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勉 대사의 6.25 手記

李承晩 대통령의 떨리는 목소리,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참전을 요청한 일 등등.
1950년 6월 25일 밤 9시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있노라니까 AP 통신사의 해리스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해리스 기자의 다급한 목소리는 '북괴군이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한다는데 아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듣
는 이야기인지라 '모른다'고 대답한 다음, 흔히 있는 산발적인 전투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이윽고 UP 통신사에서 또 남침 보도
가 들어왔는데 사실이냐고 확인하려는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이번에
도 역시 국지적인 충돌일 거라고 대답했으나 어쩐지 사태가 심상치 않다
는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국무성에 전화를 걸었더니 담당 직
원이 없어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6월 25일(일요일)이 미국 시간으로는
24일이며, 토요일이어서 주말 여행을 떠난 모양이었다. 국무성 숙직자에
게 한국으로부터 무슨 보고가 있으면 연락해 줄 것을 부탁하고 전화를 끊
었다.

10시 30분쯤 본국 정부로부터 지급 국제 전화가 걸려 왔다. 바로 李 대
통령의 육성이 들려 왔다. 李 대통령은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장 대
사! 이거 큰일 났소. 북괴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서 밀고 들
어오니, 장 대사가 어떻게 빨리 활동해 주어야겠소' 하는 것이었다.
李 대통령으로부터 현지 정세를 대충 듣고 나니, 곧 이어서 다시 임병
직 외무 장관도 미국 대통령과 유엔에 호소하여 우리 나라를 구원해 주도
록 극력 활동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임 장관은 '당신 하나의 역량에 국
가의 운명이 달렸소' 하면서 목이 메어 우는 소리로 호소하는 것이었
다. 임 장관의 전화를 마지막으로 본국 정부와의 연락은 완전히 두절되
었다.

정부의 훈령을 받을 도리가 없으니 완전히 나 혼자의 판단으로 활
동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밤 11시,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중압감
을 느끼면서 나는 국무성으로 차를 몰았다. 국무성 건물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러스크 극동 담당 차관보(현 국무 장관), 히커슨 유엔 담당 차
관보, 제섭 순회 대사 등이 모여 있었다. 이날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
주의 자기 私邸(사저)로 주말 여행을 떠났고 애치슨 국무 장관은 메릴랜드 주의 그의 별장에서 쉬고 있었다.

내가 국무성에 들어서자 모여 있던 국무성 고관들은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다그쳐 묻는 것이었다.
그들은 外電으로 사태의 심각함을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아직 확실한 보고
는 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李 대통령으로부터 국제 전화를 통해
직접 들은 정보를 이야기해 주고 그것을 토대로 대책을 협의하기 시작했
을 때, 무치오 주한 미 대사로부터 '오늘 아침 북괴군이 대한 민국 영토
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침범해 들어왔다. 이 공격의 규모로 보나 작전 형
태로 보아, 이것은 대한 민국에 대한 총공격으로 보인다'라는 내용(이
전보의 전문은 후에 입수된 것임)의 電文이 전달되었다.

이 자리에 모인 러스크 차관보 등은 우선 한국 사태를 유엔 안전 보장 이
사회에 제소하기로 합의를 보고, 곧 애치슨 국무 장관에게 장거리 전화
를 걸어 이 대책을 건의했으며, 애치슨 국무 장관은 다시 장거리 전화
로 트루먼 대통령의 구두 허가를 얻었다.

한편 이들은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 총장을 야밤중에 깨워 긴급 사태를
설명하고, 밤늦게라도 안보 이사회 11개국 맴버에게 통지해서 내일 안으
로 안보 이사회의 긴급 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요청했다. 리 총장은 북괴
군의 남침 보고를 듣자 대뜸 한다는 말이 '아이쿠, 하느님! 이건 유엔
에 대한 도전이구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리 총장의 주선으로 안보 이사회가 소집되기로 결정을 보고 나니 다음날
새벽 3시가 되었다. 미국은 제소자(提訴者)가 되어 철야로 제소문 작성
에 바빴고 재외 각국 대사에게 이 사실을 전보로 알렸다.
나는 새벽 4시가 넘어 숙소로 돌아왔으나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유엔 안보 이사회에서 당사국 입장으로 발언하게 될 연설문을 작성하느라
고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 아침 9시, 성당에 들러 주일 미사에 참례하
고 유엔 본부가 있는 롱 아일랜드의 레이크 석세스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날 아침 조간들에 주먹 같은 활자로 실린 '한국에 전쟁유발'이
라는 톱기사를 보고, 긴장과 흥분에 휩쓸려 안보 이사회가 열리는 유엔
본부로 가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도저히 비행기표를 끊을 수가 없었
다. 나는 무슨 일이 있든지 오후 3시 안에는 꼭 레이크 석세스에 도착해
야 하므로 급한 대로 군용기를 내달라고 해서 그것을 얻어 타고 유엔 본
부로 달려갔다.

