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대중정치인 李承晩
李承晩은 獄中학교를 만들어 죄수들을 교육했다. 출감한 뒤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쓴 논설에서 미래의 건국 대통령은 한국 민중의 우수성과 지배층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가 대륙횡단 열차편으로 워싱턴으로 가고 있을 때에 「帝國新聞」에 記名논설이 실렸다. 1904년 12월29일자와 30일자에 연속으로 실린 「나라의 폐단을 고칠 일」이라는 글이었다.
李承晩은 ‘근래에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인종이 걸러서 당초에 어찌할 수 없다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 하오’라고 전제한 다음, 그 특유의 논법에 따라 국민을 「상등인」과 「하등인」으로 구분하여 외국인들과 비교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하등인」은 외국 「하등인」에 비하면 師父라고 할 만큼 우수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하등인」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도 교육을 받은 외국의 「하등인」보다 양순하고 성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상등인」은 다른 나라 「상등인」에 비하여 ‘천양지판으로’떨어진다면서, 그 이유는 우리나라 「상등인」들이 받아온 敎育 때문이라고 했다. 李承晩은 전통교육의 폐단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그것은 첫째 태고적 옛것을 숭상하는 것, 둘째 虛誕(허탄:거짓되고 미덥지 못함)함을 숭상하는 것, 셋째 인심을 결박하는 것, 넷째 큰 것을 섬기는 주의, 다섯째 이른바 도덕상 주의, 곧 실상이 없고 빈 생각만 숭상하는 것이었다.
이 「논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장래 여망은 우리 용준한 평민에게 달렸고 전혀 상등인에게 있지 아니하며, 우리 청년들에게 달렸고 老成한 이에게 있지 아니한지라>
徐載弼은 미국 건국의 요람이자 남북전쟁의 격전지였던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살면서 미국의 건국정신과 자유와 민권의 행동철학을 실감 있게 터득했을 것이다. 李承晩은 권력의 중심지 워싱턴에 근거지를 둔 때문이기도 하지만 徐載弼보다는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조국의 문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大에서 석사, 프린스턴大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중립에 관한 연구」는 ‘戰時 중립이론의 발전 과정’을 추적한 일류 논문이다. 미국이 戰時에도 非교전국이 무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여 시장의 자유를 확대시켜 왔다는 것이 논문의 요지이다.
李承晩은 미국에서 명문대학을 나왔고 동양적 교양에서도 일류 지식인이었으나 엘리트 의식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의 개혁적, 반골적 기질이 李박사를 대중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일시 귀국한 李박사는 YMCA의 간사로 일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강연여행이었다. 日帝 시대였으므로 李承晩의 강연 내용은 주로 기독교를 傳道(전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1911년의 여름엔 한 달 이상 전국을 돌아다녔다. 3,400km를 다녔고, 33회의 집회에서 7,533명의 학생들을 만났다. 李 박사를 본 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나도 그와 같은 인물이 되어야겠다.”면서 공부하고 유학을 갔다. 이때 조선인들 마음속에 심어진 ‘李承晩 박사像’이 그를 민족의 지도자, 건국의 아버지로 만들게 된다. 대중을 경멸하지 않고 그 대중의 각성을 통해서 권력을 잡고 역사를 바꿔야 한다고 확신했다는 점에서 李承晩은 한국 최초의 대중 정치인이다.
헌법 속으로 들어간 기독교적 민주주의
徐載弼, 李承晩 두 사람은 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만났다. 두 사람은 미국의 역사와 文化를 현장에서 호흡하면서 ’기독교적 민주주의’를 신념화했다.
李承晩이 공산주의의 기만성을 그 어떤 한국인보다 먼저 꿰뚫어 본 글, 徐載弼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이 개인의 자유라고 확신한 글을 읽어보면 두 분은 공산주의의 악마성과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대해 맨 먼저 깨달음을 얻은 점에서 先覺者임을 알 수 있다.
