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자 43명중 13명이 非命橫死
-明治유신의 주역들을 길러냈던 요시다 쇼인의 경우. 교육과 희생 없이는 역사를 움직일 수 없다.
재작년에 일본 도표의 자민당 사무실에서 아베 신조 의원(현 총리)을 인터뷰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정치인으로서 마음에 새기고 계시는 말이 있습니까.
'저의 고향은 야마구치현, 도쿠가와 시절엔 조슈한(長州藩)입니다만, 여기에 명치유신의 志士들을 많이 길러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란 선생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인용한 孟子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誠意를 다하면 움직이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至誠而不動者未之有也)」는 말씀입니다'
그가 말한 요시다 쇼인은 일본의 근대화 혁명인 明治유신의 주체세력을 길러낸 스승으로 불린다. 政界 거물 이토 히로부미, 軍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같은 明治 시기의 주역들이 그의 제자였다. 아베 수상은 야마구치(明治유신 전엔 조슈한)현<하기(萩)市 출생>출신으로선 여덟번째 총리이다. 요시다 쇼인이란 선생이 있었기에 이 작은 지역이 일본 역대 정권의 핵심인물들을 배출한 것이다.
요시다 쇼인은 그러나 만30세에 처형된 사람이다. 그는 도쿠가와 幕府를 타도하고 서구식의 근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르쳤다. 조슈한에서 서당 비슷한 松下村塾을 열어 문하생들을 교육한 지 4년째 되는 해, 즉 1859년 막부에 의해 역모죄로 몰려 참수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그가 가르친 조슈한의 제자들이 지금의 가고시마(규슈), 고치(시고쿠) 무사들과 손잡고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중심의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기 시작한 명치유신이 일어난 것은 그가 죽은 9년 뒤였다.
일본의 이즈(伊豆) 반도 끝에 있는 시모다(下田)라는 항구는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에 의해서 개항된 곳으로 유명하다. 요시다 쇼인은 이 항구에서 작은 배에 옮겨타고 정박중이던 미해군 함정에 찾아가서 渡美의 편의를 보아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이때 요시다 쇼인이 묵었던 집은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이 도시에서 알게 된 흥미로원 통계가 있었다. 그가 松下村塾에서 가르친 43명의 제자들은 亂世에 어떤 운명을 맞았는가? 할복자살 6명, 戰死 1명,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어 사망(討死) 4명, 참수형 1명, 옥사 1명. 13명이 요사이 말로 하면 非命橫死(비명횡사)한 것이다. 요시다의 제자들중 명치유신의 성공으로 출세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 등 5명 정도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데는 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志士들의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통계이다.
2. '목숨 걸지 않고 대통령 되겠다는 건 도둑심보'
-柳根一: '정권을 건 싸움에서 공짜는 없다'
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지난 연말 송년 행사장에서 '북한이 붕괴 직전에 이르러 5년을 지탱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친북정책으로 몇 배나 改惡돼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黃長燁 선생은 김정일을 민족반역자라고 표현하면서 2007년에는 애국세력이 대동단결하여 친북세력을 정리하자고 역설했다. 柳根一 전 조선일보 주필은 인사말에서 김정일 정권을 상대로 싸우지 않으려는 대통령 지망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국무총리까지는 누가 시켜주지만 대통령은 스스로 되는 것이다'면서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씨가 다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는 것은 '도둑 심보'라면서 '정권을 건 싸움에서 공짜는 없다'고 말했다.
3. 탈북자들이 세운 대한민국
-김일성과 김정일이 내몬 사람들이 한국으로 와서 反共의 보루를 만들었다. 제 무덤을 판 것이다.
年初 서울시내 한 식당에서 있었던 黃長燁 선생 위로 신년회에 참석했다. 올해 만 84세인 黃 선생은 아직도 건강이 좋은 듯했다. 이 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김정일과 從金세력의 급소를 찌르는 비수 같은 의미가 들어 있다. 이날 모임에서 李東馥 전 국회의원(남북고위급회담 남측 대변인 출신)은 재미 있는 말을 했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탈북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가 북한출신 아닙니까? 요사이 탈북자는 약1만명 정도이지만 6.25 전에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수많은 1세대 탈북자들이 여기서 反共의 보루를 만든 것입니다. 6.25 남침 때 북한군과 맞서 싸웠던 국군의 지휘부는 거의가 북한출신 월남자들이었습니다'
동석했던 李哲承 선생(전 신민당 총재)도 비슷한 말을 했다. 李 선생은 해방직후 反共학생운동을 주도하여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북한의 신의주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反蘇 시위를 벌였습니다. 탄압받은 주동자들이 남한으로 내려와 공산주의의 만행을 고발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이 증언을 듣고 反共운동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 자리엔 탈북자 출신들이 많이 참석했다. 탈북자 동지회 홍순경 회장, 자유북한방송 대표 김성민씨, 요덕수용소 출신 강철환 기자 등이었다. 이들은 남한사회에 북한의 지옥상을 알려주어 언론과 국민들이 깨어나게 한 귀중한 증언자들이다.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 이런 탈북자들이 10만 명만 된다면 從金세력과 함께 김정일 정권은 무너질 것이다.
김일성과 소련과 공산당이 싫어 월남한 북한인들이 한국에서 기독교를 더욱 확산시켰다. 남한의 기독교화는 남한의 反共민주화와 궤를 같이한다. 결국 김일성-김정일의 惡行이 남한에서 자신의 敵對세력을 만들어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다. 그야말로 역사의 應報이다.
3. '김정일은 노무현을 만나지 않는다'
-일부 북한전문가들 견해: '인기 떨어진 말년의 대통령을 만나 무얼 하겠는가. 김영남을 대신 보낼 가능성은 있다.'
김정일은 지지율이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회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전문가를 두 사람 만났다. 한 사람은 일본 정부 관리이고 다른 사람은 북한의 對南공작부서 출신 탈북자이다. 올해 상반기에 盧金 회담이 있을 것이라는 다수설과 배치되는 이들의 시각을 소개한다.
1. 김정일은 정말로 자신을 神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한다. 인기가 떨어진 말년의 남한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위신에 상처를 준다고 판단할 것이다. 제2인자격인 김영남을 대신 남쪽으로 내려보내 만나게 할 순 있다.
2. 2000년 6월에 김정일이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만난 것은 미국과 담판하기 위한 징검다리 작전이었다. 실제로 평양회담 이후 美北의 고위급 접촉이 이뤄져 조명록이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고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었다. 김정일은 핵무기라는 카드를 가지고 미국과 담판을 하려고 하지 인기가 급락한 노 대통령을 상대로 하진 않을 것이다.
3. 김정일은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아도 거래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공갈을 칠 수도 당당하게 얻어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親한나라당 정책은 불가능하다. 그런 노선을 취하면 남한내의 親北세력, 즉 赤化기지를 잃는다. 한나라당이 집권했을 때 김정일은 이를 이용하여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내부 단속을 할 수 있다.
4. 김정일은 非이념형 독재자, 즉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가치관이 全無한 독재자이므로 북한정권이나 북한주민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해서 노 대통령을 만나지는 않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현금 뇌물을 듬뿍 바칠 수 있으면 모를까.
5. 핵실험 이후 남북관계나 국제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김정일은 가동중인 원자로의 동결과 국제사찰을 수용하는 선까지는 물러날 것이다. 이런 제스처는 그러나 미국을 상대로 할 것이다. 핵실험으로 해서 남북관계는 美北관계에 더욱 종속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6. 2007년이 김정일을 압박할 수 있는 찬스이다. 2008년에 북경 올림픽이 열리기 때문에 중국은 내년에 김정일이 추가 핵실험을 하여 올림픽 분위기를 깨는 짓을 한사코 막으려 할 것이다. 김정일이 말을 듣지 않으면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고 김정일을 제거하는 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
7.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줄 것이 없다. 김정일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연합사 해체 등 赤化노선에 동조한 점이 많은데 이기주의자 김정일은 이것보다는 현금지원을 원할 것이다. 김정일이 해외 비자금에 대한 미국의 압박을 못견뎌 하는 것은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이 돈이기 때문이다. 자기 돈에 대한 간섭을 못참아하는 것이 김정일이다.
4. '김정일의 非이념형 독재자'
-그는 수백만명의 인간을 죽여서라도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利己主義의 화신이다.
理念이란 黃長燁 선생의 定義에 따르면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이다. 이념이란 公的인 가치관이다. 스탈린, 모택동, 히틀러는 다 이념형 독재자였다. 김일성도 남침전쟁을 통해서 한반도 전체를 적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이념형 독재자로 볼 수 있다.
김정일은 다르다는 의견이 있다. 그의 행태를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들과 북한정권내에서 그에게 충성했던 이들의 이야기에 공통점이 있다. 김정일은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민족이든지 북한노동당이든지 어떤 집단을 위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행복과 이해관계에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 의사 결정도 獨斷한다. 혼자서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그의 이념이라면 이념이다.
그래서 그는 후계자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후계자를 내세울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 다른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고민해서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어준다는 생각만 해도 억울한 모양이다. 그는 북한정권이 어차피 자기 代로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준다. 그는 측근들이 통일 이야기를 하면 화를 낸다고 한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수호, 즉 자신의 안전이 급선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극도의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과 권한이 침해받거나 도전받는다고 판단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미국이 작년 9월 김정일의 비자금을 취급하는 마카오 은행과 미국은행 사이의 거래를 금지시키자 국제 금융기관들이 연쇄적으로 對北거래를 중단하는, 이른바 금융제재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이 직접 북한을 상대로 취한 제재가 아닌데도 국제금융을 지배하는 미국의 방침에 대해서 국제금융기관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때문이다.
김정일이 이 조치에 발끈한 것은 자신의 돈줄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한 것도 무슨 대전략이 있어서가 아니고 자신의 금고를 지키겠다는 일념에서 한 지극히 개인적인 도발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 CIA의 북한담당 분석관 출신 한 인사는 '김정일은 후계자를 절대로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그와 측근들은 가이아나의 인민사원 광신도들처럼 동반자폭과 집단자살로 종말을 고할 것이다'고 예측했다.
김정일은 그 어떤 인간적 배려도 하지 않는, 인간성과 이타심이 철저히 배제된 글자 그대로 악마라고 단언하는 기독교인 對北전문가도 있다.
5. 김일성과 김정일이 죽인 屍身은 9000km
-그 屍身이 깔린 도로를 서울에서 파리까지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자에게 굴종하는 자들의 죄값은?
김일성은 동족을 치기 위하여 모택동, 스탈린을 불러들인 남침전쟁을 벌였다가 한반도를 국제전쟁터로 만들었다. 약300만 명이 죽었다. 300만의 시체를 일렬로 고속도로 위에 눕혀놓으면(평균키 150cm 기준) 그 길이가 약4500km이다. 시체가 깔린 서울-평양-북경 도로를 차로써 며칠을 달려도 끝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 300만의 생명 하나 하나는 이 지구보다 무거운 값을 가졌다. 그 한 구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될 때마다 울부짖었을 아내, 아버지, 어머니, 남편의 고통이 지금도 한반도의 하늘과 땅속을 덮고 있다.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은 개혁 개방 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의 편의를 위해서 개혁 개방을 거부하고 식량수입에 비자금을 한 푼도 쓰지 않음으로써 300만 명을 또 굶겨죽였다. 父子가 약600만 명을 죽였다. 600만 명의 屍身을 도로위에 일렬로 깔면 서울에서 파리까지 그 주검 위로만 달릴 수 있다.
동족학살에서 세계 1위는 모택동이다. 약4000만 명 이상의 중국인을 죽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모택동을 중국인 중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민족이 동족 600만의 죽음으로써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폭로했는데도 선거를 통해서 좌파들에게 정권을 넘겨준 것이 유권자들이었다. 이 과오를 피로써 씻으려면 또 몇백만의 한국인들이 죽어야 할까?
6. 일본정부가 펼친 '북한인권週間행사'
-한국 납북자 가족들은 盧정권 대신 일본 정부에 대해서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12월14일 나는 일본 도쿄 히비야 공원에 있는 공회당에서 일본 정부가 주최한 북한 납치자 관련 대중집회에 참석했다. 지난 6월 성립된 북한인권법에 따라 일본 정부는 북한인권계몽주간을 선포하고 여러 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많은 탈북자, 납북자 가족들이 이 행사에 초대받았다. 히비야 공회당에선 북한납치자 문제를 잘 다루어 총리가 된 아베씨가 연사로 나왔다. 그는 '내가 총리로 있는 한 납치자 문제의 완전한 해결 없이는 절대로 북한과 수교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이 대목에서 관중들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나는 북한정권에 의한 국제납치 문제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이 대회에 초청받았다.
일본 정부, 국회, 언론이 한덩어리가 되어 납치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國力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중한 일본인들은 좀처럼 본심을 드러내지 않지만 느낌으로선 일본이 미국보다도 오히려 더 강력하게 김정일 정권의 붕괴나 無力化를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세미나의 결론을 맺은 사토 가쓰미 구출회 회장도 '대량살상무기 그 자체인 김정일의 제거 없이는 납치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의 기준으로는 일본이 김정일로부터 대단한 양보를 받아낸 것 같은 데 일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2002년 9월 평양회담에서 고이즈미 당시 수상은 김정일로부터 일본인 납치의 자백을 받았고 16명(지금은 17명으로 일본 정부가 확인)의 납치자중 생존자 5명을 데리고 왔다. 일본은 북한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한 납치자들이 살아 있다고 전제하고 북한에 대해서 진상규명을 압박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인권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이 선진국이고 일본은 후진국이었다. 1991년 7월호 月刊朝鮮은 북한공작원 辛光洙에 의한 일본인 하라타다아키氏 납치 사건을 현지 취재로 상세하게 다뤘다. 당시 편집장으로서 이 기사를 읽어본 나는, 일본 경찰이 이 명백한 납치사건에 대해서 쉬쉬하면서 공개수사를 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북한에 의한 납치임이 안기부 수사로 밝혀졌는데도 북한당국에 대해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무슨 이런 나라가 다 있나'라고 의아해 했었다.
