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6월29일은 민주화 운동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民主 실천 시대를 연 6.29 선언 20년이 되는 날이다. 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가 발표한 6.29 선언은 권위주의 정권을 민주정권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 선언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5년간 물태우라는 욕을 먹어가면서 민주주의의 실천을 주도했다. 6.29 선언은 한국 정치사장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그 뒤 등장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6.29 선언의 그늘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1999년에 노태우 대통령을 인터뷰한 기록을 다시 싣는다. 이 기록은 민주화 실천시대에 대한 중간평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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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泰愚 肉聲회고록(1)-權力의 갑옷을 벗은 전직 대통령이 들려주는 깊은 곳 깊은 이야기
『손목이 새콤새콤해질 때까지 쓰고 또 썼다. 여생을 전직 대통령의 기록문화를 만드는 데 바치겠다』
『북방정책은 북한을 양파껍질처럼 벗기는 遠交近攻의 전략. 북한의 개방이 바로 통일. 金日成의 頂上회담 초청을 거절했다. 金泳三 정부가 남북대화의 주도권을 놓친 것이 한스럽다』
편집자 注를 대신하여… 이 기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대통령이란 자리의 무게
2. 국가대전략-서울올림픽 유치
3. 북방정책의 철학과 戰略-모스크바와 北京을 거쳐 평양으로
4. 동구권 수교 秘話-헝가리가 징검다리 역할
5. 韓蘇수교와 고르바초프-그는 돈에 無知했다
6. 朴正熙·全斗煥과의 인연
7. 韓中수교와 대만 문제-義理와 國益 사이서 고민
8. 북한의 고삐를 잡다-한국을 안 통하고는 對北접촉 못하게 막다
9. 남북頂上회담 추진과 徐東權-털樽?밀사 교환 방문
10. 北核문제와 非核化 선언 내막-群山에 핵무기 있었다
<1999년 5월 월간조선>
* 盧泰愚 대통령 연보
1932년 12월 4일 대구직할시 동구 신용동 596번지에서 출생
1951년 7월 경북고 졸업
1955년 9월 陸士 졸업(11기), 육군 소위 임관
1968년 6월 육군대학 정규과정 졸업(중령)
1971년 11월 보병 제21연대장(대령)
1974년 10월 제9공수특전여단장(준장)
1979년 1월 보병 제9사단장(소장)
1979년 12월 수도경비사령관(소장)
1980년 8월 국군보안사령관(중장)
1981년 7월 전역(육군 대장), 정무 제2장관
1982년 3월∼4월 체육부장관
1982년 4월∼83년 7월 내무부장관
1983년 7월∼86년 5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1984년 10월∼86년 5월 대한체육회장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987년 6월29일 6·29 선언
1987? 8월 민주정의당 총재 취임
198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발표(7·7 선언)
9월17일 서울올림픽 개회선언. 다케시타 일본 수상과 韓日 정상회담(서울)
10월15일 서울장애자올림픽 개회식 참석
10월19일 제43차 유엔총회 연설(「한반도에 화해와 통일을 여는 길」)
10월21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韓美 정상회담(미국)
11월 3일∼14일 말레이시아, 호주,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방문
1989년 2월27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 韓美 정상회담(서울)
9월11일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천명 특별 연설
10월18일 미국 上下 양원 합동회의 연설
11월18일∼12월4일 유럽 순방(독일, 헝가리, 스위스, 영국, 프랑스)
1990년 5월 9일 민주자유당 총재 취임
5월25일 일본 국회연설(「변화하는 세계 속의 새韓日관계」)
6월 5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韓蘇 정상회담(샌프란시스코)
6월 6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 韓美 정상회담(워싱턴)
12월13일∼17일 盧泰愚 대통령 소련 방문
12월14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韓蘇 정상회담(모스크바), 모스크바대학 연설 (「냉전의 벽을 넘어, 평화와 번영을 향하여」)
1991년 9월10일 가이후 일본 수상과 韓日 정상회담
4월20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韓蘇 정상회담(제주)
6월29일∼7월 7일 미국, 캐나다 공식 방문
9월17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9월23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韓美 정상회담(뉴욕)
9월24일 유엔총회 연설(「평화로운 하나의 세계 공동체를 향하여」)
9월25일 살리나스 멕시코 대통령과 韓멕시코 정상회담(멕시코)
11월 8일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구축을 위한 선언」발표
1992년 1월 5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 韓美 정상회담(서울)
1월16일 미야자와 일본 수상과 韓日 정상회담(서울)
9월22일 유엔총회 연설(「평화와 번영의 21세기를 향하여」)
11월 8일 미야자와 일본 수상과 韓日 정상회담(교토)
11월18일∼19일 옐친 러시아 대통령 공식방한, 韓러 정상회담(서울)
1993년 2월24일 대통령 퇴임
= 편집자 注를 대신하여-이 기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내가 대통령이라면
마흔 여섯의 나이에 암살된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저명한 학자들과 담소(談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을 해보니 학자들이 쓴 과거 대통령 전기(傳記)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통령을 해보지 않은 학자가 과연 제대로 대통령 전기를 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도 퇴임 직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통치사료담당 비서관의 기록).
『노태우(盧泰愚)도 인간 全斗煥은 알지만 대통령 全斗煥은 모를 거야』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술을 마신 뒤에 기자들에게 내뱉었던 말,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도 대통령직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 부족을 개탄하는 의미를 품고 있다.
