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대한민국 再生의 길

徐載弼의 유언: “자유를 지키려거든 생명을 걸고 싸워라”
*月刊朝鮮 2007년 1월호

여행기: 2007년 대한민국 再生의 길

김정일편인가, 대한민국편인가?

-徐載弼과 李承晩이 미국과 만나 자유민주주의를 한국에 도입한 것이 자유통일을 넘어서 一流국가로 가는 궤도를 깔았다. 조종실이 반역적 세력에 의하여 점거되어 일시 탈선한 대한민국을 향해 在美교포들이 제2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徐載弼의 유언: “자유를 지키려거든 생명을 걸고 싸워라”

趙甲濟(月刊朝鮮 편집위원. 조갑제닷컴 대표)



삶의 질, 선진국 수준으로

지난 12월 초 미국 뉴욕의 在美애국단체로부터 강연초대를 받은 나는 태평양을 건너는 점보機 안에서 심심풀이로 통계집을 훑어보았다. 올해 가을 UNDP(유엔개발기구)가 발표한 세계 180여개국의 인간개발지수, 즉 삶의 질 랭킹에 따르면 한국은 26위이다. 포르투갈, 헝가리, 체코보다도 삶의 질이 높은 선진국 수준이다. 이 통계에 따르면 노무현 세력의 저주를 집중적으로 받아온 한국은 중국과 함께 지난 30년간 삶의 질을 가장 크게 향상시킨 나라이다. 미국의 인권단체 프리덤 하우스가 발표하는 정치적 자유지수 랭킹에서도 한국은 거의 유럽수준의 ‘자유국가’로 분류된다. 올해 한국의 무역액은 6000억 달러를 돌파한다. 이는 한국의 국민총생산과 함께 세계 12위권이다. 북한의 올해 추정 무역액 30억 달러에 비교하면 약200배이다. 나는 한국의 국민총생산이 북한의 약100배라고 추정한다.
지난 25년간 한국사회의 변화는 눈부시다. 1980년엔 서비스업 종사자가 경제활동인구의 43.5%였는데 지금은 73.5%이다. 25년 전 22.5%이던 제조업 종사자는 18.6%, 34%이던 농어민은 7.9%로 줄었다. 한국인의 근로시간은 週當 45.4시간으로서 대만의 44.3시간, 일본의 43.5시간, 미국의 40.7시간에 비하여 아직 길다.
자동차 생산량은 세계 5위, 造船은 세계 1위, 전자는 3등, 제철(製鐵)은 4위이다. PC보유대수는 인구당 세계4위이다. 포춘지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500대 기업 랭킹에 들어가는 기업수의 국별 순위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중국, 네덜란드, 캐나다에 이어 세계9위이다. 10위인 이탈리아보다도 세계적 기업이 많다는 통계이다. 한 나라의 생산성과 생동성을 보여주는 에너지 소비량 부문에서 한국은 10위권이다. 電力 생산량은 세계 9위, 석유소비량은 세계 6위, 총에너지 소비량은 8위이다.

