소개로 겨우 일자리를 찾은 곳은 허룽(和龍)에 있는 채석장이었다. 돌을 다듬는 채석장 일은 중국인들도 꺼려하는 중노동이다. 당장 안착할 곳이 없는 나는 돈은 나중에 받기로 하고 일부터 시작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망치로 돌을 까야 하는 채석장 일은 자칫 돌을 잘못 옮겨도 손가락이 짓눌려 문드러지고, 낙반에 맞을 위험이 항시적으로 뒤따랐다.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고, 밥은 증기빵(찐빵) 두 덩이에 멀건 죽 한 그릇이었다. 잠에 쫓기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간염이 도지기 시작했다. 이따금 몸이 아파 앉아 있으면 중국인들은 일을 잘 하지 않는다고 욕을 했다.
이렇게 겨울이 가고 여름이 왔다. 나는 피곤하고 속이 메스꺼워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나는 노반(老板: 사장)을 찾아가 집으로 가겠다며 품삯을 요구했다. 노반은 '너는 1년 동안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병도 고쳐야 하고, 여비가 있어야 집으로 갈 게 아니냐'며 통사정 했다. 노반은 8개월 품값으로 인민폐 천원(한화 13만원)을 건네주었다. 하루 20원씩 계산해 수천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차이나 드림’이 참담히 무너졌다.
외국군인에게 맞을 땐 피눈물 흘러
텐진(天津)행 기차를 타기 위해 옌지(延吉)역으로 가던 중 내가 탄 버스가 중국변방대의 검문에 걸렸다. 처음 변방대원에게 벙어리 시늉을 했지만 군인들은 다짜고짜로 나를 끌어내렸다.
군인 3명이 전기곤봉을 내 다리 사이로 들이대며 팬티에 숨겼던 돈 천원을 찾아내 빼앗았다. 병 치료도 못하고 고역을 치르며 꼬깃꼬깃 숨겼던 돈을 빼앗긴 나는 땅을 치며 울분을 토했다. 아무리 사정해도 중국군인들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돈을 빼앗긴 억울함보다 북송 되면 죽는다는 근심이 더 앞섰다. 몇 시간 지나자 변방대는 나를 투먼(圖們) 탈북자 구류소로 호송하기 위해 차에 실었다.
나는 보초의 감시를 따돌리고 족쇄를 풀고 도망칠 궁리를 했다. 죽든 살든 달리는 차에서 내리뛰려고 했으나, 네 명의 군인들이 또 달려들었다. 곤봉과 구둣발에 맞은 나는 온몸이 나른해져 정신을 잃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투먼(圖們)변방대에 도착하니 “도주 시도자”로 찍혀 또 뭇매를 맞았다. 중국군인들은 탈북자를 짐승 다루듯 했다. 동족에게 맞는 아픔은 참을 수 있어도 중국인에게 맞는 분노는 가슴을 찢었다. 살 곳을 찾아 중국으로 나왔던 북한청년들은 그야말로 파리목숨 같은 인생이었다.
북한으로 호송되던 날, 족쇄 한 개에 두 사람씩 묶였다. 이렇게 두만강을 다시 넘은 것은 2001년 8월. 다시 청진시 집결소에 끌려간 나는 알몸으로 검사 당했다. 선생(간수)들은 탈북자들이 돈을 먹고 나온다며 소금 국을 먹여 대변을 보게 했다. 선생들은 변기통을 막대기로 쑤셔 돈이 있는지를 검사했다. 옆방의 여자감방에서는 여자간수들이 들어가 자궁검사를 하는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청진 집결소에서 1개월 동안 나는 똥통을 메고 인분 나르는 일을 했다. 넘어지면 똥물을 뒤집어 쓰고, 옷을 빨아 입을 새도 없이 그대로 입고 다녔다. 이따금씩 채소농장에 나가 파밭과 오이 밭을 정리할 때가 기쁜 날이었다. 썩은 오이와 생옥수수라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이 끝나면 단련대까지 ‘도강근절’ ‘수령 결사옹위’를 외치며 달리기를 시킨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사상을 개조하고 도망가지 못하게 맥을 뽑기 위해서다. 내가 청진집결소에 잡혀있던 근 한달 동안 여러명의 탈북자들이 굶어 죽었다. 이것이 청진집결소의 진풍경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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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수기②] '親김정일'에 일주일간 북한체험 권유한다
청진집결소에서 약 한 달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날, 선생(간수)이 감방문을 열고 “대성이 나오라”고 소리쳤다.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 순간 온몸이 긴장됐다.
