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泰愚가 말하는 북방정책의 秘話(3)

金宗輝·朴哲彦「투 톱」으로 북방정책 추진
다시 盧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후에 북방외교 과정에서 참모들간에 알력이 있었다느니, 특히 미국 측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신문 잡지 등에 실리곤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당시 미국은 나의 정책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건 나를 지원하고 믿고 도와주었다. 만약 미국이 내게 기분이 나빴으면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와의 회담은 불가능했다.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있어 미국은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미국은 2차대전 때 아주 가난했던 우방들이 경제와 민주주의가 모두 발전해 미국과 나란히 국제사회에서 훌륭한 역할을 하기를 바랐지만, 한국을 제외하고는 그런 나라가 없었다.

대만이 좀 발전하기는 했지만 미국과 외교관계가 끊어져 버린 데다가, 과거 외교관계가 있을 때에도 미국은 대만을 민주주의하는 나라로는 보지 않았다. 싱가포르 역시 이광요(李光耀) 수상 자체를 미국의 지식층들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리핀도 열심히 도와주었지만 별로 칭찬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으니 내세울 만한 나라가 없었다. 한국은 위태롭기는 했지만 자유진영의 첨단에서 자유를 지키는 우방으로 훌륭하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민주주의와 인권문제였는데, 이것도 나의 집권 후에는 해결되어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감으로써 자신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피를 나누면서 도와준 우방이 이렇게 발전한 데 대해 미국은 보람을 느끼면서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한국 대통령이 미국의 이익에도 일치하는 일을 하겠다는 데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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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방정책의 철학과 전략-모스크바·북경을 거쳐 평양으로
(1999년 5월호 월간조선)

金宗輝·朴哲彦「투 톱」으로 북방정책 추진

화제는 자연스럽게 북방정책으로 이어졌다. 盧 전 대통령은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영종도 국제공항, 경부고속전철도 북방정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서 『후세의 역사를 위해서라도 당시 상황을 정확히 밝혀놓는 것이 좋겠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盧 전 대통령은 자신의 북방정책은 김종휘(金宗輝) 외교안보 수석비서관과 박철언(朴哲彦) 정책보좌관을 투 톱으로 하여 전개했다고 설명했다. 육성증언을 직접 들어본다.

<내 북방정책에는 金宗輝 외교안보 수석비서관과 朴哲彦 정책보좌관이 큰 역할을 했다.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것, 기본적인 것은 金수석이 전부 관장했고, 특사(特使)를 보내야 한다든가 하는 비공식적 일들은 朴보좌관이 주로 수행했다. 나는 북방정책을 전개하면서 당면목표와 최종목표를 설정했다. 그리고 단계도 1∼3단계로 구분했다.

우선 1단계는 여건조성 단계로 동구권 소련 중국과의 수교(修交)까지가 제1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북한을 완전 포위하는 것이다.

2단계는 남북한 통일인데 「남북한 기본합의서」가 그것을 위한 하나의 성과였다.

그리고 3단계가 앞에서 이야기한 최종목표, 즉 우리의 생활 문화권을 북방으로 확대시켜 나간다는 것이었다.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영종도 국제공항, 경부고속전철도 그 기본구상은 이같은 북방정책을 뿌리로 해서 마련된 것이다. 고속철도의 기본 구상은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아니라,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평양-신의주-시베리아-유럽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내가 일본에 갔을 때 『일본에서 부산까지 해저(海底)로 와서 痢??함께 어깨를 나란히 해서 가자』고 국회 연설에선가 비친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같은 구상을 담고 있다>

盧 전 대통령은『고속전철에 대한 우리의 구상과 기밀을 서방 국가들이 알아채고 고속전철 입찰 경쟁이 심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히 서울-부산 노선만 염두에 두었다면 서방 국가 회사들 입장에서는 별 수지가 맞지 않는 사업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