기자(趙甲濟)는 1970년대 말 부산에서 사회부 기자로 일할 때 시각(視覺)의 중요성을 절감(切感)한 경험이 있다. 부산 중심지 광복동 거리를 택시를 타고 지날 때였다. 인도(人道)와 차도(車道) 사이에 쇠말뚝을 이어 박아놓은 것이 보였다. 쇠말뚝 사이엔 쇠줄을 연결했다. 기자는 「누가 저렇게 살벌한 설치물을 만들었단 말인가」라고 개탄하면서 저 흉물(凶物)에 대해 취재를 해봐야겠다고 별렀다. 며칠 뒤 광복동 거리에 나갔다가 인도(人道)를 걷게 되었다. 쇠말뚝과 쇠사슬 때문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자동차 행렬에 신경쓰지 않고, 안심하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쇠말뚝이 고맙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행인(行人)의 시각과 승객의 시각은 정반대의 가치판단을 결과했다.
국가운영이란 것을 기준으로 할 때 대통령 자리는 정상(頂上)에서 내려다 보는 자리이고, 기자는 계곡에서 올려다 보는 자리일 것이다. 기자는 이번 盧泰愚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 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가 중국과 수교할 때 대만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했습니까. 수교 발표 며칠 전까지 대만 사람들에게 절대로 옛 친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너무 심한 배신(背信)이 아니었습니까』 盧 전 대통령은 한중(韓中)수교 부문에서 기자가 질문하기도 전에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도 대만에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이 우리에게 조건을 달았습니다. 자신들도 북한에 수교사실을 비밀에 붙일 테니 한국측도 대만에 비밀을 유지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북한이 韓中수교를 미리 알게 되면 어떤 방해책동을 할지 모르는데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기자는 잠시 「내가 대통령이었으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하고 생각해보았다. 과연 인구 12억 중국의 요구를 묵살하고 우방국가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인구 2천만의 대만측에 미리 韓中수교 예정일을 알려주고 양해를 구할 수 있었을까. 의리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자와 국익(國益)을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는 대통령의 시각차.
盧 전 대통령에 의한 그러한 결정의 당부(當否)는 오히려 韓中수교가 가져온 사후(事後)효과로써 판단될 것이다. 韓中무역액은 수교 연도인 1992년엔 63억7천9백만 달러, 93년엔 90억8천만 달러, 94년엔 1백16억6천6백만 달러, 95년엔 1백65억4천5백만 달러, 96년엔 1백99억 달러, 97년엔 2백36억9천만 달러, 98년엔 22%가 줄어 1백84억2천만 달러였다. 작년의 무역총액은 줄었지만 우리나라의 무역흑자는 54억6천만 달러를 기록, 역대 최고였다.
우리나라는 수교 다음해부터 對中 무역흑자를 기록해 왔는데, 작년까지의 흑자누계는 1백54억5천8백만 달러이다. 중국은 미국,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의 세 번째 큰 시장이다. 작년 한국인의 방중(訪中)인원은 48만7천명, 중국인의 訪韓인원은 8만9천6백명이었다.
盧泰愚 전 대통령과 이틀간 약 16시간의 대화를 나누면서 기자는 여러 번 『내가 대통령이었으면…』하고 생각해보았다. 이 인터뷰의 의미는 독자들이 대통령의 입장과 시각(視覺)에 서 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盧 전 대통령의 증언을 견디어낼 것인가
월간조선(月刊朝鮮)은 盧泰愚 대통령이 퇴임하기 직전인 1993년 1월호 별책부록으로 「비록(秘錄) 한국의 대통령」이란 책을 만들었다. 그 머리글에서 기자는 이런 말을 했다.
<月刊朝鮮은 그 동안 「대통령은 국민들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담긴 기사들을 주로 써왔다. 그런 시각을 한번 바꾸어 「국민들도 대통령의 고독과 고민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즉, 국민과 대통령은 마주 보아야 하는 사이란 뜻이다>
月刊朝鮮은 盧泰愚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집요하게 6·29 선언의 진상을 추적해왔다.
1989년 6월호 「全斗煥씨 측근들의 폭탄증언 『6·29 선언은 全斗煥 작품이다』」
1992년 1월호 「全斗煥 육성증언 6.29 前夜」
1992년 11월호「全斗煥 첫 발언 『이것이 6·29 正史다』」.
이 세 건의 기사는 盧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에 먹칠을 했다 하여 당시 정치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6·29 異說」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세월이 지나자 이설(異說)은 어느새 정설(定說)이 되었다. 요사이는 「6·29 선언은 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먼저 발상하여 盧泰愚 후보를 설득하여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는 쪽으로 굳어져 있다.
기자는 현직 대통령의 권위에 직격탄을 쏜 이 세 건의 기사가 月刊朝鮮에 실릴 수 있었고, 이 기사로 해서 압력은 많이 받았으나 아무도 안기부(安企部)에 연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주화의 혜택을 실감한 적이 있었다. 기자는, 주로 全斗煥 전 대통령의 증언에 많이 의존했던 6·29 관련 기사가 盧泰愚 전 대통령의 증언에 의하여 보완될 때 비로소 진상에 가까운 모습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기회를 기다려 왔었다. 한 사건을 온전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당사자와 관련자들의 시각을 종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盧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게 되었을 때 기자가 가장 호기심을 갖게 된 대목은 月刊朝鮮이 갖고 있는 6·29 선언에 대한 정보와 시각이 盧 전 대통령의 증언을 견디어낼 것인가, 아니면 수정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盧泰愚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러 가기 전에, 꼭 10년 전인 月刊朝鮮 1989년 7월호에 기자가 쓴 「盧泰愚 대통령 리더십 연구」란 기사를 다시 읽어보았다. 임기 2년째에 접어든 盧대통령이 민주화의 진통이 극에 달해 있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기자에게 다가왔는지, 또 기자는 그의 지도력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하고 있었는지를 1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검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백자 원고지 약 1백 장 분량의 이 기사의 처음과 끝은 이러했다.