여윈 늑대와 살찐 돼지

한국은 國力의 규모면에서는 세계 10위권, 삶의 질과 관련된 통계에선 20~30위권이다. 대만, 이스라엘과 함께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까지 온 나라가 한국이다. 非기독교 서구 국가로선 유일하게 일본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해 있다. 아직 미래가 결정되지 않는 나라 한국은 자유통일이란 관문을 통과할 때만이 일류국가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나라가 지금 赤化를 걱정하고 있다. 나를 미국으로 불러낸 것도 그런 걱정에 휩싸여 있는 在美동포 사회였다. 國力면에선 100분의 1이고 주한미군과 같은 동맹군도 없는 ‘야윈 늑대’ 같은 북한정권을 겁내면서 그들의 공갈에 끌려가는 ‘살찐 돼지’ 같은 한국은 “그 영혼이 赤化세력에 의하여 망가졌기 때문에 아무리 허우대가 좋아도 자살의 길을 달려갈 수밖에 없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뉴욕엔 많았다.
뉴욕에서 큰 교회를 운영하는 한 목사는 북한을 구석구석 다녀본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1995년 이후 5년간 북한 주민 약 300만 명이 굶어죽은 것은 金正日에 의한 인구 과잉 해소 정책이었다”고.
“식량 담당 고위 간부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데는 年間 백만 톤이 부족합니다. 인구를 줄여야 해결이 됩니다’라고. 저는 북한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지방까지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산비탈을 전부 밭으로 만들어 나름대로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북한이 연간 부족분 백만 톤의 식량을 수입하면 굶어 죽는 사람이 없어집니다. 김정일이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해외 은행에 묻어두고 식량 수입에 쓰지 않았던 것은 고의로 주민들을 굶겨 죽임으로써 인구를 줄이려 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2년前 탈북한 고위급 기술자의 증언이었다.
“북한의 농업이 무너져 수백만이 굶어죽는 가장 큰 이유는 흥남 비료공장의 老朽化(노후화)로 생산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내각에서 시설 현대화에 2억 달러만 들이면 생산량을 회복할 수 있다는 건의서를 여러 번 올렸으나 김정일은 묵살했다. 자꾸 현대화 건의가 올라오니 김정일 측근이 책임자를 불러서 가만히 말하기를 ‘식량문제는 지도자 동지의 중요한 전략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김정일이 고의로 식량 부족 사태를 일으켜 주민들을 통제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이다”
앞의 목사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死後 권력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대기근 사태를 일으켜 인구를 줄이면서 소위 불만ㆍ불평분자들도 일소하려 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목사와 똑같은 주장을 한 사람이 또 있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赤旗)의 평양 특파원을 지냈던 하기와라 료氏이다. 그는 ‘饑餓살인’ 이란 말을 써가면서 김정일이 고의로 反黨분자들을 숙청하는 수단으로 大饑饉(대기근) 사태를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위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하는 통계도 있다. 북한 전문가 나티오스氏가 쓴 ‘북한의 대기근’에 따르면 1999년 무렵 북한 사람들의 영양 상태를 분석했더니 불만계층이 가장 나쁘고 다음이 동요계층이고 충성계층은 가장 좋았다는 것이다. 이는 대기근이 정치적 탄압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金大中 - 盧武鉉 정부 시절 8년간 남한에서 북한으로 들어간 金品을 다 합치면 약100억 달러가 될 것이다. 연간 식량 부족분 100만t을 수입하는 데는 5~7억 달러이면 족하다. 100억 달러의 일부만 거기에 썼더라도 북한의 식량 문제는 해결 되었다. 김정일은 남한에서 들어온 돈과 해외에 숨겨둔 비자금을 식량수입에 쓰지 않았다. 100억 달러어치가 北으로 들어간 기간에 탈북자는 늘어났다. 100억 달러가 북한 주민이 아닌 黨과 軍에 들어가 군사력 강화, 핵개발, 對南공작, 지배층의 호화판 생활에 쓰였다는 有力한 傍證이다.

제2의 독립운동

앞의 목사는 북한을 둘러보고 이 체제가 지탱되는 이유를 알았다고 했다. 첫째는 새빨간 거짓말. 김일성이 북한을 해방시켰고 6ㆍ25 때 남한이 북침했다는 식의 180도 거짓말이 조직적으로 교육되니 진실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빨갱이란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았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집단이라고 빨갱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아닐까요? 아이들이 태어나면 노동당이 이들을 빼앗아 탁아소에 집어넣고 새빨간 거짓말을 주입하면서 로봇으로 키워 온 셈이지요. 저는 북한 체제가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는 북한은 어린 시절의 교육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점을 믿는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굶어가면서도 어린이들을 김일성ㆍ김정일의 아이들, 즉 혁명아로 키웠고 남한의 386세대를 교육하여 대한민국의 赤化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赤化되어가는 게 아니라 이미 赤化된 나라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권이 赤化되고 국민들의 영혼이 망가졌으면 나라가 赤化된 것이 아닙니까. 절박한 인식이 있어야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나라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在美동포들이 ‘제2의 독립운동’을 할 때가 온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기자를 초청한 뉴욕 고려서적 崔應杓 사장은 황해도 출신으로서 20대에 출판사 사장을 지냈고 1950~60년대에 날렸던 신태양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다. 30여년 전 미국으로 건너와서 책을 팔아 돈을 번 사람이다. 뉴욕 지방에서 그가 경영하는 세 책방은 서울 도심의 대형서점 규모이다. 이렇게 큰 서점을 自國서적으로 꽉 채울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아시아에선 일본과 한국 정도이다. 70대 후반인 崔 사장은 지난 11월말 韓美자유수호운동본부를 결성했다. 그는 “밖으로 나서지 않고 얌전하게 기업을 하시던 분이 왜 이런 일을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는,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근사한 나라의 어리석은 국민들을 속여서 공짜로 소매치기하려는 세력에 대한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늘그막에 자유수호 투쟁전선에 나서게 되었다고 말했다.
'벌써 천 명 이상의 동지들을 확보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호응이 빠른 것은 위기감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특히 건국과 호국에 참여했던 분들이 적극적입니다”
기자는 崔 사장 및 그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한국노총 전 사무총장 尹永濟 회장(白凡金九선생기념사업회 뉴욕지회장)과 5일 동안 동행하면서 뉴욕, 필라델피아, 뉴저지, 그리고 현지 방송국들을 돌아다녔다. 스무 시간도 넘는 두 분과의 車中대화를 통해서 나는 독립투사를 만난 기분이 들게 되었다. 崔 사장은 빨갱이들의 새빨간 거짓말에 격분하고 있었다.
“해방되었을 때는 북한에서 한 소년의 눈으로 공산당과 소련군의 만행을 보았고 6월25일 새벽엔 개성에서 공부하던 중학생으로서 시내까지 거의 무혈입성하던 인민군을 구경했었습니다. 6.25 전란중엔 제가 폭격으로 다리를 다쳤을 때 미군 트럭이 병원으로 실어주어 살았습니다. 전투중인데도 미군 트럭 운전병이 다친 다리에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차를 소걸음으로 몰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김정일보다 미국을 더 미워할 정도로 미쳐버렸고 여기 미주사회에서도 좌익들이 설치니 저라도 나서서 싸워야지요”
뉴욕에서 만난 교포들중에는 “제2의 독립투쟁으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는 것이 1차 독립운동이었다면 좌익한테 넘어간 대한민국을 탈환하려는 지금의 운동이 제2의 독립투쟁이란 것이다. 한미자유수호운동본부는 2007년엔 ‘조국을 향한 편지 보내기’ ‘대통령 선거에서 현명한 판단을 하도록 설득하는 전화걸기 운동’ ‘在美동포 救國선언’ 등 구체적인 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민족의 운명을 바꾼 徐載弼의 미국행

