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58주년 8.15에 붙이는 글

대한민국은 親日派들이 미국의 使嗾를 받아 만든 나라인가?
건국 55주년에 붙이는 글:대한민국은 親日派들이 미국의 使嗾를 받아 만든 나라인가?




李承晩은 全한반도의 赤化를 막고, 남한을 기반으로 自主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과 싸워가면서 建國을 주도… 고위층에서 친일파 철저 배제



● 단순한 「軍事分界線」을 「統治分界線」으로 전환시킨 소련이 민족분단의 원흉
● 북한은 5·10 총선이 있기 2년 3개월 전에 이미 단독 정권 수립 완료
● 5·10 총선거에 앞서 親日派들의 선거권, 被선거권 박탈
● 한민당 중심은 민족운동 세력
●『우리는 金九와 李承晩의 집단들에 대해 어떤 호의도 보여서는 안 될 것』(1946년 2월 末 美 국무부 電文)
● 미국은 單政 수립 결정 후에도 가택연금·정치자금 봉쇄 등으로 李承晩 괴롭혀

梁 東 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중앙大 정치학 석사. 합동통신 기자. 경기大 조교수. 경향신문 논설위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저서 및 논문 「한국현대정치사」,「남로당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연구」,「대한민국건국사」 등.



대한민국은 親日派들이 세운 나라?


제헌국회에서 初代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 취임선서를 하는 李承晩.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직후부터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親日派가 미국의 使嗾(사주)를 받아 세운 나라라는 주장이 있었다. 대체로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南勞黨(남로당), 金九(김구)의 한국독립당 및 金奎植(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系 인사들이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한 자기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러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했고, 그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은 대중적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당시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중도파 지도자들인 趙素昻(조소앙)과 安在鴻(안재홍)마저도 聲明(성명)과 글을 통해 대한민국의 정당성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남북한 공산세력의 남한 赤化(적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 6·25 이후에는 남한 지역만이라도 공산화를 면하게 했던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은 더 이상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이 4·19혁명으로 失脚(실각)하고, 한국민주당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민주당 정권이 5·16 쿠데타로 와해된 이래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李承晩과 무능한 민주당 정권을 비판하는 논객들은 점차 李承晩과 한민당의 대한민국 건국 노력의 정당성까지 회의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러한 분위기는 그동안 숨죽여 오던 反대한민국 인사들을 고무시켰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주장이 우리 사회에서 급격히 확산되었다. 당시 국내 左翼혁명세력들은 대한민국의 기성질서를 뒤엎는 자기들의 혁명투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이론투쟁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광복 이후 3년간의 역사, 혹은 대한민국 건국사를 왜곡하는 주장이 대학가에서 학술논문이나 책자의 행태로 보급되었다. 다음에는 대학신문이나 校誌, 그리고 집회 시위 때 뿌려지는 전단 등을 통해 대학생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다.


정부도 대한민국 「건국」의 意義를 외면

이런 주장에 물든 대학생들과 청년지식인들이 1990년대 이후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대중들에게까지 전파됐다.

특히 언론계와 예술계 종사자들의 영향이 컸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진 소설가·시나리오 작가·연출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광복 이후 3년史를 다루는 소설, 드라마, 영화, 연극 등은 「대한민국은 민족분단을 위해 미국의 사주를 받은 親日派들이 세운 국가」라는 메시지를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전파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러한 잘못된 지식을 수용하도록 거의 매일같이 세뇌되어 온 것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마치 「定說(정설)」인 것처럼 여겨지게 됐다.

국민들뿐 아니라 정부마저도 대한민국의 건국을 기념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대통령을 역임한 盧泰愚(노태우)·金泳三(김영삼)·金大中(김대중) 등 역대 대통령들은 일제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과 대한민국의 건국을 동시에 기념하기로 된 (왜냐하면,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된 날과 대한민국 건국일자가 같은 8월15일이기 때문에) 광복절 기념식에서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의 의의만 강조하고, 대한민국 건국의 의의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기념식」도 그 명칭에 「건국」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정부수립」이란 용어를 사용, 「건국」의 意義(의의)를 退色(퇴색)시켰다. 심지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은 매년 성대히 거행되어 그 의의가 높이 평가되면서도,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과 의의를 언급하는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언명은 어떤 기념식에서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누가 대중 앞에서 『대한민국은 민족분단을 위해서 건국된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민족을 분단하는 공산정권이 조직된 탓에 남한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건국되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사람들은 親日派도 아니고 미국의 앞잡이도 아니다』는 주장을 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사람 極右(극우)분자구먼』, 『저 사람 되게 싱거운 사람이네』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군사분계선」을 「통치분계선」으로 전환시킨 소련이 분단의 원흉

