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간첩이 아니었다"

1년 옥살이 하고 나온 李穗根 조카 裵慶玉의 수기. 『정보부·검찰·법원의 조사과정은 조작과정이었다』
(1999년 3월호 월간조선)

〔편집자 注〕 월간조선은 1989년 3월호에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국외탈출한 李씨를 체포하고, 귀순 때 그를 조사했던 당시 정보부 간부들의 주장에 주로 근거하였던 기사였다. 李씨의 국외탈출때 위조여권을 만들어주고 사이공까지 동행했던 조카 裵慶玉씨가 무기징역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20년형으로 감형돼, 지난 연말에 출감하였다. 裵씨는 李씨와 자신이 결코 북한행을 꾀한 것은 아니고 간첩으로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手記를 본지에 보내 왔기에 여기에 싣는다.


21년만에 본 내 사건기사

1969년에 있었던 李穗根 국외탈출 사건은 당시 언론에 보도된 그대로 세상 사람들의 머리속에 굳어진 것 같다. 그해 1월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서 李穗根과 함께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나는 그후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88년 12월21일 광주교도소장으로부터 감형장을 건네받는 순간 1년 앞으로 당겨진 출감일은, 내게는 사회에서 뒤늦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보다 당시의 사건을 조작되기 이전의 진실로 사회에 알릴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먼저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때의 희망대로, 내 인생에서 사라진 2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처음으로 입을 열게 되는 것이다.
李穗根이 판문점에서 유엔군측 영국군 대표 벤트러프트 준장의 세단차에 뛰어올라 월남한 1967년 3월에 나는 사이공에서 파월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다. 미국인 건설회사 퍼시픽 아키텍트 엔지니어(PA & E)가 나의 직장이었다. 미 보병 1사단의 PA & E사 모터풀(정비소) 내에 있는 숙소에서 휴식을 취할 때였다. 옆에서 라이프지를 뒤적이던 동료 하나가 『여보게, 이런 사람도 있네 그려!』라고 말했고 나는 『어디 보세』하며 그 책을 받았다. 불과 20초 만에 북한 경비병의 사격망을 뚫고 목제 차단기를 돌파하여 남쪽으로 탈출한 그는 분명 흥미로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李穗根은 그때까지 나의 이모부가 아니었고, 당연히 나는 그를 잡지속의 한 사건을 통해 알았다가 잊혀지는 인물로 만났다. 열대지방으로 돈을 벌러 나온 내가 북한의 관영통신인 중앙통신사 부사장직을 거친 그를 오래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전쟁중인 나라의 한복판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나는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고, 사상이나 이념에 관해서도 관심이 없는 젊은 일꾼일 뿐이었다.
1989년 12월22일에 안동교도소를 출감한 나는 관할경찰서에 들러 보호관찰자 신고를 하고 경기도 하남시로 올라왔다. 얼마뒤 당시의 사건을 보도한 신문을 열람하면서 20년전의 李穗根과 나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사건 조작 당시의 비인간적, 비도덕적 수사과정을 회상하면 지금도 전신이 떨리고 호흡이 곤란해지지만 나는 그때의 언론이 우리를 어떻게 왜곡하고 매도하였는가 확인하기 위해 애써 기사를 읽어 나갔다. 「저주받을…」 「흉악한 이중생활」등은 李穗根을, 「검은 인형」, 「상습여권위조범」등은 나를 비난하는 표현이었다. 李穗根의 여권을 위조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덧붙여 상습범으로 나를 지칭한 것은, 李穗根이 남침하기 1년 전인 1966년에 내가 사이공 취업을 위해 형 裵慶善의 이름으로 여권을 발급받은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모부와 첫상면

한국해외 개발공사에서 모집한 파월기술자 시험에 응시한 뒤 나는 형 裵慶善의 이름으로 여권을 신청했다.
육군에 입대하여 6년간 복무중이던 1961년에 나는 복잡한 집안사정으로 군무이탈을 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발급받은 형 이름의 여권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이 모든 절차를 간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므로 그 뒤로도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그 여권을 썼을 뿐이다.
1966년 RMK회사에 크레인 기사로 취업한 나는 새항구(New Port)공사 현장에서 근무하다가 이듬해 현지에서 PA&E 회사의 정비반으로 자리를 옮겼다.
라이프지에서 보았던 李穗根이 나의 이모부였음을 안 것은 1968년 4월이었다. 나는 누이동생 裵朝美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이공에서 일시 귀국하였다. 서울 돈암동의 신흥사에서 불교식으로 올린 결혼식이 끝난 며칠 뒤 다른 친척들과 마찬가지로 종암동의 우리집에 李穗根이 찾아왔다. 李穗根과 나는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정보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까지 외할머님, 이모님과 함께 살았던 나는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며 李穗根을 반갑게 맞았다. 우리가 재복 이모님의 안부를 묻고 이모부의 귀순으로 인해 북한의 가족들이 당할 고통을 걱정하자 그는 『좀 고생을 하겠지만 차츰 나아지지 않겠느냐』면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집안일이 한창 바쁠 때였고, 처음 상면한 15세 연상의 어른이었다. 내가 따로 이야기를 나눌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화는 곧 중단됐다.
5월5일 내가 사이공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후일 중앙정보부에서는 안면만 익혔던 이때의 만남을 두고 「68년 4월에 사이공에서 일시 귀국한 이질 배경옥과 만나 북괴와 접선할 것을 모의기도했다」는 것인데 李穗根이 아무리 포섭에 능한 간첩이었다 하더라도 그 짧은 순간에 다른 가족들이 있는 집안에서 그것도 처음 보는 나를 설득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이공의 직장동료들은 집안의 경조사 따위로 누군가 일시 귀국할 경우 서로 집안의 안부를 전하는 일이나 잡다한 심부름거리를 맡기기 마련이었다.

