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인터뷰 시리즈(1)/앨트웰 金博 회장

『法을 지키면서도 돈을 잘 벌 수 있고, 남을 돈 벌게 한 것이 결국은 내게 돌아온다는 믿음의 모델이 되고 싶다』
月刊朝鮮 2002년 11월호


언론에 한 번도 난 적이 없는 「한국의 1등 알짜기업」 앨트웰 金博 회장 최초 인터뷰
-商高 졸업한 뒤 가족 부양하면서 工具 회사 설립 지금은 회원 70만 명의 多段階 판매망 구축



『法을 지키면서도 돈을 잘 벌 수 있고, 남을 돈 벌게 한 것이 결국은 내게 돌아온다는 믿음의 모델이 되고 싶다』

● 月刊朝鮮 선정 「50大 알짜기업」 1등 업체
● 자기자본비율이 59%…은행빚은 無
● 경상이익은 매출액의 30% 육박, 순익은 20%
● 年間 두 배로 쑥쑥 성장
● 年 100억원씩 장학재단에 출연…이번 水害 때 11억원어치 金品 전달
●『부동산 투기ㆍ탈세는 해본 적 없다』



趙南俊 月刊朝鮮 이사 (njcho@chosun.com)

『앨트웰이 무엇하는 회사냐』


月刊朝鮮이 2002년 8월호에 「한국의 50대 알짜기업」을 선정, 보도했을 때, 필자는 知人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알짜기업 중 1위로 뽑힌 「앨트웰텍」이 무엇하는 회사냐, 진짜 좋은 회사냐, 그 회사의 오너(기업주)는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관찰력이 예민한 독자 가운데서는 월드컵 기간 중 KT(한국통신의 前身), 현대해상화재 등과 함께 각 球場(구장)에 나란히 붙어 있던 「ALTWELL」이라는 상표가 그 회사 것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도 관심을 갖고 앨트웰텍과 그 회사의 오너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진짜 알짜 회사였다. 재무제표와 대차대조표 상에 나타난 숫자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월드컵 기간동안 광고된 「ALTWELL」도 바로 이 회사였다.

앨트웰(주), 앨트웰텍(月刊朝鮮 8월호에 알짜기업 1위에 선정된 기업), 앨트웰코리아 세 개로 이루어져 있는 앨트웰 그룹의 2001년 매출총액은 4943억원이었는데 경상이익은 1286억원(매출액의 26%), 순익은 886억원(매출액의 18%)이었다. 올해 들어서는 영업내용이 더 두드러진다. 7개월 동안 생긴 경상이익은 842억원(매출액의 29%), 순익은 588억원(매출액의 20%)으로 2000년 1년치보다 벌써 많다.

上場(상장)기업 중 매출액 對比(대비) 경상이익률이 최고수준인 회사는 SK텔레콤. 경상이익률은 28%(매출액 6조2271억원, 경상이익 1조7600억원)이며, 순익은 18%(1조1400억원).

앨트웰의 2001년 말 현재 자산은 부채 2087억원, 자기자본 1401억원을 합쳐 3489억원. 자기자본비율 39%, 즉 부채비율은 150%로 비교적 우량한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올해들어 7월 말 현재 자기자본이 크게 늘어 자기자본비율이 59%로 높아졌다. 자기자본 비율 59%라면 부채비율은 66%. 자기자본이 부채보다 더 많다는 얘기다<표 참조>. 부채도 대부분 장부상의 부채일 뿐, 은행빚은 한푼도 없다.


매년 두 배로 폭발적 성장

그런데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폭발적인 성장률이었다. 지난 3년간 매출액을 보자. 1999년 1077억원, 2000년 2537억원이었다. 한해에 150% 성장했다. 2000년 對比 2001년의 수치도 거의 2배다. 올 7월 말까지 매출액은 2926억원으로 성장세는 약간 둔화된 느낌이지만, 자산은 벌써 3461억원으로 작년 말과 거의 맞먹는다. 특히 부채는 1506억원으로 작년보다 줄어든 반면, 자본은 2135억원으로 7개월 사이에 50% 증가했다. 이만하면 국내 최우량 기업의 수준이다.

이렇게 수익성과 안정성뿐 아니라 성장성까지 3박자를 갖춘 기업의 오너는 누구일까. 궁금증이 더해 갔다. 朝鮮日報 데이터 베이스, 기업인 인명록 등에 오너의 이름이 등재는 돼 있었다. 등재돼 있는 내용은 생년월일, 현직, 직장 주소, 직장 전화번호뿐이었다.

「金博(KIM PARK), 1942년 8월1일생」. 특이하게도 취미란에 「바둑」이라고 적혀 있었다. 최소한 출생지, 본적, 학력, 경력은 履歷(이력)의 기본사항이건만, 그에 대해서는 일절 나타난 게 없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지금까지 어떤 활자매체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 적이 없었다.

필자는 지난 8월 말, 앨트웰 회장실로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신청했다. 회장실의 비서는 담당 부장과 상의해 보라며 전화를 돌려줬다. 담당 부장은 회장이 지금까지 한 번도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 적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눠봤지만 결론은 『아무리 애써봐야 헛수고일 것』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본인의 의사를 물어는 봐야 할 것 아니냐고 했더니 건의는 해보겠다고 했다.

한 1주일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담당 부장으로부터 「인터뷰 不可(불가)」로 결정났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필자는 은근히 화가 났다. 비서실에 다시 전화를 해서 『회장은 인터뷰를 요청받은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아니냐』며 본인의 육성을 직접 듣고 싶다고 强請(강청)했다.


세 평 남짓한 會長 방

金博 회장이 필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은 인터뷰를 신청한 지 열흘쯤 지난 후였다. 그는 필자에게 인터뷰 거절은 분명한 자신의 의사라는 것부터 밝혔다. 「지금까지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매스컴에 나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앨트웰은 1등으로 뽑힐 만한 기업이 못된다, 이해가 안 간다」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필자는 『月刊朝鮮이 조사전문기관에 의뢰에 심사한 결과, 「1등 기업」으로 뽑힌 것이다. 그만한 객관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랬지 않았겠느냐, 만나뵙고 싶다』고 했다. 그는 며칠간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3일 후, 金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필자는 『안 할 수 없다』고 맞섰다.

『우리가 알짜기업 기업주에 대해 시리즈를 하는데 1등을 빼놓고 다른 기업부터 먼저 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필자는 목소리를 낮춰 설득했다. 그제서야 그는 한숨을 내쉬며 『한번 와보라』고 허락했다.

지난 9월9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 681의47번지 앨트웰빌딩 10층 회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180㎝ 정도 되는 큰 키였다. 金博 회장의 집무실은 세 평 될까말까 했다. 주인이 거인이라 그런지 방은 더 좁아 보였다. 한국 최고의 알짜기업 기업주의 방이 아파트 방 한 개의 크기 만도 못하다니. 그것을 보고 필자는 이 회사가 왜 「우량기업」 소리를 듣는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우리는 조금 넓은 접견실로 자리를 옮겨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약간 긴장한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목소리도 떨려나왔다. 하지만 얘기가 진행될수록 그의 답변은 물 흐르듯 거침이 없어졌다.

