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平和革命의 大드라마

6·10시위에서 7·9 장례대행진까지, 한국을 뒤흔든 30일간의 드라마
아스팔트와 밀실속에서 숨가쁘게 전개되었던 민중과 권력 사이의 줄다리기, 그 내막을 심층취재했다.

현장취재 종합(월간조선 1987년 8월호)

●軍동원 부를 뻔한 釜山의10만 시위인파
●6월19일 비상조치설의 진상
●평화대행진 결정과정의 內幕
●盧泰愚선언은 단독결정이었나


月刊朝鮮특별취재반

趙甲濟
權榮基

文學振
金和柱



한달간의 혁명적 변화

경찰에 의해 철통같이 포위·차단된 1987년 6월10일 오후6시 서울의 대한성공회에서 불과 수십 명의 참석자가 종소리에 맞추어 애국가를 부르면서 시작된 이 드라마는 그 한달 뒤인 7월9일 오후2시, 1백만의 인파가 서울을 뒤덮고 10여만명의 시위대가 환호하는 속에서 서울시청의 옥상에 달린 태극기가 강제로 끌어내려져 조기로 게양되는 장면으로까지 발전했다.
6월10일부터 7월9일까지, 그 한달사이에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6월사태」 「6월항쟁」 「6월혁명」 「정치혁명」 「명예혁명」등등 어떤 낱말로 표현하든, 그 동안의 변화는 가위 「혁명적」이었다.
한달 전엔 개헌논의재개가 시위의 주요 목표였는데 한달 뒤엔 직선제 개헌이 기정사실화되었다. 7년 전엔 사형확정선고를 받았고 한 달 전에만 해도 도심의 절해고도에 연금되어 있던 한 정치인은 사면·복권되어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편을 상대로, 또 자신을 「그자」라고 부르던 인물을 상대로 대권경쟁을 벌일 태세에 들어갔다. 야당 총재의 강경한 성명서와 같은 선언문을 여당 대표가 「소신있게」 낭독하는가 하면, 한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분향소마저 철거시켰던 대학총장은 그 학생의 위령탑을 세워주겠다고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시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 나라는 끄떡없이 굴러가고,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이고 더 희망에 차 있으며, 주식시장은 뜨겁게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한달간 이 나라는 열병을 앓았다. 그 진통은 새로운 시대를 출산시키는 산고(産苦)였다. 1987년 6월10일 이전을 구시대라고 부르고싶을 만큼 상황은 변했다. 혁명은 상황을 바꿀뿐 아니라 인간을 바꾸고 그 삶을 변혁시킨다. 이번 「평화혁명」의 참뜻은 국민들이 스스로 상황의 주인공임을 선언하고 역사의 무대 그 한가운데에 척 주저앉아 버렸다는 점일 것이다. 국민들이 실력행사를 한 뒤로는 국민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국민이 눈치를 보던 시대에서 국민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로 질적인 전환을 하도록 만든 이 민권승리의 드라마를 정리해 본다.

전환점 된 부산의 10만 인파

6월의 시위사태를 바깥으로는 세계적 뉴스로 만들고, 안으로는 정권적 차원의 문제로 확대시킨 전환점은 6월18일 밤의 부산시위였다. 경찰 추산 약 8만, 국민운동본부 추산 약 30만 명의 학생·시민이 부산 서면에서 부산역에 이르는 약4km의 간선도로를 완전히 장악, 약 6시간이나 점거시위를 벌이며 수백 대의 차량시위대를 앞세워 부산 시청과 KBS 부산방송본부를 위협한 이 시위는 권력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18일 밤 11시께 일본 교오토 통신 서울지국은 부산시위를 긴급 뉴스로 타전했다. 교오토 통신 본사에서는 이 긴급 뉴스를 일본 전역의 가맹사(신문 및 방송사)에 긴급스피커 방송으로 보냈다. 교오토 통신은 기사의 비중을 나름대로 판단하여 안내를 하는데 부산시위를 「1면 머리기사」로 가맹사에 추천했다. 그날 밤 NHK뉴스와 다음날자의 일본 조간지들은 일제히 부산을 중심한 한국시위사태를 1면 머리로 올렸다. 19일자 조간에서 요미우리 신문은 「반정부 데모, 전국에서 확대. 부산 8만, 진압포기」란 제목의 1면 머리기사에서 「부산 全斗煥대통령은 정권발족 이래 최대의 정치위기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부산시위인파를 10만 명이라고 보도하면서 「부산이 해방구처럼 됐다」고 썼다. 그때까지 외신면 머리기사로 취급되던 한국의 시위사태는 일거에 1면으로 옮겨갔고, 이것은 도오쿄에 있는 외국기자들을 자극했다. 19일부터 이들 외신기자들이 대거 한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6월말에는 힐튼, 조선, 신라 호텔에 투숙한 외신기자들만 해도 약 3백명에 이르렀다. 이들에 의해 한국 사태는 19일부터 세계의 머리 뉴스로 격상되었다. 세계언론은 한국사태를 현미경 들여다보듯이 하게 됐다. 이런 열화 같은 관심은 한국 정부의 정치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일 이후 며칠 동안 일본 기자들은 부산시위를 중점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20일자 조간의 도오쿄-서울-부산 3각 좌담회기사를 싣고 현장분위기를 전달하려고 했다. 부산에서 취재중이던 기오다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어나면 정권이 바뀐다』