유엔 본부에는 안보 이사회 긴급 회의를 구경하러 온 수천 명의 사람이
들끓고 있었다. 마이크를 야외에 장치해 놓고 회의가 개최되었다. 안보
이사회에는 상임 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자유 중국과 비상임 이사국
인 쿠바 에콰도르 노르웨이 이집트 인도 유고슬라비아 등이 참석했다.
이날 중요한 상임 이사국의 하나인 소련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 무렵 소련은 자유 중국 대신 중공을 안보 이사회에 앉히자는 주장을
내세우고 안보 이사회의 출석을 보이콧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날 회의
는 물론 한국 사태를 결정하는 모든 회의에도 참석치 않았다. 생각하면
소련의 회의 불참은 그야말로 천우 신조(天佑神助)가 아닐 수 없었다.

만일 소련이 안보 이사회에 출석해서 사사 건건 거부권을 행사했던들 정
전 요구 결의안이고 무엇이고 하나도 통과되지 못했을 것은 뻔한 일이었
고, 우리 조국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모골
(毛骨)이 송연하다.
오후 3시, 안보 이사회가 열리자 리 총장은 '한국 사태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중대 사건인 만큼, 안보 이사회는 한국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적절하고 신속한 방도가 강구되어야 한다'고 연설했다. 뒤이어 미국의
그로스 대표는 당사국인 한국 대표를 참석시키자고 제의하여 내가 안보
이사회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미 안보 이사회에는 유엔 한위(韓委) 등에서 각종 보고 電文이 들어
와 있어 그것들을 토대로 진지한 수습책이 논의되었다.
미국은 제소국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북괴군의 대한 민국에 대한 무력 공격을 지대한 관심으로 주목하며,
이 행동이 평화 파괴를 조성함을 단정하고, ① 전쟁 행위의 즉시 정지
를 요구하고, 북괴군을 즉시 38선 이북까지 철수시킬 것을 북괴 당국에
요구한다. ② 유엔 韓委에게는 ㉠ 이 사태에 관하여 충분히 검토된 모
든 건의를 가능한 한 지체없이 통고할 것, ㉡ 38선까지의 북괴군의 철수
를 감시할 것, ㉢ 본 결의 이행에 관하여 부단히 안보 이사회에 보고할
것을 통고한다. ③ 본 결의를 이행함에 있어서 유엔에게 모든 협조를 제
공할 것과 북괴 당국에 대한 원조 제공을 하지 말 것을 전 회원국에 요청
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제안 설명이 끝나자 이어 당사국을 대표해서 나에게 발언할 기회
가 주어졌다. 나는 밤을 세워 초안해 둔 연설을 행했는데 그 요지는 다
음과 같다.

'유엔 승인을 받은 대한 민국은 현재 북한 괴뢰군의 불법 공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여 고전 분투하고 있다. 북괴군의 대규모 침공은 우리 대한
민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북한 괴뢰 정권 치하에 몰락시키려는 야망에서
임이 분명하다. 이런 불법 공격은 인도와 민심을 거스르는 죄악일 뿐 아
니라, 국제 평화와 안전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니 만큼 귀 안보 이사회에
서 침략자들로 하여금 일체 공격을 즉각 중지케 하고, 38선 이북으로 철
퇴하도록 강력히 조처해 줄 것을 호소한다.'

