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참 좋은 날입니다. 토요일이고, 또 서울시청에서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도 더 좋은 말씀, 더 유익한 말씀, 더 양식이 될 만한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저에게는 신상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난달에는 제가 <월간조선> 대표이사 자격으로 이 자리에 섰었는데 오늘은 기자 자격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1945년 生(생)인데, 작년부터 ‘대표이사 자리를 그만두고 다시 기자로 돌아가야겠다, 기자로 돌아가면 할 일이 더 많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005년 지난 3월 31일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직을 그만두고 <월간조선> 기자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꾸 大記者(대기자)라고 하는데, 저는 대기자가 아니라 그냥 기자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대기자라는 제도는 일본 언론에서 붙인 명칭인데, 부장 등의 행정직 직책을 맡지 않고 기사만 쓰는 사람을 대기자라고 통칭하고 있습니다. 명함에 대기자라고 써서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없고, 영어로는 senior correspondent, 즉 고참기자라는 뜻이 됩니다.
대기자라고 하면 매일 좋은 글만 쓰고 特種(특종)을 해야 되는데, 언론이라는 게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젊은 기자와 20~30년 경력이 있는 기자가 기사 경쟁을 하면, 6개월짜리 기자가 이기는 게 보통입니다. 왜냐하면 기사를 쓴다는 것은 사실 보통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재주가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부지런한 사람,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면 되기 때문에, 경력이 잘 통용이 되지 않는 것이 기자 사회의 비정한 면입니다. 그래서 저는 平記者(평기자)로 돌아왔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산 부두에서 부인 기다리다 울던 월남 무관
오늘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1975년 4월 30일 越盟(월맹)군 탱크가 사이공에 있는 독립궁으로 들어가면서 越南戰(월남전)이 종식됐고, 월남은 共産化(공산화)됐었습니다. 이 전쟁에 우리도 延(연) 30만 명을 派兵(파병) 했습니다. 약 3,600명이 죽었고, 약 1만 명이 다쳤어요. 고엽제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죠. 그렇게 많은 인명을 바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參戰(참전)을 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월남 파병은 쟁점으로 남게 됐는데, 바로 월남이 망해서 赤化(적화)가 된 지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 때 저는 부산에서 사회부 기자를 하고 있었는데, 월남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 우리나라 해군 LST(상륙함) 두 척이 부산항에 도착할 당시 현장에 나가 취재를 했습니다. 제 옆에는 월남 대사를 지냈고 당시 동서석유회사 사장이었던 柳陽洙(유양수) 씨가 접안하는 두 척의 LST를 맞기 위해 와 있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질문하니까 참 착잡하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제 옆에는 서울의 월남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월남 武官(무관)이 있었습니다. 월남이 망하는 바람에 자기 가족과 소식이 끊겼던 이 무관은 혹시나 자기 부인이 그 배를 타고 오지 않았을까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착한 배에는 1,500명 정도가 타고 있었지만, 부인은 나타나지 않아서 그 장교가 울고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쯤은 재회했겠죠.
저는 월남에 파병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월남전 세대입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한 기간이 1967년부터 1970년까지였는데, 그 기간에 근무했던 사람들 중에서 월남에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10여 년 전에 월남을 방문해서 월맹 쪽에서 지휘했던 지압 장군도 인터뷰하고, 사이공 옆에 뚫어놓은 ‘구치땅굴’도 가 봤습니다. 총 연장거리가 약 150km 정도 되는 땅굴인데, 지하로 층층이 되어 있어서 그 안에 학교도 있고, 병원도 있습니다. 사이공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었는데, 미군은 땅굴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하작전을 펼 수 없었습니다.
땅굴에 들어가 보면 뚱뚱한 사람은 통과할 수 없게 차단장치 비슷한 것을 해 놓거나 기괴하게 만들어 놓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관광코스가 됐는데, 아마 남북통일이 되면 북한이 북한 지역에 뚫어놓은 땅굴이나 지하시설 역시 관광수입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화통일은 월남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는가
1990년대부터 월남은 다시 개혁·개방 정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당독재인 점은 변함 없지만, 시장경제 쪽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죠. 그렇다면 월남 전쟁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지금 월남이 쓰고 있는 정책은 망하기 전의 사이공 정부가 쓰고 있던 정책과 상당히 비슷해요. 20년 동안 경제성장은 거의 정지되어 버렸고, 1인당 GNP는 아직도 1,000달러가 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과연 적화통일이 월남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물론 민족통일 국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죠.
월남의 지도자는 북한의 지도자와 많이 다릅니다. 상당히 실용적인 정책을 쓰고 있고, 특히 한국에 사과하라는 등의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월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자진해서 월남전 참전에 대해 많은 고통을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사과를 했어요. 이런 말은 3,600명의 전사자와 30만 명의 참전자한테 허가를 받고 해도 될까 말까 한 것입니다. 우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아요. 우리가 월남전에 참전한 것은 국제법적으로도 정당하고, 도덕적으로도 정당한 겁니다.
우리가 참전한 이유는 첫째로 韓美(한미) 동맹 관계에서 미국을 도운 것입니다. 미국이 6·25때 우리를 도와주었으니까 이제는 월남에 군대를 보내서 미국을 돕고 自由를 지킨다고 하는 뚜렷한 大義명분과 실익이 있었습니다. 그 때 2개 사단을 보내지 않았다면 미국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에서 1개 사단을 뽑아내게 되어 있었어요. 즉 월남파병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국방과도 직결되는 결단이었습니다.
월남에 파병한 대가로 우리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었습니다. 1960년대에 경제개발을 하면서 외환이 부족했는데, 그 외환사정을 해소할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월남 파병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인 것이고, 또 하나는 韓日(한일) 국교 수교를 통해서 약 8억 달러의 자금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1960년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월남파병은 또 한 가지 기여를 했는데, 그것은 바로 중동에 진출하는 연습을 월남에서 했다는 점입니다. 1974년부터 우리가 中東(중동)에 진출할 때 월남에 진출했던 기업들이 거기서 배웠던 기술을 가지고 중동에 진출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석유파동을 극복한 나라가 됐습니다. 1970년대에 우리는 두 번의 석유 위기를 당했지만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했고, 다른 나라가 다 휘청거릴 때 우리가 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나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원동력 중 하나가 월남파병이었던 것이죠.
일류국가, 선진국으로의 첫 발걸음이 된 5·16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는 5·16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것인데, 이 부분은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5·16을 부정적으로 보면 한국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어 있고, 동시에 우리 민족사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한국이 一流국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 바로 5·16이라고 생각합니다.
1948년의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건국은 국민국가를 세워서 이제는 한국 사람들이 백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주인으로 사는 체제를 만든 것이었다고 본다면, 5·16은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봅니다. 5·16은 물론 근대화 혁명의 기폭제가 됐는데, 근대화 혁명이 성공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선진화의 길로 가는 문을 열었다는 事後的(사후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5·16 주체세력들이 내건 것이 민족중흥, 조국근대화인데, 근대화는 일단 성공했습니다. 근대화가 성공했다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선진화입니다. 선진화는 쉽게 말하자면 一流국가를 만드는 것을 말하죠.
물질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미 一流국가를 이뤘습니다. 경제 규모가 세계 10~11위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고, 중화학 공업 부문, 전자 부문, 첨단 산업 부문에서는 세계 10등 안에 드는 것이 10가지 이상이 됩니다. 전자, 제철, 석유화학, 기계공업, 조선, 자동차 등 굵직굵직한 것 10개 정도를 세계 10위 안에 다 가지고 있는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한국 정도입니다. 영국이나 프랑스도 그렇지 않아요. 이 정도의 공업 부문을 가지고 있고 각종 사회제도도 충실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 군사, 과학, 행정, 이 네 개 부문에서는 우리가 一流국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문턱에 온 게 아니라 벌써 그 문턱을 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총체적으로 지금 우리나라를 一流국가라고 부를 수 없게 하는 부분이 무엇이냐. 첫째는 정치입니다. 정치를 대표하는 대통령, 특히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행태가 과연 一流국가의 대통령다운 것이었다.