―매스컴과 인터뷰를 안 하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글쎄… 제가 뭐라고 광고하는 것도 싫고, 성격이 좀 수줍은 편이다 보니까. 저에게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하는데…』

―앨트웰이 원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전문기관이 50대 알짜기업 가운데 1위로 뽑았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이해가 안 간다고 말씀하시지만,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되었을 텐데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의외였어요. 정말 그런 기사가 났다길래 당시 심정으로서는 「세상에 별 일도 다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月刊朝鮮 애독자인데 그날따라 책을 미처 못 읽고 있다가, 아는 사람이 보고 알려줘서 깜짝 놀랐어요. 기준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솔직히 지금도 납득이 잘 안 가요』


Altwell=Alturism+Well

―기업의 실력을 종합적으로 따져보지 않았겠습니까. 수익성, 성장성, 안정성, 장래성 등이 고려되었겠죠.

『글쎄요. 조사하신 분들이 뭐 열심히 3개년 재무제표 분석도 하고, 14개 항목인가를 채점했다고 하는데, 우리 회사가 과연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지 저 자신도 의문이 가고, 한편으로 두렵기도 해요, 사회적인 책임이랄까… 중압감 때문에. 아직은 그게 자랑스럽거나 좋다고 생각되지를 않아요』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아뇨, 제 느낌이 그렇습니다. 실지로 부담스럽고』

―월드컵 때 각 구장마다 붙어 있던 「ALTWELL」 선전마크를 봤습니다.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요.

『우리 대표팀의 잉글랜드, 프랑스戰 친선게임을 보고 향상된 실력에 놀랐습니다. 「50일 동안 하루 1%씩 戰力을 50% 끌어올리겠다」는 히딩크의 말도 신뢰가 갔고요. 저는 임원회의에서 「8강은 무난하다, 잘하면 4강까지도 가능성이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래서 모험하는 셈치고 방송3社에 12억원씩 36억원을 주고 광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덕에 회사의 이름이 많이 알려지긴 했지요』

―앨트웰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입니까.

『네, 앨투리즘(Alturism)과 웰(Well)의 합성어인데, 아시다시피 앨투리즘은 利他(이타)주의라는 뜻이고, 웰은 샘(泉)이라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삼왕」이라고 했다가 세계화 시대를 맞아 앨트웰이 만든 물건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다 쓸 수 있게 해야 되겠는데, 외국 사람들에게 생소하지 않게끔 지어야 되겠다, 그래서 그런 이름을 붙이게 됐습니다』

―사업가는 돈을 버는 사람인데, 「남을 이롭게 한다」는 利他주의라는 말이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군요.

『제가 회사의 기업 이념을 利他주의로 결정한 것은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한 10여년 월급쟁이 생활을 하다 처음 사업에 뛰어들면서 첫 바이어를 만났는데, 그를 상대로 어떤 이익을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안 들고, 어떻게 하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사업을 처음 하니깐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해서 그랬을 겁니다』

―첫 바이어라 반가운 마음도 있으셨을 것 같군요.

『정말 그랬어요. 내가 어떻게 노력하면 이 사람이 돈을 벌 수 있을까, 이 사람 회사가 발전할 수 있을까, 거기에 초점을 맞췄어요. 그래서 열심히 하다 보니깐 그 분도 저의 마음을 알아 주시고, 저희하고만 25년을 거래해 주시더군요. 물론 저도 노력을 많이 했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물량보다 품질 위주로 수출했거든요.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시행될 때라 품질보다 물량 위주로 「밀어내기 수출」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어요. 그래야 수출금융 등 혜택을 볼 수 있었으니까』


첫 바이어와의 인간관계가 가져다준 도움

―당시 「불량 수출」 때문에 말썽이 많았죠. 심지어 돌멩이를 싣고 나가 바다에 내다버린 가짜수출, 사기수출도 있었으니까요.

『네. 잘못해서 클레임에 걸린다든가 그러면 과도한 접대 등을 통해 해결하는 등 부작용이 많이 있었거든요. 저는 생산능력을 100이라고 한다면 오더를 80%만 받았어요, 나머지 20%는 품질유지하는 데 신경을 썼습니다. 금액이 쉽게 커지진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 꾸준히 했죠. 그러니까 그 바이어도 저를 신뢰해 주시더군요』

―그 바이어는 잊을 수 없는 분이겠군요.

『거래한 지 20년쯤 지났을 땐데, 이런 얘기까지 나왔어요. 제가 천안공장하고 본사 건물 두 개를 짓는 바람에, 자금사정이 좀 어려웠습니다. 1973년에 창업을 해서, 내년이면 만 30년인데, 그 사이 부도위기도 몇 번씩 맞고 그랬어요. 어려움이 많았죠. 한참 자금이 달릴 때인데, 그 분이 이런 제안을 해요. 저보다 열 살이 많은 분인데, 「어이, 김사장! 20년 동안 김사장이 정말 열심히 도와줬기 때문에 우리 회사가 많이 커졌다. 천안의 공장하고 사옥 짓느라 힘들다고 하던데,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라. 앞으로는 물품대금을 L/C(신용장) 대신, 현금으로 보낼테니 그 돈을 잘 운용해 보라」고요』

―아니, 해외 바이어가 그렇게까지요?

『네, 일본 사람인데 그랬어요. 담보도 필요없다고 해요. 그 당시 우리 금리가 年 15~16%이고, 일본은 3~4% 정도 됐을 때거든요』

―큰 차이였네요.

『그 분이 그걸 알고서 「지금 金사장이 어려운 것 같으니까 자금을 L/C 베이스로 안 하고 현금 베이스로 하겠다, 물건은 6개월 뒤에 실어라」, 그런 겁니다. 그것도 제가 자존심 상해할까봐 아주 조심스럽게 「이제부터 내가 김사장을 도와야겠다」며 그런 제안을 하더라구요.

그 뒤 6개월 동안 쌓인 현금액이 400만 달러나 됐어요. 그 당시 환율로 30억원이 넘었습니다. 그게 한 5년 동안 계속됐어요. 계속 400만 달러는 아니고, 400만 달러가 됐다가, 300만 달러가 됐다가, 다시 400만 달러로 올라갔다가 하는 식으로 해서 5년간을 무이자로 자금 지원을 받았어요』

―이자 차액만 매년 3억~4억원 정도 되는군요.

『그렇죠.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인간승리가 아닐까」라고 느끼면서, 그래, 내가 30년 동안 견지해 왔던 기업관이 쓸모가 있었구나 하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전에 상대방의 이익을 먼저 고려해 주면, 그것이 가장 설득력이 강한 것이고, 그것이 돌고 돌아 결국 나한테도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자연히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간단한 원리인데요. 남을 먼저 생각하느냐, 나를 먼저 생각하느냐 순서만 다를 뿐이지, 결국은 나를 위하는 길이 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참 실행하기는 어렵거든요.

『그래요. 어렵습니다. 제가 사업을 하면서 느끼고 알게 된 것을 직원들한테 전수하고, 그런 생각이 사회에 음으로 양으로 퍼져 나가면 좀더 바람직한 사회가 되는데 기여를 하고 기업도 이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그래서 기업이념을 利他주의로 결정한 겁니다.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고 정직과 신용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利他주의다, 저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든 직원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일을 해 나가고 있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네트워크 마케팅 시대의 到來를 예측

―연간 매출액이 5000억원 정도 된다죠?

『앨트웰주식회사, 앨트웰텍, 앨트웰 코리아 3개 회사가 합쳐서 그 정도 됩니다』

―회사 자료를 보니까 업계 2위라고 되어 있던데.

