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정권 교체’라는 ‘극약’도 검토해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창립 10주년 기념 학술회의 주제발표문 "남북갈등 해결의 길 - 평화공존, 화해, 그리고 민족통합”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창립 10주년 기념 학술회의
“한반도 갈등, 어떻게 풀 것인가?”
장소: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
일시: 2006년9월29일 오전 9시30분-오후 4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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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1주제: 발제자 李東馥
“남북갈등 해결의 길 - 평화공존, 화해, 그리고 민족통합”

1. 들어가는 말 -- 남북관계와 갈등이론

오늘 이 학술회의의 대주제가 “한반도 갈등 어떻게 풀 것인가?” 그리고 오전 회의 주제가 “남북갈등 해결의 길 - 평화공존, 화해, 그리고 민족통합”이라는 사실은 주최측의 의도가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포함하여 분단한국의 문제를 ‘갈등이론’에 입각하여 접근해 보겠다는데 있음을 시사한다. 주최측의 의도가 과연 그러한 것이라면, 필자는 그 같은 주최측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분명히 밝혀 두고 본론에 들어가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회과학에서 ‘갈등이론’은 근본적으로 ‘좌파’ 이론의 하나라는 것이 필자의 인식이다. 북한과,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북한과 이미 코드를 함께 하기 때문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한국의 ‘좌파’ 세력들은, 이른바 ‘수정주의 사관(史觀)’이라는 이름 아래, 1945년 일본의 항복과 이에 따른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의 결과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상태로부터 해방된 후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을 ‘갈등이론’으로 설명하고 그 틀 속에서 해결방안을 찾는 데 집념을 불태워 왔다. 이념적 ‘좌’ㆍ‘우’의 갈등, 제국주의 세력의 ‘잔재’와 ‘반제’ 세력의 갈등, ‘친일’과 ‘반일’ㆍ‘친미’와 ‘반미’ㆍ‘친소’와 ‘반소’의 갈등, 그리고 ‘지주ㆍ자본가’와 ‘농민ㆍ근로자’ㆍ‘유산’과 ‘무산’ 계급의 갈등, ‘자주’와 ‘외세’의 갈등 등의 시각을 통하여 남북문제와 통일문제를 조명하려 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 문제는 다양한 해결과제를 제시한다. 우선 전쟁방지, 긴장완화, 관계개선 및 평화정착의 과제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분단해소와 통일실현의 과제를 제기한다. 한반도의 분단사는 ‘분단’이 생성되는 과정 중에 ‘갈등이론’에 의거하여 설명될 수 있는 단계나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이미 ‘역사’일 뿐, 이제 ‘분단’의 해소를 생각하는 단계에서는 이미 ‘갈등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차원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이제 한반도의 남북문제는 2개의 ‘주권국가’ 간의 관계이지 더 이상 ‘민족 내부’ 문제가 아니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 해소에 수반되는 모든 문제는 ‘민족내부 문제’ 이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2개의 ‘분단국가’ 사이에 ‘국가관계 이론’에 의거하여 해결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남쪽 사회의 ‘좌파’ 세력은 지금도 ‘갈등이론’에 집착한 남북문제 해결에 집착하고 있다. ‘갈등이론’이 제기하는 명제가 <반제ㆍ민족해방ㆍ인민민주주의 혁명>론이다. “북조선에서는 구 소련의 도움으로 <반제ㆍ민족해방ㆍ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되었으나 ‘일제’를 대신한 ‘미제’의 ‘신 식민지’가 된 남조선에서는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승만 정권과 그 이후의 역대 ‘반공’ 정권들)의 ‘방해’로 인하여 그 같은 혁명의 수행이 좌절되었다”는 것이고 이로써 “북조선은 완전히 해방되었으나 남조선의 해방은 ‘미완성’으로 그쳤기 때문”에 분단한국의 통일은 1단계의 ‘선결과제’로 “남조선에서 <반제ㆍ민족해방ㆍ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완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부터 북한이 주도하는 통일논의에는 ‘통일전선’이라는 대남정책의 전술적 차원에서 2개의 새로운 ‘키 워드’가 등장하여 접목되었다. ‘민족’과 ‘자주’가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짚어 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민족’은 일제 강점 기간은 물론 1945년 이후의 ‘해방공간’에서도, 그리고 북한 정권의 초창기에도, 오히려 ‘우파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용어로 인식되어 북한이 구 소련으로부터 전수 받은 ‘유물론적 계급사관’에 입각한 공산주의 통치이론의 틀 속에서는 ‘부르조아’적 가치로 지목되어 배척되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통하여 ‘민족’을, 그리고 1980년대 초부터 북한판 변종 공산주의의 ‘상표(商標)’가 된 ‘주체사상’의 틀 속에서 ‘자주’를 재포장하여 등장시켰다. 북한이 ‘민족’과 ‘자주’ 문제를 통일논의에 접목시킨 이유는 명백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한사회 내에서 ‘갈등이론’에 입각한 통일논의를 가열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전형적 대남전술인 ‘통일전선’ 전술에 뿌리를 둔 전술용어들인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남쪽의 ‘좌파’ 세력들이 ‘갈등이론’에 입각한 통일논의를 수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남쪽의 ‘좌파’ 세력의 핵심에는 1980년 ‘광주 항쟁’의 파생물인 소위 ‘주사파’의 존재가 있다. 언론이 작명한 ‘주사파’의 오늘날의 호칭은 ‘386’이다. 1990년 구 소련의 붕괴와 동구 공산권 와해의 충격파 속에서 ‘386’의 일부인 ‘486’들이 전향을 선언하고 이탈해 나왔다. ‘486’의 ‘고백’과 ‘증언’에 의하면 ‘주사파’들은 198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위수김동’ㆍ‘친지김동’에게 ‘충성’을 서약하면서 <반제ㆍ민족해방ㆍ인민민주주의 혁명>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또 이것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들의 그 같은 ‘전력’에 대한 ‘시인’도, ‘전향’도 없이, ‘좌파’인 채로, 2002년 대선전에 뛰어들어 현 노무현 정권을 창출시키는데 기여한 뒤 ‘해방공간’에 뿌리를 두고 대한민국이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권위주의’ 시기에는 지하에서 ‘칩거’하거나 ‘잠행’하다가 1998년 김대중 정권 성립에 편승하여 ‘양지’로 뛰어 나온, 주로 <남로당> 계열의, 원조(元祖) ‘좌익’ 세력과 제휴ㆍ연대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이끄는 ‘참여정부’의 중심을 장악함으로써, 북한의 표현에 의하면, ‘남조선의 주류세력’이 되었다. 이들이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가속화시키면서 ‘갈등이론’에 기초한 통일논의를 주도해 왔다. 이들이 통일논의에서 새로이 각인시키고 있는 ‘키 워드’들 가운데 ‘민족화합’ㆍ‘민족공조’ㆍ‘민족통합’ 같은 것들이 있다.