그 다음은 언론입니다. KBS, MBC의 몰상식하고, 저질스럽고, 때로는 선동적인 보도가 과연 一流국가를 만드는 데 걸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수나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태, 논지가 과연 一流국가에 맞는 학문적 양심을 반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종 사회단체나 노동조합의 행태 등도 우리나라가 一流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一流국가로 가는 문턱을 넘어섰지만,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二流 또는 三流국가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을 선진국이라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李健熙(이건희) 회장이 몇 년 전에 한 말, 즉 기업은 一流고 정치는 三流 또는 四流라고 이야기한 것은 거의 맞는 말이죠.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을 一流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정신력, 魂(혼)을 어떻게 바로 잡을 것인가, 이 부분에서 어떻게 선진화를 이루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중심적 과제로 남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도 한 번 一流국가가 되어봐야겠다는 꿈이 생긴 것은 바로 5·16이 있었기 때문에, 朴正熙(박정희)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나라가 一流국가
1950년대로 한 번 거슬러 올라가 보십시오. 저도 195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만, 1950년대 우리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一流국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습니까? 그 때 한국인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굶주림을 해소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 때의 꿈은 三流국가 정도의 꿈이었죠. 二流국가도 아닌, 三流국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의 사회교과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어요. 뉴욕에서는 출퇴근 시간이면 자동차가 너무 많아서 사람이 걸어가는 것과 자동차 달리는 속도가 비슷하다는 내용이었는데,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내용이었습니다. 자동차가 드문드문 다니는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자동차가 한 집에 한 대씩 있다는 것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 一流국가는 그야말로 꿈이었죠. 선진화, 一流국가는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비전입니다.
꿈과 비전은 다릅니다. 꿈은 그냥 꿈이지만, 비전은 실현 가능한 목표입니다. 一流국가가 되는 것, 선진국을 만드는 것이 한국 사람들 또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실력에 비해 가당치 않은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됐느냐. 바로 5·16 이후 한국이 근대화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5·16은 우리 민족이 일류국가로 갈 수 있는 문을 열어젖힌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화를 내고 개탄하는 이류를 캐고 들어가면, 그것은 바로 국가 선진화, 일류국가의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一流국가는 어떤 나라인가. 一流국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이고, 또한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길거리를 걸어도 마음 놓고 걷고, 대통령 욕을 해도 마음 놓고 할 수 있고, 자동차를 타도 안전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측이 가능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나라입니다.
一流국가는 또한 문학, 예술하는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는 곳입니다. 창조하는 나라인 것이죠. 예술적인 것, 문학적인 것은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정치는 하루살이지만 위대한 시인이나 위대한 화가, 음악가의 작품은 오래 갑니다. 바로 그런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일류국가입니다. 말하자면 국민들이 인간답게 우아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보낼 수 있게 하는 공동체가 바로 일류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류국가로 가려고 하는 겁니다. 막연하게 축구 잘 하고 힘이 센 국가가 일류국가가 아닙니다. 그 나라에서 살면 인생을 여유 있고 안전하며 예측 가능하게 보낼 수 있는 일류 국가는 지금 세계에서 대략 유럽, 北美, 일본 이 세 곳입니다.
일류국가가 되기 위한 다섯 가지 조건
일본은 지난 200년 동안 非(비)서구 국가로서 一流국가가 된 유일한 나라입니다. 제가 정리를 해 보니, 一流국가에는 대략적으로 다섯 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역사가 깊어야 됩니다. 역사가 얕은 나라는 잘 안됩니다. 필리핀 같은 나라를 들 수 있죠. 역사가 깊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 문자를 아는 역사가 깊어야 되고, 또 국가를 만들어서 전쟁도 하고, 통일도 하는, 국가로서의 역사가 깊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역사가 깊으면 그 민족의 문화·교양·예술·지혜의 창고가 커집니다. 필요할때 이 정신적 자원을 이용할 수 있죠. 지금의 중국·인도처럼 말입니다.
둘째로는 지정학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있어야 된다는 조건입니다. 지금 문명의 한복판은 어디입니까? 유럽, 미국, 동북아시아 지역이 아닙니까? 이 근방에 있어야 됩니다. 인도나 아프리카 같이 문명의 한복판에서 좀 떨어져 있으면 아무래도 先進문물을 흡수하는 데 장애가 많죠. 문명의 한복판엔 돈·정보·물건이 모이니 경제가 잘 됩니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나라는 여건이 충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국민국가 문명의 역사가 길어야 합니다. 여기서의 역사는 왕조로서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왕조의 역사는 길지만 국민국가의 역사는 짧죠. 국민국가로서의 역사는 6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는 장애가 있어요. 국민국가, 즉 법치국가, 민주국가를 만들어서 국민들이 다 참여하는 정치를 경험한 기간이 길어야 합니다. 유럽은 수 백 년이 되죠. 이 점이 부족허면 정치가 어려요.
넷째는 현재의 정치제도가 좋아야 된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정치제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제도가 좋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는 괜찮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니까 말입니다.
다섯 번째로는 국민들의 자질과 품성이 좋아야 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一流국가로 가기 위해서 우선해야 될 것은 다섯 가지 정도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漢字(한자)를 한글과 같이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한글 전용으로 간다면 우리나라는 절대로 一流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한자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곧 우리의 민족 문화를 잊어버린다는 뜻이고, 그것은 또한 우리 민족의 혼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잊어버리면 뿌리 의식이 없어집니다. 한자를 쓰지 않으면 정확한 의미전달이 되지 않게 되어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低級(저급)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글과 말이 이 모양이 된 원인은 한자를 쓰지 않는 것과 분명히 직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국가 엘리트가 다시 나타나야 됩니다. 지난 60여 년 동안 우리나라 국가 엘리트는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독립투사들과 朴正熙(박정희)로 상징되는 군 장교단, 그리고 그 밑에 있었던 행정 관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물을 판단하고 집행할 때 국가적인 관점에서 國益을 중심에 놓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하면 나에게 도움이 된다든지, 이렇게 하면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 지역 사람들에게, 우리 당에 도움이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놓고 사업을 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하는 판단을 했다는 말입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수립 이후 소위 민주투사들이 주도세력이 되면서, 국가 엘리트라는 개념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국가중심의 사고방식은 사라지고 지역·집단·계급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 수도를 반신불수로 만들어서 동강을 내어 옮기는 짓까지도 지역적 이기주의에 서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국가 전체를 생각하는 국가 엘리트가 실종됐다는 뜻입니다.
오늘 날 한국에는 지역 엘리트는 많습니다. 경상도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 전라도를 대표하는 사람, 충청도를 대표하는 엘리트는 많지만, 국가 엘리트가 없는 것입니다. 기능 엘리트도 많습니다. 각 분야에서 기능적으로 열심히 잘 하는 사람은 많지만, 국가와 민족 전체의 운명을 놓고 생각하는 엘리트는 적습니다. 당파 엘리트 또한 많습니다. 열린당의 엘리트도 있고 한나라당의 엘리트도 있지만 그 차원을 넘어서 국가 전체를 놓고 고민하는 국가 엘리트는 없습니다. 이 국가 엘리트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一流국가로 가는 과정에 있어서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입니다.