『그건 다단계 판매를 말하는 거죠』

앨트웰은 1995년 네트워크 마케팅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지면서 서울시에 제8호로 등록, 유통업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네트워크 마케팅이란 「다단계 판매」를 말한다. 金博 회장은 수출 때문에 외국 다단계 판매회사와 접촉하면서 발전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국민소득이 3000달러 정도 되면 한국에도 그런 회사가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준비를 하며 기다려오다가 관련 법규가 생기자마자, 바로 등록했다고 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단계 판매가 무엇인가 간단히 알아본다.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다단계 판매란 제조업자·도매업자·산매업자·소비자같은 일반적인 유통경로를 거치지 아니하고 다단계 판매업자가 판매하는 상품을 사용해 본 소비자가 다단계 판매조직의 판매원이 되어 상품을 구입하고 다른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과정이 순차적,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판매방식을 말한다.

소비자가 판매원이 되고 판매원 가입이 순차적, 단계적으로 확산되며 직접적인 對人판매, 연고판매에 의존하기 때문에 射倖(사행)성과 소비자 피해를 야기하는 피라미드 판매가 되기 쉽다. 그래서 정부는 엄격한 규정을 정해 놓고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의 판매원은 月 1000만~ 2000만원 소득

정부는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 1995년 7월6일부터 시행하고 있으며 법률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을 할 수 있게 돼 있다.

다단계 판매는 점포도 없고 광고도 하지 않으므로 취급 상품의 품질 및 가격이 유사제품에 비해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이 비싸거나 低품질이라면 반복구매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자연히 조직이 붕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앨트웰이 판매하는 130여 상품 가운데 생활필수품의 경우, 가격은 할인마트와 비슷하다고 한다.

한 품목의 가격 상한선은 100만원. 최근 시행령 개정으로 130만원까지 상향조정됐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동차나 대형 TV 등은 판매대상이 아니다. 앨트웰이 취급하는 품목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은 淨水器(정수기)로, 99만원이다.

앨트웰의 경우, 판매조직이 1~7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일정한 액수의 판매와 하위 판매원의 육성 등에 따른 포인트를 따면 昇級된다. 최고단계인 7단계는 社內에서는 「로열패밀리」라고 불리는데, 전국에 400명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로열패밀리의 月소득은 1000만~2000만원 선이며 최고 5000만원을 버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앨트웰 관계자의 말이다.

金博 회장은 利他주의의 경영이념 아래 여섯 가지 경영목표를 세워두고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에게 사랑받는 기업, 외부에 자랑할 만한 기업,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 국가발전에 공헌하는 기업,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 세계화를 지향하는 기업 등이다.

이 중에서 「자랑할 만한 기업」을 예로 들면, 직원들이 밖에 나가서 『앨트웰에서 근무한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기업이 되게 하기 위해, 우선 봉급을 많이 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각종 복지지원금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정사원의 경우, 성과급을 포함해서 대졸 초임 연봉이 2500만원, 10년차 과장이 5000만원, 15년차 부장이 7000만원 내외라고 한다. 일류기업 수준이다.

중·고·대학 재학 자녀들에게 학자금 전액을 지급하고 있으며, 주택구입자금 및 전세금의 50%까지 연리 1~2%로 대출해 준다. 이외에도 의료비 300만원, 학원 수강료 등 1인당 연간 최고 265만원까지 지원한다는 것. 그래서 그런지 이 회사엔 노동조합이 없다고 한다.


최종학력은 商高 졸업

―우선 제일 궁금한 게 회장님의 신상명세인데요.

『서울서 태어났구요, 아버지의 고향은 충청남도 서산입니다. 서울에서 살다 6ㆍ25 때 대전을 거쳐 서산으로 피란 갔죠. 거기서 초등학교 5학년부터 다니다가, 서산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시 서울로 왔죠. 뭐, 그렇게 개인적인 걸 시시콜콜히 말을 해야 하나요?』

―네. 金博 회장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말씀해 주시죠.

『자랑할 것도 없는데…』

―그래도 해 주시죠. 이력인데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제 집이 좀 어려워 대학을 못 가고 바로 취직을 했죠. 부산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동양정유라고 모빌油 만드는 회사에도 한 2년 있었고, 제일슬레트라고 지금 벽산슬레트가 된 데에서 한 3년, 수산회사에도 한 3년 일을 하고, 그렇게 한 10여 년 월급생활을 하다가, 1973년에 창업을 했죠』

크게 성공하면 약점도 장점으로 변한다. 자신이 고졸자라고 밝히는 金博 회장의 태도가 당당하다.

―창업을 하시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서울에서 아는 분이 브래지어 공장을 한 20년 가까이 운영했는데, 3년여 동안 적자를 보다가 공장을 좀 팔아달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는 錢主(전주)에게 추천을 했죠. 「이 공장을 사서 맡겨 주면 제가 경영을 잘 해보겠습니다」 하고요. 맨 처음에는 살 것처럼 얘길 하더니, 몇 개월이 지나도록 돈을 안 주시는 거예요. 나중에야, 「도저히 나는 그걸 할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 내가 신용장을 하나 줄 테니 수출 금융을 받아 쓰고 나중에 갚아라」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신용장을 가지고 은행에 가서 200만원을 빌려 서울로 왔죠. 하하』

―얼마 만의 상경인가요.

『네, 11년 만에 상경했어요. 청계천 7가에 있는 공장을 200만원 계약금만 걸고 나머지는 벌어서 延拂(연불)로 갚는 조건으로 인수를 했죠』


생산성 높이려 女工에게 빵과 우유 지급

―그렇게 시작을 하셨구나.

『네. 제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출업무 3년, 수입업무 3년, 경리업무 4년을 봤어요. 사업 하는 데 필수적인 일들을 거저 배운 거지요. 제가 상업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경기상고를 나왔는데, 숫자를 조금 알았거든요. 당시 미싱 44대 하고, 종업원 27명을 인수했어요. 종업원이 27명밖에 안 되는데 매일 한 댓 명씩 결근하고 한 달이 멀다 하고 돈을 조금 더 준다는 데로 이리저리 옮겨 가더라구요.

적자가 나는 이유를 분석해 보니까, 생산성이었어요. 그래, 생산성만 올리면 되겠구나 하는 답이 나오더라구요. 이상하게 그 당시엔 파노라마처럼 그게 선연히 보이더라구요. 생산성을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왜 이 사람들이 이동을 하나. 원인제거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죠.

그 당시 종업원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처녀들인데, 형편이 어려우니까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상경해서 혼자 돈을 벌어 시골 부모님한테 부쳐주고, 동생들 오빠 학비 대 주고, 저희들 먹고 사는 건 아주 열악한 그런 처녀들이었어요.

그때는 보릿고개도 있었거든요. 먹는 것이 불규칙하니까 위장병이 많고, 저항력이 떨어지다 보니, 감기에도 잘 걸리고, 거기다가 노동집약산업이기 때문에 일도 激務(격무)고. 그래서 제가 그 때부터 간식을 지급하기 시작했어요. 우유하고 빵하고. 그런데 안 먹던 우유를 먹이니깐 애들이 처음에는 설사를 하더라구요』

―어려울 땐데 참 생각이 깊으셨네요.

『저도 여동생들이 있으니까요』

―몇 남매세요?

