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영혼은 살아 있는가
인간이든 조직이든 靈魂(영혼)이라 불리는 것이 있을 때 고귀한 존재가 된다. 靈魂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육체와는 다른, 그러나 육체에도 깃들이어 있어서 생명체의 제반활동을 지배하며, 죽은 후에도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는 정신적 실체'이다. 영혼이란 '영속성이 있는 최고의 정신'인 셈이다. 영혼은 이성과 감성을 아우르고 氣魄(기백)과 理想(이상)을 합친 높은 정신력의 실체이다. 정신의 사령탑인 셈이다.
위인들과 선진국의 행동에서 이런 魂의 實在(실재)를 느낄 때가 있다. 미국의 건국이념,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천년간 공화정을 유지해가면서 정치적 군사적 자주성과 함께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베니스의 尙武(상무)정신, 李舜臣(이순신)과 朴正熙(박정희)의 최후, 그리고 신라 지도부의 對唐 결전의지가 높은 정신력, 즉 혼의 實在를 느끼게 하는 사례이다.
신라가 唐과 함께 손잡고 백제를 멸망시킨 뒤의 일이다. 唐이 여세를 몰아 신라마처 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태종무열왕은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한 신하가 唐과 싸우자는 강경론을 냈다. 무열왕은 '唐나라 군사가 우리의 적을 멸해주었는데 도리어 함께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소?'라고 했다. 이에 金庾信(김유신)이 말했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신라는 개, 唐은 주인으로 비유되고 있다. 신라는 唐에 신세를 졌고 그것에 감사하지만 唐이 신라를 우습게 여기면 그런 唐과는 정면 대결하여 정체성을 지켜내어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 唐은 전성기의 세계제국이었다. 신라 지도부는 그런 唐과 싸워서라도 지켜내어야 할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원동력이 된 국가적 氣魄, 즉 魂이었다. 이런 魂이 있는 나라는 어떤 모습인가.
唐軍의 최고 사령관 蘇定方이 귀국하여 唐 고종에게 보고하니 고종은 '어찌하여 신라마저 치지 않았는가'라고 추궁했다. 蘇장군은 이렇게 해명했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仁), 백성을 사랑하며(愛), 그 신하가 충성으로(忠) 나라를 섬기고(事), 아랫사람은 윗사람 모시기를 父兄(부형) 같이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靈魂(영혼)이 있는 나라는 仁愛忠事, 즉 어짐 사랑 충성 섬김의 기풍이 있는 사회라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예에서 보듯이 한 국가의 정신력은 지도층의 어짐과 사랑이 백성들의 충성과 섬김을 불러낼 때 그 나라의 氣魄(기백), 또는 영혼으로 승화된다. 세계사에서 일류국가를 만들었던 민족은 이런 높은 정신력을 가졌다. 그런 나라의 쇠퇴는 이런 정신력의 쇠퇴와 함께했다. 미국의 魂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플리머스에 상륙했던 청교도 정신으로 상징된다. 메이플라워 정신은,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고 그렇게 얻은 자유로써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미국의 독립정신으로 발전되었다.
그리스의 인간중심 사상, 로마의 명예심, 프랑스의 인간존중, 네덜란드의 관용정신, 독일의 野性(야성)과 기율, 일본의 武士道(무사도), 영국 紳士道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 신라 화랑도의 세속5계 가운데 특히 殺生有擇(살생유택)의 윤리가 이들 일류국가의 정신적인 表象(표상)이다.
통일신라에 이어 민족사상 두번째로 일류국가가 되려 하는 대한민국의 魂은 무엇인가. 지금은 폐기되었지만 영원히 유효할 국민교육헌장의 한 귀절이 생각난다.
<길이 후손에게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자유통일과 선진조국 건설이 역사적 사명임을 자각한 국민들이 신념, 긍지, 근면, 슬기로 무장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 한국인의 念願(염원)이다. 이 염원을 '이론화된 신념', 즉 理念(이념)으로 승화시킬 때 국가적 행동 윤리와 국민적인 正義感(정의감)이 나온다. 이 행동윤리의 중심에는 '反共자유'가 자리잡고 있다. 一流국가를 건설하는 길을 막고 있는 金正日과 從金(종김)세력을 치우고 남한에 이어 북한까지 민주화함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 그 자유속에서 행복한 삶을 함께 추구하자는 것이다.
