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daum)에 실린 조갑제 비방 기사에는 약8천 건의 댓글이 붙었다. 그 90% 이상이 극렬하고 살벌한 언어로 나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몇 개를 소개한다.
1. 나이도 먹을 만치 먹었으니 그냥 가라~~~저승으로
2. 살기 싫냐? 이 노망난 ㅆㅍㅈ 같은 할방구야...내가 죽여주리?
3. 저넘 아마도 조상대대로 쪽발이 하수인인 것 같애...안 그럼 또라이든가...암튼 친일파 후손들까지 이번 기회에 묻어버려야 할텐데.
4. 먼저 자살하심이 어떠하실런지...
5. 독도 경비대 총알받이로 써라.
6. 얼굴이 일본 사람 닮았어...분명히 조상중에 일본 피가 흐르고 있을 것 같군.
위의 댓글들을 읽어보면 내가 무슨 흉악범죄나 역적질을 한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비방기사의 대상이 되었던 나의 글을 原文대로 싣는다. 一讀(일독)한 다음 계속하기로 하자.
<자료1: 일본쪽에서 바라본 東海 사태(4월20일자)
우리의 영토인 獨島 근해에 대한 日本의 해양 조사선 파견 문제로 韓日 양국 관계가 어려워지고 있는 가운데 日本 서해안의 이시카와(石川) 지방을 여행하고 있다. 오늘(20일)자 일본 조간신문들은 해양조사 문제를 크게 다루었는데 특히 좌파여론을 대변하는 아사히(朝日) 신문이 균형있는 취재를 했다. 아사히 신문은 일본정부 內에서도 조사선 파견에 대해서 찬반 양론이 있다면서 특히 시마네(島根)현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마네현은 경상북도와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작년에 이 縣 의회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교류가 단절되었다가 최근에 겨우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는데, 이번 사태로 다시 악화될까봐 주민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獨島·교과서·역사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의 좌파가 비교적 親韓的 자세를 보이고, 북한인권 문제·납북자 문제·北核 문제에서는 우파가 親韓的이다. 인구 약 1억3000만명, GDP 세계 2위의 일본을 우습게 보는 세계 유일의 나라가 한국이라는 우스개도 있지만, 日本의 여론이나 일본인의 양식을 일본 정부의 정책과 동일시하는 것도 일본을 誤判하는 일이다.
韓日 문제는 민주화된 국가끼리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해결이나 타협이 가능하다. 韓中,南北관계는 민주화된 한국과 독재적인 국가(中) 또는 집단(北)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實用的이거나 합리적인 해결이 어렵다(黃砂나 납북자 문제처럼).
작년에 韓日관계가 정부 차원에서는 악화되었으나 민간교류 면에서는 여전히 활발했다. 올해 兩國 사이의 여행객은 500만명을 넘을 것이다.
日本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우파 정권이 계속(또는 영속)되는 나라이다. 天皇이란 우파의 中心이 있기 때문에 일본의 좌파도 한국처럼 反체제나 反국가적으로 흐르지 못한다.
新羅의 삼국통일로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접어야 했던 日本은 그 뒤 한반도에 敵對세력이 들어서는 것은 安保위협이 된다는 생각에 집착하게 되었다. 우파적이거나 民主的인 한국이 존재하는 한 일본이 獨島문제를 물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남한이 赤化된다면 일본은 獨島를 점령해 버릴 것이다.
韓美日 삼각 동맹체제 안에서는 韓日 관계가 악화될 때 미국이 중재하든지 한국편을 드는 경우가 많았다. 1980년대 초 全斗煥 정권이 일본에 40억 달러의 '安保 차관'을 요구했을 때에도 레이건 정부는 우리 편을 들었다.