광복 직후 3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사건들을 있었던 그대로 추적해 보면, 대한민국은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 지역에 단독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남북한 사회의 분단과 이질화가 이루어진 후에 건국되었으며, 親日派가 아닌 民族主義的 인사들에 의해서, 그리고 미국의 使嗾를 받아서가 아니라 미국과 대립하면서 건국한 국가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韓民族의 분단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완료되는가?

민족의 분단은 어떤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민족구성원들 간의 자유로운 왕래와 교신이 불가능해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런 경계선으로 구획된 각 지역에 별도의 정부 혹은 통치기구가 수립됨으로써 완료된다.

이제껏 한국 현대정치사를 기술해 온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우리 민족분단의 출발은 미국이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미군과 소련군의 공동작전을 위해 북위 38도선을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을 劃定(획정)하는 것은 지도 위에 군사작전의 관할구역을 구분하는 선을 긋는 것에 불과하며 그런 행위가 곧 그 지역의 영토와 주민을 「분단」하는 출발이 될 수 없다.

분단은 그러한 「군사분계선」에 따라 「주민들의 생활을 분리」시키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군사분계선」이 「군사분계선」으로 그치면 그로 인해 분단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 군사분계선이 「통치분계선」으로 전환되면서부터 분단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서부지역과 오스트리아 서부지역에 進駐(진주)한 미국·영국·프랑스 3개국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그 지역의 국토와 주민의 분단을 초래하지 않았었다는 사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자주 이루어진 多國籍(다국적) 유엔평화유지군이 파견된 지역에서 각국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그 지역의 분단을 초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잘 확인된다.

한반도에 먼저 進駐한 소련군은 북한 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한 간의 교통·통신을 단절시켰다. 뒤늦게 한반도에 進駐한 미군은 소련군의 이러한 조치에 항의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38선을 경계로 단절된 남북한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기 위한 협상을 소련에 제의했으나 소련은 그를 일절 외면했다.

미국이 획정한 「군사분계선」을 소련이 주민들의 교통·통신을 단절하는 「통치분계선」으로 전환함으로써 한반도 및 우리 민족의 분단은 시작됐던 것이다.


5·10 총선거 2년3개월 전에 북한 단독정권 수립

군사분계선을 통치분계선으로 전환시킨 소련군은 그들의 앞잡이 金日成을 내세워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공산정권을 조직하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북한 지역의 단독정권이라는 사실은 당시 평양의 주요 건물들에 게양되었던 현수막에 적혀 있던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다」라는 구호가 잘 입증해 주고 있다.

金日成은 1946년 2월2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중앙정권기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해 임시인민위원회가 북한지역의 정부임을 확인했다. 또한 북한의 역사학자 김한길은 1983년 평양에서 출판된 「현대조선력사」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인민민주주의독재정권」이라고 규정, 그것이 북한의 단독정권임을 확인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북한 지역의 단독정부라는 사실은 그 기관의 행동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된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출범과 거의 동시에 토지개혁·산업국유화·경제계획수립·교육개혁·주민사상 개조운동 등의 사업을 실천했다. 그러한 사업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오로지 정부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소련군과 북한공산세력은 黑白(흑백)투표함 선거방식의 공산주의적 선거방식에 의해 1946년 11월에는 道·市·郡 인민위원회 代議員선거, 1947년 2월에는 里·面 인민위원회 대의원 선거를 각각 실시했다.

이를 기초로 하여 1947년 2월에는 민주국가의 국회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그 인민회의에서 행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북한 지역에서는 남한 지역에서 정부수립을 위한 5·10선거가 실시되기 1년여 전에 단독정부 구성이 완료된 것이다.