필자는 북한은 물론 남한사회 내 ‘좌파’ 세력들의 이 같은 견해와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필자의 확고한 입장은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관계와 통일문제 해결 방정식에서 ‘민족’과 ‘자주’는 ‘고려’의 대상이 될 ‘요소’이기는 하지만 중심 이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언어의 정치화를 통한 이질화와 이로 인한 해석을 둘러 싼 혼선 때문이다. 대한민국과 김일성ㆍ김정일의 ‘수령독재’가 지배하는 북한 사이에는 ‘민족’과 ‘자주’의 ‘해석’을 놓고 근본적 차이가 존재한다. 북이 말하는 ‘민족’과 남이 말하는 ‘민족’은 더 이상 뜻을 함께 하는 단어가 아니다.

남과 북이 각기 ‘해석’을 달리하는 이 용어들을, 서로 상이한 ‘해석’을 통일시키지 않은 채, ‘공통’의 ‘언어’로 합의하여 사용하는데서 초래되는 치명적 위험이 벌써 35년의 연륜을 헤아리는 ‘남북대화’로 하여금 실질적으로는 아직도 여전히 원점에서 맴돌게 하고 있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남북관계의 실체 -- 대한민국의 시각

남북관계 해결의 정도(正道)는 한반도 분단의 경위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해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일시에, 일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분단’은 1945년 38선의 출현에 의한 ‘국토분단’ →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현을 통한 ‘국가분단’ → 1950-53년의 6.25 전쟁과 53년 휴전 이후 남북의 두 동포사회 간에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온 ‘민족분단’의 순으로 3단계로 확대ㆍ진행되어 왔다.

북한과 북한에 동조하는 국내 ‘좌파’ 세력들은 ‘갈등이론’의 틀 안에서 우리나라의 ‘분단’의 책임을 일괄해서 ‘외세’로 전가시킨다. “미국과 ‘미국의 앞잡이들’(이승만 정부와 이를 뒤 이은 역대 ‘반공’ 정부들)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과 역사적 사실 사이에는 큰 괴리가 존재한다. ‘분단’의 첫 단계인 38선의 등장만큼은 미국의 책임이라는 주장이 맞다. 이로 인하여 ‘국토분단’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그은 38선은 ‘군사작전’을 위한 ‘군사분계선’이었으나 이를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킨 것은 소련이었다. 그 책임은 소련과 북한공산주의자들의 몫이었다. 더구나 우리는 38선의 등장 덕분으로 38선 이남 지역의 공산화를 방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적어도 ‘공산화’를 모면함으로써 오늘의 자유와 민주주의 및 번영을 향유하게 된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38선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만약 38선이 없었다면 4천8백만 대한민국 국민들도 지금 ‘공산화’된 세계에서 북한동포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단계인 1948년의 ‘국가분단’과 3단계인 6.25 남침 전쟁 이후의 ‘민족분단’ 단계에 대해서는 결코 ‘외세’에만 책임을 전가시킬 수는 없다. ‘해방공간’에서 통일국가 실현에 실패한 책임을 미국에 전가시키는 것이 ‘갈등이론’에 입각한 수정주의 사관이 취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46년과 47년 두 차례의 <미ㆍ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책임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에 있었다. <미ㆍ소 공위>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했고 유엔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을 결의했지만 북한을 관리하던 소련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통일국가 실현의 마지막 기회가 일실되었다.

이렇게 되자 유엔총회는 “유엔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했고 이에 따라 1948년5월10일 <제헌국회> 선거를 통해 한반도에서 ‘유일합법성’이 인정된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소련의 수중에 확실하게 장악된 북한에서는 일사불란한 ‘공산화’가 진행되었지만 남한에서는 ‘좌ㆍ우’ 세력간에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공공연하게 무력과 폭력으로 개입하는 가운데 유혈과 파괴를 수반하는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선택’은 국민의 몫이었고 국민은 ‘좌’를 버리고 ‘우’를 ‘선택’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분단국가’를 일방적으로 수립했다. 이로써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국가분단’이 초래되는 사태가 전개된 것이다.