주변 동료들은 ‘너, 집에 간다. 나가서 만나자’며 부러워했다. 취조실에 가니 거주지 담당 보안원(거주지 담당경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청진집결소를 떠난다는 기쁨이 앞섰으나, 앞으로 닥쳐올 위험 변수들이 영화 화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향 가면 ‘반역자’로 재판받고 교화소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야, 이 새끼, 죽지 않고 살아 있구나”는 보안원의 말이 내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동행한 사람은 담당 보안원과 시(市) 보안서 감찰과 지도원. 그들의 호송 하에 나는 덜렁거리는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이 땅은 나를 버렸구나'
출발 3일만에 열차는 평남도 거차고개에 이르렀다. 경사가 급한 거차고개를 올라갈 때 모든 열차는 속도가 떨어진다. 열차의 속도가 거의 멈출 때, 차창을 응시하던 나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순간 “반역자를 잡아라!”고 소리치는 보안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모든 열차승객의 시선은 나에게로 쏠렸다.
허둥지둥 산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며칠 동안 먹지 못한 맥 빠진 다리로 빨리 뛸 수 없었다. 보안원과 열차승무원, 기차에 탔던 군대들이 나를 포위했다.
열차는 나 한 사람 때문에 멈춰 섰다. 기관사는 철도사령실에 ‘도주자가 발생해 (기차)세웠다’고 보고하고 하는 등 난리 났다. 결국 얼마 달아나지 못하고 덜미를 잡힌 나는 수십 명이 퍼붓는 구둣발 공세에 만신창이 되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보안원은 족쇄만 채우면 또 달아난다고, 포승줄로 결박했다. 밥도 물도 먹이지 않았다.
새벽 1시쯤 되었을까, 기차는 정전되자 멈춰 섰다. 이제 몇 개 역만 더 가면 교차역인 평남도 순천역이다. 그리고 기차를 바꿔 타면 고향, 그 다음은 감옥, 이것이 내가 맞게 될 운명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나는 보안원의 긴장을 풀기 위해 코 골며 자는 체 했다. 며칠간 꼬박 밤을 새운 그들도 술을 마시고 자기 시작했다. 나는 뒤로 묶인 포승을 방열기에 대고 비벼 풀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고 맨발로 승강기에 나섰다.
탈출에 성공했지만, 무엇보다 손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야 했다. 두루 길가를 뒤져 굵은 못을 얻어 들고 산에 올랐다. 부지런히 바위에 못을 가는데, 나물 캐던 처녀애가 나를 보았다. 여자애는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바구니를 버리고 마을로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신고제도가 있어 보안원에게 고자질하는 날에는 또 붙잡힐 수 있었다. 잡관목을 뚫고 정신 없이 도망치던 나는 풀숲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나는 이 땅에서 살 놈이 못 되누나, 어쩌다 반역자가 되었나?.’ 나는 가슴을 쥐어 뜯으며 통탄했다. 생각만 해도 원통한 운명이었다.