『18일의 부산 시위를 보고는 정말 놀랐다. 데모참가자는 학생이 3만 명, 시민이 7만 명으로 시민주도형이었다. 중·고교생도 끼였고, 시장의 여자상인, 술집 호스티스, 택시운전사 등 실로 다양한 시위대였다. 그런데도 「비폭력!」 「질서!」를 외치는 등 평화적인 자세로 일관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경찰관들은 시민의 수에 압도되어 KBS부산방송본부 등 주요 건물의 경비에 급급하고 있다. 학생·시민들은 부산지역의 시위가 정권교체로 이어진 전례 때문인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벼르고 있어 긴박한 분위기다. 오늘(19)은 시내에서 군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외출·휴가 장병은 병영에 복귀, 대기하라는 명령이 내렸다는 소문이 있는 등 불길한 느낌이다』
18일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 주한 미군을 포함한 주한미국인은 부산지역에 대한 출입을 삼가도록 AFKN방송 등을 통해 권유하기 시작했다.
교오토 통신의 히라이 기자와 AP통신의 제임스 스미스 기자는 부산시위의 특징을 이렇게 지적했다.
첫째, 한번 시작하면 시간을 오래끈다. 16~18일 사이 연 3일간 철야시위, 그것도 동이 트기까지 계속되는 넌스톱 시위를 했다.
둘째, 시민들의 호기심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4·19와 부마사태, 그리고 2·12총선 등을 들어 부산과 마산이 한번 반정부의 기치를 들면 정국이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 위험한 시위현장에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와 구경할 정도로 극성이었다.
셋째, 부산시민들은 직정적(直情的)이고 행동적이었다. 고층 건물에서 구격하다가 흥분하면 경찰관들을 향해 마구 물건을 던지는 등 학생들보다도 더 격렬했다.

시민·학생 편이 된 외국기자들

6월22일 발매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한국사태를 커버 스토리로 다루었다. 이 기사의 도입부는 6월18일 저녁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있었던 전경들의 항복 장면이었다.
「시위자들은 경찰 장비들을 두 군데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이 장면은 심볼리즘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독재의 도구들이 불타오르고, 국민을 억누르던 경찰은 공포에 떨며 머리 숙인 장면-구경꾼들은 이것이 한국의 미래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국 정부의 정책 결졍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미국의 2대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도 19일자 1면 머리에 한국의 18일 시위를 올렸다. 두 신문 모두 전경들이 시위대의 투석에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고 있는 사진을 실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1면 톱 제목은 「시위대가 서울거리를 장악하다」, 뉴욕 타임스의 제목은 「더욱 격렬해진 시위에 직면, 비틀거리는 서울당국」이었다. 뉴욕 타임스의 기사 도입부는 이러했다.
「서울 도심부 전역은, 오늘밤, 전장으로 바뀌었다. 최근의 한국 정치사태에서 최악의 혼란이 일어난 속에서 경찰은 도심의 통제 능력을 수만 명의 시위학생들에게 빼앗겼다」
6월 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을 방문했던 전 워싱턴 포스트 기자이며 지금은 아메리칸 대학 언론대학장으로 있는 샌포드 웅거 씨는 『미국 언론의 집중보도는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을 적극화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특히 한국의 시위가 비교적 평화스러웠다는 것이 미국의 기자들, 그리고 독자·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것이 미국 정부가 한국정부에 여러 가지 압력을 넣도록 하는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외신기자들은 시위 현장에서 학생보다는 경찰이 훨씬 폭력적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외국기자들이 한국에 와서 만들어낸 낱말이 하나 있다. 그들은 진압경찰관을 「그래버즈」(grabbers: 잡아 나꾸어채가는 사람들이란 뜻)라고 비아냥거리는 투로 불렀다. 외국기자들의 시위대에 호의적이고 경찰에 적대적인 태도는 지면에 반영되어 세계 여론을 시민쪽으로 돌려놓는 역할을 했다.

