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침설이 거짓으로 밝혀지니 남침유도설을 들고 나온 '쓸모 없는 바보들' 이야기
한국전쟁은 南侵 전쟁이다. 그 南侵은 소련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고, 金日成은 적극적으로 전쟁 수행을 위한 역할을 담당했다.
민족의 참극을 주도한 金日成이 이 전쟁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필자: 李春根 자유기업원 부원장
1952년 서울 출생. 연세大 정외과·同 대학원 졸업. 美 텍사스 주립大 정치학 박사.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해양전략연구소 연구실장, 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 역임. 現 자유기업원 부원장. 저서 「북한핵의 문제 : 발단, 전개과정, 전망」, 「테러전쟁 시대의 국제정세」,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譯書), 「새로운 제국 중국」(譯書)등.
(월간조선)
美·韓 포함 20개국이 참전
6·25 전쟁 때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인민군.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진행된 전쟁을 우리는 오랫동안 「6·25 사변」 또는 「6·25 동란」이라고 불러 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6·25 사변 혹은 6·25 동란을 「한국전쟁」이라고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이라 부르고 있지만, 이 전쟁은 아직도 모두가 공통으로 부르는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영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외국 사람들은 이 전쟁을 「Korean War」라고 부른다. 6·25 한국전쟁에서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미국·중국·영국·프랑스 등 당대의 강대국 군인들이 모두 참전했을 뿐 아니라, 국제연합의 깃발 아래 총 16개국 군대가 파견되었다. 한국·북한·중국·소련까지 합한다면 한국전쟁의 참전국이 20개국에 이르니 「한국전쟁」 혹은 「Korean War」는 잘못된 이름이 분명하다. 소련은 종전에는 직접적인 참전국이 아닌 것처럼 알려졌지만, 최근 자료들은 소련도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병해 전투에 직접 참여(특히 공중戰)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이처럼 참전국 수와 그 내용을 볼 때 한국전쟁은 가히 「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 측은 자신의 입장과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이 전쟁을 「抗美援朝戰爭(항미원조전쟁)」, 즉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을 도와준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 전쟁을 「朝鮮戰爭(조선전쟁)」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기습 南侵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국제정치학적 성격이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전쟁의 원인에 대해 다양한 이론과 학설들이 존재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12년 정도 지난 시점인 1965년 이미 한국전쟁 관련 출판물이 1만 種(종)을 넘어섰다. 그 이후에도 한국전쟁 관련 서적과 논문, 그리고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국전쟁의 전모에 관한 지식을 지금과 같은 知的(지적)·사상적인 혼란 상황으로 더 이상 방치하기는 곤란하다. 이 전쟁을 좀더 정확하게 분석하고, 교훈을 얻음으로써 민족상잔의 비극을 피하는 시금석으로 삼아야 한다.
한국전쟁은 세계사상 7大 전쟁
한국전쟁은 전투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규모로 측정할 경우, 서기 1500년 무렵 근대 국제체제가 형성된 이래 발발했던 모든 전쟁 중에서 그 규모가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大전쟁이다. 한국전쟁보다 인명피해가 더 큰 규모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3), 30년 전쟁(1618~1648), 그리고 7년 전쟁(1755~1763)뿐이다.
한국전쟁보다 규모가 더 큰 이 전쟁들은 모두 그 시대의 「세계대전」이라고 할 만한 규모와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 세계적인 覇權(패권)을 걸고 강대국들이 벌인 전쟁들이었다.
6·25 전쟁은 한반도라는 아주 좁은 땅에 전쟁의 범위가 한정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처절하고 비참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연평균 인명피해 수치로 본다면 한국전쟁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이어 세계사상 세 번째로 잔인한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전투에서의 군인 사망자를 기준으로 연평균 30만8053명이 숨진 처절한 전쟁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제외하면 연평균 30만 명의 병사들이 전사한 전쟁은 없었다. 처절함의 극치처럼 보였던 나폴레옹 전쟁의 경우도 연평균 병력 전사자 수는 한국전쟁의 절반 정도인 15만5750명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을 도발한 자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아무리 그럴듯하다고 해도 민간인 포함, 全국민의 10% 이상이 인명 피해를 당한 사건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우리 민족끼리」를 말끝마다 되뇌이고 있는 바로 그 집단이 동족의 가슴을 향해 도발했던 전쟁이기 때문에 이 전쟁은 더욱 가증스럽다.
세월의 흐름은 한국전쟁에 대해 권위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새로운 자료들을 쏟아 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외교 문서들을 일정기간 비밀로 분류하다 시간이 지나면 공개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료들은 거의 공개되었고, 특히 전쟁의 중요한 배후 국가였던 소련의 몰락으로 한국전쟁에 관한 수많은 소련 측 자료가 공개되었다. 하지만 중국과 북한의 한국전쟁 관련 문서 자료들은 아직도 그 대부분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다.
전쟁을 연구하는 경우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전쟁 발발의 당사자에 관한 부분이다. 전쟁 발발 당사자를 밝혀야 하는 것은 전쟁의 연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전쟁을 연구하는 일이란 규범적·도덕적 목적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연구에는 침략자를 가려내어 역사적으로 단죄한다는 도덕적 목적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싸움을 조사하는 경우에 「누가 먼저 폭력을 행사했느냐」가 가장 중요한 질문인 것과 마찬가지다. 전쟁을 연구하는 목적 중 하나는 평화를 위한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전통주의
한국전쟁은 누가, 왜, 어떻게 일으킨 것인가?
한국전쟁을 시작한 장본인인 북한의 金日成은 공격 개시와 함께 발한 선전포고에서 「남한이 먼저 도발했기 때문에 이를 반격하는 차원에서 전쟁을 개시한다」고 주장했다. 아직도 북한 측은 이 주장을 고수한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아직도 싸움의 두 상대방이 모두 상대편이 도발한 전쟁이라고 우기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은 이 전쟁을 공산주의 침략 전쟁이라고 규정했고, 북한·소련·중국 등은 이 전쟁을 北侵(북침)에 대한 반격, 민족해방, 反제국주의 전쟁 등으로 부른다.
