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장으로 요약한 한국 현대사 흐름
'조국 근대화(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자유통일-조국 先進化로 나아가야 하는 道程에 있다'
한국은 1948년 건국 이후 근대화를 성공시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으나 1998년 이후 守舊좌파 정권이 등장함으로써 자유통일을 넘어서 일류국가 건설로 가야 하는 길목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내년에 좌파를 종식시키지 못한다면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50년이 될지 모른다. 아르헨티나 등 많은 中進國이 선진국 문턱에 걸려 넘어져 일류국가 건설의 꿈을 접었다. 한국도 그런 반열에 들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좌파와 싸울 용기가 있는가에 대한 답이라야 한다.
일류국가는 반역, 守舊세력과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일류국가는 국민들이 생명을 걸고 체제를 지키려 할 때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배부른 돼지가 일류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투지만만한 야윈 늑대가 양떼를 지휘해야 일류국가를 세울 수 있다. 한국인에게 부족한 것은 지능지수도 아니고 國富도 아니다. 용기이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일제 때의 독립운동가, 6.25전쟁 때의 학도의용군, 산업전사들, 민주투사들과 같은 집단적 용기를 발휘하여 권력을 사기적 숫법으로 차지한 좌파守舊정권을 정리할 수 있다면 일류국가로 가는 길은 넓게 열릴 것이다. 그런 용기가 없다면 국민들은 악랄한 좌파의 밥이 되어 자유도 재산도 미래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어떤 고생을 했고 어떤 고난을 극복했는지 뒤돌아보는 이유는 선배들의 惡戰苦鬪(악전고투)를 돠새기면서 거기서 투지를 뽑아내기 위한 것이다. 선배들이 직면했던 어려움에 비교하면 지금 좌파의 도전은 아무것도 아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화장한 그들은 본질적으로 사이비이기 때문이다. 무장한 좌파를 물리친 우리가 사이비 좌파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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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흐름
*발전방향: 조국 근대화(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자유통일-조국 先進化로 나아가야 하는 道程에 있다.
*대한민국의 4대 재발견: 해양정신, 기업가정신, 尙武정신, 自主정신
*4대 기여 집단: 장교단, 기업인, 기독교, 과학기술자
*국력의 양적 규모로는 세계 12위권, 삶의 질로서는 세계 40-50위권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다투는 세 나라 한국, 대만, 이스라엘은 모두 안보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나간 현대사의 중간결산은 통일을 어떻게 이루느냐에 있다. 門前까지는 잘 왔지만···
*기성세대·대한민국의 위대한 업적과 유산을 자랑하고 옹호하는 챔피언이 등장하여 현대사의 추억을 다음 세대로 이어주어야 조국 선진화도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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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史: 신라통일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건국이 가능했다. 신라는 對唐결전으로써 唐軍을 한반도에 몰아냄으로써 한반도를 한민족의 생존공간으로 확보했다. 삼국시대엔 민족의식이 없었다. 韓民族은 신라통일로써 만들어진 同族의식을 딛고 장구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대한민국은 민족사의 정통이며 金正日 정권은 이단이다. 대한민국의 정통론은 신라통일에서 비롯된다. 신라통일의 정당성을 부정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설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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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년 광복과 분단의 의미
·해양화: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사실상 섬이 되었다. 생존을 위해서 해양세력과 손잡고 해외 지향의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미국 일본 서구 등 해양문명권의 일원이 되었고 이 선진문화권의 유산들-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과학과 합리정신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봉건적 전통과의 결별: 한반도 분단은 자유 對 독재의 이념형 분단으로서 자유 선진 진영에 줄을 선 한국은 後進的 대륙세력 및 朝鮮朝的인 봉건적 전통과 결별하고 근대화로 나아가려는 데 있어서의 저항이 약화되었다.
·한미동맹: 해방군으로 진주한 미군에 의해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는 계기를 맺었고 미국을 통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2.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
·국민국가 건설과정: 주체적 근대화(산업화, 민주화) 道程의 시작이었다.
·국가이념: 헌법의 基調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설정됨으로써 「脫대륙, 脫후진적 전통, 脫주자학적 전통 이데올로기」의 근대화 혁명이 발진하는 틀이 갖추어졌다.
·국가 정통성: 건국과정이 유엔의 공인하 총선거로 이뤄짐으로써 한국은 민족사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확보하였다.
·李承晩 초대 대통령의 지도력: 그의 정치철학은 반공 기독교적 민주주의였고 통치행태는 「對外 개방적·실용적 권위주의」였다. 그는 『공산주의는 호열자와 같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반도에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등장한 실용적 집권자였다.
·군대의 등장: 국민국가의 생존 조건이자 국가 목표인 富國强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또 공산주의자들의 위협 속에서 건국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朝鮮朝 개국 이후 처음으로 군대가 중추세력으로 등장했다.
·남북대치상황의 본질: 1민족1국가의 정통론에 입각하여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의 金日成 정권을 반란집단, 북한땅을 한국의 영토, 통일을 미수복지구의 수복으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그 뒤 남북관계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과 삶의 양식과 善惡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으로 굳혀진다.
3. 李承晩과 그의 시대: 건국과 호국의 구심점으로서 근대화의 礎石을 놓았다
·李承晩이란 축복: 아인슈타인이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된 격. 동서양의 최고 교양을 아우르고 민족적 사명감과 자존심으로 무장한 한국 최초의 박사. 그의 경력과 경륜은, 한국과 미국의 합작품이나 한국인의 주체성과 혼을 견지한 자주 자존의 지도자였다.
·국군의 창설: 북한의 위협적 존재로 해서 강력한 상비군을 갖게 되었다. 이 국군은 6·25 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다음 시대의 근대화 주도능력을 키워갔다. 강력한 국군장교단의 등장은 朝鮮朝 500년간 잊혀졌던 尙武정신과 그에 수반되는 실용정신, 효율성, 과학과 합리정신을 우리 역사에서 되살림으로써 우리 민족이 진취적이고 실용적이며 효율적인 민족성과 기풍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농지개혁: 기득권층으로서의 지주계급을 없앰으로써 그 뒤 산업화와 민주화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사회갈등의 소지를 축소시켰다. 농지개혁으로 한국 赤化가 저지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일제 시대 관료의 활용: 친일 경찰과 헌병들까지 이용한 부작용도 있었으나 근대국가 운영에 참여했던 경험자가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 동원되었다.
·6·25 전쟁 지도: 그의 카리스마는 후퇴하는 국군에게 저항과 반격의 의지를 심어준 구심ㅂ점이었다.
·6·25 전쟁의 의미: 한국은 자유세계의 선봉으로서 국제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함으로써 일본과 독일의 부흥, 대만의 수호에 기여했고 미국이 對蘇 봉쇄작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냉전의 실질적인 시작이었다. 동서냉전은 한국에서 시작되었으며 공산주의의 붕괴도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은 또 국내 좌익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체제수호와 근대화의 큰 걸림돌을 제거했다. 전쟁을 통하여 거대한 군사집단이 생겼고 이는 근대화 주도세력의 잠재력을 키워간다.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휴전협상에서 소외된 李承晩 대통령은 단독 北進, 반공포로 석방을 카드로 미국정부를 압박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끌어냈다. 안보의 틀을 한미동맹으로 굳힘으로써 산업화 시기 국방비의 증액을 최소화하면서 국가자원을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민주 교육의 강화: 1950년대에 양성되고 온존된 젊은 인력이 60년대 근대화의 인력으로 쓰여졌고 4·19 혁명의 주도층이 되었다. 그는 언론자유와 야당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제약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시대에 양성된 민주세력이 자유당 정권의 타도의 선봉이 되었다. 李承晩도 모든 성공한 지도자처럼 「자기 성공의 실패자」였다.
·애국적 기업인의 등장: 유교적 실용주의, 한국적 상업정신(개성상인), 기독교적 직업윤리, 그리고 애국심으로 무장한 창업주群이 자본주의의 전도사 내지 개척자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李承晩은 좋은 후원자였다.
·헌법과 현실의 갈등: 그의 시대는, 민주주의의 경험이 전무한 후진국이 선진 민주주의 헌법체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현실과 법과의 괴리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 선진 자유민주주의의 기준으로 후진 조국의 현실을 재단할 때의 부정적 자학적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李承晩 정권의 붕괴: 자유와 복지를 다같이 갈망하는 국민들, 특히 젊은 군인들과 학생들의 커지는 에너지를 충족시켜주기에는 너무 노쇠하고 경직된 자유당 정권의 정치행태가 무리한 부정선거를 촉발시켰다. 李承晩 대통령의 하야 결단이 최소한의 유혈로 정권 이양을 가능하게 했다.
4. 張勉 정부: 善意의 실패
·붕당정치 再現: 李承晩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정치풍토에서 내각제를 실험하자 한국의 전통적인 붕당정치 행태가 再演되었다. 민주당의 新舊派 분당 사태는 정치 지도력의 약화를 가져와 4·19로 촉발된 국민들의 욕구를 감당할 수 없었고 이 틈을 탄 좌익세력의 등장은 반공정신과 개혁의지에 불타던 장교단에게 심각한 체제불안 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때는 6·25가 끝난 지 불과 7년이 흐른 때였다.
·민심과 軍心의 이반: 張勉 정부는 우파 정권이었으나 좌익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군 장교단의 불안과 불신을 불식시킬 수 없었다. 일반 국민들도 민주화에 따른 사회불안에 진절머리를 냈으며 군인들의 등장을 요청하는 목소리도 커갔다. 민심과 함께 물려 돌아가는 軍心도 張勉 정부에 등을 돌려 5·16 주체세력들은 거의 공공연히 쿠데타 모의를 할 수 있었다.
·善意의 실패: 張勉 정부는 그러나 경제개발계획 작성 등 나름대로의 국가 발전 계획을 세우는 노력을 하였으나 민주당 분열에 기인한 지도력의 약화로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그의 실패로 내각제는 허약한 정치체제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강하게 주었고 대통령 중심제의 리더십이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5. 5·16일 군사혁명-700년만의 군인 主導 국가개조
·왜 혁명인가. 근대화라는 가장 큰 규모의 국가개조를 가능하게 한 주체세력이 있었고, 지도자 朴正熙의 뚜렷한 목표와 이념과 전략이 있었다. 1963년에 그가 제시한 비전은 초과 달성되었다. 국민의 지지가 60% 이상이었다.
·군사문화의 확산: 13세기 고려 무신정권 이후 최초의 군사정권. 군사문화가 가진 실용성, 효율성, 과학과 합리주의, 자주성, 富國强兵의 철학 등 긍정적인 면이 획일성 등 부정적인 면을 압도하고 국가개조에 긍정적 기여를 했다. 그 뒤 30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한 군사문화는 민족사의 주요 요소가 될 것이다.
·장교단의 개혁성: 당시의 군 장교단은 한국의 최강이자 최선진 개혁 집단이었다. 10%가 미국 유학 경험자로서 외무부 직원보다도 높았다.
·商工農士로의 신분혁명: 그는 士農工商의 후진적 신분서열을 商工農士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자, 언론인, 정치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기업인 군인 관료 과학기술자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킨 점에 그의 근대화 혁명적 이념의 핵심이 있다. 기업인과 군인들이 사회의 주류층을 형성한 것은 우리 민족사상 처음이다. 이들 근대화 혁명의 주체세력이 득세하면서 한국 사회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實事求是的인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朴正熙의 혁명적 역사관과 자주적 민주주의觀: 朝鮮朝의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무능, 위선, 守舊로 비판했던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우상 숭배하는 야당과 지식인들을 사대주의로 인식했다. 그의 주체적 생각은 민족적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로 표현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한국식 민주주의로 확산, 정착시키지는 못한 것이 한계였다. 그의 한국적 민주주의론은 후발 開途國의 개발전략을 뒷받침하는 국가지도 이념의 한 모델이 되었다.
·빵 다음에 자유: 朴正熙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주의는 경제발전과 물질적인 토대를 딛고 설 때만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문민세력에 대한 경멸: 그는 5·16을 일으킨 데 대해서 죄의식이 없었다. 그는 민주당과 자유당을 똑 같은 위선적 정치집단 또는 守舊세력으로 보았다.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란 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 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
6. 朴正熙와 그의 시대-조국 근대화의 騎手
·朴正熙 리더십의 본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사명감과 서민성을 바탕으로 깔고서 일본적인 武士道 정신과 국가주의 및 미국식 합리적 조직 경영법을 종합한 韓日美의 합작품.
