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前대통령의 교통사고가 의혹이 아닌 이유
트럭 운전사도 생존해 있고 수사 검사였던 허경만 前전남 지사도 ‘외압은 없었다’고 증언. 당시 경호원도 김대중측 차량 과실 인정
全敬雄
김대중 前대통령의 교통사고가 의혹이 아닌 이유
트럭 운전사도 생존해 있고 수사 검사였던 허경만 前전남 지사도 ‘외압은 없었다’고 증언. 당시 경호원도 김대중측 차량 과실 인정
양대 공중파 방송인 KBS와 MBC는 5월21일 밤9시 메인 뉴스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피습 사건을 다루면서 역대 주요 정치테러에 대한 보도도 함께 했다. 양대 방송국은 1971년 전남 무안에서 일어난 金大中씨의 교통사고도 주요 정치테러로 보도했다.
5월21일 KBS는 9시 뉴스에서 ‘정치인 피습(취재 김웅규 기자)’이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71년 8대 총선 때 지원 유세를 다니던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승용차에 트럭이 부딪친 일은 아직 의혹으로 남아 있다”고 보도했고 MBC도 ‘정치인 습격 사건(취재 김희웅 기자)’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1971년 총선 때는 신민당 후보 지원유세를 마치고 목포에서 광주로 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승용차에 덤프트럭이 돌진했다. 이 사고로 승용차 운전자 등 세명이 숨지고 김 전 대통령은 지금까지 불편한 다리로 평생을 살아왔다. 트럭은 당시 공화당 소속 의원의 소유로 드러났지만 최종 배후는 드러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양 방송국의 보도 내용은 金大中씨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토대로 하는 것이다.
‘당시 나(김대중)는 전라도 지방의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를 끝내고 목포에서 비행기로 상경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날씨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뜬다고 했다. 광주에서는 비행기가 뜬다는 이야기를 듣고 비행기를 타러 광주로 갔다. 광주로 가는 도중 전남 무안 입구의 1차선 도로에서 마주 오던 14t 트럭이 거의 90도 각도로 확 꺾으며 중앙선을 넘어 내 차를 덮쳤다. 내 차를 받은 트럭은 잇따라 택시를 정면으로 받았다. 앞에 탔던 3명이 즉사, 뒤의 3명이 중상을 당했다. 사고 후 현장에서는 트럭 운전사가 없어졌다. 이 일은 박 대통령의 측근들이 시킨 것이다. 트럭의 소유자가 당시 공화당 전국구 후보로 등록된 변호사였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도 바뀌었다. 운전사는 1년 징역을 받았는데 중간에 풀려났다. 운전사는 나중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애초에 목포에서 비행기가 뜨지 못하게 한 것도 정부의 음모다.’
金大中씨는 1997년 11월15일 도서출판 산하에서 출간된 자전적 에세이「나의 삶 나의 길」에서도 이 사고를「야만적인 독재정권이 선물한 교통사고」로 규정하고 있다.
金大中씨의 이같은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월간조선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먼저 사고를 낸 트럭은 범한화물(주)라는 회사 소속이었다. 이 회사의 사장은 洪國泰씨. 그의 아버지는 당시 공화당 전국구의원 후보였던 洪承萬씨(작고·당시 대한변협 회장)였다. 그러니까 사고트럭은 공화당 국회의원 후보의 아들 소유였던 것이다. 취재 당시 한국상역이란 컴퓨터 회사를 경영하고 있던 洪씨는 이렇게 증언했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그게 단순한 교통사고, 그것도 피해차량이 교통법규를 어겨서 일어난 사고임을 다 알고 있기에 구태여 해명하지 않았다. 제가 김대중씨한테 사과를 하지도 문병을 하지도 않은 이유가 있다. 사고운전사는 당시 서울 근교의 셋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고 다음날 신민당원들이 그 집에 몰려가 부인과 아이들을 반죽음이 될 정도로 괴롭히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걸 보고 저도 흥분해, 찾아온 당원들에게, 오히려 내가 김대중씨의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버티고 말았다. 그런 분위기였던 만큼 목포에서 있었던 수사와 재판은 공정했다. 운수회사는 그 사고가 계기가 되어 문을 닫아버렸다』
트럭 운전사가 사고 이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조갑제 기자는 이 운전사를 찾아내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기사는 1987년 11월호 월간조선에 실렸다.
인터뷰 당시 사고트럭운전사 權重億씨(당시 51세)는 부산 동래구 연산6동 1876-13번지에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회사 출퇴근 버스의 운전을 하고 있었다. 權씨는 사고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 비가 좀 내리고 있었다. 경기 영 7-4755호 트럭을 몰고 목포로 가는데 무안군에서 마주 오던 차량 행렬을 보았다. 택시가 맨 앞에 있었고, 그 뒤를 따라 오던 세단차―여기에 김대중씨가 타고 있었다는 것은 사고 뒤에 알았다―가 중앙선을 넘어 택시를 앞지르려고 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급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비탈길에 비가 내려 그런지 왼쪽으로 미끌어지면서 세단을 약간 스치고 뒷따라오던 택시를 정면으로 들이받아 그 안에 타고 있던 두명이 죽었다. 저는 뛰어내려 택시 승객부터 끌어냈고, 지나가는 차들한테도 구원을 청했다. 세단차는 길 아래로 처박혔는데 그 차에 탔던 사람들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운전사는 당시 현장에서 달아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붙잡혀 구속되었고 금고 10개월의 刑을 받았다고 했다. 刑을 다 살고 나와 아내와 헤어진 뒤 두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고 했다.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도 고의성이 있는 사고라는 쪽으로 추궁을 받은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 金大中씨측은 金珍培(김진배ㆍ민주당 국회의원)씨가 쓴 「金大中 受難史-인동초의 새벽」(1987년 10월31일 발행)과 1999년 2월25일에 발행한「김대중 자서전①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라는 책을 통해 택시가 자신의 차를 추월하려다 맞은 편에서 오던 트럭과 부딪혀 큰 사고로 이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金大中씨 경호원은 세단차가 추월하려는 택시를 막으려다 사고가 났다고 증언했다. 金大中씨 경호원 咸씨는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사고 당시의 정황을 설명했다.
