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23일은 6.25 전쟁때 부산교두보를 死守하여 반격의 기회를 잡았던 미8군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이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56주년이었다. 아래 기사는 필자의 박정희 전기에서 뽑은 것이다. 한국군인이 미8군 사령관을 치어죽게 했지만 미국측은 오히려 사고를 낸 운정병의 선처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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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12월23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서울 북쪽 의정부의 미군부대를 방문하는 길에 아들 샘 워커 중위에게 은성훈장을 직접 수여하기로 했다.
얼어붙은 도로를 맹속도로 달리고 있던 워커 중장의 지프를 추월하려 던 한국군 트럭이 추돌했다. 지프가 옆으로 뒹굴면서 보좌관과 운전병은 튕겨나와 살았지만 워커는 즉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소식을 전해듣자 사고를 낸 한국군 운전병을 즉시 처형하도록 지시한다. 옆에 있던 미 군사고문관 짐 하우스맨 대위가 말려 운전병은 3년 징역형을 받았다. 이 짐하우스맨은 회고록에서 이런 뼈아픈 지적을 했다.
〈하버드 대학의 고풍어린 교내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에 목숨을 바친 20여 명의 하버드생 병사들 이름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 도 시에서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한 '미국의 희망'들을 한국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보냈다. 교수들도 참전해 더러 전사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학도병들이 전사했다.
한국의 어느 학교에도 전사 학도병들의 이름 이 새겨져 지나는 자들의 머리를 숙이게 하는 표지는 없다. 존경하는 소 대장님, 용감한 대대장님, 그리고 생명을 던져 진지를 지켜낸 병사들의 얘기는 입으로 만전해질 뿐 그들을 기릴 수 있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은 전후 팔을 잃은 국회의원, 눈이 날아간 국방장관을 갖지 못했다. 행사장이나 연회장 같은 데서 한국전 전상자들을 만나 본 적도 없다.〉.
채명신 전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월남한 뒤 장 교가 되어 인접부대에서 함께 근무하다가 전사한 아픔을 겪은 사람인데, 1952년 당시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주관한 한 회의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북한으로 출격했다가 실종된 아들(공군 조종사) 에 대한 공중수색 보고를 다 들은 다음 전혀 표정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명령하는 바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내 아들을 수색하기 위한 특수작전은 중지하도록 명령합니다. 행방불명자에 대한 공군의수색작전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번 특수작전은 그 정도이 면 최선을 다한 겁니다. 이제부터는 시간낭비이고 피로를 더해줄 뿐입니 다. 그간 작전에 참여해준 장병들에게 밴 플리트 중위의 아버지로서 심 심한감사를 표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담담한 표 정,그건 감동 그 자체였다. '미국의 힘'이 바로 그의 얼굴에 씌어져 있 었다.〉.
워커 사령관의 후임은 육군참모차장 매튜 릿지웨이 중장이었다. 그 는 2차 세계대전 때 제82공수사단장으로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했고 노르망디 상륙전 때도 낙하산을 타고 적진에 내린 용장이었다. 그는 통 보를 받자마자 '준비된 점검목록에 따라 짐을 꾸리고 유언장을 작성했으 며 유산분배를 결정하고 전선으로 가져갈 사진을 처자와 함께 찍었다'고 한다.
릿지웨이는 가슴에 수류탄이 달린 공수부대원의 복장을 하고 다녔 다. 그는 한국전선에 도착하자마자 전선을 누비면서 떨어진 사기를 되살 려내려고 애썼다. 릿지웨이 사령관이 장교들에게 맨 처음 명령한 것은 지프의 덮개를 걷도록 한 일이었다. 그는 말했다.
'밀폐된 차는 탑승자에게 안도감과 안이함을 준다. 포장 따위가 총탄 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달아나던 타조가 모래에 머리만 파묻고 안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심리일 뿐이다.'.
한국전의 세 현지사령관 워커, 릿지웨이, 밴 플리트는 진정한 군사 문화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워커 장군 사망 56주년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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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2-28, 2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