먼저 못을 뾰족하게 갈아 족쇄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 족쇄를 푸느라 손목을 비틀어 생긴 흉터가 아직 남아있다. 나는 다시 자유로운 새가 되어 북쪽으로, 중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잊지 못할 사장님과 헤어지기까지
열차에서 탈출한 지 일 주일만에 나는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그 길로 내가 일했던 채석장의 노반(老板, 중국사장)을 찾아갔다. 노반은 눈이 둥그래지며 고생했다며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동북지방은 위험하니 텐진(天津)으로 가겠다. 여비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노반은 인민폐 500원(한화 6만 5천원)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 돈을 여비 삼아 옌지(延吉)-텐진(天津)행 열차에 올랐다. 텐진까지 갔으나, 중국 땅 어딜 가나 내가 발 붙일 곳은 없었다. 근 1년간 텐진과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를 전전긍긍하며 방황했다.
그러던 쑤저우의 어느 한 한국회사에서 직원채용을 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면접은 보았지만, 중국말도 변변히 못하고 몸도 허약한 나를 받아줄 리 없었다. 면접에서 떨어진 나는 한국사장님을 만나 통사정을 하기로 결심했다.
정문에서 한국사장님의 앞을 막고 “저는 탈북자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렇게 해서 사장님의 보증으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부러진 발가락도 수술받았다.
내가 중국 동북에 있을 때 돌에 치어 두 번째, 세 번째 발가락뼈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썩기 시작했다.
절룩거리는 나를 본 사장님은 ‘무슨 일인가?’ 물었다. 사장님 지시에 따라 나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병원은 수술받지 않으면 발가락을 잘라야 한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수술비는 줄 테니 발가락은 자르지 말라고 당부하셨고, 그 덕에 나는 수술받았다.
퇴원한 지 얼마 안 있어, 회사에 중국공안이 달려들었다. 당시 중국은 ‘따지 헤이써꾸이(打擊黑色鬼) 100일 전투’에 진입했을 때이다. ‘불량배 소탕작전’이다.
중국공안은 통상 한국회사가 탈북자들을 보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수시로 탈북자 단속에 나오곤 했다. 내가 붙잡히면 회사는 영업정지를 당하게 된다. 국적 없는 수모는 날이 갈수록 더했고, 나의 진정한 보금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이왕 한국으로 갈 결심을 했으면, 태국이나, 베트남 쪽으로 나가라며 인민폐 2천원(한화 26만원)을 주며 등 떠밀어 주셨다. 참 고마운 분이었다.
‘北 인권, 인류의 보편적 가치 지키는 길’
2003년 2월 광저우(廣州)에 도착한 나는 여러 탈북자들과 중국 쿤밍(昆明)으로 떠났다. 한국행은 험난했지만, 자유를 찾을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
중국- 라오스 국경의 정글과 30도의 무더위, 악어와 독사의 습격을 피하며 근 한달 동안 산속에서 헤맸다. 훗날 태국감옥에서 다른 탈북자들의 말을 통해 국경을 넘던 북한사람들이 악어와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정처 없이 라오스 오지를 헤매던 우리는 라오스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국대사관에 인계해줄 것을 요구하며 1개월간 단식 끝에 태국 접경지역인 메콩강까지 추방되게 되었다. 당초 라오스 경찰이 중국으로 송환하려고 했으나, 한국과 여러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석방되었다.
일행은 태국으로 밀입국하여 드디어 방콕행 열차에 올랐다. 그제서야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재탈북과 감옥생활, 그리고 중국에서 고생했던 아픔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듯했다.
2003년 5월 20일 드디어 방콕에 도착했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과 인터뷰를 했다. 이민국 감옥은 망명을 원하는 아프리카, 동남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나는 인권이 인류의 보편적 권리이고 가치라는 것을 밝힌 “1948년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담은 국제인권선언을 접하게 되었고, 유엔에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해줄 것을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감옥에서 느낀 ‘코리아’의 위상이었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코리아”라며 엄지손가락을 흔들었다. 한국이 월드컵 4강을 이뤘다는 소식을 듣고 한민족의 긍지를 찾게 되었고, 자유와 희망을 누릴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입국후 '하나원'(탈북자정착교육기관)을 마치고 나오던 날, 나는 주민등록증을 받아 안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
지금 대학가에는 북한인권운동이 어떤 정치목적의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북한인권을 바로 알리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친북'을 외치며 북한의 참담한 인권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일주일간의 북한체험을 권유하고 싶다. (끝)
김대성(가명, 2003년 입국)
정리/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
[탈북수기①] 너희가 '자유'를 진정 아느냐
출처: 데일리엔케이
나는 2003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다.