徐載弼, 李承晩은 교육과 언론 사업을 통해 국민 각성을 추구한 점에서는 같으나 실천의 문제에서는 人生 行路가 달라졌다.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자가 되고 기업도 운영하면서 ‘미국화’ 되어갔다. 그의 민주주의論도 미국적인, 보편적인 원리란 면이 강했다. 3ㆍ1운동 이후 전개된 새로운 한반도 정세 속에서 徐載弼은 서서히 역사의 主流에서 밀려나면서 조국과의 접촉도 줄었고 한국어도 거의 잊었다. 徐載弼은 독립운동가의 역할에 머물렀다.
李承晩은 애국심과 기독교 정신을 자기 확신과 권력 의지에 연관시켜가면서 독립과 건국의 실천에 매달렸다. 개혁운동가에 머물지 않고 建國의 주인공役을 자임했다. 기본적으로 徐載弼은 교육가였고 李承晩은 정치인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이야말로 徐載弼, 李承晩의 꿈이 담긴 ‘自由민주의 한국판 권리장전’이다. 徐, 李 두 사람을 매개로 하여, 또 미국인 선교사의 중계로 한국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손을 잡았다. 이 관계는 해방, 건국, 6ㆍ25를 거치면서 韓美동맹 관계로 굳어졌고 이 조건이 한국을 一流국가의 문턱까지 밀어올렸다. 대한민국 헌법과 건국과정에서 李承晩 대통령은 기독교적인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의 自主性을 내세우고 북한의 김일성 정권을 사대매국집단으로 단정했다. 헌법에 반영된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유일 합법성은 감정적 뽐냄이 아니요, 선언적 虛言도 아닌, 自由에 기초한 建國의 당연한 자리매김이었다.
李庭植 교수는 徐載弼이 19세기 말에 “조선이 장차 동양의 강대국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돈키호테와 같은 착상’을 한 것은 10년의 미국 생활에서 터득했던 민족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의 ‘돈키호테 같은 착상’은 세계 10大 경제대국, 삶의 질 세계 26위의 대한민국으로 결실됨으로써 위대한 예언이 되었다.
하지만 徐씨가 지적했던 ‘지배층’과 관리집단의 문제는 남아 있다. 국군 장교단 출신 엘리트들의 역할이 끝난 1993년 이후 정권을 장악한 자칭 민주투사들은 徐載弼을 절망시켰던 조선조의 守舊的 지배층의 행태를 보이면서 민족혼을 망가뜨리고 민족의 저력을 탕진시키면서 一流국가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 명분론의 포로가 되어 위선적이고 당파적이며 분열적 행태를 보이는 이들은 그 속성이 자유민주적 실용주의보다는 아직도 조선조 상태로 남아 있는 북한의 守舊좌파와 더 가깝다. 金正日 - 金大中 - 盧武鉉의 守舊좌파 연합은 이런 공통점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일종의 이념적 공동운명체가 되어 자유통일과 일류국가 건설로 매진해야 할 한국의 미래를 막고 있는 것이다.
主體광신교 對 기독교의 싸움
徐載弼과 李承晩이 한국에 소개했던 기독교적 민주주의가 대표하는 가치, 사랑ㆍ화합ㆍ진실ㆍ평등ㆍ자유ㆍ겸손은 전부가 공산주의의 치유불가능한 생리인 증오ㆍ분열ㆍ거짓ㆍ억압ㆍ독선ㆍ오만과 정반대이다. 한반도의 무장ㆍ이념 대결 관계는 그 본질이 主體광신교와 기독교적 민주주의의 대결이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조국을 걱정하면서 애국운동에 나선 이들은 거의가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이비 좌파와의 대결을 金正日이란 사탄의 세력이 지휘하는 惡黨들과의 靈的 싸움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집단적 행태를 분석하면 위대한 성취와 병적인 타락이 混在하여 분열증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정권은 남침 전과가 있는 戰犯집단이다. 이 위험한 집단이 핵실험을 함으로써 한국에 대해 결정적 우위(優位)에 섰다. 그럼에도 집권세력은 핵무장 저지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UNㆍ미국과 손잡고 김정일에 압력을 넣는 일에도 협조하지 않는다. 국민들도 자신들의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안보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태평이다.