19일 오전, 비상조치설로 긴장

18일 오후에 시작, 19일 새벽까지 시위가 계속된 부산에선 경찰이 공황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 새벽 3시쯤 부산역 근방에 있던 시위군중이 부두 길에서 트럭, 트레일러 등 10여 대를 징발, 그뒤를 2백여 대의 택시가 뒤따르고 차량시위대를 조직, 부산시청으로는 차량시위대를 조직, 부산시청으로 향했다. 시청에서 7백m쯤 떨어진 부산세관 앞에서 경찰은 저지선을 펴고 최루탄을 퍼부어댔으나 수천 명의 시위대는 물러가지 않았다. 경찰은 대형트럭을 동원, 길을 가로막은 뒤 새벽 4시쯤 64연발 최루탄 수백 발을 쏘아 겨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무렵 부산시의 치안당국에선 서울로 『경찰력의 한계가 왔다』고 보고했다. 7월13일치 타임지는 「부산시 당국에서는 공포상태에 빠져, 몰리고 있는 전경들을 지원하기 위한 군 동원을 요청했었다」고 보도했다.
7월4일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盧泰愚는 민정당 대표도 어느 시점에서 군사력을 동원한 진압책이 고려된적이 있었다고 했다. 盧대표가 말한 「어느 시점」이란 6월19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날은 위기의 날이었다.
19일 오전 청와대의 고위 보좌관은 청와대출입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인내와 자제로 가급적 경찰력으로 사태를 진압하려 했으나 19일 새벽까지 계속된 부산의 소요사태 등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으로서 정부의 대응방안은 강성으로 전환되고 있다』
청와대 기자들은 본사로 돌아와 비상조치설이 임박했다고 알렸다. 아마도 오후에 위수령이나 계엄령, 또는 헌법에 규정된 비상조치가 떨어질 것이라고 브리핑한 기자들도 많았다. 뒤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때 정부는 위수령을 펼 것에 대비, 군을 주요도시 외곽에 배치완료,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19일 뉴욕 타임스는 서울의 외교 소식통을 인용, 全斗煥 정권 내부에서는 비상조치를 요구하는 강경파와 타협적 대응을 바라는 민정당 의원 등 온건파 사이에 대립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盧泰愚대표는 온건파에 속한다고 했다. 뉴욕 타임스 기자에 의해 비줄기파로 분류된 민정당 奉斗玩 의원은 『바람방향이 지금 바뀌고 있다. 간밤의 시위 사태 이후 우리는 매파 사람들에게 몰리고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19일 오전 정부는 모처에서 내무, 국방, 법무, 문공 등 안보장관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고 같은 시각에 민정당사에선 盧泰愚대표위원이 당직자들과 사태를 논의하고 있다.

주목 끈 鄭鎬溶씨와 레이건 친서

鄭鎬溶 전 내무부 장관도 오전에 민정당사로 盧대표를 찾아 약 10분간 둘이서만 요담했다. 방을 나오다가 기자들과 마주친 鄭씨는 『盧대표를 중심으로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 시국을 해결해야 한다』고 의미있는 말을 했다.
정부가 비상조치쪽으로 거의 기운 시점에서 盧대표와는 육사동기이기도 한 鄭씨가 「민주적인 방법」을 공개적으로 강조한 것은 특별히 관심을 끌 만한 일이었다.
6·29선언 뒤 일부 외신보도는 공수특전 사령관·육군참모총장 출신인 鄭씨가 군을 동원한 시위진압에 반대했고, 盧대표의 선언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군지휘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했다. 서울의 외교소식통은 鄭鎬溶씨가 내무장관 재직시 朴鍾哲고문치사사건의 축소조작에 관련한 인책개각에 즈음하여 全대통령에게 자신을 포함한 책임자의 대폭 사퇴를 직접 건의, 張世東 안기부장 등 핵심 각료 및 실력자의 교체를 몰고 왔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광주사태 때 공수특전사령관이었던 鄭씨는 국회에서 자신은 그때 예하부대의 지휘권을 현지 계엄사령관에게 넘겨주어 당시에는 지휘권이 없었다고 해명한 바 있었는데, 6월사태에 있어서도 군의 동원은 광주사태와 같은 비극의 재발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 온건론을 개진했다고 한다.
19일 오후 2시 릴리 대사는 청와대를 방문, 全斗煥대통령에게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하고 2시간 동안 면담했다. 이 시간에 미국 뉴욕 타임스는 친서전달 사실을 보도, 그 내용은 全대통령에게 완전한 민주화를 촉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울의 외교소식통은 미국 정부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한국상황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기자에게 흘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19일 오후 안보관계부처에서는 비상조치에 대비한 작업을 하고 있었고, 밤에는 『몇시에 무슨 조치가 발령된다더라』는 소문이 퍼져 긴박감을 더해 주었다. 비상조치 여부의 가늠자가 되는 국무총리 담화도 이날 중에 『한다, 안 한다』로 갈팡질팡했다. 담화발표가 없으면 곧장 비상조치로 나갈 것이란 관측이 유력했다. 이날 오후엔 국무총리 담화문의 문안을 문공부장관과 尹碩淳국무총리비서실장이 손질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곧 바로 비상조치에 즈음한 담화문으로 바뀔 것이란 소문이 관가에 퍼지기도 했다.
오후 4~6시 사이 시내 모처에서는 盧泰愚대표, 李漢基총리, 李春九사무총장, 안보관계 장관 등이 참석, 고위당정회의를 가졌다. 비상조치가 공식으로 일단 유보된 것은 이 모임에서였다. 盧대표와 李총리는 이 회의에서 온건론을 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리 담화에 관한 결정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날 저녁 9시 국무총리 담화가 경고성 성명 정도로 발표되었다. 비상조치설은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관계부처에서는 이날 밤의 데모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서울은 조용했으나 부산의 야간시위가 비속에서도 격렬했고, 대전에서 전경 1명이 버스에 깔려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와 유보된 강경조치가 방향전환하지 않나 걱정하는 공무원들도 있었다.