요컨대, 대한민국은 민족분단을 목적으로 건국된 것이 아니라, 소련과 북한공산세력에 의해 민족분단이 돌이킬 수 없도록 조성된 조건에서 남한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건국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 건국으로 인해 한반도가 분단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분단을 시작했고 또 돌이킬 수 없게 만든 소련과 북한공산세력의 反민족적 범죄를 두둔하고, 그러한 소련과 북한공산세력의 조치로 인해 피할 수 없게 된 분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대한민국 건국세력을 비판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한반도가 공산화 통일 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다음으로,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이 親日派인지 여부를 살펴보자.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두 개의 軸(축)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李承晩과 獨立促成國民會(독립촉성국민회)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이다. 한민당도 李承晩을 추종하는 집단이었지만, 李承晩으로부터 상당한 독립성을 가진 집단이었다.


右翼의 연합체 한국민주당

李承晩이 친일파였던가? 李承晩이 抗日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들 중의 1인이며,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反日노선을 강력하게 유지해 온 지도자라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일이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친일파들의 집단이었던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지도부는 李始榮(이시영)·吳世昌(오세창)·明濟世(명제세)·申翼熙(신익희)·李靑天(이청천)·李允榮(이윤영)·배은희 등 저명한 민족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설혹 독립촉성국민회의 하부조직에 親日경력을 가진 인사들이 참여했다 하더라도 누구도 그 단체를 親日派 단체로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 가운데 親日派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집단은 한국민주당뿐이다. 한민당이 親日派 세력인지 여부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민당의 창당과정부터 살펴봐야 한다.

한민당은 左翼세력이 8·15 해방과 동시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政界의 기선을 장악하면서 공세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데 대해 위기의식을 가진 國內 右翼 민족지사들에 의해 창당되었다. 國內 민족지사들은 처음에는 두 갈래로 右翼정당 창당 작업을 전개했다.

하나는 金炳魯(김병로)·李仁(이인)·趙炳玉(조병옥)·白寬洙(백관수)·元世勳(원세훈) 등이 주도한 조선민족당이었다. 조선민족당을 주도한 인사들은 대체로 지속적으로 國內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해 왔고,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보다 관용적이고 親日派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한 입장을 취하는 인사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張德秀(장덕수)·許政(허정)·金度演(김도연)·白南薰(백남훈)·尹致暎(윤치영)·尹潽善(윤보선) 등이 주도한 한국국민당이다. 한국국민당을 주도한 인사들은 대체로 歐美(구미)에서 유학 혹은 민족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지식인 및 그들과 친분이 깊은 인사들로서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덜 관용적이고 親日派에 대해서는 보다 관용적인 경향을 나타냈다.

조선민족당과 한국국민당은 처음부터 右翼진영의 통합정당을 지향했기 때문에 창당 작업의 개시와 거의 동시에 양측 간의 통합작업을 전개했다. 그 결과 한국민주당이라는 右翼진영 통합정당의 창당을 발기하게 되었다.


한국민주당 지도부는 民族志士들

한국민주당의 창당발기대회가 개최된 후 정당 창당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還國(환국)환영국민대회」 개최를 준비해 오던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측이 한국민주당에 합류했다.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주도한 인사들은 宋鎭禹(송진우)·金性洙(김성수)·金俊淵(김준연)·徐相日(서상일)·金東元(김동원) 등으로서 거의 모두가 東亞日報와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와 親日派에 대해 다같이 관용적인 경향을 나타냈다. 결국, 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국민대회준비위원회 등이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게 된 것이다.

右翼진영의 통합정당인 한민당 지도부에는 日帝치하에서 민족을 위한 운동을 전개한 民族志士들이 많았다.

민족을 위한 운동, 즉 민족주의 운동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민족운동, 민족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 등이다. 「민족운동」은 민족 전체나 민족 구성원들에게 도움을 주는 모든 집단적 활동을 말한다. 「민족독립운동」은 異민족의 지배로부터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운동이다. 「민족해방운동」은 異민족의 지배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달성한 데 더하여 민족국가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운동이다. 한민당의 지도자들은 민족독립운동이나 민족해방운동은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않았지만 민족운동은 전개한 사람들이다.

