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三國史記를 읽어야

기독교인이 성경을 읽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듯이 한국인이 三國史記를 잃지 않으면 결격사유가 된다.

나는 어떤 모임에 가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으면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혹시 삼국사기를 읽어보신 분이 계십니까」. 나는 三國史記를 읽었다고 손을 드는 사람을 아직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三國史記가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삼국사기를 왜 읽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면 이런 대답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 책은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反民族的 관점에서 쓴 엉터리 역사서가 아닙니까. 丹齋 申采浩선생이 그렇게 썼던데요」.

삼국사기가 중국을 무조건 숭배하는 유학자의 손에 의하여 쓰여졌으니 우리의 역사를 비하하는 내용일 것이고, 이런 책을 뭣하러 읽겠느냐 하는 그런 뜻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三國史記를 나이 쉰을 넘겨서 처음 읽었습니다. 저도 중학교 국사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국사기를 읽는 데 대해서 좀 찜찜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朝鮮上古史란 책의 총론에서 이런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에 와서는 작자를 알 수 없는 三韓古記, 海東古記, 三史 등과 김부식의 三國史記와 일연의 三國遺事가 있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뿐이다. 전하고 전하지 않은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 일연 양인의 저작이 우수하여 이것만 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고려 초엽부터 평양에 수도를 두고 북쪽의 옛 강토를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일파가 되고 사대를 國是로 삼아 압록강 이내에서 편안하게 지내자는 유교도가 다른 일파가 되어 대치한 지가 수백년이 흘렀다. 佛子인 묘청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 거병하여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학자인 김부식에게 패망하였다. 이에 김부식이 사대주의에 근본을 두고 삼국사기를 지었다. 따라서 동북의 양 부여를 빼어버림으로써 조선문화가 태어난 뿌리를 먼지 땅에 묻고 발해를 버림으로써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에 던졌다. 이두문과 한자번역의 구별에 어두워 한 사람이 수명이 되고 한 땅이 수개의 땅으로 변하는 등 전후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부분이 많아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삼국사기가 전하는 것은 고려가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유래 문헌에 만일 독립자존에 관한 부분이 있으면 이를 금지할 때에 유일하게 사대사상을 고취하는 三國史記와 그 아류인 三國遺事가 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신채호의 비판을 들으면 저부터도 삼국사기를 읽고싶은 마음이 사라질 것입니다. 사실은 신채호의 이 비판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고 왜곡과 과장이 많습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린다면 삼국사기는 사대적인 역사관에 의거하여 쓰여진 책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아주 정확하고 과학적인 저술입니다.

신채호의 민족사관이 여러 가지로 우리 사학계에 끼친 공이 많지만 그의 삼국사기에 대한 부정확한 비판은 우리나라의 역사서중 가장 중요한 삼국사기에 대해 나쁜 인상과 선입감을 확산시켜 우리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막아버리는 중대한 폐해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삼국사기를 그 체제면에서 살펴본다면 김부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중국에 종속된 나라가 아닌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紀傳體 역사서술의 표본인 한나라 司馬遷이 쓴 史記의 체제를 본뜬 것이 삼국사기입니다.

史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대 황제들의 사적을 기록한 本紀입니다. 황제의 아래에 있는 제후나 王公들의 일들을 기록한 章은 世家로 불렸고 그 밖의 중요 인물들은 列傳에 적혀 있습니다. 삼국사기도 이에 따라 삼국의 왕들의 사적은 本紀로 다루고 있습니다.

즉,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란 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주자학이 조선조의 국가이념으로 고착되기 시작할 무렵에 편찬된 高麗史에는 본기가 없어지고 고려 왕들을 世家 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고려사를 편찬한 김종서 정인지 같은 사람들이 고려 왕들을 중국의 제후 정도로 대우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분명히 사대주의적인 자세입니다. 자기 나라의 왕들을 다른 나라 황제의 신하 정도로 여겼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김부식은 삼국의 왕들을 중국의 황제와 맞먹는 존재로 보고 그렇게 대우하는 편집체제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이는 삼국을 중국에 종속적인 국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김부식의 역사관을 어떻게 사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단 말입니까. 김부식은 대단한 자주적인 역사관을 지녔던 지식인이었습니다.

김부식의 이런 자주적 역사관은 또 삼국을 동등하게 다루는 기술방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흔히 김부식이 신라중심으로 삼국사기를 썼다고들 하지만 그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鼎立했을 때는 삼국을 동일하게 취급했습니다. 예컨대 고구려의 기사를 쓸 때는 주어가 우리, 즉 고구려가 되었고 백제의 기사를 쓸 때는 백제가 우리가 되었습니다.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침략에 대해서는 반드시 入寇, 또는 來浸이라 표현했습니다. 중국으로부터의 침략도 꼭 來浸이라 표현하여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물론 당나라가 신라를 치러온 사실도 내침이라 표현했습니다.