나는 요즘도 세계지도를 보며 동남아 탈북루트를 되짚어 볼 때가 많다. '하나원'(남한정착 재교육기관)을 수료하고 제일 먼저 교보문고에서 구입해 벽에 붙인 것이 바로 이 세계지도다.
평소 지리공부를 하지 않았던 내가 깨알 같은 글씨가 아물거리는 세계지도를 먼저 구입한 이유는 자유를 찾기 위해 헤쳐온 수만리 장정과 언어,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들과 만났던 추억 때문이다.
그 넓은 지도에 한반도는 아시아 극동지역에 한마리 토끼마냥 중국대륙에 옹크리고 있다. 서울서 내 고향까지 차를 타면 불과 4시간 거리.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를 장장 수만리를 돌아 왔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다. 나의 경우처럼 중국과 베트남, 태국을 거쳐 자유를 찾은 탈북자들이 수천 명에 달한다. 자유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목숨 건 집착력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이다.
2003년 12월 20일 아침 8시. 방콕-서울행 대한항공이 인천공항에 내리던 날, 우리 6명 일행은 속으로 ‘자유만세’ ‘대한민국만세’를 불렀다. 과연 비행장에 내리니 땅 생김새도 기후도 이북과 비슷했다. 약간 상냥한 서울말씨를 쓰는 것 외에 사람들의 생김새도 거의 비슷하다.
‘이 땅이 과연 60년 동안 숙적으로 생각했던 남조선인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던 불가사의한 남한의 궁금증을 떨치기에는 그리 시간이 많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북한과 해외를 떠돌 때 남한방송을 즐겨 들은 탓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연세대학교에서 배움의 꿈을 펼쳐간다. 폐쇄된 북한의 세뇌교육만 받다가 남한의 개방교육, 글로벌 세상의 지식을 배워가는 대학생활이 얼마나 보람차고 재미있는지 모른다. 실로 이 모든 자유를 준 대한민국 국민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또 사생결단하고 자유를 찾은 보람이 얼마나 컸던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자유의 눈을 틔어준 남조선 방송
내가 신의주 모 대학에 재학 중이던 90년대 초 세계는 많은 변화를 맞았다. 소련과 동구권이 해체되고 92년에는 한중수교가 맺어졌다. 신의주 주민들은 자고 일어나면 개혁개방을 떠들었고, 시내 곳곳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자본주의 상업요소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단둥(丹東)과 접한 신의주 주민들은 압록강 건너편에 우후죽순처럼 솟는 고층 빌딩과 밤에 대낮처럼 밝은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중국의 개혁개방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개혁개방에 가장 호감을 가진 이들은 역시 대학생들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남조선 일인당 GDP가 1만달러를 넘었고, 자가용이 1천만대를 돌파했다’고 수군거렸다. 그중 사회가 민주화 되었다는 소리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남한방송을 듣기 위해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화교 왕가(王家)로부터 소형 반도체 라디오 하나를 구입했다. 단파 라디오 수신기는 자정이 넘으면 남한방송이 잘 잡혔다.
당시 신의주에는 자본주의 황색바람을 단속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내려져 당, 안전, 보위부 합동으로 비(非)사회주의 그루빠('그룹'의 러시아어)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여기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다.
다행히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가 남한방송을 듣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신의주에는 중국TV도 잘 잡힌다. 나는 틈만 나면 '아지트'(어느 가정집)에 가서 중국TV를 보았다. 대학당국은 학생들에게 기숙사에 모여 숙식하라고 하지만, 학생들은 사품(私品)을 보관하고, 개인생활 공간을 갖기 위해 학교 근처에 가정집을 아지트로 정한다.