셋째로는 국민 교양의 향상을 위한 전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국민 교양이란 무엇인가. 一流국가에 맞는 시민이 되려면 국민들의 자질이 향상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주의가 실시되면, 민주주의는 악랄한 사람들의 흉기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죠. 사기꾼과 선동가를 제어할 수 있는 건전한 국민들이 싸워서 자기의 체제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용감하고 교양 있는 국민층이 강력하게 형성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통일된 이후에도 해양세력과 함께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韓美(한미)동맹은 결국 해양 동맹이고, 일본과도 폭넓은 교류를 하면서 생겨난 韓美日(한미일) 삼각동맹 체제가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든 것입니다. 지금 중국이 강해진다고 해서 우리가 다시 대륙 쪽으로 간다면 대륙적인 분위기, 대륙적인 인습의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대륙적이라는 뜻은, 아직까지는 독재적, 후진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과는 무역을 통해 많은 돈을 벌어야 합니다. 중국의 정치제도로부터 우리나라가 배울 것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해양국가로 남아 있지 않으면 一流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가장 시급한 것은 金正日(김정일) 정권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빨리 제거할수록 장기적으로는 득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점에서 김정일을 제거하는 데 한 10억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면, 10년 후에는 김정일 정권을 제거하고 그 후유증을 해결하는 데에 아마 100억, 1,000억이 들 겁니다. 다소 희생이 있더라도 국가 선진화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는 김정일 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一流국가로 갈 수 없습니다.
70년 만의 군인 정권 등장
5·16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민족사적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면, 5·16은 12세기 고려시대 때 군인들이 武臣亂(무신란)을 일으켜서 집권한 이후 700년 만에 처음으로 군인들이 다시 집권한 경우입니다. 1961년 당시 우리나라의 군 장교단은 약 6만 명이었는데, 그 중 약 10%가 해외유학 경험을 했고 이들은 조직경영술이나 책임감, 실천력과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군인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선진화된 생각을 갖고 있던 집단이었습니다. 거기에 총을 가지고 있었으니 최강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5·16 군사혁명은 최강의 선진집단인 군장교단이 국방을 넘어, 국가를 개조해야겠다는 집단적인 결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16이 일어나자마자 군인들이 경찰서장도 되고, 장관도 되고, 기획관리실장도 되어서 행정조직을 효율성이 있고 열심히 일하고 책임감이 있는 조직으로 바꾸었습니다. 좋게 바뀐 행정조직은 기업인들의 후견인이 되고, 때로는 기업인의 친구가 되는가 하면 때로는 기업인들을 견제하기도 했습니다. 군인, 행정관료, 기업인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밀어붙이게 된 것입니다. 5·16을 통해 등장한 우리 군 엘리트 장교단은 한국 역사를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높이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역사는 신라통일 이후 5·16까지 고려 무신정권 100년을 제외한 거의 1,300년 동안, 글을 잘 쓰고 말을 잘하는 민간인들이 권력을 잡았던 역사였습니다. 1,300여년 만에 처음으로 군 장교단이 역사의 主役으로 등장했다는 점이 5·16의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중에도 군 장교단을 상징하는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과 金鍾泌(김종필), 이 두 사람입니다.
박 대통령이 5·16 군사지도자가 됐다는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왜 다행인가. 박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지도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1945년에, 그 당시의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서 언어 능력이라든지, 외교 능력이라든지, 카리스마라든지, 영어하고 글 쓰는 능력 등을 다 포함해서 가장 유능한 사람을 딱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1961년에 군 장교단 중에서 최고의 지성과 최고의 통찰력, 그리고 최고의 인간적인 매력까지 모두 포함해서 종합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을 한 사람 꼽으라면 아마 박 대통령이었을 것입니다. 엘리트 집단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가 지도자로 나섰다는 것이 5·16의 성공, 그리고 그 후 근대화 성공의 큰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를 살린 이승만,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든 김일성
5·16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심사숙고 끝에 이루어진 일 입니다. 박정희라는 사람은 1917년에 태어나서 대구사범을 나와 잠시 교사를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서 滿軍(만군)장교가 되기 위해 2년 동안 교육을 받았습니다. 성적이 좋았던 그는 일본 육사로 다시 유학을 가서 교육을 받았고, 북경 북쪽의 열하성이라는 곳에서 팔로군과 싸우는 위치에 있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잠시 실직상태에서 방황하다가 1946년에 조선경비학교 2기생으로 들어가서 다시 장교가 됐죠. 그리고 그 2년 뒤에 여순반란사건이 났습니다.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에 들어간 것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연이 있습니다만, 좌익운동을 하던 형이 대구 폭동 때 죽었는데, 그 형의 친구들이 박정희 소령을 포섭해서 남로당 군사책임자로 이름을 올려놓는 일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자신도 그 당시에는 상당히 미군과 사이가 나빠서 反美的(반미적)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순반란사건 후 군내의 좌익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이 검거됐습니다.
박정희 소령은 사형될 뻔했는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자 수사책임자였던 -지금도 살아계시는- 白善燁(백선엽) 장군이 박 대통령을 면담한 후 그를 살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야기합니다. 박정희에 대해서 無期(무기) 선고에 집행 면제를 하고, 옷을 벗기는 선에서 끝냈습니다. 무기 선고를 받은 사람이 형을 살지 않고 집행 면제가 됐다는 점, 그리고 다시 군에 문관으로 돌아와서 근무를 했다는 점은 지금 생각하면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절차죠. 어떻게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박정희를 살린 셈입니다.
1950년 6월 25일에 박 대통령은 고향에 가 있었는데, 남침 소식을 듣고 도망가지 않고 올라와서 육군본부에서 근무를 하다가 한강다리가 끊어진 직후에 남쪽으로 갔습니다. 비로소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증명을 한 것이죠. 그 때는 인민군이 이미 서울에 왔을 때니까 평양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박 대통령은 한강다리를 남쪽으로 건넜어요. 그 11년 뒤에는 거꾸로 해병대와 공수단을 이끌고 한강을 북쪽으로 건너서 서울을 장악할 수가 있었습니다.
1950년에 김일성의 南侵(남침)이 없었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아마 불우한, 叛骨(반골)적인, 불평불만에 쌓인 사람으로 인생을 끝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박정희를 대통령을 만든 것은 바로 김일성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박정희를 살렸고, 살아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은 김일성입니다.
오늘날의 불행이 몇 년 뒤에는 행복의 단초가 되고, 반대로 오늘날의 행복이 불행의 씨앗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박 대통령의 생애에서도 이런 것을 많습니다.
군에 복귀한 박 대통령은 동기생들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육사에서도 나이차이가 많이 났죠. 金載圭(김재규)와는 아홉 살 차이가 났는데도 동기생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보다는 후배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1961년까지 박 대통령의 군 생활은 자신의 人脈(인맥)을 구축하는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16의 한 주체 인맥은 육사 5기생입니다. 왜 육사 5기생들이 5·16에 많이 참여를 했을까. 金在春(김재춘)씨와 蔡命新(채명신) 같은 사람이 육사 5기죠. 이 분들은 박 대통령이 육사에서 교관 하고 중대장을 할 때 그 밑에서 배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박 대통령의 모습 등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고 합니다. 육사 6기인 朴泰俊(박태준)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박정희의 아주 단정한 모습이라든지 지휘할 때나 교육할 때의 진지한 모습이 계속 머리에 남아서, 언젠가는 저 사람과 한 번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혁명은 항상 불만있는 쪽에서 시작하기 마련
그 다음은 육사 8기생들입니다. 박대통령이 불우했던 시절인 1949년 무렵, 그가 陸本(육군)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할 때 육사 8기생들이 그곳에 많이 배치됐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으니까 매일 박 대통령을 모시고 돌아다니면서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관계를 통해 형, 동생 사이처럼 아주 친밀해지게 됐습니다. 육사 8기는 수가 아주 많습니다. 그 전 우리나라 육사는 교육이 3개월짜리였는데, 육사 8기부터 6개월짜리가 되고, 육사 11기부터는 4년제가 됐습니다만, 육사 8기는 1,500명 정도 됐습니다.