<내가 1987년에 대통령 후보로서 미국을 방문해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한 학생이 내게 한국 젊은이들의 반미(反美)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물었다. 나는 그때 『그것은 反美가 아니라 자존심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1세대들은 자존심을 잃었다. 일제(日帝)의 폭압 아래서 우리의 자존심은 말살되었다. 우리의 역사, 문화, 자존심은 다 말살되고 살기 위해 비굴해지면서 생명을 구걸해 왔다. 그런데 우리의 2세들은 그렇지 않다. 이 사람들이 나중에 성장해 나라의 책임을 질 위치에 서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우호적이 될 것이 틀림없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이해해 주길 바란다』고 답변했다.

당시 미국의 언론이나 지도자들은 韓美관계에 대한 나의 철학과 입장이 어떤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내가 북방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더라도 일단은 정부차원에서 나를 지원해주고 응원해 주었다. 중국, 소련과의 수교 때도 미국의 지도층 가운데 슐츠 전 국무장관 등 여러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북방정책 비판

그러나 盧대통령의 북방정책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新東亞(1993년 2월호)에는 북방정책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 대목이 발견된다.

<…북방정책은 실행과정에서 균형, 조정 및 가치감각을 상실하여 전통적 우방을 소외시키고 투자에 상응하는 이익을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기도 했다. 한국이 떠들썩하게 북방외교를 과시한 것이 美·日의 대한(大韓) 통상마찰을 심화시킨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나, 대만에게 사전통고도 없이 韓·中수교를 감행하면서 대사관마저 비워줄 것을 요구한 것은 균형과 조정을 소홀히 한 좋은 예였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盧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하나도 희생하지 않고 전부 다 큰 것을 얻는다면 그 이상 좋은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해야 할 때도 있게 마련이다. 그 작은 희생을 너무 과장해서 평가하는 데 대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다만 대만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데 대해서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전통적 우방인 대만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내면적으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보면서 노력했지만, 중국 측이 다른 나라들의 전례(前例)를 제시하면서 요구해 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우회적, 간접적인 표현으로나마 그들을 이해시키고 무마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수교 사실을 사전에 분명하게 알려주면서 「미안하다」고 해야 했는데 그것조차 하지 못해 더욱 마음이 아프다. 당시의 국제정세상 12억이 넘는 중국대륙과 인구 몇천만 안되는 대만을 똑같은 비중으로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라의 이익을 생각하는 차원에서 대(大)를 얻기 위해 소(小)를 불가피하게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盧 전 대통령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수교를 하면서 대만 사람들에게 「안됐다」하면서도 불가피하다고 보았지요. 첫째는 현실적으로 나라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만이 따지고 보면 역사적으로 중국이 더 오랜 친구다 이런 생각이 들었구먼. 외교란 건 솔직하게 털어놓고 양해를 구하는 그런 게 안돼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이란
1988년 7월7일 盧泰愚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바 「7·7선언」6개항을 발표했다. 이 특별선언에서 盧대통령은 북방정책의 실천적인 행동지침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각계각층의 남북동포 상호교류를 추진한다.
2. 이산가족 生死확인 및 상호방문을 지원한다.
3. 남북 직접교역을 위한 문호를 개방한다.
4. 우리 우방의 對북한 교역을 인정한다.
5. 남북간의 소모적인 경쟁, 대결외교를 종식한다.
6. 북한이 美日 등 우리의 우방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

*북방정책 관련 주요 일지
● 1973년 6월23일
일명 「6·23선언」발표. 『우리에 대하여 적대적이지 않는 한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공산국가들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한다』고 선언
● 1983년 6월29일
李範錫 외무장관, 국방대학원에서 열린 「6·23선언」10주년 기념특강에서 정부 차원에서 「북방정책」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

