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盧泰愚를 높게 평가할 것이다

공산권 붕괴와 민주화란 안팎의 전환기를 맞아 국가 대전략으로 민족의 活路를 열어간 사람.

*노태우 육성 회고록의 머리글*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

인간이 人類라는 種을 형성하여 만들어낸 가장 소중한 제도는 국가와 민주주의일 것이다. 民主국가(또는 국민국가)가 있음으로 인간은 안전, 복지, 자유를 누리면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독립선언서에 明文化했던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은 '민주주의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를 마시면서 자라는 나무다'는 말을 남겼다. 민주주의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그런 희생 없이는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국민국가 건설의 역사와 軌(궤)를 같이 한다. 19세기 말 開化期를 기점으로 한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나이는 약150년,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기점으로 치면 59년, 1987년 6.29 선언을 기점으로 하면 20년이다. 매우 어린 민주주의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랜 영국의 민주주의는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를 기준으로 하면 약800년의 역사이다. 왕의 세금징수권을 제한하고 자유민을 재판 없이는 구금할 수 없도록 한 이 문서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민주주의가 정권교체의 관례를 확립하는 데는 473년이 걸렸다. 정권을 잡기 위한 수많은 內戰, 암살, 음모를 겪은 끝에 영국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규범이 정착된 것은 1688년 명예혁명 이후이다.
영국을 민주주의의 어른, 한국을 어린아이로 비유한다면 영국 민주주의의 나이는 80이고 한국은 15세이다. 민주주의의 발전단계에서 마지막 고비는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정착이다. 그 나이가 20년인 한국과 320년인 영국, 그 차이는 국민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윤리, 제도의 운영 방식, 정치인들의 행태 속에 남아 있다. 한국의 정치, 언론, 사법, 문화 등에서 드러나는 未熟性(미숙성)은 민주주의 체험의 기간이 짧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정치게임, 6.29 선언

한국인들은 지난 60년간 압축성장이란 말을 만들어내면서 인류역사상 가장 빠른 발전을 이룩했다. 경제적 발전뿐만이 아니었다. 정치적 발전, 즉 민주화의 속도도 빨랐다. 60년만에 한국만한 민주주의를 건설한 나라는 몇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시간의 단축은 어떻게 해서 가능했는가? 대한민국 헌법으로 상징되는 자유민주-시장경제란 게임의 룰이 좋았다. 좌파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까진 역대 대통령들이 뛰어났다. 韓美동맹이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민족적 자질도 좋았다. 무엇보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좋았다.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東北亞의 한복판에서 세계의 最新 조류를 흡수할 수 있었다.
경제는 발전했는데 民主(정치)는 後進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경제와 民主는 동반발전한다. 경제가 민주주의의 기반을 만들고 민주주의는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1987년 6월29일, 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가 발표했던 이른바 6.29 민주화선언은 민주투쟁 시대에서 민주실천 시대를 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야구를 구경하면서 평을 하는 것과 야구를 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민주투쟁 시대엔 민주주의가 '타는 목마름'이었으나 민주실천 시대의 민주주의는 法治의 생활화이다. 낭만주의가 낄 틈이 매우 좁다.
盧泰愚 당시 대표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서 군사정권을 연장하려는 민주주의 敵으로 지탄받았다. 6.29 선언 덕분에 그는 민주실천 시대를 연 騎手가 되었다. 질풍노도와 같았던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變身이었다. '민주탄압자'가 민주실천가로 되다니! 6.29 선언은 盧씨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 선언이 나오지 않고 6월의 대시위가 7, 8, 9월까지 계속되었더라면 군대가 나오든지 민중봉기로 流血사태가 생기고 그해 대통령 선거와 이듬해의 88 올림픽도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6.29 선언은 한국 정치사장 가장 성공한 도박이었다. 말로써 역사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정치게임이었다.

