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씨가 요사이 하고 있는 김정일 옹호, 미국 비방, 6.25 전쟁에 대한 좌익적 시각의 토로를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이 비로소 자신의 이념적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온다. 그는 한때 보수政客으로 자처했으나 요사이 발언은 전형적인 좌익의 논리이다. 1945년 직후 그가 좌익정당의 투사였다는 사실, 북한정권이 끊임없이 그를 공작대상으로 삼았던 점, 일본에서 북한정권의 하수인들과 손잡고 反국가단체 한민통을 만들었던 사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뒤 벌인 친북좌경적 정책들을 종합하면 그는 사상적 전향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추정에 이른다. 필자가 썼던 '김대중의 정체'에 나오는 일부를 소개한다.
<<다시 1차 피의자 신문(1980년 5월29일자)으로 돌아간다.
문: 피의자의 정당 사회단체 가입 관계를 말하시오.
답: 저는 8·15 해방 직후부터 정당 및 사회단체에 가입 활동하고 있는 바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 선전부원, 1945년 8월 목포청년동맹 평맹원, 1945년 10월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 1946년 6월 민주청년동맹 목포지부 가입, 1947년 7월 한국민주당 입당 목포시 지부 운영위원, 1949년 2월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 운영위원, 1950년 3월 대한청년단 입단 목포 해상단 부단장, 1957년 8월 민주당 중앙당 입당, 중앙상무위원 노농부 차장, 1959년 7월 민주당 강원도당 부위원장, 1960년 10월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 1963년 7월 민주당 대변인, 1965년 6월 민중당 대변인, 1966년 8월 민중당 정책심의위 의장, 1967년 2월 신민당 운영위원 겸 대변인,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1973년 7월 在美 韓民統 의장(명예), 1973년 8월 在日 韓民統 의장, 1974년 12월 민주회복 국민회의 고문, 1979년 3월 국민연합 공동의장으로 취임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한 동기와 同 단체에서 활동한 사실을 말하시오.
답: 당시 저는 전남 기선회사의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1945년 8월19일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 지부가 목사 李南奎에 의해 설립되었고, 8·15 해방 전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바 있던 저의 이웃집(목포시 복만동 9번지) 거주 林永春(당시 35세 가량)이 建準의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저에게 가입을 권유하여 해방된 나라를 위해 일해 보겠다는 마음에서 가입하였으며, 林永春의 지시에 따라 중앙에서 시달되는 홍보용 삐라 등 유인물 撤布와 치안활동에 종사하던 중 1945년 9월 하순경 좌익계 인물 등에 의해 建準이 인민위원회로 개칭되었고, 1945년 9월 말 경 미군이 進駐하자 인민위원회는 자동 해체되었습니다.
문: 피의자의 신민당 입당 경위와 활동 사항을 말하시오.
답: 1945년 10월 목포시 보광동에 白南雲이 창당한 신민당의 목포시당을 친일파 徐基華의 장인인 李彩鉉이 결성하고 같이 일할 것을 권유,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서 同黨 상임 위원급으로 있던 徐得均(6·25시 서울에서 총살 처형), 權五哲(9·28시 월북), 權庠植(경찰특채사찰계 근무), 金鎭剛(6·25시 行不) 등과 같이 1946년 10월1일 폭동사건시까지 각종 회합에 참석, 교양 및 선전 유인물 살포 등 조직확대 사업에 종사하였습니다.
문: 피의자는 민주청년동맹(民靑)에 가입활동한 사실이 있습니까.
답: 1946년 6월경 民靑 목포시지부에 가입한 사실은 있으나 당시 저는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직에 있었기 때문에 民靑에서는 별로 활동한 사실이 없습니다.
문: 민주청년동맹은 어떤 성격의 단체이었던가요.
답: 民靑은 당시 좌익 정당이던 공산당과 인민당·신민당의 행동대원들이 모인 단체로 10·1 폭동 사건을 주도하는 등 좌익계 극렬 단체입니다.