나 역시 적지 않은 부탁을 받아 두고 있었다. 또한 나는 68년 4월19일부터 친구의 형인 閔庚學과 합자하여 트럭을 운영했기 때문에 보름 남짓 머무는 시간은 그 일만으로도 부족했다. 집안에 붙어 있을 여가조차 없었으모로 처음 보는 이모부와 시간을 함께 할 겨를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회사의 유급휴가는 1년에 한달이었다.
가장 필요한 때 휴가 기일을 나누어 쓰기 위해서라도 나는 가능한 빨리 출국을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나에 대한 검찰기소장에 따르면 초면인 사람(李穗根)을 위해 「암호문을 한영판 성경책 속에 감추어 홍콩으로 가서 모스크바 천주교회에서 우송하였다」는 것이다. 공소사실대로라면 李穗根이 그 암호문을 작성한 것은」 5월4일 오후 6시」였다. 내가 김포공항을 떠난 시간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만 하루가 안되는 그 시간동안 나는 李穗根을 만난 일이 없고 전화조차 받은 적이 없다. 그러기는 커녕 사이공으로 돌아가 다시 귀국할 때까지 李穗根은 내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조작된 「金日成앞 암호문 전달」

1969년 4월10일에 있었던 검찰의 1차공판에서 李穗根은 『귀순전에 이미 북괴공작원과의 접선방법등을 교육받았다』고 말했으며, 판문점 출입기자의 선정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이론이 높고 정세판단, 공작능력이 뛰어난 기자를 뽑아 남조선 총국 문화부의 심사를 거쳐 임명된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 진술대로라면 그는 굳이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나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암호문을 전달할 방법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 암호문이란 것도 그토록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임명된 기자 출신의 李穗根이 작성한 것으로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金日成의 집인 「조선노동당 중앙당 위원회 5호댁」 앞으로 보낸 암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가로 5cm 세로 9cm 크기의 쪽지였다고 한다.
「배은망덕하고 고향을 떠난 불효자식(이수근 자신)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잘못을 뉘우치고 사업을 하겠습니다. 여기에 약(북괴에 도움이 되는 자료)을 구해놓았으니 인편(북괴 지도원)을 보내 주십시오. 지난 정월달에 그곳에서(북괴) 여기(한국)에 보낸 선물(1·21 무장 공비침투)의 답례로 무엇을 보내려고 하는데 그것을 받지 마세요. 나에게 인편을 보낼 때는 전쟁때 죽은 금순이 삼촌의 이름을 대면 아버지가 보내신 사람으로 믿겠습니다」

李穗根을 위장간첩으로 묶어낸 유일한 증거물인 암호문은 13일간이나 우리를 수사한 중앙정보부의 1차 수사발표문에는 정작 빠져있고 그 보다 한달이 더 지난 검찰이 내놓은 공소장에 나타났다. 인편으로 직접 전달되어도 의심스러울 그런 조잡한 암호문이 제3국을 통해 우편으로 金日成에게 직접 전달되었다는 발표는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배은 망덕」 「이제 잘못을 뉘우치고」 따위의 표현이야말로 李穗根의 귀순이 위장이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문맥이 아닐 수 없다. 대남 사업총국장인 李孝淳의 소환을 받고 그의 안내로 金日成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조국을 위하여 부하된 사명을 다하라』는 격려를 받았다는 중앙정보부의 발표문이 사실이라면 다섯 문장에 불과한 짧은 암호문 속에 구태여 두 문장씩이나 「불효자식이 잘못을 뉘우친다」는 그런 표현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金日成을 면담한 후 비밀아지트에서 李孝淳 대남사업총국장에게도 「여하한 악조건이 있더라도 적화통일이 될 때까지 장기잠복하라」는 지령까지 받았다는 특수 간첩이, 「나에게 인편을 보낼 때는 전쟁 때 죽은 금순이 삼촌의 이름을 대면 아버지가 보내신 사람으로 믿겠습니다」라고 했다면 그는 접선방법이나 자신의 행동지침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李穗根이 처음부터 간첩이었다는 발표와 그가 작성했다는 암호문, 둘 다 분명히 조작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고문으로 자백강요

李穗根에 대한 수사가 종결되었을때까지 그에 대한 간첩 혐의로 채택된 증거는 암호문 뿐이었고, 고유의 암호명이나 그 흔한 난수표, 기타 어떠한 물증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약(자료나 정보를 의미)을 구해 놓았으니 인편을 보내 주십시오」라는 대목에 대해서는 李穗根 자신도 이 사실심리 과정에서 『그들이 데리고 다녀서 보았을 뿐』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기억한다. 월남한 뒤에 중앙정보부 직원과 함께 군부대나 산업시설 등을 참관하면서 돌아다닌 사실이 뒤늦게 기밀탐지로 둔갑한 것이었다. 북한에서 중앙통신사 부사장을 지낸 차관급의 거물 간첩이 혼자 돌아다니면서 국가기밀에 관련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당국이 방치했을 리가 없고, 그에게 정보를 누설한 사람이 있었으리라고 믿을 수도 없다.