김일성의 북한이 남한 내의 <남로당> 세력의 ‘봉기’를 기대하면서 “무력에 의한 적화 통일”의 대담한 시도로 도발한 6.25 남침 전쟁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또 한 차례의 ‘선택’의 기회였다. <남로당>의 ‘봉기’는 없었다. 남북간의 일방적인 군사적 불균형을 배경으로 북한이 도발한 6.25 전쟁에서 대한민국은 미군을 비롯한 16개 유엔회원국군과 한국군으로 이루어진 유엔군의 힘으로 북한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대한민국 국민들이 침략해 온 북한군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면 유엔군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거부하고 일치단결하여 6.25 전란을 극복해 냈다.

‘해방공간’에서 2개의 ‘분단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남과 북(사실은 북의 선택은 동포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닌 ‘관제(官製)’였지만)은 각기 상반된 ‘선택’을 했다. 남의 ‘선택’은 ‘민주주의’와 ‘자유’였고 북의 ‘선택’은 ‘공산주의’와 ‘독재’였다. 남의 ‘선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경쟁사회’였고 북의 ‘선택’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입각한 ‘명령사회’였다. 남의 ‘선택’은 ‘개방’과 ‘국제화’였고 북의 ‘선택’은 ‘폐쇄’와 ‘고립화’였다. 이 같은 ‘선택’의 ‘결과’가 지금 우리의 눈앞에 드라마틱하게 펼쳐져 있다. 파괴와 폐허를 남긴 6.25 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일면 국방ㆍ일면 건설’을 요구하는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 많은 부작용과 과실(過失)들이 나타나서 축적된 끝에 오늘날의 사회적 갈등의 소지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분단’을 ‘차선책’으로 ‘선택’한 결과로 지금 남쪽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가히 민족사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다.

2004년도 자료로 본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세계 200여개 국가 가운데 11위다. 53년 13억 달러였던 우리의 GNP는 523배인 6,810억 달러로 늘어났고 1인당 GNP는 67 달러의 211배인 14,162 달러로 늘어났다. 한국 경제는 54년 처음으로 5.6%의 성장을 기록한 이래 56년과 80년의 두 해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플러스 성장을 계속해 왔다. 산업구조는 1차 산업으로부터 3차 산업으로, 경공업 위주로부터 중화학공업을 거쳐 첨단 정보ㆍ통신사업 위주로 이동하여 선진국 형 산업구조로 환골탈태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단’ 이전에는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에 비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945년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의 98%, 유연탄의 87%, 역청탄의 98%, 전력의 92%가 북한지역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1960년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인구 때문에 비록 GNP는 19억 대 17억 달러로 남한이 근소하게 앞섰지만 1인당 GNP는 94 대 137 달러, 수출액은 3천3백만 대 1억5천4백만 달러로 북한이 크게 앞서고 있었다. 1945년 해방 이전의 남북한의 경제구조는 남농북공(南農北工)ㆍ남경북중(南輕北重)으로 북이 주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분단’으로부터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경과한 지금 역전된 남북한의 경제는 이미 비교의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이다. 북한의 경제는 국가예산을 편성하는 것을 중단한 1994년 이래 선고만 안 되었을 뿐이지 실제로는 파산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덜 난 경제는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수백만의 주민이 기아(饑餓)로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명의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두만강과 압록강을 밀도강하여 만주 벌판을 전전하고 있다고 한다. 북에 남은 주민들은 남한과 서방세계의 인도적 지원으로 겨우 집단 아사(餓死)를 모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이 1차 7개년 계획을 시작한 직후인 1962년 김일성은 이 계획이 완료되면 북한주민에게 “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이 돌아 갈 것”이라고 약속했었지만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이루어진 것이 없는 것은 물론 앞으로도 이루어질 전망이 없는 실정인 것이다. 최근 미국의 Foreign Policy와 Fund for Peace라는 기관이 발표한 ‘2006년도 실패한 국가지수’(Failed States Index)에 의하면 북한은 조사 대상 146개국 가운데 14위였다. ‘국가분단’이 회갑(回甲)을 맞이하려 하고 있는 시점에서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회복 불가능한 실패한 나라’다. 북한의 ‘국가위험도’를 <유로머니>는 세계 185개국 가운데 185위로, 가 173개국 가운데 173위로, PRS가 140개국 가운데 109위로 평가하고 있고 OECD의 <국가위험도 전문가회의>는 7년 연속으로 북한을 전체 8등급 가운데 가장 낮은 7등급에 포함시키고 있다.

남북간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 국제무대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 두 ‘나라’의 ‘수교현황’에 반영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대만을 제외한 전 세계 190개 독립국가 가운데 2006년 현재 대한민국의 수교국가는 모두 186개 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교국가는 모두 155개국이며 그 가운데 152개국이 남북한과 따로따로 ‘동시수교’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과 국교를 트지 않고 있는 나라는 쿠바, 시리아, 마케도니아, 모나코 등 4개국뿐이다. 대한민국은 91개국의 국제기구에 가입한 반면 북한이 가입한 국제기구는 30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은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1991년 각기 별개의 회원국으로 유엔회원국이 되었다. 유엔헌장은 국가 단위의 가입조건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서로 별개의 회원국으로 유엔에 가입함으로써 남북한은, 공개적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한반도 상에 2개의 ‘주권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수용한 결과가 되었다. [1992년의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서 남북은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정리’해 놓았다.]