·朴正熙 전략의 핵심: (정신적)自助-(경제적)自立-(국방과 정치의)自主의 3단계 발전론. 그는 국가 주도에 경쟁개념을 도입했다. 새마을 사업의 원칙은 잘하는 마을을 집중 지원하고 못하는 마을은 방치하여 차등과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朴正熙의 비전: 민족중흥, 조국 근대화, 자주국방, 한국적 민주주의.
·동양적 실용정신: 朴正熙는 管仲-명치유신 지도자-鄧小平-李光耀로 이어지는 동양의 실용적 정치 지도자型에 속한다.
·결정적 선택-수출입국: 좁은 민족주의가 선택하기 쉬운 수입대체 전략을 폐기하고 수출입국 전략으로의 방향전환을 통해서 우리 기업은 처음부터 국제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先경제, 後민주: 先경제, 後자주국방 건설, 先건설, 後통일의 전략에서 보듯이 朴正熙 정권은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다』(孟子)는 동양적 실용주의 노선을 실천했다.
·남북한 逆轉: 1960년대에 남한은 경제제일 노선, 북한은 군사제일노선 추구. 1970년대에 남한은 견실한 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자주국방을 추진했으나, 북한은 과도한 군사비 지출의 누적으로 경제파탄에 직면하여 남북한 국력의 逆轉이 일어났다.
·결정적 선택-朴正熙식 세계화 전략: 수출입국 정책, 한일 국교정상화, 월남파병, 중동건설 시장 진출은 한국인의 활동무대를 세계로 확대시켰다.
·민족사 세번째의 국제화: 신라통일 前後, 몽골 지배하,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한민족은 세계사의 중심부에서 활동공간을 확보했다. 이는 唐, 몽골, 미국 등 당대 최대강국과 친선 및 동맹관계를 유지한 덕분이다.
·維新시대의 功過: 1972년부터 7년간은 국력의 조직화, 효율의 극대화에 성공한 권위정부에 의한 중화학 및 자주국방 건설기였다. 이 기간에 언론 및 정치의 자유는 제한되었으나 경제의 고도성장으로 석유위기를 돌파하고 필리핀, 타이, 말레이시아, 북한 등을 추월하여 질적으로 다른 국가로 승격했다. 정치의 코스트가 최소화되면서 공직자 부패도 최소화되었던 시기였다.
·결정적 선택: 1973년 석유쇼크와 중화학공업 전략 밀고 나가기: 유신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1974년부터 본격화되는 중동건설시장 진출은 월남진출의 경험을 딛고 가능했다.
·근대국민국가의 기본시스템을 구축: 군의 현대화, 방위산업 진흥, 직업 공무원조직의 확립, 법령정비, 의료보험제도, 고속도로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축적, 국책 연구기관의 창설, 특히 KIST와 원자력 연구소 등 과학기술 진흥.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저항과 미국의 압력: 민주주의를 하느님처럼 모시려는 세력에 대한 朴正熙의 경멸과 代案 모색은 다수 지식인과 국민들이 판단의 기준을 선진 민주주의로 삼고 있는 대세 속에서 실패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신념화한 이념집단을 만드는 데 실패한 이유는 지식인층의 반발로 근대화의 산물인 중산층을 의식화시키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카터 집권후 韓美 갈등: 카터의 인권외교와 주한미군 철수 공약.
·중산층 이반-釜馬사태의 충격: 근대화 성공의 산물인 도시 중산층이 학생 야당과 손잡고 정권에 대항했다는 점에서 정권에 충격을 주었다. 金載圭도 그 영향을 받았다. 그 뒤 한국 정치 변동의 결정적 역할이 도시 중산층의 손으로 넘어간다.
·釜馬사태의 원인: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 민주화 운동,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고와 부가가치세 징수, 金泳三 의원직 제명.
·10.26 사건의 의미: 「朴正熙는 봉건적 잔재 및 사대주의와 싸우다가 戰死했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그의 죽음은 適期에 피로한 旗手를 교체하여 한국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인간 朴正熙: 인정과 눈물이 많은 鐵人·哲人·超人. 『난 괜찮아』
7. 신군부의 재집권 과정-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서···
·12·12 군사변란의 성격: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朴正熙 친위세력의 군내 헤게모니 장악기도가 유혈사태를 촉발하여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 집권으로 매진하게 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朴正熙의 지도이념을 신념화하지 않은 권력기생 체질이 강해 朴正熙가 사라지자 지리멸렬하여 주도권을 상실했다.
·중산층의 중립-군부 재집권: 1980년 봄 정치자유화를 계기로 야당은 분열하고 사북사태 등 혼란이 발생했으며 제2차 석유위기의 여파로 경제는 不況 국면이었다. 중산층의 불안이 증대했고 학생시위에 대해 냉담한 중립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탄 신군부의 집권 시도는 광주에서 국지적 저항에 직면하였으나 다수 국민들의 非호의적 묵인하에 성공했다. 10·26사건의 한 동기가 되었던, 부마사태 때의 중산층과 학생들의 합세는 이때에는 이뤄지지 않아 야당, 학생 등 민주화 운동 세력은 고립되었다.
·미국의 중립: 미국은 정권 교체기에 있었고 카터는 이란 인질 사건에 매달려 신군부의 집권을 저지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8. 全斗煥 정권-유혈 집권, 경제의 안정적 발전, 單任 실천
·3低시대의 경제약진: 박정희 시대 말기의 중화학공업 과잉투자 부작용을 정리. 국제 석유가 안정에 힘입어 엘리트 경제관료들의 일관된 정책수행을 대통령이 뒷받침하여 물가를 잡고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등 견실한 성장세 지속. 경제호조가 민주화의 충격과 혼란을 흡수함으로써 평화적 민주화 과정이 가능해졌다.
·정보통신과 전자산업의 전략적 추진: 1990년대의 IT 붐을 예약하였다.
·한미관계의 안정: 레이건 행정부가 對蘇압박정책을 쓰면서 일본의 나카소네, 영국의 대처, 한국의 全斗煥 정권을 필요하게 되어 朴正熙 후반기와 같은 큰 갈등이 사라졌다.
·서울 올림픽의 전략적 추진: 한국 사회 선진화, 對北우위 확보, 對공산권 접근, 한국의 국제 이미지 提高라는 당초 목표 달성. 동시에 국내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부측의 강력 대응은 올림픽 반납을 각오해야 하는 등 민주화 과정의 한 안전판이 되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한 북한정권과의 대결에서 승리: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 폭파사건 등을 일으킨 북한은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고 대응카드로 써먹은 평양 세계청년축전 개최는 예산 낭비를 가져와 경제위기의 단초가 되었다.
·학생운동권에 친북 좌익 이념 확산: 민주화 운동의 흐름속에서 북한세력과 연계되거나 자생적인 좌익이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위장하여 당국의 단속을 탄압으로 몰아갔고 언론과 여론도 호의적이었다. 여론과 야당에 밀린 정부도 적실한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좌익 이념의 젊은층 침투는 大勢가 되었다.
·1985년 2·12총선과 민주화 운동의 대세화: 이 흐름은 1987년6월 대시위로 폭발했고 全斗煥-盧泰愚세력은 6·29민주화 선언으로 대응하여 정면충돌 위기를 평화적인 민주화 과정으로 전환시켰으며 兩金의 분열로 盧泰愚 대통령이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全斗煥 정권은 유혈사태를 통해서 집권했으나 7년간 대내외적으로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한국 사회를 긴장과 갈등과 성장이 교차하는 역동적 사회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9. 盧泰愚에서 盧武鉉까지: 민주화의 진통과 文民좌파정권 등장
·대중조직의 시대: 1988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언론 집회 시위의 자유가 확대되는 가운데 각종 대중운동조직이 강력한 조직력과 활동력을 바탕으로 정부의 공권력과 기성세력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들 조직중에서는 친북적인 성격을 가진 단체도 많아 체제 불안 요인이 되었다.
·노사문제의 결정적 중요성: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기업이 정권의 보호 아래 노조운동을 누르고 생산과 판매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나고 노조의 경영에 대한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노사문제가 경제발전의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었다.
·위선적 문민정치의 폐해: 1993년 소위 문민 정부의 재등장은 한국 정치가 예외의 시대(군인 주도 시대)가 끝나고 正常의 시대(문민 우위)로 복귀했다는 의미였다. 한국 정치의 정상복귀란 조선조 정치생리의 재현으로서 정치인, 언론인, 학자, 법조인, 사회단체가 주도하는 위선적 명분론의 부패한 파당정치이며 경제와 안보 및 국제정세에 대한 無知와 무능으로 나타난다.
·사회의 좌경화-좌파 권력의 등장: 1980년대에 좌경화되었던 운동권 세력이 사회 중심부로 진입함에 따라 한국 사회의 권력구조도 좌경화되고 이런 바탕에서 金大中, 盧武鉉 좌파 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다.
·세계화속에서 좌초: 국내의 권력투쟁에 함몰하여 전통적으로 세계대세에 무지,무관심한 문민정부는 세계화에 한국 경제를 제대로 적응시키지 못해 1997-98년의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그 뒤에도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정경유착, 전투적 노조 등 문제점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정치부패의 深化: 정치권력의 부패는 민주화에 따른 잇단 선거로 해서 오히려 더 악화되었고 이는 심각한 정치불신을 야기하여 정치 리더십의 약화를 초래했다.
·북한의 大飢饉과 北核문제: 흡수통일에 따른 책임과 부담을 두려워한 한국 정부는 북한의 급변사태를 통일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1998년 이후 좌파정권이 등장하여 굴욕적 對北지원으로 金正日 정권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국론분열을 주도한 것은, 통일의 결정적 찬스를 놓치고 분단고착을 불러 북한동포의 고통을 연장한 민족사적 범죄가 될 가능성이 있다.
·국론분열: 金大中 좌파 정권이 추진한 햇볕정책은 위기에 빠진 金正日 체제의 강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남한내 친북좌익 세력의 강화로 이어져 체제불안이 가중되고 있는 한편 북한의 내부개혁은 요원한 실정이다. 이 정책을 둘러싼 살벌한 대립은 대한민국의 존립기반을 뒤흔들 수 있는 위험 요인이 되고 있다.
·남북한 친북반미 연합전선의 형성: 남북한에 걸쳐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관에 반감을 가진 親北反美 연합 전선이 형성되고 있고 일부 정권 내외의 인사들이 여기에 가담하고 있다. 親북한정권 세력은 「북한공작원+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세력+대한민국의 공권력으로부터 제재를 당한 경험에서 생긴 복수심과 적개심으로 무장한 세력+前근대화 후진세력의 집합체」로 되어 있다.
·근대와 前近代의 대결: 한반도에선 지금 前근대 봉건 세력이 金正日 정권을 핵으로 하여 남북한에 통일전선을 형성중이며 이에 대해 대한민국이 지난 55년간 키워온 근대국민국가로서의 시스템(기업, 법치, 언론자유, 선거의 자유 등등)과 중산층이 저항하고 있는 형국이다.
·중산층의 위기와 선동정치: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 변동기 때 결정적 역할을 했던 중산층이 외환위기를 계기로 자신감을 잃어 사회의 중심 균형자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사이 좌파 선동정치가들이 20, 30대를 움직여 정치변동의 원동력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먹혀 들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 정통주류 세력의 위기: 1997년 및 2002년 선거에서 우파 세력이 분열하여 좌파 정권의 등장을 허용하였다. 두 차례 선거에서 국가와 역사와 과거의 챔피언이어야 할 우파 지도층은 대한민국 55년의 위대한 성취를 옹호하지 못하고 좌파선동에 변명 수세로 대응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상실했다. 우파 지도부는, 한반도 상황을 이념적으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戰略부재의 무기력을 보여주었다.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이념과 역사관이 가장 큰 전략이다.