문: 1950년 9월7일 당시 목포시 서산동 4번지 거주 張금성의 조선 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당 위원장 앞 당원등록청원서 기록에 의하면 피의자가 民靑 목포시 지부 부위원장으로 民靑사업 취지 및 국내외 정세 등을 敎養한 사실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답: 민청의 부위원장 등 간부직에 종사한 사실은 없으나 당시 저는 신민당의 조직부장으로 국내외 정세 등 많은 교양을 한 바 있으므로, 民靑의 모임에서도 교양을 한 일이 있는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장금성이란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인물입니다.
장금성의 조선 노동당 당원 등록 청원서에 등장한 金大中
다시 자료를 보충한다. 위에서 등장하는 장금성이란 인물이 남긴 글이 있다. 육군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金大中씨를 기소하면서 법원에 제출한 증거자료에는 장금성이란 사람의 조선노동당 당원 등록 청원서 사본이 있었던 것이다.
장금성은 民靑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가 조선공산당이 신민당(당수 白南雲), 인민당(당수 呂運亨)의 일부 세력과 합당, 남조선 노동당(당수 朴憲永)을 만들 때 따라갔던 사람이다. 그는 지하 활동을 하다가 6·25 직전에 전향한 좌익들을 敎導하기 위해 조직된 保導연맹에 가입했었다.
그는 6·25 남침으로 인민군이 목포에 진주하자 1950년 9월7일에 다시 조선 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당 위원장 앞으로 당원 등록 청원서를 낸 것이다.
우리 경찰이 이 서류를 압수,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문서에 金大中씨의 이름이 등장한다. 청원서의 요지를 소개한다.
<성명: 장금성, 지하당 시절 별명: 장세철
생년월일: 1925년 7월1일(26세)
입당년월일: 서기 1946년 10월15일
입당당시 직책: 조선공산당 목포시 북지구 제22야 세포 당원
현재: 전라남도 목포시 제22동 노동당 부책임자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그달 19일 목포시 건국준비위원회 청년대에 입대, 9월20일경에 목포시 창평정 적색 로동조합 보안대 남부에 가입하여 치안확보에 노력하였으며, 1946년 6월16일에 민주주의 청년동맹 목포시 위원회 간부 김진강, 서득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民靑 사업의 취지 설명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고 民靑에 가입하여 1946년 20일에 민청 제22동 분회를 목포시 서산동 김판섭 동무 집에서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고 맹원 획득에 주력하였음. 매주 3회씩 목포시 금화동 윤양신 동무 집에 강습 장소를 정하고 민청 목포시 위원회 위원장 송제경, 부위원장 김창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교양을 받았으며 분회장 김판섭 동무의 지시에 의하여 1946년 9월23일 총파업 직전에 모든 선전투쟁에 참가하였음.
1946년 10월15일 목포시 서산동 김판섭 동무에게서 입당선언을 받았으며 추천동무도 정철, 김판섭 동무이었음. 입당 직후부터 세포위원장 정철 동무의 지시에 의하여 1946년 10월31일 인민항쟁 준비투쟁으로 민청 제22동 분회장으로 임명받으면서 10월31일 오전 7시 정각에 집합장소 목포시 금화동 조선회사 앞으로 나갔으나 아무도 집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위행진에 실패하였으며 당일 시내 각처에서 악질 경관 살해, 경찰파출소 습격 시위 등으로 목포시 전체가 혼란소동하여 경찰은 물론 우익청년단체 총동원 등 일제 검속 비상경비가 실시되어 조직이 분산되고 사업을 중지하고 있었음. 11월 말일경부터 민청 조직을 수습하여 분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세포원으로서 당 지시에 의하여 집회, 당비납부, 삐라, 전단, 벽보 등 투쟁에 참가하였으며, 1946년 12월에 남로당으로 발족하였음.
