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 민주주의'
1963년 10월6일, 대구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는 고향에 돌아온 안도감 때문인지 상당히 고무된 기분으로 공격적인 연설을 한다.
<요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취임하기 전에 미국에 쫑아가서 원조를 얻어와 가지고 우리나라를 잘 사는 나라로 만들겠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약에 안될 때는, 안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아무리 미국과 우 리하고 관계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거지 구걸하는 원조는 받을 수 없다, 이겁니다.(박수).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의 경제를 재건할 수 있는 계획을 딱 세워놓고 미국 사람들에게 원조를 받을 때에는 우리에겐 이런 걸 원조해 주시오, 이런 걸 좀 해 달라, 그리고 소비 물자만 주지 말고 건설자재를 좀 달라, 먹고 당장 없어지는 것보다도 세멘트 한 포라 도 더 달라, 철근을 하나 더 달라, 그래서 공장이라도 하나 더 지어달라. 그런 걸 우리가 사전에 계획을 딱 지어놓고 미국 사람들과 협조를 해서 우리한테 꼭 필요한 것을 받자 이겁니다. (박수).
미국 시민들이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세금을 모아서 도와주는 이 원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규모있게, 계획적으로 효과있게 잘 써 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래야만 미국 사람들도 우리한테 도와준 보람이 있을 것이고, 우리도 또 우방국가로서 원조를 받아서 뒤에 무엇이 남아 야그 은혜에 대해서 보답할 수 있는 그런 길이 되는 것이지, 주면 똑 한 강물에 돌 집어 던지듯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전혀 모르는 이런 식 원조, 모래 사장에 물붓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면 없어지고, 주면 없어지고….
과거에 우리 구정치인들이 미국에서 수십억불의 원조를 받아다가 어디 다 썼습니까? 얻어올 적에는 그런 거지 식으로 얻어와서, 가져와서 는 돌아올 때는 국민들에게 노나준다 그러고, 돌아 온 뒤에는 저그들끼리 쏙쏙 노나 묵꼬, 뭐가 남아 있습니까? (와-하는 웃음과 박수).>.
그 날 저녁, 숙소인 대구 수성 관광호텔로 돌아 온 박정희 후보와 일행은 저녁을 마친 뒤 각자 다음 진주 유세를 위한 준비로 바빴다. 박 정희는 유세요원 이만섭(전국회의장, 현 국민회의 고문)을 부르더니 '여보, 이만섭씨. 나, 오늘 한솔(이효상)선생 처음 뵤는데, 사회를 참 구수하게 잘하시데. 내일부터 그 어른 모시고 합시다'라고 했다.
10월7일 진주 유세부터 박정희 후보는 검은 색이 옅게 깔린 안경을 쓰고연단에 오른다. 연단에서 인사를 한 박정희 후보가 막 연설을 시작 하려 는순간, 청중속의 한 노인이 손나팔을 만들어 고함을 쳤다.
'그, 박의장요! 안경 좀 벗어보소. 관상 좀 봅시더.'.
이 순간 이만섭 등 선거 유세반원들은 아연 긴장했다고 한다. 다들 박 의장의 성격을 아는지라 화가 나면 어떻게 될지 눈 앞이 캄캄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후보는 그 노인을 향해 '아, 그래요? 내 벗지요'라며 안경 을 벗었다. 얼굴엔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화를 꾹 참고 안경을 벗는 모습이 이만섭의 시야에 들어왔다. 박후보의 연설이 끝나자 고함쳐 안 경을 벗게 만든 노인이 다시 한번 고함을 쳤다.
'아, 그 관상 보이 대통령 되겠다.'.
이 말에 박정희의 얼굴엔 짧은 미소가 돌았다고 한다. 이만섭은 '옛 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참, 민주주의가 좋기는 좋다'고 혼잣말 을했다.
진주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는 임진 왜란 당시의 진주성 싸움과 6·25 를 예로 들면서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지킨 것은 군인과 민중이요, 나 라를 망친 것은 벼슬아치와 구정치인이었다고 비판했다.
박정희 후보는 또, 그러한 위선적·사대적 정치인이 주장하는 민주주 의는 서구에는 맞지만 한국의 토양에는 맞지 않는 '탱자 민주주의'라고 야유도 한다.
