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全斗煥 당시 대통령과 盧泰愚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합작했던 6.29 민주화 선언을 기점으로 하면 올해는 민주화 만20년이다. 조선일보와 한국조사연구학회가 공동조사한 '민주화 20년 국민의식조사'가 연초 조선일보에 발표되었다. 한 마디로 국민들은 한국식 민주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때로는 비관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많은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20년 전의 79%에서 지금은 37%로 줄었다고 한다. '민주화가 자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4%에서 31%로 늘었다. 민주화로 봇물이 터진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이 급증했다. 1987년에 노동자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응답자는 66%였는데 20년 뒤는 26%로 줄었다. '부당하다'는 의견은 12%에서 57%로 거의 다섯 배나 늘었다.
貧富격차에 대한 시각도 '정부정책 잘못'이란 생각은 35%에서 30%로 줄고 '개인능력 때문'이란 생각은 25%에서 37%로 늘었다.
'현재 생활이 좋아졌다'고 대답한 사람은 20년 전의 68%에서 32%로 줄었다. '한국의 미래를 비교적 낙관한다'는 사람도 55%에서 35%로 크게 줄었다. 남북관계에서도 '좋아질 것'이란 낙관론은 20년 전의 69%에서 30%로 줄었다. '전쟁이 나면 싸울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20년 전의 65%와 거의 비슷한 60%가 '싸우겠다'고 답했다. 주한미군의 안보에 대한 기여에 대해서도 약85%가 '그렇다'고 대답하여 20년 전과 거의 같았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민주화가 불러온 인권과 자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 반면에 法治와 안보(남북관계)의 약화를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수반하는 갈등과 혼돈에 피로감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 여론조사를 정치인들이 제대로 읽는다면 민주, 개혁, 통일을 앞세운 표 얻기 전술을 再考해야 할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실패는 아니지만 심각한 헛점을 드러낸 것이 노무현 대통령이란 존재이다. 그가 反헌법적-反국가적-守舊的 성향을 민주투사로 위장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유권자들의 낮은 분별력 때문이었고,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일 것이다. 盧정권 같은 위장民主세력을 선거를 통해서 퇴출시킬 수 있느냐가 올해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할 역사적 도전이다.
지난 20년간의 민주실천 시기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적 보수정권은 盧泰愚 5년뿐이었다. 김영삼은 출신성분이나 지지기반이 보수였으나 知性이 부족한 그 머리로 좌파적 역사관과 이념관이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사실상 좌파의 宿主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보수층을 분열시키고 약화시켰고 결과적으로 좌파의 무대를 마련해주었다. 그 뒤 10년간의 좌파정권 등장의 길은 연 이가 김영삼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친북좌파이다. 한국의 민주실천 시대 20년은 15년간의 좌경화 시기와 겹친다. 한국의 민주화가 보수층의 분열로 좌파에 이용당했다는 이 점을 직시하여야 2007년의 大반전이 가능할 것이다.
필자가 민주화 10년을 회고하며 쓴 1998년의 글을 아래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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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한국 민주화 10년의 반성..<錦衫의 피>를 또 뿌릴 것인가
實事求是
金泳三 전 대통령이 가장 즐겨 쓴 휘호는 「大道無門」, 金大中 대통령이 자주 쓰는 휘호는 「實事求是」라고 합니다. 故 朴正熙대통령은 「有備無患」을 좋아했습니다. 평을 한다면 金泳三씨의 글귀는 구호적이고 金大中, 朴正熙 두 분의 그것은 실제적입니다.