<盧泰愚 대통령의 리더십이 가진 최대 강점은 「약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한 청와대 비서관은 말했다. 대통령이 약해 보이니까 국민들이 불안해하면서 『이제는 공권력도 믿을 바 못되니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자율, 자위 의식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이 사회의 각 집단으로 확산될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민주적인 자생력을 지닌 강력한 구조로서 뿌리박게 될 것이라고 그 비서관은 말했다. 그래서 盧대통령은 스스로를 약하고 답답하게 보임으로써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자율학습을 시키는 「커다란 어리석음(泰愚)의 지혜」를 실천하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1980년대의 한국을 변화시키고 있는 민주화운동은 盧대통령의 인간됨과 정치가됨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고, 盧대통령의 그런 변화는 다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의 역동성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변증법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12·12 군사변란의 지휘자에서 민주화를 리드하는 지도자로 변신한 盧대통령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시대정신의 산물인 셈이다. 따라서 盧대통령을 어떤 모습의 대통령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도 오늘의 한국인이 같이 지고 있는 숙제인 것이다.
위협당하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줄 강한 대통령, 또는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는 독재시대의 거울에 비친 「결단력 있는 대통령像」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면서 盧대통령을 약하다고 비판하고 있지 않은지를 생각해볼 때인 것 같다. 盧대통령의 약함과 강함에는 오늘날 한국인의 몫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盧泰愚씨를 일찍이 우리가 가져본 적이 없는 「강하면서도 선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식인은 자기에게 보다 정직해야 하고, 기득권층은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하며, 소외층은 자신의 탓도 할 줄 아는, 전국민적인 반성이 함께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이, 덧붙이고 싶은 기자의 사견(私見)이다>
이「盧泰愚 전 대통령의 육성(肉聲) 회고록」은 역사적인 문건이다. 전직 대통령이 네 분 생존해 있으나 지금까지는 한번도 공식적인 인터뷰를 허용하지 않았고, 회고록도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과 국민의 共感과 共有
盧泰愚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최초의 인터뷰를 月刊朝鮮과 갖기로 했을 때는 4시간 정도의 시간을 내기로 했었다. 기자는 여기서 욕심이 생겼다. 盧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통상적인 인터뷰가 아니라 「역사를 위한 육성증언」으로 확대하여 하나의 사료(史料)가 될 만한 작업을 하자는 욕심이었다. 기자의 이런 의욕에 대해서 盧 전 대통령은 동의해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盧 전 대통령은 1997년 12월 출옥(出獄)한 이후 측근들에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한 일들을 제대로 기록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이 더 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다』고 말한 뒤 곧바로 회고록 준비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盧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직접 공책 수십 권에 기록해 둔 기억들을 기초로 하여 주요 정책과 사건별로 구술을 시작했고, 관계자들을 배석시켜 정확성을 기했다. 이 구술 정리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 임하면서 盧 전 대통령은 자신의 구술자료를 간추려서 증언에 이용했다. 「집중연재·盧泰愚 육성회고록」 제1회분은 이틀간 총 16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한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전직 대통령이 작심하고 자신이 통치한 시대를 설명하고 해설해가는 인터뷰는 우리나라에선 전례(前例)가 없는 일이다. 기자는 盧 전 대통령의 해설을 들으면서 저절로 대통령의 시각에서 국정(國政)을 바라보는 가상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 체험은 기자에게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었다. 「내가 대통령을 해봤으면 더 정확한 기사를 쓸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망상(妄想)도 해보았다.
기자는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을 놓고 「따지고 가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증언을 충실하게 기록, 전달하는 것이란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일단 盧 전 대통령이 털어놓는 6共 비사(秘史)를 읽어본 다음에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순리(順理)일 것이기 때문이다. 주장이나 견해에 대해서는 『내 생각은 다릅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백 가지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사실」이듯 6공화국에 대한 평가가 급한 것이 아니라, 6共의 진실과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기자는 盧泰愚 전 대통령의 역사적인 증언을 잘 편집하여 독자들이 읽기에 쉽도록 하는 일에 치중했다. 사실들이 제대로 정리만 되면 평가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며, 그런 평가는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렵고 중요한 작업은 평가가 아니라 그 평가의 기초가 되는 事實과 史實의 축적인 것이다. 고급정보를 독점했던 대통령이 그 정보를 국민들과 공유하면서 한 시대의 혼란, 애환, 성패, 고뇌를 함께 느껴보는 일은 서로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내일의 역사 창조를 위해서 의미 있는 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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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통령이란 자리의 무게
심장병 입원說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위해 서울 연희동 자택(自宅)을 방문한 지난 3월30일, 공교롭게도 모 일간지에 「盧泰愚씨 심장병 입원說 한밤 소동」이란 기사가 실렸다. 사연인즉 盧 전 대통령이 오전에 골프장에 나갔다가 심한 가슴 통증으로 쓰러져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었다.
盧 전 대통령은 이 기사에 대한 소감으로써 『내가 오래 살란 모양이오』하고 웃었다. 이 소문이 나돌 무렵 盧 전 대통령은 자택에서 月刊朝鮮과의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감색 양복으로 정장을 한 전직 대통령은 권력의 갑옷을 벗은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마음 속에 담아 놓았던 말을 하게 된 감회가 새로운 듯 약간 들뜬 표정이었다. 응접실에서 이뤄진 이날 인터뷰에는 6共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과 공보처장관을 지냈던 손주환(孫柱煥) 전 장관, 그리고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일시 귀국한 盧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盧載憲)씨도 동석(同席)했다.
