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選 改憲, JP 설득당하다
1969년 여름 朴 대통령은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이 세 번 연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신이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길을 여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 자신이 나서서 반발하는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3選 개헌에 반대한 공화당 의원들은 金鍾泌 전 당의장 계열이었다. 朴 대통령은 李厚洛 비서실장을 보내 조카사위를 청와대로 데려오게 했다. 金씨가 들어가니 대통령은 담배를 권하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라고 물었다.
'그냥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 돌아가는 얘기 들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임자는 어떻게 생각하나?'
'반대하는 의원들 때문에 심통하신 모양인데 그게 다 각하를 생각해서 걱정하는 거지 각하께 반항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저 하고는 관계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설득해주어야겠어. 임자밖에 없어'
'제가 설득해도 안들을 겁니다'
'해보고 그런 소리를 해. 임자가 날 도와주어야지 누가 도와줄 거야? 임자밖에 없어. 날 도와주어 조금 남은 일 더하게 해줘. 이담엔 임자 차례야. 임자가 할 거 아냐? 이번 한번만 더 하겠다는 건데 그것도 안되겠어? 나 하고 임자 사이 얘기 아닌가. 나 좀 도와줘. 나를 돕는 게 임자 자신을 돕는 걸 거야'
'정 그렇게 결심하시고, 또 이제까지 이 나라의 빈곤을 추방해오신 각하께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셔서 마무리를 하시고 물러나신다고 한다면 이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더 뛰죠'
(이상은 金鍾泌씨가 1986년 12월호 月刊朝鮮 인터뷰 때 오효진 기자에게 한 말이다)
金鍾泌 전 총리는 최근 기자에겐 이렇게 덧붙였다.
'대통령께서 나의 눈을 응시하시면서 '같이 목숨을 걸고 혁명을 했는데 혼자 살려고 그래?'라고 말씀하셨다. '60년대엔 빈곤을 겨우 퇴치했다. 70년대엔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이 길을 같이 가자'고 하시니 내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3選 개헌안은 1969년 9월14일 국회 제3별관에서 변칙적으로 통과되었다. 1969년 10월17일 3選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있었다. 투표율 77.1%에 찬성이 65.1%, 반대가 31.3%였다. 행정력이 총동원되었지만 압도적 찬성이 아니었다. 丁一權 총리 이하 내각과 李厚洛 비서실장은 朴 대통령에게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만2년간 상공부장관직에 있었던 金正濂씨가 사무실의 짐을 꾸려 집으로 나르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급히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金 장관이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니 대통령은 팔장을 낀 채 동쪽의 창가를 왔다갔다 거닐고 있었다. 金 장관이 인사하니 대통령은 자리를 권했다. 朴대통령은 정색을 하더니 말했다.
'내일 비서실장으로 발령낼터이니 열심히 일해주시오'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전혀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適任이 아닙니다'
'경제야말로 國政의 기본이오. 경제가 잘 되어야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고 포실한 생활을 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어서 대통령은 '6.25 동란 이후 계속되어온 무장간첩 침투 사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1968년의 1.21 청와대 기습사건, 1월23일의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11월23일의 울진-삼척 공비침투 사건, 1969년 4월15일 동해에서 있었던 미군 정보수집기 EC-121 격추사건 등을 열거했다. 朴 대통령은 미군이 정보함이 납치되고 정보기가 격추되어 수십명이 죽었는데도 북한에 대해서 강력한 응징을 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朴 대통령은 1969년 7월 닉슨 대통령이 괌에서 발표한 이른바 괌 닥트린을 걱정했다. 닉슨은 아시아에서 美軍의 직접 개입이 앞으로는 없을 것임을 천명했던 것이다.
대통령은 '지금은 6.25 이후 처음 맞이하는 국방상의 비상시임으로 나는 국방과 안보외교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를 들여다 볼 시간이 없다. 경제문제는 비서실장에게 맡길터이니 경제장관들과 잘 협조하여 처리하라. 수출증진과 농업개발에 계속 역점을 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金正濂 실장은 이날 이후 9년 이상 朴대통령을 보좌하게 된다.
1970년대의 개막: 7사단 철수
1970년 1월1일 朴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서 70년대의 비전을 밝혔다. 그는 '1970년대에는 완전 자립 경제를 꼭 성취하여야 한다'면서 '1인당 국민소득은 500달러를 넘어야 하고 수출은 적어도 60억 달러를 돌파해야 한다'고 했다.