1988년
● 2월25일 盧泰愚 대통령, 제13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전방위적(全方位的) 외교정책으로 북방정책 펴나갈 것임을 피력
● 3월1일 盧泰愚 대통령, 3·1절 제69주년 기념사에서 북방정책과 통일정책의 연계상정을 밝힘
● 5월30일 盧泰愚 대통령, 제13대 국회 개원식 연설에서 북방외교정책의 추진배경 설명
● 7월5일 유고 슬로베니아공화국의 수도 류블랴나에 무역사무소 개설
● 7월7일 盧泰愚 대통령,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6개항 발표
● 10월3일 유고슬라비아, 서울에 무역사무소 개설
● 10월25일 한국정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상주대표부 건설
● 12월27일 헝가리 정부, 서울에 상주대표부 개설

1989년
● 2월1일 韓·헝가리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정부수립 41년 만에 사회주의 국가와 최초의 외교관계 수립)
● 4월3일 소련, 한국에 상의(商議) 무역사무소 개소
● 4월13일 코트라, 폴란드에 무역사무소 개소
● 11월1일 韓·폴란드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 11월22일 盧泰愚 대통령 헝가리 방문(한국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 방문)
● 11월29일 韓蘇 영사관계 수립에 합의
● 12월27일 韓·유고슬라비아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1990년
● 1월16일 알제리와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 2월22일 주소(駐蘇) 대한민국 영사처 개설
● 3월20일 정부 및 여당 대표단 3월27일까지 소련 공식방문(金泳三 대표와 朴哲彦 장관의 알력 발생)
● 3월22일 韓·체코슬로바키아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 3월23일 韓·불가리아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 3월26일 韓·몽고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 3월30일 韓·루마니아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 6월5일 盧泰愚 대통령,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첫 韓蘇 정상회담(제1차 韓蘇 정상회담)
● 9월30일 韓·소련 대사습 외교관계 수립
● 11월7일 보리사부 요비치 유고 대통령, 동구권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訪韓
● 11월15일 곤츠 헝가리 대통령 訪韓
● 12월7일 스콜로프, 초대 駐韓 소련대사로 부임
● 12월13일 盧泰愚 대통령, 12월17일까지 소련 공식방문(제2차 韓蘇 정상회담)

1991년
● 4월19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한국 공식방문. 4월20일까지 제주도에 머물면서 정상회담(제3차 韓蘇 정상회담)
● 8월22일 韓·알바니아 수교
● 9월18일 유엔총회, 남북 유엔 가입안 만장일치로 통과
● 9월28일 부시 대통령, 미국의 지상 및 해상 발사 단거리 핵무기 폐기 또는 철수하겠다는 핵무기 감축안 발표
● 11월8일 盧泰愚 대통령 한반도 비핵화선언 발표
● 12월18일 盧泰愚 대통령 核不在 선언
● 12월31일 남북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

1992년
● 8월24일 韓中수교 동시발표
● 9월27일 盧泰愚 대통령, 중국 공식방문. 9월28일 양상곤(楊尙昆)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 11월18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11월20일까지 한국 공식방문
● 12월22일 韓·베트남,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미국과의 마찰說

워싱턴 포스트는 1988년 11월16일자 「한국의 북방정책」이라는 서울發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 적이 있다.

<韓美간의 가시적인 마찰은 무역과 미군의 한국 주둔이지만 장기적인 위험성은 한국의 북방정책, 즉 아시아의 새 민주국가로 출범한 한국이 북한을 유도,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도움이 되게끔 소련 중국 및 그 밖의 공산국가들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려는 정책에 있다 하겠다. 35년간의 북한 테러행위를 협조적인 태도로 바꾸고 장차 통일까지 이룩하려는 盧泰愚대통령의 움직임은 이만저만 까다로운 과업이 아니다.