한민당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사들, 즉 國內에서 「一面妥協 一面抵抗(일면타협 일면저항)」의 온건한, 그리고 신변위협이 크지 않은 민족운동을 전개한 인사들은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고생하며 抗日독립투쟁을 전개했던 인사들에게는 親日派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日帝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들이나, 日帝에 복종만 해온 國內의 대중들과 비교할 때는 民族志士들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한민당 지도부에는 분명하게 親日派로 규정될 만한 인사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은 한민당을 창당할 때 「親日派를 배제하되 다소 융통성을 둔다」는 人選(인선)원칙을 준수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볼 때, 한민당은 親日派나 親日경력자들이 주도하여 창당한 정당이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인사들이 주도하여 창당된 정당임이 분명하다.

강하건 약하건 간에 親日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인사들이 한민당에 상당수 참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설사 그들을 모두 親日派로 규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한민당 창당을 주도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한민당 지도부의 多數를 구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당하게 말한다면 누구도 한민당을 親日派 정당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5·10 總選時 親日派의 선거권·被선거권 박탈

한편,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활동 경력자들을 모두 親日派로 규정해야 할 것인가도 진지하게 따져 봐야 할 사항이다.

광복 직후 親日派 숙청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左翼진영의 통일전선기구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戰)은 親日派를 「일본제국주의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者들」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民戰의 親日派 정의를 기준으로 할 때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활동 경력자들의 대부분은 親日派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사들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떤 목적을 위해 「親日을 해야겠다」는 적극적 의식을 가지고 親日활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日帝의 강요 때문이거나, 日帝 말기 사회단체나 기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日帝가 조직한 단체의 임원 명단에 포함되거나 親日的 연설을 하고 글을 썼던 인사들이다.

左翼진영 지도자의 한 사람인 呂運亨(여운형)이 日帝 말기 상당한 親日활동을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親日派로 규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경력자들의 대부분도 親日派로 규정하기에 무리가 있는 인사들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건국 주도세력은 親日派를 배제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건국을 위한 5·10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선거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親日附逆者(친일부역자)들의 被선거권은 물론 선거권까지 박탈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5·10 선거법 제2조는 ① 일본 정부로부터 爵位(작위)를 받은 者, ②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者 등은 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이 선거법 제3조는 ① 일제시대 判任官(판임관) 이상의 경찰관 및 憲兵補(헌병보) 또는 고등경찰의 職에 있었던 者 및 그 密偵(밀정)행위를 한 자, ② 日帝시대 中樞院(중추원)의 부의장·顧問(고문) 또는 參議(참의)가 되었던 자, ③ 日帝시대에 府 또는 道의 자문 혹은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 ④ 日帝시대에 고등관으로서 3등급 이상의 지위에 있던 者 또는 勳 7등 이상을 받은 者(단, 기술관 및 교육자는 제외함) 등은 被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대한민국이 親日派들에 의해 건국된 국가라면 건국 주도세력이 스스로의 발을 묶는 이러한 親日派 배제 노력을 전개할 리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이 이처럼 親日派 배제원칙을 준수하면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이나 국회 간부에는 親日派로 규정될 수 있는 인사가 단 한 명도 참여하지 못했다. 6·25 전쟁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 親日派로 분류될 만한 인사들이 기용되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는 親日派는 정부에 참여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지도부가 아닌 실무 관료조직, 특히 경찰에 親日派에 속하는 인사들이 상당수 참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기능인」들로서 지도부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바람직한 점만을 생각한다면 그런 기능인 수준에서도 親日派를 가능한 한 제거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光復 직후 남한의 혼란상과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려는 左翼에 대항하여 동원할 수 있는 人的자원의 한계 등을 고려한다면, 기능적 수준에서의 親日경력자들의 채용은 양해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건국 주도세력이 미국의 使嗾(사주)를 받아서 대한민국 건국운동을 전개했는지 여부를 살펴보자.

우선 대한민국 건국의 중심인물인 李承晩은 미국의 앞잡이는커녕 남한에서 미국이 가장 싫어하는 정치지도자였다.


귀국時부터 미국에게 냉대받은 李承晩

李承晩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美국무부로부터 냉대를 받아 왔다. 그 주된 이유는 당시 美국무부에 親蘇·親共的 좌익분자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美국무부에 좌익분자들이 많이 진출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까닭이 있었다. 첫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 左翼세력의 지지를 받았었고, 이 때문에 루스벨트 행정부는 左翼분자들의 公職 진출에 관대했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 後期 미국과 소련은 獨·伊·日과 싸우면서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미국의 對外정책 담당 부서인 국무부에는 자연스럽게 親蘇·親共的 左翼인사들이 많이 침투하게 되었다(1950년대 初 미국에서 일어난 매카시 선풍은 美정부기관에 左翼분자들이 침투한 현상에 대한 미국 사회의 반발이었다).