―최근에 교보문고에도 가시고 일반 국민과의 접촉도 여러 번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盧 전 대통령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盧 전 대통령을 보는 시선이나 반응이 어떻던가요.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향수심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교보문고에서 사람들을 만난 것은 극히 적은 숫자고, 요즘에는 쉬고 있지만 등산이나 테니스를 할 때, 또 대구 내려갈 때 추풍령 휴게소에서 잠깐 쉬어 우동 한 그릇 먹을 때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차에서 내려 휴게소에 가려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악수도 나누곤 합니다』
―대한민국 인구가 4천5백만인데 대통령이 되실 분은 그중 몇 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대의 행운이고 영광인 동시에, 대통령이란 자리가 주는 부담 때문에 물러나신 다음엔 전직 대통령으로 살아가시는 데 제약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몇년 전에 전직 대통령으로서 바람직한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사람들은 역사의 교훈을 왕왕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시대를 책임진다 했을 때 거기에는 상상도 못할 여러 가지 일들을 겪고, 고민도 많이 하고, 희비의 쌍곡선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모아서 후임자에게, 또 후배들에게 발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것을 못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말의 속도는 느릿느릿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과거에는 대통령이 정적(政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한 시대가 지나면 보복이 되풀이되다 보니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졌다 해도 실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나는 한 시대를 책임졌지만 적(敵)을 만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국정(國政)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마음의 자세랄까 철학이 「모든 것을 참자, 어지간하면 용서하자, 기다리자」(孫柱煥 전 공보처장관은 이것을 「참용기」라고 설명했다)는 신념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때문에 과거 朴대통령, 全대통령 시절에 한(恨)을 품었던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감싸안느냐, 안아서 그 恨을 녹여주느냐 하고 애를 많이 썼어요』
「전직 대통령 문화」를 만들겠다
그 예로 盧대통령은 얼마 전 작고한 이태영(李兌榮) 여사의 사례를 소개했다.
『李兌榮 여사, 내가 이분을 만나 욕을 많이 얻어먹었어요. 그분 말에 반론을 펴지 않고 무조건 들어주니까 다행히 거부적이고 반항적이던 자세가 다 풀리고 내가 하는 일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내가 얻은 노하우를, 옛날 선비들이 벼슬하다 낙향해서 후학(後學)을 기르듯 그런 입장에서 국가를 위해 이바지하겠다고 작정했지요.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사안들을 검토했습니다. 그 중에서 북방정책은 내가 기초를 닦았고, 내 다음 시대는 전과(戰果)확대라는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구상했는데, 그만 혼란이 생긴 겁니다. 내가 퇴임하니까 왜 소련과 경협(經協)을 했느냐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 북방외교라는 것도 돌아다니며 돈만 쓴 낭비외교가 아니냐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북방외교를 긍정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학자나 교수들도 북방정책의 본질이나 기본철학을 제대로 모르더군요. 잘못하다간 본질이 오도될 우려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북방정책」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고려대 언론대학원, 연세대, 경북대 등 몇 군데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니까 여기저기서 요청이 자주 오더군요. 그래 하와이의 東西문화센터에서도 초청이 와서 연설도 하고 강의도 하면서 정부에 도움을 줄 것은 주고 이바지해 나가야 되겠다, 이렇게 하면 퇴임 대통령으로서 바람직한 대통령 문화를 만들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盧 전 대통령은 『내가 덕(德)이 없다 보니 불행하게 이런 일들이 중단되고 말았다』고 아쉬워했다. 비자금 사건으로 인한 구속과 재판, 빗발치는 비난 여론, 수감생활, 전직 대통령을 비하하고 경멸하는 언론보도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盧 전 대통령은 그런 말로 우회하고 있었다.
『내가 어려움을 겪고 난 후 옛날의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나를 위시해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뭐냐. 여러분이 닦은 노하우, 또 우리가 이 나라를 위해 이룬 소중한 업적들이 많은데, 불행하게도 우리 다음 정권은 이것을 부정하고 팽개쳐버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자니 기본이 없다. 기본이 없으니 도약할 수가 없어 허공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21세기가 다가오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냐.
1980년대 말∼90년대 초, 그 당시 세계 여러 나라가 우릴 칭송하고 부러워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을 정리해서 앞으로 나라를 책임질 사람들에게 내놓고,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이것 아니겠는가. 이런 작업을 하다 보면 6共을 책임졌던 사람들의 실추됐던 명예가 회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마음을 합치자.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손목이 새콤새콤할 때까지 쓰기도 했다』
―최근에 부시 미국 대통령이 회고록을 썼습니다. 부시 대통령과 盧대통령께서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퇴임하셨는데 회고록은 저쪽에서 먼저 나왔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현직에서 물러나면 바로 회고록 작업에 돌입해서 보통 퇴임 후 5년 안에 회고록이 나옵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역사를 거의 같은 시간에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기 때문에 그 시대를 평가하는 데 정확성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회고록 쓰는 것을 어렵게 생각해서 공직자들이 회고록을 안 쓰든지, 아니면 쓸 때쯤 되면 기억밖에 남지 않아 정확성이 결여되곤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제가 듣기로는 盧 전 대통령께서는 옥중에 계실 때부터 노트를 하기 시작해서 회고록을 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언제쯤 회고록을 발간할 계획이십니까.
『내가 회고록을 쓰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져서가 아니라, 언젠가 역사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서 내가 겪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하고 있습니다. 생각날 때마다 메모를 하는데, 신나게 적다 보면 무리를 해서 손목이 새콤새콤해서 쓰지 못할 정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現職에 있을 때도 지금처럼 열심히 쓴 적은 없구마.