지금 親北反美 세력에 얹힌 노무현 정권은 韓美 동맹을 '심리적 와해 단계'로 몰고 있다. 일본이 이 틈을 타고 對韓 압박을 강화해도 미국은 구경만 하거나 내심 日本편을 들려 할지 모른다. 노무현 정권은 중국과 북한에 대해서는 유화적이고 때로는 굴욕적이다. 盧정권의 反美·反日 정책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親中·親北쪽으로 기울도록 만든다면 이는 국가적 자살 상태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나라(日)를 적으로 돌리고 세계에서 가장 못살며 잔혹한 집단(北)과 세계에서 가장 큰 一黨 독재국가와 친구가 되겠다는 자살충동을 억제해줄 세력이 한국에 과연 있는가? 日本이 태평양전쟁이라는 자살 코스를 걷게 된 것도 한때의 우방이던 영국과 미국을 적으로 돌리고 파쇼 국가인 독일과 이태리와 손잡았기 때문이다. 친구를 잘못 만나면 패가망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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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 日本의 드라이 아이스 전략 (4월21일자)
日本의 드라이 아이스 전략
오늘(21일) 아침 요미우리 신문의 1면 맨 아래 고정칼럼(「편집수첩」)은 일본의 해양조사선 파견을 둘러싼 韓日 갈등을 다뤘다. 이 칼럼은 「공해상에서 公船(공선)을 나포하는 것은 국제연합 해양법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竹島를 실효지배하고 있다. 국제법 파괴는 이것이 불법 점거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이 칼럼은 한국측에 대해서 「국제법을 어겼다가 火傷(화상)을 당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自國 정부에 대해서는 이런 주문을 했다.
<국제법을 오른손에, 대화를 거듭하는 자세를 왼손에, 가슴에는 영토를 지키는 마음을. 이것이 드라이 아이스 정신이다.>
「드라이 아이스는 차갑지만 만지면 화상을 입는다」는 경고도 곁들였다. 요미우리 신문 사설은 「냉정하게 타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盧정권이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외교적 不渡(부도)」란 말이 있다. 동맹관계와 군사력의 범위를 넘어선 강경책은 국제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 盧武鉉 정권은 국가실력의 殘高(잔고)를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만약 국내 정치상황, 특히 선거판을 고려한 對日 강경책을 폈다가 독도 문제를 「국제분쟁」으로 격상시키면 이는 외교적 부도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드라이 아이스 정책에 넘어가 「국가적 火傷」을 입는 것을 뜻한다.
참고로 세계 최대의 발행부수를 가진 요미우리 신문은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등 중도우파적 성향을 보인다.<일본 이시카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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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나의 기사를 읽어보고 daum의 욕설 댓글과 비교해본 뒤 왜 이런 욕설이 나타났을까 의아해할 것임이 틀림 없다. 그 비밀은 포털 daum에 실린 문제기사의 제목이다. daum에 실린 국민일보 기사의 主 제목은 <조갑제“부자나라 일본을 적으로 만드는 건 국가적 자살”>이었다.
나는 인용부호 안에 들어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일본을 적으로 돌리고 북한정권과 중국을 친구로 삼겠다고 하는 것'은 '자살충동'이라고 지적했을 뿐이다.
(원문: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나라(日)를 적으로 돌리고 세계에서 가장 못살며 잔혹한 집단(北)과 세계에서 가장 큰 一黨 독재국가와 친구가 되겠다는 자살충동을 억제해줄 세력이 한국에 과연 있는가?>)
국민일보 기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내 기사의 原文에서 문제가 되도록 문장을 도려내고 '자살충동'을 '국가적 자살'로 바꿔치기 하는 등 짜집기식으로 제목을 變造(변조)한 것이다. 이 변조의 목적은 일반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부자와 일본을 내가 굴욕적으로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제목에 자극받은 독자들은 대부분이 비방이고 욕설인 약8000건의 댓글을 올렸다. 하나의 댓글은 100명의 독자를 대표한다고 한다. 즉, 약80만 명이 왜곡된 제목의 기사를 보고 나에 대해서 터무니 없는 오해를 한 셈이고 그만큼 나의 명예가 훼손된 것이다.
위에 소개한 댓글에는 '저승, 자살, 총알받이, 죽여주리?' 같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나를 人格살인하려는 실탄 같은, 흉기 같은 욕설이다. 이것이 바로 '포털식 인민재판에 의한 인격살인의 현장'이다.
6.25 때 인민재판은 재판장, 검사, 배심원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검사가 우익 인사를 끌고 나와 왜곡 변조된 죄상을 낭독하면 배심원 역할을 하는 구경꾼들은 좌익들의 선동에 따라 '죽여라'고 소리친다. 재판장은 이 외침을 받아들여 사형을 선고하고 현장에서 찔러죽이고 때려죽였다(아래 목격기 참조).
이번 인터넷 인민재판에선 국민일보 기자가 검사役을 하여 왜곡된 공소장을 썼고 daum이 재판장役을 맡아 그 공소장으로써 구경꾼들을 선동했다. 잘 짜여진 각본대로 구경꾼들은 '죽여!'라고 외쳐댔다.