<경제의 규모나 단위, 그리고 평가의 기준은 모두 국제적인 수준에서 다루어져야 하며, 몇몇 상업 부분은 세계1위를 자랑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실현될 때 우리는 조국 근대화의 대부분의 작업들을 70년대에 끝내는 셈이 됩니다>
이해 1월9일에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朴 대통령은 1960년대를 '민족 自覺의 연대'였다고 높게 평가하면서도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이 시국이 戰時냐 平時냐 하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한심한 일입니다. 총칼을 갈고 준비를 하여 폭력, 비폭력, 합법, 비합법, 정규전, 비정규전이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우리들을 치겠다고 벼르고 앉아 있는 적을 목전에다 두고 평시냐 전시냐 이런 논쟁을 한다는 자체가 우리 국민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잘못하면 1970년대에 우리 조상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얼빠진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이러한 수치스러운 역사를 남겼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1970년의 國政지표도 1968년 이후 3년째 똑 같이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이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위기의식을 항상 고취시킴으로써 국민들이 벼랑에 선 기분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도록 몰아갔다. 이것이 그의 리더십의 중요한 대목이다. 三星의 성공비결 또한 李秉喆, 李健熙의 끊임 없는 위기의식 조장이었다.
이해 북한의 도발은 계속되었다. 6월5일 서해 휴전선 남쪽 4해리 해상에서 어선단을 보호하고 있던 우리 해군 방송선을 북한 고속정 두 척이 납치해갔다. 그 17일 뒤인 6월22일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朴대통령의 목숨을 노린 음모였다. 이날 새벽 북한무장특공대 3명이 국립묘지의 추념祭壇 앞 현충문에 올라갔다. 이들은 몰래 폭탄을 장치하려다가 터지는 바람에 한 명은 즉사하고 두 명은 달아났다가 사살되었다. 6월25일 남침 기념일에 朴대통령 일행이 현충문을 통과할 때 인근에서 원격조종으로 폭파시켜 죽이려 했던 사건이 미수로 그친 것이다. 북한은 1983년 10월9일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를 방문하던 全斗煥 대통령 일행을 노리고 같은 숫법의 테러를 가해 17명의 장관급 엘리트들을 죽였다.
1970년 7월5일 미국의 로저스 국무장관은 마닐라에서 열린 월남참전 7개국 외무장관 회의 때 崔圭夏 장관에게 주한미군 2개 사단중 7사단을 철수하겠다고 통보했다. 그 전해 8월22,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韓美 頂上회담에서 닉슨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약속했으나 朴 대통령은 다른 감을 잡았다. 그는 그해 9월24일 대구에서 '미군의 주둔이 종결될 때를 대비하여 국군의 정예화를 기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한국군이 2개 사단, 약5만 명의 大軍을 월남전선에 보내놓고 있는데 주한미군을 감군하지는 않을 것이란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1970년 8월24일 애그뉴 부통령이 7사단 철수에 따른 협상을 위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서울에 왔다.
朴 대통령은 애그뉴와의 담판을 준비하기 위하여 2주일간 거의 모든 일정을 미루고 對策구상에 몰두했다. 金正濂 실장은 이 기간중엔 아침, 저녁 두 차레 극히 중요한 사안만을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 1차 회담은 8월25일 오전 10시 朴 대통령, 애그뉴 부통령, 崔圭夏 외무장관, 포터 주한미국대사, 金 실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두 시간을 예정했으나 여섯 시간이 걸렸다. 점심 식사도 잊었고 화장실에 가는 사람도 없었다. 회의가 끝날 때 코피와 케이크로 점심을 때웠다.
朴대통령은 자신이 준비한 메모를 꺼내놓고 減軍의 부당성과 위험성, 그리고 감군에 따른 보완대책을 설명하고 요구했다.
다음날 2차 회담에서 朴 대통령은 애그뉴 부통령으로부터 2만명 이상은 감군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아냈다. 그러나 애그뉴 부통령은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군의 현대화가 완전히 이뤄질 때, 아마도 앞으로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은 완전히 철수할 것이다'
비서실장으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朴 대통령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렇게 말했다.
'자주국방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미국측 방침에 일비일희 하는 처지를 빨리 초월해야 한다. 자주국방에는 막대한 내외자가 소요되므로 경제가 잘 되어야 하며 첨단 정밀무기는 비싸므로 外貨는 신종 고성능 무기 도입에만 사용하고 전통적 기본무기는 하루빨리 국산화해야 한다'
박정희-애그뉴 회담을 이어받아 실무회담이 계속되었다. 1971년 2월6일 韓美 양국이 합의한 내용은 한국군의 역할을 획기적으로 강화한 것이었다.