이 분들은 6·25가 발발하자 주로 소대장으로 배치가 되어서, 육사 8기생의 약 30%가 전사를 했습니다. 이 분들에게는 ‘6·25는 우리가 치렀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반면 보상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육사 8기생들은 진급이 늦었어요. 예를 들면 1961년에 육사 8기생들은 대부분 다 중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보다 약 1년 먼저 군에 들어온 사람들은 소장, 준장까지 올랐어요. 나이 차이도 별로 없었습니다. 金鍾泌(김종필) 씨가 1926년생인데 張都暎(장도영) 장군 같은 사람들과 동갑이었습니다. 그러니 불만이 컸습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반드시 불만이 있는 쪽에서 시작됩니다. 아주 안이하게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박 대통령도 시국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육사 8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4·19가 일어났습니다. 박 대통령은 부산에서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승만 정부를 뒤집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때는 하나의 구상단계이자 인맥을 구축하는 단계였지, 작전계획을 세우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수도를 장악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산에서 그런 일을 할 수도 없었죠.
4·19가 일어나자 우리나라 곳곳에서 불평불만과 욕구가 분출했습니다. 저는 4·19때 중학생이었는데, 멋도 모르고 데모를 여러 번 했습니다. 국민학생도 아주머니도 데모를 했어요. 데모하지 말라는 데모도 했습니다. 야간 촛불시위도 그 때 처음 했는데, 그것도 좌익들이 했습니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날아가니까, 그 동안 쌓여있던 각종각양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여기에 지하에 잠복했던 좌익세력들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張勉(장면) 정부는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어요.
민주당 정부는 내각 책임제로 개헌한 후 총선에서 의석의 3분의 2를 얻었지만, 신파와 구파로 나눠져 버렸습니다. 金度演(김도연), 尹潽善(윤보선)파와 張勉(장면)파로, 말하자면 分黨(분당)이 되어 버린 겁니다. 분당이 되니 장면 총리가 정치적으로 약화돼서 1년도 채 집권하지 못했죠. 그래서 장면 정부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면 자신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5·16 이후의 행태를 보면 알지만, 이승만 정부 때부터 장면은 굉장히 親美的(친미적)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도 미국에 대들고, 미국을 괴롭히고 하니까 미국 정부가 후계자로 밀었던 사람 중에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만, 미국 사람들은 張勉(장면)을 하나의 對案(대안)으로 보고 여러 가지로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CIA 보고서를 보면, 장면이 민주적이고 온화하지만 용기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문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특히 장면 당시 부통령이 CIA직원에게,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미국이 자신을 보호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는 보고서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미국 사람들에게 그런 부탁하면 안 되죠. 아무튼 이 사람이 4·19 이후에 국무총리가 됐습니다. 分黨(분당)까지 오고, 그러다보니 4·19로 폭발한 우리 국민들의 에너지와 희망을 담아놓을 수 있는 그릇이 없었어요.
“국민들 뭣 하나”
4·19로 분출된 희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민주주의를 하자는 희망입니다. 이 때 세대교체라는 말이 처음 나왔습니다만, 이제 이승만 같은 노쇠한 지도자는 싫고, 좀 젊은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죠. 민주화의 욕구였습니다. 또 하나는 경제적인 욕구였습니다. 이제는 좀 먹고 살아야겠다는 것이었죠. 이 두 가지, 경제적인 욕구와 민주적인 욕구 중에서 장면 정부는 민주화 욕구를 충족시켜 줬습니다. 당시 언론의 자유가 지나칠 정도였죠. 5·16 후 언론의 통폐합이 이루어집니다만, 통신사가 240개나 됐습니다. 지방에도 통신사가 있었죠. 말하자면 민주화가 과도할 정도로 滿開(만개)되니까, 결국은 민주주의가 自害(자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민주화가 너무 지나치니까 法治(법치)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질서의 붕괴가 시작됩니다. 그 틈을 타서 左翼(좌익)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군인들이 자극을 받게 됩니다. 당시는 6·25가 끝난 지 8년 밖에 안 된 시기였는데, 군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피를 씻는 전투를 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장면 정부는 확실한 反共(반공)정부였지만 좌익들이 야간 촛불시위를 할 정도까지 전개된 상황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군인들은 등 뒤가 서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민주당에 대한 서민들의 지지도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가 불안해지다보니 깡패들이 많이 나오게 됐어요. 민주화의 열정도 1961년부터는 시들해지기 시작했고, 국민들 속에서는 오히려 ‘군인들은 뭐하고 있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민심이 바뀌니까 軍心(군심)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 군대는 傭兵(용병)이 아닌 皆兵制(개병제)이기 때문에 민심과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현재의 군대도 마찬가지죠. 사회가 左傾化(좌경화)되면 군대도 좌경화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론조사를 하면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우리의 主敵(주적)이다’ 라고 대답하는 사병들이 더 많다는데, 여기에 놀랄 필요가 없어요. 사회에서 다 키운 사람들인데 군복을 입었다고 하루아침에 생각이 다 바뀌겠습니까? 다만 제대할 때쯤 되면 생각이 좀 바뀐다고 해요.
격변기나 위기 때 기회주의자는 大權 못잡아
이런 분위기 속에서 5·16 혁명 모의는 거의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육군본부 식당에서도 밥을 먹으면서 동지를 포섭할 정도였습니다. 이 혁명을 막아야 될 당시의 방첩부대에서도 누가 모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소장이 5·16 하루 전쯤에 서울 지역을 관할하는 506방첩 부대장을 불러서 군사혁명의 타당성을 역설했어도 이 사람은 신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5·16 혁명을 성공시킨 세 사람이 있습니다. 장면 총리와 장도영 당시 육군참모총장 그리고 윤보선 대통령이 다 一助(일조)를 해서 5·16 혁명이 성공하게 된 것이죠. 그 중에서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박 대통령과 인연이 많은 사람입니다. 박 대통령을 여러 번 도와준 사람인데 나이는 박 대통령보다 적어서 박 대통령을 부하로 데리고 있었지만 어렵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장도영 씨는 5·16뒤 밀려나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한 분인데, 아주 양반이고, 마음이 여리고, 모범생 같은 사람이죠. 6·25 때는 6사단장으로 용문산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운 분이죠.
계급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면 박정희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특정 사람과 만나면 氣(기)에 눌리는 사람이 있죠. 장도영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혁명의 모의 과정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모두 얘기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당장 잡아넣었어야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그렇게 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장면 총리한테 박정희가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가 군 계통, 경찰, 검찰 등 수십 군데에서 들어왔습니다. 그는 몇 번 장도영 씨를 불러서, ‘이런 첩보가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박정희를 보호해 줬습니다. 그러면서도 적극적으로 모의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는데, 박정희가 성공하면 자기를 추대하니까 좋고, 실패하면 그만이라는 기회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격변기나 위기 때, 기회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대권을 잡는 일이 없습니다. 이 점은 어떤 역사를 봐도 그래요. 어느 한 쪽에 확실하게 서야죠.
당시에 서울로 들어온 혁명군대는 4,00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60만 군대 중에서 4,000명이 서울로 들어온 것이죠. 그것도 5월 15일 밤에 기밀이 누설돼서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나 혁명, 쿠데타는 계획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군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고 나면 하루 사이에 미리 세워놨던 작전계획은 다 무효가 되고 뒤죽박죽이 된다는 것입니다. 뒤죽박죽이 되는 상태에서 왜 이쪽은 이기고, 왜 저쪽은 지느냐 하는 것은 상당부분 지도자의 리더십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날 5·16이 성공한 것은 바로 박정희 소장이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初志一貫(초지일관) 밀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초저녁에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혁명군으로 대기 중이었던 30사단 병력이 출동하지 못하게 됐어요. 주모자들이 혁명본부로 사용하려고 했던 영등포의 제6관구 사령부에 집합을 하고보니 벌써 헌병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설득을 통해 그 헌병들을 자기편으로 돌려놓았습니다.
尹潽善 대통령:“올 것이 왔구나”
박 소장이 직접 해병대와 공수단을 출동시키기 위해서 그 쪽으로 갔습니다. 공수단은 출동을 하긴 했습니다만, 내부사정으로 출동이 늦어졌죠. 제대로 출동한 부대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김포에 있던 제1김포여단입니다. 金潤根(김윤근) 장군이라는 사람이 준장이었는데, 해병대가 제일 앞장을 섰습니다.
