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벼랑에 몰려 死活을 건 생존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생존투쟁에 나서도록 신라를 벼랑으로 몰아붙인 것은 백제의 의자왕이었다. 신라 삼국통일의 세 元勳 金春秋, 文武王, 金庾信은 원한과 분노와 걱정을 담고 산 사람들이다. 이런 감정이 그들뿐 아니라 신라지도부에 위기의식을 심어 젖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는 생존투쟁을 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超人的인 힘이 모여 당초 목표보다 더 높은 삼국통일을 가능케 한 것이다. 삼국통일은 신라 지도부에겐 생존투쟁이면서도 일종의 복수극이었다. 이념은 감정이란 말이 있다. 감정이 이념, 즉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역사를 바꾸는 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 列傳 김유신條에 이런 글이 있다.
<공의 나이 17세였는데 고구려, 말갈, 백제가 국토를 침략하는 것을 보고 강개하여 구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떠나 중악 석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알리어 맹세하기를, '적국이 無道하여 이리와 범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요하니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미약한 신으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禍亂을 없애기를 뜻하니 오직 하늘이 하강하시어 저에게 능력을 빌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난승이란 노인을 만나 말하기를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과 머리가 아프므로 저의 정성을 민망히 여기시어 방술을 가려쳐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백제 의자왕은 초기에는 海東曾子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善政을 베풀었다. 그의 실수는 외교에서부터 왔다.
그는 고구려, 倭와 동맹하여 신라를 여러 번 쳤다. 특히 서기 642년 백제 장군 允充이 지금의 합천 大耶城을 친 것이 문제였다. 당시 政界의 실력자 金春秋의 사위 品釋이 대야성을 지키고 있다가 妻子와 함께 항복했다. 윤충은 품석 부부와 자녀들을 모두 죽이고 머리를 잘라 의자왕에게 보냈다. 왕은 윤충을 표창하고 신라 사람 1000명을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종일 기둥에 의지하여서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하더니, 얼마 후에 말하기를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하고 곧 왕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臣이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싶습니다'라고 하니 왕(선덕여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대야성의 비극은 金春秋의 원한이 되었지만 그는 목숨을 건 통일외교로써 이 원한을 민족통일 의지로 승화시킴으로써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백제는 대야성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항복한 敵將을 죽임으로써 신라 지도부에 원한을 심어 결국은 결정적 패배를 자초하고 만다. 백제군이 항복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을 죽인 데는 아마도 서기 554년에 진흥왕의 군대가 관산성(지금 충북 옥천) 싸움에서 백제의 聖王을 죽인 뒤 시체를 땅속에 파묻고 밟아버린 것에 대한 복수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김춘추는 고구려, 일본, 唐을 오고가면서 동맹외교를 시도하다가 羅唐동맹을 성공시킨다. 당시 세계최강대국과 손잡은 신라는 백제-고구려-왜의 남북3國동맹을 차례로 격파한 뒤에는 唐과 결전하여 삼국통일을 완성한다. 30여년이 걸린 통일과정이었다.
신라의 승리와 백제의 패배는 동맹국의 선택에 의하여 결정났다. 삼국사기의 편집책임자 金富軾은 백제本紀의 마지막 장에서 평하기를 '백제는 이웃과 친하게 지내지 못했고 大國(唐)의 명령을 어겼으니 그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이승만이 6.25 전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韓美동맹을 만들어 자유통일의 발판을 놓은 것은 김춘추가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목숨을 건 외교로써 羅唐동맹을 맺어 삼국통일의 근거를 구축한 것과 통한다. 노무현식으로 동맹을 우습게 여기는 자세는 위기의식이 없이 오만하다는 증거이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여 동맹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自蔑을 예약한다.
서기 660년 羅唐연합군은 사비성을 점령하여 백제를 멸망시킨다. 삼국사기엔 金法敏(뒤에 문무왕)이 복수하는 장면이 나와 있다.
<의자왕의 아들 隆이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니, 金法敏(뒤에 문무왕)은 융을 말 앞에 꿇리고 그 낯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지난 날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원통하게 죽이고 옥중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간 마음 아프고 머리 앓게 하였으니, 오늘의 네 목숨은 나의 손에 있다'하니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이 없었다(서기 660년)>
唐은 백제를 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舊백제땅을 다스리게 하니 신라는 불만이 많았다. 唐은 패전국의 왕자인 부여융과 승전국의 王인 문무왕이 일종의 의형제 관계를 맺어 화해선언을 하도록 강요했다. 한때 부영융의 얼굴에 침을 뱉었던 문무왕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백제 부여융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 제사를 받들고 옛 땅을 보존케 하니 신라와 서로 의지하여 여국이 되고 각자 묵은 감정을 없애 화친을 맺을 것이며 각각 詔命(조명)을 받들어 번속이 되어야 한다' 운운(서기 665년 문무왕과 부영융의 웅진 취리산 盟文)>
서기 668년 羅唐연합군은 평양성을 쳐서 드디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고구려 땅을 다스리고, 백제땅은 부여융이 대리통치를 하도록 하고, 신라의 문무왕은 鷄林대도독으로 임명하여 한반도를 속국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문무왕과 김유신은 이에 對唐결전을 결심하고 먼저 舊백제땅을 공격한다. 唐이 설인귀 장군 이름으로 경고서한을 보낸다. 문무왕이 쓴 답장엔 이러한 대목이 있다.