그 동안 남북간에 벌어진 이 같은 엄청난 발전의 격차는 1948년 일시적 ‘차선책’으로 ‘통일’을 잠시 유보하고 ‘분단’의 길을 택한 대한민국 건국주역들의 ‘선택’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이 때 ‘분단’의 ‘선택’은 곧 ‘체제’와 ‘이념’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단’을 ‘선택’한 결과로 그 동안 남북간에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가운데 상호 우열과 사활을 다투는 체제경쟁이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이 체제경쟁에서 남쪽의 대한민국이 승자가 되었다. ‘체제’와 ‘이념’의 승리였다.

이 같은 체제경쟁의 결과는 남의 체제 실험이 ‘성공담(成功談)’인 반면 북의 체제 실험은 ‘실패작(失敗作)’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 같은 결과는 당연히 분단해소와 통일실현의 조건 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분단의 해소와 통일의 실현은 ‘성공한 체제’ 중심으로 모색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명제가 성립되게 된 것이다. 1948년의 ‘분단’이 우리에게 ‘선택’의 문제였던 것처럼 앞으로 ‘통일’ 또한 ‘선택’의 문제라면 이제 우리가 이룩해야 할 ‘통일’의 ‘조건’은 체제경쟁에서 승리한 승자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이 정할 몫이지 패자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를 좌우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3. 남북관계의 실체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각

남북관계를 보는 북한의 시각은 남한의 그것과는 비대칭적이다. 이 비대칭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보다도 이 헌법(제11조)에 의거하여 국가의 상위에 군림하는 초권력체인 <조선로동당> 규약의 관련 조항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 헌법은 하나의 ‘대외 전시용 장식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조선로동당> 규약은 “남조선에서 미 제국주의 침략군대를 몰아내고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며 “남조선 인민들의 사회민주화와 생존권 투쟁을 적극 지원”하는 것과 함께 “당면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규약은 지금도 살아 있고 여전히 유효하다. 북한이 추구하는 불변의 최종 목표가 ‘공산화 통일’임을 명시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로동당> 규약은 남북관계를 두 체제간의 ‘경쟁’이 아니라 ‘투쟁’의 관계, ‘혁명’의 문제로 보는 입장을 명시한다. 이를 위하여 북한이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는 통일전략이 이른바 ‘<남조선혁명>에 기초한 조국통일’ 이론이다. 이 전략의 틀 안에서 북한이 주력하는 것은 이른바 ‘3대 혁명역량’의 강화다. ①‘북조선’을 ‘혁명기지’로 육성하고 ②‘남조선’의 ‘혁명역량’을 지원하며 ③국제적 ‘혁명역량’과 연대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3대 혁명역량’의 강화를 통해 추구하는 통일의 방도로 ‘평화적’ 방도 또는 ‘비평화적’ 방도를 함께 설정하고 있다.

‘평화적’ 방도는 ‘비폭력’ 또는 ‘폭력’의 방법으로 ‘남조선’의 ‘반공’ 정권을 전복시키고 이를 ‘연공’ 또는 ‘용공’ 정권으로 대체시킨 뒤 “이미 공산화 되어 있는 ‘북조선’과 ‘합작’에 의한 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폭력’의 방법은 ‘통일전선’ 전술로 남한의 국내정치 프로세스에 개입함으로써 선거를 통해 ‘혁명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고 ‘폭력’의 방법은 ‘지하당 공작’을 통한 ‘폭력혁명’을 통해 ‘혁명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던지, 추구하는 ‘혁명 목적’은 하나다. ‘남조선’의 ‘반공’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연공’ 또는 ‘용공’ 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이 곧 <남조선혁명>이다.

이 같은 <남조선혁명>의 수행을 위해서는 남한에 존재하는 ‘혁명’에 대한 장애 요인을 제거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은 다시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되어 수행된다. ‘통일전선’의 기본은 “<남조선혁명>의 ‘주력군(主力軍)’인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진보적 지식인과 ‘보조역량(補助力量)’인 도시소자산계급, ‘민족’자본가, ‘반제’ 종교인, ‘애국적’ 군인 등 ‘기층민중(基層民衆)’들을 엮는 ‘하층 통일전선’”이다. 그러나 ‘하층 통일전선’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의 제거가 필요하다. 이들 ‘장애물’의 제거를 위하여 북한은 남한과 ‘당국 대 당국’의 ‘대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한다. 이것이 ‘상층 통일전선’이다. 북한은 ‘상층 통일전선’ 전술에 입각하여 당국간에 이루어지는 ‘남북대화’를 이용하여 남한의 <국가보안법>과 <국가정보원> 등 혁명에 대한 장애 요인이 되는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제거하려 하는 것이다.