金泳三총재의 도박-영수회담 요구

「비상조치설」과 관련, 정부여당이 긴박한 움직임을 보인 19일 오전 민주당은 그동안 조건부로 검토해 온 盧泰愚·金泳三 회담을 거부하고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요구하고 나섰다.
金泳三 총재는 이날 오후 자신의 사무실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기자들과의 간담회를 자청했다.
金총재는 『지난 밤 부산사태 등으로 2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밝히면서 『盧대표를 만날 여유가 없다』며 「시간이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金총재는 비상조치를 취할 경우 『그렇게 되면 1주일도 못가 전국이 내란상태에 빠져 수천 수만의 사람이 죽고 나라가 망할 것이며 대통령도, 정부·여당도, 나도, 야당도 살아 남는다는 보장이 없다. 여야 영수회담 제의는 그런 이유 때문에 구국적인 자세로 대화하자는 의미다』고 역설했다.
金총재는 6월18일까지만 해도 盧·金회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가 갑자기 영수회담으로 바꾼 것과 관련, 기자들이 『어제와 오늘 상황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묻자 『그 24시간은 평상시 같으면 한달 이상이나 될 만큼 엄청나게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한편 민주당은 오후부터 비상체제에 돌입, 사무처간부들로 비상대기조를 편성하여 철야 근무에 들어갔다. 오후 들어서 야당가엔 20일 새벽 4시를 기해 정부가 비상조치를 내릴 것이란 구체적인 소문이 나돌았다. 민주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비상조치설」의 사실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밤늦도록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19일 한남동 모처에선 국민운동본부의 상집위원 및 공동대표 연석회의가 열렸다. 먼저 사회자가 나서서 상집위의 17일 결정사항을 보고했다. 「26일에 국민 대행진을 실시하겠다고 20일 언론에 발표하자」는 내용이었다. 사회자가 각 단체 대표의 의견을 물어 3분의 2가량이 찬성을 표시했을 즈음 개신교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지금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여권을 자극하는 행동 또는 배수진은 위험하다. 26일에 실시하겠다고 못박지 말고,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일정한 날짜에 대응하겠다고 발표하자.
민주당측이 호응하고 나섰다.
―정보관리는 우리가 잘한다. 내일 대행진 일자를 발표하면 여권내 강경파에 개입 명분을 주게 되고,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정보가 있다.
그러나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6·10, 6·18에서 국민의 열기가 어떠했는지 확인하지 않았느냐. 군대가 나오면 일은 더 커진다. 군이 며칠 버티지 못할 것이다. 6·18의 분위기를 계속 몰고 가야 한다. 강경파가 득세하는 것은 오히려 국민의 힘을 보여주지 않을 때이다. 설사 全-金회담이 열린다해도, 「26일 대행진 예정」이라고 발표해 놓으면 그것은 金총재에게 큰 뒷심으로 작용할 것이다.
민주당측은 『비상사태가 우려돼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을 국민운동본부의 정치적 대표기관으로 본다면, 그 의견을 존중해 준다는 의미에서 내부적으로는 6·26을 결정해 놓되 다만 발표를 보류해 달라는 것이다』는 의견을 냈다.
양측 의견은 팽팽히 맞섰고 밤9시반에 시작된 회의는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민통련과 가톨릭, 민주당 소장파 일부가 모여 절충안을 만들어 냈다. 「4개항을 정부에 촉구, 22일까지 응답을 기다린 뒤 반응이 없으면 23일 중대조치를 취할 것을 발표하겠다」는 문안을 20일에 발표한다는 의견이었다.