뭐를 체계적으로 쓴다기보다는 어릴 때 내가 어떻게 자랐는가, 내가 군 생활을 30여년간 했는데 군인으로서의 사생관(死生觀)은 무엇인가. 이것은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적어 보기도 하고. 어느덧 내가 정치인이 됐는데, 정치인으로서 무엇을 지향했느냐 이것도 가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룩한 것을 정리해야겠다. 그래서 앞으로 국가와 시대를 책임질 사람들에게 발판이 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주자는 입장에서 孫柱煥 장관이 여기 있지만 몇몇이서 자료도 모아보고,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물어보기도 하라, 이렇게 해서 나도 몇 글자 적어놓은 것이 있으니 이것을 중심으로 자료 정리와 사실 확인 작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대통령은 무한책임
―대통령이란 어떤 자리입니까.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대통령만큼 책임 의식이랄까 사명감을 갖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지금도 누구보다 金大中 대통령이 넓게는 역사에 대한 사명감, 국가에 대한 무한책임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아니라고 부정할 사람이 없어요. 예를 들어 날씨가 가물 때 내가 여러 번 경험으로 느꼈습니다. 「언제 비가 오나」하고 밤에 잠을 못 이루면서 창을 몇 번이나 열어보게 됩니다』 盧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올림픽 개막식이 1988년 9월17일이었는데, 이날 기상이 나쁘면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날 날씨가 좋아야겠다 하는 생각을 몇 달을 두고 골똘히 생각하고, 나중에는 「부처님, 하나님 그날 좋은 날씨를 주실 거죠」이렇게 질문하고 다짐했습니다. 나중에는 「틀림없이 날씨가 좋다」는 확신을 갖게 됩디다』
―朴正熙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지킬 때의 고독함을 언급하면서 『한강물이 넘치는지 아닌지는 둑에 서 본 사람이 제일 잘 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요. 「둑에 서 본 사람」으로서의 대통령을 경험한 분들은 역사를 보는 눈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의 인물들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에 존경하는 인물이 많습니다. 김유신(金庾信) 장군도 참으로 존경합니다. 우리의 고유문화를 중국이라는 큰 나라에 동화되지 않고 유지해 온 데 대해서도 자부를 느낍니다. 이것은 신라문화를 뿌리로 우리 고유문화를 창조하고, 그것이 다른 데 동화되지 않고 이어져 온 것이죠. 내가 문화사상을 깊이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예컨대 원효(元曉)사상 같은 것은 우리 고유문화의 근원과 본질로 자랑스럽게 간직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합니다』
―李承晩, 朴正熙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李承晩 대통령도 명암(明暗)이 있지요. 건국(建國) 당시 우리나라의 사정과 환경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일제(日帝) 36년을 통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파괴당하고, 일본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공부를 시켰나 사람을 길렀나. 李박사가 정권을 잡고 행정을 해보려 하니 日帝시대 군수(郡守) 이상을 지낸 사람이 몇 안됐다고 해요. 李박사가 친일파(親日派)를 등용했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日帝시대 親日을 했다 해도 방대한 국가 조직을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을 활용해야 될 것 아니겠는가. 李박사만큼 항일(抗日)정신이 투철한 분이 드물 정도였던 분이 친일파를 등용한 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지 않느냐, 이런 차원에서 그분이 어려운 여건에서 건국을 했다는 것을 존경합니다』
인터뷰 초기의 경직됐던 분위기가 시간이 흐르면서 부드럽게 변해갔다. 盧 전 대통령의 어투도 자연스럽게 바뀌어 갔다.
―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주시죠.
『그분은 조갑제(趙甲濟) 편집장이 朝鮮日報에 써나가는 글(「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90% 이상 공감하는 것을 답으로 요약하고 싶구마. 우리가 자유다 민주다 하는데, 굶어죽는 사람이 무슨 자유가 있고 민주가 있겠소. 내가 朴대통령을 존경하는 것은, 물론 내가 그분은 직접 모시기도 했지만(편집자 注 : 盧 전 대통령은 1955년 9월 육사(陸士)를 졸업하고 5사단 소대장으로 부임했는데, 당시 5사단장이 朴正熙 장군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수천년을 통해 우리 민족이 품은 세 가지의 큰 한(恨)이 있어요. 가난의 恨, 무지(無知)의 恨,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恨, 이 세 가지 恨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朴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있던 시대에 배고픔의 恨, 無知의 恨, 또 자주국방이라는 기치에서 국방력을 강화시켜 강대국도 우리를 넘겨볼 수 없는 안보태세를 갖추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朴대통령을 존경합니다.
―盧 전 대통령께서는 문화권으로 보면 신라, 불교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아까 김유신 장군을 높이 평가한다고 하셨는데, 교보문고에 가서 김유신과 관련한 책을 구하려 하면 한 권도 없습니다. 고려의 김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을 쓸 때까지는 김유신에 대한 평가가 제일 높아서 삼국사기에 문무왕(文武王)이나 태종 무열왕보다 더 길게 쓰여진 분이 김유신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신라통일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김유신에 대한 평가도 낮아지고 있습니다.
『흔히 김유신 하면 삼국통일을 이룩한 주인공으로서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분이 신라 3대왕에 걸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우리의 민족성이나 정치 속성으로 봐서 권력을 장악하면 뭔가 일을 내려고 하고 합니다. 김유신이 3권을 좌우하다시피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조금도 남용하지 않았어요. 뿐만 아니라 문무(文武)를 균형 있게 조화시킨 때가 신라 말고 언제 있었습니까. 김유신 장군이라고 하지만 文의 개념에서 더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지. 文武의 균형을 이룩함으로써 국가 발전, 국가 안보 등을 돈독히 발전시켜 나가고, 또 신라라는 국가의 법통(法統)을 그대로 지켜 나갔습니다. 이럴 때가 우리 역사에서 극히 드물지 않았느냐, 그것만 보더라도 존경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해요』
군사문화의 본질
―삼국통일을 시작한 분은 태종 무열왕인데 완수한 분은 文武王입니다. 이분이 돌아가고 나서 시호를 文武王으로 정한 것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원동력이 文武를 같이 아우른 데서 나온 것이다 하는 교훈을 후세에 전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삼국통일과 비슷한 상황에서 남북통일을 지향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데, 이럴 때 文武를 다시 한 번 현대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盧 전 대통령께서는 군사문화 속에서 성장하셔서 민주화를 실천하는 시대를 연 분입니다. 군사문화를 반민주(反民主)라는 시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입니다.