제대로 출동을 하긴 했지만, 이 분은 선두에 서려고 하지 않았어요. 이 분에게는 만약 해병대가 선두에 서게 되면 견제 대상이 되어서 반드시 보복을 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해병대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수부대 뒤에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데, 공수부대가 제대로 출동을 안 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해병대가 앞장서게 된 것입니다. 그의 예감대로 정말 해병대가 해군으로 편입되어 버렸죠. 박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시해될 당시의 경호원들이 모두 해병대 출신이었고 김재규의 지시에 따라 이들은 처치한 朴善浩도 해병대 출신이었습니다.
5월 16일 새벽, 한강을 건너올 때 약간 충돌이 있어서 다친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만, 사망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즉 한강다리를 진압군인 헌병대에서 차단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뜻이 되죠.
그날 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막는 척을 했을 뿐 적극적으로 막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장도영 총장은 왔다 갔다 하다가 아무런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24시간을 보내버렸는데, 다만 한강을 넘을 때 장면 총리와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피신하라는 이야기 정도를 했습니다.
장면 총리는 어디에 있었을까. 반도호텔에 집무실이 있었는데, 총성을 듣고는 먼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로 갔습니다. 지금의 한국일보 건물 건너편에 있었는데, 거기 아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피신하려고 간 겁니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혜화동에 있는 수녀원으로 갔고, 그 후 3일 동안에는 연락두절이 됐습니다. 軍(군) 통수권을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연락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 지도부의 실종사태라고 볼 수 있죠. 아무리 장면 총리를 인간적으로 변호하려고 해도 이 부분은 변호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용산에 있는 미군사령부로 도망갔으면 지휘부로 기능했을 거예요. 달아나는 장소를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그 새벽에 6군단 포병, 공수부대, 해병대까지 합쳐서 약 4,000여 명이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장면 총리는 달아났으니, 이 상황을 총괄해야 할 사람은 윤보선 대통령이죠. 윤보선 대통령이 군 통수권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진담이었을 거예요. 나중에 이 분은 박 대통령을 반대하는 쪽으로 갑니다만, 윤보선 대통령의 이 말은 많은 국민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말 때문에 나중에는 욕을 먹게 됐지만 말입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민주당의 舊派(구파) 출신이었기 때문에 장면 총리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에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미8군 사령관이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8군 사령관이 와서 군 출동 명령만 내려주면 4,000여명 정도의 얼마 안 되는 군대를 진압하겠다며 졸랐어요. 매그루더(C. B. Magruder) 미8군 사령관은 유엔군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李翰林(이한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분인데 지금도 살아계셔서 몇 달 전에도 만났습니다만, 박 대통령과는 滿軍(만군) 동기인데 군에는 이 분이 먼저 들어와서 당시에는 1군 사령관이 되어 있었어요. 당시는 3군 사령부가 없었을 때인데, 1군이 전 육군의 약 80%의 戰力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군만 움직이면 작전상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매그루더, 그린 대리대사의 군 출동 명령 하달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혁명군의 진압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죠. 윤보선 대통령이 혁명을 도와주게 된 겁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태도를 바꿔서 혁명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당시에 발표된 계엄령 선포, 혁명 공약 등은 전부 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름으로 나옵니다.
5월 16일부터 18일까지 한 3일 동안은 상당히 유동적인 상황이 계속되다가, 5월 19일쯤이 되면 5·16 혁명의 성공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이한림 1군 사령관이 부하들, 즉 육사 8기의 참모들에게 체포돼서 서울로 압송돼 버렸어요. 이게 제일 중요한 사건이었고, 그 다음은 육사생도들, 공사생도들이 18, 19일에 혁명지지 시위를 한 일입니다. 이것이 또 민심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이 진압명령을 거부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5·16은 준비된 쿠데타…집권 후 계획까지 치밀한 준비
이러다보니까 미국도 혁명을 뒤집을 수단이 없게 됐습니다.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났느냐. 이것이 만약 親共(친공) 쿠데타였다고 하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었는데, 이건 反共(반공) 쿠데타란 말이죠. 5·16혁명 공약의 제1조도 ‘반공을 國是(국시)의 제1의로 하고’로 시작됩니다. 박정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박 소장이 지휘를 했다고 하니까 좌익 쿠데타가 아닌가 의심한 사람도 소수가 있긴 했습니다. 그 당시쯤 되면 박정희에 대한 의심은 다 사라진 뒤였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은 처음엔 의심을 했지만 우리 군 안에서는 반공 쿠데타라는 사실을 의심한 이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60만 군대의 묵인하에, 아니 묵인이라기보다는 암묵적인 지지 하에 4,000명이 정권을 잡는 쿠데타가 성공을 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5·16은 준비된 쿠데타입니다. 5·16의 준비는 거의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준비하는 사람들도 정권을 잡는 것만 준비한 것이 아니라 정권을 잡은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까지 준비했습니다. 포고령을 열 개쯤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고, 정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중앙정보부를 만든다든지 하는 중요한 것을 미리 계획하고 있었어요.
이 계획을 책임진 사람이 당시 민간인이었던 김종필 씨입니다. 김종필 총리에 대한 요즘 이미지와 사십 몇 년 전의 이미지는 완전히 다르죠. 이 분은 4·19 이후 군내에서 기성세대는 퇴진하라는 下剋上(하극상) 운동을 일으켜서 옷을 벗게 됐습니다. 그래서 민간인으로서 혁명을 계획했죠. 김종필 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5·16을 준비하는 기간은 3개월 정도 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군대의 티자기, 官의 펜촉
민간인이 되니까 홀가분해진 김종필 씨는 왔다 갔다 하면서 출동계획을 짜는 등 음모가 본격적으로 됐습니다. 5·16의 작전참모는 김종필이었는데, 지휘관은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문서화 된 것은 거의 모두 김종필 씨 작품입니다. 이 박정희·김종필이라는 콤비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입니다.
김종필은 육사 8기생 중 모든 면에서 제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형인 朴相熙(박상희) 씨의 딸인 朴英玉(박영옥) 씨의 남편이 김종필 씨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1인자, 2인자 콤비는 대충 실패하는데, 박정희-김종필이라는 관계는 1979년까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획을 긋는 데 있어서 협조-관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정희-김종필의 콤비는 신라통일을 주도한 태종무열왕, 김유신, 문무왕 이 세 사람의 협조관계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김종필 총재에 대해서 사십년이 넘게 해먹다가 마지막에는 김대중의 신원보증이나 해줬다는 식으로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사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2인자를 한 것은 그 사람의 능력입니다. 공짜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분의 능력은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만, 제가 볼 때는 독서에서 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정희, 김종필은 둘 다 제가 만나 본 연배의 사람들 중에서 책을 제일 많이 읽은 사람이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다보니 사물을 보는 안목이 다르고, 또 말이 다릅니다.
