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기자

아래 기사를 읽어보고도 박정희 대통령이 김정일類의 독재자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희망이 없는 인간이다.
아래 기사를 읽어보고도 박정희 대통령이 김정일類의 독재자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희망이 없는 인간이다. 군인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도 기자들이 최고 권력자를 얼마나 신랄하게 비판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북한기자가 아래 동아일보 기자의 1000분의 1만 써도 그는 一家3代가 몽땅 강제수용소로 끌려 가서 거기서 죽는다. 아래 글은 필자가 쓴 '박정희 傳記'중 한 매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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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중립

1963년 5代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중 국군은 대체로 중립을 지켰다. 당시 육군 방첩부대장은 정승화 준장이었다. 그는 지휘관들이 혁명 정부의 치적을 홍보하는 정도만 허용하고 투개표 부정은 못하게 했다.

민기식 육군참모총장은 일과 후 육본 강당에 장병들을 모아놓고 몇번 '윤보선 후보를 찍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질테니 박정희 후보를 찍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민기식은 박정희, 이주일(최고회의 부의 장)과 술자리에서 격의없이 속을 털어놓는 사이였다. 호주가인 세 사람은 백화수복 정종을 섭씨 40도로 데워 맥주컵에 부어마셨다.이 무렵 박의장은 이가 좋지 않아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래도 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기식은 '이런 술자리를 통해서 비로소 박의장 같은 분을 중심으로 한 10년은 해야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겠구 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민기식이 보니 박의장이 갖고 다니는 수첩에는 각부처에 지시한 일을 깨알같이 붉은 글씨로 메모해두고 점검하고 있었다.

의장실 벽면에는 한반도 지도가 있는데 곳곳에 색색으로 개발지의 표시가 되어 있었다. 수백 가지나 되는 사업들을 일일이 챙기고 있는 박의 장에게 감복한 민기식의 선거운동은 순전히 개인 차원의 지원이었다는 것이다. 민기식은 1, 2군 사령관에게는 아무 지시도 하지 않았으나 논산 훈련소장에게는 '중장으로 승진시켜줄테니 장병들과 훈련생들이 박정희 후보를 찍도록 교육하라'고 지시했다.

민기식은 미발표 회고록에서 '아마도 5대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운동을 한 군 인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정권이 바뀌면 형무소에 갈 각오를 했다'고 썼다.

10월12일 오후 동아일보 김성열 정치부장(뒤에 동아일보 사장 역임)은 박정희 후보측을 맡고 있던 유혁인 기자(뒤에 대통령 정무 수석비서관·작고)에게 '박후보가 유세를 마치면 인터뷰를 하되 이 질문을 꼭하라'고 지시했다.

질문은 '만약 낙선되어도 국민의 심판을 따르겠습니까'였다. 김 부장은 박정희가 선거에서 패배하면 과연 군부가 결과에 승복하겠 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으므로 박정희의 답은 뉴스거리라고 판단 했다. 몇시간 뒤 유혁인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박의장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타사 기자들이 몰려와 마 지막 질문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저같은 평기자는 안되고 부장께서 오시면 단독 회견에 응할 것 같습니다.'.

오후 7시 장충동 의장공관에 도착한 김부장은 응접실로 안내되 었다. 유혁인 기자는 미리 와 있었고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자리를 권했다. 잠시 후 유세장에서 돌아온 양복차림 그대로의 박 의장이 나타났다. 의자에 앉자마자 박정희는 쏘아붙였다.

'동아일보는 완전히 야당편이더군요. 부산 대구 유세 현장 취재 기자가 아무리 청중이 몇십만 명이라고 기사를 보내도 서울에 앉아 있는 정치부장이 마음대로 결정한다면서요?'.

김성열 부장은 속으로 '아 그 일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김 부장은 유세장의 청중수를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해서 유세장의 면 적을 미리 파악하고 항공사진을 찍어 평당 인원수를 추정하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애썼는데 박의장이 오해를 하고있구나 하고 그간의 과정을 설명했다.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보니 인파수가 주최측에서 발표하는 것보다 항상 적게 나왔다. 수십만 인파라고 발표된 것도 따져보면 그 10분의 1밖에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김성열은 이렇게 회고한다.

'대구 수성천변에서 박정희 후보가 유세를 할 때 이 지역의 중 요성을 감안하여 사회부 기자들도 별도로 보냈습니다. 신문 강판 직전에 내가 현장의 사회부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청중수를 물었더 니 한 5 - 6만명이라고 합디다. 정치부 팀에 물었더니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수십만으로 송고하는 걸 확인했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 사진부 팀장에게 '전번 윤보선 후보 때와 비교해서 어떠냐'고 물었 더니 '비슷합니다'라고 해요.

그래서 윤후보 유세 때 현장에 있었 던 여덟명의 기자들에게 일일이 물었습니다. 네 명은 윤보선 때가 많았다, 네 명은 지금이 더 많다고 해요. 마지막으로 대구 지사장 에게 물으니 전과 같다고 해서 '대체로 10만대는 넘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많다'고 써넣었어요. 다른 신문보다도 우리쪽 청중 수가 적었으니 박의장이 화를 낸 겁니다'.

박정희는 김부장의 설명을 듣더니 '동아일보는 공화당 집회를 과소평가한 거죠?'라고 또 따지고 들었다.

'항공사진까지 찍어서 정확을 기하려 했습니다.' '우리 공군에서도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걸로 청중수 문제가 일단락되는가 했더니 박정희는 다시 정색 을 하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왜 빨갱입니까.'.