·反美와 親中: 남북한의 좌파전선이 反美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는 사이 중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이고 때로는 굴종적인 자세가 굳어지고 있다. 중국의 거대한 경제적 팽창은 한국에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끼치고 있고, 과거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의 再現이 우려되고 있다.
·해양문화권에서 대륙문화권으로 복귀 가능성: 1945년 이후 지속되었던 한국의 해양화, 세계화 추세는 1993년 金泳三 정권의 등장을 계기로 하여 미국 일본과는 불화하고 중국 러시아 북한쪽으로 기우는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한국 내 두 흐름-해양화와 대륙화-의 대결은 舊韓末의 재판이 되어 국가의 안전을 위협할 가능성도 있다.
10. 대한민국의 내일: 자유통일을 넘어서 조국 선진화로
*한국의 국력 지표: 국내총생산은 세계 12위(인구 10억인 인도와 비슷하다). 수출은 세계 12위, 수입은 14위. 에너지 총소비량은 세계 10위, 1인당 소비량은 16위. 粗鋼생산량은 세계 5위. 선박 건조량은 1위. 자동차 생산량은 세계 6위. 전자제품 생산량은 3위. 인터넷 이용자수는 세계 3위. 개인컴퓨터 보유율은 7위. 인구는 세계 26위.
*국력은 선진국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국력에 걸맞는 지도층의 교양과 능력, 국민들의 애국심과 자신감, 반란집단인 북한정권에 대한 엄정한 자세와 북한동포들에 대한 동정심이 갖추어지면 자유통일도, 조국 선진화도 가능하다. 물질적 근대화 이후에 정신적 근대화(합리화, 과학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김정일 정권의 선동과 방해가 작동하고 있어 선진화가 늦추어지고 있다. 조국 선진화는 김정일 집단이란 방해물을 치우지 않고는 달성될 수 없다. 우리 민족사의 발전방향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복지 안전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그리고 國政에 참여하는 계층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다. 북한의 오늘날 생활 수준은 조선조 500년에서도 최악이었던 철종 고종 시절보다 못하다. 민족사의 발전 원리는, 역사발전과 국민국가건설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2천만 북한동포들을 구출하고 이들을 역사만들기에 동참시키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꿈 꾸는 대한민국의 모습
히틀러는 국가주의자, 처칠은 애국자라고 구별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국가주의자는 국가의 적을 증오하는 마음이 기본이다. 애국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이다. 正義를 독점하는 위선자들에게서 사명감(왜곡된)은 느낄 수 있지만 사랑은 느낄 수 없다. 한국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경쟁하고, 남북대치상황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숙명을 갖고 나온 셈이다. 이 경쟁과 투쟁이 사랑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경쟁과 투쟁에 승리한 이후의 비전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 인간에 대한 관심, 북한동포에 대한 동정심과 김정일에 대한 분노,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따뜻한 마음, 그런 마음들이 모인 국가. 이와 같은 국가가 존재해본 적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가장 비슷한 국가를 우리 민족사에서 찾는다면 삼국통일기의 신라일 것이다. 唐將 蘇定方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한 다음 귀국하여 唐帝 고종에게 귀국신고를 하니 고종은 이렇게 물었다.
'왜 내친 김에 신라마저 정벌하지 않았는가.'
蘇定方은 이렇게 답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의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감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신하, 즉 국가엘리트들이 충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왕이 아니라 나라(즉 헌법)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짐, 사랑, 忠義, 받듬, 섬김-위의 짧은 문장 속에 등장하는 이런 키 워드가 충만한 신라였기 때문에 삼국통일과 對唐결전으로써 한반도를 지켜내어 민족의 보금자리를 가꿀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가려고 하는 대한민국의 모습도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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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민국은 罪人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변명할 것이 없다. 당당한 대한민국 만세!'
식민지에서 독립하자 마자 남침전쟁으로 얻어맞아 국토는 초토화되고, 위대한 건국 대통령은 학생혁명으로 쫓겨났다. 민주당 정권은 1년만에 군사쿠데타로 무너지고, 제2의 월남화를 노린 김일성의 명령으로 청와대가 북한특공대의 기습을 받았다. 그 6년 뒤 대통령의 부인은 김정일이 보낸 자객의 총을 맞아 죽고 그 5년 뒤 근대화의 기수는 자기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군사變亂으로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미얀마로 출장갔던 대통령 일행을 노린 김정일의 테러로 17명의 장관급 엘리트가 죽고,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김정일이 대한항공기를 폭파하는 바람에 중동근로자 등 115명이 죽어갔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고 무역흑자국을 만들고 민주화 약속도 지킨 두 전직 대통령이 내란죄로 2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있을 때 국립박물관이 친일파라고 사형을 선고하여 때려부순 대통령의 失政으로 국가不渡 위기로 몰린 나라는 IMF에 구조를 요청해야 했다. 어리석은 국민들은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북한에서 300만 명이 굶어죽는 것을 보고도 2代에 걸쳐 민주세력으로 위장한 좌파정권을 등장시켰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反美선동과 對南적화전략에 동조하니 국가는 분열되고 그 틈을 타고 김정일이 핵실험을 해도 韓美동맹은 작동하지 않는다. 前現職 두 대통령이 김정일과 한 패가 됨으로써 내년 대통령 선거는 내전적 상황에서 치러질 것으로 예측되는 아, 대한민국!
그런데 어찌하여 이 나라는 지금 세계 약200개 국가중 삶의 질이 26위로서 선진국 수준에 진입해 있고, 사람들은 살빼기에 목숨을 걸고, 미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내는가 하면, 남자의 평균키가 아시아에서 가장 큰 키가 되고, 공업에서 세계 4강, 경제력 및 군사력 부문에선 8강을 노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연간 成人인구의 약3분의 1인 1200만 명이 비행기나 배를 타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는가? 이것이 기적인가, 꿈인가, 현실인가?
한강의 기적은 공짜가 아니었다.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기적이 아니다. 기적이라면 국민수준보다 너무나 위대한 李承晩, 朴正熙가 대통령이 된 것이 기적이요, 1950년 6월25일 남침 소식을 보고받은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국무장관에게 '그 자식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내뱉으면서 30초만에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국민들'을 구하려고 미군의 참전을 결정한 것이 기적이다. 이 결단으로 약5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죽었다. 근면성실한 국민성, 머리 좋고 강건한 민족적 자질, 이승만 대통령이 간판을 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자율과 경쟁 원리, 박정희가 도입한 능률적인 군사문화, 그리고 미국의 결정적 지원이 합쳐져서 우리의 실력보다 월등한 성취를 이룩했다.
김일성, 김정일 일당과 이들에게 영혼을 판 반역자들의 집요한 공작, 암살, 침투, 선동, 배신, 훼방에도 끄떡 않고 대한민국은 전진했고 국민들은 한 손에 망치 들고 한 손에 총을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웠다. 고마움을 모르는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은 이런 기적을 만든 대한민국의 歷代 지도자와 기성세대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조국의 과거와 약점을 캐기 위하여 공권력과 예산을 집중 투입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맞다면 지난 60년간 지도층은 국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만 했는데 기적적인 대한민국은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하느님이 만들어서 땅위로 내려보냈단 말인가? 북의 김일성 김정일이 힘을 합쳐 만들어 남한으로 선물했단 말인가? 아니면 김대중씨가 혼자서 땀을 흘려 만들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노무현씨가 그 말 많은 입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기적 같은 대한민국은 있는데 애국자도 영웅도 보이지 않고 온통 독재자, 守舊세력, 냉전세력뿐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반역자들이 만든 나라란 결론인가?
대한민국은 이제 김대중, 노무현 일파에 사과할 것도 미안해 할 것도 변명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은 罪人이 아니다. 이런 나라를 만든 주인공들은 역사 앞에, 세계 앞에, 무엇보다 김정일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자랑한다. 우리는 현대사를 긍정한다. 우리는 선배세대의 노고에 감사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빛과 그림자를 다 쓸어안고싶다. 우리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이 나라를 사랑한다. 당당한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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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全北이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
뉴라이트全北연합의 창립을 축하함.
뉴라이트全北연합 창립(2월6일)을 축하합니다. 무엇보다도 뉴라이트의 운동이념이 대한민국헌법과 일치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축하를 보냅니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고 했고,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反국가단체가 不法점거한 북한지역을 해방시켜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이를 헌법4조가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평화적 방법에 의한 자유통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요사이 남발되는 ‘평화통일’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자유통일’이 목표이고 ‘평화통일’은 목표달성을 돕는 수단입니다. 헌법 1, 3, 4조는 이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腦髓(뇌수)와 심장으로서 改正불가능 조항입니다. 이 조항에 손대는 순간 대한민국은 국민국가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뉴라이트全北연합의 신조는 대한민국헌법 정신이고 이 정신을 수호하는 것이 모든 활동의 근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年初에 뉴라이트全國연합의 대구 모임에 참석했다가 ‘좌파를 종식시키고 국가선진화를 이룩하자’는 구호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올해 대통령 선거,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從金守舊좌파세력’을 정치적으로 소멸시키고 자유통일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좌파종식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최고 개혁입니다. 우리는 그 여세를 몰아 김정일 정권을 제거하고 북한동포를 해방시키는 자유통일을 한 다음 일류국가 건설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1948년 8월15일 건국으로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현대사의 大命題인 것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키고 가꾸겠다는 세력을 보수, 자유진영, 우파, 애국세력 등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와 현재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미래를 기준으로 한다면 우리는 자유통일 세력입니다.
뉴라이트는 건국-호국-산업화-민주화의 맥을 잇는 ‘젊은 애국자들’이자 ‘자유통일의 주체세력’이어야 합니다. 애국과 통일이란 말 속에는 지역과 종교와 계층을 초월하자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자유와 진실과 法治에 기초하여 國益을 추구하고 지역적, 계급적 선동을 극복해가는 것이 국민국가건설의 과정입니다. 헌법을 짓밟고 국민국가를 지역적, 계급적 이해관계로 분열시키려 한 것이 좌파정권이었고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진보로 위장한 守舊세력인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지난 60년간 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의 4단계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꾸준히 가꾸어왔으나 金正日을 頂点으로 하는 남북한의 좌파세력은 민주제도의 허점을 악용하여 국민들을 속이고 정권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를 보호하면서 이 민주제도의 힘으로써 선거를 통해 좌파를 종식시켜야 합니다. 그 방법은 국민대각성입니다. 다시는 좌파들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 깨어 있는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경제력, 군사력, 과학력은 이미 선진국 수준입니다. 정치, 언론, 문화 등 민족과 국가의 정신과 혼을 결정하는 부분이 후진적이기 때문에 선진화가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이 부분에서 좌경화와 저질화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좌경화와 저질화를 촉진하고 있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력을 망가뜨린 한글전용의 폐해입니다. 韓國語는 70%의 漢字語와 30%의 한글어로 되어 있는데 漢字語까지 한글로 표기함으로써 우리 언어생활의 상당부분이 암호화되어 정확하고 아름다운 정보전달이 되지 않는 틈을 타고 좌파식 선동과 저질이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역이기주의나 계급적 이기주의에 함몰된 파당적 엘리트는 많으나, 교양 있는 국가엘리트 집단이 보이지 않는 이런 위기는 동시에 찬스입니다. 뉴라이트가 자신의 자질을 함양하고 단련한다면 자유통일 시대를 주도할 국가엘리트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짊어질 새로운 엘리트층은 변경지역에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한국 우파세력의 본산이었던 全北에서 溫故知新(온고지신)하는 뉴라이트가 등장한 것은 신선한 충격입니다. 젊고 씩씩한 바람을 일으켜 대한민국을 깨우고 일으켜세워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난 200년간의 세계사 속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는 쾌거를 이루어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全北이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고 생각합니다. 뉴라이트全北연합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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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한민국 3년 만에 右向右!