전두환+노태우 협력과 김영삼, 김대중 분열

1987년 6.29 선언이 민주투쟁 시대를 민주실천 시대로 바꿀 수 있었던 힘은 高潮(고조)된 국민여론을 업었기 때문이다. 유도의 업어치기처럼 자세를 낮추어 밀려오는 여론의 힘을 받아내면서 그 고삐를 잡아챙겨 자신의 승리로 만든 셈이다. 6.29 선언 3일 전에 있었던 대시위엔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으나 全斗煥 정권의 공권력 또한 강력했다. 무교동 거리로 나서던 金泳三씨가 간단하게 경찰에 들려 닭장차에 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전 6월18일의 대시위에선 부산시청이 밤중에 몰려든 군중에 의해서 함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全斗煥 대통령은 그 다음날 오전 군부대 출동준비 명령을 내렸고 오후엔 '오늘 저녁에 비상계엄령이 발표된다'는 소문이 언론계에 돌았다. 그러다가 릴리 미국대사가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러 들어간다고 하더니 밤이 되니 '비상조치는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과 권위주의 정권의 물리력이 거의 대등한 힘으로 팽팽하게 맞서 있을 때였다. 이 순간의 터지기 직전의 풍선에 구멍을 뚫는 식으로 발표된 것이 월요일의 기습, 6.29 선언이었다.
그 내용이 우선 야당과 국민들이 원했던 수준을 넘어서는 全面的 민주화였다. 직선제 개헌, 언론자유 보장, 金大中씨 사면복권 등 거침 없는 약속이 국민들을 사로잡았다. 순식간에 가장 미움 받던 사람이 가장 사랑 받는 정치인으로 변했다.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盧泰愚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6.29 선언과 兩金 분열 덕분이었다.
이 6.29 선언은 盧泰愚 대표의 외로운 결단으로 알려졌으나 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제안을 盧 대표가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뤄졌음이 月刊朝鮮의 취재로 밝혀졌다. 물론 盧 대표도 직선제 개헌 수용밖에는 사태해결의 방도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全 대통령을 그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을 때였다. 全 대통령이 자신의 功이 될 수 있는 직선제 수용발표를 후계자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1, 2인자의 이런 콤비 플레이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全斗煥, 盧泰愚 두 사람의 협력과 金泳三, 金大中의 분열이 대조되면서 盧泰愚 정부를 만들어냈다. 全斗煥 기획-연출, 盧泰愚 주연의 6.29 선언 합작은 5.16을 성공시킨 朴正熙-金鍾泌 콤비의 협력관계를 연상시킨다. 5.16 성공 뒤 朴正熙-金鍾泌 관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全-盧 관계도 순탄치 못했다. 盧 대통령이 5공 비리 조사 바람 앞에서 인간적인 의리와 정치력과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全斗煥 세력을 보호할 수 있었느냐의 여부는 쟁점이다. 1988년 3월 선거에서 與小野大가 된 날 나는 농담 삼아 '이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야 하겠군'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全씨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지 않고 山寺로 들어갔다.

盧泰愚 정부의 정통성일 인정하지 않은 자들

盧泰愚 대통령 시절 5년간이 나의 기자생활 37년간 가장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던 시기로 기억된다. 대통령이 텔레비전 코미디의 소재가 되고, '물태우'란 말이 나오고,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국내 신문을 읽으면 하늘에서 뛰어내리고싶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정치적 기사로 해서 기자들이 안기부에 연행된 적이 없는 첫 시기였다. 盧 대통령과 측근들은 비판적인 기자들을 누르는 대신 설득하려고 애썼다.
6.29 선언의 탄생과정에 全斗煥 대통령의 역할이 컸지만 결국 그 선언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된 사람은 盧泰愚 대통령이었다. 1997년의 김대중-김종필 합작극과 내각제 개헌 약속은 對국민 사기극으로 확인되었다. 김대중-김정일의 반역적 합작품인 6.15 선언은 탄생 자체가 원인무효인 사기였다. 6.29처럼 철저하게 실천된 정치선언도 달리 없을 것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盧泰愚 대통령은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민주화 세력은 盧泰愚 정권을 어떻게 보느냐를 기준으로 하여 그 정체성을 드러냈다. 나는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 그를 찍지 않았으나 '국민의 선택으로 뽑힌 정부이므로 민주 정부, 정통성 있는 정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정리할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선거에서 패배한 일부 민주화 세력은 盧 정부를 군사정권의 연장이라고 해석하고 타도를 외쳐댔다. 그 속엔 친북좌익세력이 있었다. 이 시기에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국회에서 전직 대통령을 향하여 명패를 던지고도 무사했던 盧武鉉 대통령까지도 제6공화국을 민주정부로 이해하지 않는 듯한 논법을 자주 쓴다.
盧泰愚 정부, 즉 제6공화국을 정통성이 있는 민주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은 자동적으로 民意를 부정하는 反민주세력이다. 盧泰愚 정부하에서 여당의 대표를 지냈던 金泳三씨는 대통령이 되자 자신의 정부가 최초의 민주정부라면서 ‘문민정부’라고 이름 지었다. 그렇다면 그는 군사정부하에서 제2인자로 복무했다는 이야기이다.