정부에의 최후통첩 선언

회의가 재개된 뒤 이 절충안을 놓고 토의가 전재됐으나 여전히 평행선이었다.
절충안을 반대하는 측은 『23일 발표해서는 홍보가 안된다.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적을 것이다』는 논리였다.
李相洙변호사, 李吉再 상집위장대행, 崔炯佑 민주당 부총재 등이 모여 제2의 절충안을 만들었다. 22일까지 정부측 대응을 기다려 본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됐다. 단 내부적으로는 26일에 대행진을 실시한다는 방침에는 변동이 없는 것으로 결의했다. 두 번째 절충안이 통과된 것은 새벽 2시가 가까워서였다.
이튿날 印名鎭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4·13조치 철회 ▲6·10대회관련 구속자 및 양심수 석방 ▲집회시위 및 언론 자유보장 ▲최루탄 사용중지 등 4개항을 정부에 촉구하고 『이에 대한 조치를 오는 22일까지 국민 앞에 밝히라』고 요구했다.
성명은 이어 『만약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운동본부는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을 불가피하게 강행하지 않을 수 없다』며 『오는 23일에 대행진 실시의 날짜·방법 및 국민행동수칙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성명은 또 『李漢基총리가 밝힌 「비상한 각오』란 무엇인가』고 묻고 『전국민의 민주화 열기가 번져가고 있는 시점에 「한국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더라도 어떠한 제재를 가하지 않겠다」는 슐츠 미 국무장관의 발언과 「한국의 대학생들은 북으로부터의 위험에 대해 너무 경시하고 있다」는 제임스 릴리 주한 미 대사의 발언에 크게 주목한다』고 밝혔다.

광주와 올림픽이 발목잡다

盧泰愚대표가 비상조치를 보류시킨 고위당정회의에 참석한 뒤 당사에 돌아온 것은 19일 오후 6시. 그는 康容植보좌관역에게 야권 3당 대표들과의 회담을 위해 접촉하도록 지시했다. 康보좌역은 접견실에서 李敏雨, 李萬燮총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20일의 회담시각을 약속했다. 金泳三총재와는 이날 늦게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아 金東英·崔炯佑부총재에게 간접 연락만 해두었다.
全대통령이 19일에 군을 동원한 시위 진압책을 포기하고 정치적으로 사태를 수습하기로 결심한 배경에 대해 세계 언론들은 ①대통령의 역사의식 ②군부의 반대 ③미국의 압력 ④올림픽 등등 여러 이유들을 들었다.
7월13일치 타임지는 「한국군 장성들은 全대통령에게 군 동원을 피하도록 건의했었다. 그들은 군 동원이 문제해결책이 아니며 우리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고 보도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볼 때 盧泰愚대표와 兪學聖·鄭鎬溶씨 등 그의 측근 및 李漢基국무총리와 군 지휘관들이 19일을 전후한 중요한 시기에 군의 동원에 반대했던 것 같다.
광주사태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아야겠다는 「역사의 교훈」이외에도 비상조치 포기의 이유로는 여러 가지 지적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全斗煥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평가가 역사에 어떤 식으로 기록되느냐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고, 군의 동원은 제5공화국 최대의 치적인 88년 올림픽 유치를 물거품으로 만들 것이란 우려가 있었으며, 군의 동원이 전국민적인 저항을 부르고 정권 담당자들에게도 상당한 위험부담이 된다는 계산도 있었으리란 분석이다.
어느 일본기자는 『역사와 올림픽이 한국정부의 발목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 역사란 광주사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부·여당은 올림픽을 개헌논의의 유보와 민주화속도를 늦추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주 써먹곤 했는데, 결정적 시기에 가서 올림픽은 민주화를 앞당기는 촉매제로 변하고 말았다.

