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5년 단임제가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데 결정적 장애가 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또 다른 盧씨 대통령은 그 5년간 엄청난 일을 했다. 盧泰愚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아직 제대로 내려지지 않았으나 그가 5년간 이룩한 일들이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비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고 좋다는 점에선 큰 異義가 없을 것이다. 그는 민주화를 실천했고, 韓中수교 등 북방정책으로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넓혔으며, 對北정책에서 주도권을 잡았고, 경부고속전철과 인천 공항 및 주택200만호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많이 했다.
후임자에 의해서 해체되긴 했지만 안정적 보수연합정당인 민자당을 3당합당에 의해 만들어낸 것도 그였다. 월간조선에 실린 肉聲회고록과 인터뷰 등에 나타난 盧泰愚 전 대통령 자신의 술회를 정리하여 그의 생산적이었던 5년 실적을 소개한다.
<내 임기는 5년이었지만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전환기였다. 여기에다가 공산권의 붕괴로 세계사의 일대전환이 일어난 시기와 겹쳐 그 전환에 따른 혼란과 고민은 참으로 큰 인내와 용기를 강요했다. 전환(轉換)의 핵심적 의미는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대에서 민주화를 실천해야 하는 시기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 실천의 최종책임을 진 것이 나였으므로 나부터 새로운 사고(思考)로 새로운 사태에 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가 가장 민주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고 내가 가장 민주적으로 국정(國政)을 운영해야 했다. 나는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에 대한 언행(言行)일치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했다. 민주화를 외친 정치인이 실천에선 가장 非민주적인 경우를 나는 여러번 발견했다.
권위주의 정부가 민주정부로 넘어가는 과정이 가장 혼란스럽고 가장 위험하다는 것은 세계사가 실증(實證)하고 있다. 많은 나라가 이 전환기에서 실족(失足)하여 쿠데타, 민중혁명, 심지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거나 성장의 동력(動力)을 상실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세 번의 큰 고비가 있었다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주도한 건국(建國),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이끌었던 근대화, 그리고 나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직면해야 했던 민주화 시기일 것이다. 우리는 건국, 근대화, 민주화의 고비를 북한정권과 대결하면서 넘겨야 했으니 이 시대를 책임졌던 지도자들이 감당해야 했던 고민과 상처의 깊이는 남달랐다.
민주화의 시기는 욕구 분출이 시기이다. 이 거친 욕구분출은 역사의 대세(大勢)이고 당위(當爲)이므로 도도히 흐르는 탁류(濁流)와도 같아서 어설프게 막으려 하다가는 둑이 터지고,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마을을 휩쓸어 생존의 근거를 무너뜨린다. 민주화의 대세 속에서 어떻게 하면 안보와 성장을 유지할 것인가 고민하던 끝에 나는 민주화의 대세를 내가 맨 앞에서 주도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것이 6.29 선언정신이었고, 대통령 재임중의 일관된 국정(國政) 철학이었다.
민주주의의 실천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은 질서 확보를 위한 행동을 민주주의를 역행하고 말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민주질서란 官(관)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세워 나아가야 하는데도 공권력에 대한 불신은 높기만 했다. 그래도 나는 우리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높으므로 적절한 동기만 유발하면 가닥이 잡혀갈 것이라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노사분규가 도처에서 벌어졌다. 그 동안 억눌렀던 임금을 일시에 올리려는 근로자들의 욕구가 분출했다. 대부분의 기업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간 버티기 힘들게 되어 결국 기업과 근로자가 모두 망하고 말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운동권, 在野(재야), 야당 정치권 할 것 없이 모두가 勞組(노조)측을 부추겼다. 나는 이 경우에도 기업인들이 먼저 성의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의 옥동자를 낳기 위한 産苦(산고)는 이만 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국민들은 『군 출신 대통령이 왜 저렇게 힘이 없나. 강하게 잡아야 하지 않는가』 하고 수군거렸다. 심지어 「물 대통령」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됐다. 듣기 거북한 것은 물론이고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참모들 보기가 민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힘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그 이상 쉬운 것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민주주의가 힘으로 이룩될 수 있다는 데 懷疑(회의)를 가졌다. 「더 많은 희생과 代價(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 국민 스스로가 자유롭게 이룩한 진정한 민주주의여야 튼튼한 뿌리가 내려지고, 더 싱싱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어느 날 기자 간담회에서 내가 『참 용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대답하는 기자가 없었다. 나는 『참 용기란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석한 기자들은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이것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나의 철학』이라고 덧붙였던 기억이 난다.
한국인들이 난생 처음 맛보는 민주화의 시기를 슬기롭게 관리해야 했던 바로 그때 소련 동구(東歐) 등 국제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분단국인 한국에 전혀 새로운 지평선이 열렸다. 내가 이끌었던 서울 올림픽 유치, 준비과정에서 나는 일찍이 강철 같이 단결되어 있다고 믿었던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세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感知)했었다. 전(全) 대통령과 나는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산국가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면서 관계를 정상화하는 기회로 활용하려 했고 북한은 우리의 이런 노력에 대해서 대한항공기를 폭파하는 만행으로 맞섰으나 소련과 중국까지 서울 올림픽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공산권과 통하는 길을 열 수가 있었다.
서울 올림픽 자체가 1988년에서 89년에 걸친 동구의 민주화혁명에 하나의 도화선이 되었고 그 올림픽의 유치와 준비과정을 지휘했던 내가 공산권 붕괴 이후 한국의 야심적인 북방정책을 주도하게 되었으니 그 어떤 운명적이고도 역사적인 인연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동서 냉전(冷戰)시대에 한반도의 남반부에 갇혀 사실상 섬이 되어 있었던 한국은 유라시아 대륙에 남은 유일한 자유진영의 초소(哨所)로서 인간말살의 전체주의 북한정권과 대결하여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세계에 증명한 쇼윈도이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은 그런 쇼윈도役의 결정판이었고,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힘으로써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성취하였음을 세계에 알린 일대 선언이었다. 서울 올림픽의 대성공을 예감하면서 나는 1988년 7월7일에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세계사의 전환기에 마련된 기회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활용하는 디딤돌을 놓았다. 이 선언에서 나는 북한정권에 대한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민족공동체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공동번영을 모색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내가 야심적으로 추진한 북방정책은 1988년 헝거리와 수교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엔 소련과, 1992년엔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한국의 활동무대를 全세계로 넓혔고 지금 한국인은 그 과실(果實)을 즐기고 있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을 원리로 한 북방정책에서 나는 북한정권을 후방에서 고립시킴으로써 남북한 대화에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유도하려고 했다. 나의 재임 기간에 북한정권은 한번도 무력도발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 남북관계에서 반드시 그 진가(眞價)를 발휘하게 될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함께 만들어냈다.
1988년 내가 물려받았던 대한민국과 1993년 내가 물려준 대한민국은 국제적 영향력과 위상(位相)이 전혀 딴판이 되어 있었다. 對북한관계에 있어서도 결정적 우위에 서 있었던 것이 한국이었다. 내가 만들어놓았던 틀이 그 뒤 유지되지 못함으로써 한국이 오늘과 같은 안보적, 경제적, 외교적 위기를 맞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나의 책임이 무엇인가 반성하고 있다.>
盧泰愚는 5년간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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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1-11, 23: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