<여러분. 이 책상 위에, 마침 이걸 누가 갖다 놨는지 모르겠지만, 이 게 아마 탱자일 겁니다. ('유잡니다. 유자!'-관중석에서). 유잡니까? 아, 잘 몰랐습니다.
우리나라에 탱자라고 있지요? 어느 식물학자가 몇년 전에 일본에서 밀감나무를 이식을 해다가 자기 집에다 심어가지고 잘 가꾸어서 키워 놨 는데 몇년 지나고 난 뒤에 열매가 열렸다 이겁니다. 노오란 게 열렸는데 따 보니까 이것은 밀감이 아니고 탱자가 열렸더라 이겁니다.
종자는 틀림없이 밀감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나라에 갖다 심어보니까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토질이 다르고, 모든 환경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은 밀감이 안 열리고 탱자가 열렸다 이겁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에선 그것이 아무리 좋은 민주주의 도, 서구제국에선 가장 알맞는 그런 제도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우리 나라에 갖다가 완전히 밀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동안 우리가 이 나무에 알맞는 실질적인 여건, 지질 기타 여러가지 여건을 잘 만들어 줘서 어느 시기에 가서접목을 시켜서 이것이 완전히 우리나라에서 밀감이 될 수 있 도록 이걸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갖다 여기다 꽂아 놓는 것은 민주주의가 되지 않고 탱자 민주주의가 된다 이겁니다.(박수).
육니오(6·25)사변때 공산군이 우리를 침략했을 때 이것을 나가서 총 칼을 들고 목숨을 걸고 싸워서 나라를 지켰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당 시의 우리 국군 장병이요, 자진해서 군에 입대한 우리 애국 시민, 학생, 학도병, 또는 저 시골 농촌에서 학교도 가지 못하고 지게 목발을 두드리 던 불우한 청년들이 전부 끌려 나와서 지게 목발 대신에 총칼을 들고 전 방에서 공산당과 싸워서 이 나라를 지켜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소위 구정치인, 과거에 정치를 했다는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할 줄 아는 것은 우리뿐이고,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우리고, 느그는 전부 가짜고, 이질민주주의고, 위험한 민족주의고, 심지어 나아가서는 빨갱이고, 공산당이고 이렇게 떠들고 돌아 다닙니다.
지금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고 있는 전몰 장병들은 아직 한번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우리뿐이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누가 진짜로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수호해 왔고, 누가 거짓말, 껍데기 민주주의를 해 왔느냐…국민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군사문화
1963년 박정희 대통령 후보의 연설을 녹음테이프로 들어본다. 그의 연 설은 기교가 없고 투박하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던 기자는 10월9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있었던 공화당 유세를 들으러 갔다. 박의장의 연설은 한 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선동과 우스개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정치연설을 듣는 사람들은 통쾌한 공격과 재미를 기대한다.
박후 보는 그냥 차분하고 깐깐하게 연설하니 청중은 흥분하거나 웃을 일이 없었다. 박정희는 또 대중 앞에 나타나 연설하는 것이 뭔가 어색한 듯 몸에 맞지 않았을뿐 아니라 수줍어하는 표정이었다.
36년이 지난 뒤 다시 듣는 박정희의 연설은 달랐다. 그의 연설에는 구체성과 실질이 있고 비전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열정이 느껴졌다. 그가 연설에서 약속한 것이 대부분 실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금 그의 연 설은 당시의 청중이 아니라 역사를 향해서, 미래를 향해서 토로한 웅변이 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5대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군사문화의 효율성과 복종심, 그리 고 희생정신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함석헌-이낙선 지상 논전에서도 잘 드러났지만 이 선거는 군사문화의 실천력과 민간문화의 명분론이 대결한 장이기도 했다. 10월8일 마산 유세에서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 어떤 소위 우리나라의 자칭 지도자라는 사람이 아마 이 고장에 도 다녀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선거전이 벌어지기 전부터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군인은 군복을 벗어도 한 3년 동안은 때가 벗겨지지 않는다, 군대 갔다 온 놈은 전부 집에 앉아서 한 삼년 동안 물을 끓여놓 고 때를 벗겨라, 이겁니다. 여기 지금 군대 갔다온 제대군인들이 많이 계 시죠. 완전히 군복을 벗고 민정에 참여하더라도 이것은 옷만을 바꾼 군정 이다, 그러니까 우리 야당 구정치인들이 정권을 잡아야겠다. 이거 여러분 들이 혹 정신을 못 차리면 감쪽같이 속아넘어갈지도 몰라요. 군인이 군대에가서 무슨 지독한 짓을 했길래 삼년 동안 벗겨야 할 때가 묻어 있습니 까.