이들 親蘇·親共的인 美정부 인사들은 민족자주의식이 강하고 확고하게 反共·反蘇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李承晩에게 非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美국무성의 한국문제 담당관인 조지 매쿤(George McCune)은 在美 韓人독립운동세력 內에서 李承晩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島山(도산) 安昌浩(안창호)의 친구였던 탓에 李承晩을 멀리했다.

美국무부의 이런 분위기로 인해 李承晩은 日帝로부터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하는 일에서부터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美국무부는 李承晩의 조속한 귀국을 은근히 방해했다. 李承晩은 美국방부에 있는 우호적 인사들과 東京에 있던 태평양 지역 美軍사령관 맥아더의 도움을 얻어 귀국했다.

李承晩이 귀국時 美軍機를 타고 귀국하게 된 것도 맥아더의 개인적 배려에 의한 것이지 미국 정부의 지원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李承晩이 워싱턴을 떠날 때는 미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환송도 받지 못했다.

李承晩이 미국의 앞잡이라면 미국 정부가 李承晩의 귀국여행에 대해 지원하지 않는다거나, 귀국하는 李承晩을 이처럼 철저하게 냉대했을 리가 없다. 李承晩의 귀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냉대는 金日成이 귀국하고 권력의 전면에 나서는 과정에서 소련이 그에게 베푼 온갖 배려, 그리고 金九 귀국時 중국 정부의 따뜻한 환송 등과 비교할 때 매우 대조적이다.

미국 정부(주로 국무부)는 李承晩이 귀국하여 남한 政界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자 李承晩을 남한 정계에서 退出(퇴출)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이러한 미국 정부의 태도는 美국무부가 駐韓 美軍政 당국에 보낸 電文(전문)들에 잘 나타나 있다.

美국무부는 1946년 2월末 보낸 電文에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그들의 망명경력과 그들이 국민당 정부에 의해 지원받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수년간에 걸친 李承晩과 국무부 간의 불만족스런 거래 경험 때문에 우리는 金九와 李承晩의 집단들에 대해 어떤 好意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진보적 지도자들의 집단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면 金九 집단이 그러한 강령을 채택하여 실천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강력한 노력을 전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電文의 내용은 미국 정부가 金九보다도 李承晩을 더욱 적대시했음을 시사해 준다.


美, 單政 결정 후에도 李承晩 배제 노력

美국무부의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 힐드링(John Hildring)은 1946년 6월 남한 政界에서 李承晩의 退出을 촉구하는 각서를 駐韓미군사령관 하지에게 보냈다. 그 電文은 다음과 같다.

<만일 조선의 최근 논쟁에서 폭풍의 중심이 되어 왔던 어떤 인물들이 정치무대로부터 일시적으로 물러난다면 美蘇당국 간의 합의뿐만 아니라 남한의 여러 정파간의 합의도 크게 용이해질 것이다. …그들은…한국에서의 미국의 정책목적 달성에 필수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정치무대에서의 그들의 존재는 소련과의 합의에 도달하는 데 어려움을 크게 증대시킬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한국에 있어서 미국의 정책목적 달성은 조선정치에 대한 그들의 참여에 의해 도움받기보다는 전반적으로 방해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미국 정부는 심지어 李承晩이 주장해 온 바대로 남한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정책을 변경한 후에도 李承晩이 남한 정부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美軍政은 美蘇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된 후인 1947년 10월 李承晩이 주장해 온 바대로 남한 지역에 독자적 정부를 수립하기로 방침을 정해 놓고도 李承晩을 강력하게 제압하기 위해 하지 장군보다 더욱 단호한 인물로 주한미군사령관을 교체할 것을 고려했다.

미국 정부는 또한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 선거 전후에도 李承晩을 제치고 徐載弼(서재필)이나 金奎植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공작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나타난 미국 정부의 李承晩에 대한 적대와 견제는 소련이 자기들의 앞잡이 金日成을 시종일관 북한의 지도자로 내세워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美, 이승만 배제 위해 左右 합작 추진

李承晩은 미국의 앞잡이가 아닐 뿐만 아니라, 남한 지역에서의 정부수립 문제를 놓고 미국과 장기간 대립해 왔다.