『8남매에서 둘 죽고 6남매 남았죠. 전쟁통에 병으로 죽었어요』

―저희가 7남매 중 셋 죽고 넷 남은 거랑 비슷하구나. 하하. 6남매 중 몇째세요?

『둘째입니다. 남자 셋, 여자 셋 중에서』

金博 회장의 맏형은 아우의 일을 도와주다가 은퇴했고, 아우들은 앨트웰의 수석 디자이너 등으로 앨트웰과 인연을 맺고 있으며, 여동생들은 모두 金회장이 키우고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아버님은 무엇하는 분이었습니까?

『300석 지기의 장남이셨는데…』

―부잣집이셨네요?

『네. 근데 그 300석을 저희 할아버지 代에 다 없앴죠. 아버지는 부잣집 아들로 자라셨는데, 철 나시면서는 집안이 완전히 망하다 보니깐 생활력이 없었어요. 사람은 고생을 하면서 자라야 돼요. 그래야 깨달음도 있고, 지혜도 생기고 그렇게 되는데 아버지는 부잣집에서 자라다 보니까 현실감각이 너무 둔하셔서 경제적인 능력이 없으셨지요』


『고생이 성공의 아버지다』


―고생을 많이 하셨겠네요.

『그래도 저 혼자 벌어서 학교를 가라고 했으면 어떻게 해서든 대학을 나왔을 텐데, 중학교·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제가 벌어서 식구들이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근데 저는 사실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육신하고, 어려서부터 고생으로 단련된 것이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큰 두 가지 기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잘 될 때는 정말 자만에 빠지기 쉬워요. 근데 고생스럽고 시련이 있을 때마다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것이 지혜가 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해 저희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있어요』

열등감과 傲氣(오기)는 자칫 적개심과 증오로 나타나기 쉽다. 하지만 적당한 열등감과 傲氣는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열등감은 남보다 더 노력하게 하고, 傲氣는 쉽게 좌절하지 않는 힘의 원천이다. 고생담을 얘기하는 金博 회장에게서 그런 과정을 거친 성취자의 입김이 물씬 배어 나온다.

―하하. 역설적인 말씀이군요.

『친구들끼리 만나면 요즘 애들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걱정들 많이 해요. 자식을 위해서는 우리가 깡그리 망해야 된다, 그런 얘기를 주고 받죠』

그는 자녀들의 철없는 행동뿐 아니라, 국가의 고마움을 모르는 反체제 행위, 기업의 고마움을 모르는 불법적 파업 행위 등이 발생할 때, 흔히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주고 받는다고 덧붙인다.

『그런 처녀들한테 빵하고 우유를 주니까… 맨 처음에는 소화를 못 시켜 고생하더니, 한 2개월쯤 지나고 나니까 애들이 얼굴색이 달라지더라구요, 진짜』

―적응이 되겠죠. 소화효소도 나올 거고.

『네. 그래서 27명 처녀들한테 제가 제안을 했어요. 그 당시엔 그 친구들이 여동생 같고, 애처롭고, 어떻게 하면 다른 데 안 가고 여기에 있게 할까… 저는 제가 살기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지만요』

―利他주의하고 똑같은 거네요.

『그 아이들이 열일곱 살부터 스물두세살 처녀들이거든요. 공장 그만둘 때 시집 밑천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나이와 기능과 근무기간을 감안해서 15만원에서 30만원까지 3년짜리 적금을 들어 半은 회사에서 부어주겠다, 半은 여러분이 대라 했죠. 자꾸 옮기니까 기능이 떨어질 게 아닙니까.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서 낸 아이디어죠』


남에게 줄 때가 기쁘다

그 당시 15만원, 30만원이면 큰 재산이었다. 1973년 金회장이 부산에서 살았던 곳은 10평짜리 아파트. 그걸 1974년 9월에 팔았는데 53만원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때 나이 어린 처녀들한테 그건 큰 돈이었다. 女工 월급이 적게는 7000~ 8000원에서 많게는 1만5000~1만6000원이었다.

그랬더니 이웃 공장들에서 난리가 났다. 『너희만 살려고 그렇게 하면 어떡하냐. 그리고 그렇게 해봤자 1년도 못 되서 망한다』고 악담을 했다. 하지만 망하기는커녕 그런 식으로 했더니 1년 후에는 생산성이 두 배는 올라가더란다.

女工들 건강이 좋아져서 웬만하면 결근을 안 하려고 노력하고, 결근해도 한두 명에 그쳤다. 한 달이면 열 명씩 이동하는 것이 거의 이동을 안 하고, 반대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 바람에 돈을 좀 벌었다고 했다.

―거기서 느끼신 바가 컸겠군요.

『아! 사람관계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할 계기가 됐습니다. 말씀을 드리려고 하다 보니까 다 드리는데, 자화자찬하는 건 안 써주셨으면 좋겠고』

―말씀하시는 내용을 취사선택하겠습니다.

『저는 아홉 살에 6ㆍ25를 맞아 그 때부터 고생길에 들어서서 가족부양을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이 형성된 것 같아요. 바깥에서 뭐가 생기면 부모님 갖다 드리고, 배고파하는 동생들 먹이고, 그런 게 몸에 밴 게 아닌가. 평생을 살면서 저 자신한테는 엄격한 편인데, 남한테는 주는 걸 좋아하게 됐나봐요. 받으면서 기뻐하는 동생들, 부모님을 보면서 그게 저는 제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기쁜 거예요. 그게 체질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어려서부터 고생하며 자라면 마음이 삐뚤어지기 쉬운 법인데.

『제가 부모님한테 하나 감사드리는 것은 그런 고생을 했는데도 마음이 꼬이거나 좌절하지 않고 정해진 길을 정해진 대로 가게 하는 마음을 물려 주신 것입니다. 선생님들이나 선배들로부터 「인생은 마라톤이다」 하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살고 보니까 평범한 진리가 맞는 것 같아요. 눈앞의 이익이나 현실에 급급하다 보면 금방 쓰러지는 거죠. 그런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지구력이 있었고,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한달 후, 1년 후를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좋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좋은 時代를 타고난 행운에 감사, 시장경제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天國』

―기업은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아래에 우수한 직원들이 많았던 모양이죠?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운이 참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보다 열심히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옛날 우리 임직원들이 참 성실하고 좋은 친구들이었어요. 비록 서울大 연세-고려大 같은 일류 대학생들은 없으나, 열심히 일해 줬어요. 옛날에 중소기업이 일류대학 학생들을 쓸 수 있었나요. 돈을 똑같이 준다고 해도 안 오고 다 대기업으로 갔죠』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겠죠?

『예. 그런 친구들이 일치단결해서 큰 힘을 발휘해 준 것이 고맙죠. 저는 제가 시대도 잘 타고 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10년 먼저 태어났다면 日帝의 징병으로 끌려 나갔을 테고, 아니면 6ㆍ25 때 끌려가서 죽었을 수도 있고.

5000년 우리 역사 중에서 신라시대 이전 빼놓고 나머지 2000년만 생각해도 얼마나 좋은 때에 우리가 태어났습니까. 제가 1961년 고등학교 졸업할 때 배웠던 바로는 세계가 102개국이었어요. 우리나라가 102개국 중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 가는 정도였을 거예요. 지금의 방글라데시 정도나 되는 나라였던 것 같아요』

―1961년이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 정도 됐나요?