“참고 용서하며 기다리는 것”

盧泰愚 대통령 재임 5년은 세계사적 전환기와 국내적 전환기가 겹친 시기였다. 1988년에 ‘벽을 넘어서’란 주제를 내건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이 올림픽은 공산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89년에 동구공산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1990년엔 독일이 통일되었다. 1991년엔 드디어 소련이 해체되었다. 한국은 건국, 호국(6.25戰爭期), 산업화에 이은 네 번째 전환기, 즉 민주화 시대를 맞았다.
전환기는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거나 일대 혼란에 빠져버리기도 하는 危機와 好機의 공존기이다. 위험도 많지만 기회가 더 많은 시기이다. 역사는 盧泰愚 대통령이 이 2중의 전환기를 기회로 삼아 국가 大戰略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사람으로 기록할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 실천, 북방정책, 사회간접차본 확충이란 3大 업적을 남겼다. 盧 대통령은, 1988년 4월 총선에서 국회가 與小野大(여소야대)가 되는 바람에 대화, 타협, 설득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자율성의 提高로 본 것 같다. 공권력 행사를 자제함으로써 사회 각 부문이 스스로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자세였다. 학원이나 기업에서 불법적인 농성, 파업이 발생해도 盧 정부는 경찰력의 투입을 자제했다. 이 부분만큼 法治의 훼손이 있었다.
法治를 양보하지 않고 민주화를 실천할 수 없었는가 하는 쟁점이 남는다. 盧 대통령은 참용기란 “참고 용서하며 기다리는 것”이라고 定義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너무 유약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대통령이 약해 보이면 국민들이 강해질 것이란 생각을 한 듯하다. 소위 민주투사들이 집권했던 지난 15년을 포함하여 역대 정부 가운데 그래도 與野 사이에 정상적인 대화와 타협이 이뤄졌던 시기는 盧泰愚 정부 5년간이었다는 점에 별 異見이 없을 것이다.
盧 대통령은 2년간의 與小野大 국회를 경험하면서 지쳤던지 1990년 초 金泳三의 민주당, 金鍾泌의 공화당과 여당인 民正黨을 합쳐 거대 여당 民自黨을 만들었다. 金大中의 평민당을 고립시킨 보수대연합 구도였다. 이 안정적 구도하에서 金泳三 후보는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大勝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 이 보수대연합 구도를 깼다. 金鍾泌 세력을 밀어내고, 盧泰愚 세력을 무력화시켰으며, 드디어 全斗煥-盧泰愚 사법처리로 경상북도-대구세력과 틈이 벌어졌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때는 그의 직계인 李仁濟씨까지 갈라져 나가버렸다. 보수대연합 구도가 무너지고 보수 대분열 시대를 만든 것이다. 그 종착역은 金大中 당선이었다.