『군사문화 하면 「反民主 문화다」이렇게 생각하는 식자(識者)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건 너무 피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군사문화인가를 미시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와는 아주 상이한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盧대통령은 건국(建國) 이래 軍을 유지해 온 군사문화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창군(創軍) 때는 미국의 주도에 의해 軍을 건설했지만 軍을 이끌어 나가는 고급간부 전부가 일제시대 일본군에서 훈련받고 성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자연히 일본 군국주의 색채가 짙을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軍의 조직이나 제도는 미국식이었어. 군사학이나 軍의 규정은 미국식이니까 초기에는 갈등 속에 지내왔습니다. 이게 언제 변하게 됐느냐면, 정규 육군사관학교가 1951년 전쟁 때 진해에서 창설됐어요. 그전에는 육사(陸士)가 3개월, 6개월, 최고 1년 이렇게 있었지. 정규 陸士는 4년제로서 미국 웨스트 포인트 제도를 그대로 도입해서 학과 과목도 웨스트 포인트 생도들이 배우는 과목을 그대로 배웠단 말입니다. 이러니까 미국 군대를 어떻게 평할 것인가.
아마 「민주주의 국가의 군대다」이렇게 평할 겁니다. 미국에서 1∼2차 대전(大戰)을 통해 軍이 이바지한 것, 정치인들과의 관계, 이런 것을 보니 정치 지도자를 상전으로 모시고 안보를 위해 책임을 다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또 미국 군대의 제도와 규정, 여러 생활방식의 기본틀은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해서 만들어진 제도이며 운영이었지요. 우리가 모름지기 그 영향을 받아왔고 체질화되고, 인생관 확립에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왔습니다. 나중에 분석해 보니 민주주의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생활은 민주주의 절차를 자연스럽게 밟아온 겁니다』
반면에 盧대통령은 『우리가 민주주의자라고 여겼던 많은 민간 정치집단들이 과연 민주주의 절차가 체질화되었느냐 하는 문제는 깊이 음미해 봐야 한다』고 여운을 남겼다.
―군대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면 선거를 통해 지휘관을 뽑는 것이 아니니까 결국 민주주의를 생활화하는 「제도적 장치」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어떤 결정을 만들 때 여러 사람이 참여한다는 것이 되겠습니다만, 결국은 참모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이런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참모 및 예하 지휘관, 그러니까 조직의 골간이 민간용어로 말하자면 직접선거와 간접선거로 비유할까요. 어떤 과업을 결정함에 있어 일등병도 한 표, 중사도 한 표, 소대장도 한 표 이런 제도는 아니지만 소대장은 소대원의 의사를 대변해서 참여하는 것이고, 많은 지휘관들이 참여해서 과업을 결정합니다. 그 참여 절차가 참여해도 되고 안해도 될 만큼 아리송한 것이 아니라 뚜렷하게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생활화가 됩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朴正熙, 全斗煥, 盧泰愚 이 세 분을 대표하는 노선은 기본적으로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지향하는 국가주의라고 생각합니다. 盧 전 대통령께서는 여기에 민주주의라는 것이 첨가되기 때문에 앞의 두 분과는 조금 다릅니다만. 반면에 양김(兩金)씨로 대표되는 분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분들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분들과 국가주의적 노선을 채택했던 분들이 현대사의 두 바퀴가 되어 대한민국이라는 수레를 밀고 왔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제가 질문드리고 싶은 것은 민주주의를 요구한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盧대통령이란 분이 탄생한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사람이란 스스로 개혁하기가 힘든데, 외부에서 요구하고 여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내키지 않아도 민주적으로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 요구세력들의 우리 현대사에 대한 기여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럼 습득정권이네』
盧 전 대통령은 이 질문에 『시대가 상황에 맞는 지도자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朴대통령 때는 가난을 물리치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에 적합한 지도자가,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국민들이 「못살아도 좋으니 민주주의 하자」했다면 朴대통령이 5·16 혁명에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金日成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고, 배가 고프고 죽을 지경이다 살려내라, 여기에 의정단상에서는 밤낮 싸우고, 그런 정치인을 국민이 못 믿겠다 하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에 5·16 군사혁명이 성공했던 것이고, 따라서 이것이 시대의 요구였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또 全斗煥 대통령은 좀 특이한 입장이었습니다.
1970년대 말에 朴대통령이 불행하게 되기 직전 몇 년간 우리 국민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국가는 文民이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공통적인 상식이었지요. 이런 높은 수준을 가진 文民들이 있는데 軍部 아래 들어간다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 識者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어요. 朴대통령이 경제를 발전시켜 나라를 중흥시켜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軍部 그만두시오」하는 거센 저항이 불시에 권력의 핵을 사라지게 한 겁니다. 자연현상도 그렇잖아요. 적도 근방에서 기류(氣流)의 진공상태가 되면 태풍이 일어나는데, 朴대통령 서거로 권력의 핵이 진공상태가 된 겁니다. 그러니 거센 태풍이 몰아칠 수밖에 없는 것이고…』
盧 전 대통령은 『이 태풍을 「이제는 文民이다」라고 주장했던 분들이 잠재울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요』하고 말했다. 文民 정치세력이 이 태풍을 잠재우지 못하고, 오히려 태풍을 부채질하는 입장이 되니까 국민들이 또 한 번 혼란과 위기의식에 빠졌고, 이런 혼란을 정리한 것이 全斗煥 전 대통령이라는 설명이었다.