1947년 10월15일까지 투쟁하다가 악질 경관 모종남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948년 2월19일에는 대한청년단 악질간부들과 사찰계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살인적 고문을 당하였음. 벌금을 물고 석방된 이후 1948년 10월에는 미군철퇴 진정서에 날인하고 소련군 철퇴 감사선물을 만드는 사업에 참여하였음.
서기 1949년 1월 목포시 대한청년단 남지단부에 신변보장을 하기 위하여 가입하였으나 身病으로 진단서 첨부하여 휴가원을 제출하고 출근치 않았음. (중략) 1950년 4월 중순에 보도연맹 목포시 간부인 김진강 동무의 권고로 가입하지 않으면 체포될 수가 있다 하기에 부득이 가입하였음. 1950년 6월26일 보련(보도연맹) 총소집으로 구금당하였다가 6월27일 오후 1시경에 석방되었으며, 1950년 7월4일 보련 소집으로 왔으나 신병으로 그대로 돌아왔다가 1950년 7월12일 해군 방첩대에 체포되어 목포 경찰서로 인치, 유치당했다가 7월23일 오후 2시경 무조건 풀려났음. 1950년 8월7일부터 1950년 8월23일까지 목포시 제22동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가 8월24일 신병으로 목포시 죽교리에 가서 치료하고 있었음. 이상과 같이 틀림없사옵기에 당원 등록을 청원합니다.
서기 1950년 9월7일
전라남도 목포시 서산동 4번지
청원인 장금성
조선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 당위원장 동지 앞
대필 김판섭>
金大中 반론: 민청에서 교양은 했으나 목포시 부위원장은 아니었다
장금성의 자술서 내용과 金大中의 자술서 내용을 비교해 보면 평행선을 달리는 부분이 발견된다. 이 시대 같은 무대(목포시), 같은 좌익 단체에서 활동했던 두 청년의 궤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金大中씨는 합수부에서 軍 검찰로 송치된 후인 1980년 7월17일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도 『장금성은 모르는 사람이며, 民靑 목포시지부 부위원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적이 전혀 없다. 본인이 부위원장이었다고 그 서류만으로 인정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軍 검찰은 그러나 장금성의 자필 기록을 받아들여 金大中씨에 대한 공소장에서 「신민당(후에 공산당, 인민당과 합쳐 남로당이 됨―편집자 注) 목포시 위원장이며 그 후에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된 이채현의 권유로 위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열의 행동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이라고 적었다.
장금성의 자술서에 따르면 좌익 통일전선 조직인 民靑에는 金大中씨 같은 신민당원이나 장금성 같은 조선 공산당원(뒤에 남로당원)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동일한 노선의 행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금성의 글에는 民靑 목포시 위원회 부위원장이던 金大中씨가 신민당 간부로서 조선 공산당원이던 장금성을 설득하여 民靑에 가입시키고 맹원들을 교육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金大中씨는 자신이 「민청의 모임에서 교양을 한 사실」은 인정했으나, 民靑 목포시 부위원장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찰서 습격 사건에 연루
1차 피의자 신문 조서(1980년 5월29일)로 돌아간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10·1 폭동사건은 어떤 사건인가요.
답: 10·1 사건은 1946년 10월1일 신민당 공산당 및 民靑 등 좌익 정당 단체와 신민당의 좌익계가 합세하여 목포경찰서 남교동 파출소 등 경찰관서를 습격한 좌익계 폭동사건입니다.
문: 피의자는 10·1 사건시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가요.
답: 당시 저는 8·15 해방 전부터 근무하던 전남기선(주)에 적은 두고 있었으나 별로 일거리가 없어 목포시 상낙동 소재 장인 車寶輪의 인쇄소 일을 돌보아 주고 있던 중이었는데 1946년 9월20일경 해산차 목포시 서산동 소재 親家에 가 있던 亡妻 車蓉秀의 분만이 임박하였다 하여 9월30일 밤 처가에 가서 10월1일 새벽 처가 분만하는 것을 보았으며 10·1 사건은 그날 오후에서야 알았습니다.