<남조선혁명>의 수행이 불가능해 지면 북한의 선택은 ‘비평화적 방도’, 즉 ‘무력통일’의 추구로 전환된다. 그런데 ‘무력통일’에도 ‘장애물’이 있다. 북한의 대남 무력행사를 ‘억지’하고 있는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존재가 그것이다. 이들 ‘장애물’의 제거가 ‘무력통일’의 ‘전제조건’이다. 북한은 ‘주한미군’의 철수와 ‘한미동맹’의 파괴도 ‘전제조건’으로 제기하여 역시 ‘상층 통일전선’의 틀 안에서 당국간의 ‘남북대화’를 통해 해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1980년10월의 <조선로동당> 6차 당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에 의한 통일방안’을 제시한 것을 계기로 하여 북한은 이른바 ‘연방제’ 통일공세를 격화시켜 왔다. 이 같은 북한의 ‘연방제’ 통일공세는 드디어 2000년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평양방문으로 이루어진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2항을 통해 하나의 ‘결실’을 이루어냈다. “남의 ‘연합제’안과 북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데 ‘합의’를 도출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모르고 한 일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북이 말하는 ‘연방제’가, 그것이 ‘높은 단계’이건 ‘낮은 단계’이건 간에, 대한민국이 수용할 수 없는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묵살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1980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내놓았을 때 북한이 제시한 이 ‘방안’ 실현의 ‘전제조건’은 ①‘남조선’의 ‘군사파쇼’ 청산과 ‘사회의 민주화’(<국가보안법> 폐지ㆍ‘폭압기구’ 해체ㆍ‘정치활동의 자유’ 보장ㆍ‘민주인사’ 석방), ②‘긴장상태’ 해소와 ‘전쟁위협’ 제거(‘주한미군’ 철수와 미-북 ‘평화협정’ 체결, ③미국의 ‘2개 조선’ 책동 및 ‘내정간섭’ 중단 요구 등이었다. 북한의 ‘연방제’ 공세는 ‘연방제’ 실현이라는 ‘염불’이 목적이 아니라 그 ‘전제조건’으로 남한의 ‘반공’ 체제를 해체하고 ‘한미동맹’을 파괴하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잿밥’이 그 목적이었다.

‘전제조건’을 이용한 ‘상층 통일전선’ 전술은 이제 35년의 연륜을 헤아리는 ‘남북대화’ 전 과정을 통해 일관되게 추구해 온 북한의 대화 전략이다. 예컨대, 이 때문에 1970년대 초에 시작된 <남북적십자회담>은 그 동안 간혈적인 ‘시범성’ 이산가족 ‘상봉’ 사업이 반복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여전히 원점에서 맴돌고 있다.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한 남북 이산가족 찾기 사업의 요체는 <국제적십자위원회>가 권고하는 ‘이산가족 찾기 사업’의 ‘절차’와 ‘방식’을 실현시키는 데 있다. 그 첫 걸음이 중립적 방식에 의한 ‘주소와 생사 확인’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그 대신 북한이 ‘대안’을 내놓았다. “이산가족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상대지역으로 가서 ‘자유’롭게 찾아다니게 하자”는 것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적극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당연히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남한이 “이산가족들이 마음대로 상대지역으로 가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한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속셈은 소위 ‘적십자 요해인원’ 상호 파견 제안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들어났다. <적십자회담>에서 북한은 “우선 서로 상대방의 이산가족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적십자 요해인원’을 상호 파견하자”는 제안을 꺼내들었다. “상대편 지역 리ㆍ동 단위로 1명씩의 ‘적십자 요해인원’을 파견하자”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남은 4,300여 명을 북은 무려 36,000여 명의 ‘요해인원’을 각기 파견하자는 말이 된다. 여기서도 문제는 ‘전제조건’에 있었다. 북한은 ‘적십자 요해인원’들에게 “언론ㆍ출판ㆍ집회ㆍ통행 등 활동의 자유는 물론 인신과 휴대품 불가침권을 보장할 것”과 이를 위해 “우선 필요한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남북조절위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위원회를 ‘확대 개편’하던가 아니면 위원회를 ‘남북정치협상회의’로 대체하자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북한이 내놓은 ‘확대 개편’안은 황당한 것이었다. <남북조절위원회>를 “쌍방에서 각기 5명 이상의 당국 대표, 각기 60-70개의 정당ㆍ사회단체에서 보내는 각기 5-20명의 대표, 그리고 각계각층 인민의 대표들”로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쌍방에서 각기 700-3,000여 명이 참가하는 초대형 군중회의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위훤회의 규모가 아니었다. 북한은 “남조선의 경우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정당ㆍ단체ㆍ개별인사’들은 배제하라”는 ‘전제조건’을 붙였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이때 북한은 황당한 ‘3단 논법’을 들고 나왔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곧 민족단결을 반대하는 것이고 민족단결을 반대하는 것은 곧 통일을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결국 통일을 반대하는 것”이므로 “통일을 논의하는 자리에 통일을 반대하는 자들이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북한의 대화 전략은 북한의 주장으로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에 수용된 소위 ‘조국통일 3대원칙’에 압축되어 있다. 북한이 주장하는 ‘조국통일 3대원칙’은 ‘자주ㆍ평화통일ㆍ민족대단결’이다. 문제의 이 ‘3대원칙’에 대해서는 남한사회에서 제대로 인식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이 ‘3대원칙’은 북한에 대해서는 해당되지 않으며 오로지 남한에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북한에서는 이 ‘3대원칙’이 이미 완전히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말하는 ‘조국통일 3대원칙’은 남한에 대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동맹’을 파기하여 ‘자주성’을 회복”하고 “공산주의를 단속하는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고쳐서 ‘민족대단결’에 대한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평화통일’을 위해 유리한 조건ㆍ환경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1972년 남쪽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실무진으로부터 ‘조국통일 3대원칙’에 내포된 이 같은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던 ‘10월 유신(維新)’의 ‘명분’ 마련을 위하여 북한이 요구를 수용하여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문제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수용하는 치명적 실책을 저질렀다. 그 뒤 다양하게 추진된 ‘남북대화’는 예외 없이 북한의 주장에 따라 남북간의 모든 합의문에 문제의 ‘3대원칙’에 관한 언급을 포함시켜야 하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이렇게 되자 남북은 대화가 민감한 고비에 접어들 때마다 이에 관한 ‘해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 했고 대화는 결국 답보, 교착, 좌절의 악순환을 되풀이해야 했다.