물론 창문을 가리고, 볼륨을 최대한 낮추고 본다. 단둥TV, 선양TV, 베이징TV 등 여러 채널에서 무협, 디스코, 뉴스 등 다양한 프로들이 방영되었다. 특히 리샤오룽(李小龍), 청룽(成龍), 리렌제(李連杰)의 무협영화를 즐겨 시청했고, 뉴스는 화교들의 번역을 빌어 듣곤 했다.
97년 노동당 비서 황장엽씨가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을 통해 망명한 사실도 화교들이 뉴스를 보다가 알려주어 우리가 평양보다 먼저 알았다.
그 과정에 자유를 구속하고 폐쇄적인 수령우상화 교육만 시키는 북한 대학교육이 싫었고, 내 마음속에는 자유세상에서 배우고 싶은 욕망이 자라고 있었다.
90년대 중반 식량난이 겹치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때 우리 부모님도 굶어 세상을 떠났다. 굶주린 사람들은 행여나 국경지역에 먹을 것이 있을까 하는 희망으로 신의주에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기차지붕과 화물열차에 매달려 신의주로 흘러든 사람들은 역전 대합실에 노숙하면서 중국에서 넘어오는 옥수수와 밀가루를 훔쳐먹었다.
97년 여름, 북-중 국경 ‘조중 친선다리’(우의교)로 중국으로 탈출했다 북송 되는 주민들이 부쩍 늘어났다. '중국은 어딜가나 먹을 걱정 없고, 하루 일해도 인민폐 20원은 벌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귀가 솔깃했다. 평소 중국TV와 남한방송을 들으며 자유를 동경해오던 터라 울타리를 박차고 자유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허무하게 썩어갈 청춘이 아까웠다.
산산이 부서진 '차이나 드림'
나의 첫 번째 탈출은 2000년 11월에 있었다. 신의주 앞 압록강은 너무 넓고, 겨울이어서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첫 탈북 행선지로 정한 곳이 혜산이었다. 평양-혜산행 열차를 타고 가던 중 신성천역에서 열차 안전원(승무경찰)의 단속에 걸렸다.
북한에서 열차를 타자면 공민증(주민등록증)과 보안서에서 발급하는 통행증을 같이 소지해야 한다. 통행증도 없고, 더욱이 내 짐에서 중국지도가 나오자 열차 안전원들은 확인할 게 있다며 나를 단속한 것이다.
검열관실에 갇힌 나는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열차가 정전되어 멈춘 틈을 타서 차창을 열고 뛰어내렸다.
이렇게 혜산에 도착한 나는 먼저 압록강 폭이 좁은 지역을 선택하고, 국경수비대의 초소 위치도 알아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나는 고향을 향해 기도했다. ‘성공하여 조상의 무덤이 있는 이 땅을 다시 밟게 해주소서…’ 나는 서서히 강물에 들어섰다.
창바이(長白)현에 들어선 나는 빨리 국경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산속으로 들어갔다. 길을 잃으면 나무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될수록 마을을 피해 북쪽으로 들어갔다. 밤에는 낙엽을 덮고 자고 사흘 밤, 나흘 낮을 산속에서 헤맸다. 정작 국경을 넘기는 했지만, 말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영하 30도 추운 날씨의 산속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며칠 굶은 나는 비틀거리며 인가를 찾았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불렀지만, 중국인들은 북한사람을 잠 재우면 벌금을 내야 한다며 문전박대했다. 다행히 혼자 사는 조선족 아저씨의 집에 들어가 오래간만에 토장국과 쌀밥을 먹었다. 얼었던 마음도 녹고, 밀렸던 잠도 푸짐하게 잤다.