북한을 포함한 소련 등 공산주의 진영에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 및 학설들은 「전통주의」라고 불린다. 특히 한국·미국 및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자유진영 국가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한국전쟁에 관한 공식적 설명들은 모두 전통주의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주의적 해석은 문자 그대로 더 오래된 해석이며, 훨씬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多數說(다수설)이다. 그리고 전통주의는 오늘날 소련 자료가 발굴·공개됨으로써 한국전쟁은 물론 冷戰(냉전)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압도적인 多數說의 자리를 확립하게 되었다.
물론 소련의 자료들이 공개되기 이전에 이루어졌던 해석들이 모두 맞다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수정이 있었지만 冷戰 및 한국전쟁의 원인이 북한·소련 등 공산진영에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전통주의 학설에 反旗를 든 일단의 학자들이 1960년대 이후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소련을 비롯한 東유럽 공산진영이 붕괴된 1980년대 후반까지 상당한 학술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의 수많은 젊은이들도 이 학설에 큰 영향을 받았고, 그 여파는 아직도 한국 사회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넣고 있는 원인 중 하나다.
「修正主義(수정주의)」라 불리는 학설들은 이름 그대로 전통주의 학설을 수정한다는 의미다. 美·蘇 간 冷戰의 원인을 再조명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1961년 플레밍이 발간한 「冷戰과 그 기원들」이라는 책을 효시로 삼는다. 冷戰을 수정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는 저술들은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출간된 1980년대까지 하나의 큰 학술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수정주의의 도전
수정주의學派(학파)의 가장 큰 특징은 정교한 학문적 분석이라기보다 이들의 대부분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는 학자들이라는 데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본다. 결국 미국의 외교정책은 제국주의의 전형으로 공격적인 반면, 소련의 행동은 미국의 행동에 대한 방어적인 反작용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소련이 東유럽을 공산화시킨 것, 북한을 공산화시킨 것 등은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 정책이라는 맥락이 아니라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방어막을 형성하는 행동일 뿐이라고 두둔한다. 그리고 소련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공산화된 것은 소련의 행동이 아니라 각 지역의 자발적인 사회주의 혁명 노력의 결과라고 정당화시킨다.
결국 수정주의자들은 스탈린을 신중하며 사려 깊은 정치가로 부각시키며, 그의 통치 시기에 소련의 외교는 모험을 회피하고 자제하며 방어적인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들은 소련의 국력(특히 경제력)이 미국보다 한참 열세에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힘없는 소련이 미국을 상대로 모험주의적 對外 정책을 벌일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수정주의자들의 관점은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데 그대로 적용된다.
애초 한국전쟁의 발발에 관한 북한 및 소련의 공식적인 견해는 남한의 北侵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었다. 1950년대 左派계열의 지식인들은 소련·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수정주의의 붕괴
수정주의자들은 과학적 근거보다 억측 및 추측 그리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서 유래하는 세계관에 일치하는 주장을 하며 이론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혹독한 학문적 비판을 당했지만, 점차 북한의 南侵에 의해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되자 한국전쟁에 대한 그들의 기왕의 입장을 고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흔쾌히 시인하지는 않았다. 북한 및 소련에 의한 南侵은 인정했지만 그 南侵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는 변명을 추가한 것이다.
북한은 아직도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이 한국의 北侵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에 대한 논쟁은 사실상 끝난 상황이다. 북한이 한 일의 대부분이 옳다고 생각하는 과격한 親北주의자들도 한국전쟁은 북한이 먼저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북한이 전쟁을 먼저 시작했음을 알려 주는 문서들, 특히 북한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린 소련 측의 공격명령서가 발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南侵이라는 근거는 외교문서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전쟁사의 기초 상식으로 볼 때도 쉽게 밝혀질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이 전쟁이 북한의 주장대로 北侵 전쟁이라면, 즉 1950년 6월25일 새벽 한국의 北侵에 대해 북한이 반격한 것이라면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세계사의 최대 異變(이변)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 전쟁史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전면 전쟁을 개시한 나라가 단 3일 만에 자기 나라의 수도를 빼앗긴 어처구니없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北侵이 사실이라면 李承晩 정권은 전략 측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우둔한 정권이라 비판받아도 마땅할 것이다.
소련 자료들은 고르바초프 이후 부분적으로 공개되기 시작해 1994년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이 한국 정부에 이 전쟁에 관한 소련의 黨 및 정부의 비밀 자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을 넘겨주었다.
새로 공개된 한국전쟁에 관한 소련 측 자료들은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주도했다」는 과거의 전통주의 학설이나, 「金日成은 괴뢰라기보다 한국전쟁을 주도했다」는 흐루시초프 회고록의 주장을 크게 강화시키는 한편, 수정주의 학설들을 크게 弱化(약화)시켰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배경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는 정반대로 해석한다.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라는 시각은 한국전쟁만 특별히 설명하기 위해 나온 이론들은 아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미국과 소련의 冷戰을 폭넓게 분석하며 그 맥락下에서 한국전쟁을 조명하고 있다.
冷戰의 책임
초기의 전통주의學派는 기본적으로 冷戰의 책임을 소련에 돌렸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소련 首長(수장)인 스탈린은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집권자로 간주된다. 소련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조에 따라 세계를 공산화시킨 帝國으로 간주된다. 반면 이들은 미국을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對外 정책을 수행하는 국가로 본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전통주의 주장은 타당하다.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러시아는 주변의 15개국을 합병하여 소련이라는 나라로 팽창했고,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國力을 증가시킴과 동시에 주변 20여 개 국가들을 공산화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소련이 공산화한 나라 중에는 중국과 같은 거대한 나라도 포함되고, 독일(동독)과 같은 과거의 강국도 있었다.