그러나 최근 남쪽의 입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1항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우리 민족끼리’라는 표현에 문제의 ‘3대원칙’을 담아낸 뒤 그로부터 정권을 이어 받은 노무현 정부는 2005년 평양을 방문한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과 김정일 사이의 면담 석상에서 <남북공동선언> 1항의 ‘우리 민족끼리’가 ‘민족공조’를 의미한다는 북한측 ‘해석’을 사실상 수용한 것이다. 그 결과로, 여전히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것이기는 하나, 여러 가지 형태의 대화가 그나마 ‘형해(形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실정이다.

4. 평화공존, 화해, 그리고 민족통합 -- 신기루인가? 오아시스인가?

김대중 정권으로부터 소위 ‘햇볕정책’을 물려받은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은 동북아 지역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평화번영정책’ 테두리 안에서 ‘대북화해협력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문제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이 제시하고 있는 ‘로드 맵’(Road Map)이 ‘평화공존, 화해, 그리고 민족통합’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는 기본적 문제점의 하나는 ‘햇볕정책’이나 ‘대북화해협력정책’이나 사실은 정체가 분명치 않은 ‘사불상(四不像)’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들 정책은 ‘통일정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딱 부러지게 ‘분단관리정책’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 동안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이 정책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김대중 씨는 물론 그의 참모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체계적ㆍ이론적으로 정리되어서 설명된 사실이 없다는 ‘이상한 현상’이 간과되고 있다. 이에 대한 그 나마의 구체적 설명은 김대중 정권에서 국가정보원장ㆍ통일부장관ㆍ대통령특별보좌관을 역임했던 임동원 씨로부터 나온 것이 고작이다. 그는 ‘햇볕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새로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배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은 75년부터 동유럽에 대해 데탕트 정책을 썼다. 15년 동안 꾸준히 해 온 결과 총 한 방 안 쏘고 동유럽이 무너졌다. 우리도 이 정책을 한반도에서 실현해 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름은 그렇다 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평화공존, 화해, 그리고 민족통합’과는 거리가 먼 정책이다. 왜냐 하면 미국의 데탕트 정책의 실체는 이름만을 달리하는 ‘소련 붕괴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측면 때문에, 사실은, 2000년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방북이 실현되기 직전까지는 북한에서도 김정일을 필두로 백남순 외무상과 <로동신문>이 길길이 뛰면서 “이것은 미국이 소련을 붕괴시켰던 ‘평화이행’ 전략의 아류”라고 ‘햇볕정책’을 맹공했던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은 2000년6월부터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남의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을 ‘대화’(?)의 상대방으로 수용하기 시작하는 기행(奇行)을 보여주었다. 그 뒤에 밝혀진 사실이 있다. 그것은 2000년6월의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남북정상회담’ 및 ‘6.15 남북공동선언’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 등정(登程)의 하루 지연까지 강요당하면서 <현대>로 하여금 마련케 하여 ‘급전(急錢)으로 우선 제공한, 5억 달러 또는 그 이상의 ‘뇌물’과 그 밖의 추가적 ‘반대급부’를 대가로 하여 이루어진 ‘검은 흥정’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파산한 북한은 2000년6월 이후 건별로 실리 위주의 철저한 ‘주고받기’ 식 ‘대화’를 진행시켜 왔다. 그 동안 남북간에는 이름하여 ‘장관급 회담’ㆍ‘군사회담’ㆍ다양한 ‘경제회담’ㆍ‘체육회담’ㆍ‘적십자회담’ 등의 여러 갈래 대화가 진행되어 왔고 남북간에는 몇 해째 서울과 평양에서 6.15 및 8.l5 ‘민족공동 축전행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건설 및 남북 철도ㆍ도로 연결이 계속되거나 추진되고 한 해 2-3회, 그것도 그때마다 ‘쌀’과 ‘비료’를 대가로 하여 이루어지는,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져 왔다. 남북간에는 심심치 않게 각종 ‘합의문건’들이 생산되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간에 타결된 ‘합의문건’이나 ‘합의문’들은 북한의 변덕에 따라 이행과 불이행이 교차적으로 반복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그 동안 ‘대북화해협력정책’의 ‘성공적’ 추진의 결과로 남북간에는 연간 10만 명의 인적 왕래와 10억 달러 수준의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1만3천 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남북간의 이 같은 인적ㆍ물적 교류는 그 어느 것도 ‘공짜’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교류는 대부분 북한이 철저하게 현금 또는 현물로 ‘대가’를 챙기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95년부터 2006년까지 12년 동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또는 민간단체가 주체가 되어 남쪽에서 제공한 대북지원 총액은 돈으로 환산해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불법적 방법으로 북에 건네 준 ‘검은 돈’ 5억 달러(또는 그 이상)를 제외하고도, 무려 6조6천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 가운데 이제 3년 반의 임기를 소진한 노무현 정부의 대북 지원액이 3조970억 원으로 김대중 정부 때의 1조5천억 원의 2배 이상에 이르고 있다. ‘밑 빠진 독’에 부어버리고 만 대북 경수로 건설비용 1조4천억 원을 제외하면 노무현 정부의 대북 지원액은 전체의 무려 64%가 된다. ‘대북 퍼주기’ 시비가 일어났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천문학적 규모의 대북지원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남북관계는 실질적으로 개선된 것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그 동안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의 성과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성립과 작년 9월 4차 베이징 ‘6자회담’에서 채택된 6개 항목의 ‘공동성명’을 치켜들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에 따른 ‘6자회담’의 장기 중단과 북한에 의한 미사일 시험발사 및 핵실험 위협 등으로 인하여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주소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노무현 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이 본래 표방한 것은 이를 통한 “북한의 변화”였다. 그러나, 그 동안 북한이 보여 준 ‘변화’는 사실상 거의 없다. 노무현 정부의 통일부는 특히 2000년의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북한이 ‘신사고(新思考)’(2001년 1월 ‘연두공동사설’)와 ‘경제관리개선조치’(2002년7월1일 시행) 등을 거쳐 ‘변화’의 길을 열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의 ‘변화’는 있었더라도 ‘유두분면(油頭粉面)’의 무의미한 겉치레 ‘변화’에 불과했었다. 그 동안 중국은 김정일의 베이징 ‘중관촌(中關村) 과학단지’ 시찰(2001), 샹하이 ‘푸동(浦東) 개발구역’ 시찰(2002년), 중국 남부 시찰(2006) 등을 주선하면서 “중국식 ‘개혁ㆍ개방(改革ㆍ開放)’의 모방”을 극력 종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의 북한은 좀처럼 ‘의미 있는 변화’로의 발길을 내디디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엉뚱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그 동안 ‘평화공존, 화해, 그리고 민족통합’ 기치 아래, ‘대북 퍼주기’ 시비를 불러일으키면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8년 반에 걸쳐 집요하게 추진한 ‘햇볕정책’과 ‘대북화해협력정책’이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서 엉뚱한 내용과 방향으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특히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이후 간단없이 제기되고 있는 ‘좌파’ 정권 시비에 무관심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그의 대부분의 말이 그랬던 것처럼 이 ‘말’도 ‘해석’상의 혼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정권을 가리켜 ‘좌파’ 정권이라고 표현한 사실이 있다. 한 정권의 이념적 정체성을 판단하려면 그 정권의 ‘인적 구성’ㆍ‘지지 기반’ㆍ‘정책 노선’ 등의 세 가지를 판단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면 노무현 정권은 “좌파 정권이 아니라”고 부인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우리의 우려를 증폭시켜 주고 있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구체적 행보(行步)가 보여 주는 문제상황이다.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정부가 자랑해 마지않는 남북간 ‘인적 교류’의 허구성이다. ‘6.15’와 ‘8.15’를 계기로 하고 ‘민족’을 명분으로 하여 최근 진행되어 온 각종 ‘축전 행사’는 물론이고 ‘금강산 관광’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북간의 ‘인적 교류’는 예외 없이 ‘보수ㆍ우파’는 배제된 가운데 ‘진보ㆍ좌파’들만의 ‘잔치 판’이 되어 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북의 주문대로 남쪽이 길들여지는” 공간으로 구실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가 하면 국내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주한미군’ 기지의 평택으로의 이전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의 국무총리의 부군이 평택으로의 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좌익’ 단체의 간부이고, 정부는 “맥아더 장군 동상의 철거를 주장”하고 “평택으로의 기지 이전에 반대”할 뿐 아니라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좌경 시민단체’들에게 국고로부터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 실로 몬도카네적 ‘진기한’ 상황이 일상사(日常事)가 되어 있기도 하다. 더구나, 이 정부는 북한에 의한 ‘핵’과 ‘미사일’ 개발이 “우리를 군사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정치적 행동”이라고 감싸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대북 강경대응의 예봉을 둔화시키는 데 전 외교역량을 경주하고 있다.