<'신라와 백제는 屢代의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형상을 보면 따로 한 나라로 자립할 모양이니 100년 후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呑滅(탄멸)될 것이다. 신라가 이미 국가의 州인 이상 두 나라로 나눌 수 없는 일이니 원컨대 한 집안이 되어서 길이 후환이 없도록 해달라'하였소(671년 문무왕이 唐將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서)>
즉 신라가 절망적 상황에서 당시 세계최대의 제국과 결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은, 한반도에 대한 唐의 통치가 오래 가면 백제가 다시 일어나 신라를 쳐서 자손들을 다 죽일 것이라는 공포감이었다. 신라는 또 벼랑에 몰린 것이다. 이 벼랑에서 떨어죽느니 날아버리겠다고 높이 뛰었다. 運도 따라주어 신라는 對唐결전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대한민국이 지금 신라처럼 벼랑에 몰렸다. 핵무장한 김정일 정권과 이 김정일에게 굴종하는 노무현 정권, 그리고 김정일의 심부름꾼이 친북좌익 세력으로부터 포위당했다. 우리 편이어야 할 미국은 盧 정권의 反美 정책으로 구경꾼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기사회생의 복수전을 펼치지 않으면 100년이 가기 전에 빨갱이들에게 자손이 모두 呑滅될지 모른다. 신라가 당을 상대로 한 전쟁을 결단하여 자존과 독립을 지켜냈듯이 국민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할 순간에 서 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이런 위기의식을 느끼느냐이다.
민족사의 결정적인 危機와 好機에 처하여 내어놓는 대운하 계획이나 열차페리 구상은 소꿉장난 수준이 아닌가? 민족의 챔피언이 되어 김정일과 맞서 자유통일을 완수할 김유신型의 지도자는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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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를 읽으면서 보름달을 보니
조갑제
지금 보름달이 창밖으로 보인다. 구름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를 되풀이 하면서 하늘을 가고 있다. 마침 三國史記를 읽고 있는데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 20년(660년)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귀신 하나가 궁중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게 했더니 깊이 석자쯤에서 한 마리의 거북이 나왔다. 그 등에 글이 써 있었는데 이르기를 '백제는 月輪(달바퀴)과 같고 신라는 新月과 같다'고 하였다. 왕이 이를 巫者에게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월륜과 같다는 것은 찼다(滿)는 것이니, 차면 기울 것이요, 신월과 같다고 함은 아직 차지 않았다는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月輪과 같다는 것은 盛을 의미한 것이요, 新月과 같다는 것은 미약을 뜻한 것이니, 생각컨대 국가는 성하고 신라는 점점 미약해진다는 것일까 합니다'라고 하나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보름달은 작아지고 초승달은 커지는 것처럼 나라의 운명에도 계절처럼, 天文처럼 거역할 수 없는 원리가 있다는 지극히 동양철학적인 기술이다. 백제 의자왕은 초기에는 海東曾子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善政을 베풀었다. 그의 실수는 외교에서부터 왔다.
그는 고구려, 倭와 동맹하여 신라를 여러 번 쳤다. 특히 서기 642년 백제 장군 允充이 지금의 합천 大耶城을 친 것이 문제였다. 당시 政界의 실력자 金春秋의 사위 品釋이 대야성을 지키고 있다가 妻子와 함께 항복했다. 윤충은 품석 부부와 자녀들을 모두 죽이고 머리를 잘라 의자왕에게 보냈다. 왕은 윤충을 표창하고 신라 사람 1000명을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종일 기둥에 의지하여서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하더니, 얼마 후에 말하기를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하고 곧 왕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臣이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싶습니다'라고 하니 왕(선덕여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대야성의 비극은 金春秋의 원한이 되었지만 그는 목숨을 건 통일외교로써 이 원한을 민족통일 의지로 승화시킴으로써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백제는 대야성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항복한 敵將을 죽임으로써 신라 지도부에 원한을 심어 결국은 결정적 패배를 자초하고 만다.
김춘추는 고구려, 일본, 唐을 오고가면서 동맹외교를 시도하다가 羅唐동맹을 성공시킨다. 당시 세계최강대국과 손잡은 신라는 백제-고구려-왜의 남북3國동맹을 차례로 격파한 뒤에는 唐과 결전하여 삼국통일을 완성한다. 30여년이 걸린 통일과정이었다.
신라의 승리와 백제의 패배는 동맹국의 선택에 의하여 결정났다. 삼국사기의 편집책임자 金富軾은 백제本紀의 마지막 장에서 평하기를 '백제는 이웃과 친하게 지내지 못했고 大國(唐)의 명령을 어겼으니 그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韓美동맹을 우습게 보고 오히려 敵과 친해보려고 애쓰는 盧武鉉 정권이 의자왕을 닮아가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月輪이고 북한이 新月이란 말인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 2005-09-18, 22:01 ]
벼랑에서 날아버린 新羅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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