소련의 외교정책이 좀더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이라는 사실은 소련이 붕괴된 후 공개된 새로운 자료들을 가지고 冷戰의 역사를 다시 분석한 미국 예일大 역사학과 「존 루이스 개디스」 교수의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라는 책에서 확인되었다.
「스탈린이 주도해서 한국전쟁이 발생했고 북한은 그저 괴뢰」라는 입장이 한국전쟁 직후 1950년대 서방진영의 한국전쟁에 관한 해석의 主流(주류)였다. 1950년대 및 1960년대 한국 정부 및 학자들의 한국전쟁에 관한 공식 입장도 스탈린의 「괴뢰」 金日成이 도발한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위의 주장은 상당 부분 진실이지만 1970년 간행된 흐루시초프 회고록은 「스탈린이 전적으로 주도했다기보다 스탈린과 金日成이 함께 공모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주었다. 흐루시초프 회고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9년 말 金日成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南侵 계획을 설명하고 스탈린의 동의를 얻으려 했다. 金日成은 『전쟁을 개시하면 남한에서 폭발을 촉진시켜 인민의 권력, 즉 북한 권력이 쉽게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잘 생각해 신중한 계획을 세워 다시 오라』고 金日成을 설득했다.
金日成은 차후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승리를 절대적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걱정했다고 한다. 金日成은 『전쟁이 신속히 끝나면 미국의 간섭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金日成, 蘇 지원 얻으려「구걸 외교」
흐루시초프 회고록이 밝힌 사실은 후일 소련의 외교문서들이 공개됨으로써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 가장 진실에 가까운 분석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한국전쟁은 애초 전통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전적으로 스탈린이 명령하고 金日成은 스탈린의 명령을 수행한 게 아니다. 金日成은 「괴뢰」라기보다 오히려 더욱 열성적으로 한국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스탈린을 설득했던 것이다.
金日成이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해 「구걸 외교」를 벌였던 사실, 그 과정에서 스탈린은 金日成을 마치 하수인처럼 취급한 것 등은 초기의 전통주의 해석이 상당부분 타당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학자들은 초기 전통주의와 구분하여 1990년 이후의 전통주의를 「新전통주의」라 부르고 있다. 한국전쟁에 관해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을 제공하는 學派라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을 논하는 데 있어서 미국을 제외할 수 없다. 근래에 와서 적잖은 수의 한국인들은 한국전쟁의 원인이 되는 분단이 미국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좀더 정확하게 분석한다면, 미국이 「의도적」으로, 「惡意(악의)」를 가지고 한국을 분단한 것이기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장기적인 국가 전략을 가지지 못한 채 서둘러서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려는 과정에서 한국이 분단되고 말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미국은 소련이 참전한 후 불과 1주일 만에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1945년 8월9일 소련이 선전포고한 이후 불과 2~3일이 지나자 미국은 한반도의 일부라도 미국이 장악해야 하는 심정으로 38선을 즉각 고안한 후 소련에 제의한 것이다.
군사적 편의에 입각해 38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군이 항복을 접수하고, 그 이남의 일본군 항복은 미군이 접수한다는 결정은 결국 민족 분단선이 되었고 한국전쟁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반면에 소련은 좀더 의도적 혹은 전략적인 입장에서 한국 문제에 접근했다. 1990년대 들어 발굴된 소련 측 자료는 스탈린이 이미 1945년 9월20일 북한 지역에 「단독 정부」를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는 점을 알려 준다.
6·25 당시 한국 군사력은 1775년 미국 수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그리고 전쟁 중에도 미국의 태도는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국 그 자체의 전략적 가치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미국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 소련이 주도하는 국제 공산주의의 확산을 차단한다는 차원에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한국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스탈린은 독일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자료도 있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당시 북한군의 무장은 거의 전적으로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북한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세계 전쟁사상 가장 효율적인 탱크라고 소문난 소련제 T-34 탱크 242대, 야크전투기 등 폭격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은 1949년부터 1950년 6월25일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정찰기 10대, 야크전투기 100대, 폭격기 70대, T-34 탱크 100대를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소련이 이처럼 북한을 신식 군대로 키운 결과, 북한의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1950년 1월21일 『비행기·탱크·전함과 현대 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은 어떤 전투 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敵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호언했다.
당시 소련의 무기로 현대화된 북한 군사력에 대항하는 한국군에게는 비행기, 탱크는커녕 제대로 된 야포도 없었다. 미국의 평가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군사력은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기 1년 전인 1775년의 미군 수준이었다.
당시 한국군이 북한군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이던 상황에서, 북한에 대해 기습 선제공격을 가한다는 것은 군사상식상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의 南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 당시 남북한 군사력 상황이며, 북한의 그런 압도적인 군사력은 소련이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南侵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수정주의자들은 자신의 이론과 설명이 오류였다는 사실을 시인하지않았다. 이같은 점에서 수정주의자들의 역사 해석은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였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南侵유도說과 內戰說
수정주의자들은 그들의 잘못된 이론을 폐기하는 대신 한국전쟁을 다른 차원에서 옹호하고 변명했다. 그들이 제시한 한국전쟁에 관한 변명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첫째는 북한을 비롯한 공산 진영이 먼저 공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미국이 南侵을 유도한 결과라는 것이다. 소위 「南侵유도說」이다.
이 주장은 1950년 1월12일 애치슨 장관의 「미국의 極東(극동) 방위선에 대한 선언」에 주목한다. 그날 애치슨 장관은 미국의 極東 방위선을 알류산 列島(열도)-일본 列島-오키나와를 잇는 선으로 한정했다. 남한을 미국의 極東 방위선에서 빼놓은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이를 미국이 북한 및 소련을 유인한 음모라고 본다.
수정주의 이론의 두 번째 변형은 한국 전쟁을 국제 전쟁이 아니라 內戰(내전)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전쟁을 內戰으로 간주하게 되면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는다.