국가의 魂(혼)은 국민 각자에게는 정의감과 희생정신으로 구체화된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의 두 副사령관은 각자의 아들(관창과 반굴)을 먼저 희생시켰다. 6.25 기습을 당하고도 자유의 신봉자가 되어 있던 국군은 후퇴할지언정 조직적인 항복이 없었다. 반면 북진 때 북한군은 조직 자체가 붕괴하여 부대 단위로 항복했다.
한 국가의 魂은 대통령 등 지도부에 의하여 표현된다. 훗날 역사는 李承晩, 朴正熙 두 대통령을 새로운 민족혼의 건설자, 金泳三, 金大中, 盧武鉉 세 대통령을 민족혼의 파괴자로 기록할 것이다. 李承晩가 주도한 국민국가의 구조와 이념속에 朴正熙의 근대화와 自主국방 의지가 채워지면서 한국인은 선진국 건설을 목표로 내세울 만큼 기백과 실력을 두루 갖추게 되었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魂은 허무하다.
金泳三은 현대사의 총체적 부정으로써, 金大中은 민족반역자 金正日에 대한 굴종으로써, 盧武鉉은 저급한 言說로써 민족의 기백과 긍지를 깎아내리고 그 영혼을 더럽혔다. 물질적 수준은 一流국가 대열까지 왔으나 이 세 대통령의 무식하고 반역적이며 저질스러운 행동에 의해서 대한민국의 정신력이 망가지고 있다.
국가원수란 자가 동족 300만명을 사실상 굶겨죽인 독재자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고 노예상태의 동족에 대해서는 냉소적 태도를 취하는가 하면 이 독재자를 타도하려는 애국자들을 적대시해도 국민들이 행동하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 개판'이 되었다. 국가의 영혼은 교양 있는 국민들과 신념 있는 지도층의 합작품인데, 좌파정권하에선 지도층이 솔선해서 국민교양을 파괴하고 있다.
국가의 魂은 理想, 正義, 용기를 핵심가치로 한다. 그 혼을 지켜가야 할 대통령이 영혼의 오염자가 되고 있고 야당대표도 金正日에 대해서는 비판 한 마디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一流국가를 만들어낼 것인가, 우리의 고민은 실로 크다.
국가혼 또는 민족혼을 간직해가야 할 책임을 진 이들이 국가엘리트층이다. 국가의 魂은 문학, 철학, 종교, 역사, 정치, 언론 등 주로 人文的 교양을 통해서 보존되고 발전된다. 국가魂을 구체화해주는 것은 언어이다. 그 국가지도층이 사용하는 말과 글의 수준이 魂의 수준이다. 국민들의 말과 글이 대체로 정확하고 깊이 있고 아름다워야 그 속에서 위대한 국가魂이 우러나온다.
한국어는 70%의 漢字語와 30%의 한글어로 구성되어 있다. 常溫, 可水分解, 傳記 같은 한자어는 상온, 가수분해, 전기로 써서는 정확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심한 경우엔 암호가 되어버린다. 30년 이상 계속되어온 한글전용은 70%의 漢字語(대부분이 개념어, 고급어, 기술용어이다)를 암호화함으로써 한국인의 언어생활을 半身不隨 상태로 만들었다. 언어가 半身不隨(반신불수)가 되었다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과 魂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다.