『金泳三씨나 金大中씨 이런 양반들이 이런 혼란을 질서 있게 이겨나가야 한다는 호소와 더불어 국민들이 여기에 뜻을 맞추었더라면 후의 역사는 달라졌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고 책임질 사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농담을 하더군요. 5共의 본질이 뭐냐. 이것이 지금도 역사적 시비로 남았습니다. 재판에서는 쿠데타다 뭐다 단죄를 했지요. 5共 당시에도 내가 대표위원이 되어 민정당 연수원에 가보니까 5共의 본질이 뭔지 모르더라고. 전에 문교부장관을 했던 누가 와서 「5共의 본질은 쿠데타다」하는 얘길 했다고 하더군요.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쿠데타가 아니야. 쿠데타 같으면 정권이란 목표가 있어야 하고, 정권을 빼앗게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 하는 (계획이) 나와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얻어진 정권입니다. 어떻게 얻어졌느냐.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 온몸을 바쳐 최선을 다한 결과가 우리 쪽으로 온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친구가 「그럼 습득정권이네」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경우인데 5共이 질서를 잡았고, 경제도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돌아서 연간 10% 이상 GDP 성장이 계속됐는데 다시 그런 식(대통령 간선제)으로 집권하겠다는 것은 엄청난 저항이었지요. 그래서 1970년대 말 상황이 되풀이된 겁니다. 내가 간접선거의 대통령 후보로 여당에서 지명을 받았지만 국민적 저항이 심했습니다. 시대가 당시 요구하는 사안은 「잘사는 것이고 뭐고 다 싫다, 이제는 민주주의 해라」이것이었어요. 내가 보기에는 「이제 군대는 물러앉아라」하는 소리가 귀가 찢어지도록 들려왔어. 여기에 부응한 것이 6·29 선언이었지요』
金大中 구명 설득
盧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꾸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기 孫장관도 전부터 같이 있었지만 (盧대통령은 육군 소령 시절 당시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孫柱煥씨와 처음 만난 후 40여년을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됐다고 한다), 내가 자라면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金泳三 대통령 같은 분은 젊을 때부터 대통령을 꿈꾸었다고 합디다. 꿈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요. 누구나 뜻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내 경우는 「꿈도 꾸지 못한 사람이 왜 대통령 됐느냐」하는 나무람을 받는다 해도 사실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盧 전 대통령께선 金大中 내란 음모 사건 때 金大中씨 구명에 일정한 역할을 하셨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만 해도 아마 군부(軍部)의 거의 절대 다수가 金大中씨를 사형하자는 것이었지. (우리에게 있어 金大中씨는) 정적(政敵)이 아니거든. 그분은 朴대통령과 政敵 관계였지. 이걸 단순하게 생각하더라도 金大中씨를 사형하면 全斗煥 대통령은 내 친구 아닌가. 친구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한다는 것은 안될 말이다. 뿐만 아니라 피를 묻힌다고 했을 때 全대통령은 독재자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독재자의 특징이 政敵을 죽이는 것이고, 장기 집권하고, 초장부터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내가 강하게 가졌거든요.
이런 뜻을 내가 몇 번 全대통령에게 표시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全대통령이 「그게 아니다」하는 반론이 없었으니까 나의 심중에 공감한 것으로 믿었지. 그런데 몰아치는 분위기는 전부 그쪽(사형)으로…. 軍部 핵심요원들 보고 진정 全대통령을 위하고 그분에게 충성하는 입장이라면 그분의 생각에 공감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버지 여읜 외로움 달래다가 노래와 친해졌다』
―지금까지 작곡하신 것이 몇 곡이나 됩니까.
『몇 곡 안했어요. 음악에 소질이 있는 것은 아버지 영향인데.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했던 것만은 틀림없어. 그 시골 마을에 우리집에만 유성기가 있었어요. 서너 살 되었을 때 아버지 무릎위에 앉아서 들었던 곡을 지금도 기억해. 현인(玄人)씨나 김정구(金貞九)씨 이런 분들이 가사를 잊어먹은 곡도 내가 알고 있어요. 옛날 곡 중에 「순풍에 돛을 달고」라는 것이 있어요. 근래에 은방울 시스터가 부르더라고. 그것이 내가 어릴 때 아버지 무릎 위에서 들었던 것이야. 옛날에 채규엽씨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야. 玄仁씨보다 선배지요. 들어보니까 자기들이 기억은 나는데 가사가 기억이 안 난다고 해서 내가 가사를 3절까지 적어준 적이 있어요』
―그걸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유품이 유성기, 옥퉁소, 바이올린도 있었다는데 기억이 안나요. 내가 1932년생인데 1938년에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느라 유성기를 틀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나도 곧잘 노래를 잘 해, 휘파람으로 기이한 소리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국민학교 다닐 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고, 중학교 다닐 때는 합창부도 했고.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해서 작곡을 한다든지 이런 것은 못했습니다. 소질은 있었지요. 내가 초급 지휘관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연대장을 할 때 온 정력을 부대지휘에 집중하니까 음상(音想)이 떠올라, 그래서 책상을 빙빙 돌면서 수첩을 하나 꺼내서 기자들 속기하듯이 音이 올라가는 것은 올리고, 내려가는 것은 내리고 하다보니 며칠 지나도 그 音想이 머리 속에 박히더라고요』
―악보에 그리신 것은 아니군요.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한 뒤 작곡할 줄 아는 사람을 불러서 악보에 옮기고 불러보라고 했지요. 나도 감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이만하면 애들 사기가 올라가겠다해서 연대가(8사단 21연대가)를 만들었고. 공수부대를 내가 창설했거든, 부평에서. 그래서 9공수여단가를 내가 만들었고』 盧泰愚 대통령 작사 작곡의 보병 8사단 21연대가는 다음과 같다.