李穗根이 국가기밀을 탐지했다면, 해당기밀을 취급한 사람이나 李穗根을 전담한 중정 요원, 정보누설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고 따로 처벌을 받았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 그 문제로 처벌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중정의 주장대로 내가 홍콩 구룡반도 우체국에서 암호문이 들어있는 성경책을 우송했다면 홍콩 우체국에 그 발송근거가 명기되어 있었을 것이고 중정은 보다 명확한 증거를 위해 그 근거를 함께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암호문을 우송했다면 그 근거가 남아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라, 부르는 대로 받아쓰고 묻는 것만 대답하라』며 고문을 계속했다. 이 사실은 명백히 채증법칙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 받은 고문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다. 나와 연루돼 조사를 받았던 누이동생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1968년 8월20일에 내가 사이공에서 알게 된 金모씨와 함께 일시 귀국했던 까닭은 閔庚學에게 일임했던 트럭의 운명문제를 매듭짓고, 손아래의 金과 당시 경기가 좋던 사이공에서 식당이나 기타의 새로운 사업을 할 계획 때문이었다.

8월22일 나는 출입국을 하는 동안 잘 알고 지내던 홍콩의 대한 여행사 사장 내외가 타워호텔에서 묵었다가 출국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 종암동을 나온 나는 김포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시트의 비닐커버도 벗기지 않은 신형 코로나였다. 전송을 마치고 나면 바로 외무부 여권과로 가서 여권의 유효기간을 연장하려던 참이었다.양복에서 택시요금을 꺼내주고 내린 나는 공항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차안 왼쪽 자리에 여권이 든 손가장을 놓고 내린 것을 깨달았다. 뒤돌아 서자 택시가 막 떠나고 있었다.

내 운명을 바꾼 여권분실

뒷차를 타고 쫓았다. 영등포, 서교동, 강변도로의 갈래 길로 갈라지는 양화대교에서 끝내 앞차를 놓치고 말았다. 내가 탄 차는 구형이었던 탓에 신형 코로나의 속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양화교 파출소에 있는 검문소에서 내려 방금 간 앞차에 대해 묻자, 검문은 했어도 뒷좌석은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타고 왔던 택시를 다시 공항으로 돌려 여행사 사장을 보낸뒤에 나는 바로 당시 낙원동에 있는 MBC방송국으로 가서 방송을 내보냈고, 시경 교통과에도 들러 대충 기억나는 대로 차량번호를 수배했다. 외제 손가방의 모양새가 좋아 누구든 욕심을 낼 만 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 안에는 값나갈 물건이 없었고 여권에는 분명히 내 주소가 기재되어 있었으므로 바로 돌아오리라 믿었다.
닷새가 지나도 여권은 돌아오지 않았다. 8월27일, 나는 동아일보에 「분실여권 E11425 비행기표 주사카드 국제면허 기타, 68년 8月22日. 김포공항착 택시內에서, 연락처 電④8057 연락要 사례하겠음. 배경선」이라는 여권 불신공고를 냈다.
이듬해 1월에 李穗根과 함께 입북할 예정이었다면 전혀 불필요한 절차였다.

분실공고를 내고도 여권을 찾을 수 없자 같이 귀국했던 金은 내가 여권을 재발급받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먼저 사이공으로 떠났다. 머지않아 출국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나는 그때 金을 통해 내 짐과 사업준비에 필요한 상당한 돈까지 함께 맡겨 보냈다.
여권브로커가 成洛永과 朴昌錄은 먼저 떠난 金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여행사에서 여권 대행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됐다. 분실한 여권이 돌아오기를 일단 포기한 나는 새 여권을 발급받는 데 필요한 모든 수속 절차를 그 두 사람에게 맡겼다.
李穗根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여권이 새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가끔씩 종암동에 놀러온 李穗根과 동행하여 관악산 부근의 작은 절과 구파발의 진관사에 놀러간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여름철의 다른 향락객들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내가 여권을 분실한 사실을 모르는 李穗根은 나를 바로 출국할 사람으로 알았고 출국문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모두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평범한 것들이었다.

지난 4월에도 귀국해서 오래 머물지 않았던 내가 몇 달이 지나도록 특별한 일도 없이 체류하자 그때서야 李穗根은 어째서 출국하지 않는가 물었다. 나는 그저 여권을 잃어버렸고 여행사에 맡겼는데 시일이 제법 걸리는 모양이라고만 말했다. 그도 더 따져 묻지 않았다. 여권을 부탁받은 成洛永과 朴昌錄은 처음에 내게서 받은 돈을 모두 써버리고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길어야 한두 달이면 나올 수 있는 여권이었으므로 나는 그를 찾아 성북동과 돈암동을 오갔다. 成, 朴 두 사람 때문에 나는 결국 이 불행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이었다.
미아동에 있는 李穗根의 집으로 한번 놀러오라는 전갈이 온 것은 1968년 11월경이었다. 식모만 한 사람 있었을 뿐 텅 빈 집에서 응접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李穗根이 『여행사에 맡기면 여권을 만들 수 있느냐?』하고 물었다. 그리고 대충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李穗根의 중립국行 계획