대통령의 말이 저질스러워지고 언론의 기사문장이 요란스럽기만 하고 생각을 깊게 하는 책이 드물고 오히려 생각을 어지럽히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역사, 문학, 철학이 輕視되고 게으른 젊은이들의 취향에 영합하는 어른들이 많이 생기고 신문 訃告란에서 이름이 한글로 표기되고 名文이 사라지고 있다. 국민교양의 수준이 낮아지고 국가魂이 약해진다는 증거들이다. 국민교양과 지도층의 국가魂이 결합될 때만 한국은 자유통일을 넘어서 一流국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교양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자유통일을 이룩하며 一流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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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은 1964년 8월 아래에서 써 올린 국방대학원 졸업식 연설문 초안을 다 읽고는 석장을 추가했다. 그가 만년필로 직접 쓴 추가분은 이러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둡고 절망적인 면이 많이 있는 반면에는, 밝고 희망적이고도 고무적인 면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용기와 의욕을 가지고 분투해야 할 시기라는 것을 명심해주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졸업생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꼭 여러분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세대에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서 우리 다 같이 평생에 소원이 있다면, 우리들 세대에 우리의 조국을 근대화해서 先進열강과 같이 잘 사는 나라를 한 번 맨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서구라파인들이 그들의 조국을 근대화하기 위해서(문예부흥이고 산업혁명이요 하고: 산업혁명으로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동안) 피 땀 흘려 노력할 때에 우리 조상들은 케케묵은 당파싸움이나 하고 兩班 자랑 하느라고 세월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또 2차대전 후 20년 동안 패전의 苦盃를 마신 패전국가들이 잿더미속에서 피눈물을 흘려가며 그들의 조국을 재건해서 오늘날 그들은 전쟁 전보다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 후 20년 동안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與野정치싸움만 하다가 또 다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앞으로 5년 내지 10년은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기회를 또 다시 놓친다면 우리에게는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를 또 다시 놓친다면 우리는 영원히 후진국가란 낙인을 벗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생산과 건설에 집중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기간동안은 우리는 모든것을 참고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맡은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용기와 결심을 가지고 분투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합니다>
朴 대통령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데는 時限이 있다는 강박관념을 가졌다. 시간에 쫓기는 기분으로 일한 사람이 그였다. 1970년대 朴 대통령이 유신체제를 만들어 정치 비용을 줄이고 국가조직을 효율화하여 생산성을 극대화한 것은 이 시간관념과 직결된다. 1970년대에 한국은 앞서가던 말레이시아, 태국 등을 추월하여 중진국으로 도약하였고, 선진국 문턱까지 갈 수 있는 디딤돌을 만든다. 1970년대를 허송한 나라는 다 선진국 進入경쟁에서 탈락했다. 1970년대에 민주화가 시도되었더라면 사회 혼란속에서 한국의 활력과 동력은 타격을 받아 민주화도 경제발전도 실패했을 것이다.
'남과 북은 생존투쟁중'
유신체제를 만든 朴대통령이 혼신의 氣力을 쏟아 한 연설이 1974년10월1일 국군의 날 유시이다. 아내를 북한정권이 보낸 암살자에게 잃은 그로서는 정예국군의 대오를 앞에 둔 이 자리의 의미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는 한국이 처한 상황을 생존투쟁으로 규정했다.
<우리 국군의 역사는 건군 초창기부터 공산침략자들과의 투쟁의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도 그들과 투쟁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또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며, 일보도 양보할 수 없는 생존투쟁입니다>
그는 '유신체제는 공산침략자들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라고 단정했다. 그는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도 알고, 또는 절제할 줄도 아는 슬기를 가져야만 우리는 큰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우리도 남과 같이 주어진 자유라고 해서 이를 다 누리고싶고, 또 남이 하는 것은 다 하고싶고, 그러고도 자유는 자유대로 지키겠다고 한다면, 또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환상적인 낭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다른 자리에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기강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지만 북괴가 노리는 국론분열을 막아 더 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실정에 맞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朴대통령은 또 '민주주의는 어떻게 보면 공자가 말씀하신 中庸사상과 상통하는 것이며 전제군주식 억압정치도 나쁘지만 무절제한 자유방임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中庸의 핵심은 온건한 균형감각일 것이다. 朴대통령은 유교적 교양위에서 균형감각이 있는 인격을 쌓아올린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文武를 통합한 균형미를 바탕으로 하여 엄격하면서도 多感하고 이론과 실천을 겸비하여 사물을 항상 주체적으로, 균형적으로 보려고 한 그는 중간선을 택하는 기회주의자의 균형이 아니라 심사숙고 끝에 대담한 결단을 내린 뒤 우직하게 밀고 가는 隱忍自重型의 균형감각 소유자였다.
朴대통령은 한산도의 戍樓(수루)를 둘러보다가 '금연'이라고 쓴 패말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루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 보고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회상하며 담배 한 대쯤 피우고싶지 않겠소? 금연보다 오히려 재떨이를 비치해두도록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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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國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唐의 체면을 세워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아야 하는 新羅의 고민을 담은 아주 무게 있는 외교문서이기도 하다.