이번 호에 一代記가 실린 병자호란(1636년)때의 주화파(主和派) 거두 최명길(崔鳴吉)이 바로 實事求是의 정치인이었습니다. 정순태(鄭淳台)씨는 崔鳴吉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국난의 무거운 짐을 묵묵히 지고 위선적 명분론과 대결하면서 國益을 유일한 是非의 기준으로 삼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을 실천했던 巨人〉 지도자의 實事求是는 「사실에 근거하여 현실을 直視하고 국익을 기준으로 하여 시비(是非)를 가리는 자세」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仁祖 정부에서 崔鳴吉은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明나라에 대한 주자학적 사대주의에 뼈가 녹고 혼이 팔린 다수의 척화파(斥和派) 신하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淸나라와 화친하려는 崔鳴吉을 배신자로 몰았습니다. 홍문관 副校理 윤집(尹集)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명나라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나라이고 後金은 부모의 원수입니다. 임진년의 일은 조그마한 것까지도 모두 황제의 힘이니 우리나라가 살아서 숨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차마 淸 황제란 글자를 崔鳴吉의 입에서 거론할 줄은 몰랐습니다〉
누루하치가 일으킨 여진족의 後金이 明의 원수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원수는 아니었습니다. 명분론자들은 後金이 부모 나라인 明의 원수인데 어떻게 그 왕을 황제라고 부르겠느냐고 주장하면서 아무 힘도 없이 대들다가 後金(淸)도 원치 않았던 전쟁을 자초(自招)했던 것입니다. 요사이 일본의 天皇을 日王이라 표기하느냐 天皇이라 표기하느냐로 논란이 있는데 金大中대통령이 천황이라 호칭한 것은 崔鳴吉流의 실용론이라 볼 만도 합니다.
崔鳴吉은 조선이 淸의 황제 참칭(僭稱)을 나무라는 항서(抗書)를 보낸 이상 淸과의 전쟁은 불가피하니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합니다. 그는 강화도(江華島)로 빨리 조정을 옮겨 결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요사이에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비변사(備辨司)가 이 건의에 반대하여 江華島로의 피란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것은 仁祖의 큰 실수로 밝혀집니다. 淸의 기마군단이 서울로 쳐들어왔을 때 인조는 뒤늦게 피란간다는 것이 방비가 허술한 남한산성을 택함으로써 포위망 속에서 오래 버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비유환( 無備有患)이 된 것입니다.
名分 위해 國益 희생시켜
淸나라의 약을 올리고 있던 당시의 강경파 신하들은 정작 전쟁준비를 하자고 하면 희한한 논리를 동원합니다. 사간원(司諫院)은 「하늘이 크게 재앙을 내려 수해와 한해가 계속되니 팔도의 생령(生靈)이 모두 죽게 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전쟁까지 하게 된다면 국가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仁祖에게 상소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의리론을 앞세운 선비들은 淸에 대한 과격한 명분론을 펴 적을 문 앞에 불러들여 놓고서 전쟁 준비는 반대하니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이들은 明에 대한 事大의 의리를 지킨 선비로 그 뒤에도 오랫동안 이름이 남았지만 백성들은 이들의 위선(僞善) 때문에 말못할 수모(受侮)와 고통을 당했습니다. 개인의 名分을 위해 국가이익이 희생된 경우입니다.
더 웃기는 것은 그런 명분론자들이 충신으로 추앙을 받는 대신에 백성 편에 서서 화친과 전쟁대비를 주장했던 崔鳴吉은 後代에까지도 변절자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崔鳴吉 같은 주체적이고 실용적인 정치가들을 매장하는 못된 생리를 가진 것이 우리의 지식인들이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엔 국난(國難)을 눈앞에 두고 정치인들이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추구하면서 분열하다가 나라를 망치고 국민들을 도탄에 빠뜨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해방후의 예로선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있습니다. 일선에선 우리 국군들이 피를 피로 씻는 高地戰을 벌이고 있는데 임시 수도 부산에선 집권연장을 꾀하는 李承晩대통령과 미국의 비호를 받은 야당세력이 권력투쟁에 열심이었습니다. 급기야는 李대통령이 계엄령을 펴고 국회의원들을 국회로 잡아 들여와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 시켰습니다.
4.19학생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1961년 봄에 좌익-혁신 세력이 야간 횃불데모를 벌이는 등 사회 표면에 나서자 반공법을 강화하고 데모 규제법안을 만듭니다. 이를 국회에 내니 민주당 구파(舊派) 출신 야당(신민당)은 내심으로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민주당 신파 출신인 장면(張勉) 정권이 미워서 이 법안을 악법으로 규정하여 반대합니다. 그러자 민주당도 강행 통과를 포기했습니다. 야당 입장에선 좌익보다도 여당이 더 미웠던 모양입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일선의 장교단이 자신들의 등뒤에서 준동하는 좌익에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공산화되면 먼저 죽는 것은 우리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라도 이런 정권은 뒤엎어야 한다」는 軍心이 朴正熙소장이 이끈 4천명의 혁명군을 지원했기에 쿠데타가 성공한 것입니다. 똑같은 일이 지난 해 벌어졌습니다.