피로감을 보이는 한국 민주주의

民自黨의 보수대연합 구도가 유지되었다면 외환위기나 좌파집권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金泳三 대통령이 자멸적인 보수대분열 사태를 만든 것은 그의 머리 속에 좌파적 논리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좌파적 참모들이 그의 역사관을 反대한민국적으로, 부정적으로 몰고갔다. 출신성분으로 보아 보수정객일 수밖에 없는 金泳三 씨는 결국 좌파의 宿主가 되어 좌파 집권의 길을 열었다. 좌파세력의 핵심인 전교조를 키운 것도 金泳三 대통령이었다. 盧泰愚 시절에 불법화되고 해직되었던 전교조 교사들을 金泳三이 복직시켰고, 金大中은 전교조를 합법화했으며, 노무현은 이들의 反韓反美 수업을 적극적으로 비호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盧泰愚 대통령의 민주 路線이, 후계자를 잘못 선택함으로써 보수약화-좌파집권으로 빗나간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金日成은 한국에서 反共민주화라도 이뤄지면 권위주의 정권 때보다는 赤化 공작이 훨씬 쉬워질 것이란 예언을 했었다. 민주화의 분위기를 이용하여 사회를 좌경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한 것이다. 盧 대통령은 한반도의 무장대결 상태의 본질을 이념적으로 투시하는 데 소홀했다.
그러나 盧泰愚 대통령이 金泳三 이외의 사람을 후보자로 키워서 대통령에 당선시킬 수 있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金泳三의 대통령 당선과 失政은 대한민국의 운명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2007년 연초에 조선일보와 한국조사연구학회가 공동조사한 '민주화 20년 국민의식조사'가 발표되었다. 한 마디로 국민들은 한국식 민주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때로는 비관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더 많은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20년 전의 79%에서 지금은 37%로 줄었다고 한다. '민주화가 자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4%에서 31%로 늘었다. 민주화로 봇물이 터진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이 급증했다. 1987년에 노동자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응답자는 66%였는데 20년 뒤는 26%로 줄었다. '부당하다'는 의견은 12%에서 57%로 거의 다섯 배나 늘었다.
貧富격차에 대한 시각도 '정부정책 잘못'이란 생각은 35%에서 30%로 줄고 '개인능력 때문'이란 생각은 25%에서 37%로 늘었다.
'현재 생활이 좋아졌다'고 대답한 사람은 20년 전의 68%에서 32%로 줄었다. '한국의 미래를 비교적 낙관한다'는 사람도 55%에서 35%로 크게 줄었다.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좋아질 것'이란 낙관론은 20년 전의 69%에서 30%로 줄었다. '전쟁이 나면 싸울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20년 전의 65%와 거의 비슷한 60%가 '싸우겠다'고 답했다. 주한미군의 안보에 대한 기여에 대해서도 약85%가 '그렇다'고 대답하여 20년 전과 거의 같았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민주화가 불러온 인권과 자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 반면에 法治와 안보(남북관계)의 약화를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수반하는 갈등과 혼돈에 피로감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지난 6월 초순에 실시된 한겨레신문의 여론조사에선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이 잃어버린 10년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약 55%로서 '아니다'는 응답 40%를 눌렀다고 한다. 국민들이 20년의 민주주의 실험을 통해서 '민주투쟁은 이젠 그만, 法治를 정착시킬 때이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 같다. 국민들은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反動으로서 좌경적 욕구분출을 다해본 뒤에 다시 우경화의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20년 전 盧 대통령은 민주주의 실험이 이렇게 오래 걸릴 것이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방정책: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두 배로 늘리다

