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규슈의 사가현 아리타(有田) 마을에 가서 조선陶工 李參平의 자취를 보고 온 적 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붙들려간 조선陶工으로서는 가고시마에 정착한 심수관이 한국인에게는 더 유명한데 일본과 세계에 끼친 영향면에서는 李參平이 훨씬 크다. 李參平은 일본에 磁器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주었고, 일본은 이를 산업적으로 발전시켜 17세기 중엽부터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해서 유럽으로 수출했다. 李씨가 정착한 아리타는 그의 덕분으로 일본 磁器공업의 본산이 되었다. 이 산골마을의 인구는 1만4000명 정도인데 150개의 窯(요. 자기를 굽는 가마)와 250개의 판매점이 있다. 규슈陶磁문화관이란 박물관도 이 마을에 있다. 李參平을 기리는 神社에 가보니 자기로 만든 그의 坐像이 있었다.
공주사람인 그는 1598년 왜군이 철군할 때 지금의 사가현 일대를 영지로 하고 있던 나베시마 장군에 의해서 납치되어 끌려갔다. 나베시마는 이삼평으로 하여금 좋은 도자기를 만들도록 뒷받침을 잘해준 것 같다. 이삼평은 아리타에서 陶土를 발견하고 窯를 개량하여 일본에서 처음으로 磁器를 만들었다.
당시 세계에서 陶器를 만드는 나라는 많았으나 磁器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뿐이었다. 도기와 자기를 비교하면 이런 차이가 있다. 도기의 원료는 有色粘土이다. 자기의 원료는 백색粘土와 長石, 그리고 珪石과 陶石이 혼합된 흙이다. 도기는 색이 있지만 자기는 백색이다. 도기는 透光性이 없으나 磁器는 있다. 굽는 온도는 도기가 1200~1300도인 데 반해 자기는 1300~1400도이다. 두드렸을 때 자기는 아주 맑은 금속음이 난다. 여러 가지 점에서 磁器는 도기보다 한 단계 위의 고급품이다.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왜군의 주력은 규슈의 영주들이었다. 이들은 그 전부터 陶器생산에 관심이 많아 철군할 때는 경쟁적으로 조선도공들을 붙들어갔다. 이 조선陶工들에 의해서 磁器를 만드는 기술(成形과 燒成)이 일본에 도입되고 개량되었다. 아리타가 일본 磁器산업의 출발지가 된 것은 이삼평이 이 마을의 泉山이란 곳에서 陶土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했더니 아직도 노란빛깔 흙을 캐냈던 坑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이삼평 등 조선도공들은 규슈 지방에 새로운 窯(가마)의 방식을 소개하여 확산시켰다. 산비탈을 따라 계단식登窯를 만든 것이다. 이 가마는 불을 때는 연소실에 이어 처음 빚어낸 그릇을 넣어 굽는 燒成室을 적게는 5,6개, 많게는 30개 연결한 모습이었다. 일본에선 이 燒成室을 처음엔 대나무를 쪼갠 것 같은 割竹式으로 만들었으나 李參平 이후 천장을 돔으로 한 連房式으로 개량했다. 연방식으로 되니 방이 커져 큰 磁器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들어가면 아리타에서는 길이가 100m, 폭이 8m나 되는 거대한 登窯도 만들어졌다. 1637년 아리타 등 지금 사가(佐賀)현 일대를 다스리던 나베시마藩은 너무 많은 窯가 난립한다고 판단하여 826명의 도공들을 폐업시키고 11개의 가마터로 통합하는 구조조정을 했다.
아리타 야키로 일컬어지는 이곳 磁器산업이 비약한 것은 중국의 정세 변화 때문이었다. 1644년에 명이 망했다. 그때까지 유럽에 자기를 공급했던 것은 중국이었다. 1656년 淸은 海禁令을 발표하여 중국 상선의 私的인 항해를 금지시킴으로써 磁器 수출이 어렵게 되었다.