*三國史記 文武王條에 실린, 唐將 薛仁貴의 편지에 대한 문무왕의 답서는 신라의 强首가 썼다고 추정된다. 이 문서는 唐에 대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할 말을 다한 名文이다. 그 내용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라 史料로서 가치가 높다. 신라는 세계 최대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면서 唐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도 國魂과 國益을 잃지 않아야 했다. 져서도 안되고 전쟁을 확대시키셔도 안되는 新羅의 고민을 담은 아주 무게 있는 외교문서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사의 최고문장으로 꼽는 이들도 있다. 특히 '유인원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新羅의 育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국가(당)의 은택은 비록 무한하나 신라의 충성도 또한 애닮다 할 것이오'라고 쓴 대목이 가슴을 친다. 민족혼이 살아 숨쉬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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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답서에 이르기를, “선왕이 정관(貞觀) 22년에 당에 입조하고 태종 문황제(太宗 文皇帝)의 은칙(恩勅)을 받았을 때 ‘짐(朕)이 지금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너희 신라가 양국에 끼어 매양 침략을 당하여 편안한 날이 없음을 가엾게 여겨서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고 옥백과 자녀는 나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니,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를 모두 너희 신라에 주어 길이 안일케 하고자 한다.’하고 계책과 군기(軍期)를 정해 주었소. 신라의 백성이 이 은칙을 듣고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쓰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사를 끝내지 못한 채 문제(당 태종)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지금의 황제(고종)가 즉위하여, 다시 전은(前恩)을 계속하고 자주 애호를 입히니 오히려 지난날보다 더하여 형제 및 아이들이 보물과 관작을 받게 되었소. 영총(榮寵)이 지극하여 옛날에도 없었던 일인지라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진다 해도 사역의 용무에 다함을 바라며, 간과 뇌를 땅에 발려서라도 만분의 일이나마 갚으려고 하였던 것이라오.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성상께서 선왕의 뜻을 마치지 못한 것을 느끼시고, 지난날의 유업을 달성코자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띄우고 수군을 크게 일으켰는데 선왕이 나이 늙고 힘이 약하여 행군하기 매우 어려웠으나, 전은에 감격하여 힘써 국경에까지 나아가 모(某: 문무왕)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대군을 응접하게 하였던 것이오. (그리하여) 동서(東西)가 향응하고 수육(水陸)이 함께 나아가 수군이 겨우 강어귀에 들어올 때 육군은 이미 대적을 깨뜨리고 양군이 함께 왕도(王都)에 이르러 한나라를 평정하였던 것인데, 평정 이후에 선왕은 소(정방) 대총관과 함께 평정하여 한병(漢兵) 1만 명을 머물게 하고, 신라 역시 왕제(王弟) 인태(人泰)를 보내어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함께 웅진을 지키게 하였던 것이오. 대군(大軍)이 돌아간 뒤 적신(賊臣) 복신(福信)이 강서(江西)에서 일어나 패잔병을 모아서 부성(府城)을 포위하면서 먼저 바깥 기지를 깨뜨려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부성을 공격하니 거의 함락 지경에 놓여 있었으며, 또 부성과 가까운 사방에 성을 만들어 지키므로 부성에 출입할 수 없었소. 모(某)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포위를 뚫고 사면의 적 성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군량을 운반하여 드디어 1만 명의 한병(漢兵)으로 하여금 호구의 위난을 면케 하였고, 머물러 지키는 굶주린 군사로서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는 일이 없게 하였던 것이오.