그런 한국이 북한인권 문제에 관한 한 지금은 후진국이 되어버렸고 일본이 오히려 선진국이 된 것을 이번에 실감하게 되었다. 이런 逆轉은 어떻게 이뤄졌던가? 일본의 용감한 기자들, 현대코리아 그룹 인사들, 그리고 납치자 가족들이 약10년간 끈질기게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내고 이를 근거로 일본 정치인을 움직이고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나서고, 드디어 김정일의 자백을 받아내고 그렇게 되니 일본의 여론이 움직이고 역사가 바뀐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1977년 11월15일 니이카다 해안에서 북한공작원이 납치해간 13세 중학생 요코다 메구미 사건이었다. 요코다 메구미씨를 북한에서 보았다는 탈북 공작원 安明進씨의 증언이 진상규명의 돌파구였다. 요코다 소녀(지금은 40代)의 부모는 수상 이상으로 일본인들에게 잘 알려진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일본에서 천황, 수상만큼 기자들을 많이 끌고 다니는 인물이 요코다 시게루(아버지)-요코다 사키에(어머니) 부부일 것이다.
이 부모는 납북된 딸의 實名을 걸고 공개적으로 납치자 문제를 호소했다. 實名을 공개하면 북한당국이 딸을 죽일 것이라고 걱정도 했으나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12월14일의 집회에서도 요코다 부모가 나와서 한 시간 동안 조용한 강연을 했다. 어머니 요코다 사키에씨의 차분한 설명이 감동적이었다. 사키에씨는 일본 경찰이 일찍 공개수사를 했더라면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딸이 실종된 뒤 지옥 같은 하루 하루의 고통에 대해서 어머니 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김정일 이 놈이 정말 악마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사키에씨는 경찰이 여자 시체가 발견되었으니 와서 확인해달라는 전화를 걸 때마다 온 몸이 떨리고 맥이 빠졌다고 한다.
이날 강연에서 요코다 사키에씨는 일본인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았다. 6.25 때 한국에서 끌려간 10만 명 이상의 납북자들, 휴전 후 납치된 500명, 그리고 북한 강제수용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지금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다루는 일본의 공무원과 구출회, 그리고 가족회 사람들은 한국인 납북자와 탈북자, 그리고 북한내의 인권탄압에 대해서도 반드시 언급한다. 납치자 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한국인 납치자 가족들은 일본 정부인사들을 만나면 '한국인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에 호소해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한다. 노무현 김대중 정부가 외면하니 이렇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국이 버린 가족의 문제를 외국 정부에 대해서 호소하려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12월14일 오후 국제세미나 참석자들이 아소 외무장관을 만났을 때도 한국 납북자 가족 대표들로부터 그런 부탁이 나왔다. 아소 장관은 말했다.
'일본 정부는 외국과 정상회담이나 외상회담을 할 때마다 반드시 납북자 문제를 거론하고 협력을 효청합니다. 이것이 내각의 확고한 방침입니다'
아베 수상은 취임 직후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중국총리에게 납치자 관련 팸플리트를 건네주면서 '북한이 중국사람도 납치해갔으니 관심을 가져달라'는 취지의 당부를 했다고 한다.
아베씨는 고이즈미 총리 시절 납치 문제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한 정치인으로 부각되어 50代 초반에 집권 자민당의 총재=日本 총리가 되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북한 인권파’를 黨과 내각의 요직에 앉혔다. 총리 자신이 납치대책본부장을 겸하고 全각료가 위원이다. 2007년 12월 한국 대통령선거에서 ‘인권 외면파’인 從金 세력이 몰락하고, ‘인권파’가 집권한다면 韓美日 사이의 공조가 부활할 것이다.
7. 진짜로 준비된 대통령 레이건
-그는 국내戰線에서 20년간 매일 공산당과 싸워 이겼던 사람이다. 그는 이 경험을 소련에 적용하여 이겼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을 필두로 하는 국제 공산주의 제국을 붕괴시킨 主役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助役은 요한 바오로 2세, 대처 영국수상, 바웬사, 그리고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다. 美蘇 냉전은 스탈린이 도발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이에 응전하면서 시작되었다. 트루먼은 자신과 미국의 對蘇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6.25 전쟁에 참전하여 한국을 구했다. 트루먼과 레이건이 냉전을 승리로 이끈 두 巨人이었다. 두 사람은 민주당, 공화당으로 입장은 달랐지만 공산주의를 堊의 세력으로 본 점에선 같았다.
로널드 레이건에 대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배우출신의 카우보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레이건을 '근사하게 생긴 바보'라고 본 한국인들이 많았다. 레이건은 위대한 인물에게 필수적인 ‘위대한 관점’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관점이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능력을 뜻한다.
레이건이 1981년에 집권하여 1989년에 물러날 때까지 공산주의 세력을 코너로 몰아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든 힘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의 전환이 우연한 인물의 우연한 행위로써 이뤄질 리는 없다. 역사를 움직이게 하는 사람은 그 순간을 위해 준비된 인물이다. 레이건이 그러했다. 그는 20년간 미국의 국내전선에서 공산주의와 매일 싸워서 이겼던 사람이다.
배우로서 성공했던 레이건은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영화배우협회(Screen Actors Guild)의 핵심 멤버나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헐리우드의 영화산업에 침투하는 것을 저지했다. 주먹다짐도 하고 테러위협도 받아가면서 그는 좌익들과 매일 싸웠다. 그 전에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그는 이런 對共투쟁의 경험을 통해서 공산주의자들의 본질과 생리, 그리고 전술을 알게 되었고, 대통령이 된 뒤 이 경험을 살려 국제공산주의자들을 분쇄할 수 있었다.
레이건은 공산주의자들을, ‘자유를 파괴하기 위한 적들중 가장 잘 조직되고 유능한 세력’이라고 평했다. 그는 1960년에 다시 영화배우조합 위원장으로 뽑혔는데 ‘러시아와의 이념전쟁이야말로 이 세계의 가장 큰 문제’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는 평화至上주의자들을 경멸했다. 평화至上주의자들이 “지금은 평화시대이므로 이 평화를 깨는 어떤 일을 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미국을 패배의 길로 내몰고 있는 독약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과 전쟁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이미 패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와 전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1960년대 레이건의 이 말은 어리석은 2007년의 한국인을 향해서 하는 말처럼 들린다. 김정일과 從金세력은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뒤엎으려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노무현, 김대중, 그리고 비겁한 일부 한국인들은 “지금은 남북화해 교류의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공산당 운운 하는 당신들은 전쟁하자는 이야기냐”라고 말한다.
1960년대 레이건은 이런 한국인들에게도 적용되는 논리로써 이렇게 경고했다.
“만약 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서 지고 그리하여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면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패배를 방지하기 위한 행동에서 가장 비겁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졌노라고”
이런 레이건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 소련의 허점을 발견하자 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그 허점을 확대시켜갔고, 결국 공산권의 총붕괴로 몰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1981년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미국은 카터 대통령의 失政으로 인해 총퇴각중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군의 지배하로 넘어가고 反共 팔레비 정권이 무너져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손에 장악되었다. 이란 혁명정부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삼고 444일 동안 미국을 갖고 놀았다. 이들을 구출하려던 미국의 특공작전은 이륙도 해보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실패했다. 미국의 코밑인 니카라과에서는 산디니스트 공산주의 정권이 流血혁명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때 집권한 레이건은 수비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아예 소련공산제국을 붕괴시키는 대전략을 추진한다. 목표를 엄청 높이 잡은 것이다. 그 대전략의 핵심은 자유노조 운동이 일어난 폴란드였다. 레이건은 '폴란드를 민주화시키면 안전핀이 빠진 수류탄처럼 동구 공산권이 터져버리고 그 파편으로 소련까지 무너진다'는 계산을 했다. 레이건이,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영국의 대처 수상과 공조해가면서 소련을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외교적으로 몰아붙인 결과 소련 지도부가 내어놓은 代案이 고르바초프였다.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지원했지만 군사적으로는 더 밀어붙였다. 즉, 고르바초프의 체제해체적 개혁을 응원함으로써 소련이 내부적으로 무너지도록 일종의 자살을 유도했던 것이다. 레이건이야말로 ‘堊의 제국’과 정면대결함으로써 이를 해체하기 위하여 훈련받고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8. 李承晩도 極右로 불렸다!
-남로당, 좌우합작파, 미 군정과 싸우면서 오로지 신념과 여론의 힘에 의지하여 대한민국을 세웠던 이 분은 참 외로웠다.
요사이 다시 '대한민국 建國의 內幕'이란 책을 정독하고 있다. 李承晩 대통령의 친구이자 고문이었던 미국인 학자 로버트 T. 올리버씨가 쓴 것을 朴日泳씨가 번역했다(啓明社). 1998년에 상하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李承晩 대통령이 올리버씨에게 써 보낸 私信을 중심으로 하여 쓰여졌다. 李 박사의 솔직한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인간 李承晩을 가장 가까이서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 李承滿 대통령이 그 위대한 안목으로 해서 당했던 비난과 모함, 그로 해서 느꼈을 답답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공산당의 본질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안 사람이 李 박사였다.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기회주의자들과 미국이 그를 極右니 守舊세력이니 고집장이니 하는 말로써 공격한다. 朴憲永을 필두로 하는 남로당은 남한의 공산화 노선을 추구하고 김규식-여운형系는 左右합작노선을 좇아가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赤化로 가는 길이 된다는 것이 李承晩의 확신이었다.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군정은 본국의 정책에 따라 左右합작노선을 지지하는데 여기에 반대하는 李承晩을 공산당만큼 미워한다. 1946년 말 이후 이승만은 四面이 적이었다. 소련, 김일성, 남로당, 좌우합작파, 미 군정당국이 모두 李承晩의 反共자유민주주의 건국노선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李 박사가 초지일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신념과 일반 대중의 절대적 지지였다. 신념과 여론의 힘으로써 그는 포위망을 깨부수고 자신의 설계도대로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었다. 東歐에서 만들어진 左右합작정부가 모조리 공산화되는 것을 본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對蘇 강경정책으로 선회한 것이 李承晩의 입장을 강화시켜주었으나 대한민국의 건국은 오로지 李承晩 노선의 자주적 승리였다.
요사이 교과서는 대한민국을 미 군정당국이 만들어준 작품처럼 왜곡한다. 건국과정의 설명에서 李承晩의 이름이 한번도 안나오는 교과서도 있다(그것도 좀 낫다는 교과서에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런 부분을 말살하고 넘어가는 현대사 교육이 좌익선동의 밥이 되는 '쓸모 있는 바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도 해방직후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남북한 좌익은 적화노선이고 노무현 세력은 赤化로 이어질 것이 분명한 左右합작노선이다. 약30%인 대한민국 수호세력만이 李承晩 노선을 이어받아 反共자유민주주의와 자유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아직도 李承晩 노선과 대한민국 수호 노선은 외롭고 의로운 길이다. 이승만과 대한민국 수호세력이 똑 같이 極右, 守舊라고 불린 점도 흥미롭다. 좌익이 말하는 極右란 애국이고 독립운동이란 뜻이다. 훈장인 것이다.
9.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닉슨 사면을 결정했던 포드 대통령은 '정치인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여론조사가 아니라 결단이다'고 했다.
지난 연말 他界한 미국의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은 대학교 때는 미식 축구팀의 名센터였고, 2차 세계대전 때는 구축함에서 근무했다. 태풍을 맞아 세 척의 구축함이 침몰하여 778명이 죽는 사고가 났을 때 그의 배는 침몰을 면했다. 닉슨 대통령 밑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던 멜빈 R. 레어드는 이 태풍 속에서 다른 구축함에 타고 있다가 살아난 사람이다. 그는 12월29일자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문에서 친구인 포드에 대해서 감동적인 평가와 일화를 소개했다.
포드는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의 경험으로 해서 정치위기를 위기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生死가 오가는 戰場의 위기에 비교하면 정치판의 위기는 위기도 아니다. 포드는 하원의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가 소속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지 못해 그 꿈이 이뤄지지 않은 대신에 그는 부통령으로서 상원의장이 되었고,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닉슨 대통령은 스피로 에그뉴 부통령이 스캔들로 사임하자 공화당의 하원총무였던 그를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1974년 8월9일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자 포드는 대통령직을 인수했다. 그 직후 포드는 닉슨에 대한 형사처벌을 면제하는 사면령을 내렸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도청사건을 은폐하고 국민들에게 거짓보고한 데 대해서 격앙되어 있었던 언론과 야당은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레어드는 자신도 포드의 결심에 찬성하고 일단 美 의회를 먼저 설득한 뒤 사면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포드는 즉각적인 사면령을 내렸다고 한다. 포드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미국이 매달려 있으면 있을수록 국가의 進路가 미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국의 악몽'을 일찍 끝내겠다는 포드의 결정은 여론을 거슬렀다. 이는 그가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 민주당 후보에게 진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포드의 닉슨 사면 결정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이가 암살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당시 대통령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5년 전 에드워드 케네디는 '존 F 케네디의 용기 있는 사람들 상'을 포드 전 대통령에게 주는 자리에서 자신의 과오를 고백했다. 그는 '나도 포드 대통령의 사임조치에 반대한 사람들중의 하나였지만 시간은 과거사를 명확히 해준다. 지금 우리는 그때 포드 대통령이 취한 조치가 옳았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포드의 답사가 감동적이었다.
'정치인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여론조사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험적 결단을 어떻게 했느냐로 정해진다. 단기적으로 어떤 결단은 (그 영향이) 너무 엄청나고, 때로는 자기파멸적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가장 큰 人生 패배는 그런 결단의 용기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삶은 사는 것이 아니다'
11. 李明博씨는 김정일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인가?
-한국에서 대통령을 뽑는다고 함은 '김정일 정권과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 영토, 계속성, 헌법을 지켜내고 평화적 방법으로 자유통일을 추구할 수 있는 인물을 뽑는다'는 의미이다.