압제를 당하는 국민들이 정부에 저항하는 혁명 과정에서 폭력을 누가 먼저 행사했느냐의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수정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민족해방이라는 숭고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느냐의 여부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전쟁의 원인」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데 반해 수정주의자들은 「전쟁의 기원」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 그 자체의 중요성을 없애 버린 것이다. 싸움을 하는데 「먼저 때린 사람이 누구냐」보다, 「누가 싸움의 조건을 만들었는가」를 보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쟁은 단지 수단일 뿐」이라는 레닌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이같은 입장에 동조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평화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며,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주의자』라고 주장하는 현실이 이율배반적이다. 「反戰平和」라는 구호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행하는 전쟁의 경우에는 예외인 모양이다.
한국전쟁은 內戰이 아닌 「강대국 전쟁」
한국전쟁을 內戰이라고 보는 사람들에게는 인구의 10%가 사망한 민족 대참사의 戰犯(전범)은 없다. 金日成이 한 일은 숭고한 목표를 위해 한 일이며, 그는 침략자도 戰犯도 아닌 혁명가인 것이다.
소련이 한 일도 역시 숭고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을 도와준 자비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래서 소련의 행동을 침략자로 낙인찍을 수 없게 된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도 마찬가지 논리로 정당화한다.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미국의 개입만 문제가 된다.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金日成과 북한이 원하던 「혁명」과 「통일」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이 개입함으로써 한반도가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반면,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것은 원통하게 생각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지금도 美軍 등 유엔군을 총지휘한 맥아더 장군을 통일을 방해한 元兇(원흉)으로 보고 「맥아더 동상 철거」를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모든 통일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고 원하는 통일은 「공산 赤化 통일」을 의미한다.
수정주의자들의 통일은「赤化통일」
전쟁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이론가들은 모든 전쟁을 다 연구할 수 없기 때문에 연구 대상으로 역사상 중요한 전쟁들을 선별한다.
국제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강대국들의 전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강대국 전쟁論」이다. 적어도 1개 이상의 강대국이 한편에 서서 싸운 전쟁을 「강대국 전쟁」이라고 말한다.
한국전쟁은 1950년 당시 세계의 강대국으로 분류되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참전한 전쟁이다. 「강대국 전쟁論」의 주요 이론가인 잭 리비 교수는 1950년 당시 세계의 강대국을 6개국이라 보는데, 그중 독일을 제외한 5大 강국(미국·소련·중국·영국·프랑스)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이 국제戰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수정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은 본래 內戰이었는데 미국이 개입한 결과 국제戰으로 확대되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이 진짜 內戰이었다면 북한이 어떻게 수백 대의 탱크와 폭격기까지 가지고 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겠는가? 소련이 내린 공격명령서까지 나왔는데 그것을 어떻게 內戰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 중요한 반론은 당시 한국의 남북한에 존재하던 정치단위의 성격에서 유래한다.
대한민국은 당시 국제사회의 공인된 主權국가였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공인된 主權국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소련은 북한을 主權독립국가로 간주하고 있었다. 국내법이나 국제적인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북한은 나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요건을 이미 다 갖추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북한이라는 국가의 실체를 갖춘 집단이 자신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일으킨 전쟁이다. 그걸 內戰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한국전쟁이 內戰이 될 수 없는 것은, 이 전쟁의 준비·진행·결과 등 거의 모든 측면이 철저히 국제적인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南侵을 유도했나?
수정주의 左派계열 학자들이 한국전쟁이 南侵임을 확실히 알고 난 후 공산 진영을 두둔하기 위해 전개하는 또 다른 논리는 미국이 가만히 있는 북한이나 소련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을 유혹해 전쟁을 도발토록 하고 이를 빌미로 공산주의 정권들을 武力으로 붕괴시키려 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의 極東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했다는 점에 미국의 음모가 깔려 있다고 본다.
하지만 미국은 1950년 1월12일 애치슨 장관의 연설을 통해 한국을 미국의 極東 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미국의 極東 방위선 속에 확실하게 「포함」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한국을 가져도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건드리면 미국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를 전달한 것이다.
현상을 왜곡해서 보기 시작하면 객관적인 분석은 불가능해진다. 모든 것을 음모라고 본다면 학문적인 분석의 필요도 없어져 버린다. 음모이론은 그것은 음모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밖에는 부정될 수 없다. 논리적 과정을 통해 부정될 수 없는 이론을 학자들은 이론으로 치지 않는다.
미국이 신속하게 개입했다는 사실, 미국의 반격이 38선에서 멈추지 않고 38선을 넘었다는 사실은 南侵유도說의 또 다른 근거들이다. 하지만 전쟁은 한 번 시작하면 그 전개 과정이 스스로의 역동성을 가지게 된다. 세상에 애초에 의도한 대로 진행되는 전쟁은 없다.
미국이 진짜 음모를 가지고 전쟁을 준비하려 했다면 그것은 아시아의 변두리가 아니라 유럽이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더 중요한 곳에 병력과 노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전략적으로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역할은 작지 않다. 그러나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서는 아직 권위 있는 설명을 할 만큼 충분한 자료가 없다.
스탈린이 중국의 등장을 두려워한 나머지 미국과 중국을 한판 붙게 해서 중국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부추겼다는 주장에서부터, 중국은 할 수 없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는 주장, 그리고 최근 첸지안 교수의 주장처럼 중국은 한국전쟁의 모든 과정에서 대단히 적극적이었다는 입장까지 다양하다.
金日成은 전쟁 책임 면할 수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국전쟁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아졌다. 한국전쟁은 분명한 南侵 전쟁이다. 그 南侵은 소련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것이며, 金日成은 거기서 적극적으로 전쟁 개시를 위한 역할을 담당했다.
수정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한국전쟁은 內戰도 아니고 미국이 침략을 유도한 것도 아니다. 인구의 10%가 목숨을 잃은 전쟁이었고 세계의 강대국이 모두 참전한 「세계대전」이었다.