김부식은 이에 그치지 않고 삼국이 중국과 대결한 과정에 대해서는 유달리 자세하게 기술하여놓았습니다. 고구려 東川王 때 있었던 魏나라 장수 관구검이 침략해왔을 때 紐由, 密友 등 용사들이 용감하게 싸운 일,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당나라 장수 蘇定方의 부당한 행동에 대한 김유신의 반발, 당나라의 신라합병 의도를 간파한 신라 사람들의 결전의지가 중점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김부식이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삼국사기를 썼다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자랑스런 민족항전의 사례들을 없애버려야 했을 것 아닙니까. 김부식이 쓴 책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을 찬양하면서 그런 기록을 전해준 著者를 비난하고 있으니 통일벼로 된 밥을 먹으면서 통일벼를 개발한 사람을 저주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단재 신채호는 김부식이 화랑의 맥을 잇는 묘청의 난을 분쇄한 것을 가지고 김부식이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힘을 파괴한 인물인 것인 양 비판했습니다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화랑도를 대단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김유신, 관창 등 유명한 화랑도의 이야기들은 열전에 실려 있습니다. 이 열전의 맨 앞에 등장시킨 인물은 대표 화랑이라 볼 수 있는 김유신이었습니다. 김유신에 한하여 상, 중, 하 세 편으로 다루었습니다.

개인에 대한 기록으로서는 김유신에 대한 기록이 어떤 왕보다도 깁니다. 이것은 김부식이 김유신의 통일대업 달성과 그의 자주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그런 편집형태를 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부식은 왕이 아닌 김유신을 삼국의 제1인물로 본 것입니다. 직위에 따라 인물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민족국가의 건설과 통일이란 가치기준에 따라서 인물을 평가했다는 뜻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또 김부식이 모화사상에 젖어 조선문화의 뿌리를 애써 무시하였다고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대주의와 외래문화의 주체적 수입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중국문명을 도입하여 나라를 튼튼히 하고 국민들을 잘 먹이고 입혔다는 것은 하등 비판할 일이 아닙니다.

사대주의는 선진국의 문물을 도입할 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하느님처럼 섬기고 자기것을 비하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김부식의 태도는 그런 사대주의자의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것을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김부식은 신라왕실의 탄생설화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런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신라 고사에 하늘에서 금괴짝이 내려온 때문에 김씨라 했다고 하는데 그 말은 괴이하여 믿을 수가 없지마는, 신(臣)이 역사를 편수할 적엔 그 말이 전해온 지가 오래 되었기에 그 내용을 깎아버릴 수가 없다>

김부식의 이 태도는 대단한 객관주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미신 따위를 믿지 않는 유학자이던 김부식은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건국설화도 그렇게 전해내려오니 그렇게 적는다는 식입니다. 김부식은 또 신라 왕의 호칭에 대해서 이런 기준에 의하여 표기했음을 삼국사기 안에 남겼습니다.

<신라에서 왕의 칭호를 居西干, 次次雄, 尼師今, 麻立干으로 호칭한 것을 신라 말의 유명한 유학자인 崔致遠은 「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 모두 왕이라 일컫고 거서간 등으로 호칭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아마도 그 말이 비속하다고 여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중국의 史書인 左氏傳과 漢書 등에 楚나라 말과 凶奴의 말을 그대로 보존해두는 것이 또한 마땅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언어, 방언, 설화를 그대로 보존해두려는 뜻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식의 호칭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신라왕족이 몽골 - 투르크계통과 인종적, 문화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는 집단임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거서간, 마립간 등의 호칭에 나오는 간이란 말은 북방 유목민족들이 왕을 호칭할 때 쓰는 칸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징기즈칸의 칸을 신라사람들은 왕을 호칭할 때 썼다는 뜻입니다.

삼국사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아마도 당태종이 이끄는 원정군이 고구려의 안시성을 함락시키려다가 끈질긴 항전에 부닥쳐 패퇴하는 장면을 묘사한 기록일 것입니다. 김부식은 당태종을 무찌른 안시성의 성주 이름을 중국의 기록에서 빼버리고 있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로 당당한 김부식이 어떻게 되어 사대주의적인 사람으로 매도되고 그가 쓴 이 불후의 명작이 소홀하게 취급되게 되었는지 울분이 치솟을 지경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나라의 교실에서는 삼국사기를 읽어본 적도 없는 교사와 학자들이 학생들에게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쓴 자주성이 결여된 책이다」고 가르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저처럼 삼국사기를 읽을 마음이 내키지 않게 되고 결국은 원전을 읽지 않고서 우리 역사를 이해하려는 그릇된 역사교육이 확산되고 말 것입니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린 학생들에게 어른이 그릇된 선입감을 심어주는 것만큼 악영향을 끼치는 일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지난 2천년간의 역사에서 1천년의 역사가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고고학적 발굴품이나 중국, 일본의 역사자료 속에서 우리와 관계된 부분을 골라내 짜집기 하는 식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잃어버린 천년 역사를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행히도 김부식이란 일류 학자를 통해서 正史로 쓰여진 三國史記란 아주 정확하고 객관적인 역사서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다행으로 생각하고 김부식을 높게 평가해야 마땅함에도 과장되고 편협된 시각으로써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깎아내리는 것을 무슨 業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들이 있으니 이런 이들이 바로 자기 역사를 파괴함으로써 자주와 주체의 지적인 근거를 무너뜨리는 사대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정상적인 역사교육은 교사들이 어린이들에게 원전을 읽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그 원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것이지 교사들이 먼저 역사서를 평가함으로써 학생들이 아예 읽을 마음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학생들이 원전을 읽고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교육법은 자주적인 인간을 만드는 교육법입니다.

교사들이 자신의 엉터리 역사지식을 어린이들에게 주입하는 교육법이야말로 주체성이 약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즉 사대주의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사대주의적 교육법인 것입니다. 주체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삼국사기를 사대주의자에 의한 사대주의적 서적이라고 몰아세우는 사람들이야말로 사대주의자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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