'노무현 정권이 좌파집권의 해악(害惡)을 최단 시일 내에 확실히 깨닫게 해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선일보
세상일이 내 마음처럼 풀리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럴 때 위안을 얻는 방법 중 하나는 상황이 더 안 좋았던 시절을 떠올려 보는 일이다. 가령 요즘 나라 돌아가는 사정이 걱정스럽게 느껴진다면 3년 전 일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2004년 4월 17일자 조선일보를 들춰 보자. 3면 머리기사 제목이 ‘권력 대이동, 진보세력의 국회장악’이었다. 기사 첫 머리엔 이틀 전 총선결과에 대한 정치학자의 촌평(寸評)이 나온다. “정치판 전체가 왼쪽으로 움직인 느낌이다.” 진보 내지 좌파로 분류되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당시 총선에서 얻은 득표율 합계가 51%였다. 보수우파인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득표율 합은 39%였다. 2000년 총선 때는 우파 정당의 득표율이 52%, 좌파 정당의 득표율이 36%였다. 4년 만에 한국 정치판의 오른쪽, 왼쪽이 정확히 뒤바뀐 것이다.
총선 얼마 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앞으로 20년, 30년 집권세력의 토대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5년 주기 대선에서 최소한 4차례 연속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좌파 전성시대가 열린다는 건 좌파의 일방적인 생각만도 아니었다.
시장경제 전도사로 불리는 공병호씨는 “앞으로 10년간 우파 정당이 집권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10년 동안 한국은 왼쪽으로 갈 것이다. 진보주의 시대, 소위 좌파정권들이 계속 집권하는 지형도가 그려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앞으로 20년 내에 민노당이 집권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민노당 정치인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의 발언이었다.
‘좌파의 늪’은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오기 힘들다. 좌파 정책은 중산층을 몰락시켜 빈곤층으로 내몬다. 그렇게 생겨난 빈곤층은 ‘평등한 세상’이라는 좌파 구호에 솔깃해 한다. 좌파정책은 빈부격차를 확대하고, 확대된 빈부격차는 다시 좌파 정권의 자양분이 된다. 그래서 좌파는 계속 정권을 재창출하지만 나라는 골병이 든다. 남미(南美) 여러 나라에서 되풀이돼 온 악순환 구도다. 이런 이치를 아는 사람들은 3년전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좌파들은 남미형 성공담을 쓰지 못할 전망이다. 얼마 전 갤럽 조사에서 한나라당 ‘빅 3’ 대선주자의 지지율 합계가 75%였다. 국민 넷 중 셋이 다음 대통령감을 우파정당에서 찾고 있다는 뜻이다. 12월 대선의 승자를 지금 점치는 건 너무 성급한 일이다. 그러나 얼치기 좌파 흉내를 냈던 정치인은 당선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위험한 예측은 아니다.
1949년 건국한 중국과 1947년 독립한 인도는 처음엔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했다. 그 길은 빈곤에서 빈곤으로 이어지는 미로였다. 중국은 1989년부터 시장 시스템을 도입했다. 인도는 1991년에 자유주의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지금 중국과 인도는 각각 10%, 8%의 고속성장을 하며 세계 경제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좌파의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우향우(右向右)’를 하기까지는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우리는 다른 국민들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룬 민주화와 산업화를 불과 50년 만에 성취했다. 이번엔 남들이 40년 동안 빠져 있던 좌파의 최면에서 불과 3년 만에 깨어나려 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정말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지혜롭고 현명한 국민이라도 혼자 힘으로 ‘좌파의 늪’에서 그렇게 신속하게 탈출할 수는 없다. 노무현 정권이 좌파집권의 해악(害惡)을 최단 시일 내에 확실히 깨닫게 해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라와 국민 전체가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됐다. 아마도 이것이 노무현 정권이 남길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김창균 논설위원/ck-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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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한민국이여, 일어나라!'
친북좌파종식3·1국민대회가 오는 3월1일(木) 정오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립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1. 汎우파애국세력이 대동단결하였습니다. 정통보수와 新進우파가 손을 잡고, 삶의 터전인 안보와 경제를 망친 ‘親독재守舊세력’을 소멸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2. 기회가 왔습니다. 국민 대각성의 흐름이 정권에 의한 좌경화를 압도하면서 거대한 여론을 만들고 있습니다. 2007년 대통령 선거와 2008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자유통일과 조국선진화의 걸림돌을 치우고 대한민국을 바로 세웁시다.
3. 우리가 正義이고 저들은 不義의 세력입니다. 지난 10년간 거짓선동으로 國憲을 문란시키고 나라를 빚더미에 앉히고 민족반역의 戰犯집단에 굴종하여 핵무장마저 허용한 저들이야말로 스스로 守舊, 전쟁, 事大, 무능, 그리고 反통일세력임을 폭로하였습니다.
4. 守舊좌파를 소멸시키는 것이 이 시대의 가장 큰 개혁입니다.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룬 대한민국 정통세력이 진정한 개혁세력, 저들은 진보로 위장한 무능한 守舊세력입니다. 개혁은 한풀이가 아니라 국민들이 마음 편하게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일입니다. 친북좌파가 소멸되면 김정일 정권도, 北核도 제거되어 자유통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립니다.
5. 이념이 가장 큰 전략입니다. 선거판에서 정당과 후보들은 이념을 분명히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기회주의적 中道와 안보를 무시한 경제제일주의를 집어치우고 결단해야 합니다. 김정일 편인가, 대한민국 편인가. 여기에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6.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자유통일을 넘어 일류국가 건설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7000만 민족이 함께 자유, 진실, 正義를 누려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 용기와 희망으로 무장하여 오는 3월1일(목) 정오 서울시청광장으로 집합합시다!
2007 년 2월 12일
국민행동본부 徐貞甲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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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007년 한반도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대한민국헌법에 담긴 민족자결주의의 열정을 동원하면 우리가 한반도 문제해결의 주인공이 된다.'
한반도의 격변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몇 가지 原則的인 觀点이 定立되어야 한다. 그 觀点은 가치관과 세계관과 사실관계에 입각할 때 정확해진다. 이런 관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 상황을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樂觀과 悲觀사이를 오고가면서 혼란에 빠진다. 예컨대 2005년 9월19일 北京의 6자회담에서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한다는 약속을 담은 합의문이 나왔을 때 나는 즉각 나의 인터넷 홈페이지(natizen.com)에 “이 합의문은 지켜지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글을 썼다. 나의 예상보다도 일찍, 즉 바로 다음날 북한은 “輕水爐를 먼저 지어주어야 핵시설 폐기에 들어간다”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북한정권의 속성은 馬賊團이다. 국제협약을 지키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고 판단할 때만 지킨다. 약속을 깨는 데 대해서 아무런 양심의 苛責이 없다. 9.19 합의문은 김정일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가할 罰則이 없었기에 휴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金正日에 대한 觀点이다.
金正日은 非이념적 이기주의자이다. 그의 행태를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들과 북한정권내에서 그에게 충성했던 이들의 이야기에 공통점이 있다. 金正日은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민족, 북한노동당, 북한주민, 북한체제 등 그 어떤 집단이나 他人을 위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행복과 이해관계에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 의사 결정도 獨斷한다. 혼자서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그의 이념이라면 이념이다. 한반도를 理念무장대치상황으로 몰아간 자가 本性은 非이념형 독재자인 것이다. 理念이란 가치관이므로 그는 가치관이 없는 독재자, 양심이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후계자 문제에 관심이 없다. 후계자를 내세울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 다른 움직임이 없다. 자신이 고민해서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어준다는 생각만 해도 억울한 모양이다. 그는 북한정권이 어차피 자기 代로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준다. 그는 측근들이 통일 이야기를 하면 화를 낸다고 한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수호, 즉 자신의 안전이 급선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극도의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과 권한이 침해받거나 도전받는다고 판단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미국이 작년 9월 金正日의 범죄자금을 취급해온 마카오 은행과 미국은행 사이의 거래를 금지시키자 국제 금융기관들이 연쇄적으로 對北거래를 중단하는, 이른바 금융제재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이 직접 북한을 상대로 취한 제재가 아닌데도 국제금융을 지배하는 미국의 방침에 대해서 국제금융기관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때문이다.
金正日이 이 조치에 발끈한 것은 자신의 돈줄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한 것도 무슨 大戰略이 있어서가 아니고 자신의 비밀金庫를 지키겠다는 일념에서 한 지극히 개인적인 도발이고 투정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 CIA의 북한담당 분석관 출신 한 인사는 '金正日은 후계자를 절대로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그와 측근들은 가이아나의 人民寺院 광신도들처럼 동반自爆과 集團自殺로 종말을 고할 것이다'고 예언했다.
金正日은 그 어떤 인간적 배려도 하지 않는, 同情心과 利他心이 철저히 배제된 글자 그대로 악마라고 단언하는 기독교인 對北전문가도 있다.
金正日은 2000년 6월 최소 5억 달러의 금품을 받고서 남북수뇌회담을 金大中 당시 대통령에게 판 사람이다. 金大中은 5억 달러중 4억5000만 달러를 金正日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보냈다. 2007년에 盧武鉉-金正日 회담이 열리지 않게 된다면 그 가장 큰 이유는 盧 대통령이 金正日에게 현금을 뇌물로 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金正日은 權力과 金力에 의해서 유지된다. 金力의 핵심은 39호실 비자금이다. 2005년 9월부터 시작된 미국에 의한 간접적인 對北금융제재(미국은 북한정권을 상대로 금융제재를 취한 적이 없다. 북한정권의 不法자금을 관리하는 외국은행과 미국금융기관의 거래를 규제한 것뿐이다)는 金正日의 急所인 金力을 친 것이다.
2007년에 들어서 미국 정부는 북한정권과 직접 대화를 하고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묶여 있는 북한자금의 일부를 풀어줄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북한측도 영변 원자로의 가동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다시 받겠다고 나선 듯하다. 미국정부는 극히 일부인 合法자금을 풀어주더라도 '金正日비자금遮斷작전'의 큰 틀은 결코 허물지 않을 것이다. 2006년에 있었던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핵실험, 이에 대한 유엔안보리 제재결의, 중국의 對北압박 등은 미국이 金正日의 돈줄을 쥐어짠 데 대한 金正日의 반발과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응징이었다. '金正日비자금遮斷작전'이 거둔 성과이기도 했다. 미국이 유일하고 가장 효과적인 이 전략적 압박수단을 놓아버릴 리는 없다. 북한은 식량이 바닥나는 이른바 春窮期를 맞아 한국과 국제사회로부터 식량과 비료를 지원받기 위해서 전술적 후퇴를 하겠지만 핵무기는 절대로 폐기하지 않을 것이다.
‘金正日비자금遮斷작전’은 김정일 한 사람만을 표적으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정일의 본질을 直擊한 것이므로 효과가 크다. 이를 잘 활용하면 金正日을 북한주민 및 지배층으로부터도 고립시킨 뒤 격파할 수 있다. 북한의 핵실험 직후에 나온 유엔안보리 결의문이 사치품의 對北禁輸조치를 포함시킨 것은 金正日에겐 큰 스트레스이다. 金正日을 굶겨야 북한주민들이 굶지 않을지 모른다.
金正日에 대한 또 다른 핵심적 觀点의 하나는 그가 바로 대량살상무기란 점이다. 체코 전 대통령 하벨의 주장에 따르면 나치의 아우슈비츠보다도 더 가혹한 북한 강제수용소에서 지난 30년간 약40만 명이 학살당했다. 하벨은 金正日의 대학살이 北核보다 더 위험한 것이므로 이를 유엔안보리에서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김정일은 집단농장의 개혁이나 군사비 지출의 삭감, 해외비자금 사용 등 여러 가지 구제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집권의 편의를 위해서 그 구제수단을 쓰지 않음으로써 북한주민 수백 만명을 사실상 굶겨죽였다. 그는 모자라는 식량을 골고루 나누지 않고 충성집단에만 배급하고 불만계층과 동요계층에 대해선 배급을 중단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적대계층을 숙청하는 도구로 飢餓를 이용하였다.
人命손실을 기준하면 金正日은 한국전쟁을 북한지역에서 한번 더 일으킨 셈이고 히로시마급 원자폭탄을 同族을 향하여 수십개 投下한 셈이다. 핵폭탄 제조와 북한동포 학살이란 2大 反인류범죄의 張本人은 金正日이다. 그가 바로 핵무기보다도, 히틀러보다도 더 무서운 대량살상무기이다. 金正日은 2100만 북한인민들이 자신을 決死擁衛(결사옹위)하는 ‘인간총폭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류역사상 인민 모두를 언제든지 폭파시킬 수 있는 폭탄으로 만든 유일한 독재가가 金正日이다. 북한공작원은 추격을 받고 죽게 되면 金正日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電文을 보내고 전원 자살한다. 金正日이란 대량살상무기의 해체 없이는 핵무기의 해체도 대학살의 중단도 불가능하다. 對北문제의 본질은 金正日 제거인 것이다.