이같은 민족의 참극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변명은 있을 수 없다. 민족을 그토록 강조하는 북한이 이데올로기 때문에 야기한 同族相殘(동족상잔)의 전쟁 책임을 면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
한국전쟁은 南侵 전쟁이다. 그 南侵은 소련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고, 金日成은 적극적으로 전쟁 수행을 위한 역할을 담당했다.
민족의 참극을 주도한 金日成이 이 전쟁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필자: 李春根 자유기업원 부원장
1952년 서울 출생. 연세大 정외과·同 대학원 졸업. 美 텍사스 주립大 정치학 박사.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해양전략연구소 연구실장, 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 역임. 現 자유기업원 부원장. 저서 「북한핵의 문제 : 발단, 전개과정, 전망」, 「테러전쟁 시대의 국제정세」,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譯書), 「새로운 제국 중국」(譯書)등.
(월간조선)
美·韓 포함 20개국이 참전
6·25 전쟁 때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인민군.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진행된 전쟁을 우리는 오랫동안 「6·25 사변」 또는 「6·25 동란」이라고 불러 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6·25 사변 혹은 6·25 동란을 「한국전쟁」이라고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이라 부르고 있지만, 이 전쟁은 아직도 모두가 공통으로 부르는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영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외국 사람들은 이 전쟁을 「Korean War」라고 부른다. 6·25 한국전쟁에서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미국·중국·영국·프랑스 등 당대의 강대국 군인들이 모두 참전했을 뿐 아니라, 국제연합의 깃발 아래 총 16개국 군대가 파견되었다. 한국·북한·중국·소련까지 합한다면 한국전쟁의 참전국이 20개국에 이르니 「한국전쟁」 혹은 「Korean War」는 잘못된 이름이 분명하다. 소련은 종전에는 직접적인 참전국이 아닌 것처럼 알려졌지만, 최근 자료들은 소련도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병해 전투에 직접 참여(특히 공중戰)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이처럼 참전국 수와 그 내용을 볼 때 한국전쟁은 가히 「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 측은 자신의 입장과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이 전쟁을 「抗美援朝戰爭(항미원조전쟁)」, 즉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을 도와준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 전쟁을 「朝鮮戰爭(조선전쟁)」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기습 南侵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국제정치학적 성격이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전쟁의 원인에 대해 다양한 이론과 학설들이 존재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12년 정도 지난 시점인 1965년 이미 한국전쟁 관련 출판물이 1만 種(종)을 넘어섰다. 그 이후에도 한국전쟁 관련 서적과 논문, 그리고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국전쟁의 전모에 관한 지식을 지금과 같은 知的(지적)·사상적인 혼란 상황으로 더 이상 방치하기는 곤란하다. 이 전쟁을 좀더 정확하게 분석하고, 교훈을 얻음으로써 민족상잔의 비극을 피하는 시금석으로 삼아야 한다.
한국전쟁은 세계사상 7大 전쟁
한국전쟁은 전투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규모로 측정할 경우, 서기 1500년 무렵 근대 국제체제가 형성된 이래 발발했던 모든 전쟁 중에서 그 규모가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大전쟁이다. 한국전쟁보다 인명피해가 더 큰 규모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3), 30년 전쟁(1618~1648), 그리고 7년 전쟁(1755~1763)뿐이다.
한국전쟁보다 규모가 더 큰 이 전쟁들은 모두 그 시대의 「세계대전」이라고 할 만한 규모와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 세계적인 覇權(패권)을 걸고 강대국들이 벌인 전쟁들이었다.
6·25 전쟁은 한반도라는 아주 좁은 땅에 전쟁의 범위가 한정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처절하고 비참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연평균 인명피해 수치로 본다면 한국전쟁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이어 세계사상 세 번째로 잔인한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전투에서의 군인 사망자를 기준으로 연평균 30만8053명이 숨진 처절한 전쟁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제외하면 연평균 30만 명의 병사들이 전사한 전쟁은 없었다. 처절함의 극치처럼 보였던 나폴레옹 전쟁의 경우도 연평균 병력 전사자 수는 한국전쟁의 절반 정도인 15만5750명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을 도발한 자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아무리 그럴듯하다고 해도 민간인 포함, 全국민의 10% 이상이 인명 피해를 당한 사건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우리 민족끼리」를 말끝마다 되뇌이고 있는 바로 그 집단이 동족의 가슴을 향해 도발했던 전쟁이기 때문에 이 전쟁은 더욱 가증스럽다.
세월의 흐름은 한국전쟁에 대해 권위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새로운 자료들을 쏟아 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외교 문서들을 일정기간 비밀로 분류하다 시간이 지나면 공개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료들은 거의 공개되었고, 특히 전쟁의 중요한 배후 국가였던 소련의 몰락으로 한국전쟁에 관한 수많은 소련 측 자료가 공개되었다. 하지만 중국과 북한의 한국전쟁 관련 문서 자료들은 아직도 그 대부분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다.
전쟁을 연구하는 경우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전쟁 발발의 당사자에 관한 부분이다. 전쟁 발발 당사자를 밝혀야 하는 것은 전쟁의 연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전쟁을 연구하는 일이란 규범적·도덕적 목적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연구에는 침략자를 가려내어 역사적으로 단죄한다는 도덕적 목적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싸움을 조사하는 경우에 「누가 먼저 폭력을 행사했느냐」가 가장 중요한 질문인 것과 마찬가지다. 전쟁을 연구하는 목적 중 하나는 평화를 위한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전통주의
한국전쟁은 누가, 왜, 어떻게 일으킨 것인가?
한국전쟁을 시작한 장본인인 북한의 金日成은 공격 개시와 함께 발한 선전포고에서 「남한이 먼저 도발했기 때문에 이를 반격하는 차원에서 전쟁을 개시한다」고 주장했다. 아직도 북한 측은 이 주장을 고수한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아직도 싸움의 두 상대방이 모두 상대편이 도발한 전쟁이라고 우기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은 이 전쟁을 공산주의 침략 전쟁이라고 규정했고, 북한·소련·중국 등은 이 전쟁을 北侵(북침)에 대한 반격, 민족해방, 反제국주의 전쟁 등으로 부른다.