조선족들의 소개로 겨우 일자리를 찾은 곳은 허룽(和龍)에 있는 채석장이었다. 돌을 다듬는 채석장 일은 중국인들도 꺼려하는 중노동이다. 당장 안착할 곳이 없는 나는 돈은 나중에 받기로 하고 일부터 시작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망치로 돌을 까야 하는 채석장 일은 자칫 돌을 잘못 옮겨도 손가락이 짓눌려 문드러지고, 낙반에 맞을 위험이 항시적으로 뒤따랐다.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고, 밥은 증기빵(찐빵) 두 덩이에 멀건 죽 한 그릇이었다. 잠에 쫓기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간염이 도지기 시작했다. 이따금 몸이 아파 앉아 있으면 중국인들은 일을 잘 하지 않는다고 욕을 했다.
이렇게 겨울이 가고 여름이 왔다. 나는 피곤하고 속이 메스꺼워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나는 노반(老板: 사장)을 찾아가 집으로 가겠다며 품삯을 요구했다. 노반은 '너는 1년 동안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병도 고쳐야 하고, 여비가 있어야 집으로 갈 게 아니냐'며 통사정 했다. 노반은 8개월 품값으로 인민폐 천원(한화 13만원)을 건네주었다. 하루 20원씩 계산해 수천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차이나 드림’이 참담히 무너졌다.
외국군인에게 맞을 땐 피눈물 흘러
텐진(天津)행 기차를 타기 위해 옌지(延吉)역으로 가던 중 내가 탄 버스가 중국변방대의 검문에 걸렸다. 처음 변방대원에게 벙어리 시늉을 했지만 군인들은 다짜고짜로 나를 끌어내렸다.
군인 3명이 전기곤봉을 내 다리 사이로 들이대며 팬티에 숨겼던 돈 천원을 찾아내 빼앗았다. 병 치료도 못하고 고역을 치르며 꼬깃꼬깃 숨겼던 돈을 빼앗긴 나는 땅을 치며 울분을 토했다. 아무리 사정해도 중국군인들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돈을 빼앗긴 억울함보다 북송 되면 죽는다는 근심이 더 앞섰다. 몇 시간 지나자 변방대는 나를 투먼(圖們) 탈북자 구류소로 호송하기 위해 차에 실었다.
나는 보초의 감시를 따돌리고 족쇄를 풀고 도망칠 궁리를 했다. 죽든 살든 달리는 차에서 내리뛰려고 했으나, 네 명의 군인들이 또 달려들었다. 곤봉과 구둣발에 맞은 나는 온몸이 나른해져 정신을 잃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투먼(圖們)변방대에 도착하니 “도주 시도자”로 찍혀 또 뭇매를 맞았다. 중국군인들은 탈북자를 짐승 다루듯 했다. 동족에게 맞는 아픔은 참을 수 있어도 중국인에게 맞는 분노는 가슴을 찢었다. 살 곳을 찾아 중국으로 나왔던 북한청년들은 그야말로 파리목숨 같은 인생이었다.
북한으로 호송되던 날, 족쇄 한 개에 두 사람씩 묶였다. 이렇게 두만강을 다시 넘은 것은 2001년 8월. 다시 청진시 집결소에 끌려간 나는 알몸으로 검사 당했다. 선생(간수)들은 탈북자들이 돈을 먹고 나온다며 소금 국을 먹여 대변을 보게 했다. 선생들은 변기통을 막대기로 쑤셔 돈이 있는지를 검사했다. 옆방의 여자감방에서는 여자간수들이 들어가 자궁검사를 하는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청진 집결소에서 1개월 동안 나는 똥통을 메고 인분 나르는 일을 했다. 넘어지면 똥물을 뒤집어 쓰고, 옷을 빨아 입을 새도 없이 그대로 입고 다녔다. 이따금씩 채소농장에 나가 파밭과 오이 밭을 정리할 때가 기쁜 날이었다. 썩은 오이와 생옥수수라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이 끝나면 단련대까지 ‘도강근절’ ‘수령 결사옹위’를 외치며 달리기를 시킨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사상을 개조하고 도망가지 못하게 맥을 뽑기 위해서다. 내가 청진집결소에 잡혀있던 근 한달 동안 여러명의 탈북자들이 굶어 죽었다. 이것이 청진집결소의 진풍경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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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수기②] '親김정일'에 일주일간 북한체험 권유한다
청진집결소에서 약 한 달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날, 선생(간수)이 감방문을 열고 “대성이 나오라”고 소리쳤다.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 순간 온몸이 긴장됐다.