비상조치설에 도전한 부산·광주

비상조치설이 나돈 19일 정부당국자들은 『오늘밤의 시위, 특히 부산의 시위가 사태진전의 관건이 될 것이다』고 했다. 19일에도 18일 밤과 같은 시위가 계속될 경우, 정부내 온건론자들의 설 땅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기자들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19일 밤의 부산시위는 군중이 크게 줄었으나 역시 격렬했다.
이날 처음으로 시위에 가담한 3개 전문대를 포함, 10개 대학생을 비롯한 1만여 명의 학생·시민 합동시위대는 서면 등 시내 중심가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며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전경 1개중대 병력을 한때 포위, 경찰장비를 빼앗는가 하면 시내버스를 앞세워 행진하고, 시멘트 전봇대로 간선로를 막아 연좌농성을 벌였다.
19일 국민운동 부산본부에서는 비상조치설이 서울로부터 전해오자 상임집행 위원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 시위대에 섞였다. 『잡혀 가도 집에서 잡혀 가선 안된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그들은 비밀전화를 시내 두 곳에 설치해 두고 암호를 써 가며 간접 연락을 했다.
19일 광주에서도 시민·대학생 등 1만여 명이 비상조치설을 아랑곳하지 않고 20일 새벽까지 밤샘시위를 벌였다. 6월사태의 전개과정을 보면 6월10일 서울에서 맨 먼저 불이 붙어 명동성당 농성사건이 이 불씨를 5일간 보존하고 있는 사이에 부산·대전·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시위가 파급되었고, 16일~18일 사이의 부산철야 시위가 18일 저녁의 10만 군중으로 절정을 이룬 뒤 18~19일부터는 광주에서 본격적인 연소가 시작되었다. 불씨가 서울→부산→광주로 이어진 셈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좀 늦게 시작한 광주시위는 이 도시의 특유한 역사적 기억으로 해서 큰 주목을 받았다.
19일 저녁 광주의 시위군중은 계림파 출소를 습격, 집기 등을 꺼내 불태웠다. 이때 책상 속에 들어있던 직원봉급 63만5천원도 재가 되고 말았다.

달라진 신문·방송

국무총리의 경고 담화가 발표된 지 두 시간이 조금 지난 19일 밤 11시경 대전의 시위자들이 시내버스를 빼앗아 대전역 부근에 있던 전경대열로 돌진, 朴東鎭일경(20)을 죽게 하고 다른 두 전경에게 중상을 입힌 뒤 달아났다.
1980년 5월 서울 남대문에서 일어난 비슷한 사건은 여론을 반(反)학생쪽으로 돌려 놓은 계기가 됐었다. 그러나, 이 대전사건은 신문들에 의해 차분하게 다루어졌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20일자의 두 조간신문은 사회면의 두 번째 기사 정도로, 이 날의 두 석간신문도 비슷한 비중으로 취급했다. 이런 냉정한 취급은 이 사건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 끼쳤다. 기사의 비중을 결정하는 편집기자들은, 이 사건의 비상조치의 빌미가 되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더구나 범인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성급하게 사건의 성격을 단정할 수도 없으며, 전경의 최루탄에 머리를 맞은 연세대생 李韓烈군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그런 판단을 했던 것이다.
22일 오후 충남 도경 산하 전경대원 부모 50여명은 대전일보 앞마당에 모여 朴東鎭상경의 사망 사건에 대한 보도와 관련, 항의 시위를 했다. 이들은 『신문이 이번 사건을 너무 작게 취급했고, 평소에도 편파보도로 시위학생들이 전경대원에게 화풀이하게 만들고 있다. 죽은 사람이 시위자였다면 이처럼 작게 보도할 수가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19일 오전 비상조치설이 언론가에 깔릴 때는 비상조치의 주요 표적은 신문사 기자들이 될 것이란 말이 돌았다. 20일에는 권력층에서 이번 사태의 주요원인은 신문사의 집중적인 시위사태 보도라고 분석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시위군중은 제도 언론의 축소 보더를 규탄하고 있었고, 정부측에선 신문이 확대보도를 일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6·10이후 신문과 텔레비전의 시위보도 자세는 외부상황의 진전에 따라 바뀌어져 갔다. 워낙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엄청났기 때문에 그때까지 소극적이던 기자·편집자라도 그 상황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처음엔 「일부시민」이 학생에 동조했다고 쓰다가 며칠 뒤에는 「많은 시민」으로 바뀌었고, 18일께부턴 「시민·학생시위대」로 변했다.
1면 머리에 올려진 「시위 전국 확산」이란 시커먼 제목은 국민 모두의 마음속으로 시위를 확산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활자의 마력은 상황을 축약·과장해서 전달한다. 「전국확산」이라고 해도, 평온한 지역이 훨씬 많았고, 「대규모 도심 야간 시위」라고 해도 도시의 대부분은 평온했다. 그러나 신문지면에 나타난 「전국확산」이란 활자는 독자들의 뇌리에 현실과는 다른 또다른 현실의 이미지를 심었다. 영향력이 큰 것은 정확히 측정할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실제적 현실이 아니라 신문지면상의 이 의제(擬製) 현실이었다.
아무리 언론자유가 제약된 환경이라도 일단 큰 사건이 터지면 그 사건 자체의 동력과, 언론사 간의 경쟁심리가 맞물려 통제가 어려울 정도로 보도가 치열해지는 법이다. 張玲子사건과 朴鍾哲군 고문치사사건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큰 사건은 통제받는 언론기관을 자극하여 언론자유를 넓혀주는 힘이 있는데, 6월 시위사태는 연일 터지는 대사건의 홍수로써 기자들을 끌고 달려갔다. 민중의 분출된 에너지가 언론을 점점 자유롭게 만들어 가고 있었고, 더 자유롭게 된 언론은 민중의 용기를 북돋우었다. 신문과 민중사이의 이런 상호작용이 확대 재생산되는 속에서 당국에선 아예 언론사에 간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6월18일, 19일의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는 신문의 논조도 한 걸음 전진시켰다. 「무조건 여야가 만나 협상해야 한다」는 선에서 「즉각적인 개헌논의 재개」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때까지 신문 논조의 주류는 여도 나쁘고, 야도 나쁘다는 식의 기계적인 양비론(兩非論)이었는데, 논조의 화살이 정부·여당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다.