300만 명이 죽은 6ㆍ25 전쟁, 또 300만이 굶어죽은 북한의 대기근, 그리고 소련ㆍ동구 공산권의 해체로써 사회주의의 실패가 증명되었는데도 그 직후 한국인은 선거를 통해서 親共집단, 즉 사이비 守舊좌파를 집권세력으로 만들었다. 이 좌파세력의 핵심들은 사회주의 중에서도 최악의 變種인 김일성식 전체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대한민국보다 북한정권을 더 높게 평가하고, 동맹국을 主敵보다 더 미워하며, 대한민국 수호세력을 증오한다. 反헌법, 反국가적 이념에 영혼을 판 집단에게 정권을 넘겨준 유권자들의 정신도 분명 정상이 아니다.
한국은 북한보다 경제력이 약 100배나 된다. 한국은 주한미군이 있으나, 북한은 외국군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이런 압도적 國力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북한정권의 공갈에 겁을 내고 굴복하고 있다. 야윈 늑대에 뜯어 먹히는 ‘살찐 돼지’같은 나라이다. 김정일 정권의 위협에 대해서 ‘一戰不辭’나 ‘우리도 핵개발하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 정도이다. 김정일 세력이 남한의 친구들과 작당하여 발신한 가짜 평화론과 가짜 민족주의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여 잘 살기는 하지만 잘 속고 자존심ㆍ책임감ㆍ용기가 없는 집단이 한국인이다. 한국인들의 영혼이 망가진 탓이다. 인간과 집단의 품격과 윤리를 규정하고 장래의 成敗를 결정케 하는 것은 영혼이고 정신력이다.
북한정권은 지난 60년간 굶어가면서도 끈질긴 對南赤化 工作을 추진하여 한국인들의 뇌수와 심장에 자멸적인 바이러스를 심어 놓는데 성공했다. 어떤 조직이나 인간을 파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미치게 하는 것인데, 이에 성공한 셈이다. 그들은 많은 한국인이 원래 가진 위선성, 명분론, 열등감, 분열성을 자극하여 이를 암흑의 에너지, 파괴적 動力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악마에 영혼을 팔아넘긴 한국인들
한국인의 집단적 행태를 분석하면 위대한 성취와 병적인 타락이 混在하여 분열증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정권은 남침 전과가 있는 戰犯집단이다. 이 위험한 집단이 핵실험을 하여 한국에 대해 결정적 우위(優位)에 섰다. 그럼에도 집권세력은 핵무장 저지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UNㆍ미국과 손잡고 김정일에 압력을 넣는 일에도 협조하지 않는다. 국민들도 자신들의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안보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태평이다.
300만 명이 죽은 6ㆍ25 전쟁, 또 300만이 굶어죽은 북한의 대 기근, 그리고 소련ㆍ동구 공산권의 해체로써 사회주의의 실패가 증명되었는데도 그 직후 한국인은 선거를 통해서 親共집단, 즉 사이비 守舊좌파를 집권세력으로 만들었다. 이 세력은 사회주의 중에서도 최악의 변종인 김일성식 전체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대한민국보다 북한정권을 더 높게 평가하고, 동맹국을 주적보다 더 미워하며, 대한민국 수호세력을 증오한다. 反헌법, 反국가적 이념에 영혼을 판 반역집단에게 정권을 넘겨준 유권자들의 정신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한국은 북한보다 경제력이 약 100배나 된다. 한국은 주한미군이 있으나, 북한은 외국군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이런 압도적 國力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북한정권의 공갈에 겁을 내고 굴복하고 있다. 야윈 늑대에 뜯어 먹히는 ‘살찐 돼지’같은 나라이다. 김정일 정권의 위협에 대해서 ‘一戰不辭’나 ‘우리도 핵개발하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 정도이다.
