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이가 죽을 때까지 간직했던 비닐봉지엔

딸의 屍身(시신)을 집에 가져다 헤쳐보니 가슴속에는 깨끗한 비닐봉지에 정성 들여 골라놓은 배 껍질과 배 송치(편집자 注:씨가 들은 속), 명태껍질, 돼지뼈 한 개가 들어 있었다.
*1999년 7월호 월간조선에 실렸던 북한주민의 手記중에서 뽑은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면 자리에 누워서 童心(동심)의 세계를 펼쳐갔다. 우리 사회에서 일명 「리론식사」라고 하는, 말로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밥에 고깃국을 먹어보았던 자기의 짧은 일생들을 끝없이 끝없이 되풀이하며 아버지가 장거리에서 사주었던 송편에 대하여 金日成의 생일날에 맛보았던 「선물」 사탕과자에 대하여…. 언젠가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두부장과 콩나물에 대하여…. 굶주리고 헐벗었던 모든 것은 다 버리고 잘 먹고 행복했던 짧은 인생을 간추려 맥이 빠져 잠드는 순간까지 재잘거리는 것이었다. 이런 숨막히는 생활의 세파 속에서 누이 동생이 굶어죽었고 영양실조로 허덕이던 어머니마저 나의 곁을 떠나갔다.
오랜 기간을 대용식품으로 이어온 이 나라의 사정은 우리 집에서 애지중지하던 나의 아들을 걷어갔다. 초인간적 힘으로 버텨오던 아내가 아들을 붙들고 통곡하다 그 자리서 숨져버렸다.
아내와 아이를 붙들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나 굶기는 피차일반이던 마을에서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묻어주려고 나서지 않았다. 묻어주는 일도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해야 나서는 세월이 그때였다.
기울어져 가는 저녁해처럼 이제 이 家門(가문)에 살아남을 자가 누구냐?이번에는 지옥에서 누굴 데려갈 거냐? 정말 시간문제였다.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두 딸애와 내가 우리 가문의 유일한 재산이었으니 그때 나의 심정은 무엇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나는 찬장 서랍에 있는 쥐약봉지를 생각했다. 아이들과 함께 먹어버리고 다 함께 죽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파리한 얼굴에 눈확이 꺼져 들어간 흐릿한 눈길로 행여나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딸들을 보니 차마 내 손으로 죽이자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범도 제 새끼는 안잡아 먹는다는 말이 그날처럼 나에게 공감을 주어보기는 일생 처음이다.
우리 셋 중에서 죽으려면 내가 죽게 하고 저애들은 살아남게 해 주십사 하고 생각하였다. 그후 우리의 목숨은 끈질기게도 붙어 있었다. 그날이 잊혀지지 않는 1995년 11월15일이었다.
막내딸 ○○이가 비칠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변소에 가겠지 하고 혼미상태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막내딸이 방긋이 웃는다.
『아버지, 아- 하세요』 하길래 멋도 모르고 입을 벌리는데 딸애의 고사리같은 작은 손이 펴지는 순간 쌀알 20 여알이 손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쌀알을 보고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저 건너집 돼지우리 옆에 볏짚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펼쳐보니 벼알이 몇 알 있더라는 것이었다.
딸애는 그 벼알 한 알 한 알을 손톱으로 까서 모아 가지고 나를 깨운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걸 잡숫고 일어나야 우리가 산단다. 나는 딸애의 그 말에 심한 가책을 느끼며 그 귀여운 딸애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의 딸애가 정말 이 미련한 아버지보다 나았다. 나는 그 쌀알을 막내가 큰딸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기살기로 거부하고 나섰다. 내가 먹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쌀알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가 없었으니…. 그날 이 지구촌 위에서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쌀알 나누어 먹는 신기한 장면이 우리 집에서 연출되었다.

그날 밤. 나는 아이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생겼다. 종전에 죽기만을 기다리던 방식에서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위하여 무슨 짓인들 다 해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곰곰 누워서 생각하니 아파트 어느 1층집에 쥐이빨 강냉이종자를 매달아 놓은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아파트 골목을 누비다가 끝내 그 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창문을 만져보니 다행히도 유리가 아닌 비닐방막이였다. 허기에 지쳤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먹이를 구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설렜다.
나는 준비해 가지고 갔던 칼로 비닐을 째고 옥수수종자를 움켜 쥐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의 흥분으로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의 그 쾌감을 나는 적절히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艱難辛苦(간난신고) 끝에 옥수수종자를 떼내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비칠거리기는 했어도 가벼웠다. 이것이 내 일생에 처음으로 내짚은 도적생활이었다.
이날 밤 우리 집에서는 근간에 보기 드문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눈물은 내려오고 밥술은 올라간다」는 격언이 틀리지 않았다. 연달은 초상으로 푹 꺼져 들어갔던 생기가 옥수수종자 다섯 이삭이 생기면서 집안에 和氣(화기)가 돌았다. 죽은 건 죽은 것이고 산 놈은 살아야 한다는 삶의 요구가 우리들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나는 옥수수종자 한 이삭을 아이들에게 날 것으로 먹도록 배려해 주었다. 음식이 익는 동안 아이들의 고통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였는데 두 딸애는 그 돌덩이 같은 옥수수알을 맛있게 씹어먹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아남은 긍지로 오랜만에 웃고 떠들었다.
이때부터 우리 세 식구는 빌어도 먹어 보고 훔쳐도 먹어보고 땅에서 주워도 먹어보면서 신성천~고원, 원산~단천 등지로 방랑하면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민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직접 목격하면서 파리 목숨 같은 인생을 유지하였다.
이 길 위에 고원에서 맏딸이 숨을 거두었고 그후 순천역의 쓰레기장에서 막내딸애의 시체가 발견되어 나를 질식케 하였다. 막내딸은 마지막까지 나의 곁에 남아 아버지께 충직했던 나의 혁명동지였으며 이 세상에서 나를 고아로 만들어 버린 유일한 마지막 혈육이었다. 딸의 屍身(시신)을 집에 가져다 헤쳐보니 가슴속에는 깨끗한 비닐봉지에 정성 들여 골라놓은 배 껍질과 배 송치(편집자 注:씨가 들은 속), 명태껍질, 돼지뼈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아마도 나를 만나면 함께 먹으려고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건사했을 딸애를 생각하여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딸애를 안장하고 그 비닐봉지를 입가에 얹어 주었다. 그때 나의 막내딸의 나이가 12세였다.>

*한국에선 매년 약400만t의 음식쓰레기가 발생한다. 이는 북한주민들을 모두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양이다.
*김정일은 1990년대 후반 스위스 은행 등에 약40억 달러의 비자금을 숨겨놓고 있었다. 연간 3억 달러만 쓰면 연간 200만t의 옥수수를 수입하여 북한주민들을 한 사람도 굶겨죽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식량구입엔 1달러도 쓰지 않았다.
*2001년 3월 김정일의 日食 식단표: 감자 살라드, 야자상어날개탕, 물고기목이버섯술찜, 자라함찜, 다랑어도로, 뱀장어카비아, 상어날개소라탕, 비둘기간장찜 등등(일본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의 책에서 인용). 병당 2000달러 하는 '타임레스'(Timeless)라는 꼬냑의 최대 수입자는 김정일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지난 10년간 김정일 정권에 약100억 달러의 금품을 지원했다. 연간 5억 달러만 식량구입에 썼더라도 북한주민은 굶지 않았다. 북한정권에 제공되는 쌀은 군대와 노동당 간부들에게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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