盧泰愚 대통령은 무임소 장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하던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 작전을 총괄적으로 지휘했고 성공한 다음 조직위원장으로 일했다. 朴鐘圭씨가 朴正熙 대통령 시절에 발상한 서울 올림픽은 군사문화에서 배양된 국가지도 그룹의 세계적 안목과 놀라운 추진력을 보여준 사례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서울 올림픽을 국가 선진화와 공산권에 대한 외교적 공략, 그리고 남북관계에서 우위에 선다는 전략적 목표 아래에서 추진했고 성공했다.
서울 올림픽은 또 1987년의 대시위 때 全斗煥 정권이 무력을 동원할 수 없게 붙든 하나의 민주화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은 동구 공산권 붕괴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1988년 9월17일의 화려한 서울 올림픽 개막식은 군인들이 주도한 한국 근대화 과정의 피날레 같은 행사였다.
군사문화의 추진력과 민간부문의 창의력이 종합된 서울 올림픽은 군인과 민간 정치인의 타협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추진되던 한국 민주화를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물론 그 뒤 사태 전개는 이 절정을 아련한 추억으로 만들었다. 서울 올림픽 성공의 主役이었던 盧 대통령은 그 흐름을 외교적으로 연장하여 북방외교를 공산권 붕괴라는 전환기의 국가 大戰略으로 추진했다. 중국, 러시아, 동구 국가들과 수교하여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거의 두 배로 늘린 효과는 엄청나다.
작년 한국-중국간 수출입은 1181억 달러로서 한국의 전체 무역액중 21.3%를 차지했다. 한국은 중국으로 695억 달러어치를 수출하고 중국으로부터 486억 달러어치를 수입했다. 약200억 달러의 무역흑자였다. 이 수치에는 한국-홍콩 거래액이 포함되지 않았다. 韓中 무역액은 몇 년 안으로 韓美, 韓日 무역액을 합친 것보다도 많아진다.
작년에 출국한 한국인 1161만 명중 중국으로 간 사람이 147만 명, 한국으로 들어온 중국인은 약90만 명이었다. 올해 약600만 명이 상호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는 韓日간의 인적 왕래에는 미치지 못하나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르다.
1992년 盧泰愚 대통령이 대만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韓中 수교는 한국에 거대한 活路를 연 것이다. 盧 대통령은, 전통적인 우방인 대만 정부를 버리고, 그것도 修交계획을 그들에게 속였으며, 6.25 전쟁 때 불법 개입하여 北進통일을 저지했던 敵으로부터 한 마디의 사과도 받아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비판자들도 자신들이 盧泰愚 대통령의 입장에 처했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있었을까 자문해 볼 만하다. 대통령의 회고록이 가진 매력이 바로 그런 점일 것이다. 미국의 케네디는 대통령이 된 뒤 학자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대통령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 傳記를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도 있다.

對北압박의 産物: 남북기본합의서


북방외교의 일환으로 추진된 남북접촉은 시종 盧泰愚 정부의 주도하에서 이뤄졌다.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붕괴로 김일성-김정일 체제가 최악의 위기에 몰려 있을 때 盧 대통령이 국제정세의 변화를 타고 북한을 압박했기에 한국에 유리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金泳三 정부 출범 이후 북한정권은 핵개발 카드로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고, 그 시기에 金泳三 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의 對北압박 정책에 브레이크를 거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때부터 對北정책에서 韓美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의 對北 주도권은 韓美공조하에서만 나올 수 있다. 盧泰愚 정부 시절 북한은 對南 무력 도발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盧 대통령은 그러나 對北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기능주의적 접근법을 취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1988년의 이른바 7.7 성명은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을 감상적 표현으로써 동반자로 규정했고, 한민족통일방안에 나오는 남북연합은 헌법상의 반란단체인 북한정권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인 대한민국과 同格에 놓았다. 이 통일방안엔 북한의 對南적화공작인 연방제와 그 연방제와 궤를 같이하는 金大中의 친북적 통일방안의 영향이 많이 들어가 있다.
盧 대통령은 물론 남북관계의 전략적 목표를 북한체제의 자유화, 즉 자유통일에 두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 헌법에서 크게 이탈했고 그 틈으로 북한정권의 공작이 들어와 북한 페이스대로 만들어진 것이 2000년 평양회담에서 나온 6.15 선언이었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는 한국의 주도로 만들어졌고, 6.15 선언은 김대중측으로부터 4억5000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김정일이 김대중의 약점을 잡은 상태에서 들이민 對南적화전략문서였다. 남북한 좌익들이 합창하는 ‘6.15 선언 실천’은 ‘대한민국 적화’를 의미한다. 다시 기본합의서 체제로 돌아갈 수 있어야 남북관계는 정상화될 것이다.

소득배증, KTX, 영종도 공항, 주택 272만호 건설

盧泰愚 정부의 주택정책으로 그 5년간 272만호의 집을 지었다. 전국 주택수의 약40%를 5년간 지은 것이다. 주택 보급률이 획기적으로 늘었다. 서울 주변엔 거대한 신도시들이 들어섰다. 도로, 항만, 철도, 공항 투자도 많이 했다. 한국인의 삶을 바꿔놓고 있는 경부고속철도와 영종도 공항 및 서해안 고속도로 건설이 이때 확정되었다. 이 사회간접투자가 오늘의 한국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있다.
盧泰愚 정부 5년간 1인당 국민소득은 2700 달러에서 7000달러로 늘었다. 임금은 115%가 늘었다. 소득倍增이 이뤄진 것이다. 상당 부분 노동자들이 투쟁한 결과이기도 했다. 노동자의 투쟁이 기업의 생산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들의 소득증가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여 한국 경제를 활기 차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나는 중산층이다”고 대답한 사람이 이 기간엔 최고 80%에 이르렀다.