외환위기가 벼랑을 향하여 치닫고 있을 때 강경식(姜慶植) 경제팀은 국회에 계류중인 금융개혁법안의 통과를 위해서 大選에 정신이 팔린 여야를 설득하려고 애썼습니다. 당시 야당은 이 법안이 통과되면 李會昌후보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반대했고 여당도 이 법안의 통과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金大中후보에게 유리해질 것이라고 판단하여 포기했습니다. 우리 경제가 무너져내리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 정치인들은 당파적 이해관계를 私益보다도 우선시켰습니다.
당파적 엘리트 수준으로 복고(復古)
일부 정치학자들은 자유당, 민주당 시절의 정치인, 관료 등 우리나라 지도층을 당파적 엘리트로 분류합니다. 이들은 국가와 국민전체의 이해관계를 바라보면서 大義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출신 계층이나 지역, 또는 당파의 이익을 중심으로 하여 나라 경영을 해왔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우리 야당의 뿌리인 한민당은 地主출신이 많았고 李承晩의 농지개혁을 반대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5.16쿠데타 이후에 집권한 젊은 장교단을 국가 엘리트로 분류합니다. 국가 이익과 국민의 복지를 기준으로 하여 국가경영을 시작한 최초의 집단이란 점에서입니다. 요사이 金正日의 북한은 자칭 强盛국가로 불리고 있는데 학자들은 당파적 엘리트가 다스리는 나라를 연성(軟性)국가, 국가엘리트가 다스리는 나라를 硬性국가라 분류하기도 합니다.
1988년 이후 한국 민주화의 흐름은 5.16 이전의 당파적 엘리트 시대, 또는 연성국가 체제로의 復古라는 시각이 요사이는 상당한 설득력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시각은 IMF 관리체제를 불러온 경제위기도 이런 복고(復古)적 민주화의 대가(代價)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일부 학자들은 오늘의 경제위기, 그 원인은 金泳三 전 대통령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朴正熙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金大中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최장집(崔章集) 교수 등 상당수의 학자들도 그런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全斗煥대통령이 퇴임하면서 盧泰愚대통령에게 물려준 대한민국의 경제는 튼튼했습니다. 全斗煥 정권하에서 우리 경제는 연평균 10%씩 성장하여 세계 2백여개 국가 가운데서 1등을 차지했습니다. 대만(세계8위)보다도, 싱가포르(세계9위)보다도 높았습니다. 우리 경제는 1980년대에 외형만 커진 것이 아니라 내실 또한 든든해졌습니다. 1986년의 국민저축률은 34%로서 일본의 32.5%보다도 앞선 세계 제8위였고 경상수지 흑자는 세계 7위(87년엔 세계 4위)였습니다.
盧泰愚 정부 첫해(88년)에도 全斗煥 정부가 물려준 경제가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성적이 좋았습니다. 연간 경제성장률은 12.1%였고 1인당 국민소득은 3천7백달러, 수출 6백억 달러, 수입 5백25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는 1백 38억 달러나 되었습니다. 총 외채는 3백 20억 달러에 불과했고 우리나라가 외국에 가지고 있는 對外 자산은 2백 53억달러나 되었습니다. 1989년엔 외채와 對外재산을 상쇄하여 純 채권국이 되기도 했습니다.
1988년말 갤럽여론조사소는 全세계 34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한국인의 62%가 「1989년의 살림살이가 88년보다도 나아질 것」이라고 대답하여 세계에서도 가장 낙관적인 미래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국력이 가장 충실해 있을 때인 1988년에 우리는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서울올림픽의 1천 3백개 경기 가운데 定時에 시작하여 定時에 끝난 경기는 전체의 97.1%였습니다. 이것은 도쿄 올림픽의 93%, 서독 뮌헨올림픽의 95%를 앞지르는 역대 제 1위였습니다. 조직 운영을 기가 막히게 하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 독일보다도 우리나라의 조직운영이 더 정확 무비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때 한국사회가 고도로 생산적이고 능률적이었음을 상징하는 통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나라를 물려준 全斗煥씨와 그 전의 朴正熙에게 오늘날의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은 세종대왕에게 오늘날의 한글전용 폐혜를 따지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10년간의 민주화는 언론인과 정치인들, 그리고 勞組 농민 시민단체 등 이익집단들에게 특히 많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들은 이 자유를, 국가이익의 증진보다는 私益, 즉 당파적 지역적 집단적 이익의 증진에 주로 썼습니다.