6년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이 차츰 많아져 강동의 땅을 침범하여 빼앗으므로, 웅진의 한병 1000명이 적을 치다가 적에게 패배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패배한 이래로 웅진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달라는 청이 밤낮을 계속하였소. 신라에서는 괴질이 유행하여서 병마(兵馬)를 징발할 수 없었어도 쓰라린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많은 군사를 일으켜서 주류성(周留城)을 포위하였으나, 적은 (아군의) 병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병마만 크게 상실하고 이득 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이 일시에 배반하여 복신에게로 소속되고, 복신은 승세를 타서 다시 부성을 포위하였소. 이로 인하여 곧 웅진의 길이 끊기어 소금 된장이 다 떨어졌으니 곧 건아를 모집하여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곤경을 구하였소. 6월에 이르러 선왕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칙지에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돌아오라하였고 함자도 총관 유덕민(劉德敏) 등이 와서 칙지를 받들고 신라를 보내어 평양으로 군량을 공급케 하였소. 이때 웅진의 사인(使人)이 와서 부성의 위급함을 알리니, 유 총관은 모(某)와 더불어 상의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만약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만약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한병이 곧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였소. 유 총관은 드디어 모와 함께 먼저 태산성을 치고 옹(?)산성이 함락되자 이내 웅진에 성을 쌓아서 웅진의 도로를 개통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에 군량이 다하였으나 먼저 웅진으로 운송한다면 칙지를 어길까 두려웠고 만약 평양으로 운송한다면 굳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 염려가 있으므로, 노약자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정병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노상에서 눈을 만나 인마(人馬)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용삭(龍朔) 2년 정월에 이르러 유 총관은 신라의 양하도 총관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에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月〕을 이어 비가 내리고 풍설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군량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므로 신라의 병마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노상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행군(行軍)이 호로하(瓠瀘河)에 이르자 고구려 병마가 얼마 후 쫓아와 언덕위에 진을 치므로, 신라 병사는 오랫동안 피로하였으나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 것이 두려워 적이 물을 건너기 전에 먼저 건너가 선봉과 잠깐 교전하였는데, 적병이 무너지니 드디어 군사를 거두고 돌아왔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되어 웅진 부성에서 자주 곡식 종자를 청하므로 전후에 보낸 것이 수만여 가마였소. 남으로 웅진에 보내고 북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우마(牛馬)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의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한병은 양식의 여유가 있었소. 또 머물러 지키는 한병은 집을 떠난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에게 권과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주었소. 도호(都護) 유인원이 멀리 와서 외로운 성을 지키자니 사면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한병이 4년을 신라에게 의식하였으니, 인원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한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국가(당)의 은택은 비록 무한하나 신라의 충성도 또한 애닮다 할 것이오.
용삭 3년에 이르러 총관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부성을 구원하러 올 때 신라의 병마 또한 함께 치기로 하여 주류성(周留城) 아래 당도하였소. 이때 왜국의 해군이 백제를 원조하여 왜선 1000척이 백사(白沙)에 정박하고 백제의 정기병은 언덕 위에서 배를 지켰으므로, 신라의 날랜 기병이 한(漢)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을 부수니 주류성은 용기를 잃고 드디어 항복하였소. 남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사를 돌이켜 북을 치자 임존성(任存城) 하나만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기에 양군이 협력하여서 하나의 성을 쳤으나 굳게 지키어 항거하니 깨뜨리지 못하였소. 신라가 곧 돌아가려는데 두대부(杜大夫)가 말하기를, ‘칙명에, 평정된 후에는 함께 회맹하라 하였으니 임존성만이 비록 항복하지 않았다 해도 함께 맹세해야 한다.’ 하였으나, 신라는 말하기를, ‘칙지에, 평정된 후에 서로 회맹하라 하였는데 임존성이 항복하지 않았으니 이미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또 백제는 간사하여 반복이 무상하니 지금 서로 회맹한다 해도 뒤에 후회할 것이다.’하여 맹세를 정지할 것을 주청하였소.
인덕(麟德) 원년에 이르러 다시 엄한 칙지를 내려 맹세치 않은 것을 책망하므로 곧 웅령(熊嶺)으로 사람을 보내어 단을 쌓아 서로 회맹하고 회맹한 곳을 양국의 경계선으로 삼았소. 회맹의 일은 비록 원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감히 칙지를 어길 수 없었소. 또 취리산(就利山)에 단을 쌓고 칙사 유인원을 상대로 삽혈로써 맹세하고 산하(山河)로써 서약한 후 경계를 긋고 푯말을 세워 길이 강계를 정하니 백성들이 거주하여 제각기 산업을 영위하였던 것이오.
건봉(乾封) 2년에 이르러 대총관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요동(고구려)을 친다는 말을 듣고 모(某)는 한성주로 가서 군사를 보내어 국경으로 모집하였소. 신라 병마만이 홀로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먼저 정탐을 세 차례나 배를 태워 보내고 대군의 동정을 살피니, 정탐이 돌아와 알리기를, ‘대군이 아직 평양에 도착지 않았습니다.’ 하므로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도로를 개통하고 대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소. 그 성이 차츰 함락할 때 영공의 사인(使人) 강심(江深: 신라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의 병마는 성을 치지 말고 빨리 평양으로 달려가 군량을 공급하라.’ 하여 영으로써 달려가 모이게 하였는데,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러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의 병마도 드디어 철수하였던 것이오.