나의 연설이 끝나자 미국 제안을 둘러싸고 갑론 을박이 벌어진 끝에 하
오 6시쯤 표결에 붙여졌다. 10개 참가국 중 미 영 프 중 쿠바 에콰도르
노르웨이가 찬성하고, 이집트와 인도는 투표 불참 후에 찬성, 유고는 기
권함으로써 이 정전 요구 결의안은 가결되었다. 이로써 일단 유엔으로서
는 제1 단계의 급한 조처를 취해 놓았다.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유엔 안보 이사회에서 정전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던 6월 26일(미국 시
간 25일) 하오에 주말 여행을 즐기던 트루먼 대통령은 예정을 앞당겨 급
거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이날 맥아더 장군과 주한 미 고문단에서는 한국군에 실탄이 필요하니,
급히 공급해 달라는 요청이 국무성 당국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덜레스 씨로부터도 화급한 電文이 도착했다. 6 25가 터지기 사
흘 전에 한국을 떠났던 덜레스 씨는 일본에 들러 경도 지방을 관광하다
가 맥아더 장군의 급보를 받고 동경으로 돌아왔다. 맥아더 장군이 보낸
전용기로 동경에 비래(飛來)한 덜레스 씨는 한국 사태에 관해 맥아더 장
군과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눴다. 평소 한국을 아끼고 뒷받침해 주던 맥아
더 장군과 유사시에는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언질을 준 바 있는 덜레스 씨
는 북괴군을 격퇴시키기 위해서는 미군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덜레스 씨가 미국 정부에 보낸 전문 내용을 보면 '한국
군이 침략자를 自力으로 물리칠 수만 있다면 제일 좋은 일이지만,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라면 미군을 투입해야 한다. 이런 불의의 침략을 미국
이 좌시하고만 있다면 불행한 사태의 연쇄적 계기로 종국에는 제3차 대
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처음 한국 사태에 대해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덜레스 씨의 이
電文이 결정적 작용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워
싱턴에 귀환하자, 곧 존슨 국방 장관과 3군 참모 총장, 그리고 애치슨
국무 장관, 웹 차관, 러스크 차관보 등을 블레어 하우스로 불러 긴급 회
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애치슨 국무 장관의 제의로 맥아더 장군에게 다량의 탄약
공급을 결의했고, 비행기와 선박으로 재한 미국인을 철수할 것과 필리핀
에 있던 미 제7 함대를 북상시켜 대만을 보호할 것을 결정했다. 이튿날
인 27일(현지 시간 26일)에도 2차 연석 회의가 열렸고, 이날 오전에는
트루먼 대통령의 '유엔 결의를 지지한다'는 간단한 성명서가 발표되었
다. 이날 하오 4시쯤 나는 한표욱(韓豹頊) 1등 서기관을 대동하고 백악
관으로 트루먼 대통령을 면회하러 들어갔다. 미국 태도 여하에 우리 국
운이 달려 있는지라,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하고 단호한 결정이 내려져
야 할 순간이었다.

나는 침통한 심정으로 트루먼 대통령 앞에 섰다. 너무도 황급해서 국가
원수에 대한 예모도 차릴 겨를도 없이 '한국의 비극을 알고 계십니
까?'라고 들이댔다.
'6개월 전에 내가 이 자리에 와서 38선 경비를 위해 무기 원조를 요청하
지 않았습니까? 그 후 소총 한 자루라도 한국에 보냈습니까? 그때 우리
요구를 들었더라면 오늘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나라 운명이 당신 손에 달렸으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마구 항변
했다.

내가 너무 흥분한 어조로 말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던 한표욱 1등
서기관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아무 대꾸도 없이 한참 동안 조용히 내 말을 듣고만 있더니 '장 대사의
초조한 심정은 잘 알겠소. 그러나 유엔이 적절히 조처할 것이니 지금 앞
이 아무리 캄캄해 보이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라고 위로하는 것이
었다. 그러나 미군의 파병에 대해서는 아무 확실한 언질을 해주지는 않
았다. 나는 트루먼 대통령의 암시적인 이야기에 만족할 수 없어 '당신
의 역량으로 꼭 한국을 구해 주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물러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함축성 있는 말에 일루의 희망을 두기도 했
다.

내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니 기자들이 나를 둘러싸고 대통령과
의 회담 내용을 질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외교 예의상 회담 내용을 그대
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가 유엔과의 협조하에 반드시 한국을 지원해
줄 것을 확신한다고 답하고, 기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절대적인 협조를
요망했다. 또 全미국인에게 공산 도배의 불법 침범을 당한 우리 한국을
지원해 달라는 나의 간청을 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전항이 날로
한국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인 27일, 미국 정부의 태도도 점점 한국
지원으로 기울어졌다.