열심히 일하여 잘 살기는 하지만 잘 속고 자존심ㆍ책임감ㆍ용기가 없는 집단이 한국인이다. 한국인들의 영혼이 망가진 탓이다. 인간과 집단의 품격과 윤리를 규정하고 장래의 成敗를 결정케 하는 것은 영혼이고 정신력이다.
북한정권은 지난 60년간 굶어가면서도 끈질긴 對南赤化 工作을 추진하여 한국인들의 뇌수와 심장에 바이러스를 심어 놓는 데 성공했다. 어떤 조직이나 인간을 파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미치게 하는 것인데, 여기에 성공한 셈이다. 많은 한국인이 원래 가진 위선성, 명분론, 열등감, 분열성을 자극하여 이를 암흑의 에너지, 파괴적 動力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뉴욕에서 만난 많은 기독교인들은 한국인들이 악마에 영혼을 판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개탄했다. 그 증거는 한국인들이 선거를 통해서 從金집단을 집권세력으로 뽑아준 점이란 것이었다.
“생명을 바쳐 싸우라”
徐載弼은 1947년 美군정당국의 최고 지휘관이던 하지 사령관의 고문으로 초대받아 다시 한국에 왔다. 사사건건 李承晩과 대립하던 하지는 徐載弼을 이용하여 李承晩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80세를 넘긴 徐載弼은 그때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건국에 매진하던 李承晩 세력은 徐載弼 추대운동설에 발끈했다. 대한민국 건국 선언이 1948년 8월15일에 있었고 徐載弼은 9월11일에 다시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다. 출국 두 주일 전 그를 찾아간 조선일보 기자가 “끝으로 조선인민에게 부탁하고싶은 말은?”하고 물었을 때 徐載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라는 것이요. 정부는 인민의 從僕(종복)이란 것을 잊어선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他人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 소원이다”
기자도 뉴욕, 필라델피아 강연에서 “자유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를 마시면서 자라는 나무이다. 2007년 大選에서 또 국민들을 속이고 좌파정권을 만들기 위해서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 세력이 목숨을 걸고 나오는데 대한민국 세력이 한나라당과 대통령 지망생들처럼 정면승부를 기피하면 또 진다. 싸우는 자유세력을 대표할 수 있는 선명 애국정당이 만들어져야 한나라당과 경쟁, 견제하면서 한나라당을 오른쪽으로 당길 수 있고 자유진영의 전체적인 勢를 불릴 수 있다. 이념이 가장 큰 전략이어야 하고 白衣종군, 大同단결, 分進合擊이 우리의 행동원칙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徐載弼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죽으러 돌아온 사람’ 같은 인상을 풍겼다고 한다. ‘파쟁을 계속하는 한국정치인들에게 실망했고 자신을 초청하여 갔던 미국 정부 정책에도 환멸을 느꼈다’는 것이다(李庭植 교수의 上記 저서). 귀국한 지 두 해 뒤 6.25 남침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더욱 낙담했을 것이다. 1951년 1월5일, 그 하루 전 서울이 중공군 손에 떨어지고 트루먼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철군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을 때 徐載弼은 숨을 거두었다. 만 86세였다.
徐載弼은 ‘회고 갑신정변’이란 책에서 자신의 일생을 결정해준 그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조국이 청국의 종주권하에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치욕을 벗어나 조선도 세계 각국 속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일원이 될까 하여 밤낮으로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李庭植 교수는 이 격분이 金玉均을 개혁가로 만들었고 徐載弼의 일생을 지배했다고 평했다. 李承晩도 그렇지만 徐載弼의 생애를 지배하고 인도한 것은 조국을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분노와 조선인에 대한 동정과 그 저력에 대한 희망이었다. 기자도 비슷한 분노와 희망을 담아 이런 글을 나의 홈페이지에 올린 적이 있다.
"자기 권리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라"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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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2-11, 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