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圓形의 傳說' 등 문제작을 많이 남긴 소설가 張龍鶴(1921~1999)씨는 소설은 반드시 漢字-한글 혼용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실천한 분이다. 張씨는 예술과 학문을 구분했다. 학문은 지식을 다루는 과학이므로 뜻만으로 족하다. 학문은 개념에 의해 진리를 알아내는 것이므로 뜻만으로 족하다. 예술은 다르다.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의 표현은 '뜻을 넘어선, 감각적인 현상화에 의하여 정서에 호소하는 이미지 활동'이다. 張씨는 말한다.
'과학은 개념에서 끝나지만 예술의 본질은 개념을 넘어선 이미지에 있고, 이미지를 떠나 예술은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지식의 글은 한글전용을 해도 무방하지만 소설의 글은 한글전용을 하면 마찰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漢字에는 이미지가 있지만 한글에는 그것이 없거나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한자는 글자 하나 하나가 일종의 추상화인 이미지 문자이다. 사람 人은 '인'이라고 읽으면 소리뿐이지만 뜻과 모양을 함께 인식하면 그림을 보는 것처럼 본질의 파악이 빠르고 기억은 오래 간다.
한글로 쓴 글은 한번만 읽어선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한자어엔 '전기(電氣 傳記 前期)'처럼 同音異義語(동음이의어)가 많고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면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있다. 따라서 한글로 된 글을 읽어내려가다가 중단하고 의미 파악을 위해서 다시 읽게 된다. 張씨는 소설의 경우는 이렇게 하면 '예술적 감상의 흐름'이 끊어진다고 지적한다. 모든 예술감상은 흐름이 중요하다. 음악을 듣다가 잘 모른다고 다시 연주를 하게 하거나 돌아가는 기계를 중단시키고 반복 청취를 할 수는 없다.
漢字로 쓴 문자를 읽으면 뜻과 이미지를 함께 인식함으로 이해가 빠르고 기억이 오래 간다. '박정희'보다 朴正熙가, '설원'보다는 '雪原'이 오래 간다. '우미가'라는 음식점 간판에선 아무 정서적 반응이 생기지 않지만 優味家는 뜻과 함께 이미지가 전달되어 그 간판을 보는 이로 하여금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도록 한다.
현대와 現代, 삼성과 三星, 조선일보와 朝鮮日報, 공동체와 共同體, 상도와 商道, 운정과 雲庭, 후광과 後光, 미진과 美眞을 비교해보라! 한자는 읽는 이로 하여금 발음과 이미지를 동시에 느끼게 하고 한글은 소리만 느끼게 한다. 前者는 입체적이고 後者는 피상적이다.
한글 간판을 단 음식점과 한자 간판을 단 음식점은 장기적으로 큰 차이가 날 것이다. 한자 간판을 오래 깊게 인식하게 되는 손님은 그 음식점을 자주 찾을 것이고 한글 간판은 一回性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한글專用으로 쓰인 역사책, 철학책, 전문서적은 70%가 암호이다. 이런 책을 읽고 공부하면 피상적 지식습득이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이 오래 계속되면 그 국가나 사회의 지식수준도 얕고 낮아진다. 한국의 경우 90% 이상의 전통문화와 역사기록은 漢字라는 그릇에 담겨 있다. 한글전용으로 이 민족문화의 그릇에 금이 갔다. 오늘을 살고 내일을 여는 데 도움이 되는 민족의 집단적 지혜와 기억이 담겨 있는 그릇, 여기에 금이 가니 지혜와 기억은 새어나가고 있다. 그런 문화와 역사의 파괴를 허용하는 국가나 국민들은 뿌리가 약해지고 가벼워진다. 바람이 불면 넘어진다.
왜 소설은 漢字를 혼용해야 하나?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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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5-17, 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