헌법이 살아 있는데도 댓글을 통해서 나를 죽이겠다고 공개적으로 협박한 사람들은 친북좌익이나 김정일 세상이 되면 나를 인민재판정으로 끌어내 '죽여!'라고 외치든지 몽둥이나 죽창을 들 이들이다.
인민재판의 특징은 변호사가 없다는 점이다. 다음(daum)에 실린 국민일보 기사에는 나에 대한 비방 의견만 싣고 당연히 써야 할 내 지지 의견은 싣지 않았다. 다음이나 국민일보는 나의 반론이나 논평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럼으로 해서 그 기사는 기사로 위장된 인민재판정의 선동적 논고문이 되었고 그 목적을 달성했다. 삽시간에 약8000명의 '글몽둥이 부대'를 동원하여 나의 인격을 짓밟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daum은 선동적으로 왜곡 변조된 내가 말하지도 않은 제목을 내걸고 찬반을 묻는 인터넷 즉석 여론조사란까지 만들어 붙였다. 가학적인 명예훼손 게임을 한 것이다.
애국적이고 온건한 나의 글을 이런 식으로 왜곡 선동 유포하니 당장 수천 명이 '댓글몽둥이' '댓글죽창'을 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나를 잡으려고 궐기했다. 정보선진국이라는 민주국가의 대낮에 이런 암흑이 연출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과 포털이 증오심을 퍼뜨리는 인격살인의 흉기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1994년 르완다에서는 후투족이 방송을 통해서 투치족 학살을 선동하여 한 달 사이 약80만 명을 죽였다. 방송과 인터넷 같은 정보매체가 선동가들의 손에 넘어가면 피를 부른다. 약8000개의 '살인적' 인간 저주 낙서를 포털 사이트에 공개하고 또 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어도 法的 제재를 당하지 않는다면 이런 나라는 無法천지이든지 자기파멸의 씨앗을 키워가는 사회일 것이다.
욕설을 하면 망가지는 것은 욕설자의 인격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어제 수천명의 인격이 살해되었다. 이 기사變造 사건의 진정한 피해자는 욕설댓글을 올린 사람들, 거짓선동에 놀아나 자신들의 인격을 죽인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어제 정말 인격 자살을 감행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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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초등학교 3년生이 본 인민재판의 모습
이 용 범(서울 관악구 봉천11동)
읍내에서의 연극 구경
나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 미곡리 277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윗마을, 아랫마을 합쳐 30여 호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장신초등학교(예산군 광시면 장전리 소재·그 당시에는 간이 학교였음)에 입학하여 10여 리 길을 산과 들길을 따라 등교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를 맞았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기억된다.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며칠 있으면 신대초등학교(예산군 광시면 신대리 소재)에서 연극공연이 있으니 우리 학교에서도 모두 다 참가해야 한다고 하셨으며 몇 학생을 모아 음악 연습도 시키셨다. 그때 나도 그중에 끼게 되었으며 며칠간은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으며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리던 날(1950년 8월30일)은 내일로 다가왔고 나는 밤잠을 설친 채 일찍 일어나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급우들과 함께 선생님의 인솔하에 읍내 학교를 향하여 산과 들길을 따라 즐겁게 10여 리 길을 걸었다. 가는 길에 비행기가 지나가면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우리들은 풀숲에 숨기도 하며…. 이곳 저곳 각 동네에서 농악대를 앞세우고 흥겨운 농악에 맞춰 많은 사람들이 뒤를 이어 따르고 있었다. 나는 더욱 더 흥분이 되었다. 처음으로 읍내에 있는 학교로 연극을 보러 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더욱 그러했다.