대한민국헌법제66조②항은 '大統領은 國家의 獨立·領土의 保全·國家의 繼續性과 憲法을 守護할 責務를 진다'라고 규정했다. 대한민국의 독립, 영토, 계속성, 헌법을 위협하는 집단은 한반도의 북반부를 불법점거하고 있는 反국가단체 김정일 정권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대통령을 뽑는다고 함은 '김정일 정권과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 영토, 계속성, 헌법을 지켜내고 평화적 방법으로 자유통일을 추구할 수 있는 인물을 뽑는다'는 의미이다. 쉽게 줄이면 김정일과 맞서 대한민국을 지켜낼 인물을 고르는 일이다. 이는 또한 대통령 선택의 제1기준이 되어야 한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대통령 후보群 중 누가 이런 헌법의 요구에 가장 알맞는 인물인가? 현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다수 유권자들은 李明博 전 서울시장을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40%대의 지지율로 獨走상태이다. 李 시장에 대한 높은 지지율의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은 국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인물'이란 신뢰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李씨는 경제와 행정에 유능한 사람이란 인상이 강하다. 현대건설의 회장으로서, 서울시장으로서 보여준 능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적증명서가 되고 있다.
'제발 마음 편하게 먹고살게 해주세요'라는 것이 국민들의 第一願望(제일원망)이라면 '제발 김정일을 무력화시켜 안보 걱정을 안하도록 해달라'는 것이 제2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제1의 희망이 이뤄지려면 제2의 희망이 이뤄져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김정일의 위협과 남한내 김정일 세력의 도전을 눌러 성실한 국민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경제는 표면상의 희망이고 내용상으로는 김정일과 친북좌익 세력에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 영토, 계속성, 헌법을 지켜달라'는 것이 국민들의 일치된 소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李明博씨가 이 기준에 맞는 인물인지의 여부는 다음 몇 가지 기준으로 검증해봐야 할 것이다.
첫째, 李明博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이 야합하여 만들어낸 대한민국赤化전략문서인 6.15 선언을 폐기할 수 있는가. 李 전 시장은 6.15 선언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세배차 방문했다.
둘째, 북한의 핵무장을 저지할 수 있는가.
셋째, 韓美동맹을 복구하고 韓美연합사 해체 기도를 중단시킬 수 있는가.
넷째, 공직사회로 침투하여 헌법정신을 유린하고 있는 극좌공산주의자들을 퇴출시킬 수 있는가.
다섯째, 對共수사기관을 활성화시켜 간첩수사를 재개할 수 있는가.
여섯째, 위선적인 평화통일이 아닌, 헌법적인 자유통일을 추진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일곱째, 북한인권문제를 國政의 주요목표로 삼아 탈북자, 납북자, 국군포로들에게 광명을 안겨다 줄 수 있는가.
여덟째, 법치와 질서를 회복시켜줄 것인가.
아홉째, 국군의 主敵이 김정일 정권임을 재천명하고 군의 對北억지력을 확보할 수 있는가.
열번째, 대한민국憲法제3조가 개정이 불가능한 대한민국憲法의 심장임을 이해하는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말이 신념화되어 있는가.
이 10개항에 대한 답은 너무나 쉽다. 상식 있는 국민들이라면 100점을 맞을 수 있다. 인기영합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대중 정치인이 상식적 판단을 하기란 쉽지 않다. 지도자가 상식을 따르면 위대한 인물이 된다. 李明博씨의 경제제일주의가 확고한 안보관의 뒷받침을 받는다면 그의 獨走는 계속될 것이지만 안보관이 허약하면 남북한 좌익의 계략과 도전에 직면했을 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 국민들이 보수인 줄 알고 뽑아놓았더니 좌파에게 이용당하여 결과적으로 宿主역할을 한 金泳三씨의 경우가 있다. 안보관은 李明博씨의 下體이고 경제는 上體이다.
안보관의 핵심은 그가 김정일을 어떤 존재로 보는가이다. 친구로 보는가? 主敵으로 보는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가? 그가 300만 同族학살자 김정일을 無力化시켜야 할 민족반역자로 보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李明博씨는 부시처럼 '김정일 그 자의 이름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인물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동시에 북한동포 생각만 하면 잠이 오지 않는 인물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분노와 동정심은 태극기만 바라보아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애국심의 자연스런 반영이다.
작년 8월15일 광복60주년을 맞아 남북한 좌익들이 서울을 난장판으로 만들 때 李明博 시장이 서울시청 건물을 태극기로 감싸주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일이 생각난다.
12. 朴槿惠씨는 왜 2위로 밀렸나?
-작년의 피크타임에서 失足한 때문이다. 안보위기를 맞아 영웅 待望의 무대가 마련되었으나 구경꾼으로 만족했다.
朴槿惠 한나라당 의원은 당대표로서 두 번 한나라당을 구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탄핵역풍을 만난 한나라당을 구하여 改憲저지선을 확보했다. 작년 5.31 지방선거에선 한나라당의 大勝을 이끌어 노무현 정권을 사실상의 레임덕 상태로 몰아넣고 대세론을 만들었다. 특히 목에 칼을 맞는 순간에 보여준 초인적인 냉철함은 '역시 그 아버지의 그 딸'이란 찬사를 불렀다. 대표를 그만 둔 이후의 한나라당 대표 및 최고위원 競選에서도 親朴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가 지난해 여름. 여론조사에서도 朴 의원은 상당한 차이로 李明博씨를 누르고 1위를 달렸다. 이즈음 朴槿惠 대세론도 나왔다. 그 후 6개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朴의원 지지율은 李 전 시장의 반으로 줄어들었는가?
朴 의원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바로 그때 한국은 안보위기로 접어들었다. 작년 7월5일 북한이 미사일 실험을 했고, 盧 정권은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韓美연합사 해체 사업을 밀고 나갔다. 지난 10월9일엔 드디어 김정일이 핵실험을 했다. 이런 안보위기를 맞아 朴槿惠씨는 失足(실족)했다.
국가위기를 당해 불안에 빠진 국민들은 한나라당과 대통령 후보群이 김정일-노무현 세력과 정면대결 자세를 취하고 대한민국을 지키는 싸움에 앞장서 줄 것을 기대했다. 애국단체에선 서울역 광장이나 시청 앞 시위를 할 때 朴 의원에게 잇따라 초대장을 보냈다. 李明博씨도 그러했지만 朴槿惠 의원은 안보투쟁에서 구경꾼이나 손님 역할 이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영웅 待望의 무대는 마련되었지만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무대는 누구보다도 朴槿惠씨에게 어울리는 무대였다. 李明博씨는 경제와 행정이란 고유의 무대를 따로 가진 사람이다. 國難이란 무대는 朴正熙의 딸 朴槿惠씨의 독무대가 될 수 있었다. 그 무대를 피했을 때의 타격도 朴씨에게 주로 갔다.
朴槿惠씨가 만약 애국투쟁의 선두에 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여론조사에서 1위로 달리고 있든지 李明博씨와 비슷할 것이다. 朴씨는 그야말로 잔 다르크役을 할 수 있었다. 가냘프게 보이고 앳되어보이기도 하는 朴씨가 김정일이란 천하의 개망나니와 노무현이란 '깽판 대통령'을 상대로 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투쟁을 거리에서 광장에서 대중속에서 벌이는 모습은 상상하기만 해도 아름답지 않은가?
朴槿惠씨는 굳이 그 役을 회피했다. 애국투쟁의 현장에 당연히 있어야 할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70, 80 老兵들이 섭씨 30도를 넘나드는 땡볕 아래 아스팔트 위에서 싸우는데 朴씨는 앞장을 서지 않았다. 기억할 만한 기자회견도, 연설도 없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국가비상시기에 사실상 침묵한 것은 임무포기로 비쳐졌다.
자연스럽게 2002년의 박근혜-김정일 회담에 관한 의혹이 재발했다. 김정일에게 속아서, 또는 김정일이 무서워서 反核反金의 애국투쟁을 기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워낙 사건 사고가 많은 한국에선 잊혀지기도 쉽다. 몇달간 朴槿惠씨는 거의 그런 존재가 되었다. 목에 칼을 맞았을 때 국민들이 가졌던 보호본능도 희미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朴槿惠씨가 앞으로 李明博씨를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안보 분야의 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경제와 행정 분야에서는 이명박씨를 앞지르기 어려울 것이다. 李씨의 대운하 계획에 대응하려고 급조한 '열차페리구상'은 너무 사소하다. 김정일을 '나의 맞수'라고 생각하고 북한동포들을 '해방시켜야 할 인질'이라고 여기고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6.15 선언 폐기를 공약하고 친북좌익 척결을 다짐하며 韓美연합사 해체 계획의 중단을 약속하면서 '안보의 박근혜'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만회가 힘들 것이다.
李明博씨는 컨텐츠가 강하고 朴槿惠씨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명박의 경제와 박근혜의 안보가 한나라당 경선을 통해서 하나로 융합된다면 한나라당은 無敵의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박근혜-이명박 경쟁은 치열할수록 좋다.
13. 과거사委, 『이수근은 간첩이 아님』
-李大鎔, 趙甲濟씨 등 우파 인사들이 문제제기.
글: 金成昱(미래한국 객원기자)
정부 산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委)가 소위 「위장간첩 李穗根 사건」에 대해 『李穗根은 위장간첩이 아니었다』고 작년 12월19일에 최종 판단했다.
李씨는 1967년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탈출한 전직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으로서, 귀순 후 한국의 열렬한 환영 속에서 對국민 반공강연 활동 등을 해 온 인물이다. 그는 1969년 초 한국을 다시 탈출해 홍콩을 경우하여 베트남에 들어갔다가 체포됐고, 그해 7월 『위장간첩』이라는 지탄 속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李穗根이 정말로 위장귀순한 간첩이었는지는 논란이 있었다. 李씨를 사이공 공항에서 체포했던 李大鎔 당시 주월공사·趙甲濟 前 월간조선 사장이 글과 증언을 통해서『李穗根은 위장간첩이 아니었다』고 주장해 왔다.
과거사委의 결정은 이 같은 문제 제기를 국가 차원에서 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사委는 결정문을 통해 『이수근이 귀순 후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 및 在北 가족의 안위에 대한 염려 등으로 한국을 출국하자, 중앙정보부가 당혹한 나머지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조작, 처형하여 귀순자의 생명권이 박탈된 非인도적·反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결정문은 또 『국가는 수사과정에서 불법감금 등에 의존한 무리한 기소 등에 대해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국가는 확정판결에 대해 피해자들과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再審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1989년3월호 월간조선에 실어 논란의 불을 지폈던 趙甲濟기자(조갑제닷컴 대표)는 『이수근 사건의 진실규명은 애국자유진영 인사들이 단서를 열어줬다는 점에서, 이들이 과거 정권의 잘못까지 감싸고 도는 사람들이 아님을 입증해 준 사례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과거사委는 6.25 전쟁중 있었던 좌익에 의한 민간인학살도 국가범죄 행위와 함께 규명해야 공평하다. 약10만 명이 좌익에 의해 학살당했지만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수근 사건 조작을 지시한 당시 중앙정보부장 金炯旭 등 특정인물의 잘못을 들어 정권이나 정보기관 전체를 매도하는 논리적 비약을 해서도 안될 것이다』고 했다.
趙 대표는 『진실(眞實)은 단편적인 사실(事實)들이 모여야 드러나는 총체적 모습인 만큼, 공평성을 결여한 사실(事實)규명은 결코 진실(眞實)규명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14. 별세한 柳陽洙 회장 추억
-박정희와 맺은 인연의 소중함을 생애를 걸고 지킨 분. 군인, 외교관, 장관, 기업인, 사회단체장으로서 쉼 없는 公人생활을 했던 그는 별세 직전까지 나라걱정을 했다.
柳陽洙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이 지난 1월1일 밤 별세했다. 1923년 출생이니 향년 84세였다. 柳 회장은 군인, 외교관, 장관, 기업인, 사회단체장으로서 쉼 없는 公人생활을 했다. 柳 회장은 지난 여름부터 암투병을 해왔다. 수술 이후 경과가 좋지 않았다. 원래 날씬한 분이 더욱 여위어갔다. 두 달 전 서울 마포에 있는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더니 필자의 朴正熙 전기가 언제 출판되느냐고 물었다. 보름 전 필자가 외국에 가 있는데 柳 회장이 또 전화를 걸어와 '언제 나오느냐'고 재촉하듯이 묻는 것이었다. 柳 회장은 별세 직전까지 '나라가 이 모양인데, 내가 이렇게 누워 있으면 안되는데. 특히 내년은 중요한 해가 아닌가'라면서 자신의 몸보다는 나라 걱정을 더 많이 했다고 한다.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국가지원금 200억원을 묶어놓고 지출을 못하게 하는 바람에 서울 상암동의 기념관 공사를 중단시켜놓고 있다. 작년 柳 회장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1심에서 재판부는 국가가 200억원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했으나 정부가 항소했다.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신경을 많이 썼던 柳 회장은 그야말로 公職 인생을 끝까지 성실하게 꽉 채운 분이다.
필자가 柳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5월13일 부산항에서였다. 그해 4월30일 월남의 사이공이 월맹군에게 함락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그 며칠 전 월남에 살던 한국인과 그 가족들을 실은 한국 해군 수송선 두 척이 사이공港을 떠났고 이날 부산항에 입항했던 것이다. 필자는 부산 국제신문의 사회부 기자였다. 柳 회장은 월남대사를 그만두고 정부 기업체를 맡고 있었다. 기자는 수송선을 마중나온 柳 회장에게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柳 전 월남대사는 '만감이 교차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柳 회장은 1973년 초 티우 월남 대통령에 대한 키신저의 强勸(강권)으로 월남평화협정이 체결될 때 대사로 있으면서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런 식의 협정이라면 월남은 머지 않아 적화된다'는 경고를 티우에게 했던 이다. 柳 회장은 몇년 전 월남이 망한 과정을 분석한 소책자를 만들어 나눠주면서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柳 회장이 남긴 월남평화협정 성립과정에 대한 글은 참전국인 한국측 시각으로 비판한 귀중한 史料이기도 하다.
