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槿惠 한나라당 의원은 당대표로서 두 번 한나라당을 구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탄핵역풍을 만난 한나라당을 구하여 改憲저지선을 확보했다. 작년 5.31 지방선거에선 한나라당의 大勝을 이끌어 노무현 정권을 사실상의 레임덕 상태로 몰아넣고 대세론을 만들었다. 특히 목에 칼을 맞는 순간에 보여준 초인적인 냉철함은 '역시 그 아버지의 그 딸'이란 찬사를 불렀다. 대표를 그만 둔 이후의 한나라당 대표 및 최고위원 競選에서도 親朴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가 지난해 여름. 여론조사에서도 朴 의원은 상당한 차이로 李明博씨를 누르고 1위를 달렸다. 이즈음 朴槿惠 대세론도 나왔다. 그 후 6개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朴의원 지지율은 李 전 시장의 반으로 줄어들었는가?
朴 의원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바로 그때 한국은 안보위기로 접어들었다. 작년 7월5일 북한이 미사일 실험을 했고, 盧 정권은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韓美연합사 해체 사업을 밀고 나갔다. 지난 10월9일엔 드디어 김정일이 핵실험을 했다. 이런 안보위기를 맞아 朴槿惠씨는 失足(실족)했다.
국가위기를 당해 불안에 빠진 국민들은 한나라당과 대통령 후보群이 김정일-노무현 세력과 정면대결 자세를 취하고 대한민국을 지키는 싸움에 앞장서 줄 것을 기대했다. 애국단체에선 서울역 광장이나 시청 앞 시위를 할 때 朴 의원에게 잇따라 초대장을 보냈다. 李明博씨도 그러했지만 朴槿惠 의원은 안보투쟁에서 구경꾼이나 손님 역할 이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영웅 待望의 무대는 마련되었지만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무대는 누구보다도 朴槿惠씨에게 어울리는 무대였다. 李明博씨는 경제와 행정이란 고유의 무대를 따로 가진 사람이다. 國難이란 무대는 朴正熙의 딸 朴槿惠씨의 독무대가 될 수 있었다. 그 무대를 피했을 때의 타격도 朴씨에게 주로 갔다.
朴槿惠씨가 만약 애국투쟁의 선두에 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여론조사에서 1위로 달리고 있든지 李明博씨와 비슷할 것이다. 朴씨는 그야말로 잔 다르크役을 할 수 있었다. 가냘프게 보이고 앳되어보이기도 하는 朴씨가 김정일이란 천하의 개망나니와 노무현이란 '깽판 대통령'을 상대로 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투쟁을 거리에서 광장에서 대중속에서 벌이는 모습은 상상하기만 해도 아름답지 않은가?
朴槿惠씨는 굳이 그 役을 회피했다. 애국투쟁의 현장에 당연히 있어야 할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70, 80 老兵들이 섭씨 30도를 넘나드는 땡볕 아래 아스팔트 위에서 싸우는데 朴씨는 앞장을 서지 않았다. 기억할 만한 기자회견도, 연설도 없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국가비상시기에 사실상 침묵한 것은 임무포기로 비쳐졌다.
자연스럽게 2002년의 박근혜-김정일 회담에 관한 의혹이 재발했다. 김정일에게 속아서, 또는 김정일이 무서워서 反核反金의 애국투쟁을 기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워낙 사건 사고가 많은 한국에선 잊혀지기도 쉽다. 몇달간 朴槿惠씨는 거의 그런 존재가 되었다. 목에 칼을 맞았을 때 국민들이 가졌던 보호본능도 희미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朴槿惠씨가 앞으로 李明博씨를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안보 분야의 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경제와 행정 분야에서는 이명박씨를 앞지르기 어려울 것이다. 李씨의 대운하 계획에 대응하려고 급조한 '열차페리구상'은 너무 사소하다. 김정일을 '나의 맞수'라고 생각하고 북한동포들을 '해방시켜야 할 인질'이라고 여기고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6.15 선언 폐기를 공약하고 친북좌익 척결을 다짐하며 韓美연합사 해체 계획의 중단을 약속하면서 '안보의 박근혜'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만회가 힘들 것이다.
李明博씨는 컨텐츠가 강하고 朴槿惠씨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명박의 경제와 박근혜의 안보가 한나라당 경선을 통해서 하나로 융합된다면 한나라당은 無敵의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박근혜-이명박 경쟁은 치열할수록 좋다.
朴槿惠씨는 왜 2위로 밀려났나?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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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1-04, 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