12월5일 저녁 뉴욕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플러싱 지구의 대동연회장에서 열린 강연회엔 700명의 청중들이 참석했다. 나는 ‘2007년 한국 再生의 길: 한국의 절망과 희망’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경청하는 태도나 질문의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 위기의식이 조국보다 더 깊다는 실감이 왔다. 다음날엔 약3시간을 달려 필라델피아市의 徐載弼 재단 강당으로 가서 200명이 넘는 동포들과 만났다. 徐載弼기념재단(Philip Jaison Memorial Foundation)의 정홍택 회장이 徐載弼(서재필) 선생과 관련된 秘話를 들려주고 자료를 건네주었다.
徐載弼은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한 뒤 金玉均의 영향을 받고 일본에 유학을 가서 사관생도 교육을 받고 왔다. 그는 만 20세의 나이에 金玉均이 일본 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1884년의 갑신정변에 가담했다. 3일天下 시절 그는 병조참판, 즉 국방차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3일천하는 서울에 주둔하던 淸軍에 의하여 무너지고 서재필은 일본으로 탈출했다. 그의 가족은 역적 집안으로 규정되어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당했다. 일본에서 냉대를 받은 서재필은 ‘요코하마에 살던 한두 사람의 미국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굶어죽었거나 얼어죽었을 것이다’(서재필 증언). 그는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朴泳孝, 徐光範과 함께 1885년 5월26일 시티 오브 페킹號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향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 출신의 유명한 정치학자 李庭植씨는 2003년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이란 책에서 그가 일본에서 냉대를 받고 미국으로 간 것은 그와 한국을 위해서 轉禍爲福(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썼다. 그가 말한 福은 徐載弼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미국과 만났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실용정신을 배우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기자는 서재필 재단 강당에서 강연을 하고 호텔에 돌아와서 李庭植 교수의 名著을 읽어갔다.
나는 약110년 전 조국에서 쫓겨난 21세의 망명자가 한 부호의 후원을 받고 필라델리아가 속한 펜실베이니어주의 작은 도시 윌크스베리에 정착한 뒤 힐멘 아카데미라는 중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가 공부하던 때의 고독과 울분을 생각했다. 徐載弼의 생애에서 느껴지는 그러한 悲感은 비슷한 행로를 걸은 李承晩의 생애에서 우러나는 무서운 자기확신과 권력의지에 비교된다.

왜 한국인은 자연스럽게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했나?