金正日의 딜레마는 核을 포기해도 죽고 核을 껴안고 있어도 죽는다는 점이다. 핵무기를 포기한 金正日은 이빨과 발톱이 빠진 호랑이다. 국제사회에서뿐 아니라 지배층안에서도 경멸당하고 쫓겨날 것이다. 이를 잘 아는 그는 결국 핵무기를 껴안고 自爆하든지 自滅하는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7년과 2008년의 한반도는 큰 위기상황 없이 지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중국은 2008년 北京올림픽에 방해가 되는 金正日의 불장난을 막으려 할 것이다. 미국 공화당 정부는 2008년 대통령 선거 전에 北核문제 해결을 위한 可視的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 2008년에 미국과 중국에서 예정되어 있는 두 행사는 金正日에 대한 압박을 더할 지렛대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빅딜(Big Deal)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金正日과 핵무기를 동시에 처리하고 새로 등장한 북한정권을 중국이 親中化하여 鄧小平식으로 개혁 개방하게 만든다는 諒解이다.
金正日도 앞으로 2년을 위장평화공세와 내부단속으로 버티어내면서 핵보유국의 지위를 기정사실로 만들려 할 것이다. 김정일과의 대화나 약속은 실천과는 상관이 없다. 정치인들은 그러나 합의를 위한 합의를 해놓고 평화가 이뤄졌다고 선전하는 버릇이 있다.
한반도 사태의 주인공은 그러나 미국도 중국도 아니다. 4800만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영토, 북한정권을 反국가단체, 북한동포를 해방시켜야 할 대한민국 국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헌법에 담겨 있는 민족주의적 열정을 한국인들이 신념화할 때 金正日 제거를 핵심으로 하는 북한문제 해결은 대한민국의 몫이 된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선 盧武鉉과 金大中을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이 몰락하고 정통세력이 미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2007년 大選승리의 여파로 2008년 4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선 좌파가 정치적으로 소멸할 가능성마저 보인다. 親北좌파의 退潮는 大勢이다. 작년 초까지 한국사회는 좌파정권에 의한 親北좌경화와 이에 대응한 國民大覺醒 흐름이 치열하게 경쟁했다. 작년의 5.31 지방선거에서 盧武鉉의 與黨이 사상최악의 참패를 한 이후 國民大覺醒 흐름이 大勢化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어리다. 나이가 60세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민주주의는 독재자뿐 아니라 선동꾼과 거짓말쟁이에 의해서 醜行당하기 쉽다. 지난 15년간 한국의 민주주의는 民主鬪士 출신 세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책에 의하여 농락당하였으나 민주주의의 본질을 잃지는 않았다. 언론자유, 선거의 자유, 私有재산권이라는 3대 조건이 작동하고 있다. 이 힘에 의하여 평화적으로 좌파정권이 교체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체질이 강화될 것이다. 세어진 민주주의의 힘은 北進하여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는 자유통일의 방향으로 작용하게 될 것임에 틀림 없다. 자유통일의 본질적 의미는 노예상태의 북한동포를 해방하여 한국사람처럼 自由民으로 만드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는 人權이다. 한반도의 인권문제는 金正日에 의한 북한인민 대학살을 어떻게 중단시킬 것이냐이다. 이는 핵개발 중단보다도 더 시급한 사안이다. 이 대학살을 중단시키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이고 통일의 목적인 것이다. 필자가 金大中과 盧武鉉에 분노하는 이유도 이들이 人權을 팔아 대통령이 되었으면서도 人權을 말살하는 편에 섰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金正日과 반역자와 자기 패거리들의 인권만 보호했고, 북한주민 탈북자 납북자 미귀환 국군포로의 人權을 외면했다. 이들이 소중하게 여긴 인권은 학살자와 반역자와 부하들의 인권이었다.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오늘 이 순간에도 맞아죽고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의 인권은 이들에겐 인권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적 가치에 대해선 증오심을 품고 그런 생각을 정책에 투영시켜온 두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계급적 가치관을 버리지 못한, 분열적이고 수구적인 人權色盲者였다.
盧 대통령은 좌파적 가치관을 외교에도 투입하여 親金正日, 親中國, 反美, 反日정책을 취함으로써 한국을 北核 위기 때 무력한 구경꾼으로 만들었다. 金正日의 대학살에 방관자가 된 그는 金正日의 핵개발에 대해서도 傍助者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金正日 金大中 盧武鉉 세 사람은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렸다.
대한민국의 조종간을 정상적인 대통령이 다시 잡게 되면 한국인의 底力과 資源이 金正日의 無力化를 위해 동원될 수 있다. 국민총생산을 기준으로 하면 북한은 한국의 100분의 1이다. 2007년 한국의 수출액은 3000억 달러를 넘었는데 북한은 그 200분의 1이다. 한국의 5일간 석유소비량이 북한의 1년치이다. 이런 경제력이 國民大覺醒의 大勢化에 의하여 北韓住民들에 대한 동정심과 金正日에 대한 분노의 힘으로 轉換된다면, 또 韓美동맹과 韓日우호관계가 회복된다면, 그리하여 자유를 공통가치로 하는 韓美日 해양문화권의 협력이 이뤄진다면 2008년은 金正日 정권의 사실상 종말의 해가 될 것이다.
金正日은 2006년 11월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한 것을 보고 부시의 對北강경정책이 무디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민주당 클린턴 정부 시절국방장관을 지냈던 페리는 北核 시설 폭격론을 주장하는 등 민주당이 오히려 더 공격적이다. 공화당 정부와 민주당의 의회가 對北강경 노선으로 경쟁할지도 모른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金正日이 성공도 실패도 아닌 어중간한 핵실험을 했다고 해서 당장 긴급한 군사적 위협으로 커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치적 이유에서 金正日의 목을 세게 졸라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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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벼랑에 선 대한민국의 행운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세 살 어린이부터 여든 노인까지 모두 나라를 걱정하도록 만든 점이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세 살 어린이부터 여든 노인까지 모두 나라를 걱정하도록 만든 점이다'고 한다. 국민들이 이렇게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 이후 처음일 것이다. 대통령의 망언과 깽판치기가 다수 국민들을 憂國지사로 만든 것이다. 불만, 불평, 분노, 정의감, 답답함의 증상을 보이는 나라걱정의 마음들이 한 군데로 모인다면 굉장한 폭발력을 낼 수 있다. 국민들의 이 분노를 조직하고 폭발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몸안으로 들어온 바이러스와 싸우면서 抗體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몸에 열이 나는 것도, 잠이 오지 않는 것도 항체를 만드는 과정의 불가피한 부작용이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찬스는 벼랑에 서 있다는 점이다. 벼랑에서 떨어져 죽든지 벼랑에서 날아올라 더 높고 안전한 곳으로 昇天(승천)하든지 兩者擇一(양자택일)이다. 인간이든 조직이든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상태에서 생존투쟁을 벌일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단순히 생존 정도가 아니라 위대한 逆轉勝(역전승)을 거두는 경우가 많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협공을 받아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唐과 연합하여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길을 뚫었다. 생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친 김에 통일을 해버린 것이다.
냉전시절이던 1980년에 미국은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그 5년 전엔 월남전에서 패배했고, 1979년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유린하고 있었고, 이란 혁명 세력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아놓고 있었다. 이들을 구출하려던 미국의 특공작전은 허망하게 실패하여 자유세계의 기수의 권위에 먹칠을 했다. 미국의 안 마당인 南美에서도 니카라과 산디니스트 정권과 같은 反美좌익 정권이 잇따라 들어섰다.
벼랑에 몰린 미국을 구출한 것은 우유부단한 카터를 꺾고 대통령이 된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은 열세를 만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東歐와 소련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는 되감기 작전을 선택한다. 1989년의 동구 공산국가, 1991년의 소련 붕괴는 벼랑에 선 미국이 롤백하는 과정에서 성취한 逆轉勝이었다.
우리도 자유민주체제의 생존을 위한 좌파종식 정도가 아니라 좌파소멸과 김정일 정권 붕괴, 그 뒤의 자유통일을 視野에 넣는 逆轉勝의 전망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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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행기: 2007년 대한민국 再生의 길
김정일편인가, 대한민국편인가?
-徐載弼과 李承晩이 미국과 만나 자유민주주의를 한국에 도입한 것이 자유통일을 넘어서 一流국가로 가는 궤도를 깔았다. 조종실이 반역적 세력에 의하여 점거되어 일시 탈선한 대한민국을 향해 在美교포들이 제2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徐載弼의 유언: “자유를 지키려거든 생명을 걸고 싸워라”(月刊朝鮮 2007년 1월호).
삶의 질, 선진국 수준으로
지난 12월 초 미국 뉴욕의 在美애국단체로부터 강연초대를 받은 나는 태평양을 건너는 점보機 안에서 심심풀이로 통계집을 훑어보았다. 올해 가을 UNDP(유엔개발기구)가 발표한 세계 180여개국의 인간개발지수, 즉 삶의 질 랭킹에 따르면 한국은 26위이다. 포르투갈, 헝가리, 체코보다도 삶의 질이 높은 선진국 수준이다. 이 통계에 따르면 노무현 세력의 저주를 집중적으로 받아온 한국은 중국과 함께 지난 30년간 삶의 질을 가장 크게 향상시킨 나라이다. 미국의 인권단체 프리덤 하우스가 발표하는 정치적 자유지수 랭킹에서도 한국은 거의 유럽수준의 ‘자유국가’로 분류된다. 올해 한국의 무역액은 6000억 달러를 돌파한다. 이는 한국의 국민총생산과 함께 세계 12위권이다. 북한의 올해 추정 무역액 30억 달러에 비교하면 약200배이다. 나는 한국의 국민총생산이 북한의 약100배라고 추정한다.
지난 25년간 한국사회의 변화는 눈부시다. 1980년엔 서비스업 종사자가 경제활동인구의 43.5%였는데 지금은 73.5%이다. 25년 전 22.5%이던 제조업 종사자는 18.6%, 34%이던 농어민은 7.9%로 줄었다. 한국인의 근로시간은 週當 45.4시간으로서 대만의 44.3시간, 일본의 43.5시간, 미국의 40.7시간에 비하여 아직 길다.
자동차 생산량은 세계 5위, 造船은 세계 1위, 전자는 3등, 제철(製鐵)은 4위이다. PC보유대수는 인구당 세계4위이다. 포춘지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500대 기업 랭킹에 들어가는 기업수의 국별 순위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중국, 네덜란드, 캐나다에 이어 세계9위이다. 10위인 이탈리아보다도 세계적 기업이 많다는 통계이다. 한 나라의 생산성과 생동성을 보여주는 에너지 소비량 부문에서 한국은 10위권이다. 電力 생산량은 세계 9위, 석유소비량은 세계 6위, 총에너지 소비량은 8위이다.
여윈 늑대와 살찐 돼지
한국은 國力의 규모면에서는 세계 10위권, 삶의 질과 관련된 통계에선 20~30위권이다. 대만, 이스라엘과 함께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까지 온 나라가 한국이다. 非기독교 서구 국가로선 유일하게 일본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해 있다. 아직 미래가 결정되지 않는 나라 한국은 자유통일이란 관문을 통과할 때만이 일류국가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나라가 지금 赤化를 걱정하고 있다. 나를 미국으로 불러낸 것도 그런 걱정에 휩싸여 있는 在美동포 사회였다. 國力면에선 100분의 1이고 주한미군과 같은 동맹군도 없는 ‘야윈 늑대’ 같은 북한정권을 겁내면서 그들의 공갈에 끌려가는 ‘살찐 돼지’ 같은 한국은 “그 영혼이 赤化세력에 의하여 망가졌기 때문에 아무리 허우대가 좋아도 자살의 길을 달려갈 수밖에 없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뉴욕엔 많았다.
뉴욕에서 큰 교회를 운영하는 한 목사는 북한을 구석구석 다녀본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1995년 이후 5년간 북한 주민 약 300만 명이 굶어죽은 것은 金正日에 의한 인구 과잉 해소 정책이었다”고.