비바람 눈보라 억세게 불어라/
먹구름 무엇이냐 닥칠 대로 닥쳐라/
사나이 품은 뜻 이 목숨 다하여/
장하다 독수리 씩씩하게 자란다/
그 이름 드높은 21연대
『백마부대는 사단歌가 있기 때문에 「백마혼(白馬魂)」이라는 것을 하나 만들었고, 수경사령관 할 때도 「충정의 길」은 몇몇 가수들에게 시켜보았더니 패티金이 자기가 부르겠다고 해서 패티金이 불러서 디스크에 넣었고. 다른 노래는 조영남 엄정행이 불렀어요』 盧대통령은 퇴임 직전 자작곡(自作曲)과 애창곡을 모은 「충정의 길」이란 CD에는 盧 전 대통령이 직접 부른 「베사메 무쵸」가 수록돼 있어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기자는 이 CD를 구해서 들어봤는데 盧 전 대통령의 노래 솜씨는 「가수 못지 않은 수준」이란 느낌이 들었다.
「베사메 무쵸」에 얽힌 사연
―전에 CD를 취입할 때는 청와대에서 하신 거죠?
『최석립(崔石立) 경호실장에게 불려갔는데 지휘자를 데려오고 반주를 KBS에서 녹음을 해 와서 거기에 맞춰서 나보고 노래를 불러라 그래요』
―베사메 무쵸가 애창곡이 맞습니까.
『그게 아닌데 어찌 그리 되어 버렸어요. 사람들이 그 노래를 좋아해요. 대통령 되기 전에 한동안 많이 불렀어. 당 대표할 때 모임이 있으면 사기 올라간다고 「대표님 한 번 부르시오」 자꾸 신청하기 때문에. 그런데 가사가 좀 그렇잖아요. 대통령 되고 나니까 수석 중에 한 이 「이제 베사메 무쵸는 부르지 마십시오」그래서 안불렀어요』 그러다가 盧대통령이 베사메 무쵸와 다시 조우하게 된 것이 멕시코 국빈(國賓)방문 때였다고 한다.
『내가 멕시코에 도착하니까 음악이 전부 베사메 무쵸야. 그래서 살리나스 대통령한테 물어 보았어요. 「이 노래가 멕시코 국민들이 좋아하는 노래냐」고. 그랬더니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 그래요. 우리로 치면 아리랑과 마찬가지야. 그리고 베사메 무쵸를 작곡한 작곡가를 초청해 놨어요』
「손에 손잡고」는 예언적인 노래
―그것 말고 또 무슨 노래를 좋아하십니까.
『이미자(李美子)가 부른 「아씨」라는 노래가 있지. 올림픽 다음부터는 애창곡이 「손에 손잡고」야』
―그 노래 가사에 보면 「브레이킹 더 월(Breaking the Wall)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데, 번역은 「벽을 넘어서」라고 했죠.
『올림픽뿐만 아니라 북방정책, 소련이 무너지는 것, 동서독 통일까지 이 노래 속에 다 예언이 되어 있어요』
―어떻게 보면 盧 전 대통령께선 서울 올림픽과의 인연으로 북방정책과 만나신 것 같습니다.
『서울 올림픽의 모토가 화합과 전진이야. 고대 올림픽이 그랬거든. 힘센 사람들은 창칼을 버리고 발가벗은 뒤 힘을 겨루고, 왕들은 모여서 어떻게 하면 전쟁을 막는가 평화를 이야기하고.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그들대로 강론을 하고. 그야말로 평화의 상징탑이었어. 올림피아를 중심으로 해서 도시국가들이 많이 싸웠잖아요. 그런데 4년마다 한번은 싸움을 중지하는 거야. 이런 도중에(올림픽이) 없어졌거든. 그러나 근대 올림픽이 다시 생기면서 모토가 고대 올림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는데 못 돌아갔어요.
정치적인 이용도 했고,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 최근에는 모스크바와 LA의 반쪽 올림픽, 피로 얼룩진 뮌헨 올림픽이라든지. 이 모든 것을 극복해서 이번만은 진짜 「평화의 상징」을 꽃 피워보자, 이것이 내 욕심이었어요. 나중에 나오겠지만 왜 우리가 올림픽을 열게 되었는가. 처음에는 (올림픽 유치하자니까) 미친놈으로 취급당했는데 그것을 극복했어요. 올림픽은 우리나라를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고, 이것은 대운(大運)이다 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가졌지. 유치 스토리 들었어요?』
―예,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런 내용들을 적어놓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전에 적어 놓은 걸 보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盧대통령은 미리 준비한 자료를 이것저것 살펴보더니, 그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표지에는 「북방정책의 시동(始動)… 서울올림픽에서」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孫柱煥 전 장관은 『이 자료는 盧대통령께서 집필한 내용과 말씀, 그리고 해당 참모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盧대통령은 깨알같은 글씨가 점점이 박힌 노트를 몇 권 보여주었다. 그것은 盧대통령이 수감생활 중 회고록을 집필중인 것으로 언론에 보도됐던 바로 그 노트였다. 회색빛 겉면, 무궁화 마크 안에 「법」(法)자가 찍혀 있는 노트가 족히 30여 권은 되었다. 盧대통령은 준비된 「서울올림픽」자료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전직 대통령의 육성증언, 육성 회고록이 시작되는 셈이다.
6.29 선언 20년/노태우 육성 회고록 再錄(1)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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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5-21, 10: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