문: 피의자는 權庠植이란 사람을 알고 있는가요.
답: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제가 신민당 조직부장으로 있을 때 제 밑에서 조직부장으로 일을 보다가 10·1 폭동사건에 가담 피신하였다가 검거되어 조사를 받은 일이 있고 그 후 전향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 목포경찰서 형사로 특채되어 6·25 사변 이후까지도 경찰관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위 權庠植과 張금성의 진술 기억에 의하면 10·1 사건시 신민당 조직부장과 민청의 부위원장으로서 10·1 사건에 가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이 아닌지요.
답: 제가 民靑의 부위원장이나 간부직에 있었다면 사건에 당연히 가담하였겠고, 또한 가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당시 民靑에 가입은 하였었으나 평맹원이었을 뿐 간부직에 종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동에 가담한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의 호적부상 1946년 10월1일 출산자는 출생사실이 등재된 바 없는데 어떻게 된것인가요.
답: 당시 출산자는 여자로 이름은 素姬였었는데 2歲時 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죽었는데 출산 직후 호적신고를 못하고 있다가 사망으로 그냥 지나버린 것 같습니다.
문: 그러면 피의자는 10·1 사건 관련혐의로 조사를 받은 사실이 없는가요.
답: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1946년 10월1일 오후 妻家에서 처의 출산을 보고 나오는데 평소 본인과 감정이 극히 나빴던 우익단체인 독립촉성회 목포시지부 청년대장 洪益先 등이 본인을 촉성회 사무실 창고로 끌고가 구타하며 10·1 사건 가담 여부를 추궁하였으나 가담 사실을 계속 부인하자 목포 경찰서 사찰계로 인계, 同署에서 10여 일간 조사를 받고 당시 한국민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으로 있던 장인 車寶輪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계 단체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훈방된 사실이 있습니다.
좌익 전향자 先導 단체 보도연맹 운영위원
문: 피의자의 한국민주당 입당 경위와 활동사건을 말하시오.
답: 10·1 사건 후 경찰서에서 좌익단체에 관여치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훈방되자 장인 車寶輪과 당시 同黨 부위원장이던 金炫庠이 입당을 권유하여 입당, 상임위원직에 있었으나 별로 활동한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는 보도연맹이란 단체를 알고 있으며 同 단체에 가입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보도연맹이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사실이 있는 자들을 가입시켜 선도하던 단체로 경찰서장 등 기관장들이 지도위원이며 위원장만은 우익계 인사이나 기타 맹원들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자들이었던 바, 본인도 좌익단체에 관여했던 사실이 있어 同 연맹의 운영위원으로서 수차에 걸쳐 찬조금을 낸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목포시 보도연맹에는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였던가요.
답: 지금 기억되는 인물로는 초대 위원장 吳栽均, 2대 위원장 趙壽男, 부위원장 薛俊錫(남로당 목포시당 부위원장) 총무부장 金南喆(남로당원) 등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2대 위원장 趙壽男의 진술기록에 의하면 피의자가 보도연맹의 총무부 차장직에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본인은 同 연맹의 운영위원직에 있었던 사실은 있으나 총무부 차장직은 맡은 일이 없습니다. 당시 저는 해운회사를 自營하고 있을 때였는데 목포경찰서 사찰과 보도연맹 담당인 林春吉 경사가 저의 사무실에 수시 출입하며 형님, 동생하고 지내는 사이여서 보도연맹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저도 좌익단체에 관여하였던 사실이 있기에 해당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업과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는데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면 지장이 있으니 빼달라고 하였더니 『자네는 돈이 많으니 찬조금을 내는 운영위원이나 하라』고 하여 운영위원이 되었을 뿐입니다.