1948년 건국에 즈음하여 反共 우파 세력이 헌법을 만들 때 아무 이견 없이 거의 만장일치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헌법의 기본 가치로 받아들인 것은 신비하기까지 하다. 헌법 제정에 미 軍政이 개입하여 미국식 정치체제를 강요했다는 증거는 없다. 制憲과정에서 王政 복고나 사회민주주의, 또는 국가주도의 개획경제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건국세대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결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경험이 全無한 나라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건국지도층과 국민들 마음속에 자유와 인권의 소중함에 대한 合意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李庭植 교수는 徐載弼을 평하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이라고 규정했다. 이 씨앗 속엔 徐載弼의 강연을 듣고 감동하여 民權의 소중함을 알았고 끝내는 徐載弼을 뛰어넘는 거대한 역사적 업적을 남기게 된 李承晩이 포함될 것이다. 徐載弼, 李承晩 두 사람이 미국에서 배운 기독교 문명과 거기서 파생된 민주주의와 실용사상을 한국에 전파한 기간이 徐載弼이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되는 1895년부터 치면 해방 때까지 약50년이었다. 이 두 偉人의 苦鬪에 의하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자유와 인권과 실용의 정신이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건국정신, 헌법정신으로 스며들어 대한민국의 國體와 政體를 결정하게 된 것이 아닐까?
지난 60년간 한국인이 건국-호국-산업화-민주화의 4단계 국민국가건설과정, 또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유통일의 關門을 넘어서면 一流국가 건설이 가능하다는 희망과 비전을 갖게 된 것은 두 巨人 徐載弼, 李承晩에 힘입은 바 크다. 우리가 세계 10대 國力을 가진 국가가 된 원동력은 근면 성실한 민족적 자질, 李承晩 朴正熙로 대표되는 위대한 지도자, 자유민주 체제, 韓美동맹이란 4대 조건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것이다. 李承晩-자유민주-韓美동맹이란 번영의 軸(축)은 이곳 펜실베이니아에서 살면서 미국의 번영과 조국의 참상을 놓고 고민하고 연구했던 조선의 젊은 망명객 徐載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은 李庭植 교수의 徐載弼 연구서에 실린 한 대목 때문이었다.

절망 속에서 강대국의 꿈을 보다

徐載弼은 필라델피아, 워싱턴에서 살던 10년간 의사가 되고 미국여자와 결혼하고 드디어 미국시민이 되었다. 그는 淸日전쟁으로 일본이 이기고 朴泳孝 등 개화파가 집권하자 1895년 크리스마스 날 인천을 통해서 귀국한다. 그는 이듬해 한 영문잡지에 쓴 ‘조선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14년 만에 돌아오면서 나라의 형편이 좀 좋아졌을 것을 기대하였는데, 오히려 크게 실망했다. 나의 심장에서 피가 터져 나오도록 통분케 하는 것은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다>
그는 이 글에서 ‘교육’을 강조했다. 교육으로써 백성들과 젊은이들을 깨우치는 것이 나라를 융성케 하는 지름길이란 것이다.
<젊은 세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흡수하고 크리스천 문명에 숙달하게 되면 얼마나 큰 혜택을 받게 될지 모른다.>
徐載弼은 조선의 당시 상황에 실망했지만 기독교 문명, 즉 자유민주주의와 과학ㆍ합리ㆍ실용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아 민중이 깨어나면 워낙 민족의 자질이 뛰어나므로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 조선은 절망적으로 보이지만 나는 조선이 장차 동양의 강대국중 하나(a power)가 될 것을 확신한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들을 가르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구한말의 개혁ㆍ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학교 출판부)의 著者 李庭植 교수 (펜실베이니아 대학 명예교수)는 “徐씨의 ‘강대국 운운’하는 발언은 빈말이 아니라 고국에서 투신활약한 것을 뒷받침 해준 신조” 였다고 지적했다.
<이 글(강대국 운운)을 읽은 독자들은 폭소 아니면 冷笑로 대했을 것이지만 서재필에겐 근거가 있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두뇌가 과학이나 예술의 어느 분야라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사고방식이 매우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서재필은 또 조선반도엔 자원이 충분하고 전국적으로 관리들의 수가 너무나 많으므로 3분의 1로 줄여도 정부 운영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관리를 줄여서 남은 財源으로 교육 등 각종 사업을 운영할 수 있다>
徐載弼은 ‘조선의 절망’속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 셈이다. 그는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확신했고 이 우수성이 ‘기독교적 문명’과 접목되기만 하면, 그리하여 발전을 누르고 있는 부패한 守舊 지배층을 개혁하기만 하면 민족적 에너지가 대폭발할 것임을 예감했던 것이다.
이 徐載弼의 생각을 이어받은 여러 제자중 한 사람이 李承晩이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徐씨의 강연을 듣고 감동했다. 李承晩은 “기독교 국가 시민들은 그들의 통치자들의 억압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으로” 듣고 가슴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1898년 고종은 徐載弼을 다시 추방하고 ‘독립신문’을 폐간시키고 親露 정권의 전횡 밑에서 王權강화에 열중했으나, 李承晩은 徐씨가 만든 독립협회의 민중 운동 시기, 즉 만민공동회 당시(1898)에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다. 그는 ‘매일신문’ ‘뎨국신문’ 창간을 주도했고 反고종 역모에 걸려 옥살이를 하는 중에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예수를 믿어야 나라가 산다”고 하는 정치ㆍ종교관을 갖게 되었다 (李庭植 교수著 ‘구한말의 개혁ㆍ독립투사 서재필)