주변 동료들은 ‘너, 집에 간다. 나가서 만나자’며 부러워했다. 취조실에 가니 거주지 담당 보안원(거주지 담당경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청진집결소를 떠난다는 기쁨이 앞섰으나, 앞으로 닥쳐올 위험 변수들이 영화 화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향 가면 ‘반역자’로 재판받고 교화소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야, 이 새끼, 죽지 않고 살아 있구나”는 보안원의 말이 내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동행한 사람은 담당 보안원과 시(市) 보안서 감찰과 지도원. 그들의 호송 하에 나는 덜렁거리는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이 땅은 나를 버렸구나'
출발 3일만에 열차는 평남도 거차고개에 이르렀다. 경사가 급한 거차고개를 올라갈 때 모든 열차는 속도가 떨어진다. 열차의 속도가 거의 멈출 때, 차창을 응시하던 나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순간 “반역자를 잡아라!”고 소리치는 보안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모든 열차승객의 시선은 나에게로 쏠렸다.
허둥지둥 산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며칠 동안 먹지 못한 맥 빠진 다리로 빨리 뛸 수 없었다. 보안원과 열차승무원, 기차에 탔던 군대들이 나를 포위했다.
열차는 나 한 사람 때문에 멈춰 섰다. 기관사는 철도사령실에 ‘도주자가 발생해 (기차)세웠다’고 보고하고 하는 등 난리 났다. 결국 얼마 달아나지 못하고 덜미를 잡힌 나는 수십 명이 퍼붓는 구둣발 공세에 만신창이 되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보안원은 족쇄만 채우면 또 달아난다고, 포승줄로 결박했다. 밥도 물도 먹이지 않았다.
새벽 1시쯤 되었을까, 기차는 정전되자 멈춰 섰다. 이제 몇 개 역만 더 가면 교차역인 평남도 순천역이다. 그리고 기차를 바꿔 타면 고향, 그 다음은 감옥, 이것이 내가 맞게 될 운명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나는 보안원의 긴장을 풀기 위해 코 골며 자는 체 했다. 며칠간 꼬박 밤을 새운 그들도 술을 마시고 자기 시작했다. 나는 뒤로 묶인 포승을 방열기에 대고 비벼 풀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고 맨발로 승강기에 나섰다.
탈출에 성공했지만, 무엇보다 손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야 했다. 두루 길가를 뒤져 굵은 못을 얻어 들고 산에 올랐다. 부지런히 바위에 못을 가는데, 나물 캐던 처녀애가 나를 보았다. 여자애는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바구니를 버리고 마을로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신고제도가 있어 보안원에게 고자질하는 날에는 또 붙잡힐 수 있었다. 잡관목을 뚫고 정신 없이 도망치던 나는 풀숲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나는 이 땅에서 살 놈이 못 되누나, 어쩌다 반역자가 되었나?.’ 나는 가슴을 쥐어 뜯으며 통탄했다. 생각만 해도 원통한 운명이었다.
먼저 못을 뾰족하게 갈아 족쇄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 족쇄를 푸느라 손목을 비틀어 생긴 흉터가 아직 남아있다. 나는 다시 자유로운 새가 되어 북쪽으로, 중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잊지 못할 사장님과 헤어지기까지
열차에서 탈출한 지 일 주일만에 나는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그 길로 내가 일했던 채석장의 노반(老板, 중국사장)을 찾아갔다. 노반은 눈이 둥그래지며 고생했다며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동북지방은 위험하니 텐진(天津)으로 가겠다. 여비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노반은 인민폐 500원(한화 6만 5천원)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 돈을 여비 삼아 옌지(延吉)-텐진(天津)행 열차에 올랐다. 텐진까지 갔으나, 중국 땅 어딜 가나 내가 발 붙일 곳은 없었다. 근 1년간 텐진과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를 전전긍긍하며 방황했다.