『여권 발급에 필요한 수속을 대행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업무다』
『그 여권을 갖고 외국에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여행을 하려고 그러는가?』
『아니다. 여기서 사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몇 차례 그를 만나는 동안 그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후일 알게 된 바로는, 그 가장 큰 원인이 정보부의 지나친 감시와 추궁에 있었던 것 같지만 그때는 단순히 북한의 가족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9월14일에 반도호텔에서 올린 李江月(당시 36세)과의 결혼식은, 귀순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결혼을 하니 자신도 그렇게 됐을 뿐이라며, 인륜대사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역시 李江月과는 그때나 이후에도 단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우리들의 대화는 처음에 북에 두고온 가족들의 문제를 꺼낸 것부터 시작됐다. 李穗根이 다시 말했다.
『내가 중립국으로 갈 수 있다면 좋은 방법이 생길 것이다』
『무슨 뜻인가?』
『나는 남북의 사회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다. 양 체제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 중립국이므로 나는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보내달라고 할 것이며, 그러면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내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려 들 것이 아닌가. 살기는 남한이 좋으니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겠는가』

그의 생각대로 중립국에 가서 한동안 글을 쓴 뒤 가족을 데리고 온다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생활을하는 동안 한 번도 남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나의 단순한 성격과 정치 상황에 대한 무지가 그런 생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그밖에 李穗根은 우리나라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며, 더 연구해서 통일 문제에 관해서도 글을 쓸 것이라고 덧붙였다. 도움을 주고는 싶었지만, 나의 여권도 발급받지 못한 상황에서 도와주겠다고 결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여권을 신청하려면 사진을 붙여야 하는데 세상이 이모부의 얼굴을 다 알고 있지 않는가?』
『내가 평소 얼굴이 알려졌기 때문에 술집 등에 갈 때는 가발을 사용하니까 잘 모르더라』
그때 처음으로 그가 쓰고 다니던 가발을 보여주었다. 만일 이러한 이야기들로 李穗根이 나를 포섭한 것이라면, 내쪽에서도 포섭당할 만한 이유가 더 있어야 했다. 당시의 한 신문을 보니, 「68년 7월 귀국한 裵는 운송사업을 한다고 설치다가 자기집과 동생집을 잡히고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는 터무니없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마치 내가 돈에 궁해 李穗根과 접촉하게 된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여권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내가 쓴 돈이 더 많았다. 사이공에서 근무하면서 내가 받은 보수는 당시 돈으로 월 50만원이 넘었고, 閔庚學과 합자하여 운영한 트럭도 매달 1백만원의 수입을 가져오고 있던 때였다. 종암동의 집을 살 때 들어간 돈이 1백만원 정도였으니 나는 도리어 李穗根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돈을 한창 벌 수 있었던 호기를 놓친 것이었다.

위조여권 나오다

1970년 11월23일에 대전교도소 교도보 김정중을 증명인으로 하여 작성한 민경학에 대한 고소내용서에는 「일제 덤프트럭 12t과 8t 두 대를 1968년 4월19일부터 1968년 8월31일까지 운영하였다」고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운송사업을 시작한 것은 여동생 裵朝美의 결혼식 때문에 귀국했던 4월부터였던 것이다.
근저당을 잡힌 집 또한 종암동의 집 뿐이었지 내가 손수 지어준 독산동의 동생집은 저당과는 무관했다. 저당을 잡힌 이유도 고소내용서에 적힌대로 閔庚學에게 사기당한 뒤 8t 트럭을 인수하면서 들어갈 돈이 필요했고, 成洛永이 여권수속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돈을 더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李穗根과 내가 북한으로 갈 계획이었다면 저당을 잡힐 것이 아니라 아예 매매에 넘겼을 것이다. 저당은 나중에 다시 찾을 것을 전제로 하는 행위였다. 나의 아버지 裵明國은 여순반란사건 때 토벌대로 순직한 공무원이었고, 나는 소박한 생활인으로서 노력한 만큼 벌어 남 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꿈이었던 젊은이었을 뿐이다.

검찰은 李穗根이 「68년 4월 사이공에서 귀국한 배경옥을 만나 북괴와의 접선이 안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홍콩, 프놈펜을 통해 입북키로 모의했다」고만 막연히 밝혔을 뿐, 그 과정을 상세히 밝히지는 못했다. 내가 여권을 분실한 8월에 이미 李穗根과 입북키로 모의가 끝난 상태였다면 여권브로커에게 내 여권을 부탁한 9월초에 李穗根의 여권도 같이 만들도록 서둘렀을 것이다.
李穗根의 여권을 부탁한 것은 그보다 3개월이나 더 지난 11월이었다. 만일 成洛永과 朴昌錄이 내가 처음 여권을 부탁했을 때 바로 수속을 밟았다면 나는 李穗根과 더 만날 필요없이 사이공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이후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1968년 11월에 나는 成洛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솔직히 말해달라. 한 사람 더 갈 사람이 있는데 여권을 하나 더 만들 수 있겠는가?』하고 묻자 그는, 『사실 그동안 받은 돈을 다른 곳에 썼기 때문에 수속을 밟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기왕 안나온 것이나, 한 사람 더 해서 돈을 주면 이번에는 빨리 만들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후 나는 成洛永이 시키는 대로 북창동 시장의 이북 5도청 앞에서 인장업을 하던 吳濟寧씨에게 증명서류와 사진을 준비하도록 했다. 成으로부터 『신원조회만 마치면 72시간안에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을 것이니 吳씨와 같이 담당형사를 만나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라』는 말을 듣고 吳씨와 같이 영등포경찰서로 간적이 있었다. 전에도 여권서류를 준비하면서 吳씨에게 도장을 새긴 적이 있었다. 그저 얼굴만 아는 정도였는데 成洛永은 다른 사람들의 여권에도 많이 관계하고 있었으므로 吳씨는 잘아는 듯했고 여권과에 가서 수속을 밟는 모든 과정도 그가 도맡아 처리하였다.
1969년 1월에 마침내 나는 吳濟寧의 여권과 동시에 내 여권을 발급받았다. 吳씨 여권에 李穗根의 가발쓰고 콧수염 단 사진을 바꿔붙이고 여권과에 가서 철인을 받아온 것도 成이었다. 그리고 비행기표도 成洛永의 소개로 반도 아케이트 커피숍에서 여행사직원을 만나 구입했다. 1969년 1월27일이었다.