최초의 대중정치인 李承晩

李承晩은 獄中학교를 만들어 죄수들을 교육했다. 그는 출감한 뒤 徐載弼처럼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래의 건국 대통령은 한국 민중의 우수성과 지배층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가 대륙횡단 열차편으로 워싱턴으로 가고 있을 때에 「帝國新聞」에 記名논설이 실렸다. 1904년 12월29일자와 30일자에 연속으로 실린 「나라의 폐단을 고칠 일」이라는 글이었다.
李承晩은 ‘근래에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인종이 걸러서 당초에 어찌할 수 없다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 하오’라고 전제한 다음, 그 특유의 논법에 따라 국민을 「상등인」과 「하등인」으로 구분하여 외국인들과 비교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하등인」은 외국 「하등인」에 비하면 師父라고 할 만큼 우수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하등인」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도 교육을 받은 외국의 「하등인」보다 양순하고 성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상등인」은 다른 나라 「상등인」에 비하여 ‘천양지판으로’떨어진다면서, 그 이유는 우리나라 「상등인」들이 받아온 敎育 때문이라고 했다. 李承晩은 전통교육의 폐단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그것은 첫째 태고적 옛것을 숭상하는 것, 둘째 虛誕(허탄:거짓되고 미덥지 못함)함을 숭상하는 것, 셋째 인심을 결박하는 것, 넷째 큰 것을 섬기는 주의, 다섯째 이른바 도덕상 주의, 곧 실상이 없고 빈 생각만 숭상하는 것이었다.
이 「논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장래 여망은 우리 용준한 평민에게 달렸고 전혀 상등인에게 있지 아니하며, 우리 청년들에게 달렸고 老成한 이에게 있지 아니한지라>
徐載弼은 미국 건국의 요람이자 남북전쟁의 격전지였던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살면서 미국의 건국정신과 자유와 민권의 행동철학을 실감 있게 터득했을 것이다. 李承晩은 권력의 중심지 워싱턴에 근거지를 둔 때문이기도 하지만 徐載弼보다는 국제정치의 力學관계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조국의 문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大에서 석사, 프린스턴大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에 관한 연구」는 ‘戰時 중립이론의 발전 과정’을 추적한 일류 논문이다. 미국이 戰時에도 非교전국이 무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여 시장의 자유를 확대시켜 왔다는 것이 논문의 요지이다.
李承晩은 미국에서 명문대학을 나왔고 동양적 교양에서도 일류 지식인이었으나 엘리트 의식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의 개혁적, 반골적 기질이 李박사를 대중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일시 귀국한 李박사는 YMCA의 간사로 일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강연여행이었다. 日帝 시대였으므로 李承晩의 강연 내용은 주로 기독교를 傳道(전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1911년의 여름엔 한 달 이상 전국을 순회했다. 3,400km를 다녔고, 33회의 집회에서 7,533명의 학생들을 만났다. 李 박사를 본 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나도 그와 같은 인물이 되어야겠다”면서 공부하고 유학을 갔다. 이때 조선인들 마음속에 심어진 ‘李承晩 박사像’이 그를 민족의 지도자, 건국의 아버지로 만들게 된다. 대중을 경멸하지 않고 그 대중의 각성을 통해서 권력을 잡고 역사를 바꿔야 한다고 확신했다는 점에서 李承晩은 한국 최초의 대중 정치인이다.