『그런데 그게 50년 만에 경제대국으로 됐으니까. 세계 200개 이상 되는 나라에서 10위, 뭐 12~13위 가는, 경제 크기로 말하자면 말이에요』

―무역량으로 하면 11위고, 시장규모로 하면 15위고, 국민소득으로 따지면 한 50위 권일 거예요.

『그러니까 어쨌든 경제규모로 봐서는 단군 이래 최대의 전성기 아닙니까. 제가 이 시대에 살았다는 건 무얼 의미하냐 하면, 각 개인에게 그만큼 기회가 많이 있었던 시대를 살았다, 그런 뜻 아니겠어요?

그래서 시대를 잘 타고난 데다, 운이 좋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 안에서 제가 일관되게 생각한 것은 유럽 중세라든가, 조선시대라든가 그런 때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얼마나 답답한 세상이었을까, 자유 민주주의라는 게 얼마나 좋은 거냐, 시장경제를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라는 게 능력 있는 사람들의 천국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해보거든요. 그럼 이렇게 좋은 제도를 유지, 발전, 계승시켜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원론적인 얘기지만, 모든 국민이 법과 질서를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런 얘기를 부르짖으면 친구들은 「너는 아직도 순진하고, 아직도 유치하다」 그래요. 너무 원론적인 얘기를 한다고.

능력 있는 사람들의 천국이라는 자본주의란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이 세금을 정직하게 내서 소득 再분배가 잘 이루어지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배려를 진심으로 해야 큰 탈 없이 발전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을 하죠』


30년 동안 脫稅한 적 없다

―세금 말씀이 나왔는데, 세금 문제가 깨끗하기로 소문난 회사라면서요.

『작년 7월, 국세청에서 전국의 사업장을 조사했어요』

―저런, 큰 곤욕을 치렀겠군요.

『한 개 회사는 4년치 조사를 받았고, 한 개 회사는 5년치 조사를 받았는데, 우리 직원이 잘못한 것도 있어요. 기업회계하고 세무회계하고 해석상의 차이 때문에』

―그런 차이는 어느 기업에나 다 있습니다.

『22억원 물라고 해서 22억원 물었어요. 우리가 잘못한 것은 수긍을 하고, 법률적으로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행정소송을 냈어요. 지금 재판에 계류 중입니다. 1980년도 초에 한 번 대법원까지 가서 제가 환급받은 적이 있거든요. 1983년도에 대법원 판결이 나왔나? 그때도 돈 2300만원 때문에 대법원까지 가서 재판해 가지고 세금을 돌려받았어요』

―잘못이 없으면 재판해야죠.

『그런데 일반 사기업에서 30년 전부터 탈세 안 한다는 건 굉장히 힘든 거예요. 저도 매일 유혹과 갈등을 이기느라고 저 자신과 무지하게 싸웠어요. 제가 물려받은 재산이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부도 위기도 여러 번 맞았고. 제가 갈등을 느꼈던 것이 영업회의를 하면서 왜 수금이 안 되냐, 왜 판매가 요거 밖에 안 되냐, 그럴 때마다 영업직원이 「아, 사장님. 우리도 영수증 없이 無資料(무자료)로 거래하면 30% 더 판매할 수 있고, 현금 수금도 가능합니다」 그래요. 갈등이 심했죠』

―그러셨겠네요.

『영업직원들이 그거 왜 못 하게 합니까, 그럴 때마다 죽겠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한 3년만 참자, 3년만 참으면 아리랑 공구는 資料 없이는 못 사는 거다, 하는 인식이 심어질 거다, 그 때는 편해질 거다, 그 때까지 참자」고 했어요. 그런데 회사는 어렵죠. 내일 당장 직원들 월급은 줘야죠. 그런데 월급 마련도 제대로 안 돼 있고 그럴 때마다 유혹을 받죠. 왜 안 받겠습니까. 현실의 이익하고 자기의 신념하고 부딪칠 때 참 힘들었어요』

―힘들죠. 밥 한 끼 굶는 것도 힘든 건데.

『네. 지난 30년 동안 일관되게 유지했던 것은 탈세를 하지 말자는 것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비자금도 한푼 만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기업을 하면서 몇 가지 소원을 가진 적이 있었어요. 한 가지는 은행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두 번째는 국세청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세 번째는 경찰이나 검찰로부터 독립하고 싶고, 자유롭고 싶다. 마지막 네 번째는 매스컴이나 일반 시민단체로부터 자유스럽고 싶다, 그랬습니다. 하하』


물품 구매 때 不正하면 절대 용서 안해

―매스컴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소원 때문에 지금까지 인터뷰를 안 하셨습니까.

『괜히 실속도 없이 신문에 나고 방송에 나오는 게 싫었어요. 기업을 하면서 그 네 가지 소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은행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것은 IMF 사태가 난 다음해(1998년) 6월에 달성했습니다. 국세청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은 그건 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30년 전부터 했고, 작년부터 저희 회사에 변호사 두 분이 번갈아 상주하면서 회사內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위법사항이 있는지 없는지 체크하고 있습니다. 경찰이나 검찰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요.

우리가 시민단체나 매스컴에 대해서 자유스러우려면 모든 직원이 그 쪽에 책잡힐 짓을 안 하면 되는 게 아니냐. 진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그런 경영을 하면 되는 게 아니냐. 우리 직원이 아르바이트직까지 합쳐서 한 1000명 되거든요』

―1000명요?

『네. 정규 직원이 한 350명 정도, 계약직이 300여 명 되고, 아르바이트 사원이 한 300여 명 정도 되는데, 여러 사람이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부서든지 빈 구석이 나오게 돼 있어요』

―그럴 수 있죠.

『저는 웬만한 직원들의 잘못은 두세 번은 용서를 하고, 교육도 시키고, 설득도 시킵니다만, 용서 못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거래처에서 밥 한 끼, 차 한 잔, 상품권 한 장이라도 받으면 그건 절대 용서가 안됩니다. 그건 전체 직원들이 잘 알고 실행을 하고 있고요. 저희가 외부에서 구매하는 액수가 연간 1500억원 정도 되는데, 그 과정에서 부정이 절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지불을 현금으로 하고 있어요. 뭐 하러 시간낭비하고 수금하러 오냐, 은행으로 현금 이체해 주면 되니까 수금하러 다니면서 시간낭비하지 마라 그래요.

저는 경쟁시대에 살면서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효율, 능률을 중시할 수밖에 없죠. 한편으로 생각하면 효율, 능률이라는 게 가장 非인간적인 거거든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서 남보다 경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경쟁력 갖추는 것이 필연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비정한 부분이 있더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 갈등 속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사실 제가 지금까지 지켜 왔던 게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평소에 평범하게 다 알고 있는 거거든요. 가치관이나 신념이 눈앞의 이익하고 부딪쳤을 때 그걸 얼마나 잘 이겨낼 수 있느냐 그 차이죠.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 거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거고, 비결이랄 것도 없는 거고』

―아닙니다. 그게 어려운 겁니다.

『근데 저희 회사는 그걸 잘 지켜왔다고 생각해요』


속옷 수출하다가 아리랑 工具 창립

―일본에 처음으로 수출을 하게 됐다고 하셨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우연히 일본 바이어하고 연결이 되었어요. 거기서 기술을 많이 배웠죠』

―그 분이 아까 도움을 주셨다던 그 바이업니까.

『네』

―이름은?