8월의 찌는 듯한 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연극을 보러 간다는 기쁨에 그런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 운동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으며 정문을 통하여 일렬로 순서 있게 들어갔다. 나는 우측 제일 앞줄에서 두 번째 줄에 자리하여 연극을 보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을까. 넓은 운동장은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제 조금 후에는 기대하는 연극이 시작되겠지, 초조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기다리며….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연극을 하려면 그럴 듯한 무대가 있고 무대가 있으면 주위에는 그림이나 연극에 필요한 시설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교단 위에는 무명치마 저고리를 입은 여인 서너 명이 앉아 있었고 교단 아래쪽에는 젊은 청년 두서너 명이 서 있을 뿐이다. 운동장에는 각 동네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건만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흐르고 잠시 후,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누군가를 호명하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호명된 사람이 관중을 헤치고 교단 앞으로 나왔다. 젊은 청년이 종이로 말아 접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이 사람을 죽여야 옳소, 살려야 옳소』하고 묻는다. 넓은 운동장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8월의 뜨거운 태양은 작렬하건만…. 지금 여기는 시베리아의 혹독한 한파가 몰아닥친 듯 누구 하나 살려야 옳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민재판
아…, 이럴 수가. 이것이 인민재판이란 말인가! 호명된 사람을 교단 앞 운동장에 무릎 꿇리고 어깨 오른쪽, 왼쪽을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려친다. 참혹한 현장. 총으로 죽이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몽둥이로 사람을 패 죽이는 현장…. 나는 몸서리가 쳐지고 내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있었건만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보기 위해 나는 지난밤 잠도 설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단 말인가. 이 끔찍한 현장을 피하여 도망이라도 하였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었다. 운동장 주위에는 인민군이 총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살육은 계속되고 죽은 사람을 한쪽으로 밀어 놓는다.
죽은 사람 가운데는 설죽어서 꿈틀거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단상에 앉아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무명치마 저고리의 여인이 쏜살같이 내려와 설죽은 사람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끌어내어 죽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잊었고, 떨어야만 했다. 도중에는 도망가다 잡힌 사람들도 있었는데(2~3명으로 기억됨) 그 사람들은 포승줄로 결박하여 무대앞에 무릎을 꿇려 놓았다. 그날 저녁 시냇가 모래사장에 생매장되었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일인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8월의 긴긴 낮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연극은 계속되고 나는 친구의 손을 잡고 그저 떨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우리 아랫마을에 사는 구장 어른이 호명된 것이다. 그 어른이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먼저와 똑같은 방법으로 어깨 우측과 좌측을 사정없이 내려친다. 순간 연세가 높으신 구장 어른이 물구나무서듯 거꾸러지면서 호주머니에서 옥수수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연극을 보시면서 간식으로 드시려고 삶은 옥수수 몇 개를 호주머니에 넣고 오신 것이다.
아― 이럴 수가. 몽둥이를 든 젊은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살려줄 사람들인가. 발길질을 하며 다시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 죽인 것이다. 이 참혹한 현장에는 그 가족들도 다 참석했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그 가족들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연극은 계속되었고 8월의 긴긴 해도 서산을 넘을 무렵 그 끔찍한 연극도 막을 내렸다. 죽은 사람을 일렬로 운동장에 뉘어놓은 다음 맨 우측렬부터 일렬로 죽은 사람을 밟고 가도록 하였다. 물론 몽둥이를 들고 직접 사람을 죽인 장본인이 대열을 지켜본다. 한 사람이라도 건너뛰면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 나도 순서가 되어 죽은 자를 밟고 지나가는데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명치 부위는 더욱 더 아파 왔다. 엉겁결에 한 사람을 건너뛰어 다음 사람의 정갱이 부위를 밟는 순간 뒤에서 몽둥이를 든 사람이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너무도 무서웠고 하루 종일 떨고만 있었기에….
9·28 수복의 감격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들판을 지나 서낭당 고개를 넘어야 했다. 10여 리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나는 어떻게 집에 왔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집에 오니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계셨다. 지금도 나는 그때를 생각하며 조금은 다행스런 생각이 든다. 만약 그 자리에 우리 아버지가 참변을 당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떻게 변하여 있을까? 그 당시 우리 아버지는 대한 청년단 단장으로 계시면서 동네 청년들을 모아 놓고 넓은 광장에서 훈련을 지휘하셨기에, 1차 연극에서 호명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버지께서는 차분히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죽든 살든 도망가려고 마음먹었다고 하셨다. 그 자리에 계셨던 본인(아버지)은 얼마나 마음 조이셨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며 10년은 감수하셨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다음 달 9·28 수복이 되면서 2차 명단에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사실과 2차 연극이 또 우리 학교에서 있을 예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과 9·28 수복이 나에게는 말할 수 없이 감격적인 일이며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여기서 다시금 생각게 하는 것은 이 연극을 주도한 사람들이 인민군이 아닌 이웃한 마을에서 살며 안면이 있는 자의 소행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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