종암동을 나온 나는 여권브로커들과 만나던 북창동의 한 다방에서 李穗根과 만났다. 근처에 에ㅆ는 평창여관에 들어가 낮에 잠시 투숙했던 우리는 여관에서 함께 나와 원호청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 李穗根의 연락을 받고 나온 李씨의 조카 金世埈과 내가 시간제로 대절한 지프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은행에 들어갔다 나온 李가 『지점장이 없으니 그냥 가자』라고 말해 우리는 평창여관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나는 상업은행 본점으로 가서 내 여권과 吳濟寧 명의의 李穗根의 여권, 비과세증명서를 제출하고 4백달러를 바꾸었다. 그 사이 金世埈은 李씨의 심부름으로 영한·한영 사전과 「중국어 4주간」등의 책을 사왔다. 李穗根이 가발과 콧수염으로 변장한 뒤,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온 우리는 제일은행 앞에서 공항까지 대절한 지프를 탔다.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양평동에서 살던 崔모와 함께 기다리던 누이동생 배인향이 동승했다.

홍콩에서 캄보디아 비자얻다

검찰은 공소사실을 통해 우리가 「대절한 지프로 배의 여동생 배인향과 배의 약혼녀 최모여인을 환송가족으로 가장, 동승」시켰다고 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우리가 입북을 모의한 사람들이었다면, 오히려 가족들에게 출국 사실을 숨겼을 것이고 더더욱 공항까지 같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가족들은 나의 출국일자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입북할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裵仁香은 가발을 쓰고 콧수염을 붙인 李穗根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출국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金世埈을 통해 구입한 영한사전과 「중국어 4주간」의 책은, 만일 우리가 북한을 행선지로 잡았다면 전혀 쓸모가 없는 책이었다.
그날 오후 5시30분에 CPA기로 김포를 떠난 李穗根과 나는 일본, 대만을 거쳐 홍콩에 도착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통관을 마치고 험프리 호텔에 투숙한 우리는 곧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1월28일 아침에 일어난 우리는 호텔 객실에서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李穗根은 태국이 아니라, 비자없이도 얼마간 머물 수 있는 유럽 쪽으로 가기를 원했던 것이나, 마침 유럽행 비행기편이 마땅치 않았다. 바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자 李穗根은 『그러면 가까운 중립국인 캄보디아로 일단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은 캄보디아 영사관에서 입국비자를 받아 항공사에서 비행기 예약도 해야 한다』라고 말한 뒤 호텔 로비에 내려갔다.

로비 카운터의 중국인 직원에게 캄보디아 영사관의 위치를 묻자 전화를 걸더니 곧 주소를 적어 주었다. 나는 훼리호를 타고 마주 보이는 홍콩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홍콩의 거리가 모두 번지수로 표기되어 있어 쉽게 영사관을 찾아갔다. 캄보디아 영사관에서 비자를 받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목적을 물었을 때 나는 관광이라고 대답했고 그러자 바로 관광입국 비자가 나왔다.
사이공을 오가면서 나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의 프놈펜을 경유하여 홍콩에 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부담감은 없었다. 일단 프놈펜으로 갔다가 거기서 나는 사이공으로 들어가고, 李穗根은 보다 안전한 스위스 같은 나라로 가서 몇 달이 지나면, 그의 말대로 모든 일이 해결 되리가고 생각하였다. 프놈펜까지, 나는 여행을 안내한다는 기분이었고 사실 우리가 발급받은 비자 역시 관광용이었으므로 오랫동안 머물 형편도 아니었던 것이다.
28일 오후까지 李穗根은 호텔에 머물러 있다가 내가 돌아오자 저녁에 둘이서 외출을 나가 선상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1월29일 오전 내내 李穗根은 호텔에 머물러 있었고 나는 거리를 한바퀴 돌고 왔다. 오후에 카이탁(啓德)공항으로 나간 우리는 2층에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비행기에 실었다. 2층 로비에서 개찰을 기다리다가 곧 탑승을 알리는 방송을 듣고 바로 여행객과 공항관리국 직원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아래층 제한구역으로 들어갔다.