그러던 쑤저우의 어느 한 한국회사에서 직원채용을 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면접은 보았지만, 중국말도 변변히 못하고 몸도 허약한 나를 받아줄 리 없었다. 면접에서 떨어진 나는 한국사장님을 만나 통사정을 하기로 결심했다.
정문에서 한국사장님의 앞을 막고 “저는 탈북자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렇게 해서 사장님의 보증으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부러진 발가락도 수술받았다.
내가 중국 동북에 있을 때 돌에 치어 두 번째, 세 번째 발가락뼈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썩기 시작했다.
절룩거리는 나를 본 사장님은 ‘무슨 일인가?’ 물었다. 사장님 지시에 따라 나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병원은 수술받지 않으면 발가락을 잘라야 한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수술비는 줄 테니 발가락은 자르지 말라고 당부하셨고, 그 덕에 나는 수술받았다.
퇴원한 지 얼마 안 있어, 회사에 중국공안이 달려들었다. 당시 중국은 ‘따지 헤이써꾸이(打擊黑色鬼) 100일 전투’에 진입했을 때이다. ‘불량배 소탕작전’이다.
중국공안은 통상 한국회사가 탈북자들을 보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수시로 탈북자 단속에 나오곤 했다. 내가 붙잡히면 회사는 영업정지를 당하게 된다. 국적 없는 수모는 날이 갈수록 더했고, 나의 진정한 보금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이왕 한국으로 갈 결심을 했으면, 태국이나, 베트남 쪽으로 나가라며 인민폐 2천원(한화 26만원)을 주며 등 떠밀어 주셨다. 참 고마운 분이었다.
‘北 인권, 인류의 보편적 가치 지키는 길’
2003년 2월 광저우(廣州)에 도착한 나는 여러 탈북자들과 중국 쿤밍(昆明)으로 떠났다. 한국행은 험난했지만, 자유를 찾을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
중국- 라오스 국경의 정글과 30도의 무더위, 악어와 독사의 습격을 피하며 근 한달 동안 산속에서 헤맸다. 훗날 태국감옥에서 다른 탈북자들의 말을 통해 국경을 넘던 북한사람들이 악어와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정처 없이 라오스 오지를 헤매던 우리는 라오스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국대사관에 인계해줄 것을 요구하며 1개월간 단식 끝에 태국 접경지역인 메콩강까지 추방되게 되었다. 당초 라오스 경찰이 중국으로 송환하려고 했으나, 한국과 여러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석방되었다.
일행은 태국으로 밀입국하여 드디어 방콕행 열차에 올랐다. 그제서야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재탈북과 감옥생활, 그리고 중국에서 고생했던 아픔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듯했다.
2003년 5월 20일 드디어 방콕에 도착했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과 인터뷰를 했다. 이민국 감옥은 망명을 원하는 아프리카, 동남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나는 인권이 인류의 보편적 권리이고 가치라는 것을 밝힌 “1948년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담은 국제인권선언을 접하게 되었고, 유엔에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해줄 것을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감옥에서 느낀 ‘코리아’의 위상이었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코리아”라며 엄지손가락을 흔들었다. 한국이 월드컵 4강을 이뤘다는 소식을 듣고 한민족의 긍지를 찾게 되었고, 자유와 희망을 누릴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입국후 '하나원'(탈북자정착교육기관)을 마치고 나오던 날, 나는 주민등록증을 받아 안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
지금 대학가에는 북한인권운동이 어떤 정치목적의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북한인권을 바로 알리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친북'을 외치며 북한의 참담한 인권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일주일간의 북한체험을 권유하고 싶다. (끝)
김대성(가명, 2003년 입국)
정리/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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