고교생 가담, 차량시위 격렬

20일 盧泰愚 민정당대표위원은 신민당·국민당의 두 李총재를 상대로 시국 타개 대화를 벌였다. 여권내부에서 팽팽하게 맞섰던 강온 처방 가운데서 온건론을 주도했던 盧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李萬燮 국민당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시국스습을 위해서는 어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것을 걸겠다』고 말했다.
오후 같은 장소에서 李敏雨 총재와 만난 盧대표는 1시간20여분간의 대화를 마치고 다소 피곤한 모습으로 나와서 기자들을 만났다. 기자들이 金泳三총재를 만나지 않으면 시국수습안을 내도, 과연 효과가 있겠느냐는 투로 묻자, 盧대표는 『국민 전체가 金총재에게 매여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선 盧대표가 수습을 위해 뛰기 시작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아 또 다시 시위사태가 악화되면 강경론은 20일 오전의 총재단 회의에서도 盧-金회담은 의미가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토요일인 20일 오후 부산 북구출신인 민주당 文正秀의원은 부산시위 현장을 둘러보고 서울로 돌아와 무교동 민족문제연구소에서 金泳三총재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끝낸 뒤 文의원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부산에서는 혁명의 열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우리가 끝장내고야 말겠다는 결의와 자신감이 시민들 사이에 퍼져 있고, 독재타도를 외칠 때 내미는 손의 힘이 서울에서 흔히 보던 것과는 달리, 폐부를 찌르듯 날카로와 섬찢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날 밤의 부산시위를 아사히신문의 기오다기자는 이렇게 보도했다.
「수도 서울을 웃도는 시위와 집회가 연일 계속되어, 한국 정국의 초점이 된 부산의 데모는 토요일인 20일엔 대학생·시민뿐 아니라 고교생까지 가세, 약 2만명이 시 중심부에서 경찰과 격돌을 되풀이했다. 4·19혁명, 부마사태 등 한국 현대정치사의 고비때마다 정국을 좌우해온 이 지방에서는 비상조치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최후통고가 나온 뒤에도 시민들의 행동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고교생들은 오후가 되자, 2백, 3백 명씩 집단을 이루어 시내로 진출했다. 서울과 경상남북도로부터 약 3천 명이 응원부대를 지원받은 경찰은 약 7천 명의 병력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방어경비에서 공세로 전환한 경찰은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최루탄을 쏘았다. 그래도 골목과 지하철 입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데모대의 파도를 흩어놓을 수가 없었다. 저녁에 소낙 비가 내려도 데모는 계속되었다. 원래 반중앙의식이 강한 부산 사람들은 한번 불이 붙으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고 한다」
이날 부산시위대는 수십대의 시내버스·유조차 등을 방패처럼 앞세워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려고 했다. 일부 언론사에선 「버스탈취」라고 표현했으나 시위대 사람들은 운전사들이 자발적으로 협조해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운전사가 스스로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서 경찰 앞을 가로막든지, 전차부대처럼 시위대를 선도하여 천천히 운행했다는 것이었다. 이날 경찰의 저지는 강경했다. 서면에선 경찰관들이 5층 옥상으로 피신한 시위자들을 추격, 30여 명의 시위자들이 옆 건물로 뛰어내렸다. 옆 건물의 슬레이트 지붕이 내려앉아 뼈를 부러뜨린 학생도 있었다.