맥아더 장군과 덜레스 씨의 노력이 결정적으로 주
효했고, 한국을 방위권에서 제외한다고 선언한 까닭에 북괴군을 불러들
인 결과를 빚어낸 애치슨 장관도 앞장서서 한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앞서 대한 무기 즉송(對韓武器 卽送)을 명령한 트루먼 대통령은 27일 상
오에 상하 양원 중진들을 관저로 불러 한국의 긴급 사태를 설명한 후,
한국에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 낮 12시 30분 미 해 공군의 한국 파병
을 全세계에 공표했다.

유엔 본부 구내 식당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발표를 들은 나는 한결 마음
이 가벼워진 심경으로 이날 하오 3시부터 열리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
회 제2차 긴급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이 파병 성명
은 그날 열리는 안보 이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오 3시부터
열린 안보 이사회는 밤 11시까지 회의를 강행한 끝에 북괴군에 대한 군
사적인 제재를 가할 것과, 모든 유엔 회원국에 대해 한국에 원조를 제공
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의 이와 같은 결의에 따라 50
여 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 혹은 경제적인 원조를 해온 것은 주지의 사
실이다.

유엔의 모든 긴급 결의를 진행시키는 데 있어 리 총장의 숨은 공로가 지
대한 것이었다. 또 미국 수석 대표 오스턴 상원 의원의 한국을 위한 눈
부신 활약, 자유 중국의 장 박사, 필리핀의 로물로 장군 등 몇 분의 특
별한 공로를 우리 국민이 두고두고 감사해야 할 줄 안다. 이날 회의에
도 소련 대표는 참석치 않아 한국에 유리한 결의가 무난히 통과될 수 있
었다. 소련은 안보 이사회에서 무슨 결의안이 채택되든, 2주일만 지나
면 부산까지 석권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 때문에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 한국 파병을 결정하고 유엔이 이를 뒷받침하자, 나는 비로소 어
느 정도 안도감을 갖고 하느님께 감사드려 마지않았다. 나는 해 공군뿐
만 아니라 지상군까지를 파견해야 이 전쟁은 속히 끝날 것이라고 주장하
면서, 요로 인사들을 역방하고 또 기자 회견을 통해 이 점을 특히 강조
했다.

불행히도 서울이 28일 북괴군에게 함락되고 곳곳에서 국군이 패주하게
되자, 맥아더 장군은 30일 한국을 직접 방문, 李 대통령과 회담하고 돌
아갔다. 덜레스 씨도 워싱턴으로 돌아와 한국 전선에 해 공군뿐만 아니
라 지상군까지도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6월 30일 트루먼 대통
령은 지상군에 대해서도 한국 출동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한편, 나는 6월 26일부터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국내에 있는 동포
들에게 미군 파병과 유엔 결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고, 지금은 국군이
후퇴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서울을 탈환할 것이니 敵치하에서 어려움을 참
고 견디어 달라고 매일 호소했다. 특히 나는 방송을 통해 북괴군에게 협
조하거나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날뛰면 수복 후 극형에 처할 것이라고 거
듭 강조했던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찌는 여름에 이불을 쓰고 몰래 내 육성 방송을 듣고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는 동포가 많았으며, 나는 이 일로 하여 북괴군에
게 더욱 미움을 받아 여동생 정온(貞溫: 평양에서 수녀원장으로 있었음)
을 잃기까지 했다(평원군(平原郡) 촌가에 피신 중 지명 수배로 10월 4
일 체포되어 처형된 것으로 안다).

이렇게 바쁘고 초조한 가운데 6월이
가고 7월이 되었다. 나는 7월에 들어서도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활
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본국 정부와 연락이 끊어진데다가 국내에 있
는 가족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고, 對美 對유엔 외교는 나 혼자서 전담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의 우리 주미 대사관은 조국의 운명
을 짊어진 유일한 외교 기관이었다.

유엔 안보 이사회는 매달 의장국이 윤번제로 바뀐다. 7월에는 소련이 불
참했기 때문에 한국에 유리한 모든 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으나, 8월
에는 소련이 안보 이사회의 의장국이 되므로 소련이 출석할 가능성이 많
은 것이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모든 안건을 소련이 불참하는 7월 중에 모조리 처
리해 달라고 간청하며 여러 대표들을 순방했다. 그래서 나는 7월 한 달
을 또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7월 7일에 유엔 안보 이사회는 유엔군 총
사령부 설치안을 가결시키고, 유엔군 총사령관에 맥아더 원수를 임명했
다. 영국 프랑스 등 자유 우방 국가가 미국의 뒤를 이어 유엔군에 참여
하고, 의료품과 물자의 원조가 잇따라 들어와 한국 전쟁은 소련 북괴
대 자유 진영 국가의 싸움으로 그 양상이 바뀌어졌다. 나는 7월 중에 외
교 활동의 여가를 이용하여 한국의 전재민(戰災民)에 대한 구원 대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유엔 경제 사회 이사회와 미국 정부, 그리고 각종 구
호 단체를 통한 전재민 구호는 크나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특히 뉴
욕의 스펠만 대주교 등에 의한 在美 종교 단체의 활약은 괄목할 만한 것
이었다.