박정희, 김종필 콤비에 의해 5·16이 성공을 했는데, 후에 미국은 追認(추인)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굴욕을 맛 본 매그루더 사령관이 본국으로 소환되어 버리게 되죠. 5·16이 이루어졌을 때 나이를 보면 김종필 씨가 서른여섯, 박 대통령이 마흔 넷이었습니다. 혁명 組閣(조각)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장도영 씨가 국무총리와 내각수반을 겸하는 식으로 되는데, 나중에 정리된 것을 보면 장관 중에서 50대는 金弘壹(김홍일) 외무부 장관 딱 한 사람뿐이었고 나머지는 30~40대였습니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이죠. 전보다 20년이 젊어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행정기관을 접수했습니다. 무엇이 달라졌느냐. 당시 군대에서는 문서를 기안할 때 타자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민간인들은 붓이나 펜촉으로 문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기획예산 제도가 없었습니다. 군대가 정부에 기획관리실 제도를 만들었는데, 예산을 쓰기 전부터 예산 수요를 계산하고, 이것을 어떻게 집행할 것이며, 집행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점검을 하고, 끝난 다음에는 어떻게 감사를 한다는 이 기본적인 일, 즉 기획예산 제도가 비로소 우리 정부에 도입이 되면서 지금도 각 부처에 남아있는 기획관리실장직이 생겼습니다. 당시 기획관리실장은 모두 군인들이었습니다. 그 군인들은 이미 미국에서 교육받아 기획예산 제도에 대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기획예산 제도에 대한 교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성공적인 개혁이 軍人에 의해 이뤄졌다
제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절대로 무식한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조사를 해 봤는데, 당시 군 생활을 13년 동안 한 육사 8기생이 그 동안에 교육을 몇 년 받았느냐. 보통 1년에서 2년을 받았습니다. 13년 동안에 재교육을 1년 내지 2년 동안 받은 사람들이었어요. 반면 그 당시 공무원들은 재교육을 단 1개월도 받지 않았을 겁니다. 선진된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군 장교단이었어요. 6·25에 의해 생겨난 거대한 군대 조직에서 이런 군 엘리트가 만들어진 거죠. 6·25는 ‘불행’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선진국으로 가게 한 축복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라는 것은 항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6·25가 同族相殘(동족상잔)의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것 같지만, 그 후의 역사를 보면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5·16 혁명 이후에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진 개혁이 많습니다. 우리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개혁이 군인에 의해서, 장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끔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소위 민주투사들이 개혁이라는 말을 자주 쓰니까 ‘개혁은 원래 민주투사들이 하는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민주투사가 한 개혁이 성공한 예는 잘 모르겠습니다. 있습니까? 별로 없어요. 군인들이 한 개혁은 성공했습니다.
그 내용을 하나하나 꼽으라면 너무 많지만 중요한 것 몇 개만 말씀드리면, 우선 법률안을 한글로 펴냈습니다. 그 전의 우리나라 법률은 총독부 시절의 일본말 그대로였습니다. 일본말로 된 법전을 펴놓고 재판을 하고 있었으니 아직도 식민지 시대가 안 끝난 거죠. 그런 법전이 혁명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글로 번역됐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육법전서를 갖게 된 것이죠. 그것을 군인이 했습니다. 電氣(전기) 3社(사) 통합을 해서 한국전력이 만들어진 사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개혁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 혁명주체 세력의 머리에는 대충 두 가지의 모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터키에서 있었던 케말파샤의 개혁입니다.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근대화 개혁 중의 하나죠. 또 하나는 이집트의 낫셀이 일으켰던 군사혁명입니다. 정권을 잡고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해서 유럽의 과거 식민지 종주국과 대결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젊은 장교들은 피가 끓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주성이 강하다보니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에 대해서였죠. 그래서 경제 정책도 외국에서 원조나 외국 차관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민족자본을 동원해서 민족경제를 만든다든지, 자주적인 경제를 만든다는 꿈에 매혹되어 있었어요. 수입품도 우리가 만든다는 수입대체 전략을 쓰려고 했습니다. 군인은 그렇게 가는 게 정상적이죠. 외국에서도 보면 특히 南美(남미)에서 군사정부가 들어서면 수입대체전략을 씁니다. 수출할 생각은 안하고 수입품을 국산으로 대체한다는 정도의 생각을 하는데, 한 때 우리나라도 이 쪽으로 가려고 한 것이죠.
민족자본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동원해 보자 해서, 혁명을 일으킨 그 다음 해인 1962년에 通貨(통화)개혁을 했습니다. 기억나시죠? 어느 날 갑자기 환이 원으로 바뀌면서 옛날 돈을 전부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 때 華僑(화교)가 돈을 많이 숨겨놓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우리 혁명정부는 그 돈을 동원하면 경제개발에 쓸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誤判(오판)을 했어요. 막상 해 보니까 별 것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경제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物價高(물가고)가 생기고 말이죠.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실패한 통화개혁이었는데, 이렇게 한때는 민족주의적으로, 폐쇄적으로 자주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현재의 북한과 비슷하게 가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무장한 예언가…실천적 사상가
역사에서 박정희라는 사람에 대한 개념규정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독재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박 대통령을 민주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근대화 혁명가라고는 합니다.
박 대통령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일 것이냐 하는 것이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revolutionary를 영어로 하면 혁명가가 되는데 여기에 visionary, 즉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추가하면 박정희가 됩니다. 혁명가는 때려 부수는 사람인데, 때려 부순 다음에 비전을 세우는 사람, 즉 revolutionary and visionary가 박 대통령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혁명가이면서 예언가인 사람, 예언은 예언으로 끝나지만 그것을 다 실현한 실천가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武裝(무장)한 예언가’라는 말도 쓴 적이 한 번 있습니다. ‘무장한 예언가’라는 말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트로츠키 전기를 쓴 사람이 armed prophet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자기 예언을 스스로 실천한 사람은 이승만, 박정희 정도의 사람 밖에 없는데, 이 사람들은 권력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실천이 가능했습니다. 실학파라든지, 정약용 다산 선생 같은 사람들은 목민심서를 통해 좋은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그런 세상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권력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죠. 권력이라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무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 대통령은 바로 무장한 예언가였고, 그래서 실천을 할 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마치 삼국지를 여러 번 읽으면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것처럼 20대에 봤던 박 대통령, 제가 기자생활을 하면서 본 박 대통령, 80년대에 보았던 박대통령이 다 다르고, 또 요새 보는 박 대통령이 다릅니다. 요새 보는 박 대통령에 대해서 저는, 이 사람이야말로 한국의 위대한 사상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상가라고 하면 헤겔이나 칸트 같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떠올리는데, 그분들은 관념 철학자입니다. 사상은 실천되어야 됩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사상을 실천을 통해 검증한 사상가입니다.
박 대통령을 사상가라고 하면 사람들이 잘 납득하지 못합니다. 왜냐, 박대통령의 말은 쉽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재학생 정도의 수준에 맞춰서 쓴 글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쉽기 때문에 사상가라고 하면 아마 비웃을 겁니다.
동양의 위대한 사상가의 말은 다 쉬웠습니다. 제일 쉬운 게 뭡니까? 孟子(맹자), 孔子(공자)가 쓴 논어를 읽어보면 어려운 것은 한 줄도 없습니다. 다 알 수 있는 겁니다. 맹자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恒産(항산)이 있어야 恒心(항심)이 있다’. 일정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안정되어가지고 사람이 예의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戰國시대 제나라의 管仲(관중)은, ‘곳간이 차야 염치를 안다’고 했습니다. 창고에 쌀이 있어야 사람이 염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죠. 이런 말들이 다 위대한 실용적 정치사상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그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박정희죠. 이 사람은 혁명가이기도 하지만 위대한 사상가입니다.
박정희는 자신의 사상을 이론으로 정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박정희의 정말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떤 강력한 집권자가 자기의 혁명 사상을 이론화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 바로 북한의 주체사상 같은 것이 됩니다. 도그마가 되고, 우상이 되어버리죠. 성경처럼 되어 버립니다. 박 대통령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돕지 못하면 하늘도 도울 수 없다”-박정희 통치 철학
박 대통령은 1962년에 한 말이나 1979년에 한 말이나 다 똑같습니다. 일관성이 있는 것이죠. 인간의 행동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이 철학인데, 박 대통령의 일관된 생각중의 하나가 ‘스스로 돕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도 도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自助정신을 갖고 가난을 헤쳐 나가려고 하는 사람을 도와야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도와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하면 잘하는 사람, 의욕이 있는 사람을 도와줘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로 하면 간단하죠. 하지만 이것을 정치인들이 집행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먼저 도와주죠. 그러나 박 대통령은 열심히 하려고 하는 사람, 잘하는 사람을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는 데는 마이너스가 되는 행동이죠. 정치인들은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공짜로 도와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박 대통령은 공짜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어떻게 성공했습니까? 각 마을에 시멘트를 나눠줬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을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봤어요. 어떤 마을은 받은 시멘트에 마을 주민들이 돈을 좀 모아서 스스로 길을 닦고 마을회관을 지었는데, 다른 마을은 받아서 그냥 썼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도와줄 때는 받은 시멘트에 더 힘을 모아서 무엇을 만들어 낸 쪽을 도와주고, 아무것도 안한 쪽은 도와주지 않았어요.