북한 가려면 홍콩에서 갔을 것

한국 영사관 직원들과의 실랑이는 출입국자 제한구역에서부터 시작됐다. 복도를 지난 李穗根이 저만큼 앞에서 서서히 걸어갔고, 나는 얼마간 떨어진 거리를 두고 뒤따랐으므로 李穗根과 한국영사관 직원들이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목격할 수 없었다. 홍콩 경찰에 의해 제지된 우리는 공항대합실에서 잠깐 머물다가 이내 공항관할 경찰서로 옮겨졌다.
우리가 홍콩 경찰에게 넘겨진 뒤로 영사관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별다른 조사를 받지는 않았고, 『왜 트러블이 발생했느냐』정도의 이야기만 오갔다. 공항에서 격투를 벌이는 와중에서 李穗根의 팔이 탈골되었기 때문에 우선 병원에 가자고 하여 그들과 같이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홍콩의 일반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경찰의 감시는 별로 심한 편이 아니어서 자유롭게 화장실도 갈 수 있었다. 나는 비자 없이도 일주일간 체류할 수 있는 홍콩의 지리를 훤히 알고 있었다.
입북을 기도했다면 이때 얼마든지 도망할 수 있었다. 47세의 李穗根이라면 모르지만 서른을 갓 넘긴 나이의 나는 건강했고, 얼마든지 도주가 가능한 일이었다. 병원에서 뿐만 아니라 홍콩에서 2박을 하는 동안에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홍콩에서는 어디든지 공산당 간판이 붙어 있었고, 마카오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북한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李穗根이 간첩이었다면 구태여 캄보디아로 가는 비행기 시간을 기다릴 이유가 있었을까.

李穗根은 1969년 4월10일의 1차공판에서 이에 대해 『처음 홍콩에서 배경옥을 월북시킬 계획도 했으나 홍콩의 소련대사관을 통해 월북해야 환영도 못 받을 것 같아 중립국 캄보디아로 가기로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같은 날 그는 또 『홍콩으로 출발 직후 국내수사망이 뒤쫓고 있는 것을 느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 두 가지의 상반된 진술은 그 어느쪽도 자의에 의한 진실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위장까지 하면서 김포공항을 그토록 어렵게 빠져 나온 상황에서 입북할 계획이었다면 캄보디아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저녁에는 관광삼아 해상궁전(Sea Palace)으로 불리우는 3층 배 위에서 식사까지 할 수 있는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공항에서 경찰에 연행되기 전에 李穗根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스파이가 아니라 정치적 망명객이다』
나는 21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을 믿는다.

탑승거부도 가능했지만…

홍콩에서 2박하는 동안 우리는 홍콩의 법을 어긴 일이 없었다. 따라서 홍콩 경찰이 출국수속까지 마친 우리를 연행, 억류시킬 근거 또한 없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공항 경찰서로 돌아와 지문을 찍었다. 조사는 다음날인 1월30일에 보다 상급 기관으로 보이는 경찰서에서 있었다. 서로 다른 방에서 조사를 받았으므로 나는 李穗根에 대한 조사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게는 李穗根과의 관계, 여권 문제 등을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만 대답했다. 『어디로 갈 것이냐』는 물음에 『나는 사이공에 직장을 두고 있는 사람이므로 프놈펜으로 갔다가 사이공으로 갈 것이다』고 말했다. 뚱뚱하고 키가 작은 중국계 간부가 질문했고 한국인 교포가 통역을 맡았다. 조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공항 경찰서로 옮겨져 그곳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있었다. 그날 밤 李穗根은 『정식으로 망명을 요청했고 중립국으로 갈 수 있도록 이야기가 됐으니 안심하라』라고 말했다.
나는 『일이 잘 되어 이모부가 가족들을 데리고 귀국할 수 있게 되면 좋겠지만 저는 월남에서 생활하다가 돌아갈 사람인데 이렇게 되었으니 참 난처합니다』하고 말했다. 생각은 많았지만 이야기를 나눈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더 긴 말은 나누지 않았다. 나는 李穗根이 처음 말한 대로 되리라고 믿었었던 편이었다.

1월31일 아침에 곧 떠나게 될 것이라며 李穗根과 경찰이 나는 깨웠다.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우리의 행선지가 어느 쪽으로 결정됐는지 알지 못했다. 사이공을 경유해 프놈펜으로 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오전 7시경, 중국인 간부가 중국인 무술 경관인 듯한 13명과 함께 검은 승용차로 안개가 자욱한 카이탁 공항에 도착해서였다. 검은 승용차에서 내린 우리는 바로 비행기를 타러 갔고 수속은 경찰이 특별히 절차를 밟아 대신했다.
우리를 조사했던 중국인 경찰간부와 건장한 사복경찰 서너명이 직접 기내에 들어와 비행기 이륙직전까지 있다가 잘 가라는 말을 했다. 외신에 의하면 홍콩경찰은 한국영사관측에의 인도를 거부하고 우리를 석방했으며 홍콩정청은 우리를 구속할 충분한 증거가 없었다고 해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놈펜으로 바로 가는 비행기를 태우지 않고 사이공을 경유하도록 한 것은 이미 우리 정보부 직원들의 손에 우리를 맡긴다는 뜻이었다. 나는 탐승을 거부할 수 있었고 홍콩경찰이 강제로 태울 수는 없었다.
내가 잘못한 점은 여권을 위조한 일에 협조한 짓 뿐이었으므로 나는 그 잘못에 대한 처벌을 받기로 각오했다. 나의 가족들은 서울에 있었고, 그곳에서 처벌을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간첩이 아니었다. 사이공의 탄손누트공항까지는 두 시간 가량이 걸렸다.