미국은 모스크바 三相협정에 입각하여 소련과 합의해서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하는 한반도 임시통일정부를 구성해놓고 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李承晩과 金九는 모스크바 三相협정에 따라 한반도가 외세의 신탁통치를 받는 것은 민족적 수치이므로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남한 지역에서 美軍政이 아닌 민족의 자율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소련은 1946년 2월부터 美蘇공동위원회에서 모스크바 협정에 따른 한반도 임시통일정부의 구성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한 右翼진영 정당과 단체를 전면 배제하려는 술책(공산당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한반도 임시통일정부가 아니면 그 임시통일정부의 구성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술책)을 취했다.

李承晩은 모스크바 三相협정에 따라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하는 한반도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미국의 계획은 실현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했다.

李承晩은 또 미국이 그런 실현 불가능한 계획에 연연하다 보면 소련과의 흥정을 통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대가로 한반도에서 소련의 주장에 양보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남한주민들은 궁극적으로 공산당의 통치를 받게 되는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에 따라 李承晩은 남한 지역의 국민만이라도 공산당의 지배를 면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남한 정부를 강화시켜 민족통일에 대비하기 위해 남한지역에서 민족의 自主의지에 의한 민주공화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미국은 이러한 노선을 추구하는 李承晩과, 당시 李承晩에게 협조적이었던 金九가 모스크바 협정에 따른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李承晩과 金九를 남한 정계에서 退出시키고, 미국에게 좀더 순종적인 金奎植을 중심으로 한 中道派 정치세력을 새로이 형성, 이들로 하여금 남북한 두 지역의 공산주의 세력과 합작하도록 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러한 미국의 계획에 따라 실천된 것이 金奎植과 呂運亨을 두 軸으로 한 左右합작운동이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설치였다. 심지어 미국은 모스크바 협정에 따른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자기들의 구상을 기필코 실천하기 위해 한민당을 李承晩-金九 진영에서 분리, 金奎植과 합작시키려는 공작까지 전개했다.


美軍 철수 위한 방편으로 대한민국 건국 지지

李承晩이 1946년 6월 「井邑(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에 독자적으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고 나서자, 美軍政은 李承晩을 강력히 비난했다. 美軍政 장관 러치는 1946년 6월10일 『만일 李박사가 남조선에 따로 정부를 세워야 된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 군정청을 위해서 한 말은 아니다.…나는 軍政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그의 知人에게 보낸 편지에서 井邑 발언을 한 李承晩을 「늙은 악당(Old Rascal)」으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李承晩이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미국 內 지지여론 조성을 위해 1946년 12월 미국으로 떠날 때 美軍政은 李承晩의 出國을 방해했다. 李承晩이 訪美 활동을 마치고 1947년 4월 귀국한 후 美軍政은 李承晩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그를 가택연금했다. 美軍政은 李承晩에게 배송되는 모든 우편물을 검열했으며, 그에게 제공되는 정치자금을 봉쇄하려 했다.

미국 정부가 李承晩이 주장해 온 남한 지역에서의 대한민국 건국 필요성을 인정한 것은 1947년 10월 美蘇공동위원회가 완전 결렬된 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때도 李承晩과 미국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李承晩은 남한 지역의 공산화를 방지하고, 남한에 수립되는 민주정부를 토대로 북한 지역을 통일하기 위해 대한민국 건국을 추구했다. 반면에 미국 정부는 미국의 위신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駐韓美軍을 철수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남한 지역의 대한민국 건국 필요성을 인정했을 뿐이다.

당시 미국은 남한 지역이 美軍을 주둔시켜야 할 戰略的(전략적) 가치가 없는 지역이며, 美軍이 철수하면 조만간 공산화될 지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필자는 오늘날도 미국이 대한민국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나 않는지 걱정스럽다). 미국은 駐韓美軍을 질서 있고 품위 있게 철수하고, 미국이 점령통치했던 지역을 곧장 공산화 되도록 放棄(방기)했다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한 「시간 벌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그 방편으로 대한민국 건국을 지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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