박정희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왜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신문에 서 보도합니까'라고 다그쳤다. 어느 새 박의장의 손에는 담배가 들 려 있었고 김부장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김부장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평상시에 언론은 사건이나 뉴스에 대해서 일일이 검증하여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때 보도합니다만 선거기간중에는 후보들의 주장이나 말 그 자체가 뉴스입니다. 박의장께서 유세장에서 하신 말씀도 여과없이 보도했습니다.'.

재떨이

박정희 의장의 손이 담배와 함께 덜덜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나면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이때 춘천 유세에 연사로 참석했다가 돌아온 이만섭 전 동아일보 기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박의장은 이만섭을 보자 마치 원군을 얻은듯 언성을 높였다.

'그렇다고 나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박의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자개 재떨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곤 마루바닥에 쾅 하고 팽개쳤다. 박의장은 슬슬 걸어 방을 나가버렸다. 김성열동 아일보 정치부장은 박정희가 화장실에 간 줄 알았는데 10분이 지나도 돌 아오지 않았다. 이후락 실장만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안팎을 왔 다갔다 했다. 이실장은 '곧 나오실 겁니다'라고 했다. 김부장은 이실장 에게 말했다.

'회견하실 뜻이 없으면 그냥 가겠습니다. 신문사 체면도 있고, 제가 개인적으로 온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영감이 피곤하셔셔 좀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원수지간도 아닌데 인사나 하고 가시지요.'.

이후락의 안내를 받아 김부장이 들어간 곳은 응접실과 붙어 있는 침 실이었다. 박정희와 육영수가 서 있었다. 김부장이 박정희에게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라고 인사하니 박의장은 다가와서 말없이 손을 쑥 내밀 었다. 한복차림의 육영수는 거의 90도로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너무 무리하게 유세 계획을 짰지 뭐예요. 새벽부터 밤까지 강행군을 며칠씩 하니 저 양반이 너무 피곤해서 잠을 못이루는 날이 많았습니다. 오늘 너무 흥분하신 것 같으니 양해하세요.'.

김부장은 속으로 '야, 이렇게 얌전한 부인이 저 박의장 같이 성미급 한 남자를 만나 모진 고생을 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옆에 있던 박의장이 다시 고함을 치다시피했다.

'내가 형 한 사람 때문에 두고두고 공산당으로 몰리는데 내가 왜 공 산주의자요?'.

박정희는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김부장은 재빨리 침 실을 빠져나와 가파른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뒤따라 나온 육영 수는 김부장이 계단을 따라 내려와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까지 지켜보 면서 '미안합니다'란 뜻을 전했다. 김성열 부장은 공관을 나서면서 유혁 인기자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사로 써!'라고 했다. 유기자는 '부장님, 만일 신문에 그렇게 나가고 박의장이 낙선하면 광화문 사옥이 박살날 겁니다'라고 했다. 김성열은 '군대를 잘 알던 유혁인 기자는 겁 을냈고 군대를 잘 모르던 나는 오히려 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10월 14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박정희, 윤보선 두 후보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박정희와의 인터뷰 기사는 유혁인 기자가 끝마무리를 짓지못했던 12일 오후의 단독 회견 내용이었다. 춘천에서 대통령 선거유세 를 마치고 장충동 의장 공관으로 돌아온 박정희 후보가 유혁인 기자에게 직설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던 것이다.

'야당 사람들이 지금 별의 별 짓을 다해가며 선거 분위기를 흐리게 하고 있으니 개표가 끝날 때까지 또 무슨 장난을 할지 큰 걱정입니다.지금 야당 하는 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 개표할 때 뭣을 집어넣든가 또는 무슨짓을 해서라도 부정이다 뭐다 하지 않을 것 같소? 이번만은 무슨 일 이있더라도 공명선거를 하려고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야당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 아닙니까. 지금 그 사람 들한테는 법이 있습니까? 잡아가라고 떠들어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 다. 그저 꾹 참고만 있습니다만 선거만 끝나면 모조리 다 그만두지 않을 테요. 나는 지금 테러를 당하고 있어요. 그저 참고 있자니···이 나라 의 원수인 나를 빨갱이로 몰아치니···.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안가 리니 이게 바로 공산당수법과 다른 게 뭐요? 내가 빨갱이라면 이 나라가 2년 동안 빨갱이 치하에 있었단 말인가요?'.

박의장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피로가 역력한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기대어 '시험은 이제 끝났고 나는 내 실력껏 쳤으나 심사관들이 어떻게 점수를 매길지 뚜껑을 열어봐야 알지요'라고 했다. 그는 다시 이야기를 사상논쟁으로 돌려 '정적을 빨갱이로 모는 이 폐풍만은 이 기회에 뿌리 를 뽑아야지요'라고 했다.

10월13일 박정희 후보는 수원과 인천에서 마지막 선서유세를 했다. 박정희는 '지금 여건으로는 누가 집권해도 당장 잘 살게 할 수 없다'면 서 '내가 집권하면 여러분에게 근면과 내핍, 피땀 흘려 일할 것을 요구 할 것이다'고 말했다. 윤보선후보는 이날 수원, 천안 유세에서 '군정과 민정을 판가름하는 이 마당에 사상이 분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윤보선 후보의 민정당은 이날 경향신문 1949년2월17일자와 서울신문 2월18일자에 실렸던 '박정희 소령 무기 징역 선고' 관련 기사를 공개했다. 박정희 소령이 72명의 다른 장교들과 함께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 이후에 있었던 군부내 남로당 조직 수사에 걸려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유 죄선고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민정당의 이 폭로 내용을 호외로 만들어 전국적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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