중산층은 국가를 ‘우리나라’라고 생각한다. 이런 주인의식이 민주국가의 안전판이다. 그런 안전판을 만들어낸 것이 盧泰愚 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 전 정권, 특히 朴正熙, 全斗煥 정부 시절의 고도성장이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었고, 노태우 정부는 여기에다가 노동자의 중산층화를 이뤄 보탠 셈이다.
盧泰愚 정부 이후 15년간 한국의 좌경화가 광범위하게, 그것도 정권의 주도로 이뤄졌다. 그러함에도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본질을 지켜가고 있는 것은 盧泰愚 정부가 만들어낸 민간부문의 자율성과 거대한 중산층 의식의 존재를 무시하곤 설명할 수 없다.

비자금 문제

盧泰愚 대통령은 퇴임후 2000억원 이상의 비자금을 보관하고 있다가 사법처리되었다. 金泳三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자신에 대한 의혹이 커지자 갑자기 5.18 특별법을 만들어 12.12 사건과 5.18 광주사태까지 수사하고 재판하도록 했다. 2년간 백담사에서 귀양생활을 했던 全斗煥 전 대통령도 감옥에 갔다.
金大中씨는 盧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고백했으나 金泳三 대통령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말해오고 있다.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이다. 盧泰愚 전 대통령은 수사, 재판 과정에서 金泳三 전 대통령에게 준 돈의 有無에 대해서 밝히지 않았다. 이 육성 회고록을 위한 인터뷰 때도 끝내 함구했다.
金泳三 당시 대통령은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선거자금을 풍족하게 썼다. 많이 남았을 것이다. 그때 남은 자금이 지금도 어디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盧泰愚 전 대통령이 수사를 받고 있던 바로 그때 안기부 운영실장이 안기부 계좌에서 1000억원 이상을 뽑아내 金泳三 대통령에게 바쳤고 이 돈은 신한국당의 선거자금으로 쓰여졌다. 나중에 법원은 김영삼측 정치자금이 안기부 계좌에 들어가 관리된 것을 뽑아 쓴 것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했으나 수사검사들은 안기부 예산을 빼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盧泰愚 전 대통령의 비자금에 대한 공정한 판단은 金泳三, 金大中, 盧武鉉의 선거자금 조성과 잔금의 보관상태에 대한 국가적 조사가 있은 뒤에라야 내릴 수 있다. 나는, 비자금 분야에서 盧泰愚 전 대통령이 가장 부패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盧泰愚 전 대통령은 누가 봐도 金泳三씨한테 당한 사람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盧 전 대통령이 그를 향해서 욕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분을 속으로 삭이려 했을 것이다. 盧 대통령은 요사이 건강이 좋지 않다. 치명적인 질병은 아니나 步行과 대화가 어렵다. 필자는 그가 퇴임한 후에 자주 만났다. 순한 사람, 선한 사람, 억지가 없는 모범생이란 인상이 가장 강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밟았던 과정은 군 지휘관, 행정 기관장, 정치인이었다. 큰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경험과 리더십을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친구인 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뒷받침을 받아 대통령이 되고 부드러운 얼굴로 한국의 민주주의 실천을 주도했다. 역사는 아마도 대통령 盧泰愚를 지금보다 훨씬 높게 평가할 것이다.

이 책은 1999년 5월호부터 다섯 달 동안 연재된 ‘盧泰愚 육성 회고록’을 모은 것이다. 당시 月刊朝鮮 편집장이던 필자는 연 12일간 盧 대통령의 자택을 찾아 인터뷰를 했었다. 그 기록을 6.29 선언 20주년이 되는 시기를 택해서 책으로 발간함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많은 분들이 있다. 盧泰愚 전 대통령과 인터뷰가 이뤄지도록 도와주신 孫柱煥 전 공보처 장관, 그리고 기록을 맡아주었던 金容三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에게 특히 감사한다.

2007년 6월
趙甲濟 조선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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