박 대통령이 항상 강조한 것이, 잘하는 마을은 도와주고 아무것도 안하는 마을은 도와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경제정책에도 반영이 됐어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공업을 우선 발전시켜서 얻은 돈을 가지고 농업을 지원하자, 중소기업도 좋지만 우선 대기업을 발전시켜서 번 돈을 가지고 중소기업을 지원하자, 잘하는 것, 또는 잘될 만한 데 먼저 투자하자고 했기 때문에 일이 된 겁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처음부터 농민이 제일 많으니까 농촌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자, 대기업은 욕을 먹고 중소기업은 동정을 받으니까 중소기업만 도와주자, 부자 마을보다는 가난한 마을을 우선 도와주자고 했으면 한국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발전이 됐겠습니까? 박 대통령 식으로 잘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잘되는 기업을 도와주고,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에 투자를 많이 하고, 농촌보다는 공업에 투자를 많이 하는 것은 다 인기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선거에 딱 지게 되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초지일관 이런 원칙을 잃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박 대통령은 군인을 배경으로 해서 권력을 잡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군인들을 다 행정부에서 밀어냅니다. 제대로 교육받은 행정 관료가 중심이 되어서 일을 하도록 한 것이죠. 나중에는 우리나라가 행정국가가 되어버려서 오히려 군인 출신이나 정치 쪽으로부터의 압력을 박 대통령이 차단해 주어, 행정가들이 소신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어요.
박 대통령의 군사 정권이 한 일 중에서 군사문화에 맞지 않는 게 많습니다. 첫째 군사비를 별로 늘리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에는 우리나라 군사비가 별로 늘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은 집권하면 우선 좋은 무기 사들이고 해서 군대에 투자를 많이 하는데, 박 대통령은 군사비 투자를 최소한으로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군인들을 많이 배치했지만 나중에는 행정 관료들이 많이 올라오니까 이들에게 주도권을 줬습니다. 정보부처럼 권력을 관리하는 부문에서는 군인들이 끝까지 많이 남아 있었죠. 결국은 무엇을 기준으로 했느냐,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밀어준다, 정치적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한다, 당파적 이해관계를 줄인다는 기준이었습니다.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는 데 걸림돌은 무엇인가. 야당이 시끄럽게 굴고 언론이 시끄럽게 비판하는 것은 모두 국가 이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력을 조직화하는 데도 방해가 되고, 능률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약화시킨다, 그래서 유신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72년 10월에 憲政을 중단시키고 유신체제를 발족시킵니다. 유신체제 기간 동안 한국이 가장 능률적인 국가가 된 것은 맞습니다. 그 대신 언론 및 야당에 대한 탄압이 수반됐죠.
박정희가 타도한 것
혁명가라고 할 때는 반드시 이 사람이 극복 또는 타파하려 했던 대상이 있어야 됩니다. 박 대통령은 무엇을 타파하려고 했고, 무엇을 혁명의 대상으로 삼았을까요? 박 대통령이 혁명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도대체 누구겠습니까?
프랑스 혁명은 왕조를 타도하고, 러시아 혁명은 차르 체제를 타도했는데, 박정희는 무엇을 타도했는가에 대해 언뜻 생각이 안 떠오르시죠? 박 대통령이 우리나라에서 무엇을 타도했습니까? 장면 정부를 타도한 것은 맞는데, 그것은 정부 차원이고 혁명가의 차원에서 타도한 게 있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위선적 명분론을 타도하려고 했습니다. 위선적 명분론이란 무엇입니까? 쉽게 이런 말이죠. 우리나라 선비들이 제일 훌륭한 덕목으로 생각했던 것이 淸貧(청빈) 아닙니까? 깨끗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가장 도덕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돈벌이하는 것을 죄악시했습니다. 이것은 위선이죠. 가난을 합리화하는 위선의 논리입니다. 이런 청빈사상이 지배하는 사회는 가난을 면하지 못합니다. 적극적으로 돈을 벌어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처럼, 번 돈으로 교회도 짓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우리 자본주의의 기본이 되는 윤리입니다. 박 대통령은 바로 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돈벌이는 죄악이 아니라 명예로운 것이고, 곧 애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淸貧사상은 아직도 우리나라에 남아있죠. 가난한 사람이 가장 도덕적이라는 내용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을 때 국회의원들과 공직자들의 재산 랭킹을 내니까, 재산 많은 사람은 공격해서 물러나게 만들고 재산이 마이너스인 사람이 가장 훌륭한 정치인인 것처럼 신문에서 많이 소개했습니다. 국회의원이 될 때까지 재산이 마이너스라면 국회의원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아직도 우리는 허위적인 청빈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빈사상은 유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유교 중에서도 주자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박 대통령이 타파하려고 한 것은, 주자학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한국을 500년 동안 다스렸던 조선조적인 봉건체제에서 지배 엘리트로 군림했던 선비들과 양반들의 전통이었고, 이를 이어받은 소위 민간정치인들이었습니다. 민주당이라든지, 또는 그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 즉 士農工商(사농공상)할 때 士(사)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정치인, 언론인, 교수, 학생 등 이런 사람들을 봉건적 잔재나 낡아빠진 사고방식을 가진, 극복해야 될 후진세력이고 전근대 세력이라고 본 것이 박 대통령 혁명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연설할 때는 군인, 노동자, 농민 순으로 나가다가 항상 끝에 교수, 학생 여러분이 나옵니다. 언론인, 교수, 학생들을 경멸했던 것이죠.
士農工商은 우리나라 조선조의 계급제도였습니다. 선비가 제일 위고 그 다음이 농사를 짓는 사람, 그 다음에 물건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은 제일 下(하)라는 이런 신분제도 하에서 기업인이 나오겠습니까? 군인들은 그 안에 속하지도 않았어요.
박 대통령은 이것을 거꾸로 뒤집는 것이 바로 근대화 혁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商工農士(상공농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박 대통령은 무역하는 사람이 최고고, 그 다음이 제조업 하는 사람, 그 다음이 농민, 그리고 士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제발 가만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점이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사상의 핵심입니다.
관념론 배격하고 실력 배양에 주력
두 번째는 관념론에 대칭되는 실용주의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관념적인 것을 싫어했어요. 관념이라는 게 참 골치 아픈 건데, 바로 북한이 관념의 나라죠. 우리나라에도 관념, 즉 말장난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그런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 사람들은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항상 관념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군형자론이라는 것도 관념론적인 것이거든요.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하면 되지, 균형자론이란 말을 만들어서 그걸 가지고 계속 말싸움을 하는 것 아닙니까? 북한의 주체사상도 그렇습니다. 아니, 주체롭게 살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 주체라는 말을 꺼내면서도 계속 외국에 앵벌이 하듯 구걸해서 먹고 사는 나라가 주체가 됩니까?
조선조 시대 때의 명분, 관념의 극치는 事大(사대)입니다. 청나라가 만주에서 일어나자 光海君(광해군) 때는 우리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그야말로 줄타기 외교를 해서 전쟁에 휘말려들지 않도록 해야 된다며 외교를 잘 했어요. 거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仁祖反正(인조반정)을 일으켰죠. 인조반정의 명분은 뭐냐. 우리나라는 한 사람의 황제밖에 없고 한 사람의 부모밖에 없는데, 명나라에만 충성해야지 왜 오랑캐에게 추파를 던지느냐 하면서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다시 親明(친명)정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는 이미 명나라는 망할 때고 청나라가 일어날 때였습니다. 망해가는 明에 事大하고, 일어나는 淸과 원수가 되겠ㄷ는 건 외교적 자살이지요. 요사이 노무현 세력이 망해가는 김정일 정권과 친구가 되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과는 멀어지려는 정책을 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丙子胡亂(병자호란)을 불러들이게 된 겁니다. 관념 때문에 일어난 일이죠.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현실에서 명나라는 이미 가고 있는데 명나라에 대한 사대론, 말하자면 의리에 집착하다 보니까 그런 참화를 맞았습니다. 청나라가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황제로 불러 달라고 하니까 조선조에서 황제라고 못 부르겠다, 황제는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20만 명이나 되는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오랑캐한테 끌려가는 참화를 불러 일으켰죠. 이것 역시 관념론의 폐해죠. 박 대통령은 이런 관념론을 우습게보고 실용주의, 즉 실천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점에서 혁명가입니다.