柳 회장과 朴正熙 대통령과의 인연은 운명적이라고 부를 만하다. 육사 7기 특별반 출신인 그는 陸士에서 朴正熙 중대장을 처음 만났다. 朴 소령은 1948년 10월 여순14연대반란사건 이후 진압군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이때 柳 대위도 경찰과의 연락장교로 사령부에 내려와 함께 일했다.
朴 소령은 군내 남로당 간부라고 하여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이 면제되고 군복을 벗었다. 그를 살려준 白善燁 육군정보국장은 이 아까운 인재를 柳陽洙 전투 정보과장 아래서 민간인으로 근무하게 했다. 柳 과장은 1950년 초 북한군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상부에 올렸다. 이 보고서 작성 작업에는 朴正熙도 관계했다. 金鍾泌 등 한국 현대사를 바꾼 육사 8기생들을 대거 정보국으로 데려와 부하로 썼던 이도 柳陽洙였다.
柳 회장은 6.25 때는 연대장 등 일선부대 지휘관으로 잘 싸웠다. 12.12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鄭昇和 장군은 柳 회장의 직속부하였다. 5공화국 시절 신군부에서 鄭장군을 폄하하는 소문을 퍼뜨릴 때 柳 회장은 鄭 장군의 용감성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곤 했었다.
柳 장군은 1960년 4.19 의거 이후 등장한 張勉 정부 시절 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패상을 몸소 겪었다. 그는 5.16 주체는 아니었으나 군사혁명의 지도자가 朴正熙 소장이란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지지에 앞장섰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외무위원장으로서 對美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어를 잘 하는 그는 1950년대 말에 駐美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 민정이양 후 柳 장군은 군으로 돌아가지 않고 외교관으로 전직했다. 駐필리핀 대사, 駐오스트리아 대사, 駐월남대사, 駐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지냈다.
그가 오스트리아 대사일 때 故李承晩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고향인 비엔나에 와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柳 대사는 朴 대통령에게 건의해 프란체스카 여사가 귀국하여 이화장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왔다. 柳 대사는 한국 건설업의 진흥에 큰 공을 세운 분이다. 한국 건설업체들은 한국군을 따라 월남에 가서 해외공사를 하면서 체질을 강화했다. 그 경험을 살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중동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월남대사로서 해외건설의 가능성을 확인했던 柳 대사는 1970년대 후반엔 駐사우디 대사로 근무하면서 한국의 건설회사들이 中東에서 활동하는 것을 외교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는 기업주들이 私益을 추구하느라고 國益을 희생시키는 일을 막느라 애를 먹은 이야기를 생전에 많이 했다. 朴 대통령 서거 이후 崔圭夏 정부 시절 그는 동자부, 교통부 장관으로 짧게 일했다. 신군부 집권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동아건설 부회장으로 영입되어 그 유명한 리비아 大水路 공사를 현지에서 지휘했다.
그 뒤에도 有元건설 회장을 지냈고 申鉉碻 전 총리를 이어 朴正熙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柳 회장은 기념관 건립공사가 중단된 이후엔 朴대통령 관련 강연회와 출판, 그리고 회보 발간에 정열을 쏟았다. 몸가짐이 항상 단정하고 일처리도 분명한 柳 회장은 아무리 사소한 회의를 주재해도 꼭 발언원고나 메모를 정리하여 놓고 그것을 참고로 하여 말을 하는 분이었다.
柳 회장은 80세를 넘어서도 애국운동에 열심이었다. 2003년 3월1일의 反核反金 국민대회에도 참여했고, 작년 여름 결성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호남인 모임'에도 이름을 걸었다. 성공회 신도인 그는 성공회 출신 일부 인사들의 좌파적 행각을 개탄해마지 않았다. 柳 회장을 만날 때마다 나는 '역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의 정신력은 굉장하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부족함을 되돌아보곤 했었다. 柳陽洙 회장은 朴 대통령과 맺은 인연과 의리를 생애를 걸고 지키신 분이다. 서울대학 병원 영안실에 차려진 그의 빈소에서는 故人의 유언에 따라 조위금을 받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한 일은 많지만 폐를 끼치고 가지 않으려 했던 柳 회장의 명복을 빈다.
15. 서울시의 오만하고 한심한 用語
-'창의시정 원년'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오세훈씨 이전의 市長들은 몽땅 베끼기 행정만 했단 말인가?
연초 서울시청 앞을 지나가다가 건물 앞면에 걸려 있는 '창의시정 원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걸게 표시물을 보게 되었다. '창의시정 원년'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漢字를 읽을 줄 아는 이다.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창의시정 원년'은 뜻이 전달되지 않는 소리이고 암호일 뿐이다. '創意市政 元年'으로 써야 했다. '그러면 한자를 읽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어떻게 하나'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사전을 찾아 배우면 된다. '창의시정'으로 표기해도 모르는 사람에겐 '創意市政'이라고 써서 사전을 찾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배울 수 있는 길이라도 열어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이런 무식한 反論도 나올 것이다. 왜 외국글자인 漢字를 써야 하느냐고?
'한자가 외국글자라고? 그렇다면 당신의 부친은 한자 이름을 썼을 터인데 외국인인가? 20세기까지 역대 한반도 국가의 모든 공문서는 한자로 쓰였다. 그렇다면 신라, 고려, 조선사람들은 외국인이었단 말인가? 한자는 국어의 중요한 일부이다. 일본사람들도 한자를 쓰는데 그렇다면 일본인은 民族語가 없고 중국에서 만든 외국어를 쓰는 사람들인가? 國語는 70%의 漢字語와 30%의 한글어로 구성되어 있다.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면 한자를 모르는 이들에겐 암호가 된다. 70%의 단어를 암호로 만들어 놓는 언어생활은 국어의 파괴이다. 언어는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언어파괴는 정신과 문화에 금을 내는 짓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미쳐 돌아가는 구석이 있는 것은 民族魂을 담는 그릇에 금이 가서 정신이 새기 때문이다. 韓國語를 지켜내는 것이 대한민국과 民族文化를 지켜내는 일이다.'
한국 사람들은 元年이란 말을 너무 헤프게 쓴다. 元年이란 임금이 즉위한 해, 나라를 세운 해, 年號를 정한 첫해, 어떤 일이 처음 시작되는 해를 가리킨다. 오세훈 시장은 創意市政이 시작되는 첫해라는 뜻으로 그런 말을 쓴 듯하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吳 시장 앞의 서울시장들이 한 행정은 創意市政이 아니고 몽땅 베끼기 행정이었단 말인가? 예컨대 李明博 시장은 創意市政을 해본 적이 없는 시장인가? 청계천 복원공사는 創意市政의 작품이 아닌가? 李 시장의 걸작품인 대중교통체계 개혁은 創意市政이 아닌가? 모방市政인가?
자기를 너무 높이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자기부정과 함께 남을 깎아내리게 된다. 고귀함보다 더 귀중한 것은 겸손함이라고 한다. 공무원은 특히 겸손하고 정확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실패한 지도자의 공통점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의 사례연구. 어리석고 사악한 관점을 가지면 실패한다. 건전한 가치관이 成敗의 열쇠이다.
趙甲濟
위대한 지도자는 위대한 관점을 가진 것처럼 실패한 지도자는 사악하거나 어리석은 관점을 가진 경우가 많다.
실패한 김일성-김정일은 사회주의자로 가장한 악마이니 관점이고 뭐고 논할 가치도 없다.
金泳三은 대통령이 되기 전엔 민주적 지도자의 자질을 보여주었으나 대통령이 된 후 본전을 드러냈다. 그는 군사문화가 무조건 나쁜 것이고 文民은 무조건 좋은 것이며 따라서 현대사의 역대 정권은 모두 惡이라는 도착된 가치관을 가지고 정치를 하다가 망했다. 관점이 잘못된 사람은 사람을 잘못 쓴다. 인간을 알아보는 시각이 틀려먹었기 때문이다. 그는 韓完相 같은 위선적 지식인을 重用하다가 좌파의 宿主가 되어 좌파가 하고싶어하는 일들을 代行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정통성을 부정했고,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건물인 중앙청을 한때 조선총독부였다고 사형선고를 내려 부숴버리는 역사파괴를 자행했다. 그는 또 한국 보수-주류층의 통합체인 민자당을 분열시켜 김종필 세력과 대구-경북세력을 이탈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좌파에게 빌어줌으로써 자신의 지지기반인 한국의 보수층을 약화, 분열시키는 자살적 정치행각을 보여주었다. 그가 바로 김대중의 등장을 위한 카피트를 깐 사람이다.
김대중은 민족의 원수이자 헌법상의 主敵인 김정일을 '식견 있는 지도자'나 '효성 있는 인물'이라고 착각했다. 그리하여 이 악마적 인간과 정상적인 거래를 할 수 있다고 믿고 6.15 선언이란 약속을 했다가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를 敵에게 팔아넘겼다. 그는 김정일에게 약점이 잡힌 바 되어 헌법과 국가반역을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김정일의 심부름꾼이나 대변인 같은 말들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이솝 우화에 근거를 둔 햇볕정책이 현실속의 김정일을 속일 수 있다고 착각했다. 우화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 셈이다. 그 착각의 代價로 김정일에게 속고 이용당한 것이다.
김대중의 이런 실수는 한반도의 巨惡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엄격한 도덕적 판단을 한 바탕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사람이 대한민국의 主敵을 친구로 생각한 것이 가장 큰 반역이었다.
노무현은 협력의 대상인 미국을 自主의 대상, 自主의 대상인 김정일을 협력의 대상으로 착각함으로써 실패를 예약했다. 그는 反美가 자주라고 생각하고 韓美연합사 해체, 김정일 핵실험 옹호 정책을 펴다가 망조로 접어들었다. 미워해야 할 대상을 존경하고, 감사해야 할 대상을 미워한 노무현의 경우는 가치관이 가장 중요한 成敗의 요인임을 보여준다.
실패한 지도자의 실패 요인을 궁극적으로 규명해들어가면 가치관의 문제에 도달한다. 누구를 친구로, 누구를 원수로 보느냐 하는 것이 가치관이다. 누구에게 감사하고 누구를 미워할 것이냐 하는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 가치관이다. 대한민국은 反共자유노선에 입각한 나라이므로 국민된 사람은 헌법정신에 따라 공산주의자, 독재자, 선동가를 미워하고 적대시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김대중, 노무현, 김영삼 이 세 사람은 이 관점에서 실패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자유통일 세력이다'
자유통일 세력은 김정일 세력과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하므로 자동적으로 자유투사들이다. Freedom Fighters!!
趙甲濟
나나 우리를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여기서 作名의 고민이 생긴다. 이름짓기는 正體性 만들기의 시작이다. 보수, 진보, 좌파, 우파가 모두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한 作名이다.
대한민국 수호세력은 이런 作名에 苦心해왔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수, 우파, 자유진영, 주류층, 애국세력 등으로 불렀다. 동시에 자칭 진보세력을 좌파, 반역세력, 守舊세력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서 자칭 진보세력은 대한민국 수호세력을 極右, 守舊라고 매도했다. 자칭 진보세력은 좌파적이고 從金的(김정일 추종)이다. 따라서 이들이 진보라고 자칭하는 것은 정체성을 위장하기 위한 것임이 명백하다. 진보의 핵심 개념은 인권과 자유인데 한반도의 좌파는 그 뿌리가 학살자인 김일성-김정일이다.
대한민국 수호세력은 건국-호국-산업화-민주화의 주체세력이었고 지금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수호세력이고 동시에 반공세력이며 자유통일을 지향한다. 이런 역동적인 세력을 保守라는 다소 따분한 말로 표현하는 데 대해서 많은 불만이 있었다. 한국의 보수는 개혁적이고 진취적인데 스스로를 保守라고 부르자니 뭔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보전하고 지킨다는 뜻의 保守는 보전하고 지킬 것들이 많은 영국 같은 나라에선 맞지만 아직도 만들어가고 바꾸어가야 할 것들이 많은 新生 국민국가 한국에는 걸맞지 않다.
그래서 몇년 전부터 右派라는 말이 도입되었다. 보수-진보식 분류는 한국 실정에서는 안맞으므로 좌우로 가르자는 말이 나왔고 그렇다면 보수세력은 右派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의 본질에 접근한 생각이었다. 이즈음 애국이란 말도 쓰이기 시작했다. 左右가 이념을 기준으로 한 분류인데 헌법을 기준으로 하면 '반역 對 애국'으로 나눌 수 있다. 즉 김정일 편에 서면 반역이요, 대한민국 편에 서면 애국이란 것이었다. 지금은 보수, 우파, 애국이란 말들이 거의 비슷한 빈도로 쓰여지는 듯하다.
正體性을 결정하는 한 기준은 그 主體가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가이다. 이런 가치중심의 생각을 담아 作名하는 수도 있다. 民主主義는 국민이 주인이 되자는 의지를 담은 사상이다. 공산주의도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자는 미래를 향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 수호세력의 정체성을 분석한다면 두 단어가 등장한다. 자유통일과 一流국가이다. 자유통일을 이룩하여 노예상태의 북한동포들을 자유민으로 만들고 그 통합된 힘으로써 一流국가를 건설하여 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헌법안에 담긴 국가목표이다.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도 그런 방향성을 보여준다.
우리가 걸어온 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의 길을 연장하면 自由統一이란 關門을 지나 一流국가라는 新天地로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수호세력은 자신들을 자유통일 세력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자유통일을 해야 하는 것은 一流국가를 만들어 자유와 번영과 박애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다. 자유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좌파종식-국가再建-김정일 제거가 先決과제이다. '우리는 자유통일 세력'이라고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순간 그 前後의 맥락이 분명해진다. 보수나 우파란 단어로써는 얻을 수 없는 연상작용이요 연쇄효과이다. 자유통일이란 말 속에는 민족의 의지와 가치관이 들어 있고 한국 현대사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통일세력은 자유통일을 주도할 집단이다. 金庾信으로 대표되는 화랑도
가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이었던 것처럼 자유통일세력이 자유통일의 주인공이 된다. 李承晩으로 대표되는 독립운동세력이 建國의 주인공이었다. 국군으로 대표되는 참전용사들이 호국의 간성이었다. 박정희로 대표되는 개발연대의 엘리트가 산업화를 해치웠다. 학생-야당-언론-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민주투사들이 민주화를 선도했다. 그 흐름을 이어받은 자유투사들이 조직되고 단련될 때 자유통일을 우리가 주도하게 될 것이고 그 이후 一流국가 건설이 따라올 것이다.