保導聯盟 약 30만 명
보도연맹을 구상한 것은 당시 사상검사란 말을 들으면서 좌익 수사에 중심이 되어 있던 吳制道, 鮮于宗源 서울 지검 검사였다고 한다.
鮮于宗源 변호사는 『좌익을 수사해 보면 이러다가는 官製 빨갱이들을 많이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종로서에서 풀어 준 좌익을 성동서에서는 건수를 올리기 위하여 또 잡아넣는 식으로 무리한 수사가 많았다.
그래서 좌익 사건에서 검사로부터 불기소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사람들을 주로 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도록 하고 이들을 감시도 하고 선도도 하기로 한 것이다. 1949년 초부터 조직에 시작했는데 그해 가을 출범할 때 전국적으로 20만 명, 나중에는 약 30만 명까지 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보도연맹의 조직은 6·25 남침 때문에 비극적인 사건으로 가버린다.
개성, 서울이 敵 치하에 들어가자 전향했다던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표변하여 군인과 경찰관 가족들을 찾아내 학살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후퇴하는 국군·경찰에게 전해지면서 전국의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여 예방적으로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던 것이다. 수많은 보도연맹 사람들이 국가 생존의 몸부림 과정에서 치여 죽어갔다.
남로당으로 따라가지 않았다
문: 피의자가 관여한 신민당은 10·1사건 후 어떻게 되었던가요.
답: 신민당은 당초 左·右翼 합작 명분으로 창당되었으나 시일이 감에 따라 좌익계가 득세하여 주도권을 잡고 10·1 폭동 사건에도 가담하였는데 당시 군정 포고령에 의해 좌익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공산당의 金영재, 인민당의 薛俊錫, 신민당의 李彩鉉 등이 주동이 되어 남로당 목포시당을 결성, 1946년 11월경부터 지하활동에 들어 갔습니다.
문: 피의자가 남로당에 관여한 사실은 없는가요.
답: 본인은 당초 신민당이 左·右翼 합작을 위한 정당이라고 하여 입당, 조직부장으로 일하였으나 좌익계가 득세하여 좌익 정당이 되었고 저 또한 좌익시되어 10·1 사건 가담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 후 각서까지 쓰고 나온 터였기 때문에 완전한 지하 불법단체인 남로당에는 가입하지 않고, 해운사업계획 등 사업 착수 준비에 전념하였습니다.
문: 피의자는 좌익계 인물 지원 혐의로 수사 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답: 1949년 2월경 저의 국민학교 친구였던 兪在植의 형 兪 名 미상이 제가 자영하던 동양해운 사무실에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도와 달라고 하여 차비를 준 일이 있는데 약 20일 후 위의 兪 名 미상이 전남 경찰국 사찰과에 남로당 활동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본인이 여비를 준 사실이 밝혀져 본인도 남로당 관련 및 자금 제공 혐의로 전남 도경 사찰과 형사에게 체포되어 10여 일간 조사를 받았으나 친구의 형에 대한 단순한 여비 보조라는 사실이 밝혀져 당시 해군목포헌병대장 朴成哲 소위(現 본인의 비서실 차장) 등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된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피의자가 兪 名 미상에게 준 여비는 얼마 정도나 되었던가요.
답: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확실한 기억은 없으나 서울까지의 기차요금과 食代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 피의자가 처음으로 착수한 사업은 어떤 것이었는가요.
답: 본인은 8·15 해방 전부터 선박회사에 근무하였기 때문에 그 방면에 지식을 갖게 되어 해운업에 뜻을 두고 있다가 1947년 2월경 50t급 선박 1척을 구입하여 목포해운공사라는 社名으로 연안해운업을 시작, 1948년 말경에는 상호를 동양해운으로 고치고 사업을 계속하였는데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6·25 사변 당시에는 70t급 2척 50t급 1척 등 3척의 선박을보유하게 되었고 상당한 돈도 벌었습니다.
문: 피의자의 대한청년단 입단 경위 및 활동사항을 말하시오.