조사과정은 조작과정

경유지인 사이공공항에서 여행객들은 일단 모두 내려 면세지역 내에서 대기하다가 다시 타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른 손님들이 모두 내렸다. 우리도 내렸다가 다시 타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가 말하자 李穗根은 무조건 내리지 말자고 했다.
그는 아마도 기내가 치외법권인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잠시후 한국인 두 사람이 기내로 들어왔다. 후일 알았지만 그중 한 사람은 주월 대사관의 李大鎔 공사였다. 나는 이미 체념한 상태였으므로 『대사관에서 왔습니까?』라고 물은 뒤 여권을 건네 주고 먼저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날 기내에 스튜어디스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대사관 직원과 우리를 제외한 다른 승객은 한 명도 없었다. 李穗根이 체포되는 순간은 나도 보지 못했다. 「李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국제공항에서 대기한 한국 관계기관원과 월남경찰관에게 체포되는 광경을 목격한 파월기술자 李種敏씨는…」 하고 보도한 당시 신문의 저의가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하다. 단순한 오보가 아니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체포되는 순간부터 구속기소되어 실형을 받게 되는 순간까지 중앙정보부의 조작과정에서 언론이 협조할 수 있는 길을 트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대기시킨 승용차로 주월대사관으로 간 우리는 수갑을 차고 앉았다. 그날 밤 서울로 향하기전까지 특별한 조사는 없었다.

1969년 1월31일 밤 11시가 가까워 우리는 C-54 한국공군 전용기편으로 사이공을 출발했다. 필리핀 크라크 공군기지에 잠시 기착했다가 다음날 아침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는 눈이 쌓여 있었다.
이후 사건 수사에서 형 집행까지의 모든 과정은 중앙정보부가 간여하여 이루어졌다. 남산의 중앙정보부 퀀셋건물에서 서대문 구치소로 가기 전까지 수갑을 차고 의자에 앉아 나는 단한숨도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낮과 밤의 시간은 물론 날짜 감각까지 완전히 잃은 채로 시간을 흘렀다.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나중에는 다리와 몸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문에 대한 답변으로 진실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조사과정은 바로 조작과정으로 통했다. 나는 다만 그들이 불러주는대로, 그리고 이미 문답식으로 작성된 자술서를 썼고, 시인했다.
내가 사실대로 말한 것도, 李穗根이 달리 대답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면 나는 『그렇다면 그것이 맞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내게 야전용 전화기를 돌리는 전기, 구타 등의 고문은 한번 까무러쳤다가 깨어나면 그만이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들이 교대로 돌아가며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이었다. 책상의 작은 흠집 하나, 무늬 하나가 꿈틀거리는 뱀이나 맹수처럼 헛것을 보게 되는 환각상태가 계속됐다.
후일 나는 정신이상이 이렇게 시작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조사받는 대상은 裵慶玉이라는 한 인간이 아니라 단지 조작 대상으로 지목된 물건에 불과했다. 형량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조사가 빨리 끝날 수만 있다면 죽음이라도 좋았다.
단 하루도 자지 못했으므로 중정에서 서대문으로 넘어온 날짜는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중앙정보부 수사관은 나에게 대한민국은 3부가 아니라 4부이며 그중 중앙정보부가 최상위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할 정도였으므로 그곳에서 진술이 통용되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서대문으로 넘어온 뒤에도 검사가 구치소로 직접 와서 취조를 했고 그는 내게, 너는 재판도 필요없고 그냥 처벌해야 되지만 대한민국이 좋아서 재판을 한다면서 중정에서 꾸민 조서를 확인대조하는 데 그쳤다. 수사의 시작부터 검찰의 조사, 재판과정까지 계속해서 중정의 직원이 입회 관여하였고, 그밖의 관련 부서는 자의적으로 사건을 처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는 직접 경험하였다.

법정에서도 정보부원 감시

1차 공판은 1969년 4월10일 오전 10시에 서울형사지법 합의6부에 의해 대법정에서 열렸다.
아침에 교도소 호송차로 수송되어 공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법원구치감에서 기다릴 때였다. 무심코 구치감의 뒷창문을 통해 맞은편 건물2층을 쳐다보는 순간, 사무실 창가에서 안경을 쓰고 이쪽을 주시하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재판을 받기 전에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공소사실을 그대로 시인하라는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정보부직원인 것을 즉시 알아보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포감은 법정에서도 계속되었고 나와 이모부는 그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무조건 『예, 예』하였다. 4월10일과 24일 사실심리를 거쳐 5월10일 李穗根과 나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항소를 하지 않은 李穗根은 종범인 내가 1심에 계류 중이던 7월2일 형이 집행되었다.

1969년 사이공에서 우리를 체포한 당시 주월공사 李大鎔씨는 20년이 지난 지난해에 『李穗根이 간첩이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말하면서, 사건이 끝난 뒤 월남의 티우 대통령이 방한 했을 때 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이 사무실로 불러 『李穗根이가 이중 간첩이라고 발표했는데 그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은 李공사가 더 잘 알지 않소. 그렇다고 李穗根을 살려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몇 사람밖에 안되니 절대로 보안에 붙여야 합니다』라고 당부했다고 밝혔다.
또한 1969년에 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이었던 洪弼用씨도 李穗根의 위장 귀순여부를 판단한 부서의 책임자로서 이렇게 말했다.
『李穗根은 귀순 직후부터 내가 그를 데리고 보름간 같이 있으면서 조사를 했고, 그뒤에도 1년간 안가에서 생활하게 하고 대중강연·좌담 등은 시키면서 관찰했다. 1년 뒤 관계관들이 회합하여 李는 위장귀순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회의에서 별다른 이견을 낸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귀순동기가 딱 부러지게 나타나지 않아 판단하는 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위장귀순은 절대로 아니었다』고 밝혔다.