이들은 그러나 솔직하게 자신들의 그런 私益을 추구한다고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두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인권을 위해서, 평등을 위해서, 民主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私益의 극대화는 민주화의 장막 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민주화란 말은 이기주의나 당파성을 근사하게 위장하는 데 더할 수 없이 좋은 명분과 간판을 제공했습니다. 시민윤리가 정착되지 않는 나라에선 민주화가 억지를 부리는 세력의 무기가 됩니다.
민주화로 私益 추구 극대화
지난 10년간 우리사회 일각, 특히 지식인 사회에서는 국가, 국익, 국가주의, 애국심, 우익, 보수, 反共이란 단어들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대신, 개혁, 민주, 시장, 자유, 평등, 평화, 진보, 화해, 같은 말들이 힘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은 反共을 국시(國是)로 하여 건국되었습니다. 우익이란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약칭하는 단어입니다. 국가주의는 「국가를 위해서 개인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국수주의와 달리 「국가가 잘 되어야 나도 잘 된다」는 건전한 公民윤리입니다.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들인 반공, 우익, 국가를 경멸하는 사람들 중에는 친공, 좌익 反국가 세력이 있습니다.
지난 10년간의 민주화 기간에 국익은 私益으로부터, 국가는 反국가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그 경제적 결과는 자원의 낭비와 國富의 해산과 국가 경쟁력의 약화였고 그 종착역이 IMF였던 것입니다. 1988년 국민회의 前身인 평민당은 농어촌 부채 5兆원 탕감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정부에선 『성실하게 가계를 꾸려가는 사람은 손해보고 빚을 내 농업 이외의 분야에 투자한 사람만 득을 보는, 나라를 망칠 정책이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金泳三 정부는 약25兆나 되는 공돈을 농어촌구조개혁 사업비 중 보조금의 명목으로 농민들에게 뿌렸습니다.
한국 엘리트들은 야망이 작다
이런 낭비를 부추긴 것은 농민들에 대한 일방적인 지원을 주장해온 정치인과 언론이었습니다. 집단이기주의에 볼모가 된 이런 자세는 결국은 농민들도 멍들게 하고 국가를 해친 일임이 이제 와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낭비도 소외된 계층을 위한 善行으로 포장되었고 그에 대하여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민주화가 몰고온 우리 사회의 명분론이었습니다. 한국 민주화 10년의 비극은 자유, 평등, 평화, 복지, 인권이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국익과 국가란 자주적이고 토착적인 가치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後者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는 점일 것입니다.
지난 10년의 민주화를 주도했던 것은 민주투사로 일컬어지는 세력입니다. 역사는 이들에게 투쟁에 대한 보상(報償)으로서 정권을 주었습니다. 金泳三의 민주계는 역사의 기회를 살리지도 못하고 실패함으로써 이제는 그들의 민주화 투쟁까지도 「정권욕에서 나온 행동」으로 치부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金大中의 동교동계가 그런 실패를 따라가지 않으려면 지나 10년의 민주화에서 실종된 것을 다시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 공익, 국익, 대동단결, 실사구시(實事求是), 실용, 자주 같은 단어들일 것입니다. 한 일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통 일본인들도 개인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이 충돌하면 일단 회사를 위해서 참아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지도층은 국가를 위해서 개인의 욕구를 자제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국가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엘리트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엘리트들은 야망이 참 작다』
국가와 국익을 생각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아무리 직위가 높아도 작은 사람들입니다. 개인, 지역, 당파를 위해서만 싸우는 사람들이니까요. 우리는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껴안고 한 시대를 짊어지고 고민해 가는 그런 巨人이 아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지도층을 자임(自任)하시는 분들은 이번호 月刊朝鮮에 등장하는 朴正熙, 崔鳴吉, 등소평(鄧小平), 칭기스칸, 그리고 일본 明治유신시대의 엘리트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이야기에서 느끼시는 바가 있었으면 합니다.
<1998년 11월 월간조선>
좌파에 이용당한 한국의 민주화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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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6-08, 1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