저부터 수십년동안 군에서 복무를 했고 군에서 잔 뼈가 굵었지만 군인 이 군대 가서 배운 것은 또한 여러분들 자제가 군에 입대해서 2-3년 동안 배우는 것은 그야말로 앞으로 국민으로서 건전한 정신적인 기초를 군대에 서 닦아주는 것입니다. 자기 맡은 임무에 대해서 충성을 다하자, 국가에 대해서 충성을 해라, 상사의 명령에 대해서 복종을 해라, 동료, 단체를 위해서는 희생정신을 발휘해라, 모든 일에는 감투정신을 발휘해라. 이런 모든 것은 국민들이 모두 갖춰야 될 훌륭한 정신적인 덕목입니다. 그런데 뭐, 모처럼 배운 것을 집에와서 뭐, 삼년 동안 또 벗깁니까(와 하는 폭소). 그리고 나서 구정치인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얼렁뚱땅하니 그저 남을 속이기나 하고 사기나 하고 협잡이나 하고 하는 그런 재주를 또 배우란 그말입니까?>.
10월9일 부산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는 낭만에 빠질 여유도 없는 것이 조국의 현실이라고 했다.
<어제 마산에서 유세를 마치고 부산으로 자동차를 타고 왔습니다. 연도 의 풍경은 대단히 아름다웠습니다. 오곡백과가 대풍년을 이루었습니다.연 도에는 코스모스가 한없이 피어서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단히 부드 러운 기분을 주었습니다. 한 곳을 지나오면서 보니까 땅에 납작하게 붙은 쪼매난 오막살이 주막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코스모스가 피었는데 그 코 스모스 키가 오막살이 집보다 오히려 더 클 정도로 납작하게 붙은 주막집 입니다. 거기 어떤 농부 같은 한 두 분이 앉아서 막걸리를 이래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맑고 높은 가을하늘, 오막살리 주막집, 코스모스, 두 사람의 농부, 막걸리. 이 광경이 아주 낭만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것을 하나의 낭만이라고 듣고 버려둘 수 없는 심각한 현실이란 문제가 있 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금년과 같이 이렇게 풍년이 들었더래도 우리나라 는 식량 하나 자급자족을 못하는 그런 형편에 있다 이겁니다.>.
이 선거를 취재하러 한국에 온 재미동포 언론인 피터 현은 그때 뉴욕 헤랄드 트리뷴 특파원이었다. 그는 윤보선 후보를 먼저 인터뷰했다. 피터 현의 집안과 윤보선의 집안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피터 현은 장면정 부시절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일하다가5·16쿠데타가 터 지자 '장면 정부 임명자'로 찍혀 면직되었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악감정 을 품고 왔다.
피터 현은 윤보선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대단히 실망했다. 국가운영에 대한 비전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란 질문에 윤보선은 '내가 대통령이 당선되면 모든 게 잘 될 것이 다' '그런 것은 대통령이 당선된 뒤 생각해볼 문제이다'는 식으로 대답하 여 기사화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피터 현이 1963년10월6일자 뉴욕 헤랄드 트리뷴에 쓴 선거관련 기사에도 윤보선의 말은 한 마디만 소 개되어 있다.
'나는 군사정부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한 사람이고 박정희 일파가 몰고온 해악을 치유할 능력이 있으므로 출마했다.'.
피터 현은 박정희 후보가 대구에서 유세할 때 따라내려가서 그와 인터 뷰했다. 박의장의 집권에 의해 실직이란 피해를 입었던 피터 현은 국가 건설에 대하여 설명하는 박정희의 진지성과 열정에 감복하여 선입견이 바뀌었다. 그는 사정을 끊고서 윤보선보다는 박정희에게 유리한 기사를 쓰게 된다.
<박정희 傳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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