‘보수ㆍ우파’로부터의 ‘좌경화’ 논란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보수’ 진영에서는 “아직 ‘적화통일’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은 이미 ‘공산화’되었다”는 현상 진단마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흥미를 자아내는 사실은, 이 같은 남쪽의 ‘보수’ 진영의 진단에 대해 북한이 화답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6.15 선언의 결과로 남조선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면서 “자기를 반공ㆍ보수라고 했던 사람들이 사회의 80%, 진보라고 했던 사람들이 20% 미만”이었던 ‘남조선’에서 이제는 “반공ㆍ보수세력이 밀려나고 탄압 당하고 숨어 살아야 했던 진보적 운동세력들이 네 활개를 펴고 주류로 등장했다”고 ‘자축’하고 나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표방해 온 ‘평화공존, 화해, 그리고 민족통합’ 노력이 난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는 ‘햇볕정책’과 ‘대북화해협력정책’의 추진을 통해 남북관계에 ‘평화공존, 화해, 그리고 민족통합’이라는 ‘오아시스’를 건설할 것을 희망했으나 실제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오아시스’가 ‘신기루(蜃氣樓)’로 변질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분명하다. 북한의 대남정책이 여전히 ‘남조선혁명’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5. 대북정책의 허실과 한계 -- 극복을 위한 제언