관념의 유희라는 것이 있습니다. 관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동안 관념론자들은 머릿속에서 집을 한 열 채쯤 짓고 갑니다. 저기에는 무슨 별장을 지으면 좋겠다, 저 언덕은 근사하니까 저기에는 무엇을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관념의 유희죠. 머릿속에서만, 말로써만, 상상 속에만 있는 세상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어서 관념의 유희는 독도입니다. 독도 문제가 일어나니까 일본하고 외교적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대통령이 어떻게 상대방 국가에 대해 외교적 전쟁이라는 말까지 쓸 수 있습니까? 외교와 전쟁은 다른 것이죠. 외교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전쟁이 시작되면 외교는 끝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 후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 전쟁이 일어났습니까? 우리가 일본에 대해 보복을 한 것이 있습니까? 일본 사람들에게 앞으로 한국 들어올 때는 비자를 받으라고 한 게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수출품을 우리가 못 사겠다고 한 게 있습니까? 결국 말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관념입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를 했습니까? 이번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일본이 중국한테도 사과하지 않고, 우리에게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게는 오히려 사과를 요구했죠. 과거에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삼고, 중국이 들고 일어나면 장관이 책임지고 그만두면서 사과 비슷한 것을 했는데, 이번엔 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안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적 전쟁이 됩니까? 안되죠. 말로써는 되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일본에 대해 보복할 수 있는 수단과 힘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거죠. 박 대통령 같으면 그런 말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일본과 대결할 수 있는 우리의 외교적·경제적·군사적 카드를 준비할 수 있는가에 더 신경을 쓰고, 말이 아닌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한 반골’ 박정희의 자주정신
이것이 바로 박 대통령이 경멸했던 관념주의죠. 박 대통령은 실용주의자였습니다. 실용주의를 하려면 힘이 있어야 되는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경제의 힘, 군대의 힘, 과학의 힘이죠. 그래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군대를 강하게 하고, 또 동맹국을 만들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개방정책을 썼습니다. 한때 폐쇄적, 자주적으로 가려고 하다가 한계가 드러나니까, ‘안되겠다, 돈은 외국에서 가져와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미국과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데, 일본과는 수교를 해야겠고, 미국에 가서는 말을 잘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61년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간 박 대통령은, 우리가 월남에 파병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처음 했습니다. 가는 길에는 이케다 수상을 만나서 한일 수교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돈을 끌어들이겠다는 개방정책으로 간 것이죠. 군인들은 폐쇄정책 쪽으로 갈 가능성이 많은데, 박 대통령은 개방정책 쪽으로 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혁명가죠. 혁명가란 상식적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사람, 상식적인 것을 뒤엎는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군인들은 폐쇄적으로 갈 것이고, 군사력 강화에 힘쓸 것이라는 생각이 고정관념이라면, 박 대통령은 개방과 경제개발로 이 상식을 부수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중심 사상에는 자주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사상가였기 때문에 일관된 전략을 쓸 수가 있었죠. 전략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기저에 하나의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념에서 전략이 나온다고 하죠. 확실한 가치관에서 전략이 나오는 것인데, 박 대통령의 전략은 딱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自助(자조), 自立(자립), 自主(자주)입니다. 自助情神(자조정신)이 있어야, 그런 사람들이 모여야 自立經濟(자립경제)를 만들 수 있고, 자립경제가 되어야 自主國防(자주국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자조정신, 자립경제, 자주국방의 세 단계로 한국을 발전시켰습니다.
60년대 제일 강조한 것은 자조정신이었고, 그 다음이 자립경제였습니다. 자립경제가 이루어지니까 70년대에 들어서면 중화학 공업을 일으켜서 자주국방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주라는 말은 노무현 대통령이 아닌, 박 대통령이 처음 썼습니다. 박 대통령이 말한 자주국방은 개념이 아주 분명했어요. 그것은 미국과 싸우겠다는 자주가 아니고, 북한이 단독으로 남침할 때 우리 국군의 힘만으로 싸워서 이기겠다는 것이 자주국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합세해서 우리나라를 치면, 우리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대응하겠다는 것이 박정희식 실용적 자주국방의 개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성격은 어땠는가. 평소에는 겸손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었지만, 누가 비웃는다든지 간섭한다든지 하면 용수철처럼 반발하고 대드는 반골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한 반골, 이것이 박 대통령 성품의 핵심인데, 미국이 이래라저래라 하니까 미국에 대해 화를 냈습니다. 그렇다고 反美(반미)로 간 것은 아니죠. 마치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유신이 당나라에 대해 한 말과 똑같은 겁니다.
삼국사기에서 김유신이 한 말 중에,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개의 다리를 밟으면 그 개는 주인을 물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말을 박정희 식으로 바꾼다면, ‘미국이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를 도운 은인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한민국의 주권을 무시하면, 즉 주인이 개의 다리를 밟듯이 미국이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한다든지 인권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개입을 한다든지 하면, 개가 주인을 물듯이 우리도 미국에 대해서 달려들어야 된다’는 생각, 김유신이나 박정희나 똑같은 자주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유신과 박정희에 의해서 대변되는 자주정신은 김일성 식의 관념적인, 말장난의 허위적인 주체의식도 아니고 또 제국주의 시대에 외국을 침략하겠다는 침략적 자주정신도 아니고, 그야말로 한국처럼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어서 외세로부터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극히 평화적인 자주정신이죠.
현재 노무현 대통령이 부르짖는 對美(대미) 자주라는 것은, 미국에 대해서는 할 말을 다하고 김정일에 대해서는 할 말을 안 하는, 親北의 병적인 존재 양식이 돼버렸어요. 反美하면 자주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북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 거지나라가 되어서 외국에 구걸하는 사대국가가 된 것 아닙니까?
反美 자주를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반미 사대가 되었고, 오히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같은 사람들은 親美를 하다 보니까 자주가 된 것 아닙니까? 미국과 친해서 도움을 받고 국력을 키우다보니까 미국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됐으니까 親美(친미) 자주가 된 거죠.
진짜 진보세력이었던 박 대통령과 5·16 주도세력
박 대통령은 말장난이 아닌 실천한 사람, 그 실천도 과학적으로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를 선진화시킨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진보세력이죠. 박 대통령과 5·16 혁명의 주도세력이야말로 진보세력입니다. 근대화를 성공시켜 선진화의 길을 열었다면 그 이상의 진보세력이 없지 않습니까?
겨우 배불리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꿈을 가졌던 우리 민족에게, 먹고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이제는 예술이나 문학을 즐기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해야겠다는 꿈, 그것도 유럽이나 미국 정도의 일류국가 수준으로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꿈을 갖도록 만든 것이 5·16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박 대통령이야말로 한국 민족사에서 가장 위대한 진보세력이고 선진세력입니다.
박 대통령이 그 문을 열 수 있게 한 저력은 박 대통령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축적입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국가를 만들고 한미 동맹을 맺어서 근대화를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과 우산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박정희의 근대화혁명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근대화 혁명 성공의 공을 박정희 대통령이 독차지해서도 안 되죠. 그 공의 상당 부분은 이승만 대통령과 박 대통령 선배 세대의 몫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라는 것은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지, 딱 잘라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기적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장시간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 趙甲濟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7-05-29, 09: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