자유통일 세력은, 김정일이 수괴이고 김대중-노무현이 그 아래 부하처럼 행동하는 한반도의 守舊좌파 권력과 맞서 싸워야 자유통일할 수 있음으로 자유鬪士라야 한다. 'Freedom Fighters'인 것이다.
대한민국 수호세력이, 자유통일과 자유鬪士라는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이며 공격적인 말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좌파종식과 국가재건, 그리고 김정일 제거에 나선다면 꿈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정치에서 가장 좋은 무기는 힘차고 아름다운 용어이다.
자유통일 세력의 맹세
우리는 인간생명에 대한 존중심에 기초한 개인의 自由, 사회의 自律, 국가의 自主를 수호하며 인류애로 통하는 열린 민족주의, 열린 애국심을 추구한다.
趙甲濟
자유통일 세력의 맹세
1. 우리는 대한민국헌법의 명령을 받들어 평화적으로 자유통일을 이룩함으로써 북한동포를 해방하고 기필코 一流국가를 건설한다.
2. 우리는 국민정신을 좀먹는 평화至上주의와 가짜 민족주의를 부인하고 자유통일 세력이야말로 민족사의 정통세력이고 진정한 평화 번영세력임을 천명한다.
3. 우리는 인간생명에 대한 존중심에 기초한 개인의 自由, 사회의 自律, 국가의 自主를 수호하며 인류애로 통하는 열린 민족주의, 열린 애국심을 추구한다.
4. 우리는 國益과 公益을 중심에 놓고 판단하는 애국자들이다. 지역감정과 좌파이념은 국가 선진화를 위해서 꼭 극복해야 할 守舊반동적인 포퓰리즘이다.
5. 우리는 자유와 인권을 공통의 가치로 하는 韓美동맹과 韓日우호 관계를 발전시키고 중국과 북한정권의 인권탄압에 단호하게 대처한다.
6. 우리는 개인과 사회의 자율이 클수록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나라가 된다고 믿기 때문에 작은 정부, 적은 세금, 많은 일자리를 경제정책의 기조로 삼는다.
7. 우리는 민족문화와 미풍양속을 소중히 여기며 漢字語가 국어의 중요한 부분임을 상기하여 한자-한글 혼용에 의한 한국어의 보존과 발전을 기한다.
8. 우리는 사회에 강건하고 실질적인 기풍을 진작시키며 젊은이들을 활달하고 진취적이며 예의바른 시민으로 교육하여 자유통일의 主體세력으로 양성한다.
9. 우리는 法治와 질서에 뿌리박은 민주주의의 생활화를 위하여 노력한다.
10. 우리는 국가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고 그 자녀들을 보호한다.
==============================
피로가 쌓인 한국 민주화 20년의 반성
人權과 자유는 충분, 法治와 안보는 후퇴.
趙甲濟
1987년 全斗煥 당시 대통령과 盧泰愚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합작했던 6.29 민주화 선언을 기점으로 하면 올해는 민주화 만20년이다. 조선일보와 한국조사연구학회가 공동조사한 '민주화 20년 국민의식조사'가 오늘자 조선일보에 발표되었다. 한 마디로 국민들은 한국식 민주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때로는 비관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많은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20년 전의 79%에서 지금은 37%로 줄었다고 한다. '민주화가 자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4%에서 31%로 늘었다. 민주화로 봇물이 터진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이 급증했다. 1987년에 노동자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응답자는 66%였는데 20년 뒤는 26%로 줄었다. '부당하다'는 의견은 12%에서 57%로 거의 다섯 배나 늘었다.
貧富격차에 대한 시각도 '정부정책 잘못'이란 생각은 35%에서 30%로 줄고 '개인능력 때문'이란 생각은 25%에서 37%로 늘었다.
'현재 생활이 좋아졌다'고 대답한 사람은 20년 전의 68%에서 32%로 줄었다. '한국의 미래를 비교적 낙관한다'는 사람도 55%에서 35%로 크게 줄었다. 남북관계에서도 '좋아질 것'이란 낙관론은 20년 전의 69%에서 30%로 줄었다. '전쟁이 나면 싸울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20년 전의 65%와 거의 비슷한 60%가 '싸우겠다'고 답했다. 주한미군의 안보에 대한 기여에 대해서도 약85%가 '그렇다'고 대답하여 20년 전과 거의 같았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민주화가 불러온 인권과 자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 반면에 法治와 안보(남북관계)의 약화를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수반하는 갈등과 혼돈에 피로감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 여론조사를 정치인들이 제대로 읽는다면 민주, 개혁, 통일을 앞세운 표 얻기 전술을 再考해야 할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실패는 아니지만 심각한 헛점을 드러낸 것이 노무현 대통령이란 존재이다. 그가 反헌법적-反국가적-守舊的 성향을 민주투사로 위장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유권자들의 낮은 분별력 때문이었고,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일 것이다. 盧정권 같은 위장民主세력을 선거를 통해서 퇴출시킬 수 있느냐가 올해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할 역사적 도전이다.
최고의 북한여행안내서는 '1984년'
영국소설가 조지 오웰은 북한이 등장하기도 전에 북한체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趙甲濟
지난 달 뉴욕에서 사온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The World's Most Dangerous Places)이라는 책을 읽다가 웃었다. 북한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런 글이 있었다.
<특종: 북한에 대한 최고의 여행안내서는 북한정권의 출범 직전인 1948년에 조지 오웰에 의하여 쓰여졌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이 쓴 '1984년'이 북한에 대해서 가장 잘 쓰여진 글이란 의미이다. 필자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일반적으로는 '전향한 좌익'인 조지 오웰이 스탈린의 소련을 모델로 하여 大兄이 다스리는 전체주의 국가를 그린 소설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김정일 父子가 만든 북한체제는 스탈린의 소련을 천국으로 생각하게 하는 지옥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만이 북한체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잡아낸 일종의 예언서이다. 몇년 전에 썼던 글을 소개한다.
==========================================
조지 오웰의 1984년 읽기-1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大兄을 사랑해야 한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이 쓴 「1984년」이란 소설은 大兄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1984년에 소련은 개방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강제수용소도 없어져 있었다. 중공은 등소평의 지도하에 실용노선을 걷고 있었다. 김일성의 북한만이 스탈린주의 체제하에서 우상숭배와 주민감시를 계속하고 있었다. 지금 읽어보면 김정일의 북한과 「1984년」의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위대한 소설가는 김정일의 북한을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주인공 윈스턴이 연애를 하다가 붙들려 사상심문관 오브리언에게 조사받는 장면을 이 소설에서 읽어보자(김회진 번역 범우사 출판본에서 발췌).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오브리언은 얼굴을 돌렸다. 그는 두어 걸음 옮기더니 약간 침착하게 말을 계속했다.
『첫째로 자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곳에선 순교(殉敎)가 없다는 점일세. 자네는 과거의 종교 박해 사건에 대해 읽어 보았겠지? 중세에는 종교 재판이 있었어. 그건 실패작이야. 이교(異敎)를 뿌리뽑기 위해 시작된 이 종교 재판은 오히려 이교를 영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지. 모든 이교도들에 대한 본보기로 한 놈씩 화형에 처할 때마다 다른 수천 명이 들고 일어났어. 왜 그랬겠는가? 종교 재판은 그들의 적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회개를 받아 내지 못하고 죽였기 때문이야. 사실은 회개를 하지 않는다고 죽인 거지. 인간들은 자신의 진실한 신앙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 간 거야. 마땅히 모든 영광은 희생자들에게 돌아갔고 모든 치욕은 화형시킨 재판관에게 돌아갔지. 그 후 20세기에 이르러 소위 전체주의자라는 게 나타났어.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이지. 소련은 종교 재판 때 행한 것보다 더 잔인하게 이단자들을 처형했어. 그들은 과거의 실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고 사실 순교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들은 그 희생자들을 인민 재판에 회부하기 전에 용의주도한 수법으로 그들의 우정을 완전히 벗겨 놓았지. 그들을 고문과 감금으로 만신창이로 만들어 결국 야비하고 굽실거리는 비참한 존재로 변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무엇이든지 털어놓고 자기들끼리 서로 욕하고 비방하고 숨기며 살려 달라고 울부짖게 되었네. 그러나 이번에도 몇 년이 지난 후 똑같은 결과가 다시 일어났지. 죽은 자들은 순교자가 됐고 그들에 대한 경멸도 잊혀졌어. 그러면 왜 그리 됐겠나? 첫째로 그들의 자백이 강요된 것이었고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우리는 그런 식의 실수는 하지 않아. 여기서 얻는 자백은 모두 진실이야. 우리가 진실로 만들지. 무엇보다 죽은 자들이 우리에게 맞서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지. 윈스턴, 자네는 후손들이 자네를 변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후손들은 자네에 대한 얘기를 전혀 못 들을 것이네. 자네는 역사의 흐름에서 깨끗이 지워질 거야. 자네는 공기로 변해 하늘로 사라져 버릴 거야. 자네는 흔적도 안 남게 돼. 기록 속에 이름도 남을 수 없고 산 사람의 기억 속에 추억으로 남을 수도 없어. 자네는 미래에서와 마찬가지로 과거 속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거야. 자네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게 될 거네.』
그렇다면 왜 나를 고문으로 괴롭히는 것인가? 윈스턴은 순간적으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오브리언은 마치 윈스턴이 이 생각을 입 밖으로 크게 떠들어댄 듯 걸음을 멈췄다. 그의 넓적하고 추한 얼굴이 다가섰다. 그리고 양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자네는 생각하겠지, 우리가 자네를 완전히 파멸시키려는 이상 자네가 말하거나 행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을 텐데, 왜 이렇게 고문하고 심문하는가 하고 말이야?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그렇지?』
『예.』 윈스턴은 대답했다.
오브리언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윈스턴, 자네는 견본에 난 흠과 같아. 씻어 버려야 할 오점이야. 방금 우리는 과거의 처형자들과는 다르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소극적인 복종이나 비굴한 굴복으로는 만족하지 않아. 마침내 자네가 우리에게 항복한다 해도 그것은 자네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어야 해, 우리는 이단자들이 우리에게 반항한다고 해서 그들을 처형하지 않아. 그들이 반항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처형하지 않는단 말이야.
우리는 그들을 전향시켜 속마음을 사로잡고 새사람으로 만들지. 그들이 갖고있는 모든 악과 환상을 불태워 버리고 외양적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그들의 마음과 영혼까지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야. 우리는 그들을 죽이기 전에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지. 비록 알려지지 않고 힘은 없을지라도 그릇된 사상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야.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결코 어떤 탈선도 용납하지 않아. 옛날에는 이단자는 여전히 한 사람의 이단자로 남아 자기의 이교를 선언하며 화형장으로 걸어 나갔고 그 가운데서 희열을 맛보았지. 소련에서 숙청당한 희생자들도 총살장으로 걸어 내려갈 때까지 머리 속에 반항 의식을 갖고 있었지.
그렇지만 우리는 처치하기 전에 두뇌를 완전히 개조시키지. 구전제군주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고, 전체주의자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던 데 반해 우리들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야. 우리가 여기에 끌고 온 녀석치고 우리에게 끝까지 대항한 놈은 아직 한 놈도 없었어.
어느 놈이고 모두 완전히 세뇌되었지. 자네가 한 때 죄가 없다고 믿었던 불쌍한 세 반역자들― 존스, 아론슨, 루더포드까지 결국에 가서는 우리에게 굴복하고 말았지. 그들을 심문할 때 나도 직접 관여했었어. 나는 그들이 점점 약해지면서 엉엉 울고 설설 기면서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고통과 공포 때문이 아니었어. 오직 회개로 인한 것이었네. 우리가 심문을 마쳤을 때는 그들은 단지 인간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어. 그들에게 남은 것이란 오직 자신들이 범한 죄에 대한 슬픔과 「大兄」에 대한 애정뿐이었지. 그들이 「大兄」을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감동할 정도였어.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깨끗할 동안에 죽을 수 있도록 빨리 총살시켜 달라고 애원하더군.』
『윈스턴, 자네가 완전히 우리에게 항복한다고 해서 살아 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일단 과오를 범한 사람은 아직까지 한 사람도 살려준 적이 없네. 그리고 설사 우리가 자네를 천명대로 살도록 내버려 둔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네. 여기에서 자네에게 생긴 일은 영원히 계속될 걸세. 미리 그걸 알아 두게. 우리는 자네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멸시킬 것이네. 천년을 산다 할지라도 회복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할 거야. 다시는 보통 사람들이 지니는 감정을 지닐 수 없을 거야. 사랑, 우정, 삶의 기쁨, 웃음, 호기심, 용기, 성실성 등을 절대로 다시는 가질 수 없게 될 걸세. 자네는 텅 비게 될 걸세. 우리는 자네를 텅 비게 만든 다음 우리 자신의 것으로 자네를 채워 줄 거야.』
오브리언은 이 소설에서 유명한 말을 한다. 『대형에게 복종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大兄을 사랑해야 한다』고. 김정일 정권은 말한다. 『수령님에게, 장군님에게 복종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어버이 수령 운운하는 존칭이 그런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사랑이 인민의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도록 교육하기 위해서 김정일 父子가 만든 것이 地上의 지옥인 것이다. 후세인과 김정일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이다. 후세인은 국민들이 복종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김정일은 사랑하도록 요구했다. 어제 바그다드의 후세인 동상은 미 해병대와 시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졌다. 시민들은 부러진 동상의 머리를 끌고다녔다. 벗은 신발을 가지고 후세인 동상을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아랍 세계에서 가장 모욕적인 행동이다. 멀지 않는 시간 안에 김일성 김정일 동상도 그렇게 될 것이다.