1990년대 초부터 전 지구적 차원에서 ‘냉전’체제가 해체된 뒤 한반도에는 ‘이중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1991년 남북이 2개의 ‘주권국가’의 자격으로 별개로 유엔회원국이 됨으로써 남북관계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의 ‘국가관계’로 전환되었다. ‘국제법’에 의하여 규제되는 ‘국가관계 이론’의 적용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내에서의 남북관계에 관한 인식은 여전히 ‘갈등이론’의 포로가 되어 있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과 노무현 정권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은 전형적으로 ‘갈등이론’에 기초를 둔 대북정책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북한의 대응은 비대칭적이었다. 여전히 ‘남조선혁명’론으로 대응해 온 것이다. 지금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을 놓고 ‘좌파’ 정권 논란이 가열되고 있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의 전통적 주류 세력은 ‘보수ㆍ우파’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이 진정 남북간의 ‘평화공존, 화합, 그리고 민족통합’을 대북정책의 목표로 삼았었다면 그 같은 ‘평화공존, 화합, 그리고 민족통합’은 ‘보수ㆍ우파’의 응분의 참여가 보장되는 가운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2개의 ‘주권국가’ 사이에 ‘국가관계 이론’에 입각하여 추진되고 이루어질 때라야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2000년의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이후 실제로 전개되어 온 남북관계는 남한의 경우 ‘보수ㆍ우파’는 철저하게 배제ㆍ소외된 가운데 북한과 남한의 ‘좌파’ 세력의 ‘악수’에 의한 그들 사이만의 ‘평화공존, 화합, 그리고 민족통일’을 추진하는 것이 되었다. 실제로 가능한 것일지의 여부를 떠나서, 남북관계의 진정한 개선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북한과 남한의 ‘보수ㆍ우파’ 사이의 ‘평화공존, 화합, 그리고 민족통합’이었을 터인데도 말이다. 사실은, 남북관계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북한과 남한의 ‘좌파’ 사이의 ‘평화공존, 화합, 그리고 민족통합’은 원천적으로 그것을 논의할 필요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 하면, 이 문제에 관하여 북한과 남한의 ‘좌파’ 사이에는 이미 코드가 일치하고 있는 부분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의 남북관계는 북한의 ‘남조선혁명’론의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는 ‘상층 통일전선’의 ‘무대’가 펼쳐지는 내용과 모양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인식이다.

유감스럽게도, 국내정치적 차원에서 날이 갈수록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는 대북정책을 둘러 싼 남한사회 내부에서의 이 같은 혼선은 아무래도 내년 12월에 있을 제17대 대통령선거 때까지 지속되고 가중될 전망이다. 결국 대한민국은 내년의 대통령선거를 통해 또 한 차례의 중요한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내년 대선에서 국민이 ‘좌파’ 정권의 ‘지속’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우파’ 정권으로의 ‘복귀’를 ‘선택’할 것이냐를 놓고 역사적 ‘선택’의 기로(岐路)에 서 있다.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대북정책이 기본방향을 근본적으로 달리 하게 되리라는 것이 필자의 인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지금의 시점에서 분명하게 강조해 두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에 추구되고 있는 ‘평화공존, 화해, 그리고 민족통합’이라는 명제는 ‘수령독재’라고 일컬어지는,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로 이어지고, 다시 그의 ‘소생(所生)’으로 이어지려고 하고 있는, 북한의 ‘세습독재 체제’에 결정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우리 사회가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같은 ‘인식’의 토대 위에서 북한에서 ‘북한동포’들 스스로의 힘을 통해 그 같은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와 함께 북한에 그 같은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가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경제역량, 즉 ‘파이’를 키우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변화’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남북간 ‘평화공존, 화합, 그리고 민족통합’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유일무이의 첩경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대한민국이 해야 할 일은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를 유도하는 데 김정일 정권을 상대로 ‘구걸’이나 ‘매수’와 같은 부도덕한 방법이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한 올바른 길은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북한에게 ‘변화’의 ‘정도(正道)’를 제시하여 이를 ‘선택’하도록 ‘권유’하면서 이에 호응할 때는 응분의 ‘당근’으로 격려하고 불응할 때는 적절한 ‘채찍’으로 제재하는 강ㆍ온의 방법을 적절하게 배합하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북한의 ‘변화’를 기대함에 있어서 그 폭을 김정일을 정점으로 하는 현재의 ‘수령독재’가 스스로 ‘변화’할 때만을 무한정 기다리는 것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김정일 정권이, 예컨대 중국식 ‘개혁ㆍ개방’을 수용하여, 김정일 일가에 대한 ‘우상화(偶像化)’를 지양하고, ‘법’과 ‘제도’에 의한 지배를 받아들이며, ‘사장경제’를 실행하는 등의 필요한 ‘변화’를 수용한다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김정일의 북한이 끝내 이 같은 본질적 ‘변화’ 수용을 거부할 때는 우리는 ‘정권교체’라는 ‘극약’도 우리의 검토 대상에서 배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이 같은 북한의 ‘변화’가 평화의 파괴를 무릅쓰는 방법으로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쟁’의 방법이 고려되어서도 안 되지만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우리의 정책수단이 북한으로 하여금 ‘전쟁’의 방법으로 대응하도록 하는 유인제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그 같은 북한의 ‘변화’가 가시화될 때까지는 지난 60년간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막아온 여러 가지 ‘전쟁억지 장치’들, 그 가운데서도 ‘주한미군’과 ‘작전계획 5027’로 상징되는 ‘한미동맹’을 잘 살려서 유지하는 것이 긴요하다. 그리고, 북한의 ‘구미(口味)’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당근’과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효과적인 ‘채찍’을 잘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 발제를 마치면서 한 가지 양해를 구해야 하겠다. 오늘 필자의 발제문은 직설적 표현과 용어들을 사용하는 대목들이 적지 않아서 이 학술회의 주최측의 성향을 고려할 때 청중 가운데서 좀 거북하게 듣는 분들이 계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늘과 같은 자리에서 ‘보수ㆍ우파’의 생각이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이 앞으로 우리 사회 안에서 소위 ‘남남 갈등’ 현상을 극복하는 데 긴요할 것 같다. 오늘 필자의 발제는 바로 그 같은 시각을 가지고 주어진 주제에 관한 ‘보수ㆍ우파’의 관점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었다. 듣는 분들의 이해를 구하면서 발제를 여기서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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