레이건, 부시 미국 행정부는 공산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盧대통령의 노력을 지지하고 있으나 소련이 시베리아에서 가스를 파올리는 것을 한국이 돕거나 중국이 컴퓨터를 제작하는 것을 한국이 돕는다면 이는 그동안 주한미군의 유지를 강력히 주장해 왔던 美 의회 내 보수주의자들의 호감을 사지 못할 것이다…. 통상문제와 주둔군 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터에 韓美 두 맹방이 北의 공산 군사국가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서로 비틀거린다는 것은 비극이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盧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6共의 북방정책을 우려했다는 워싱턴 포스트(1988년 11월16일자) 기사는 납득이 안 간다. 왜냐하면 미국 언론의 다수는 나의 북방정책에 대해 미국 측이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해주고 극찬해주는 것이었다. 그 다수의 범위에 워싱턴 포스트도 들어 있었기 때문에 거꾸로 우리의 북방정책을 우려했다는 이야기는 납득되지 않는다. 6共의 북방정책이 「공작적인 차원에서 지도자의 공적(功績)을 과시하는 데 치중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외교를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비밀리에 외교를 하는 것은 세계 외교사를 들지 않더라도 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과거 잘못된 통치나 정치를 보던 왜곡된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외굘르 보아서는 곤란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金宗輝 수석 발탁 배경

다시 盧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후에 북방외교 과정에서 참모들간에 알력이 있었다느니, 특히 미국 측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신문 잡지 등에 실리곤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당시 미국은 나의 정책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건 나를 지원하고 믿고 도와주었다. 만약 미국이 내게 기분이 나빴으면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와의 회담은 불가능했다.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있어 미국은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미국은 2차대전 때 아주 가난했던 우방들이 경제와 민주주의가 모두 발전해 미국과 나란히 국제사회에서 훌륭한 역할을 하기를 바랐지만, 한국을 제외하고는 그런 나라가 없었다.

대만이 좀 발전하기는 했지만 미국과 외교관계가 끊어져 버린 데다가, 과거 외교관계가 있을 때에도 미국은 대만을 민주주의하는 나라로는 보지 않았다. 싱가포르 역시 이광요(李光耀) 수상 자체를 미국의 지식층들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리핀도 열심히 도와주었지만 별로 칭찬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으니 내세울 만한 나라가 없었다. 한국은 위태롭기는 했지만 자유진영의 첨단에서 자유를 지키는 우방으로 훌륭하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민주주의와 인권문제였는데, 이것도 나의 집권 후에는 해결되어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감으로써 자신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피를 나누면서 도와준 우방이 이렇게 발전한 데 대해 미국은 보람을 느끼면서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한국 대통령이 미국의 이익에도 일치하는 일을 하겠다는 데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

육성증언에 이어 북방정책과 관련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김종휘(金宗輝) 외교안보수석을 발탁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십시오.

『내가 金宗輝를 軍에 있을 때부터 잘 알았어요. 국가안보에 대한 지식 식견 논리에서 제1인자다, 사람이 진실하다, 국방대학원 교수였고 그랬기 때문에 장성들이나 고급 장교들이 金宗輝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는 처지였지요. 이 사람을 본격적으로 믿기 시작한 것은 내가 1980년 초 보안사령관을 할 때 金宗輝가 율곡사업에 대한 평가를 했어.

그때 육해공군 욕심이 제각기 큰 거라. 육군은 탱크만 앞세우고, 공군은 비행기만 앞세우고, 해군은 배만 앞세우고. 그래서 밸런스가 잘 안 맞았단 말이야. 거기다가 국방장관이 주영복(周永福)씨가 되니까 공군이 나서고. 그런 차원에서 까딱하다 문제가 생기겠다 해서 「그러면 논리가 정연한 金宗輝씨에게 평가를 시키자」해서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아 이 사람 정말 유능하고 훌륭하구나」하는 것을 확인한 거지』