『회사 이름은 가도리루 니시다 컴패니, 사장은 니시다 기요미라는 분이었어요』

―니시다면 西田인데.

『네, 西田』

―기요미는 맑을 淸, 아름다울 美?

『네. 가도리루는 불란서 말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분하고 오랫동안 연결돼서?

『한 25년 됐죠』

―여성용 파운데이션이라는 게 브래지어말고 또 있습니까?

『네, 브래지어, 거들, 보디슈트…』

―많이 수출하실 때는 어느 정도?

『가장 많을 때는 1600만 달러 정도까지 수출이 됐지요. 그 당시로서는 큰 규모였죠』

―그 다음에는 앨트웰텍이라는 게 나오는데?

『네. 아리랑 工具(앨트웰텍의 옛 이름)로 시작을 했죠』

―工具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요?

『미국에서 교포 친구가 와서 한국에서 工具를 들여가려 하는데, 공장도 없을뿐더러 그나마 있는 공장에서도 6개월 기다려라, 1년 기다려라 한다며 工具를 만들면 주문은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그러더라구요』


자체 생산품이 매출액의 80% 차지

―우리나라 工具가 튼튼하고 강하고 그런 느낌은 안 들거든요. 외국 것이 좋지. 무르고 그래서.

『무른 부분은 많이 개선이 됐죠』

―지금은 그런데 1978년 같으면 우리 工具의 이미지가 썩 좋을 때가 아닌데, 어떻게…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걸 비즈니스라고 하거든요. 섬유하던 사람이 工具를 만들려니까 힘이 들었죠. 삼미특수강에서 나오는 기다란 環棒(환봉)이라는 게 있어요. 그걸 잘라서 불에 달구고 두드리고 열처리해서 만드는 건데, 여하튼 그걸 준비하러 일본을 한 2년 좇아다니면서 연구를 많이 했죠. 일본 기술자들도 몇몇 데리고 와서 사원 교육을 시켰어요. 그러다 보니까 기술자가 다 돼서 나중에는 공장장이 이거 어떻게 합니까 하고 사장한테 물어볼 정도였으니깐요. 하하.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工具의 工자도 모르는 사장한테 물어보는 공장장이 어디 있냐. 工具를 책상에다 놓고 다섯 시간만 들여다 봐라. 그러면 뭔가 아이디어가 나올 거다』

―그런데 금방 군납까지 하셨네요.

『최신 기계를 사다가 한국에서 제일 품질이 좋다는 평가를 받아 우리 군에 군납을 하고, 미군에 군납하는 아메리칸 칼이라는 회사를 통해서 美 국방성에도 납품했지요』

―工具라고 하면 종류가 많을 텐데 어떤 거를 했어요?

『커팅류를 했어요. 벤치, 니퍼, 롱노스 등이죠』

―工具 부분만 보면 비중이 어느 정도입니까?

『工具는 별로예요. 제가 업종 선택을 잘못 한 거죠. 한국의 工具 시장은 너무 작고, 미국에 가면 품질 좋은 것은 독일이나 일본제 찾고, 나쁜 거는 대만제나 중국제 찾아요. 한국산은 발 붙일 데가 없어요. 아, 이건 업종 선택을 잘못한 거구나 생각했죠. 금속공업하는 사람들 정말 우대해줘야 돼요. 무지무지 고생을 많이 해요』

―앨트웰의 다단계 판매망에서 취급하는 품목 중 자체 생산품과 외부구매 비율을 말씀해 주십시오.

『직접 생산하는 게 80%정도 되고, 20%가 외부 구매예요』

―자체 생산품이 굉장히 많은 편이네요.

『네, 대개 20년 이상 생산 노하우가 쌓이다 보니까…』

―좀 전에 전시실에서 보니까 생산품이 굉장히 많던데 전부 여기에서 만드는 겁니까?

『아뇨. 외부에서 구매하는 20%가 종류가 많아요. 제가 하는 건 기능성 여성용 속옷하고 정수기뿐입니다. 그 두 가지 품목이 저희 매출액의 80%를 차지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이익이 1000억원이나 난다는 말인가요.

『1000억원까지는 아니고. 어디서 들으셨어요?』

―우리 대표이사가 어디서 듣고 오셔 갖구. 하하. 매출액 對比 순익 20%면 굉장히 높은 마진 아닌가요?

『10여 년간 가격을 한 번도 올린 적이 없는데도 그래요. 전부 기술 개발에 의해 코스트 다운이 된 거죠』


전체회원 70만 명 가운데 5만 명이 열성 판매원

―그러면 1위는 어디죠.

『외국계 회사죠』

―다단계 판매라는 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있고, 그것에 대한 규제도 강화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얼마 전 있었습니다만, 앨트웰은 다른 회사와 다른 점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자랑을 한번 해보시죠.

『다단계 판매가 지금 세계적으로 연 매출액이 800억 달러예요. 세계 대회에 사장이 갔다 오기도 했는데…』

―아, 세계 대회도 있습니까?

『네. 앞으로는 全세계가 네트워크 마케팅에 상당히 의존할 거라는 겁니다. 지금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 점점 커지는데, 그것이 나쁜 부분 때문에 기피해야 될 거냐. 그러면 우리나라는 외국 사람들만 들어와서 시장을 독점할 수밖에 없는 거죠. 모든 사업자들이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원리원칙을 지키면 좋겠는데, 자기 판매조직을 만들어서 승급하면 되는데, 자기 돈으로 승급을 하려고 욕심을 내요.

수익이 나지 않는 승급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근데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승급을 좋아해요. 소득이 있든지 없든지. 그걸 하지 말라고 그렇게 교육할 때마다 부르짖어도 그런 패턴으로 일부가 나가곤 해요』

金博 회장은 말을 꾸미는 재주가 없는 사람 같다. 자랑을 해보라고 했더니, 원리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얘기를 하고 만다.

―판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력인데요.

『저희는 회원을 디스트리뷰터(판매자)와 컨슈머(소비자)를 합성해서 디슈머라고 합니다만, 전체 회원이 70만 명 정도 되고, 5만 명 정도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굉장한 숫자네요. 그렇게 많은 인원이 방문판매를 하면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까요.

『방문판매 비중은 40% 정도 됩니다. 60%가 인터넷을 통한 주문판매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00% 인터넷 판매 시대에 대비하여 업무 매뉴얼을 준비 중입니다. 방문판매의 비중이 갈수록 줄고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우리 회사의 이미지가 걸린 일이기 때문에 고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회원가입하면 25% 할인구매 가능

앨트웰은 명절 기간 며칠 빼고 일년 내내 社內교육을 실시한다. 문제발생을 미리 막기 위한 것이다. 서울시내 4개 지사, 지방 14개 지사를 중심으로 상위 급에 있는 디슈머가 하위 디슈머에게 성공사례를 중심으로 교육하도록 프로그램을 짠다. 서울 성동구 성수1가동에 있는 성동지사의 경우, 거의 매일 1000명에 달하는 디슈머들로 복작거린다. 매장, 회원 등록창구, 반품 및 애프터 서비스, 물류창고 등이 있지만, 교육장이 가장 넓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다.

교육장과 정기적인 교육은 賣場(매장)이 없이 인간관계만으로 영업활동을 하는 디슈머들에게 소속감을 제공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등 디슈머 사이의 끈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그래선지 500명 정도 수용하는 강당은 항상 가득차며 餘興(여흥)을 즐기는 야유회장처럼 흥겹고 열기가 뜨겁다.