답: 대한청년단 목포시단은 1948년 정부수립 후 창단되었는데 본인은 당시 한민당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1950년 3월경부터 청년단의 조직을 확대하고… (해독 불명 세 줄) 있었고, 많은 청년들이 선박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해남운수의 전무로 있던 閔丙安과 협의, 해상단을 창설키로 하고 대한청년단 목포해상단을 결단 위 閔丙安이 단장, 본인이 부단장이 되어 해상운동청년들을 규합, 조직확대 사업을 하다가 6·25 사변을 만났습니다.… (해독불명 세 줄) 운수회사를 자영하면서 서울 조선상선회사와 목포지방의 정부 양곡 해상운송 하청계약을 체결하고 양곡운송을 하고 있었는데 1950년 6월15일경 미수된 운임 2000여만 환을 받기 위하여 당시 조선상선 목포출장소장이던 韓道源 20세 가량(現 백범기념 사업회 이사)과 같이 상경, 회사 측과 미수 운임을 계산하던 중 6·25 사변이 발발, 귀향하지 못하고 1950년 7월 중순경까지, 상경 후 투숙중이던 신문로 소재 林여관, 처남 車元軾의 처가인 동양장부제본사 사장 裵仁植 家를 전전하며 활동하다가 돈도 떨어지고 목포 가족들의 생활이 궁금하여 위 韓道源과 같이 귀향키로 하고 1950년 7월 중순경 서울을 출발 도보로 온양, 군산, 함평 경유 1950년 8월10일경 목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목포에 도착, 행복동 소재 집에 가보니 亡母 張鹵島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으며 인민군이 수차 잡으러 왔다 갔고 亡妻 車蓉秀는 목포시 죽동 소재 저의 회사 선장 朴東連 家에 피신하여 2남 홍업을 출산하고 숨어 있다고 하여 저도 위 朴東連 家로 피신하여 있다가 1950년 8월12일경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 조사를 받고 제가 6·25 전 민주국민당 상임위원, 해군부대 문관, 대한청년단 해상단 부단장 등으로 활동한 사실이 탄로되어 1950년 8월경까지 內務暑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다가 그 후에는 목포형무소로 옮겨져 9·28 수복으로 탈출할 때까지 형무소 감방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신민당과 金大中과 남로당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金大中 청년이 가입했던 신민당과 그 창설자인 白南雲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한다. 白南雲은 1894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 東京상과 대학을 졸업한 뒤 연희 전문의 교수로 일했다. 그는 1938년 연희전문을 그만두기까지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론의 입장에서 조선역사를 강의하는 한편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썼다.
광복 뒤 그는 강단에서 정계로 나와 좌익 운동에 참여했다. 좌익의 통일전선 조직인 민주주의 민족전선(民戰)의 공동의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1946년, 모스크바 의정서에 의해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된 직후 그는 북한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 金枓奉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왔다. 중국공산당과 가까운 金枓奉이 북한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신민당으로 개편하자 白南雲은 남조선 신민당을 만들고 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8월 金日成의 북조선 공산당과 金枓奉의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 노동당이 되는 것과 맞추어 1946년 11월 남한에서는 소련과 金日成의 지령에 따라 좌익 3당, 즉 呂運亨의 조선인민당, 白南雲의 남조선 신민당,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이 합쳐서 남조선 노동당, 즉 南勞黨을 만들었다.
이 합당 과정에서 白南雲과 呂運亨은 소외된 끝에 남로당에 합류하지 않고 사회노동당을 만들었으나 해체하고 근로인민당을 창당, 呂運亨은 위원장, 白南雲은 부위원장이 되었다. 呂運亨이 암살된 이후 고전하던 白南雲은 1948년 5월 총선 직전 자진 월북하여 거기서 눌러앉았다. 196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뽑혔고 1979년 85세에 죽었다.