<미 7사단을 중심으로 한 1만8000명을 감축하고 서부전선을 맡고 있던 미 2사단은 후방으로 물린다. 휴전선 전체의 방어를 한국군이 전담한다. 미국은 15억 달러 규모의 군사원조를 제공하여 한국군을 현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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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통일 세력의 조직화와 교육을 위한 신문광고
1. 국민행동본부의 광고와 대중집회
2001년부터 시작, 2006년의 경우, 신문광고 47회로 14회의 대중집회를 개최하여 약20만 명 동원. 신문광고비를 보내준 사람은 연인원 약1만6200명이고 후원회비는 약3억9000만원, 전액 광고비와 집회비로 사용.
2. 자유투사로서의 역할
국민행동본부는 좌파와 대결하여 자유민주체제를 지켜내는 최선봉의 행동부대 역할을 하고 있음. 대중집회 이외에 조총련 간첩 고발, 李鍾奭 통일부 장관 고발, 盧武鉉 대통령 고발 서명운동 등 가장 선명한 법률투쟁도 벌이고 실내강연을 통해서 ‘전투적 민주주의의 논리’를 확산시키고 있음.
3. 2007년의 행동 방향: 좌파종식을 위한 자유통일 세력의 조직화와 교육
가. 보수세력의 문제점: 대중교육이 부족하여 젊은층의 참여가 적고 직업적 투사들이 부족함. 교육 없이는 지속적인 反좌파투쟁이 어려움. 좌파는 광범위한 대중조직을 갖고 있고 정권으로부터도 지원을 받고 있음.
나. 자유통일 세력의 조직화 논리: 대한민국은 ‘좌파종식에 의한 國家再建-자유통일-一流국가 건설’로 나아가야 하는 나라임. ‘자유통일-一流국가 건설’이야말로 수세적인 보수개념을 뛰어넘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목표이고 가치관임. 이를 ‘자유통일 세력’이라는 새로운 개념하에서 조직하고 교육하기 위하여 국민행동본부의 신문의견광고를 중요한 홍보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함.
다. 週1회 이상의 의견광고를 통해서 좌파종식과 자유민주체제 수호를 위한 논리를 지속적으로 알리고 이 광고를 매개로 하여 자유통일 세력의 조직화와 교육을 위한 대중집회와 실내강연을 개최하며 국민행동본부가 추진하는 전국적 ‘자유통일 교실’(또는 자유통일 사랑방) 설치, 운영계획을 지원한다. 이런 교육으로 배출되는 ‘자유투사들’이 자유통일과 일류국가 건설의 주력세력이 될 것임.
4. 자유통일 세력의 조직화와 교육프로그램
가. 유권자의 약30%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골수 보수층임. 이들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고, 대한민국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투지가 있음. 이들을 조직화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기회주의적 浮動層인 약50%의 중간층을 설득하고 약20%인 친북세력을 약화, 축소시켜야 함.
나. 약30%의 보수층을 ‘자유통일 세력’으로 조직화해야 함. 흩어져 있어 용기를 낼 수 없는 이들을 ‘자유통일 국민연합’(가칭)식의 범국민조직으로 묶어내기 위해서는 신문을 통한 광고, 대중집회 이외에 전국 방방곡곡에 ‘자유통일 교실’ 같은 조직을 만들어 강연, 교육을 통한 지속적 계몽을 해야 함. 좌파들의 선동에 속지 않은 국민들을 만드는 것이 좌파종식과 자유체제수호의 요체임.
5. 자유통일 세력의 조직과 교육을 위해선 對국민홍보수단이 있어야 함. 2007년엔 신문광고를 연간 약80회 이상으로 늘릴 계획임. 조선일보 사설면의 5단통 광고비가 1회에 약1000만원임. 000에서 한국의 운명이 결정될 내년에 약5억원(연간 50회 광고비)을 광고비로 지원해주시면 ‘자유통일 세력의 조직화와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출범시킬 수 있음 . 신문광고는 反좌파-자유민주의 논리 확산뿐 아니라 대중집회와 조직화 및 교육행사를 위한 중요한 선전수단으로서 자유통일세력의 조직화와 교육의 기본 인프라임.
1970년의 박정희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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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1-23, 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