건봉(乾封) 3년에 이르러 대감(大監) 김보가(金寶嘉)를 보내어 바닷길로 (요동에) 들어가 영공의 진지(進止)를 살펴 처분을 받드니, 신라의 병마는 평양으로 집합하라는 것이었소. 5월에 이르러 유우상(劉右相: 유인궤)이 와서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고 함께 평양으로 달려가자, 모(某)도 역시 한성주로 가서 병마를 검교(檢校)하였던 것이오. 이때 번·한(蕃漢)의 모든 군사가 사수(死守)에 총집합하니 남건(男建)은 군사를 내어 한 번 싸움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려 하였소. 신라의 병마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대부대를 부수니, 평양 성중은 사기가 꺾이고 기운이 빠졌소. 후에 영공은 다시 신라의 날랜 기병 500명을 취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드디어 평양을 부수고 큰 공을 이루게 된 것이오. 이에 신라의 병사가 말하기를, ‘싸움이 이미 9년을 경과하여 인력이 탄진되었지만 끝내 양국을 평정하여 누대의 숙망이 오늘 이루어졌으니, 반드시 나라는 충성을 다한 은혜를 입을 것이며, 개인은 힘을 바친 상을 받을 것이다.’ 하였는데 영공(英公)은 말하기를, ‘신라가 전에 군기(軍期)를 위반하였으니 또한 모름지기 계산해서 정할 것이다.’ 하니, 신라의 병사는 이 말을 듣고 다시 공포심이 더한 것이오. 또 공을 세운 군장(軍裝)들은 기록되어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서울에 도착하자 말하기를, ‘지금 신라는 공 있는 자가 없습니다.’ 하여 군장들이 귀국하게 되니 백성은 다시 공포심이 더한 것이오. 또 비열성은 본래 신라의 땅인데 고(구)려가 빼앗아 30여 년이 되었으니 신라는 이성을 되찾아서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지만 (당이) 다시 이 성을 빼앗아 고(구)려에게 주었으며, 신라가 백제의 평정으로부터 고(구)려를 평정할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국가를 저버린 일이 없었는데 무슨 죄로 일조에 버림을 받는지 알 수 없소.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하나 끝내 배반할 마음은 없었던 것이오.
총장(總長) 원년에 이르러 백제는 회맹하던 곳에서 봉(封)을 옮기고 푯말을 바꾸어 전지(田地)를 침탈하며 우리 노비(奴婢)를 꾀고 우리 백성을 유인하여 내지에 숨겨두니, 자주 구해도 결국 돌려보내지 않았소. 또 소식을 통하여 말하기를, ‘국가가 선박을 수리함은 밖의 왜국(倭國)을 치기 위해서라고 하나 실은 신라를 치려는 것이다.’ 하니, 백성이 듣고 놀라 불안해 하고, 또 백제의 부녀자를 신라 한성도독(漢城都督) 박도유(朴都儒)에게 시집보내고 공모하여 신라의 병기를 빼내어 한 고을 땅을 습격하기로 하였는데, 다행히 사전에 발각되어 곧 도유를 베어 죽였으므로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이오.