헌법 속으로 들어간 기독교적 민주주의

徐載弼, 李承晩 두 사람은 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만났다. 두 사람은 미국의 역사와 文化를 현장에서 호흡하면서 ’기독교적 민주주의’를 신념화했다.
李承晩이 공산주의의 기만성을 그 어떤 한국인보다 먼저 꿰뚫어 본 글, 徐載弼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이 개인의 자유라고 확신한 글을 읽어보면 두 분은 공산주의의 악마성과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대해 맨 먼저 깨달음을 얻은 점에서 先覺者임을 알 수 있다.
李承晩은 사회주의가 세계를 석권하고 있던 1920년대에 이미 국가와 기업과 실용할 과학을 부정하는 사회주의는 독립자주해야 할 한국에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나중엔 “공산주의는 호열자와 같다. 인간은 공산주의와 같이 살 수 없다”라고 단정했다.
徐載弼, 李承晩은 교육과 언론 사업을 통해 국민 각성을 추구한 점에서는 같으나 실천의 문제에서는 人生 行路가 달라졌다. 徐載弼은 미국 시민권자가 되고 기업도 운영하면서 ‘미국화’ 되어갔다. 그의 민주주의論도 미국적인, 보편적인 원리란 면이 강했다. 3ㆍ1운동 이후 전개된 새로운 한반도 정세 속에서 徐載弼은 서서히 역사의 主流에서 밀려나면서 조국과의 접촉도 줄었고 한국어도 거의 잊었다. 徐載弼은 독립운동가의 역할에 머물렀다.
李承晩은 애국심과 기독교 정신을 자기 확신과 권력 의지에 연관시켜가면서 독립과 건국의 실천에 매달렸다. 개혁운동가에 머물지 않고 建國의 主役을 자임했다. 기본적으로 徐載弼은 교육가였고 李承晩은 정치인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이야말로 徐載弼, 李承晩의 꿈이 담긴 ‘自由민주의 한국판 권리장전’이다. 徐, 李 두 사람을 매개로 하여, 또 미국인 선교사의 중계로 한국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손을 잡았다. 이 관계는 해방, 건국, 6ㆍ25를 거치면서 韓美동맹 관계로 굳어졌고 이 조건이 한국을 一流국가의 문턱까지 밀어올렸다. 대한민국 헌법과 건국과정에서 李承晩 대통령은 기독교적인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의 自主性을 내세우고 북한의 김일성 정권을 사대매국집단으로 단정했다. 헌법에 반영된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유일 합법성은 감정적 뽐냄이 아니요, 선언적 虛言도 아닌, 自由에 기초한 建國의 당연한 자리매김이었다.
李庭植 교수는 徐載弼이 19세기말에 “조선이 장차 동양의 강대국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돈키호테와 같은 착상’을 한 것은 10년의 미국 생활에서 터득했던 민족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의 ‘돈키호테 같은 착상’은 세계 10大 경제대국, 삶의 질 세계 26위의 대한민국으로 결실됨으로써 위대한 예언이 되었다.
하지만 徐씨가 지적했던 ‘지배층’과 官吏집단의 문제는 남아 있다. 국군 장교단 출신 엘리트들의 역할이 끝난 1993년 이후 정권을 장악한 자칭 민주투사들은 徐載弼을 절망시켰던 조선조의 守舊的 지배층의 행태를 보이면서 민족혼을 망가뜨리고 민족의 저력을 탕진시키면서 一流국가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 명분론의 포로가 되어 위선적이고 당파적이며 분열적 행태를 보이는 이들은 그 속성이 자유민주적 실용주의보다는 아직도 조선조 상태로 남아 있는 북한의 守舊좌파와 더 가깝다. 金正日 - 金大中 - 盧武鉉의 守舊좌파 연합은 이런 공통점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일종의 이념적 공동운명체가 되어 자유통일과 일류국가 건설로 매진해야 할 한국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악마에 영혼을 팔아넘긴 한국인들

