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위대한 경제학자 하이에크('노예로 가는 길' 등)와 위대한 소설가 조지 오웰('1984년', '동물농장' 등)의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소련 공산주의의 인기가 절정기에 있을 때인 2차세계대전 후반기 1944년 무렵에 '스탈린주의야말로 히틀러의 나치즘과 본질적으로 같은 전체주의이다'라고 주장하는 名著를 썼다. 이 때문에 좌파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역사는 두 사람의 예언을 입증했다.
두 사람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가 다 같은 집단주의이고 증오를 가장 중요한 전략 전술로 쓰고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朴槿惠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테러 이후 이런 사건을 낳고 있는 한국 사회의 갈등, 특히 분열과 증오심을 부채질하고 있는 좌익과 노무현 대통령의 言動에 대한 집중적인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 거짓선동과 증오심 조장 등 노무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대중조작 숫법은 히틀러와 게벨스의 숫법을 많이 닮았다. 한국 사회의 성공한 계층과 대한민국 수호 세력을 유태인처럼 미워하는 것이 이들이다. 국민들을 '시민혁명'의 대상으로 보는가 하면 과반수가 넘는 국민들을 '별놈의 보수'라고 경멸한 것이 대통령이다. 그의 증오심 서린 毒說은 이미 한 사람을 자살로 몰아갔다.
盧 정권의 이런 숫법은 또 사회주의의 계급투쟁설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국민국가의 국민들을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로 나눠 '양극화'라는 갈등조장 선동으로 '덜 가진 층'의 불만과 증오심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좌익 숫법이다.
노무현은 민주투사라고 주장하나 그의 숫법은 오히려 파쇼식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이에크가 還生하여 한국의 오늘을 진단한다면 그는 히틀러, 스탈린, 노무현, 김정일의 공통점을 정확하게 집어낼 것이다.
히틀러와 가장 다른 사람은 영국 수상 처칠이었다. 히틀러는 증오심을 바탕으로 국수주의의 狂氣를 부른 사람이고, 처칠은 조국애에 기반한 애국자였다. 이렇게 출발점이 다른 것은 처칠은 개인주의자였고 히틀러는 집단주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존중, 그리고 관용이 민주주의의 기반이다. 분열과 증오심을 선동하는 숫법은 결국 인간의 나쁜 점을 자극하여 흉기화하자는 것이니 파쇼 및 공산주의와 통한다.
한때 김정일의 스승이었던 黃長燁 전 노동당 비서는 김정일이 히틀러를 숭배한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이 세계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핵공갈의 패턴을 보면 히틀러가 1930년대에 유럽을 상대로 공갈외교를 벌여 속속 영토를 확장해가던 수법이 생각난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부가 결전의지를 갖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파리에서 '거대한 환상'과 같은 反戰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는 프랑스 지도층의 정신이 썩고 있다고 생각했다. 히틀러가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키고(1936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1938년) 체코슬로바키아까지 먹어치우고(1939년)한 것은 '이렇게 해도 영국과 프랑스는 무력으로 독일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는 판단하에서 모험을 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여론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대중민주정치에선 정치인들이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英佛 지도층의 전쟁의지 박약을 그들에게만 책임추궁할 수는 없다.
英佛의 여론이 전쟁불사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초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 거주지뿐 아니라 국토전역을 점령한 것이 계기였다. 흥분한 여론을 의식한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위협하자 뒤늦게 폴란드를 침공하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공약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도 히틀러는 이 약속을 엄포라고 해석했다.
여론에 둔감한 독재자들은 상대국의 여론을 무시하다가 혼이 나는 경우가 많다. 김정일이 고이즈미 수상에게 일본인 납치에 대해서 고백했다가 일본의 여론과 언론의 역공을 당해 日北 수교 교섭에 제동이 걸린 예가 있다.
히틀러를 가장 정확히 알고 연구했던 사람이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한 양보는 결국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경고했지만 여론과 언론, 그리고 政界에서 따돌림만 당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는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처칠은 수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전쟁위험을 과장한 우익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존 루카스가 쓴 '히틀러 對 처칠'이란 책을 읽었다. 이 책은 1940년 영국 상공의 공중전을 무대로 설정하여 인류의 문명을 건 두 사람의 결투를 다루고 있다. 루카스는 이 책에서 처칠이 결국 히틀러를 이기게 된 것은 히틀러가 처칠에 대해서 안 것보다도 처칠이 히틀러에 대해서 안 정도가 훨씬 깊었고 정확한 점과 관계가 있다고 썼다.
그는 이렇게 썼다.
'1940년에 처칠이 히틀러의 제1 라이벌이 된 것은 신의 섭리라고 생각된다. 현대사에서 처칠이 히틀러를 이해한 정도로 외국의 라이벌을 熟知한 경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랬기 때문에 처칠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처칠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 선동가일 때부터 그를 관찰했다고 한다. 1930년, 히틀러 집권 3년 전 처칠은 이미 히틀러가 집권하면 독일의 재무장과 세계 전쟁이 터질 가능성이 있다고 예언했다(런던 주재 독일 대사관 참사관이 이런 처칠의 발언을 본국에 보고한 문서가 있다).
'히틀러 對 처칠'에서 필자 루카스는 두 사람의 인간됨을 아주 재미 있게 비교하고 있다.
1. 히틀러가 국가주의자였다면 처칠은 애국자였다. 국가주의자는 국가의 敵에 대한 증오심이 주류이지만 애국자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주류이다.
2. 히틀러는 처칠을 호전적인 독일인의 적, 시대착오의 반동주의자로 보았다. 처칠은 히틀러가 야만시대 惡의 재현인데, 과학기술로 무장한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3. 히틀러는 증오심이, 처칠은 관대함이 성격의 主調였다.
4. 히틀러는 유머감각이 없었으며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처칠은 눈물을 잘 흘렸고 위기 때도 항상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5. 히틀러는 남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처칠은 약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6. 두 사람 모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두 사람 다 독서를 많이 했다. 히틀러는 말을 중시했고 처칠은 글을 중시했다.
7. 히틀러보다 처칠은 역사와 전통을 중시했다. 처칠은 '운명의 여신은 관습에 등을 돌리는 사람에게 분노한다'고 쓴 적도 있다. 처칠은 히틀러를 유럽 문명의 파괴자로 보았고 자신을 수호자로 보았다.
8. 처칠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교묘하게 융합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독일인 특유의 관념론에 기울었다. 히틀러는 독일군대가 강력한 이유로서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독일 병사들의 정신력을 들었다. 히틀러가 관렴론자라면 처칠은 원칙론자였다.
이런 비교표를 읽고 있으면 김정일과 히틀러가 비슷해지고 부시와 처칠이 비슷해지는 것 같다. 부시가 김정일에 관해 언급한 내용은 짧지만 핵심을 찌르고 있다.
'주민들을 굶겨죽여가면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거대한 정치수 수용소를 운영하는 악의 축, 그 자 이름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집어진다'
김정일에 대한 증오도 북한동포들과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해야만 증오를 위한 증오가 아니라 정의로운 증오가 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증오의 사도들: 히틀러, 스탈린, 노무현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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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5-23, 2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