“식량 담당 고위 간부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데는 年間 백만 톤이 부족합니다. 인구를 줄여야 해결이 됩니다’라고. 저는 북한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지방까지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산비탈을 전부 밭으로 만들어 나름대로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북한이 연간 부족분 백만 톤의 식량을 수입하면 굶어 죽는 사람이 없어집니다. 김정일이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해외 은행에 묻어두고 식량 수입에 쓰지 않았던 것은 고의로 주민들을 굶겨 죽임으로써 인구를 줄이려 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2년前 탈북한 고위급 기술자의 증언이었다.
“북한의 농업이 무너져 수백만이 굶어죽는 가장 큰 이유는 흥남 비료공장의 老朽化(노후화)로 생산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내각에서 시설 현대화에 2억 달러만 들이면 생산량을 회복할 수 있다는 건의서를 여러 번 올렸으나 김정일은 묵살했다. 자꾸 현대화 건의가 올라오니 김정일 측근이 책임자를 불러서 가만히 말하기를 ‘식량문제는 지도자 동지의 중요한 전략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김정일이 고의로 식량 부족 사태를 일으켜 주민들을 통제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이다”
앞의 목사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死後 권력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대기근 사태를 일으켜 인구를 줄이면서 소위 불만ㆍ불평분자들도 일소하려 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목사와 똑같은 주장을 한 사람이 또 있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赤旗)의 평양 특파원을 지냈던 하기와라 료氏이다. 그는 ‘饑餓살인’ 이란 말을 써가면서 김정일이 고의로 反黨분자들을 숙청하는 수단으로 大饑饉(대기근) 사태를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위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하는 통계도 있다. 북한 전문가 나티오스氏가 쓴 ‘북한의 대기근’에 따르면 1999년 무렵 북한 사람들의 영양 상태를 분석했더니 불만계층이 가장 나쁘고 다음이 동요계층이고 충성계층은 가장 좋았다는 것이다. 이는 대기근이 정치적 탄압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金大中 - 盧武鉉 정부 시절 8년간 남한에서 북한으로 들어간 金品을 다 합치면 약100억 달러가 될 것이다. 연간 식량 부족분 100만t을 수입하는 데는 5~7억 달러이면 족하다. 100억 달러의 일부만 거기에 썼더라도 북한의 식량 문제는 해결 되었다. 김정일은 남한에서 들어온 돈과 해외에 숨겨둔 비자금을 식량수입에 쓰지 않았다. 100억 달러어치가 北으로 들어간 기간에 탈북자는 늘어났다. 100억 달러가 북한 주민이 아닌 黨과 軍에 들어가 군사력 강화, 핵개발, 對南공작, 지배층의 호화판 생활에 쓰였다는 有力한 傍證이다.
제2의 독립운동
앞의 목사는 북한을 둘러보고 이 체제가 지탱되는 이유를 알았다고 했다. 첫째는 새빨간 거짓말. 김일성이 북한을 해방시켰고 6ㆍ25 때 남한이 북침했다는 식의 180도 거짓말이 조직적으로 교육되니 진실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빨갱이란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았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집단이라고 빨갱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아닐까요? 아이들이 태어나면 노동당이 이들을 빼앗아 탁아소에 집어넣고 새빨간 거짓말을 주입하면서 로봇으로 키워 온 셈이지요. 저는 북한 체제가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는 북한은 어린 시절의 교육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점을 믿는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굶어가면서도 어린이들을 김일성ㆍ김정일의 아이들, 즉 혁명아로 키웠고 남한의 386세대를 교육하여 대한민국의 赤化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赤化되어가는 게 아니라 이미 赤化된 나라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권이 赤化되고 국민들의 영혼이 망가졌으면 나라가 赤化된 것이 아닙니까. 절박한 인식이 있어야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나라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在美동포들이 ‘제2의 독립운동’을 할 때가 온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기자를 초청한 뉴욕 고려서적 崔應杓 사장은 황해도 출신으로서 20대에 출판사 사장을 지냈고 1950~60년대에 날렸던 신태양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다. 30여년 전 미국으로 건너와서 책을 팔아 돈을 번 사람이다. 뉴욕 지방에서 그가 경영하는 세 책방은 서울 도심의 대형서점 규모이다. 이렇게 큰 서점을 自國서적으로 꽉 채울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아시아에선 일본과 한국 정도이다. 70대 후반인 崔 사장은 지난 11월말 韓美자유수호운동본부를 결성했다. 그는 “밖으로 나서지 않고 얌전하게 기업을 하시던 분이 왜 이런 일을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는,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근사한 나라의 어리석은 국민들을 속여서 공짜로 소매치기하려는 세력에 대한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늘그막에 자유수호 투쟁전선에 나서게 되었다고 말했다.
'벌써 천 명 이상의 동지들을 확보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호응이 빠른 것은 위기감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특히 건국과 호국에 참여했던 분들이 적극적입니다”
기자는 崔 사장 및 그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한국노총 전 사무총장 尹永濟 회장(白凡金九선생기념사업회 뉴욕지회장)과 5일 동안 동행하면서 뉴욕, 필라델피아, 뉴저지, 그리고 현지 방송국들을 돌아다녔다. 스무 시간도 넘는 두 분과의 車中대화를 통해서 나는 독립투사를 만난 기분이 들게 되었다. 崔 사장은 빨갱이들의 새빨간 거짓말에 격분하고 있었다.
“해방되었을 때는 북한에서 한 소년의 눈으로 공산당과 소련군의 만행을 보았고 6월25일 새벽엔 개성에서 공부하던 중학생으로서 시내까지 거의 무혈입성하던 인민군을 구경했었습니다. 6.25 전란중엔 제가 폭격으로 다리를 다쳤을 때 미군 트럭이 병원으로 실어주어 살았습니다. 전투중인데도 미군 트럭 운전병이 다친 다리에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차를 소걸음으로 몰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김정일보다 미국을 더 미워할 정도로 미쳐버렸고 여기 미주사회에서도 좌익들이 설치니 저라도 나서서 싸워야지요”
뉴욕에서 만난 교포들중에는 “제2의 독립투쟁으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는 것이 1차 독립운동이었다면 좌익한테 넘어간 대한민국을 탈환하려는 지금의 운동이 제2의 독립투쟁이란 것이다. 한미자유수호운동본부는 2007년엔 ‘조국을 향한 편지 보내기’ ‘대통령 선거에서 현명한 판단을 하도록 설득하는 전화걸기 운동’ ‘在美동포 救國선언’ 등 구체적인 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민족의 운명을 바꾼 徐載弼의 미국행
12월5일 저녁 뉴욕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플러싱 지구의 대동연회장에서 열린 강연회엔 700명의 청중들이 참석했다. 나는 ‘2007년 한국 再生의 길: 한국의 절망과 희망’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경청하는 태도나 질문의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 위기의식이 조국보다 더 깊다는 실감이 왔다. 다음날엔 약3시간을 달려 필라델피아市의 徐載弼 재단 강당으로 가서 200명이 넘는 동포들과 만났다. 徐載弼기념재단(Philip Jaison Memorial Foundation)의 정홍택 회장이 徐載弼(서재필) 선생과 관련된 秘話를 들려주고 자료를 건네주었다.
徐載弼은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한 뒤 金玉均의 영향을 받고 일본에 유학을 가서 사관생도 교육을 받고 왔다. 그는 만 20세의 나이에 金玉均이 일본 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1884년의 갑신정변에 가담했다. 3일天下 시절 그는 병조참판, 즉 국방차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3일천하는 서울에 주둔하던 淸軍에 의하여 무너지고 서재필은 일본으로 탈출했다. 그의 가족은 역적 집안으로 규정되어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당했다. 일본에서 냉대를 받은 서재필은 ‘요코하마에 살던 한두 사람의 미국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굶어죽었거나 얼어죽었을 것이다’(서재필 증언). 그는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朴泳孝, 徐光範과 함께 1885년 5월26일 시티 오브 페킹號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향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 출신의 유명한 정치학자 李庭植씨는 2003년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이란 책에서 그가 일본에서 냉대를 받고 미국으로 간 것은 그와 한국을 위해서 轉禍爲福(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썼다. 그가 말한 福은 徐載弼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미국과 만났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실용정신을 배우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기자는 서재필 재단 강당에서 강연을 하고 호텔에 돌아와서 李庭植 교수의 名著을 읽어갔다.
나는 약110년 전 조국에서 쫓겨난 21세의 망명자가 한 부호의 후원을 받고 필라델리아가 속한 펜실베이니어주의 작은 도시 윌크스베리에 정착한 뒤 힐멘 아카데미라는 중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가 공부하던 때의 고독과 울분을 생각했다. 徐載弼의 생애에서 느껴지는 그러한 悲感은 비슷한 행로를 걸은 李承晩의 생애에서 우러나는 무서운 자기확신과 권력의지에 비교된다.
왜 한국인은 자연스럽게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했나?
1948년 건국에 즈음하여 反共 우파 세력이 헌법을 만들 때 아무 이견 없이 거의 만장일치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헌법의 기본 가치로 받아들인 것은 신비하기까지 하다. 헌법 제정에 미 軍政이 개입하여 미국식 정치체제를 강요했다는 증거는 없다. 制憲과정에서 王政 복고나 사회민주주의, 또는 국가주도의 개획경제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건국세대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결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경험이 全無한 나라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건국지도층과 국민들 마음속에 자유와 인권의 소중함에 대한 合意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李庭植 교수는 徐載弼을 평하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이라고 규정했다. 이 씨앗 속엔 徐載弼의 강연을 듣고 감동하여 民權의 소중함을 알았고 끝내는 徐載弼을 뛰어넘는 거대한 역사적 업적을 남기게 된 李承晩이 포함될 것이다. 徐載弼, 李承晩 두 사람이 미국에서 배운 기독교 문명과 거기서 파생된 민주주의와 실용사상을 한국에 전파한 기간이 徐載弼이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되는 1895년부터 치면 해방 때까지 약50년이었다. 이 두 偉人의 苦鬪에 의하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자유와 인권과 실용의 정신이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건국정신, 헌법정신으로 스며들어 대한민국의 國體와 政體를 결정하게 된 것이 아닐까?
지난 60년간 한국인이 건국-호국-산업화-민주화의 4단계 국민국가건설과정, 또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유통일의 關門을 넘어서면 一流국가 건설이 가능하다는 희망과 비전을 갖게 된 것은 두 巨人 徐載弼, 李承晩에 힘입은 바 크다. 우리가 세계 10대 國力을 가진 국가가 된 원동력은 근면 성실한 민족적 자질, 李承晩 朴正熙로 대표되는 위대한 지도자, 자유민주 체제, 韓美동맹이란 4대 조건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것이다. 李承晩-자유민주-韓美동맹이란 번영의 軸(축)은 이곳 펜실베이니아에서 살면서 미국의 번영과 조국의 참상을 놓고 고민하고 연구했던 조선의 젊은 망명객 徐載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은 李庭植 교수의 徐載弼 연구서에 실린 한 대목 때문이었다.
절망 속에서 강대국의 꿈을 보다
徐載弼은 필라델피아, 워싱턴에서 살던 10년간 의사가 되고 미국여자와 결혼하고 드디어 미국시민이 되었다. 그는 淸日전쟁으로 일본이 이기고 朴泳孝 등 개화파가 집권하자 1895년 크리스마스 날 인천을 통해서 귀국한다. 그는 이듬해 한 영문잡지에 쓴 ‘조선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14년 만에 돌아오면서 나라의 형편이 좀 좋아졌을 것을 기대하였는데, 오히려 크게 실망했다. 나의 심장에서 피가 터져 나오도록 통분케 하는 것은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다>
그는 이 글에서 ‘교육’을 강조했다. 교육으로써 백성들과 젊은이들을 깨우치는 것이 나라를 융성케 하는 지름길이란 것이다.