북한을 포함한 소련 등 공산주의 진영에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 및 학설들은 「전통주의」라고 불린다. 특히 한국·미국 및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자유진영 국가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한국전쟁에 관한 공식적 설명들은 모두 전통주의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주의적 해석은 문자 그대로 더 오래된 해석이며, 훨씬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多數說(다수설)이다. 그리고 전통주의는 오늘날 소련 자료가 발굴·공개됨으로써 한국전쟁은 물론 冷戰(냉전)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압도적인 多數說의 자리를 확립하게 되었다.
물론 소련의 자료들이 공개되기 이전에 이루어졌던 해석들이 모두 맞다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수정이 있었지만 冷戰 및 한국전쟁의 원인이 북한·소련 등 공산진영에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전통주의 학설에 反旗를 든 일단의 학자들이 1960년대 이후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소련을 비롯한 東유럽 공산진영이 붕괴된 1980년대 후반까지 상당한 학술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의 수많은 젊은이들도 이 학설에 큰 영향을 받았고, 그 여파는 아직도 한국 사회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넣고 있는 원인 중 하나다.
「修正主義(수정주의)」라 불리는 학설들은 이름 그대로 전통주의 학설을 수정한다는 의미다. 美·蘇 간 冷戰의 원인을 再조명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1961년 플레밍이 발간한 「冷戰과 그 기원들」이라는 책을 효시로 삼는다. 冷戰을 수정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는 저술들은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출간된 1980년대까지 하나의 큰 학술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수정주의의 도전
수정주의學派(학파)의 가장 큰 특징은 정교한 학문적 분석이라기보다 이들의 대부분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는 학자들이라는 데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본다. 결국 미국의 외교정책은 제국주의의 전형으로 공격적인 반면, 소련의 행동은 미국의 행동에 대한 방어적인 反작용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소련이 東유럽을 공산화시킨 것, 북한을 공산화시킨 것 등은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 정책이라는 맥락이 아니라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방어막을 형성하는 행동일 뿐이라고 두둔한다. 그리고 소련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공산화된 것은 소련의 행동이 아니라 각 지역의 자발적인 사회주의 혁명 노력의 결과라고 정당화시킨다.
결국 수정주의자들은 스탈린을 신중하며 사려 깊은 정치가로 부각시키며, 그의 통치 시기에 소련의 외교는 모험을 회피하고 자제하며 방어적인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들은 소련의 국력(특히 경제력)이 미국보다 한참 열세에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힘없는 소련이 미국을 상대로 모험주의적 對外 정책을 벌일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수정주의자들의 관점은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데 그대로 적용된다.
애초 한국전쟁의 발발에 관한 북한 및 소련의 공식적인 견해는 남한의 北侵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었다. 1950년대 左派계열의 지식인들은 소련·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수정주의의 붕괴
수정주의자들은 과학적 근거보다 억측 및 추측 그리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서 유래하는 세계관에 일치하는 주장을 하며 이론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혹독한 학문적 비판을 당했지만, 점차 북한의 南侵에 의해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되자 한국전쟁에 대한 그들의 기왕의 입장을 고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흔쾌히 시인하지는 않았다. 북한 및 소련에 의한 南侵은 인정했지만 그 南侵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는 변명을 추가한 것이다.
북한은 아직도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이 한국의 北侵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에 대한 논쟁은 사실상 끝난 상황이다. 북한이 한 일의 대부분이 옳다고 생각하는 과격한 親北주의자들도 한국전쟁은 북한이 먼저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북한이 전쟁을 먼저 시작했음을 알려 주는 문서들, 특히 북한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린 소련 측의 공격명령서가 발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南侵이라는 근거는 외교문서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전쟁사의 기초 상식으로 볼 때도 쉽게 밝혀질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이 전쟁이 북한의 주장대로 北侵 전쟁이라면, 즉 1950년 6월25일 새벽 한국의 北侵에 대해 북한이 반격한 것이라면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세계사의 최대 異變(이변)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 전쟁史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전면 전쟁을 개시한 나라가 단 3일 만에 자기 나라의 수도를 빼앗긴 어처구니없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北侵이 사실이라면 李承晩 정권은 전략 측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우둔한 정권이라 비판받아도 마땅할 것이다.
소련 자료들은 고르바초프 이후 부분적으로 공개되기 시작해 1994년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이 한국 정부에 이 전쟁에 관한 소련의 黨 및 정부의 비밀 자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을 넘겨주었다.
새로 공개된 한국전쟁에 관한 소련 측 자료들은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주도했다」는 과거의 전통주의 학설이나, 「金日成은 괴뢰라기보다 한국전쟁을 주도했다」는 흐루시초프 회고록의 주장을 크게 강화시키는 한편, 수정주의 학설들을 크게 弱化(약화)시켰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배경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는 정반대로 해석한다.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라는 시각은 한국전쟁만 특별히 설명하기 위해 나온 이론들은 아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미국과 소련의 冷戰을 폭넓게 분석하며 그 맥락下에서 한국전쟁을 조명하고 있다.
冷戰의 책임
초기의 전통주의學派는 기본적으로 冷戰의 책임을 소련에 돌렸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소련 首長(수장)인 스탈린은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집권자로 간주된다. 소련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조에 따라 세계를 공산화시킨 帝國으로 간주된다. 반면 이들은 미국을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對外 정책을 수행하는 국가로 본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전통주의 주장은 타당하다.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러시아는 주변의 15개국을 합병하여 소련이라는 나라로 팽창했고,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國力을 증가시킴과 동시에 주변 20여 개 국가들을 공산화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소련이 공산화한 나라 중에는 중국과 같은 거대한 나라도 포함되고, 독일(동독)과 같은 과거의 강국도 있었다.
소련의 외교정책이 좀더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이라는 사실은 소련이 붕괴된 후 공개된 새로운 자료들을 가지고 冷戰의 역사를 다시 분석한 미국 예일大 역사학과 「존 루이스 개디스」 교수의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라는 책에서 확인되었다.