이때 전성기를 맞고 있던 해양국가가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벌인 끝에 승리한 네덜란드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로 진출하는 사이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와 동북아로 눈을 돌렸다. 국민 전체가 장사꾼이고 선원들인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무역에 國運을 걸고 있었다. 그들은 무역이 금지된 중국 대신에 일본 北규슈의 磁器를 구입하여 유럽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타이밍이 맞은 것이다. 이삼평 등 조선도공에 의해 도입된 磁器 기술이 해외 시장을 맞아 대량생산 체제로 들어간다.
1659년에 동인도회사가 유럽에 가져간 북규슈 <히젠(肥前)> 磁器는 3만3910개나 되었다. 아리타의 磁器업체들은 이마리(伊万里)항구를 통해서 국내외로 물건을 내보냈다. 도쿠가와 막부는 폐쇄정책을 썼으나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항구에만 네덜란드 商館을 허용하여 무역을 할 수 있게 했다.
1684년 淸은 磁器수출을 재개했다. 1705년 프러시아領 베를린의 샤로텐부르그城에 '磁器의 방'이 만들어지는데 일본 자기들이 많이 들어갔다. 이때 아리타에서 만들어 수출한 자기는 유럽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화려한 문양을 그려넣은 것이었다. 담백한 조선磁器에서 연유한 기술이 국제시장에 적응하여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리타 일대의 窯에서는 이 무렵 중국의 자기 기술을 많이 참고로 하는데 유럽 사람들이 오랫동안 중국 자기를 썼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1709년 독일에서 중요한 발명이 있었다. 독일의 강력한 영주인 작센의 選帝候(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때 투표권이 있는 영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磁器燒成法을 연구하도록 베트가라는 사람에게 시켰는데 그가 유럽에서 최초로 경질磁器를 구워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변화에 따라 일본의 磁器는 해외시장에서 밀리게 된다. 명치유신 이후에는 日人들이 오히려 유럽의 자기 기술을 배워오게 되었다. 1870년 사가藩은 독일 과학자 와그네르를 초청하여 유럽의 선진 窯業화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1873년 비엔나에서 있었던 만국박람회에 구경갔던 사가현의 두 도공들이 서양에서 배운 磁器기술을 일본에 소개했다.
李參平은 1655년에 죽었다고 한다. 일본에 붙들려 갔을 때 그의 나이가 20대였다고 해도 그는 80세 이상 장수했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끌려가지 않고 조선에 남았다면 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도공을 알아주는 일본 武士에 의해 납치되어가 무사들의 적극적인 지원하에서 자기 기술을 산업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李參平은 일본 磁器의 元祖로 기록되고 있다. 플라스틱 공업이 발전하기 전 磁器공업의 비중은 생활속에서 아주 컸다. 당시의 도자기 산업은 지금의 전자산업이나 석유산업처럼 가장 기초적인 생활산업이었다. 이 분야에서 혁신적인 기술을 일본에 가져온 李參平에 대해서 일본인들은 대접을 잘 해주고 있다.
일본의 지방을 돌아다녀보면 수많은 동상과 기념관을 만난다. 인물을 기리고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본인들이 非유럽국가에선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끼였다. 좋은 의미의 因果應報일 것이다.
일본 무사들은 전쟁도 잘했지만 원래 실용적인 생각을 가진 엘리트집단이었다. 따라서 전쟁을 하다가도 敵國 기술자를 만나면 이들을 죽이지 않고 우대하여 무기나 상품을 만들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領地를 윤택하게 했다. 한국의 창백한 선비들과 양반들에 눌려 지내면서 대접을 제대로 못받고 살았던 陶工들이 일본에 끌려가서 오히려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은 한국과 일본 지배층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실용파와 명분파의 차이이다.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기술과 장사를 경멸한 나라와 기술과 장사를 장려한 나라의 차이이다.
조선陶工 李參平은 왜 일본에서 날렸나?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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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3-02, 22: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