<젊은 세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흡수하고 크리스천 문명에 숙달하게 되면 얼마나 큰 혜택을 받게 될지 모른다.>
徐載弼은 조선의 당시 상황에 실망했지만 기독교 문명, 즉 자유민주주의와 과학ㆍ합리ㆍ실용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아 민중이 깨어나면 워낙 민족의 자질이 뛰어나므로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 조선은 절망적으로 보이지만 나는 조선이 장차 동양의 강대국중 하나(a power)가 될 것을 확신한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들을 가르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구한말의 개혁ㆍ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학교 출판부)의 著者 李庭植 교수 (펜실베이니아 대학 명예교수)는 “徐씨의 ‘강대국 운운’하는 발언은 빈말이 아니라 고국에서 투신활약한 것을 뒷받침 해준 신조” 였다고 지적했다.
<이 글(강대국 운운)을 읽은 독자들은 폭소 아니면 冷笑로 대했을 것이지만 서재필에겐 근거가 있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두뇌가 과학이나 예술의 어느 분야라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사고방식이 매우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서재필은 또 조선반도엔 자원이 충분하고 전국적으로 관리들의 수가 너무나 많으므로 3분의 1로 줄여도 정부 운영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관리를 줄여서 남은 財源으로 교육 등 각종 사업을 운영할 수 있다>
徐載弼은 ‘조선의 절망’속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 셈이다. 그는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확신했고 이 우수성이 ‘기독교적 문명’과 접목되기만 하면, 그리하여 발전을 누르고 있는 부패한 守舊 지배층을 개혁하기만 하면 민족적 에너지가 대폭발할 것임을 예감했던 것이다.
이 徐載弼의 생각을 이어받은 여러 제자중 한 사람이 李承晩이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徐씨의 강연을 듣고 감동했다. 李承晩은 “기독교 국가 시민들은 그들의 통치자들의 억압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으로” 듣고 가슴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1898년 고종은 徐載弼을 다시 추방하고 ‘독립신문’을 폐간시키고 親露 정권의 전횡 밑에서 王權강화에 열중했으나, 李承晩은 徐씨가 만든 독립협회의 민중 운동 시기, 즉 만민공동회 당시(1898)에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다. 그는 ‘매일신문’ ‘뎨국신문’ 창간을 주도했고 反고종 역모에 걸려 옥살이를 하는 중에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예수를 믿어야 나라가 산다”고 하는 정치ㆍ종교관을 갖게 되었다 (李庭植 교수著 ‘구한말의 개혁ㆍ독립투사 서재필)
최초의 대중정치인 李承晩
李承晩은 獄中학교를 만들어 죄수들을 교육했다. 그는 출감한 뒤 徐載弼처럼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래의 건국 대통령은 한국 민중의 우수성과 지배층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가 대륙횡단 열차편으로 워싱턴으로 가고 있을 때에 「帝國新聞」에 記名논설이 실렸다. 1904년 12월29일자와 30일자에 연속으로 실린 「나라의 폐단을 고칠 일」이라는 글이었다.
李承晩은 ‘근래에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인종이 걸러서 당초에 어찌할 수 없다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 하오’라고 전제한 다음, 그 특유의 논법에 따라 국민을 「상등인」과 「하등인」으로 구분하여 외국인들과 비교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하등인」은 외국 「하등인」에 비하면 師父라고 할 만큼 우수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하등인」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도 교육을 받은 외국의 「하등인」보다 양순하고 성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상등인」은 다른 나라 「상등인」에 비하여 ‘천양지판으로’떨어진다면서, 그 이유는 우리나라 「상등인」들이 받아온 敎育 때문이라고 했다. 李承晩은 전통교육의 폐단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그것은 첫째 태고적 옛것을 숭상하는 것, 둘째 虛誕(허탄:거짓되고 미덥지 못함)함을 숭상하는 것, 셋째 인심을 결박하는 것, 넷째 큰 것을 섬기는 주의, 다섯째 이른바 도덕상 주의, 곧 실상이 없고 빈 생각만 숭상하는 것이었다.
이 「논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장래 여망은 우리 용준한 평민에게 달렸고 전혀 상등인에게 있지 아니하며, 우리 청년들에게 달렸고 老成한 이에게 있지 아니한지라>
徐載弼은 미국 건국의 요람이자 남북전쟁의 격전지였던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살면서 미국의 건국정신과 자유와 민권의 행동철학을 실감 있게 터득했을 것이다. 李承晩은 권력의 중심지 워싱턴에 근거지를 둔 때문이기도 하지만 徐載弼보다는 국제정치의 力學관계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조국의 문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大에서 석사, 프린스턴大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에 관한 연구」는 ‘戰時 중립이론의 발전 과정’을 추적한 일류 논문이다. 미국이 戰時에도 非교전국이 무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여 시장의 자유를 확대시켜 왔다는 것이 논문의 요지이다.
李承晩은 미국에서 명문대학을 나왔고 동양적 교양에서도 일류 지식인이었으나 엘리트 의식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의 개혁적, 반골적 기질이 李박사를 대중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일시 귀국한 李박사는 YMCA의 간사로 일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강연여행이었다. 日帝 시대였으므로 李承晩의 강연 내용은 주로 기독교를 傳道(전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1911년의 여름엔 한 달 이상 전국을 순회했다. 3,400km를 다녔고, 33회의 집회에서 7,533명의 학생들을 만났다. 李 박사를 본 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나도 그와 같은 인물이 되어야겠다”면서 공부하고 유학을 갔다. 이때 조선인들 마음속에 심어진 ‘李承晩 박사像’이 그를 민족의 지도자, 건국의 아버지로 만들게 된다. 대중을 경멸하지 않고 그 대중의 각성을 통해서 권력을 잡고 역사를 바꿔야 한다고 확신했다는 점에서 李承晩은 한국 최초의 대중 정치인이다.
헌법 속으로 들어간 기독교적 민주주의
徐載弼, 李承晩 두 사람은 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만났다. 두 사람은 미국의 역사와 文化를 현장에서 호흡하면서 ’기독교적 민주주의’를 신념화했다.
李承晩이 공산주의의 기만성을 그 어떤 한국인보다 먼저 꿰뚫어 본 글, 徐載弼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이 개인의 자유라고 확신한 글을 읽어보면 두 분은 공산주의의 악마성과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대해 맨 먼저 깨달음을 얻은 점에서 先覺者임을 알 수 있다.
李承晩은 사회주의가 세계를 석권하고 있던 1920년대에 이미 국가와 기업과 실용할 과학을 부정하는 사회주의는 독립자주해야 할 한국에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나중엔 “공산주의는 호열자와 같다. 인간은 공산주의와 같이 살 수 없다”라고 단정했다.
徐載弼, 李承晩은 교육과 언론 사업을 통해 국민 각성을 추구한 점에서는 같으나 실천의 문제에서는 人生 行路가 달라졌다. 徐載弼은 미국 시민권자가 되고 기업도 운영하면서 ‘미국화’ 되어갔다. 그의 민주주의論도 미국적인, 보편적인 원리란 면이 강했다. 3ㆍ1운동 이후 전개된 새로운 한반도 정세 속에서 徐載弼은 서서히 역사의 主流에서 밀려나면서 조국과의 접촉도 줄었고 한국어도 거의 잊었다. 徐載弼은 독립운동가의 역할에 머물렀다.
李承晩은 애국심과 기독교 정신을 자기 확신과 권력 의지에 연관시켜가면서 독립과 건국의 실천에 매달렸다. 개혁운동가에 머물지 않고 建國의 主役을 자임했다. 기본적으로 徐載弼은 교육가였고 李承晩은 정치인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이야말로 徐載弼, 李承晩의 꿈이 담긴 ‘自由민주의 한국판 권리장전’이다. 徐, 李 두 사람을 매개로 하여, 또 미국인 선교사의 중계로 한국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손을 잡았다. 이 관계는 해방, 건국, 6ㆍ25를 거치면서 韓美동맹 관계로 굳어졌고 이 조건이 한국을 一流국가의 문턱까지 밀어올렸다. 대한민국 헌법과 건국과정에서 李承晩 대통령은 기독교적인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의 自主性을 내세우고 북한의 김일성 정권을 사대매국집단으로 단정했다. 헌법에 반영된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유일 합법성은 감정적 뽐냄이 아니요, 선언적 虛言도 아닌, 自由에 기초한 建國의 당연한 자리매김이었다.
李庭植 교수는 徐載弼이 19세기말에 “조선이 장차 동양의 강대국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돈키호테와 같은 착상’을 한 것은 10년의 미국 생활에서 터득했던 민족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의 ‘돈키호테 같은 착상’은 세계 10大 경제대국, 삶의 질 세계 26위의 대한민국으로 결실됨으로써 위대한 예언이 되었다.
하지만 徐씨가 지적했던 ‘지배층’과 官吏집단의 문제는 남아 있다. 국군 장교단 출신 엘리트들의 역할이 끝난 1993년 이후 정권을 장악한 자칭 민주투사들은 徐載弼을 절망시켰던 조선조의 守舊的 지배층의 행태를 보이면서 민족혼을 망가뜨리고 민족의 저력을 탕진시키면서 一流국가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 명분론의 포로가 되어 위선적이고 당파적이며 분열적 행태를 보이는 이들은 그 속성이 자유민주적 실용주의보다는 아직도 조선조 상태로 남아 있는 북한의 守舊좌파와 더 가깝다. 金正日 - 金大中 - 盧武鉉의 守舊좌파 연합은 이런 공통점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일종의 이념적 공동운명체가 되어 자유통일과 일류국가 건설로 매진해야 할 한국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악마에 영혼을 팔아넘긴 한국인들
徐載弼과 李承晩이 한국에 소개했던 기독교적 민주주의가 대표하는 가치, 사랑ㆍ화합ㆍ진실ㆍ평등ㆍ자유ㆍ겸손은 전부가 공산주의의 치유불가능한 생리인 증오ㆍ분열ㆍ거짓ㆍ억압ㆍ독선ㆍ오만과 정반대이다. 한반도의 무장ㆍ이념 대결 관계는 그 본질이 主體광신교와 기독교적 민주주의의 대결이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애국운동에 나선 이들은 거의가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이비 좌파와의 대결을 金正日이란 사탄의 세력이 지휘하는 惡黨들과의 靈的 싸움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집단적 행태를 분석하면 위대한 성취와 병적인 타락이 混在하여 분열증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정권은 남침 전과가 있는 戰犯집단이다. 이 위험한 집단이 핵실험을 함으로써 한국에 대해 결정적 우위(優位)에 섰다. 그럼에도 집권세력은 핵무장 저지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UNㆍ미국과 손잡고 김정일에 압력을 넣는 일에도 협조하지 않는다. 국민들도 자신들의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안보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태평이다.
300만 명이 죽은 6ㆍ25 전쟁, 또 300만이 굶어죽은 북한의 대기근, 그리고 소련ㆍ동구 공산권의 해체로써 사회주의의 실패가 증명되었는데도 그 직후 한국인은 선거를 통해서 親共집단, 즉 사이비 守舊좌파를 집권세력으로 만들었다. 이 좌파세력의 핵심들은 사회주의 중에서도 최악의 變種인 김일성식 전체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대한민국보다 북한정권을 더 높게 평가하고, 동맹국을 主敵보다 더 미워하며, 대한민국 수호세력을 증오한다. 反헌법, 反국가적 이념에 영혼을 판 집단에게 정권을 넘겨준 유권자들의 정신도 분명 정상이 아니다.
한국은 북한보다 경제력이 약 100배나 된다. 한국은 주한미군이 있으나, 북한은 외국군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이런 압도적 國力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북한정권의 공갈에 겁을 내고 굴복하고 있다. 야윈 늑대에 뜯어 먹히는 ‘살찐 돼지’같은 나라이다. 김정일 정권의 위협에 대해서 ‘一戰不辭’나 ‘우리도 핵개발하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 정도이다. 김정일 세력이 남한의 친구들과 作黨하여 발신한 가짜 평화론과 가짜 민족주의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여 잘 살기는 하지만 잘 속고 자존심ㆍ책임감ㆍ용기가 없는 집단이 한국인이다. 한국인들의 영혼이 망가진 탓이다. 인간과 집단의 품격과 윤리를 규정하고 장래의 成敗를 결정케 하는 것은 영혼이고 정신력이다.