「스탈린이 주도해서 한국전쟁이 발생했고 북한은 그저 괴뢰」라는 입장이 한국전쟁 직후 1950년대 서방진영의 한국전쟁에 관한 해석의 主流(주류)였다. 1950년대 및 1960년대 한국 정부 및 학자들의 한국전쟁에 관한 공식 입장도 스탈린의 「괴뢰」 金日成이 도발한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위의 주장은 상당 부분 진실이지만 1970년 간행된 흐루시초프 회고록은 「스탈린이 전적으로 주도했다기보다 스탈린과 金日成이 함께 공모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주었다. 흐루시초프 회고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9년 말 金日成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南侵 계획을 설명하고 스탈린의 동의를 얻으려 했다. 金日成은 『전쟁을 개시하면 남한에서 폭발을 촉진시켜 인민의 권력, 즉 북한 권력이 쉽게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잘 생각해 신중한 계획을 세워 다시 오라』고 金日成을 설득했다.
金日成은 차후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승리를 절대적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걱정했다고 한다. 金日成은 『전쟁이 신속히 끝나면 미국의 간섭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金日成, 蘇 지원 얻으려「구걸 외교」
흐루시초프 회고록이 밝힌 사실은 후일 소련의 외교문서들이 공개됨으로써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 가장 진실에 가까운 분석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한국전쟁은 애초 전통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전적으로 스탈린이 명령하고 金日成은 스탈린의 명령을 수행한 게 아니다. 金日成은 「괴뢰」라기보다 오히려 더욱 열성적으로 한국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스탈린을 설득했던 것이다.
金日成이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해 「구걸 외교」를 벌였던 사실, 그 과정에서 스탈린은 金日成을 마치 하수인처럼 취급한 것 등은 초기의 전통주의 해석이 상당부분 타당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학자들은 초기 전통주의와 구분하여 1990년 이후의 전통주의를 「新전통주의」라 부르고 있다. 한국전쟁에 관해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을 제공하는 學派라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을 논하는 데 있어서 미국을 제외할 수 없다. 근래에 와서 적잖은 수의 한국인들은 한국전쟁의 원인이 되는 분단이 미국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좀더 정확하게 분석한다면, 미국이 「의도적」으로, 「惡意(악의)」를 가지고 한국을 분단한 것이기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장기적인 국가 전략을 가지지 못한 채 서둘러서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려는 과정에서 한국이 분단되고 말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미국은 소련이 참전한 후 불과 1주일 만에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1945년 8월9일 소련이 선전포고한 이후 불과 2~3일이 지나자 미국은 한반도의 일부라도 미국이 장악해야 하는 심정으로 38선을 즉각 고안한 후 소련에 제의한 것이다.
군사적 편의에 입각해 38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군이 항복을 접수하고, 그 이남의 일본군 항복은 미군이 접수한다는 결정은 결국 민족 분단선이 되었고 한국전쟁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반면에 소련은 좀더 의도적 혹은 전략적인 입장에서 한국 문제에 접근했다. 1990년대 들어 발굴된 소련 측 자료는 스탈린이 이미 1945년 9월20일 북한 지역에 「단독 정부」를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는 점을 알려 준다.
6·25 당시 한국 군사력은 1775년 미국 수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그리고 전쟁 중에도 미국의 태도는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국 그 자체의 전략적 가치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미국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 소련이 주도하는 국제 공산주의의 확산을 차단한다는 차원에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한국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스탈린은 독일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자료도 있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당시 북한군의 무장은 거의 전적으로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북한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세계 전쟁사상 가장 효율적인 탱크라고 소문난 소련제 T-34 탱크 242대, 야크전투기 등 폭격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은 1949년부터 1950년 6월25일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정찰기 10대, 야크전투기 100대, 폭격기 70대, T-34 탱크 100대를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소련이 이처럼 북한을 신식 군대로 키운 결과, 북한의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1950년 1월21일 『비행기·탱크·전함과 현대 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은 어떤 전투 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敵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호언했다.
당시 소련의 무기로 현대화된 북한 군사력에 대항하는 한국군에게는 비행기, 탱크는커녕 제대로 된 야포도 없었다. 미국의 평가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군사력은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기 1년 전인 1775년의 미군 수준이었다.
당시 한국군이 북한군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이던 상황에서, 북한에 대해 기습 선제공격을 가한다는 것은 군사상식상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의 南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 당시 남북한 군사력 상황이며, 북한의 그런 압도적인 군사력은 소련이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南侵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수정주의자들은 자신의 이론과 설명이 오류였다는 사실을 시인하지않았다. 이같은 점에서 수정주의자들의 역사 해석은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였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南侵유도說과 內戰說
수정주의자들은 그들의 잘못된 이론을 폐기하는 대신 한국전쟁을 다른 차원에서 옹호하고 변명했다. 그들이 제시한 한국전쟁에 관한 변명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첫째는 북한을 비롯한 공산 진영이 먼저 공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미국이 南侵을 유도한 결과라는 것이다. 소위 「南侵유도說」이다.
이 주장은 1950년 1월12일 애치슨 장관의 「미국의 極東(극동) 방위선에 대한 선언」에 주목한다. 그날 애치슨 장관은 미국의 極東 방위선을 알류산 列島(열도)-일본 列島-오키나와를 잇는 선으로 한정했다. 남한을 미국의 極東 방위선에서 빼놓은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이를 미국이 북한 및 소련을 유인한 음모라고 본다.
수정주의 이론의 두 번째 변형은 한국 전쟁을 국제 전쟁이 아니라 內戰(내전)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전쟁을 內戰으로 간주하게 되면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는다.