徐載弼과 李承晩이 한국에 소개했던 기독교적 민주주의가 대표하는 가치, 사랑ㆍ화합ㆍ진실ㆍ평등ㆍ자유ㆍ겸손은 전부가 공산주의의 치유불가능한 생리인 증오ㆍ분열ㆍ거짓ㆍ억압ㆍ독선ㆍ오만과 정반대이다. 한반도의 무장ㆍ이념 대결 관계는 그 본질이 主體광신교와 기독교적 민주주의의 대결이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애국운동에 나선 이들은 거의가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이비 좌파와의 대결을 金正日이란 사탄의 세력이 지휘하는 惡黨들과의 靈的 싸움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집단적 행태를 분석하면 위대한 성취와 병적인 타락이 混在하여 분열증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정권은 남침 전과가 있는 戰犯집단이다. 이 위험한 집단이 핵실험을 함으로써 한국에 대해 결정적 우위(優位)에 섰다. 그럼에도 집권세력은 핵무장 저지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UNㆍ미국과 손잡고 김정일에 압력을 넣는 일에도 협조하지 않는다. 국민들도 자신들의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안보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태평이다.
300만 명이 죽은 6ㆍ25 전쟁, 또 300만이 굶어죽은 북한의 대기근, 그리고 소련ㆍ동구 공산권의 해체로써 사회주의의 실패가 증명되었는데도 그 직후 한국인은 선거를 통해서 親共집단, 즉 사이비 守舊좌파를 집권세력으로 만들었다. 이 좌파세력의 핵심들은 사회주의 중에서도 최악의 變種인 김일성식 전체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대한민국보다 북한정권을 더 높게 평가하고, 동맹국을 主敵보다 더 미워하며, 대한민국 수호세력을 증오한다. 反헌법, 反국가적 이념에 영혼을 판 집단에게 정권을 넘겨준 유권자들의 정신도 분명 정상이 아니다.
한국은 북한보다 경제력이 약 100배나 된다. 한국은 주한미군이 있으나, 북한은 외국군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이런 압도적 國力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북한정권의 공갈에 겁을 내고 굴복하고 있다. 야윈 늑대에 뜯어 먹히는 ‘살찐 돼지’같은 나라이다. 김정일 정권의 위협에 대해서 ‘一戰不辭’나 ‘우리도 핵개발하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 정도이다. 김정일 세력이 남한의 친구들과 作黨하여 발신한 가짜 평화론과 가짜 민족주의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여 잘 살기는 하지만 잘 속고 자존심ㆍ책임감ㆍ용기가 없는 집단이 한국인이다. 한국인들의 영혼이 망가진 탓이다. 인간과 집단의 품격과 윤리를 규정하고 장래의 成敗를 결정케 하는 것은 영혼이고 정신력이다.
북한정권은 지난 60년간 굶어가면서도 끈질긴 對南赤化 工作을 추진하여 한국인들의 뇌수와 심장에 자멸적인 바이러스를 심어 놓는데 성공했다. 어떤 조직이나 인간을 파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미치게 하는 것인데, 이에 성공한 셈이다. 그들은 많은 한국인이 원래 가진 위선성, 명분론, 열등감, 분열성을 자극하여 이를 암흑의 에너지, 파괴적 動力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뉴욕에서 만난 많은 기독교인들은 한국인들이 악마에 영혼을 판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개탄했다. 그 증거는 한국인들이 선거를 통해서 從金집단을 집권세력으로 뽑아준 점이란 것이었다.

“생명을 바쳐 싸우라”

徐載弼은 1947년 美군정당국의 최고 지휘관이던 하지 사령관의 고문으로 초대받아 다시 한국에 왔다. 사사건건 李承晩과 대립하던 하지는 徐載弼을 이용하여 李承晩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80세를 넘긴 徐載弼은 그때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건국에 매진하던 李承晩 세력은 徐載弼 추대운동설에 발끈했다. 대한민국 건국 선언이 1948년 8월15일에 있었고 徐載弼은 9월11일에 다시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다. 출국 두 주일 전 그를 찾아간 조선일보 기자가 “끝으로 조선인민에게 부탁하고싶은 말은?”하고 물었을 때 徐載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라는 것이요. 정부는 인민의 從僕(종복)이란 것을 잊어선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他人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 소원이다”
기자도 뉴욕, 필라델피아 강연에서 “자유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를 마시면서 자라는 나무이다. 2007년 大選에서 또 국민들을 속이고 좌파정권을 만들기 위해서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 세력이 목숨을 걸고 나오는데 대한민국 세력이 한나라당과 대통령 지망생들처럼 정면승부를 기피하면 또 진다. 싸우는 자유세력을 대표할 수 있는 선명 애국정당이 만들어져야 한나라당과 경쟁, 견제하면서 한나라당을 오른쪽으로 당길 수 있고 자유진영의 전체적인 勢를 불릴 수 있다. 이념이 가장 큰 전략이어야 하고 白衣종군, 大同단결, 分進合擊이 우리의 행동원칙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徐載弼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죽으러 돌아온 사람’ 같은 인상을 풍겼다고 한다. ‘파쟁을 계속하는 한국정치인들에게 실망했고 자신을 초청하여 갔던 미국 정부 정책에도 환멸을 느꼈다’는 것이다(李庭植 교수의 上記 저서). 귀국한 지 두 해 뒤 6.25 남침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더욱 낙담했을 것이다. 1951년 1월5일, 그 하루 전 서울이 중공군 손에 떨어지고 트루먼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철군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을 때 徐載弼은 숨을 거두었다. 만 86세였다.
徐載弼은 ‘회고 갑신정변’이란 책에서 자신의 일생을 결정해준 金玉均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조국이 청국의 宗主權하에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치욕을 벗어나 조선도 세계 각국 속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일원이 될까 하여 밤낮으로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李庭植 교수는 이 격분이 金玉均을 개혁가로 만들었고 徐載弼의 일생을 지배했다고 평했다. 李承晩도 그렇지만 徐載弼의 생애를 지배하고 인도한 것은 조국을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분노와 조선인에 대한 동정과 그 저력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제 한국인이 그런 분노를 폭발시켜야 할 대상은 김정일 학살집단과 從金세력일 것이다. 기자도 비슷한 분노와 희망을 담아 이런 글을 나의 홈페이지에 올린 적이 있다.