『사고 당시 경호 차량은 승용차 한 대와 택시 두 대였다. 목포발 비행기가 결항하는 바람에 목포에서 광주공항으로 가기 위해 크라운 승용차 한 대와 택시 두 대를 빌렸다. 金大中 의원이 탄 크라운 승용차 운전사 양승만씨는 렌터카 회사 소속이었다. 선두 1호차에 金大中 의원, 2호차에 나를 비롯한 경호원, 3호차에 주치의 이경호씨가 타고 광주를 향해 일렬로 달렸다. 경호차는 대절한 택시였기 때문에 앞장서지를 못하고 1호차 바로 뒤에 따라 붙었다. 날씨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고 시야가 뿌옇게 흐린 상태였다.
나는 경호를 맡은 사람으로서 2호차 택시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서 선두 1호차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택시 한 대가 3호차를 추월한 후 2호차 뒤에서 깜박이를 켜면서 추월을 시도했다. 나는 운전사에게 추월시켜 주라고 지시했다. 2호차를 추월한 택시는 다시 선두 1호차를 추월하기 위해 몇 차례 차선을 넘나들었다. 편도 1차선 도로인데 그때마다 1호차가 추월을 막았다. 저러다가 사고가 날까 싶어 나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1호차에게 택시를 먼저 통과시켜 주라는 신호를 보냈는데, 1호차(金大中 의원이 탄 크라운 차) 운전사가 계속 추월을 막았다. 그러다가 사고 지점인 고갯길이 나타났다. 택시는 속력을 내며 1호차 뒤에 바짝 따라 붙은 뒤 추월하기 위해 중앙선을 넘어 왼쪽으로 달렸다. 그러자 1호차도 추월을 막으려고 왼쪽 차선으로 들어가면서 두 차 모두 중앙선을 넘어버렸다. 그 순간 앞에서 트럭이 나타났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중앙선을 침범한 1호차와 택시는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그 순간 1호차 운전사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자기 차선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왼쪽 뒷부분을 트럭에 부딪치며 논에 떨어졌고, 1호차 뒤에 있던 택시만 트럭과 정면 충돌했던 것이다. 사고는 1호차가 택시의 추월을 막으려 하다가 일어났던 것이다. 사고후 렌트카 운전사에게 「택시를 먼저 보내 주라고 그렇게 신호했는데도 듣지 않고 추월경쟁을 벌여 사고를 냈느냐」며 굉장히 혼내 주었다. 그 운전사는 호남의 존경받는 정치지도자 金大中씨를 자기 차에 모셨다는 우쭐한 기분에서 양보해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金大中씨 탄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어 택시의 추월을 막은 것이다. 택시를 추월시켜 주었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을 맡았던 검사가 중간에 바뀌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달랐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주임 검사는 김대중 정부 당시 전남 지사였던 許京萬(허경만)씨였다. 許 지사는 혹시 수사 당시 상부나 외부로부터 사건을 축소하라는 압력을 받았는지 묻는 우 기자의 질문에 ‘자신은 소신대로 일했던 사람’이라며 그런 일은 없다고 말했다.
許 지사는 그러나 金大中씨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한다는 요지로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 주장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정말 트럭 운전사에게 졸음운전 여부를 물어봤느냐는 질문, 조직적인 암살을 기도했다면 발견되었을 통신장비의 유무, 암살계획이 있었다면 비밀이 요구되는 상황인데 트럭 조수가 동승한 점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답변도 하지 못했다.
비행기의 결항이 정부의 지시 때문이었다는 점도 의문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1971년 5월24일 목포에는 44.4mm의 비가 왔다고 한다. 항공사 관계자는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비행기가 결항되는 것은 아니지만 視程(시정)거리가 짧아지므로 결항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1998년 통계를 살펴보면 목포 공항의 결항율은 연평균 13%로 결항율이 21%인 속초공항 다음으로 높았다. 이 기간 중 4월부터 6월 사이의 목포공항 결항율은 월 평균 25%로 연평균보다 높다고 한다. 한국공항공단 관계자는 “비행기 운항에 지장이 없는 날씨임에도 고의적으로 항공기를 못 뜨게 했다는 주장은 항공사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이상과 같이 1971년 5월24일 金大中씨의 교통사고는 이미 일반적인 교통사고라는 것이 밝혀진 상황이다. 여기에 대해 金大中씨는 지난 30여 년 간 교통사고를 낸 트럭운전사를 ‘암살범’으로 단정하고 수많은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다. 운전사가 살인혐의가 아니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적용된 부분, 의문을 죽음을 당한 적이 없다는 점, 트럭회사가 여당 의원 소유가 아니라는 점, 수사 검사가 교체되지 않았다는 점 등은 ‘정권의 음모’라는 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말한다.
KBS와 MBC는 김대중씨가 주장하는 음모론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KBS 김웅규 기자에게 보도 내용 중 ‘의혹’이라는 부분이 어떻게 쓰인 것인지 물었다. KBS 김웅규 기자는 “내 기사에 대한 의문이 있다면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정식으로 해명을 요청하라”며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MBC 김희웅 기자는 외부 취재 때문에 전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김대중의 거짓말을 재생한 KBS, MBC
- 全敬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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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5-22, 2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