교육장에는 붉은색 상하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간간이 눈에 띄며 가장 많이 인사를 받는다. 이 사람들이 바로 「로얄패밀리」로 불리는 7단계 디슈머다. 그 다음이 노란색 유니폼을 입는 사람들. 교육이나 공식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입는 유니폼이라고 했다. 6단계에 해당하는 「다이아몬드 클라스」. 실제로 이들은 각각의 사업자들이며 외부에는 「사장님」으로 불린다. 5단계는 「골드 클라스」, 4단계는 「퍼스트 클라스」, 3단계는 「시니어」, 2단계는 「주니어」, 이제 막 가입한 사람은 「파이오니어」라고 호칭한다.

회원으로 가입하면 앨트웰이 취급하는 상품을 時價보다 25% 싸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며, 판매이익의 35%를 7단계의 디슈머들이 일정한 비율로 나눠갖는다.

―물건을 샀다가 싫어지면 어떻게 해요.

『우리는 3개월 내에는 반품을 다 받아주거든요. 백화점에서도 15일인가 지나면 반품을 안 받아줘요. 3개월 안에 반품이라도 시키면 좋은데 욕심 때문에 반품도 안하는 거예요. 자기가 받은 수수료 토해 내라 그럴까봐 그러는지. 팔리겠지, 팔리겠지 하다가 나중에 못 팔고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도 결국 원리원칙을 안 지키니까 그러는 거고, 또 일부 회사나 사업체가 그런 걸 조장을 해요. 조장을 하더라도 3개월 내에 반품을 전부 하면 아무 피해도 없을 텐데… 그런 사례가 초창기엔 많이 있었죠. 다단계 판매의 초창기 이미지가 너무 나쁘다 보니까 지금까지 연결되는 것은 사실이죠. 카드도 무작위로 마구 발급을 하다 보니까 부작용이 생기는 것처럼요』


회원들의 過慾으로 부작용도 없지 않다

金회장의 설명에서 다단계 판매에 트러블과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제도는 합법이지만, 영업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過慾(과욕)으로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초창기엔 그런 일들이 많았고, 지금도 일부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카드 문제는 심각해요.

『옛날에는 빚은 家長(가장)들만 졌거든요. 근데 요샌 딸도 빚지고, 아들도 빚지고, 마누라도 빚지고, 家長도 빚지고, 全식구가 빚을 지는 가정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게 나중엔 사회와 국가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거냐. 그게 사실은 걱정이에요. 큰 불씨가 될 수 있죠. 그 동안엔 全가족이 빚을 지면서 소비를 진작하여 경제 성장을 부추긴 측면이 있는데, 그것이 한계에 도달할 땐 어떻게 될 거냐. 일본 같은 장기불황이 남의 일 같지만 않아 걱정스러워요』

―앨트웰의 불량률은 얼마나 됩니까.

『저희 불량률은 1% 미만이에요』

―제품의 불량률이 아니라, 판매 단계에서 반품률 말입니다.

『한 25% 정도. 제가 말썽이 나지 않도록 가능하면 모두 반품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업계에서 반품률이 가장 높은 편이죠』

상품을 인도받은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반품하는 경우, 일체의 반환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 3개월 경과 후 6개월까지는 10%, 6개월 초과 1년까지는 30%의 반환수수료를 받고 물건 값을 돌려 준다고 한다.

―가장 많이 만드는 게 정수기하고 기능성 여성 속옷이라고 하셨는데 정수기를 5만 대나 미국에 수출하셨다면서요? 정수기의 내수 판매는 어느 정도나 되고 수입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정수기는 금년도 기준으로 하면 2위나 3위 정도 아닐까 싶은데요』

―내수만으로요?

『아뇨. 내수랑 수출이랑 합쳐서요』

―정수기는 액수로 어느 정도나 판매됩니까?

『1300억원 정도 되죠』

―정수기라고 하면 광물질까지 다 흡수해서 영양가 없는 물이 된다고 들었는데, 어떻습니까?

『인체에 유익한 물은 자연상태의 미네랄이 있어야 되거든요. 우리 정수기로 정수하면 미네랄이 없어지지 않아요』

―제가 서울시청을 출입할 때,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장의 말을 들어보니깐 정수기를 쓰지 말라고 그러더라구요. 광물질을 다 흡수한다고. 그래서 제가 한번 여쭈어 보는 거예요. 그만큼 정수기가 발달됐다는 말이죠?

『많이 발전했죠』


10년 동안 가격 인상 안 했다

―연구소가 몇 개 있다고 들었는데요.

『별 것 아니에요. 우리 제품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역할을 하고, 기능성 속옷을 연구하고 어떻게 착용을 해야 기능이 발휘될 수 있는가 하는 그런 일을 합니다. 여성용 기능성 속옷 연구소, 미래기술연구소, 생산기술연구소 등이 있는데, 우리 회사에서 생산하는 것을 연구하는 연구소이기 때문에 자랑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10년 동안 가격을 올리지 않고 이익도 많이 낼 수 있는 이유가 다 그런 데서 기술을 개발하기 때문이죠』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기능성 속옷은 뭐뭐가 있나요.

『브래지어, 팬티, 보디슈트, 보디쉐퍼, 니퍼』

―허허… 잘 모르는 것들만 있는데. 그것을 입으면 체형을 補正(보정)할 수 있는 건가요?

『補正이 되죠. 제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써 볼 수 없잖아요? 그런데 과거 우리 회사에 50세가 넘은 여자 영업부장이 있었어요. 그분 말씀인데, 우리 브래지어를 3년 동안 착용했더니, A컵이 C컵으로 커졌다는 거예요』

―한번 사서 써본 사람들이 다시 찾습니까.

『再구매가 많이 일어나요. 우리 제품을 써본 사람들은 다른 건 영 불편해서 안 좋다고 그런대요. 자기 몸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은 우리 기능성 속옷으로 효과를 확실히 봅니다. 대개 중년 여성들은 지방이 많잖아요. 우리 기능성 속옷은 體脂肪(체지방)을 적절히 분산시켜 줍니다』

―다른 데로 옮겨준다고요?

『네. 그렇게 해서 가슴이 커질 수 있고, 거들이 받쳐주니까 히프도 위로 올라갈 수 있고 그런 거죠. 정말 위로 올라가요. 그런데 그건 과학적인 데이터에 의해 이뤄지는 게 아니고, 사람이 실제 체험으로 아는 거기 때문에 데이터를 제시하라고 하면 곤란하지만, 착용해 본 사람들한테 들은 거라, 저는 우리 제품의 효능을 믿습니다』

―기능성 속옷 매출액의 비중이 전체에서 어느 정도입니까?

『약 45% 정도 될 겁니다』

―나머지는요.

『네. 정수기가 35%, 건강식품, 화장품, 생활용품을 망라해서 나머지가 20%쯤 되죠』

―취급하는 종류는 대충 몇 가지 정도나 되나요.