6·25 당시의 남로당 地下黨 최고위 간부 朴甲東씨에 따르면 白南雲은 6·25 이전에 이미 金日成으로부터 지령을 받는 관계가 되어 朴憲永의 남로당을 견제했었다고 한다.
남로당이 발족했을 때 朴憲永은 북한에 있었다. 美 군정에서 1946년 9월 그에 대한 체포령이 내리자 월북했던 것이다.
정판사 위조지폐사건 및 10월 폭동으로 남로당 간부들이 수배되면서 남로당 자체는 不法化되지 않았지만(남로당 不法化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조직원들은 지하로 잠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金大中 조직부장의 부하 權庠植 진술
金大中씨가 신민당 목포시당의 핵심인 조직부장이었고 좌익 청년 행동대 民靑에도 가입하여 맹원 교육을 했다는 心證을 갖게 한다. 여기 다른 자료를 하나 더 소개한다.
1회 피의자 신문에서 金大中씨는 자신이 좌익정당인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있던 시절의 同黨 상임위원급으로 權庠植 등과 같이 활동했다고 썼다.
이 權庠植이란 인물은 1971년 2월1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술서를 수사기관 앞으로 작성하여 낸 적이 있었다(軍 검찰은 이 진술서를 金大中씨 기소 자료에 덧붙여 재판부에 냈다). 그해 4월27일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朴正熙 후보의 여권에서 金大中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자료로서 확보해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생긴다.
<진술서. 權庠植 서기 1923.11.5일생. 본인은 해방 후(중략) 좌익계 신민당에서 활동 당시 金大中은 조직부장으로 활동중 1946년 10월 소위 인민항쟁 당시는 각각 동별로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金大中은 무슨 활동을 하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로 전부가 지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다가 본인은 서울로 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목포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어 특채발령을 받고 목포서에서 근무하다가 6·25 동란으로 부산으로 가 있었습니다. 목포가 수복된 뒤 목포로 돌아와 있었는데 金大中의 동생 金大義를 시내에서 만났는데, 「유격대 李文基를 잡소」라고 하기에 물어 보니 「李文基가 우리 형 金大中이를 체포하였다네」라고 했습니다. 그 후 金大中이를 內査한 바 李文基가 확실히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吳世一 인쇄소 2층
그 당시 좌익계 신민당 간부
위원장 李彩鉉
조직부장 및 선전부장 金大中
부원 金相培(현재 이북에 있음), 徐得均(사망), 張在赫(행방불명), 權庠植, 權五哲(이북에 있음).
그 당시 金大中은 새벽으로 공산당 교육을 받고 당 사무소에 와가지고 국제정세 및 국내정세를 말하고 나갔기 때문에 활동상을 잘 모릅니다.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후 신민당이 해산되자 金大中이는 그 후 보니까 全南汽船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그 후로 金大中이가 금전관계 사고가 나자 共黨에서 제명당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金大中의 동창생 金錫哲이 신민당 재정부장으로 있다가 탈당하여 있기 때문에 아마도 金大中 활동상을 잘 알 것입니다.
서기 1971년 2월10일 權庠植>
위의 진술서에 나타난 金大中 조직부장의 부하 다섯 명의 그후 운명이 처절하다. 두 명이 북한으로 갔고, 한 명은 사형, 다른 한 명은 행방불명, 그리고 權庠植 본인은 경찰에 체포되어 아마도 수사에 협조한 代價로 경찰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광복을 맞자마자 남북이 분단되고 남한에선 金日成·소련의 조종을 받는 좌익과 李承晩의 지도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 사이에 이념대결이 벌어졌다. 그 좌익의 선동과 폭력에 우익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피를 피로써 씻는 학살이 벌어지던 시절, 그 한복판에 20代 초반의 金大中 청년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은 신민당이 남로당으로 합병될 때 金大中씨가 남로당원으로 신분을 바꾸지 않았었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고 추궁한 흔적이 있다. 수사관들은 의심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아직 전향을 하지 않은 김대중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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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9-17, 1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