나는 틈틈이(주로 일요일) 각지의 민간 단체 회합을 찾아 다니며, 한국
동란의 유래와 현황과 전망에 대하여 연설을 하는 가운데 미국 우방인들
의 올바른 이해와 협조를 얻기에 전력을 기울여 보았다. 가는 곳마다 매
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全세계에 방송된 울분의 연설

전황은 날로 불리해 가고, 국군은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했다. 나는 유엔
과 미국 정부에 매달려 7월 한 달을 바쁘게 보냈다. 소련은 최초에 꿈꾸
던 안이한 한국 점령이 의외에도 유엔 궐기에 부닥쳐 안보 이사회의 보이
콧이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이제는 정략을 바꿔 8월 회의에는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인 소련 대표 말릭이 이사회에 출석
했다. 그는 의장석에 앉더니 대뜸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 이사회의 그동
안의 모든 결의가 모두 무효임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의 주장인즉, 안
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
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회의에도 옵서버 자격으로 자리 잡고 앉으려고 대기하고 있었
다. 나는 소련이 불참하는 동안 줄곧 안보 이사회에 참석해 왔던 것이
다. 그러나 그자는 끝내 나의 착석을 거부했다. 독설가 말릭은 그의 독
특한 억설로 기세를 올리면서 '6 25 동란은 북괴군의 남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한국군의 북침'이라고 괴변을 늘어놓으면서 미국
이 한국군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우겨대는 것이었다.

그는 덜레스 씨
가 38선 시찰 때 찍은 사진을 어디선지 입수해 가지고 제시하면서, 그
가 북진 침략의 지령을 내리는 광경을 좀 보라고 하면서 그 책임을 거꾸
로 미국에 뒤집어씌우려고 들었다. 나는 소련 대표의 이런 逆선전을 미
리 예상하고, 미국측 대표 오스턴 씨와 짜고 한국 전선에서 노획한 소련
제 소총 한 자루를 책상 밑에 미리 감추어 놓았다가 반격을 가하기로 한
것이다. 말릭은 우리의 이러한 계략도 모르고 '이번 싸움은 한국 사람끼
리의 싸움이지 소련은 전혀 아랑곳이 없다'고 우겨댔다. '소련군은 이
미 1947년에 완전히 북한에서 철수했고, 이번 동란에 소련서는 총 한 자
루 보내 준 일이 없다'고 큰소리 치고 있었다.

말릭의 억지 연설이 끝나자, 오스턴 씨가 일어나 한국 전쟁은 소련이 배
후에서 지시한 것이 분명하다고 반격한 다음, '여기에 그 물적 증거가
있으니 돌려보라'고 하면서 책상 밑에 감추어 두었던 소련제 소총을 꺼
내 각구 대표들에게 돌려보였다. 한국 전선에서 생포한 북괴군으로부터
입수한 이 소총에는 1950년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이 소총을 본 각국 대표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릭을 쳐다보자, 난처
해진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 퇴장해 버렸다.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졌
다. 소련 대표가 사회를 맡은 8월 중의 유엔 안보 이사회는 매일 설전
(舌戰)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9월이 되었다. 9월은 영국이 안보 이사회 의장국이었다. 9월
1일, 글랜드윈 접 대표가 안보 이사회의 사회를 맡게 되자, 나는 지난달
에 말릭으로부터 받은 모욕을 설욕하기 위해 착석과 발언권을 달라고 미
리 요구했다. 의장은 '당사자 국인 대한 민국을 대표하는 장 대사에게
착석을 허한다'고 선언하자, 나는 마치 단거리 선수마냥 쏜살같이 달려
가서 착석을 했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나는 '그동안 갖은 모욕
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소련을 공
박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말릭이 '규칙 발언!'이라고 고함을 지르면
서 내 발언을 제지하려 들었다. 그는 나를 향하여 '도대체 저자가 누군
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고 노발
대발하면서 '저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말릭의 욕설에 대해 취소하라고 항변하면서 '대한 민국에는 이승
만 도당이라는 것은 없고 나는 헌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대한 민국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의장의 초청으로 착석했
노라'고 답변하고, 그동안 가슴에 쌓였던 울분의 발언을 약 40여 분에
걸쳐 여지없이 털어놓았다. 내 생애를 통해 가장 잊지 못할 후련한 연설
이었다. 이날의 반박 연설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세계에 방송되어 참 통
쾌한 연설이었다는 격찬도 많이 받았다.