대한민국은 罪人이 아니다


식민지에서 독립하자 마자 남침전쟁으로 얻어맞아 국토는 초토화되고, 위대한 건국 대통령은 학생혁명으로 쫓겨났다. 민주당 정권은 1년만에 군사쿠데타로 무너지고, 제2의 월남화를 노린 김일성의 명령으로 청와대가 북한특공대의 기습을 받았다. 그 6년 뒤 대통령의 부인은 김정일이 보낸 자객의 총을 맞아 죽고 그 5년 뒤 근대화의 기수는 자기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군사變亂으로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미얀마로 출장갔던 대통령 일행을 노린 김정일의 테러로 17명의 장관급 엘리트가 죽고,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김정일이 대한항공기를 폭파하는 바람에 중동근로자 등 115명이 죽어갔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고 무역흑자국을 만들고 민주화 약속도 지킨 두 전직 대통령이 내란죄로 2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있을 때 국립박물관을 친일파라고 사형을 선고하여 때려부순 대통령의 失政으로 국가不渡 위기로 몰린 나라는 IMF에 구조를 요청해야 했다. 어리석은 국민들은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북한에서 300만 명이 굶어죽는 것을 보고도 2代에 걸쳐 민주세력으로 위장한 좌파정권을 등장시켰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反美선동과 對南적화전략에 동조하니 국가는 분열되고 그 틈을 타고 김정일이 핵실험을 해도 韓美동맹은 작동하지 않는다. 前現職 두 대통령이 김정일과 한 패가 됨으로써 내년 대통령 선거는 내전적 상황에서 치러질 것으로 예측되는 아, 대한민국!
그런데 어찌하여 이 나라는 지금 세계 약200개 국가중 삶의 질이 26위로서 선진국 수준에 진입해 있고, 사람들은 살빼기에 목숨을 걸고, 미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내는가 하면, 남자의 평균키가 아시아에서 가장 큰 키가 되고, 공업에서 세계 4강, 경제력 및 군사력 부문에선 8강을 노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연간 成人인구의 약3분의 1인 연1200만 명이 비행기나 배를 타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는가? 이것이 기적인가, 꿈인가, 현실인가?
한강의 기적은 공짜가 아니었다.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기적이 아니다. 기적이라면 국민수준보다 너무나 위대한 李承晩, 朴正熙가 대통령이 된 것이 기적이요, 1950년 6월25일 남침 소식을 보고받은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국무장관에게 '그 자식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내뱉으면서 30초만에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국민들'을 구하려고 미군의 참전을 결정한 것이 기적이다. 이 결단으로 약5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죽었다. 근면성실한 국민성, 머리 좋고 강건한 민족적 자질, 李承晩 대통령이 간판을 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자율과 경쟁 원리, 朴正熙가 도입한 능률적인 군사문화, 그리고 미국의 결정적 지원이 합쳐져서 우리의 실력보다 월등한 성취를 이룩했다.
김일성, 김정일 일당과 이들에게 영혼을 판 반역자들의 집요한 공작, 암살, 침투, 선동, 배신, 훼방에도 끄떡 않고 대한민국은 전진했고 국민들은 한 손에 망치 들고 한 손에 총을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웠다. 고마움을 모르는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은 이런 기적을 만든 대한민국의 歷代 지도자와 기성세대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조국의 과거와 약점을 캐기 위하여 공권력과 예산을 집중 투입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맞다면 지난 60년간 지도층은 국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만 했는데 기적적인 대한민국은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하느님이 만들어서 땅위로 내려보냈단 말인가? 북의 김일성 김정일이 힘을 합쳐 만들어 남한으로 선물했단 말인가? 아니면 김대중씨가 혼자서 땀을 흘려 만들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노무현씨가 그 말 많은 입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기적 같은 대한민국은 있는데 애국자도 영웅도 보이지 않고 온통 독재자, 守舊세력, 냉전세력뿐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반역자들이 만든 나라란 결론인가?
대한민국은 이제 김대중, 노무현 일파에 사과할 것도 미안해 할 것도 변명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은 罪人이 아니다. 이런 나라를 만든 주인공들은 역사 앞에, 세계 앞에, 무엇보다 김정일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자랑한다. 우리는 현대사를 긍정한다. 우리는 선배세대의 노고에 감사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빛과 그림자를 다 쓸어안고싶다. 우리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이 나라를 사랑한다. 당당한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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