=======================================
조지 오웰의 「1984년」읽기-2/ 권력은 상대방에게 고통과 모욕을 주어야 증명된다
그(注-사상 심문관 오브리언)는 다른 어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쟁취해야 하는 권력, 그 진정한 권력은 사물에 대한 권력이 아니고 인간에 대한 권력이야.』
그는 말을 끊고 잠시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에게 질문하는 선생과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질문했다.
『윈스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권력을 내세울 수 있지?』
윈스턴은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에게 고통을 줌으로써요.』
『맞았어. 그에게 고통을 줌으로써야. 복종으로는 불충분해. 만약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자기의 의사가 아닌 상대편의 의사에 복종한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권력은 고통과 모욕을 가하는 데서 존재하는 거야. 권력은 인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서 자기네가 선택한 새로운 형태로 다시 짜맞추는 데 있는 거야. 그러면 자네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창조하려는지 이제 좀 알겠나? 그것은 舊개혁자들이 상상했던 어리석은 쾌락주의적 유토피아와는 정반대의 것이야. 공포와 배신과 고통의 세계, 짓밟고 짓밟히는 세계, 자체가 세련되면 될수록 오히려 무자비해지는 세계, 바로 그것이야. 우리의 문명은 증오 위에 세워져 있지. 우리의 세계에서는 공포, 분노, 승리, 그리고 자기 비하 등의 감정을 빼놓고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될 거야. 그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때려부술 거야― 몽땅 말이야. 이미 우린 혁명 전부터 존속해 온 사고의 습관을 부수고 있어.
우리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남편과 부인의 관계를 끊어 놓았지.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부인과 자식들, 그리고 친구를 믿으려 들지 않지. 그러나 앞으로는 부인도 친구도 없어질 거야. 애새끼들을 암탉이 알을 낳으면 꺼내듯 낳자마자 에미 품에서 배앗아 오는 거야. 성본능도 없어질 게고. 출산은 배급 통장을 재발급해 주듯이 연례적인 공식 행사가 될 거야. 우리는 성교시의 오르가슴도 없앨 거야. 신경학자들이 현재 이걸 연구중이지. 당에 대한 충성심 이외는 어떤 충성심도 존재 못하게 될 거야. 사랑 또한 「大兄」에 대한 사랑 이외는 어떤 사랑도 없어질 거야. 웃음도 패배한 적을 보고 승리감에 취해 웃는 웃음만이 있게 될 거고, 예술도 문학도 과학도 모두 사라질 거야.
우리가 전능해지면 과학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거야.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차이도 호기심도 세상을 사는 가운데 느끼는 즐거움도 사라지고 서로 겨루며 맛보는 모든 쾌락도 없어질 거야. 그렇지만 항상 ― 이걸 잊으면 안 돼, 윈스턴 ―언제나 끊임없이 커 가고 미묘해지는 권력에 대한 도취감을 맛보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야.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승리감에서 느끼는 전율과 무력한 적을 짓밟는 쾌감이 있게 될 거야. 만약 자네가 미래를 그린 그림 한 폭을 원한다면 한 인간의 얼굴을 짓밟는 구둣발을 상상해 봐―영원히 말이야.』
*이 대목에 나타난 권력의지는 바로 김정일의 그것이다. 김정일만 진정한 권력을 누린다. 2인자, 3인자도 김정일에게 아부해야 생존이 보장된다. 수령 지배체제하에선 실력자도, 제2인자도 없다. 권력의 분점은 민주화된 사회, 전체주의가 아닌 독재체제에서나 가능하다.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굶겨죽이며 사상개조 과정에서 죽인다. 기근이 다가오자 그는 불온층의 숙청 기회로 삼아 함경남북도에 몰려살던 이들을 집중적으로 굶겨죽였다. 그는 가학적 권력의 화신이다. 한국의 풍요와 자유를 누리면서 김정일을 추종하는 반미-반전-친북세력은 북한동포들에게 고통과 모욕을 주고 김정일의 가학취미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김정일이 후세인처럼 붕괴될 때 남한내 추종세력의 反인륜, 反민족적 정체가 폭로될 것이고 우리 사회에서 제거될 것이다.
마키아벨리, 노무현에게 낙제점 주다!
'지도자의 최대의 악덕은 국민들로부터 경멸과 증오를 사는 것이다'
趙甲濟
권력의 본질을 직시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근대 정치학의 문을 연 15~16세기 피렌체(이탈리아 도시국가) 사람 마키아벨리(君主論 등의 著書가 있다)는 이런 말을 남겼다.
<君主로서 최대의 악덕은 증오를 사는 것과 경멸을 당하는 것이다. 이런 악덕을 기피할 수만 있다면 군주의 임무는 상당한 정도로 수행할 수 있으며 따로 다소간의 악평이 있더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증오는 국민이 가진 것에 손을 댈 때 일어나는 것이기에 이 짓만 하지 않으면 쉽게 피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불구하고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가진 물질과 명예만 빼앗기지 않으면 의외로 불만 없이 살아간다. 한편 경멸은 군주가 변덕이 심하고 경박하며 여성적이고 소심하며 결단력이 부족할 때 국민의 마음속에서 피어난다. 군주된 자는 항해하는 배가 암초를 주의하는 것처럼 항상 이러한 인상을 국민들에게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이 위대하고 용감하며 진지하고 확고한 의지력에 기초한 것으로 비쳐지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무현은 지금 국민들로부터 경멸과 증오를 동시에 사고 있다. 변덕이 심하고 경박하여 경멸을 사고, 국민들이 가진 자유, 교양, 자존심, 재산에 손을 대려 하기 때문에 증오를 산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지도자로서 최대의 惡德을 범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또 이런 말을 했다.
<머리에 넣어두지 않으면 안되는 사실은 신질서를 만들어내는 것만큼 어려운 사업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런 개혁의 실행자는 현체제 아래서 단물을 빨아먹고 사는 사람들 전체를 적으로 돌려야 하며 신질서로부터 득을 보는 사람들로부터는 아주 미미한 지지밖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체제를 즐기는 사람들은 공포감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새로운 것에 대한 불신감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개혁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혁으로 손해볼 사람의 저항은 확실하고 끈질긴데 개혁으로 득을 볼 사람들은 아직 그 구체적 혜택에 대한 체험이 없으므로 반개혁 세력을 잠재울 만한 지지를 개혁자에게 보내주지 않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또 이런 말을 남겼다.
<권력을 가진 인간들 사이에서 최근에 베풀어준 은혜에 의해서 이전의 원한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인간은 은혜를 쉽게 잊지만 원한을 좀처럼 잊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또 들어보자.
<자신의 안전을 자신의 힘에 의하여 지킬 의지를 갖지 않은 경우, 어떤 국가라고 해도 독립과 평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키는 데 있어서 힘에 의존하지 않고 운에 의존하려들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에선 자신의 실력에 기초를 두지 않는 권세나 명성만큼 허무한 것은 없다」는 타키투스의 말은 어느 시대에나 유용한 현명한 생각이다>
마키아벨리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을 지켜주지도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질책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충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은 계속된다.
<군주로서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과 두려움을 받는 것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당연한 일이지만 거의 모든 군주는 양쪽을 다 원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사랑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을 수는 없다.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 나는 사랑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군주로서는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서운 사람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용서없이 짓이겨버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은혜나 의리와 같은 유대(紐帶)로써 맺어진 애정 같은 것은 이해관계가 개재되면 태연히 끊어버린다. 반면 공포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엔 복수가 두려워 쉽게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다. 군주가 사랑받는 모습의 군주型을 포기한다고 해도 하나 주의할 점은 증오와 원한을 사는 행동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서도 증오를 사지 않는 것은 양립 가능하다. 예를 들면 家臣이 가진 재산이나 여자에 손을 대는 무법을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인간이란 것은 자기 재산을 빼앗아간 사람보다도 아버지의 죽음을 더 빨리 잊어먹는 존재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내용의 핵심은 군주가 부하들로부터 외경의 대상이 되면서도 증오와 원한을 남겨선 안된다는 강조입니다.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공포를 주는 행위이지만 부하의 사유재산을 강탈한다든지 부하의 아내를 탐낸다든지 하는 행동은 증오를 사는 행위입니다. 공적인 제재는 공포를 부르지만 사적인, 즉 개인감정이나 욕심에 의한 제재는 증오나 원한을 사는 것입니다.
金의 惡靈이 盧의 머리속에 들어갔나?
망언의 구조: 국민과 국군을 저주한 그의 말은 對南赤化선동의 틀과 표현이다. 그는 정신이상상태이다.
趙甲濟
노무현 대통령의 平統 연설 직후 만난 한 예비역 육군대장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북괴로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왔던 이야기를 우리 대통령이 그대로 하고 있더군요. 그가 국군과 미군과 軍 원로들에게 침을 뱉듯이 쏟아놓은 폄하와 적개심과 경멸은 북괴가 국군을 향해서 수십년간 이야기했던 것과 표현까지 비슷해요. 이 자가 한국 대통령 맞습니까?'
그래서 찬찬히 연설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과연 盧씨는 국군, 국민, 미국을 향해서 전방위적으로 공격하는데 거기에 동원된 용어는 조국에 대한 적개심이 없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단어였다. 한반도에서 국군, 국민, 미국에 대해서 이런 감정을 가진 사람은 노무현, 김정일, 그리고 親北좌익세력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老兵이 지적했던 핵심적인 의미를 부정할 수 없게 된다. 盧武鉉씨는 김정일의 시각으로 국군과 국민과 동맹국을 비방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의 머리엔 좌경사상 정도가 아니라 김정일식 국가관과 역사관이 들어 있다는 것인가? 그의 문제 발언을 정밀 분석한다.
'대한민국 군대들 지금까지 뭐 했노, 나도 군대 갔다왔고 예비군 훈련까지 다 받았는데, 심심하면 사람한테 세금 내라 하고, 불러다가 뺑뺑이 돌리고 훈련시키고 했는데, 그 위의 사람들은 뭐했어, 작전통제권 자기들 나라 자기 군대 작전 통제도 한 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놔놓고 나 국방 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깁니까? 그래서 작통권 회수하면 안 된다고 줄줄이 몰려가서 성명내고, 자기들이 직무유기 아닙니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위의 발언을 앞뒤 설명 없이 들려주면 100명 중 90명은 좌익단체 간부의 선동연설이라고 말할 것 같다. 이 연설의 다른 부분에서 盧씨는 군대가 젊은이들의 인생을 썩히는 곳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대한민국을, 심심하면 국민들을 불러다가 예비군 훈련으로 고생시키고 세금을 착취하는 집단이라고 다시 규정한다. 그는 역대 국방장관들이 제 나라 군대의 작전통제도 전혀 할 수 없는 허수아비 군대를 만들어놓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대목은 국군통수권자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부분이다. 한국군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없다는 것은 빨갱이들이 자주 퍼뜨리는 전형적인 거짓선동이기 때문이다. 군통수권자가 빨갱이들의 이 선동에 넘어가 좌익의 억지논리로써 국군을 폄하하고 있다.
군통수권자가 자신이 미국 대통령과 함께 공동소유하고 있는 戰時작전통제권에 대해서 '나는 한 개도 없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런 자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김정일이 남침하면 '나는 작전통제권이 한 개도 없다'면서 국군에 대해 응전 명령을 내리지 않아 항복하도록 만들 것이 아닌가?
한반도에서 역대 국방장관들을 향해서 '별들 달고 거들먹거린다'고 공개석상에서 말할 수 있는 叛心이나 배짱을 가진 인간은 휴전선 이북이나 정신병동, 또는 감옥에서 주로 발견될 것이다. '戰作權 二元化'에 의한 한미연합사 해체에 반대했던 역대 국방장관들 중에는 金聖恩 전 해병대 사령관처럼 6.25 전쟁의 主役이었던 분들이 많다. 屍山血海의 전장을 누비면서 조국을 지켜낸 이 분들을 향해서 한국의 대통령이 '거들먹 거린다'고 표현해도 침묵하는 국군과 들고 일어나지 않는 국민은 자유와 헌법을 지킬 힘은커녕 自衛능력도 없다고 봐야 한다.
盧씨는 이렇게 말했다.
'근데 2사단 빠지면 다 죽게 생긴 나라에서 다 죽는다고 국민들이 와들와들 사시나무처럼 떠는 나라에서 무슨 대통령이, 외교부장관이 미국의 공무원들하고 만나서 대등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겠냐?'
미군의 후방배치에 대해서 국민들이 걱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와들와들 사시나무처럼' 떨지는 않았다. 국민들이 한미동맹의 약화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盧씨가 김정일에게 굴종하면서 韓美동맹을 깨려고 한다는 의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朴正熙 대통령이 한미연합사 해체를 추진했다면 국민들은 불안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이면 다 준비를 해놓고 하는 것이겠지'하고 믿을 수 있기에. 국민들의 정당한 걱정을, '다 죽는다고 와들와들 떤다'고 야비하게 과장하면서 경멸조로 욕하는 대통령을 정신이상상태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주 온건한 평가일 것이다.
국민들도 盧씨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비겁함을 보여주지 않았나 반성해야 할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며 꿈틀하는데 대다수 국민들은 盧씨가 김정일 정권과 남한내 친북좌익 세력의 對南赤化노선에 동조하는 반역적 정책을 펴도 침묵했고, 그 침묵의 代價를 이런 受侮(수모)로써 치르고 있는 것이다.
盧씨는 또 말했다.
'국민들이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고 하는 의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국방이 되는 것이지,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지가랑이 매달려 가지고, 미국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 이게 자주 국가의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가 있겠냐?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盧씨의 야비하고 천박한 국민공격은 계속 된다. 미국을 형님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당당한 동반자 관계이지 그 누가 대한민국을 미국의 동생으로 본단 말인가? 노무현씨의 비천한 무의식을 반영한 말일 뿐이다. 미국을 형님으로 보는 것은 노무현이다. 그 비굴한 자의식을 숨기기 위해서 미국에 대어드는 행동을 취할 뿐이다. 노씨 형제의 자녀와 사위 네 명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거나 갔다 온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노무현이야말로 희대의 위선자인 것이다. 대통령으로부터 욕을 먹은 국민들은 이렇게 반격할 권리가 있다.