북한정권은 지난 60년간 굶어가면서도 끈질긴 對南赤化 工作을 추진하여 한국인들의 뇌수와 심장에 자멸적인 바이러스를 심어 놓는데 성공했다. 어떤 조직이나 인간을 파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미치게 하는 것인데, 이에 성공한 셈이다. 그들은 많은 한국인이 원래 가진 위선성, 명분론, 열등감, 분열성을 자극하여 이를 암흑의 에너지, 파괴적 動力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뉴욕에서 만난 많은 기독교인들은 한국인들이 악마에 영혼을 판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개탄했다. 그 증거는 한국인들이 선거를 통해서 從金집단을 집권세력으로 뽑아준 점이란 것이었다.
“생명을 바쳐 싸우라”
徐載弼은 1947년 美군정당국의 최고 지휘관이던 하지 사령관의 고문으로 초대받아 다시 한국에 왔다. 사사건건 李承晩과 대립하던 하지는 徐載弼을 이용하여 李承晩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80세를 넘긴 徐載弼은 그때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건국에 매진하던 李承晩 세력은 徐載弼 추대운동설에 발끈했다. 대한민국 건국 선언이 1948년 8월15일에 있었고 徐載弼은 9월11일에 다시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다. 출국 두 주일 전 그를 찾아간 조선일보 기자가 “끝으로 조선인민에게 부탁하고싶은 말은?”하고 물었을 때 徐載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라는 것이요. 정부는 인민의 從僕(종복)이란 것을 잊어선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他人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 소원이다”
기자도 뉴욕, 필라델피아 강연에서 “자유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를 마시면서 자라는 나무이다. 2007년 大選에서 또 국민들을 속이고 좌파정권을 만들기 위해서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 세력이 목숨을 걸고 나오는데 대한민국 세력이 한나라당과 대통령 지망생들처럼 정면승부를 기피하면 또 진다. 싸우는 자유세력을 대표할 수 있는 선명 애국정당이 만들어져야 한나라당과 경쟁, 견제하면서 한나라당을 오른쪽으로 당길 수 있고 자유진영의 전체적인 勢를 불릴 수 있다. 이념이 가장 큰 전략이어야 하고 白衣종군, 大同단결, 分進合擊이 우리의 행동원칙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徐載弼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죽으러 돌아온 사람’ 같은 인상을 풍겼다고 한다. ‘파쟁을 계속하는 한국정치인들에게 실망했고 자신을 초청하여 갔던 미국 정부 정책에도 환멸을 느꼈다’는 것이다(李庭植 교수의 上記 저서). 귀국한 지 두 해 뒤 6.25 남침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더욱 낙담했을 것이다. 1951년 1월5일, 그 하루 전 서울이 중공군 손에 떨어지고 트루먼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철군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을 때 徐載弼은 숨을 거두었다. 만 86세였다.
徐載弼은 ‘회고 갑신정변’이란 책에서 자신의 일생을 결정해준 金玉均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조국이 청국의 宗主權하에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치욕을 벗어나 조선도 세계 각국 속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일원이 될까 하여 밤낮으로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李庭植 교수는 이 격분이 金玉均을 개혁가로 만들었고 徐載弼의 일생을 지배했다고 평했다. 李承晩도 그렇지만 徐載弼의 생애를 지배하고 인도한 것은 조국을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분노와 조선인에 대한 동정과 그 저력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제 한국인이 그런 분노를 폭발시켜야 할 대상은 김정일 학살집단과 從金세력일 것이다. 기자도 비슷한 분노와 희망을 담아 이런 글을 나의 홈페이지에 올린 적이 있다.
대한민국은 罪人이 아니다
식민지에서 독립하자 마자 남침전쟁으로 얻어맞아 국토는 초토화되고, 위대한 건국 대통령은 학생혁명으로 쫓겨났다. 민주당 정권은 1년만에 군사쿠데타로 무너지고, 제2의 월남화를 노린 김일성의 명령으로 청와대가 북한특공대의 기습을 받았다. 그 6년 뒤 대통령의 부인은 김정일이 보낸 자객의 총을 맞아 죽고 그 5년 뒤 근대화의 기수는 자기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군사變亂으로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미얀마로 출장갔던 대통령 일행을 노린 김정일의 테러로 17명의 장관급 엘리트가 죽고,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김정일이 대한항공기를 폭파하는 바람에 중동근로자 등 115명이 죽어갔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고 무역흑자국을 만들고 민주화 약속도 지킨 두 전직 대통령이 내란죄로 2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있을 때 국립박물관을 친일파라고 사형을 선고하여 때려부순 대통령의 失政으로 국가不渡 위기로 몰린 나라는 IMF에 구조를 요청해야 했다. 어리석은 국민들은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북한에서 300만 명이 굶어죽는 것을 보고도 2代에 걸쳐 민주세력으로 위장한 좌파정권을 등장시켰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反美선동과 對南적화전략에 동조하니 국가는 분열되고 그 틈을 타고 김정일이 핵실험을 해도 韓美동맹은 작동하지 않는다. 前現職 두 대통령이 김정일과 한 패가 됨으로써 내년 대통령 선거는 내전적 상황에서 치러질 것으로 예측되는 아, 대한민국!
그런데 어찌하여 이 나라는 지금 세계 약200개 국가중 삶의 질이 26위로서 선진국 수준에 진입해 있고, 사람들은 살빼기에 목숨을 걸고, 미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내는가 하면, 남자의 평균키가 아시아에서 가장 큰 키가 되고, 공업에서 세계 4강, 경제력 및 군사력 부문에선 8강을 노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연간 成人인구의 약3분의 1인 연1200만 명이 비행기나 배를 타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는가? 이것이 기적인가, 꿈인가, 현실인가?
한강의 기적은 공짜가 아니었다.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기적이 아니다. 기적이라면 국민수준보다 너무나 위대한 李承晩, 朴正熙가 대통령이 된 것이 기적이요, 1950년 6월25일 남침 소식을 보고받은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국무장관에게 '그 자식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내뱉으면서 30초만에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국민들'을 구하려고 미군의 참전을 결정한 것이 기적이다. 이 결단으로 약5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죽었다. 근면성실한 국민성, 머리 좋고 강건한 민족적 자질, 李承晩 대통령이 간판을 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자율과 경쟁 원리, 朴正熙가 도입한 능률적인 군사문화, 그리고 미국의 결정적 지원이 합쳐져서 우리의 실력보다 월등한 성취를 이룩했다.
김일성, 김정일 일당과 이들에게 영혼을 판 반역자들의 집요한 공작, 암살, 침투, 선동, 배신, 훼방에도 끄떡 않고 대한민국은 전진했고 국민들은 한 손에 망치 들고 한 손에 총을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웠다. 고마움을 모르는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은 이런 기적을 만든 대한민국의 歷代 지도자와 기성세대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조국의 과거와 약점을 캐기 위하여 공권력과 예산을 집중 투입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맞다면 지난 60년간 지도층은 국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만 했는데 기적적인 대한민국은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하느님이 만들어서 땅위로 내려보냈단 말인가? 북의 김일성 김정일이 힘을 합쳐 만들어 남한으로 선물했단 말인가? 아니면 김대중씨가 혼자서 땀을 흘려 만들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노무현씨가 그 말 많은 입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기적 같은 대한민국은 있는데 애국자도 영웅도 보이지 않고 온통 독재자, 守舊세력, 냉전세력뿐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반역자들이 만든 나라란 결론인가?
대한민국은 이제 김대중, 노무현 일파에 사과할 것도 미안해 할 것도 변명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은 罪人이 아니다. 이런 나라를 만든 주인공들은 역사 앞에, 세계 앞에, 무엇보다 김정일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자랑한다. 우리는 현대사를 긍정한다. 우리는 선배세대의 노고에 감사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빛과 그림자를 다 쓸어안고싶다. 우리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이 나라를 사랑한다. 당당한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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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일류국가 만들기의 新羅모델
동맹외교의 승리, 내부단결의 승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승리.
대한민국의 꿈은 자유통일을 이룩한 다음 일류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민족사의 두번째 선진화 경험이다. 첫번째는 신라가 서기 676년 한반도를 통일한 다음 약200년간 일류국가로 번영했을 때였다. 7~9세기에 유럽은 암흑시대라고 하여 로마 문명이 게르만족에 의하여 파괴된 뒤라서 교회를 제외하곤 이렇다 할 문화의 건설이 없었다. 아랍에서는 이슬람 문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 세계 2대 문화권은 唐과 신라를 중심으로 한 동양, 그리고 아랍권이었다. 예술, 군사력, 정신력에서 신라는 당시 세계의 일류국가였다.
신라가 唐과 동맹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일본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평화가 그 뒤 2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고대의 황금기인 이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신라였다. 우리가 지금 두번째로 일류국가를 만들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첫번째 일류국가 新羅의 모델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신라를 일류국가로 만든 원동력은 이렇게 정의된다.
1. 정치가 안정되었다. 왕권의 계승이 비교적 순리대로 이뤄졌다.
2. 지배층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확립되어 국민단합이 이뤄졌다.
3. 외교를 잘하여 당시의 최강대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4. 종교와 권력이 이상적으로 결합하여 삼국통일의 2대 주체세력인 호국불교와 화랑도를 만들어냈다.
5. 文武겸전; 나라의 기풍이 엄격하면서도 개방적이고 활달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6. 해양력이 강했다. 對唐결전에서 신라는 해전으로 결판을 냈다.
7. 실용적 자주정신이 강했다.
8. 행정 시스템이 잘 짜여져 유사시 동원력이 강했다.
9. 불교 같은 외래문물을 사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국의 현실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10. 수도를 옮기지 않았고, 한강유역을 잃지 않았다.
11. 통일과정에서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거의 차별없이 통합했다.
위의 11개 조건은 대한민국이 일류국가의 꿈을 실현하는 데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자주정신, 실용정신, 해양정신, 文武통합, 애국종교, 행정력, 수도死守, 지도층의 솔선수범, 애국청년의 조직화, 정치안정, 동맹외교라는 키워드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일류의 조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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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민족 세번의 세계화-일류 국가와 친했기 때문
'우리 민족사상 세번의 세계화 대세가 있었다. 우리 민족은 이 세번의 시기에 세계사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한민족의 첫번째 세계화는 7세기 말 신라 통일 이후 약200년간이다. 세계제국 唐과 결전하여 이김으로써 안동도호부(평양)를 한반도에서 추방하여 민족통일국가를 만들어낸 신라는 그 뒤 唐과 화해했다. 唐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시키면서 신라는 물질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달했고 신라인은 중국, 일본 등 당시 세계사의 본무대에서 당당하게 활동했다.
두번째는 13세기 약40년의 對蒙 항전 끝에 항복한 고려를 칭기스칸 제국인 元의 쿠빌라이가 부마국으로 대우하면서이다. 元의 황제들은 끈질기게 저항했던 고려가 존경스러워서 그랬는지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고 국체를 보존하게 했으며 고려왕을 사위로 삼고 고려인들을 우대했다. 당시 元은 세계 최강의 패권국가였다. 이 元과 친한 관계로 해서 고려 사람들의 행동 반경은 元나라의 통치 범위만큼 넓어졌다.
세번째는 1948년 이후 대한민국이 세계의 최강국인 미국과 동맹국이 되면서이다. 미국은 한국에 민주주의를 가르쳐주고 젊은 이들의 목숨을 4만 명 이상이나 바쳐 나라를 지켜주었으며, 전란으로 피폐한 한국에 군사 경제 기술 원조를 주어 근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미국은 또 근대화의 시기에 한국 상품의 수출시장이 되어주었고 민주화의 시기에는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여 권위주의 정부를 견제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자 우리보다도 더 걱정을 많이 해주었고 잘 하면 통일로 나아갈 때 결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反美세력을 누를 수 있다면).
이상 세번의 교훈은 간단하다. 세계의 최강 선진국과 친하면 우리도 세계화되어 활동공간이 넒어지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번영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인권적으로 최첨단을 걷고 있는 나라와 친구가 되려고 경쟁이 치열한 판에 거짓과 선동으로써 잘 나가던 친구관계도 끊어버리자고 나서는 세력이 있으니 이들이야말로 민족과 국가가 못되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악의 축이다.
특집: 2007 대한민국 再生의 길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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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2-19, 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