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載弼(서재필)의 110년 전 대예언

"백성이 깨어나면 강대국 된다"

민족의 운명을 바꾼 徐載弼의 미국행

12월5일 저녁 뉴욕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플러싱 지구의 대동연회장에서 열린 강연회엔 700명의 청중들이 참석했다. 나는 ‘2007년 한국 再生의 길: 한국의 절망과 희망’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경청하는 태도나 질문의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 위기의식이 조국보다 더 깊다는 실감이 왔다. 다음날엔 약3시간을 달려 필라델피아市의 徐載弼 재단 강당으로 가서 200명이 넘는 동포들과 만났다. 徐載弼기념재단(Philip Jaison Memorial Foundation)의 정홍택 회장이 徐載弼(서재필) 선생과 관련된 秘話를 들려주고 자료를 건네주었다.
徐載弼은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한 뒤 金玉均의 영향을 받고 일본에 유학을 가서 사관생도 교육을 받고 왔다. 그는 만 20세의 나이에 金玉均이 일본 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1884년의 갑신정변에 가담했다. 3일天下 시절 그는 병조참판, 즉 국방차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3일천하는 서울에 주둔하던 淸軍에 의하여 무너지고 서재필은 일본으로 탈출했다. 그의 가족은 역적 집안으로 규정되어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당했다. 일본에서 냉대를 받은 서재필은 ‘요코하마에 살던 한두 사람의 미국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굶어죽었거나 얼어죽었을 것이다’(서재필 증언). 그는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朴泳孝, 徐光範과 함께 1885년 5월26일 시티 오브 페킹號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향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 출신의 유명한 정치학자 李庭植씨는 2003년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이란 책에서 그가 일본에서 냉대를 받고 미국으로 간 것은 그와 한국을 위해서 轉禍爲福(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썼다. 그가 말한 福은 徐載弼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미국과 만났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실용정신을 배우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기자는 서재필 재단 강당에서 강연을 하고 호텔에 돌아와서 李庭植 교수의 名著를 읽어갔다.
나는 약 110년 전 조국에서 쫓겨난 21세의 망명자가 한 부호의 후원을 받고 필라델리아가 속한 펜실베이니어주의 작은 도시 윌크스베리에 정착한 뒤 힐멘 아카데미라는 중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가 공부하던 때의 고독과 울분을 생각했다. 徐載弼의 생애에서 느껴지는 그러한 悲感은 비슷한 행로를 걸은 李承晩의 생애에서 우러나는 무서운 자기확신과 권력의지에 비교된다.

왜 한국인은 자연스럽게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했나?

1948년 건국에 즈음하여 反共 우파 세력이 헌법을 만들 때 아무 이견 없이 거의 만장일치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헌법의 기본 가치로 받아들인 것은 신비하기까지 하다. 헌법 제정에 미 軍政이 개입하여 미국식 정치체제를 강요했다는 증거는 없다. 制憲과정에서 王政 복고나 사회민주주의, 또는 국가주도의 개획경제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건국세대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결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경험이 全無한 나라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건국지도층과 국민들 마음속에 자유와 인권의 소중함에 대한 合意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李庭植 교수는 徐載弼을 평하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이라고 규정했다. 이 씨앗 속엔 徐載弼의 강연을 듣고 감동하여 民權의 소중함을 알았고 끝내는 徐載弼을 뛰어넘는 거대한 역사적 업적을 남기게 된 李承晩이 포함될 것이다. 徐載弼, 李承晩 두 사람이 미국에서 배운 기독교 문명과 거기서 파생된 민주주의와 실용사상을 한국에 전파한 기간이 徐載弼이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되는 1895년부터 치면 해방 때까지 약 50년이었다. 이 두 偉人의 苦鬪에 의하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자유와 인권과 실용의 정신이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건국정신, 헌법정신으로 스며들어 대한민국의 國體와 政體를 결정하게 된 것이 아닐까?
지난 60년간 한국인이 건국-호국-산업화-민주화의 4단계 국민국가건설과정, 또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유통일의 關門을 넘어서면 一流국가 건설이 가능하다는 희망과 비전을 갖게 된 것은 두 巨人 徐載弼, 李承晩에 힘입은 바 크다. 우리가 세계 10대 國力을 가진 국가가 된 원동력은 근면 성실한 민족적 자질, 李承晩 朴正熙로 대표되는 위대한 지도자, 자유민주 체제, 韓美동맹이란 4대 조건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것이다. 李承晩-자유민주-韓美동맹이란 번영의 軸(축)은 이곳 펜실베이니아에서 살면서 미국의 번영과 조국의 참상을 놓고 고민하고 연구했던 조선의 젊은 망명객 徐載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은 李庭植 교수의 徐載弼 연구서에 실린 한 대목 때문이었다.