한국 문제를 둘러싸고 유엔에서 불꽃 튀는 설전이 오가는 가운데도 미국
과 자유 진영의 여러 국가는 한국 전선에 끊임없는 정신적 지지와 아울
러 병력과 무기를 보내 주어 전투력을 강화했다. 불법 침략자를 집단적
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정의감은 전세계 자유 국가의 일치한 이념이었
고, 동란을 계기로 세계 평화와 안전의 수호자로서 유엔이 훌륭하게 그
책임을 수행한 보람으로 마침내 9. 28 수복의 날이 왔고, 적도(赤都) 평
양도 10월 20일 탈환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뜻밖에도 중공군이 개입하기에 이르렀
다. 유엔은 다시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들어갔으나, 그때는 본국 정부
와 끊임없이 연락을 취하면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6. 25 직후와 같
이 외롭고 초조하지는 않았다. 맥아더 원수의 주장대로 만주를 폭격하
여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무수한 우리 국군 장병과 우방 전우들의 고
귀한 희생과 무고한 동포들의 처참한 수난의 대가로 겨우 통일 없는 휴전
으로 끝나고 만 것은 참으로 천추의 한이다.

國運을 한몸에 짊어지고 정부의 원조도 별로 받지 못한 채 고군 분투하
던 6 25 동란 중의 주미 대사 시절을 회고할 때마다 통일 없는 휴전으
로 매듭 지어진 조국의 숙명이 슬프기만 하다. 그리고 나의 외교 활동
과 '미국의 소리' 방송 때문에 북괴의 지명 수배에 걸려 억울한 최후를
마친 누이동생 정온의 얼굴이 가끔 떠오른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이제 고인이 된 맥아더 원수와 덜레스 씨의
크나큰 은공이다. 이 두 분이야말로 대한 민국의 탄생에서부터 6 25 동
란을 겪는 동안 꾸준히 우리를 도와 준 은인이다.
6 25를 겪은 후 내가 덜레스 씨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는 6 25
직전에 한국을 방문할 때 이미 한국을 돕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감겨들
고 있었다는 것이다. 덜레스 씨는 한국 방문에 앞서 나의 초청 만찬에
서 38선 시찰과 국회에서의 한국에 대한 지원 연설을 요청받고 넌지시
애치슨 국무 장관을 만나 자기가 한국 방문 중에 그런 발언을 해도 괜찮
겠느냐고 미리 의논을 했다고 한다.

덜레스 씨 자신이 한국 국회에서 행할 연설문의 초안을 잡아 애치슨 장관
에게 보여주면서 '유사시에는 혼자 싸우지 않을 것이다'라는 정도의 의
례적 언질을 주어도 무방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하니 묵인해 주더라는 것
이다. 물론 그 당시 애치슨 씨가 며칠 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만큼 그 정도의 묵인이나마 해준 것이지, 전쟁
의 눈치라도 채었던들 응낙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덜레스 씨는 한국을 방문하는 즉시 38선을 시찰하고, 이어 국회
에서 그와 같은 발언을 했던 것이다. 결국 이 언질 때문에 덜레스 씨
는 '올가미를 쓰게 되었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자기는 스스로 발언
에 책임을 느껴 더욱 한국 지원을 위해 앞장서서 최대 노력을 하였노라
고 술회하였다. 그는 나에게 농담조로 '여보! 글쎄 그런 법이 어디 있
소…. 그날 저녁에 나는 멋도 모르고 그런 지독하게 비싼 저녁 한 끼 얻
어먹고, 그 밥값을 치르느라고 어찌나 혼이 났는지 이루 말도 다 못하겠
소!' 하며 껄껄 웃으면서 6 25 동란과 워싱턴을 오고 간 지난날을 회고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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