고문과 구타로 몸은 망가지고

지금의 나의 생각으로는 북한의 독재정치에 혐오를 느껴 자유 대한으로 귀순했으나 과잉 감시속에서 인간적인 수모와 괴로움을 당하다 못해 제3국인 스위스같은 중립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려던 것으로 여겨진다.
2심을 거쳐 12월23일 대법원에서 무기형으로 확정된 나는 1970년 3월3일에 대전교도소로 이송되었다.
내가 구속당할때 가족으로는 어머니, 처, 장남 輝勳(당시 4세) 장녀, 珍姬(1)를 두고 있었다. 처는 내가 광주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 극진하게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러나 73년 11월 이후 소식이 끊겼다. 장남은 지금 25세, 장녀는 22세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간첩의 자식」이라는 굴레가 처와 남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나는 옥중에서 동양화에 취미를 붙여 85년에 제12회 전남지역 교정상품 전시회 한국화부문에서 동상을 받았고, 88년의 광주직할시 미술대전에서 입선을 차지하였다.

열관리기능사 2급자격증도 땄다. 옥중에서 나는 복부내양성종양을 얻어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다. 출감뒤 안동교도소에 보관돼 있는 종양관계의 엑스선필름과 의사소견서를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 진료자료는 내가 내돈으로 일반병원에서 진료를 받아 생긴 것인데 교도소에서는 나에게 개인적으로는 줄 수 없다고 하니 자본주의국가에 이런 법도 있는지 모르겠다.
교도소에서 구타당하여 좌측견갑관 절탈골로 수술을 받았으나 어깨는 기형이 돼버렸다. 중앙정보부에서 받았던 고문의 후유증으로 무릎관절 통증은 지금도 계속중이다. 교도소에서 나와보니 서울이 너무나 복잡하고 공기는 혼탁하여 자동차를 타면 멀미고 목이 아프다. 처자식을 찾아나서기 전에 몸부터 바로잡아야 할 형편이지만 교도소에 있을 때부터 줄곧 나를 보살펴주고 있는 동생의 신세를 지금도 지고 있는 마당에 과연 이 세파를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것이다.

전향강요는 조작은폐가 목적

교도소 당국의 전향 권유에 대해 나는 애당초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전향을 하여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고 거부하였다. 교도소에서는 일단 국가보안법으로 형이 확정된 이상 전향을 하여야 빨리 석방될 것이라고 말했다.
70년 7월 나는 전향서를 제출하였고, 전향이 확정되었다는 통고까지 받았다. 전향서를 쓰기까지 받게 되는 회유, 기만, 구타, 고문 등의 비인간적인 행위는 접어두더라도, 전향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안수를 국민의 일원으로 복귀시키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사건의 조작이나 수사, 재판 과정에서의 고문과 모순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요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1973년 11월3일에 재 이감된 광주교도소에서 16년이 지났다. 서른둘의 건강한 청년이었던 나는 어느덧 50대로 접어들었다. 1988년 12월20일 신문을 읽던 나는 무기수 裵慶玉이 20년형으로 감형된 것을 알았다. 감정의 변동은 없었다. 차갑고 축축하고 좁은 감방 속에 기쁨이나 슬픔같은 인생의 감정을 내던지고 살아온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앞으로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은 지난 21년보다 길지 않을 것이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힘도 없었다. 단 한 가지 남은 희망은 21년간 닫혀 있던 진실이 진실로서 열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다.
전향한 지 20년이 지나도록 나의 사상이 건전하지 않다거나 교정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내가 아니며 당국의 교화정책에 있을 것이었다.

공안사범 수형 교도소에서는 전향공작 전담반이 있어서 계속 사상검토와 추수지도 등을 통해 나를 교화한 20년의 세월동안에도 그들이 원하는 「바른」 사상을 내가 갖지 못했다면 그들은 당연히 나의 전향을 취소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20년의 수감 생활에서 나는 사상이 건전하지 않다고 지적받아본 시실이 없고, 전향을 취소한다는 통고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정작 문제가 있는 쪽은 내가 아닌 그들이었다. 따라서 나는, 나의 양심의 소리에 의해 이러한 원천적 제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결연히 거부하는 것과 동시에, 20년 전의 전향서가 원인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왜냐하면 본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며 얼마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건전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겠다는 나의 뜻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향 원인 무효선언 청원서에 대한 법무부장관의 답변서는 1989년 4월말까지 받아볼 수 있도록 광주교도소와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1989년 5월16일에 나는 안동교도소로 다시 이감되었다. 그들은 직무유기를 통해 국가공무원의 공신력을 실추시켰고 나를 우롱했다.
1989년 5월15일에 광주교도소에서 나는 노태우 대통령을 수신인으로 하여 직접 관계관을 보내거나 최소한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정확한 답신을 기다리겠다는 위와 대동소이한 내용의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안동교도소로 이감된 후 1989년 10월22일에 법무부 순열관을 청원 면담하여 전향서의 의미와 목적, 공안사범의 차별적 처우에 대한 불복이 있음을 청원했으나 법무부장관의 서면답변서를 받아보지 못하고 1989년 12월22일에 나는 형기가 만료되어 교도소를 나와 관할 경찰서에들러 보호관찰자 신고를 마쳤다. 만 20년의 징역살이였고, 홍콩 경찰에의해 억류된 때로부터 권력을 움켜쥔자들에게 한 인간의 삶이 무참히 짓밟힌 만 20년 11개월의 구금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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