함형(咸亨) 원년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모반을 하여서 한(漢)의 관원을 모두 죽였으므로 신라는 곧 군사를 일으키려고 먼저 웅진(熊津)에 알리기를, ‘고(구)려가 이미 배반하였으니 치지 않을 수 없다. 피차가 황제의 신하이므로 함께 흉적을 치는 것이 도리에 맞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도 상의가 있어야 할 것이니 청컨대 관인을 여기로 보내어 서로 계획을 하자.’ 하였더니 백제의 사마이군이 이곳에 와서 상의하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후에 피차간에 의심이 생길 염려가 있으니 마땅히 쌍방의 관인으로 하여금 볼모를 교환하도록 하자.’하므로, 곧 김유돈(金儒敦)과 부성의 백제 주부(主簿) 수미(首彌)·장귀(長貴) 등을 부(府)로 보내어 교질의 일을 의논하게 하니, 백제는 교질을 허락하면서도 성중에는 병마를 집합시키고 그 성 아래 이르기만 하면 밤에 나와 치곤 하였소. 7월에 이르러 입조사(入朝使) 김흠순 등이 이르러 경계를 그으려는데 지도를 검사하여 백제의 옛 땅은 모두 나누어 되돌려주라 하니, 황하가 아직 띠와 같지 않고 태산이 아직 숫돌과 같지 않은 3, 4년 동안에 한 번 주고 한 번 빼앗으므로, 신라 백성은 모두 실망하여 말하기를, ‘신라와 백제는 누대(累代)의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형상을 보면 따로 한 나라로 자립할 모양이니 100년 후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탄멸(呑滅)될 것이다. 신라가 이미 국가의 주(州)인 이상 두 나라로 나눌 수 없는 일이니 원컨대 한 집안이 되어서 길이 후환이 없도록 해달라.’하였소. 지난 해 9월에 이 사실을 기록하고 사신을 보내어 아뢰게 하였으나, 중도에서 표류당하여 되돌아온 것이오. 다시 사신을 보냈지만 역시 도달하지 못하였으며, 그 후에는 찬바람과 풍랑으로 아뢰지 못하고 말았소. 백제는 꾸며서 말하기를, ‘신라가 배반한다.’ 하였으니 신라는 앞으로 귀신(貴臣)의 뜻을 잃고, 뒤로는 백제의 참소를 입어 나아가나 물러가나 허물만 보이고 충성(忠誠)을 펴지 못하고 그럴듯한 참소가 날로 성청(聖聽)을 거치니, 두 마음 없는 충성이 한 번도 통하지 못한 것이오. 사인 임윤이 서한을 전달하여, 총관이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로 온 것을 알았으니, 도리상 사신으로 하여금 교외에서 맞아들이고 술과 고기를 대접하는 것이 이치인데 멀리 이역에 있어서 예를 다하지 못하고 때로는 영접조차 하지 못한 것을 청컨대 괴이히 여기지 마시오. 총관의 서한을 읽어보니 신라를 반역이라 하였는데 본심이 아니므로 척연히 놀랄 따름이오. 자신의 공로를 헤아린다면 사욕(斯辱)의 꾸지람을 당할까 두려우나 함봉하고 책망을 받자니 또한 불행한 운수에 빠지므로 이제 억울함을 대략 열거하여 배반함이 없었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오.
국가가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어 사유를 묻지도 않고 곧 수만의 군사로 하여금 소혈(巢穴)을 엎으려 하여 군사의 배가 창해를 덮고 배의 꼬리가 강어귀에 이어졌으며 저 웅진을 핍박하여 이 신라를 치니 오호라! 양국이 평정되지 않아서는 구치(驅馳: 남을 위해 바삐 뛰는 것, 즉 사역)를 맡고 야수(적)가 지금 다하니 도리어 팽재(요리사)의 침핍을 보게 되었으며, 백제의 잔적은 옹치(雍齒)의 상을 받고, 한(漢)에 희생된 신라는 정공(丁公)의 죽음을 당한 것이오. (그러나) 태양(太陽)이 비록 빛을 주지 않을망정 규곽(葵藿: 해바라기·콩잎)의 본심은 오히려 해를 생각하는 것이오. 총관은 영웅(英雄)의 빼어난 기운을 받고 장상(將相)의 고재(高材)를 지니고 칠덕(七德)을 겸비하고 구류(九流)를 통한 분으로서 천벌(天罰)을 대행함에 있어 어찌 함부로 죄 아닌 죄를 더하리까? 천병(天兵)이 출동하기 전에 먼저 이유를 물어 이 글로 인하여 감히 배반하지 않았음을 진술하는 것이니 청컨대 총관은 자세히 헤아려서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말씀드리시오. 계림주대도독 좌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신라 왕 김법민(金法敏) 백.”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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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월드컵 日記/5월31일 서울 월드컵 개막식
力動·生動·機動하면서 창조되는 대한민국
나의 월드컵 체험은 불안속에서 출발했다. 5월30일 밤늦게 집에 갔다. 그날 밤
서울 상암동 월드컵 공원에서 있었던 前夜祭 공연에 갔던 두 딸이 중간에
돌아와 주최측에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비가 오는 데 대한 준비가 없
어 일부 공연이 최소되고 입장질서도 엉망이었다는 불평불만이었다.