'어이 자네는 말이야, 형님이 둘인가? 김정일도 형님이고 미국도 형님인가. 모택동도 존경하고 링컨도 숭배하더니 정신분렬증에 걸렸단 말인가'
盧씨는 또 말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한국의 국방력이 북한보다 약하다면 70년대 어떻게 견디어왔으며, 그 많은 돈을 우리 군인들이 다 떡 사 먹었느냐 , 옛날에 국방장관들 나와서 떠드는데 그 사람들 직무유기한 것 아니에요. 그 많은 돈을 쓰고도 북한보다 약하다면 직무유기 한 거지요?'
盧씨는 국방부의 보고를 불신한다. 국방부는 한국군의 戰力이 북한군보다 열세라고 주장해왔다. 물론 盧 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으니 한국군은 더욱 열세이다. 아무리 많은 재래식 무기로 대응해도 핵무장한 북한군을 이길 수 없다. 칼이 아무리 많아도 기관총 한 자루를 당할 수 없다. 한국군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북한정권이 核무장을 하고 있을 때를 이용하여 한미연합사 해체를 강행하고 있는 노무현이다. 한국의 국방력이 약해진 원인을 제공한 자가 가난한 시절 어렵게 국방력을 건설했던 군인들과 국방장관들을 향해서 '떡 사먹었느냐'고 삿대질한다. 민족사 2000년 최악의 不忠이고 무례이다.
'다음에 우리 안보 좀 조용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하게 안보하면 되는데, 정부가 안보, 안보하고 나팔을 계속 불어야 안심이 되는 국민의식, 인식, 이것 정말 참 힘듭니다. 북한이 미사일을 쐈어요. 쐈는데, 강원도 북쪽 어디에서 저 함경북도 앞바다 어느 쪽으로 미사일을 쐈는데, 한국으로 그 미사일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 않은가? 다 알고 있는 일이지 않은가?'
盧씨의 국민공격은 도를 더해간다. 盧씨는 북한이 개발한 미사일과 핵폭탄은 한국을 치기 위한 것이 아니란 인식을 갖고 있다. 김정일보다도 더 김정일을 옹호하다가 김정일도 그 과잉아부에 失笑할 수준의 말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하고 있다.
'대통령은 바뀌었고 미국을 한 번도 안 가 본 대통령이고, 그런데 전쟁은 난다하고 이런 저런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안팎 곱사등이 됐지요. 북핵문제를 가지고 전쟁은 없다 해야 하고'
2003년 초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고 걱정했다는 주장이다. 북한의 핵문제가 심각해지긴 했지만 그때 전쟁을 걱정한 한국인이 과연 있었나?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매여 있었다. 전쟁을 한다면 김정일이 쳐내려오지 도대체 누가 2003년에 전쟁을 일으키려 했단 말인가? 노무현 선거캠프가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구호를 내걸고 對北엄정조치를 주장하는 보수층을 상대로 '그렇다면 전쟁 하자는 말인가'하고 공갈쳤던 것이 盧캠프였다. 이런 식으로 과장하고 선동하다가 보니까 자기최면이 되어가지고 盧씨는 전쟁을 막기 위하여 미국에 갔다는 뜻이다. 동키호테도 이 정도이면 스페인사람들도 부러워할 일이다.
'한국군이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을 때 북한과 우리가 대화하는 관계 중국과 우리가 대화할 때 외교상의 대화를 할 때 동북아시아의 안보문제를 놓고 대화를 할 때 그래도 한국이 말발이 좀 있지 않습니까?'
남한의 김정일 전위대는, 한국군은 작전통제권도 없는 미군의 심부름꾼이므로 북한군이 대화상대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을 해왔다. 작전통제권을 가진 한국 대통령이 이들의 선동에 속아넘어가 작전통제권이 없다는 착각에 빠져가지고 '작전통제권 환수'라는 말을 만들어 헌법상의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의 대화상대라도 되어보려고 韓美연합사 해체에 돌입했다는 판단을 하게 하는 말이다. 이래도 노무현이 정신이상자나 좌익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야말로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제 정신이라는 사람이 이 정도인제 제 정신이 아닐 땐 어떤 일을 저지를지 상상만으로써도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 대통령이 국군통수권을 갖고 있는 나라의 하루하루는 위기와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위기탈출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즉각탄핵, 국민의 저항권 발동, 그리고 헌법제5조에 입각한 국군의 국가안전보장 수호 행위가 있다. 악마 김정일의 惡靈이 노무현의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면 대한민국의 조종간은 김정일이 쥐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엑소시스트를 불러야 한다는 말인가?
정확한 말을 쓴 박정희의 언어감각
연설문 초안에 있는 '군과 정부의 重鎭要員으로 있는 여러분들은'이란 대목에서 그는 重鎭要員을 '中堅幹部'로 바꾼다.
趙甲濟
'큰 자유 지키려면 작은 자유 양보해야'
朴正熙대통령은 밑에서 써올리는 연설문을 수정하여 완전히 자기것으로 소화한 뒤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직접 한 연설문 초안 교정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은데 1960년대 중반의 '국방대학원 졸업식 諭示' 원고가 남아 있다. 연설문 작성 비서관이 써올린 것을 朴대통령이 수정, 加筆한 부분을 들여다보면 그의 언어감각이 매우 적확함을 알 수 있다.
朴대통령은 우선 표현을 최대한 구체화하려고 한다. 연설문 초안에 있는 '군과 정부의 重鎭要員으로 있는 여러분들은'이란 대목에서 그는 重鎭要員을 '中堅幹部'로 바꾼다. 훨씬 그 의미가 구체화된 것이다.
초안: '여러분들이 (중략) 진지한 연구를 하게 된 것은, 국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朴 대통령은 '뜻깊은'이란 애매한 표현을 '유익한'으로 바꾼다. 이 역시 의미가 확실해지면서 구체화된 것이다.
연설문 초안이 '무엇보다도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國內的 안전'이 선행되어야 하겠다'고 적자 朴대통령은 '國內的'을 '사회적'으로 바꾼다. 국내적 안전은 국가의 안전과 같은 맥락의 뜻이므로 중복이 되는데 '사회적 안전'으로 바꿔놓으니 국가의 내면과 질서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그 뜻이 분명해진다.
그는 또 초안의 '모든 국민이 뚜렷한 목표와 보람 속에'를 '모든 국민이 뚜렷한 목표와 희망 속에'로 교정한다. '보람'은 문맥상 어색하지만 '희망'은 '목표'를 보강하는 適所의 낱말이다. 나 같은 전문 편집자도 감탄할 만한 언어감각이다.
朴대통령은 연설문 초안을 다 읽고는 석장을 추가했다. 그가 직접 쓴 추가분은 이러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둡고 절망적인 면이 많이 있는 반면에는, 밝고 희망적이고도 고무적인 면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용기와 의욕을 가지고 분투해야 할 시기라는 것을 명심해주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졸업생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꼭 여러분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세대에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서 우리 다 같이 평생에 소원이 있다면, 우리들 세대에 우리의 조국을 근대화해서 先進열강과 같이 잘 사는 나라를 한 번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서구라파인들이 그들의 조국을 근대화하기 위해서(문예부흥이고 산업혁명이요 하고: 산업혁명으로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동안) 피 땀 흘려 노력할 때에 우리 조상들은 케케묵은 당파싸움이나 하고 兩班 자랑 하느라고 세월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또 2차대전 후 20년 동안 패전의 苦盃를 마신 패전국가들이 잿더미속에서 피눈물을 흘려가며 그들의 조국을 재건해서 오늘날 그들은 전쟁 전보다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 후 20년 동안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與野정치싸움만 하다가 또 다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앞으로 5년 내지 10년은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기회를 또 다시 놓친다면 우리에게는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를 또 다시 놓친다면 우리는 영원히 후진국가란 낙인을 벗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생산과 건설에 집중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기간동안은 우리는 모든것을 참고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맡은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용기와 결심을 가지고 분투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합니다>
'남과 북은 생존투쟁중'
朴대통령은 이 짧은 글에서 국가의 목표를 '근대화'라고 규정한 다음 5-10년의 기한내에 생산과 건설에 모든 자원과 인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영원히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朴대통령은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역사의 기회는 그 시간대가 무한하지 않고 제한적이므로 국력을 집중하여야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朴대통령이 혼신의 기력을 쏟아 한 연설이 1974년10월1일 국군의 날 유시이다. 아내를 북한정권이 보낸 암살자에게 잃은 그로서는 정예국군의 대오를 앞에 둔 이 자리의 의미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는 한국이 처한 상황을 생존투쟁으로 규정했다.
<우리 국군의 역사는 건군 초창기부터 공산침략자들과의 투쟁의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도 그들과 투쟁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또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며, 일보도 양보할 수 없는 생존투쟁입니다>
그는 '유신체제는 공산침략자들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라고 단정했다. 그는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도 알고, 또는 절제할 줄도 아는 슬기를 가져야만 우리는 큰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우리도 남과 같이 주어진 자유라고 해서 이를 다 누리고싶고, 또 남이 하는 것은 다 하고싶고, 그러고도 자유는 자유대로 지키겠다고 한다면, 또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환상적인 낭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다른 자리에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기강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지만 북괴가 노리는 국론분열을 막아 더 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실정에 맞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朴대통령은 또 '민주주의는 어떻게 보면 공자가 말씀하신 中庸사상과 상통하는 것이며 전제군주식 억압정치도 나쁘지만 무절제한 자유방임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中庸의 핵심은 온건한 균형감각일 것이다. 朴대통령은 유교적 교양위에서 균형감각이 있는 인격을 쌓아올린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文武를 통합한 균형미를 바탕으로 하여 엄격하면서도 多感하고 이론과 실천을 겸비하여 사물을 항상 주체적으로, 균형적으로 보려고 한 그는 중간선을 택하는 기회주의자의 균형이 아니라 심사숙고 끝에 대담한 결단을 내린 뒤 우직하게 밀고 가는 隱忍自重型의 균형감각 소유자였다.
朴대통령은 한산도의 戍樓(수루)를 둘러보다가 '금연'이라고 쓴 패말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루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 보고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회상하며 담배 한 대쯤 피우고싶지 않겠소? 금연보다 오히려 재떨이를 비치해두도록 하시오'
윤광웅은 국군을 괴뢰군으로 보았나?
연합사의 연합작전계획은 대한민국의 主權을 북한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만든 것인데, 윤광웅, 이 자는 이를 主權침해라고 본다. 동맹군과 손잡고 조국의 主權을 방어하는 행동을 主權침해라고 본다면 尹씨는 서울이 아니라 평양의 시각에서 사물을 판단하고 있는 셈이다.
趙甲濟
8월17일 국회국방위회의록에 기록된 李仁濟 국민중심당 의원과 尹光雄 장관 사이의 문답을 읽어보면 전율이 온다.
《이인제 의원 : 전시에 작전계획을 韓美연합사령부에서 공동으로 작성해 가지고...시행하는 것이 한국의 군사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국방부장관 윤광웅 : 주권하고 관계가 있습니다. 침해에 가깝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군 단독으로 해야 하는 것을...(장내 소란)
이인제 의원 : 아니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국방부장관 윤광웅 : 자주국방과 관계있습니다.
황진하 의원 : 그것이 어디 주권 빼앗긴 것입니까?
윤광웅 장관 : 자주국방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이인제 의원 : 지금 북한이 대한민국은 전시작전통제권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과 정전체제를 해소하고 평화체제로 가는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이유가 있다 이렇게 판단하시는 것입니까?
윤광웅 장관 : 우리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한국이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평화협정이라든지 군축이라든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때 한국군 당사자로서 자격이 없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요
이인제 의원 : 그것이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십니까?
윤광웅 장관 : 예. 저는 거기에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尹 당시 장관의 머리속엔 친북반미 세력들의 억지주장이 들어가 있었고 이런 논리를 앵무새처럼 쏟아내고 있는 듯하다. 좌파정권, 좌파대통령下에 좌경국방장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韓美연합사의 연합방어작전을 한국의 主權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좌익중에서도 골수級이다. 한미연합사의 연합작전계획은 한국 정부의 요청에 의해서 만들어진 동맹군 조직의 기본전략이다. 대한민국의 主權을 북한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만든 것인데, 윤광웅, 이 자는 이를 主權침해라고 본다. 동맹군과 손잡고 조국의 主權을 방어하는 행동을 主權침해라고 본다면 尹씨는 서울이 아니라 평양의 시각에서 사물을 판단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북한의 인민무력부장과 같은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尹 당시 장관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북한정권이 한국군을 미군에 종속된 괴뢰군으로 취급하여 평화협정, 군축회담의 당사자로 삼지 않으려 하는 시각에 일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남침戰犯집단인 북한괴뢰군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 대한민국의 국군보다 우월한 존재로 보지 않으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 尹씨는 국군을 괴뢰군으로 보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尹씨는 북한괴뢰군으로부터 대화상대로 인정을 받기 위하여 韓美연합사를 해체하겠다는 것인가? 대한민국과 국군에 대한 자부심은커녕 그 합법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가 2년간 70만 국군의 지휘자였다는 말인가? 그가 장관일 때 김정일이 남침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물론 그런 남침유혹을 저지한 것이 韓美연합사였다. 공안당국은 늦기 전에 윤광웅씨에 대해 조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 미국을 한국의 주권침해국으로 본 사람을, 국군을 괴뢰군이라고 욕하는 괴뢰군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를 국방장관에 임명한 자도 동시에 조사해봐야 할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왜 북한정권이 간첩에게 지령을 내려 민노당이 국회에서 윤광웅을 보호하도록 공작하라고 했는지!!!