『130종 정도 될 거예요』


매년 100억원씩 장학재단에 出捐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희 회사의 경영목표 가운데 하나가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 아닙니까. 재작년(2000년)에 「앨트웰 민초장학재단」을 만들어 140억원을 出捐(출연)했습니다. 첫해에 40억원, 두 번째 해에 100억원을 냈습니다. 금년에도 한 100억원 정도 더 出捐할 겁니다. 매년 100억원씩 내서 키워나가려고 하거든요』

―민초는 民草를 뜻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우리 회사가 여기에 오기까지 알게 모르게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다. 民草들의 돈이 모인 거니까 장학금을 받은 사람들은 앞으로 공부해서 民草들한테 잘 좀 해 줘라. 그런 뜻으로 장학재단 이름을 일단 그렇게 지었습니다』

―장학재단을 만든 특별한 이유라도.

『일본의 나쇼날 전기 창업주가 마쓰시다 고노스케(松下幸之助)라는 분 아닙니까』

―압니다.

『그 분이 한 20년 전에 政經塾(정경숙)이라는 걸 만들어 가지고 2년제 대학원을 운영했는데, 1년에 한 20명씩 뽑아서 공부도 시키고 월급도 주고 하면서 장래 일본을 끌고 나갈 지도자로 키운다고 했어요. 20년 전에 그 기사를 읽고 나도 똑같은 건 아니지만 그런 걸 한번 운영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제가 이젠 빚도 다 갚고 그랬으니까. 이젠 좀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대상은 대학원생들인가요?

『아니, 대학생들이에요.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서 재작년(2000년)과 작년(2001년)에 80명을 뽑았어요. 등록금 전액과 한 달에 30만원씩 생활비를 줍니다. 아르바이트 하지 말고 공부만 하라는 뜻이죠』

―분야는 제한 없습니까?

『네. 제한 없습니다. 다만 세 가지 조건을 걸고 있어요. 첫째는 사회에 진출해 가지고 다른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남루하고 초라하게 보이고 하는 사람들한테 정중하고 친절하게 좀 대해 줘라. 두 번째는 부정부패 비리에 절대로 연루되지 말고 자기가 속한 조직에 그런 원인을 제거하는 데 앞장 서 달라. 세 번째는 권장사항인데,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형편이 되면 10년 거치 10년 분할상환, 연리 2% 조건으로 상환할 수 있으면 상환해라. 그 대신 형편이 안 되면 안 갚아도 된다. 이런 조건을 걸었거든요』


水害 때 10억원어치 生必品 구입, 현지에 직접 전달

―매년 100억원씩 出捐하면 재단규모가 엄청 커지겠군요.

『제 최종 목표는 1년에 100명씩 뽑아서 4학년까지 400명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을 하지만, 그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자기들이 받은 걸 되돌려주면 자가발전이 될 거 아니냐. 그러면 재단도 커지고 수혜의 폭도 훨씬 더 넓어질 게 아니냐. 가능한 한 매년 기금을 확대해 나갈 생각입니다』

―무한대로요?

『네, 무한대로요. 하지만 사업이 매년 잘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 아닙니까? 1000억원이 모아지면 1000억원, 2000억원이 모아지면 2000억원 규모의 재단이 되는 겁니다. 장학재단으로 출발을 했지만, 미국의 유수한 연구재단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석사·박사도 키우고, 연구도 하고 어쨌든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민간재단으로 발전시키면 어떨까. 기초만 마련이 되면 자기 스스로 자가발전할 때도 있을 거기 때문에 그런 꿈을 가지고 있어요』

앨트웰은 1996년부터 소년소녀가장 123가구에 월 10만~30만원씩, 불우시설에 월 450만원, 에이즈연맹에 월 50만원씩을 기부하고 있으며 수재의연금,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 같은 非정기적 기부금을 내고 있다. 1996년부터 지금까지 총 기부금액은 26억5000만원이라고 했다.

―이번 수재의연금으로 1억원을 냈더군요.

『네. 그런데 수재민들이 생필품 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듣고 추가로 10억원 어치의 생필품을 구입해서 직접 전달했습니다. 1만8000여 개의 덩어리로 포장을 하느라고 全직원들이 며칠밤을 새웠습니다』

―그건 신문에 안 난 이야긴데.

『제가 신문에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직접 현지에 보내셨다구요?

『강릉, 김천, 합천, 의령, 산청에 실어다 줬습니다』

―앨트웰이 재무구조도 좋고 장래성도 좋은데, 상장사는 아니고, 코스닥 등록 기업도 아니거든요. 앞으로 상장이나 등록할 계획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저희 회사 주식을 샀다가 팔았다가 하는 걸로 손해를 봤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듣기가 싫고요. 저희 회사는 회사 발전에 공이 많은 사원들의 지주회사로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공을 많이 세우는 그런 사원이 있을 거고, 그런 사람들에게 스톡 옵션을 줘 가지고 주식을 받게 하고, 나머지는 아마 장학재단으로 많이 가지 않을까 싶네요』

―주식분포는 어떻게 돼 있나요. 회장님께서 100% 다 가지고 계신 거죠?

『80%쯤 가지고 있죠』

―나머지는 직원들이?

『직원들도 있고, 외부인도 있고』

―모두 주식회사 형태인가요?

『앨트웰 코리아는 개인회삽니다. 제 월급만 가지고 쓸 데 다 쓰며 살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비자금을 별도로 조성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니까 개인회사로 남겨둔 거죠. 거기서 버는 돈을 가지고 좋은 일에 씁니다』

―개인회사는 과세율이 높을 텐데요.

『감수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기부금 내라거나 그런 경우는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있다고 해도 단연코 거부할 거예요. 저는 지금도 자랑은 아니지만,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은 은행빚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권에 개입하거나, 투기, 특히 부동산 투기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일본의 마쓰시다 고노스케가 부동산 투기에 대해 부정적이에요.

『저도 부정적이에요. 사업에 필요한 땅은 구입하지만, 샀다 팔았다 해 본 적은 없어요. 특히 부동산 투기는 없는 사람들의 기회를 빼앗는 거거든요. 총론적으로 얘기해서 저는 경영목표에 충실하고 원리원칙과 법을 다 지키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모델을 만들고 싶어요』


『내 재산은 장차 장학재단에 들어가 있을 것』


―회사를 아들에게 물려 줄 계획입니까.

『본인의 능력이 닿고, 경영할 의사가 있다면 물려 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아들놈에게 선언했어요. 「애비가 있으니까 네가 남보다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능력을 검증해서 모자란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모가지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아들놈이 경영학을 전공한다길래 말렸어요. 경영학은 네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전공한다. 그러니 인생을 폭넓게 살려면 철학을 공부해라. 그래서 철학을 전공하게 됐어요. 앞으로 제 재산은 직원들에게 나눠줄 功勞株(공로주) 일부를 빼고는 대부분 장학재단으로 들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취미는?

『바둑입니다. 週末에는 가끔 골프도 치고요』

―핸디캡은 얼마나 됩니까.

『바둑은 기원 3급 정도(아마추어 3~4단), 골프는 보기플레이(핸디 18) 정도 합니다』

―제가 바둑이 기원 3급이고 골프도 보기플레이 실력입니다만.

『시간을 좀 쓰면 2급까지도 둡니다. 언제 한번 붙어봅시다』

―오랫동안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가 끝난 후, 기자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대접받았다. 반찬 서너 가지에 미역국이 나왔다. 식당은 「민주공화국」이었다.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과 사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식사를 했는데, 직원들은 회장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서로들 활발한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밥을 먹었다. 회사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金博 회장은 친지 소개로 만난 부인 高重熙(61)씨와 1968년에 결혼해 예나(32), 亨厚(21), 1녀1남을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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