31일 나는 아내와 함께 개막 네 시간 전에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 도착했
다. 경기장 앞 공터에서 곧 개막식 공연에 참석하게 될 조선시대 복장의 행
렬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의 불안은 더해졌다. 나는 생동하는 대한민국
의 에너지를 자꾸 조선시대의 옷차림이나 유물을 가지고 표현하려는 것이 못마땅한
사람이다. 덕수궁 앞에서 조선시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벌이는 儀式은 공
연이지 실제가 아니다. 들고 있는 창은 호박을 찔러도 휘어질 것 같은 가짜
가 아닌가. 외국사람들은 조선시대 군인들이 실제로 저런 무기를 가지고 싸
웠으니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세계적인 강군이 된 대한민국 국군에 대한 모독이자 우리가 재발견한 尙武정신을 무시하는 것이다.
런던의 버킹검 궁전에서 騎馬兵이 벌이는 儀式은 가짜가 아니라 眞品이니
까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왜 21세기의 다이나믹 코리아를 18세기의 퇴
락한 조선시대의 것들을 가지고 상징하려고 하는 것일까. 특히 2000년1월
1일의 시작을 기념했던 광화문 축제 때 등장했던 古風의상의 그 따분한 행
렬들은 선진화를 향하여 질주하는 조국의 에너지와 그 에너지를 함께 느껴
보려고 그날 광화문으로 몰려들었던 시민들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었다.
또 그 재판인가 하는 나의 의구심은 5월31일 오후 7시30분 6만명의 대
관중을 앞에 두고 공연이 시작된 지 1분만에 날아갔다. 이날 총연출가 孫桭
策씨는 「전통은 창조적으로 파괴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한 작
품을 내놓았다.
전통의상은 현대적으로 디자인되어 고리타분하고 느릿느릿한 분위기를 일
소했다. 武士집단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잘 整齊(정제)된 전통의상의 행
렬이 갑자기 群舞의 율동집단으로 변환되고 다음에 무엇이 또 터질지 모를
意外의 장면 장면들, 그런 전환들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아, 한국적인 것을 이렇게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만
들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감동은 어느 새 자부심으로 바뀌었다. 무엇보
다도 그 공연은 생동하는 오늘날의 한국을 적나라하고 당당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고마웠다. 북치고 장구치는 출연자나 미리 나눠준 소북을 두드리는
수만 명의 관중들, 지휘봉을 신나게 휘두르는 박범훈씨의 몸짓 손짓에는 한
국인의 무의식적인 본능과 현재적 魂이 실려 있었다. 수만 관중들이 하늘을 향해서 흔드는 照明棒(조명봉)은 세계를 향해 울부짖는 한국인의 혼불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 북한에서 벌어진 아리랑 축제가 10만 인간 로봇에 의한 규격적
매스 게임으로써 수백명의 외국 관광객을 놀라게 해준 고통의 祭典이었다면
월드컵 공연은 관중들과 연기자들, 관중석과 무대가 한덩어리가 되어 주체
할 수 없는 力動의 환희를 30분속에 압축한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었다.
자율과 혼돈속에서도 질서와 속도가 유지되었으며 그것은 美學으로 승화되
었다. 野性과 知性, 文과 武, 左와 右, 前近代와 포스트 모던, 전통과 미래
가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면서 서로를 변화시키고 업그레이드시켜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力動과 生動과 機動이 아름답게 종합되고 조화된 모습이었다. 프랑스의 문명평가 기 소르망은 이 공연을 이렇게 평했다.
<전세계 10억 시청자들이 이런 메시지를 받았으면 한다. [제 영혼을 잃지 않으면서 세계에 문을 열고 스스로 현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가슴과 혼의 명령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북을 치면서 하나의 絶頂을
느꼈다. 이것은 내 생애의, 한국의, 세계의 최고 순간이 아닐까. 월드컵을
통하여 한국인은, 그리고 세계는 스스로를 재발견하게 될 것이란 예감이 들
었다. 개막식 뒤의 세네갈-프랑스戰은 공연으로 흥분된 나를 식히는 휴식시
간에 불과했다.
서울 올림픽 개막식을 보면서 이런 순간이 우리 시대에 또 다시 올 것인가
하고 아쉬워했던 14년 전의 화창한 가을하늘이 떠올랐다. 이 시대에 대한민
국에서 태어난 것의 자랑과 보람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 기분이 그
뒤 한달간 이어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교양의 힘으로 一流국가 건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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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5-01, 18: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