이런 윤광웅씨에게 맹종하여 대한민국의 안보와 국익을 파괴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국군 지휘부는 김정일이 남침했을 때 전방 부대에 응전을 명령할 수 있을까? 이게 2006년 대한민국 국군의 근본 위기이고 비극이다. 戰歿 군인들이 원혼이 되어 떠돌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25 남침 부정하는 자는 형사처벌해야
프랑스 등 서구의 몇 나라는 히틀러에 의한 유태인 학살을 부정하는 언동을 하는 사람을 형사처벌하는 법안을 갖고 있다.
趙甲濟
프랑스 등 서구의 몇 나라는 히틀러에 의한 유태인 학살을 부정하는 언동을 하는 사람을 형사처벌하는 법안을 갖고 있다. 이런 立法취지라면 6.25 남침을 부정하는 한국인을 형사처벌하는 법이 있어야 한다. 이는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법이 아니라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를 제한하는 체제 생존차원의 自救조치이다. 이런 법이 생기면 맨 처음 법정에 서야 할 사람은 盧 대통령과 386 극좌공산주의자 출신 측근들일 것이다.
9. 아홉 대통령 이야기
-두 위대한 대통령, 두 부지런한 대통령, 두 반역적 대통령, 한 명의 '좌파宿主' 대통령, 두 과도기 대통령이 있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이후 두 명의 위대한 대통령(李承晩, 朴正熙), 두 명의 부지런한 대통령(全斗煥, 盧泰愚), 두 명의 반역적 대통령(金大中, 盧武鉉), 한 명의 '좌파宿主' 대통령(金泳三), 그리고 군사변란을 묵인했던 두 과도기 대통령(尹潽善, 崔圭夏)이 있었다.
李承晩 건국 대통령은 한국을 자유민주주의 이념 위에 세우고 6.25 휴전기에 미국을 압박하여 韓美동맹이란 자유와 번영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그는 6.25 남침 직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좌익의 공격목표를 사전에 소멸시키고 민주주의 교육으로써 '不義와 不正에 저항할 줄 아는 젊은 세대'를 키웠다. 이 젊은 세대가 4.19 학생혁명으로써 李대통령을 몰아냈으니 그는 '자기성공의 희생자'였다.
미국의 名門 프린세턴 대학교에서 한국 최초의 박사가 된 그는 동서양의 교양을 한 몸에 통합한 카리스마와 세계大勢를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으로써 한국을 해양세력권에 묶어놓고 세계사의 主流 속에 집어넣었다. 1948년 건국 당시 한국인중 知的능력이 가장 탁월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한국인의 축복이었다.
아시아에서 두 개의 기적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실용적인 중국사람들이 공산화된 것. 이는 毛澤東의 군사적 천재성에 기인하는 바 크다. 또 다른 기적은 관념론의 포로였던 한국인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1920년대에 이미 간파했던 李承晩의 지도력에 힙입은 바 크다. 李承晩을 매개로 하여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 헌법속으로 들어와 건국이념이 된 것이다. 2007년의 한국이 세계 10大 경제력, 26위의 삶의 질을 가진 선진국 수준의 나라가 된 데는 李 대통령이 만든 자유와 동맹의 울타리가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한국역사상 800년만에 처음으로 효율적인 군사문화를 도입하여 후진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밀어올린 '근대화의 旗手'이자 '시스템 운영의 鬼才'였던 朴正熙는 6.25 전쟁의 産物이다. 이 전쟁으로 한국 사회의 最强집단이 된 국군장교단이 무능한 文民지배층을 교체한 것이 5.16 군사혁명이었다. 朴 대통령은 '서구식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면서 민주주의를 한국식으로 변형하여 근대화를 성공시킨 진정한 주체사상가였다. 그는 富國强兵策으로써 민주주의의 물질적, 제도적, 계급적 토대를 만들었다.
이른바 유신독재로써 정치코스트를 최소화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해갔던 1970년대 朴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매진했고 이것이 성공하여 한국을 重量級 국가로 올려세웠다. 1979년에 들어서서 朴正熙式 근대화의 産物인 도시중산층이 장기집권에 싫증을 느끼고 지식인 및 학생들과 손 잡고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고 나섰고(釜馬사태), 이것이 朴정권의 실력자 金載圭 정보부장을 변심시켜 대통령을 사살하게 만들었으니 朴正熙 또한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이끄는 약5000명의 혁명군이 서울에 진입하였을 때 張勉 총리는 달아나 연락이 두절되었다. 군통수권자이던 尹潽善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의 진압군 동원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內戰을 막고 군사혁명의 성공을 보장했다. 朴 대통령이 피살된 직후 군부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全斗煥 장군이 12.12 군사변란을 일으키자 崔圭夏 대통령도 流血사태를 걱정하여 진압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尹, 崔 두 대통령은 이 조치로 해서 비판을 받았으나 북한군과 지척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국군을 동원하여 국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全斗煥, 盧泰愚 두 대통령은 장교 시절부터 朴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힘으로써 혼란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12.12사건, 광주사태 등 流血사태를 통해서 집권했으나 민주화 약속을 지켰고 세계1위의 경제성장을 기록했으며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켰다. 盧泰愚 대통령은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으로써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했다. 이 대통령 선거에서 盧泰愚는 金泳三-金大中의 분열을 틈타서 당선되어 전면적인 민주화를 주도했다. 그는 공산권 붕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중국, 소련, 동구국가들과 수교함으로써 북한을 후방에서 고립시켰고 신도시 건설, 인천공항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도 적극적으로 했다. 盧대통령은 또 3당 合黨을 통해서 보수연합정당인 민자당을 만들고 金泳三씨를 후계자로 밀었다.
안정적인 보수연합구도의 지원하에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金泳三 대통령은 좌파적 영향하에 들어가 보수연합구도를 깨고 한국 현대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함으로써 좌파득세로 가는 카피트를 깔았다. 그는 보수를 자칭했으나 사실상 좌파적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의 분열적 정책이 金鍾泌의 충청도 세력과 대구-경북세력을 民自黨에서 이탈시켰고 外換위기를 불렀다. 이런 정책실패와 보수분열 구도하에서 金大中이 1997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좌익활동가 출신 金大中은 대통령이 된 이후 좌경적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현대그룹을 통해서 4억5000만 달러를 金正日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보낸 끝에 2000년 6월의 평양회담을 성사시켰다. 비밀송금으로 김정일에게 약점이 잡힌 신세가 된 그는 김정일의 對南적화전략지침을 그대로 수용한 6.15 선언에 합의함으로써 한국을 赤化의 길로 내몰았다. 金大中의 노선을 이어받아 2002년에 당선된 盧武鉉 대통령은 金大中의 反헌법-反국가적 노선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위선적 평화론의 전도사가 되었고, 金正日의 對南赤化전략의 핵심인 韓美연합사 해체, 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안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한국을 북한 정권의 인질로 전락시킨 끝에 北의 戰犯집단이 핵무장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金日成이 일으킨 민족반역적 6.25 전쟁으로 약300만, 金正日의 사회주의 실패로 약300만 명이 죽음으로써 공산주의의 본성을 보여주었는데도 한국의 유권자들은 선거를 통해서 민주투사로 위장한 親김정일 세력을 정권담당자로 만들었다. 독일인들이 선거를 통해서 히틀러를 뽑은 것과 같은 실수를 한 셈이다. 金泳三 이후 14년간 한국정치는 조선조의 朋黨정치 시대로 회귀했다. 국가엘리트層이 약해지고 지역, 계급적 이해관계로 國論이 분열되면서 국민들의 정신도 많이 망가졌다. 다행히 民間부문이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에 충실하여 기우는 나라를 버티고 있다.
각성하고 있는 한국의 유권자들이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통해 반역적 좌파정권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어린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려 있다. 좌파종식에 성공한다면 한국은 자유통일을 너머서 一流국가를 건설할 것이고 이는 非서구국가로선 일본에 이어 두번째의 위업이 된다. 2007년은 민족사의 결정적 해이다.
김대중이 받은 밴플리트賞 미스터리
공산당을 막아 한국을 지킨 밴플리트 장군과 공산당의 赤化공작에 문을 열어준 김대중이 무슨 관계?
趙甲濟
김정일과 만나기 위하여 현대그룹을 시켜 4억5000만 달러를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보내주도록 하였던 사람, 그 김정일의 對南적화전략을 수용한 6.15반역선언에 합의하여 국가안보와 국익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던 김대중씨. 그에게 미국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지난 주 하필 밴플리트賞을 주었다. 밴플리트賞은 코리아 소사이어티 창립 멤버로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 제정됐었다. 한국을 공산침략으로부터 지겨낸 사람을 기념하여 제정된 賞이 공산당의 공작에 문을 열어준 사람에게 주어졌다. 밴 플리트는 어떤 사람인가?
6.25 남침 전쟁 때 유엔군의 主力이던 미8군의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우이다. 그의 아들 지미는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본국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해외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 승무원들을 데리고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3월19일 밴 플리트가 만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父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4월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 짐이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4월4일 오전 10시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승무원은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정찰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다와 접촉했다. 지미는 主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전선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 벗은 미국 국민이기도 할 것이고, 남침을 당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밴 플리트의 아들은 자원해서 한국에 왔다. 동포가 아닌 他國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 젊은이에게 살아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밴플리트家의 희생정신과 김대중씨의 반역정신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이런 賞이 주어졌는지 한번 경위를 알아보아야겠다.
이 추운 겨울 리지웨이 장군을 생각한다
우리가 북한동포들처럼 춥고 배고픈 겨울을 보내지 않도록 해준 이 분은 戰場의 신사였다.
趙甲濟
한반도의 겨울은 춥다. 특히 6.25 熱戰이 한창이던 1950년 겨울은 추웠다. 이 시기에 대한 미군들의 회고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가 'cold'이다. 미군이 싸운 전투중 가장 온도가 낮았던 것이 6.25였다.
지금 북한동포들은 우리가 6.25 때 겪었던 그 추위를 거의 알몸으로 견디고 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은 남한에선 추억이 되었으나 북한동포들에게는 현실이다. 김대중, 노무현을 포함한 남한사람들도 몇 사람의 미국인이 아니었으면 지금 북한동포처럼 추위에 떨고 있을 것이다.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참전을 결단했던' 트루먼 대통령, 군사전문가들의 거의 일치된 반대를 꺾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戰勢를 역전시켰던 맥아더 장군, 낙동강 방어선과 부산교두보를 확보하여 반격의 힘을 축적했던 워커 미8군 사령관, 그는 1950년 12월에 한국군 트럭에 받혀 사고사했다. 중공군 대공세 시기에 워커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유엔군의 총붕괴를 막고 서울을 재탈환했던 리지웨이, 조종사 아들을 북한상공에서 잃은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 등등.
나는 리지웨이 장군의 한국전 회고록을 읽었을 때 여러 번 감동했다. 문명국가의 장교들이 가진 紳士道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戰死한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미8군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부인한테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도쿄를 거쳐 대구로 날아온다.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李承晩 대통령 예방이었다. 李 대통령은 미군이 중공군의 총공세에 굴복하여 한국을 포기하고 철군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이 완강한 戰士를 만나 내가 8군을 일본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싶었다. 그는 약간 수동적으로 나를 맞았다. 나는 악수를 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을 했다. 말을 돌려서 할 시간도 없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대통령 각하, 여기 오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여기 머물려고 온 것입니다'
이 말을 그는 기다렸던 것 같았다. 그는 태양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는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았다>
서울을 포기한 직후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군의 丁一權 참모총장에게 보낸 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직 하나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귀하의 국민들의 자유를 지켜내는 일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한다>
리지웨이 장군은 1951년 1월21일 苦戰中인 미8군을 향해서 '우리는 왜 여기에서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란 제목의 글을 내려보낸다. 이 글에서 리지웨이 장군은 '우리는 한국의 마을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는 것만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지는 글의 요지는 이러했다.
<핵심적 문제는 서방문명이 공산주의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포로들을 사살하고, 시민들을 노예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지배층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신성시하는 정부를 무너뜨릴 것인가이다. 우리의 동맹국인 한국의 자유뿐 아니라 우리의 자유, 우리의 자주독립과 생존을 위해 우리는 싸우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산주의와 개인의 자유 중 양자택일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나 동시에 최선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군인이란 직업의 명예를 드높여, 우리를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할 기회가 왔다>
1951년 1월1일 그는 서울 북방으로 가서 후퇴하는 한국군을 보았다. 회고록에서 그는 한국군이 무질서하게 무기도 버리고 지휘계통도 무너진 채 퇴각하는 모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차에서 내려 한국군의 궤주를 정지시켜려고 해도 공포에 질린 한국군은 미군 사령관의 말도 듣지 않더란 것이다. 리지웨이 장군은 1.4 후퇴時 지켜본 한국인들의 참혹한 피난행렬에 대해서 이런 요지의 묘사를 했다.
<그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수염을 기른 노인들, 아들의 등에 어린아이처럼 업힌 할머니들, 그들은 말 없이 한강을 건너갈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공산주의의 폭력을 피해 잠시 맛보았던 그 자유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 시기 미군은 후퇴하고 있었고 리지웨이는 병사들과 함께 막사에서 생활하면서 미군의 사기를 회복시켜 반격의 찬스를 만들기 위하여 苦鬪하고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시기에도 그는 한국인에 대한 예의와 동정심과 배려를 유지했다. 그의 회고록엔 고생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紳士란 어려운 조건하에 처했을 때 품위를 유지하는 言行의 소유자이다.
같은 시기 毛澤東은 人命손실에 대해서는 일체의 고려 없이 작전을 짜고 수행했다. 중공군이나 북한군측의 기록에선 인간적 배려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戰場에서도 인간의 생명, 그것도 타국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 리지웨이 장군. 그는 1951년 봄의 반격작전을 통해서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한국포기를 검토하던 미국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을 안심시키고 한국을 지켜냈다.
이 추운 겨울 한국인들이 따뜻한 週末을 보낼 수 있게 만든 사람중의 한 분이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인 것이다.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를 더욱 따뜻하게 해줄 것이고 그를 저주하는 인간들은 머지 않아 불행을 만날 것이다.
--------------------------
지난 한 달 인기 기사 모음
- 趙甲濟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7-01-08, 15: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