―金宗輝 수석이 1987년 연초에 대통령 직선제를 盧 전 대통령에게 맨 처음 건의를 했죠.
『내가 그렇게 기억을 해요』

『흡수통일한다는 이야기는 곤란』

―어떻게 보면 金宗輝씨는 「한국의 키신저」같은 느낌이 듭니다.
『일꾼이지. 처음에는 외교까지 이 사람의 자문을 받아야 할 대상자로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차츰 안보에서 외교로 확대되어 나갔지요』

―아까 말씀하시길 북방정책의 당면목표가 통일이고, 최종목표는 북방으로 우리 민족의 활동공간을 넓히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결국 북한을 고립 내지 흡수통일 하는 것이었는데요. 이런 목표를 미리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정책을 집행하셨으면 보수층이 안심하고 남북관계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주에 2백만 조선족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의 연해주에 원래 30만 동포가 살았는데 중앙아시아로 쫓겨가 버렸단 말이야. 이것을 내가 끌어 모으려고 했어요. 이 문제를 가지고 옐친 대통령과 담판을 했는데 「그것만은 못 들어주겠다」고 그래. 왜냐. 소수민족이 들고 일어나 연방이 깨졌고 지금도 민족주의를 부르짖고 있는데, 이것을 허용하면 다른 데 자극을 주기 때문에 안된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연해주 개발은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당신네 나라 발전시키는 거 아닌가.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진 동토(凍土)의 땅을 묵혀 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우리가 무슨 침략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이런 얘기까지 했어요.

자기들이 일본도 경계하고 미국 중국도 다 경계하는데 우리는 경계하지 않아. 그래서 「연해주 발전시키는 데 사람이 필요하지 않나. 기술자와 근로자, 경제를 이끌어줄 수 있는 자본가가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 거기(중앙아시아)에 있는 우리 동포가 필요하다」이랬더니 나중에는 옐친이 「집단으로는 안되고 개별적으로 가는 것은 막지 않겠다」이렇게까지 얘기가 진척됐어요』

―사실 북한에 대해 盧 전 대통령께서 추진하신 것은 북한을 흡수해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통일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우리는 흡수통일할 생각이 없다』고 연형묵(延亨默)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걸 흡수라고 개념을 정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물론 독일식으로 된다면 흡수지. 이북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금방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당신들 내가 끌어당겨서 흡수통일한다」는 이야기는 실제 그렇게 된다손 치더라도 그런 얘기를 못해. 지금 金大中 대통령도 마찬가지야. 그럼 뭐냐. 화해와 교류 협력이다, 이렇게 말하고 어디까지나 흡수란 말은 써서는 안되는 거야. 화해와 협력으로 동질성을 회복하면 자연히 합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또 그렇게 되는 거고. 특히 외교적 용어는 민감하기 때문에 우리는 용어선택을 잘해야 됩니다. 이런 입장에서 국내의 학자나 언론이 보기에는 「왜 그 얘기 못하나. 당당히 나가야 할 것 아니냐. 그런 말 안하는 것이 비굴하지 않느냐」이런 생각이들 수가 있겠죠』

외교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敵도 없다

―저는 『흡수통일 한다』는 말은 해서는 안된다고 보는데, 또 『흡수통일 안한다』는 말까지는 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안한다고 하셨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통일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통일되면 우리가 손해를 본다』하는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고, 또 그 말을 우리 사회의 좌익들이 가져가서 『북한을 흡수통일하는 것은 우리의 對北정책과 틀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강경론이고 극우다』이런 식으로 보수세력을 비판하는 무기로 쓰고 있습니다. 말씀하실 때는 외교적 언사로 하셨지만, 대통령의 말씀은 북한이 듣기 전에 우리 국민 전체가 듣기 때문에 그 효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내가 흡수통일을 부정하는 뉘앙스가 강한 표현을 했던가요』

―金泳三 대통령 시대에 와서 흡수통일 안한다는 발언이 공식적이 되었고, 金大中 대통령의 햇볕정책에는 하나의 원칙으로 들어갔습니다.

『남북대화를 하려는 마당에 흡수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어느 정권이든 당연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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