절망 속에서 강대국의 꿈을 보다

徐載弼은 필라델피아, 워싱턴에서 살던 10년간 의사가 되고 미국여자와 결혼하고 드디어 미국시민이 되었다. 그는 淸日전쟁으로 일본이 이기고 朴泳孝 등 개화파가 집권하자 1895년 크리스마스 날 인천을 통해서 귀국한다. 그는 이듬해 한 영문잡지에 쓴 ‘조선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14년 만에 돌아오면서 나라의 형편이 좀 좋아졌을 것을 기대하였는데, 오히려 크게 실망했다. 나의 심장에서 피가 터져 나오도록 통분케 하는 것은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다>
그는 이 글에서 ‘교육’을 강조했다. 교육으로써 백성들과 젊은이들을 깨우치는 것이 나라를 융성케 하는 지름길이란 것이다.
<젊은 세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흡수하고 크리스천 문명에 숙달하게 되면 얼마나 큰 혜택을 받게 될지 모른다.>
徐載弼은 조선의 당시 상황에 실망했지만 기독교 문명, 즉 자유민주주의와 과학ㆍ합리ㆍ실용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아 민중이 깨어나면 워낙 민족의 자질이 뛰어나므로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 조선은 절망적으로 보이지만 나는 조선이 장차 동양의 강대국중 하나(a power)가 될 것을 확신한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들을 가르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구한말의 개혁ㆍ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학교 출판부)의 著者 李庭植 교수 (펜실베이니아 대학 명예교수)는 “徐씨의 ‘강대국 운운’하는 발언은 빈말이 아니라 고국에서 투신활약한 것을 뒷받침 해준 신조”였다고 지적했다.
<이 글(강대국 운운)을 읽은 독자들은 폭소 아니면 冷笑로 대했을 것이지만 서재필에겐 근거가 있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두뇌가 과학이나 예술의 어느 분야라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사고방식이 매우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서재필은 또 조선반도엔 자원이 충분하고 전국적으로 관리들의 수가 너무나 많으므로 3분의 1로 줄여도 정부 운영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관리를 줄여서 남은 財源으로 교육 등 각종 사업을 운영할 수 있다>
徐載弼은 ‘조선의 절망’속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 셈이다. 그는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확신했고 이 우수성이 ‘기독교적 문명’과 접목되기만 하면, 그리하여 발전을 누르고 있는 부패한 守舊 지배층을 개혁하기만 하면 민족적 에너지가 대폭발할 것임을 예감했던 것이다.
이 徐載弼의 생각을 이어받은 여러 제자중 한 사람이 李承晩이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徐씨의 강연을 듣고 감동했다. 李承晩은 “기독교 국가 시민들은 그들의 통치자들의 억압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으로” 듣고 가슴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1898년 고종은 徐載弼을 다시 추방하고 ‘독립신문’을 폐간시키고 親露 정권의 전횡 밑에서 王權강화에 열중했으나, 李承晩은 徐씨가 만든 독립협회의 민중 운동 시기, 즉 만민공동회 당시(1898)에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다. 그는 ‘매일신문’ ‘뎨국신문’ 창간을 주도했고 反고종 역모에 걸려 옥살이를 하는 중에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예수를 믿어야 나라가 산다”고 하는 정치ㆍ종교관을 갖게 되었다 (李庭植 교수著 ‘구한말의 개혁ㆍ독립투사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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