압제를 당하는 국민들이 정부에 저항하는 혁명 과정에서 폭력을 누가 먼저 행사했느냐의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수정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민족해방이라는 숭고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느냐의 여부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전쟁의 원인」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데 반해 수정주의자들은 「전쟁의 기원」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 그 자체의 중요성을 없애 버린 것이다. 싸움을 하는데 「먼저 때린 사람이 누구냐」보다, 「누가 싸움의 조건을 만들었는가」를 보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쟁은 단지 수단일 뿐」이라는 레닌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이같은 입장에 동조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평화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며,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주의자』라고 주장하는 현실이 이율배반적이다. 「反戰平和」라는 구호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행하는 전쟁의 경우에는 예외인 모양이다.
한국전쟁은 內戰이 아닌 「강대국 전쟁」
한국전쟁을 內戰이라고 보는 사람들에게는 인구의 10%가 사망한 민족 대참사의 戰犯(전범)은 없다. 金日成이 한 일은 숭고한 목표를 위해 한 일이며, 그는 침략자도 戰犯도 아닌 혁명가인 것이다.
소련이 한 일도 역시 숭고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을 도와준 자비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래서 소련의 행동을 침략자로 낙인찍을 수 없게 된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도 마찬가지 논리로 정당화한다.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미국의 개입만 문제가 된다.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金日成과 북한이 원하던 「혁명」과 「통일」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이 개입함으로써 한반도가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반면,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것은 원통하게 생각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지금도 美軍 등 유엔군을 총지휘한 맥아더 장군을 통일을 방해한 元兇(원흉)으로 보고 「맥아더 동상 철거」를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모든 통일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고 원하는 통일은 「공산 赤化 통일」을 의미한다.
수정주의자들의 통일은「赤化통일」
전쟁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이론가들은 모든 전쟁을 다 연구할 수 없기 때문에 연구 대상으로 역사상 중요한 전쟁들을 선별한다.
국제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강대국들의 전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강대국 전쟁論」이다. 적어도 1개 이상의 강대국이 한편에 서서 싸운 전쟁을 「강대국 전쟁」이라고 말한다.
한국전쟁은 1950년 당시 세계의 강대국으로 분류되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참전한 전쟁이다. 「강대국 전쟁論」의 주요 이론가인 잭 리비 교수는 1950년 당시 세계의 강대국을 6개국이라 보는데, 그중 독일을 제외한 5大 강국(미국·소련·중국·영국·프랑스)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이 국제戰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수정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은 본래 內戰이었는데 미국이 개입한 결과 국제戰으로 확대되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이 진짜 內戰이었다면 북한이 어떻게 수백 대의 탱크와 폭격기까지 가지고 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겠는가? 소련이 내린 공격명령서까지 나왔는데 그것을 어떻게 內戰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 중요한 반론은 당시 한국의 남북한에 존재하던 정치단위의 성격에서 유래한다.
대한민국은 당시 국제사회의 공인된 主權국가였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공인된 主權국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소련은 북한을 主權독립국가로 간주하고 있었다. 국내법이나 국제적인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북한은 나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요건을 이미 다 갖추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북한이라는 국가의 실체를 갖춘 집단이 자신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일으킨 전쟁이다. 그걸 內戰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한국전쟁이 內戰이 될 수 없는 것은, 이 전쟁의 준비·진행·결과 등 거의 모든 측면이 철저히 국제적인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南侵을 유도했나?
수정주의 左派계열 학자들이 한국전쟁이 南侵임을 확실히 알고 난 후 공산 진영을 두둔하기 위해 전개하는 또 다른 논리는 미국이 가만히 있는 북한이나 소련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을 유혹해 전쟁을 도발토록 하고 이를 빌미로 공산주의 정권들을 武力으로 붕괴시키려 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의 極東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했다는 점에 미국의 음모가 깔려 있다고 본다.
하지만 미국은 1950년 1월12일 애치슨 장관의 연설을 통해 한국을 미국의 極東 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미국의 極東 방위선 속에 확실하게 「포함」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한국을 가져도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건드리면 미국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를 전달한 것이다.
현상을 왜곡해서 보기 시작하면 객관적인 분석은 불가능해진다. 모든 것을 음모라고 본다면 학문적인 분석의 필요도 없어져 버린다. 음모이론은 그것은 음모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밖에는 부정될 수 없다. 논리적 과정을 통해 부정될 수 없는 이론을 학자들은 이론으로 치지 않는다.
미국이 신속하게 개입했다는 사실, 미국의 반격이 38선에서 멈추지 않고 38선을 넘었다는 사실은 南侵유도說의 또 다른 근거들이다. 하지만 전쟁은 한 번 시작하면 그 전개 과정이 스스로의 역동성을 가지게 된다. 세상에 애초에 의도한 대로 진행되는 전쟁은 없다.
미국이 진짜 음모를 가지고 전쟁을 준비하려 했다면 그것은 아시아의 변두리가 아니라 유럽이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더 중요한 곳에 병력과 노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전략적으로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역할은 작지 않다. 그러나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서는 아직 권위 있는 설명을 할 만큼 충분한 자료가 없다.
스탈린이 중국의 등장을 두려워한 나머지 미국과 중국을 한판 붙게 해서 중국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부추겼다는 주장에서부터, 중국은 할 수 없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는 주장, 그리고 최근 첸지안 교수의 주장처럼 중국은 한국전쟁의 모든 과정에서 대단히 적극적이었다는 입장까지 다양하다.
金日成은 전쟁 책임 면할 수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국전쟁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아졌다. 한국전쟁은 분명한 南侵 전쟁이다. 그 南侵은 소련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것이며, 金日成은 거기서 적극적으로 전쟁 개시를 위한 역할을 담당했다.
수정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한국전쟁은 內戰도 아니고 미국이 침략을 유도한 것도 아니다. 인구의 10%가 목숨을 잃은 전쟁이었고 세계의 강대국이 모두 참전한 「세계대전」이었다.
이같은 민족의 참극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변명은 있을 수 없다. 민족을 그토록 강조하는 북한이 이데올로기 때문에 야기한 同族相殘(동족상잔)의 전쟁 책임을 면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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