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와 武士道 정신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힘'을 분석해보면 복합성과 다양성을 내부적으로 통합한 지배층의 주체성이 보인다.
말(馬)과 배(船)를 잘 부린 신라인들
=신라의 저력-다양성과 통합성과 주체성의 결합

역사학자 李道學 교수(한국전통문화학교)가 쓴 '한국 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김영사)에서 필자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힘'을 이렇게 분석했다.

1. 고대국가의 국력 척도인 양질의 鐵鑛을 확보했다.
2. 국가를 위해 생명을 가볍게 던지는 무사도 정신.
3. 신라국왕의 政敎일치적 권위로 해서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4. 지배세력의 거듭된 교체와 다양한 세력의 포용으로 활력을 더해갔다.
5. 倭, 백제, 고구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려오면서 내부 단합이 강화되었고 항상 사회의 긴장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李 교수의 분석중에서 특히 공감이 가는 것은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단에 고립되어 있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개방체제를 유지하여 다양한 세력과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의 생동력과 참신한 기풍을 유지하였다는 지적이다.

신라는 朴-昔-金씨로 왕실이 교체되었다. 기록에 의한 것만으로도 중국 秦의 유민, 고조선의 유민, 낙랑군의 유민이 신라지역으로 몰려왔는데 서로 배타적으로 적대시하지 않고 6촌을 이루며 더불어 산다. 유물과 발굴을 통한 고고학적 견해에 따르면 신라지역에는 벼농사를 전해준 남방계 사람들과 북방 초원의 유목기마민족인 흉노계가 들어왔다.

박혁거세 재위 기간중 大輔라는 재상직에 있었던 瓠公(호공)이란 사람은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倭人이라고 한다. 왜족까지도 수용했다는 뜻이다.

신라는 또 북방초원루트를 통해서 서쪽 중앙아시아와 로마지역과도 교류했다. 당과 일본을 상대로 한 스케일이 큰 통일외교의 사례도 있다.

李道學 교수는 '여러 경로로 들어온 민족의 수혈에 의해 참신한 기풍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라는 흡수한 이방인이나 피정복민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다양한 세력을 포용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요컨대 신라는 백제, 고구려, 조선에 비해서도 내부질서가 민주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여야 포용이 가능하다. 신라의 힘은 북진 해양세력과 남진 북방세력의 교차지로서의 용광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에서 우러나온 통합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신라가, 海陸의 문물을 다 받아들여 자기것으로 만든 주체성과 개방성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주도한 사람은 태종무열왕과 그의 아들 문무왕, 그리고 金庾信이었다. 金庾信은 신라에게 망한 금관가야의 왕족 후손이었다. 신라는 피정복민을 노예로 삼지 않고 권력의 핵심세력으로 받아들여 통일대업의 主役으로 써먹을 만큼 포용성이 컸다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국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라의 해군력을 알아야 한다. 512년 지증왕 때 이미 이사부는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점령했다. 울산항에 인도에서 보낸 쇠를 실은 배가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의 관등중 波珍찬이란 직책은 '바다 칸(왕)', 즉 '海干', 즉 海王이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조선술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왜에 조선술을 가르쳐준 이나베(猪名部)는 신라사람이다. 倭와 唐의 사신들도 서해나 남해를 항해할 때 신라배를 많이 이용했다. 639년 선덕여왕 때 당나라 승려들이 신라 배를 타고 왜로 갔고 649년에는 왜의 승려가 신라 배를 타고 당나라에서 귀환했다. 658년엔 왜의 승려 두 사람이 신라배를 이용하여 당에 유학을 갔다.

583년 진평왕 때는 兵部에 船府署를 두어 선박사무를 관장하게 했고, 678년 문무왕 때는 병부, 즉 국방부와 동급인 船府令 한 명을 두어 선박사무를 관장하게 했다. 해양부가 국방부와 동급으로 독립한 나라는 동아시아에서 신라가 유일했다.

신라 해군이 고대일본 시절 오사카 부근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상륙하여 왜군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대함대를 白村江 해전에서 전멸시킨 당의 해군을 676년 기벌포에서 완패시켜 통일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 신라 해군이었다.

북방기마민족출신인 신라김씨 왕족은 말을 통해서 북방초원루트를 경유한 로마와의 문화 교류를 유지하였고, 배를 통해서는 왜와 당을 비롯한 외국과의 무역을 유지했다. 말과 배는 고대 사회에서 양대 기동수단이었다. 말로 상징되는 북방초원, 배로 상징되는 남방의 海原이 신라인의 활동공간이었다. 이 만한 스케일의 민족 무대를 갖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등장까지 기다려야 했다.

신라는 농업생산성과 기마군단, 그리고 철생산력과 해양력까지 두루 갖춘 입체적이고 다양한 국력의 組合을 갖고 있었다. 이는 남방계, 북방계 등 복합적 민족구성에 의한 시너지 효과로 설명될 것이다. 이런 복합성은 신라가 가진 주체성을 매개로 하여, 복잡성으로 전락하지 않고 높은 단합력을 발휘했다. 특히 신라는 전쟁이나 외교 등 국가적 위기 때 국내의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신라는, 참으로 수가 많고 단수가 높은 나라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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