『샐러리맨이 데모바람 났다』

대전에선 20일 밤9시께 이날 개업한 대전백화점 앞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들 사이에 대전 백화점이 권력층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돌았다. 흥분한 군중은 유리창을 깨고 철제 셔터를 부순 뒤 안으로 들어가 진열장을 박살냈다. 이날 오후 대전중앙교회에서金鍾泌 전 공화당 총재는 6·25상기 특별강연회에 참석, 『개헌을 요구하는 민의가 확인된 이상 4·13 조치는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金씨는 교회 앞에서 『유신잔재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중이던 수십명의 대학생들을 만나 『나는 유신잔당이 아닌 유신본당이다』고 주장했다.
서울에 진압병력이 집중되는 바람에 지방중소도시에서는 주말에 경찰력의 부족으로 시위대에게 눌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20일 밤, 이리시에서는 시위대가 시청으로 몰려들어가 불을 질렀고, 전주에선 시위대가 시청을 경비하던 경찰을 포위, 장비를 빼앗은 뒤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21일 밤 순천에서는 51명의 경찰관들이 시위대에 포위되어 장비를 빼앗긴 뒤 민가로 달아났다.
21일 오후 金泳三사무총재는 상도동자택에서 金令培사무총장 金鉉圭총무로부터 이날 오후에 있었던 민정당총장·총무와의 회담이 어떤 합의를 보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 기자들 앞에 나타나 상당히 격앙된 말투로 全대통령을 비난했다.
『시민·학생·전경이 다치는 이 시국에 全대통령이 구름 위에 있으면서 盧대표에게 하청 준 것처럼 나와 만나라 하고 있어요. 1년에 2만 여 명씩의 각계 인사를 만난다면서 나를 왜 못 만납니까. 야당 총재가 2만 명 중에도 못 미친다는 말입니까』
『명동데모에서는 학생과 시민 비율이 1대 4라고 하지 않습니까. 넥타이맨 샐러리맨들간에 바람이 불었어요. 점심시간에 나가 두어시간 소리치고 해야 직성이 풀린답니다. 이 바람을 역류시킬 수는 없어요』

중산층의 반란과 최루탄의 영향

이즈음 한국 중산층은 세계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세계의 거의 모든 주요 언론들은 이번 사태가 한국 중산층의 반란이라고 표현하면서, 왜 중산층이 반정부 기치하에서 격렬한 몸짓을 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했다. 야당에선 중산층을 행동파로 변모시킨 3대 근인을 ①朴鍾哲군 고문치사사건 ②4·13선언 ③최루탄 난사로 꼽았다.
1987년 6월9일 한 일간지에는 아주 예언적인 기사가 실렸었다. 서울대사회과학연구소와 공동조사한 한국 중산층 1천43명에 대한 의식조사였다. 4·13조치 이후인 5월초순에 실시된 이 조사결과는 한국의 중산층이 무척 화가 나 있음을 보여주었다. 경제성장을 늦추더라도 인권을 신장시켜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85.7%, 민주화가 잘 되고 있다고 평가한 사람은 불과 1%, 헌법에 저항권을 명시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96%나 됐다.
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조사자들은 이렇게 진단했다.
「우리는 본 조사를 통해 한국중산층이 안으로는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하는 민주화를 열명하면서 밖으로는 민족의 자주를 바라는 무서운 잠재세력으로 커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들은,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손상시키는 지배엘리트의 부정·부패, 비리·비민주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민중의 입장에 공감, 연대할 수 있는 친민중적 중산층이다.
이 기사가 실린 바로 그 다음날 수많은 도시중산층은 대학생들을 응원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넥타이 맨 사람들의 시위」란 점에서 사태는 전혀 차원이 다른 국면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특히 중산층을 자극한 최루탄난사는 경찰과 그 뒤에 있는 현정권에 대해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최루가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들이나 동생뻘밖에 되지 않는 전투경찰관, 그리고 행동거지가 난폭한 사복조가 나이와 사회적 신분이 훨씬 위에 있는 중산층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경고 없이, 때로는 장난삼아, 최루탄을 던지고 쏘면, 시민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비참한 모습으로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그 초라한 모습을 되돌아 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독재타도!』 『쏘지 마!』를 외치게 되는 것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특파된 존 버지스 기자는 6월21일자의 「병원도 최루가스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는 기사에서 많은 학생들이 최루탄가스를 아랑곳하지 않고 덤비는 것을 보고 「대학생들이 최루가스에 중독되어 매일 일정량의 가스를 마셔야 한다는 우스개가 우스개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썼다.
AFP통신은 23일자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의 최루탄은 군사비밀에 속하는 특별 제조법에 따라 만들어지고 있는데 세계에서도 가장 지독한 종류다」고 보도한 뒤 「일부 보고에 따르면 최루가스에 오래 노출될 경우, 암의 발병과 남성의 성기능장애도 우려된다고 한다」 세계에 타전했다.
한 일본인 기자는 『이런 최루가스 피해는 몇 년 뒤 유전병으로 나타날 것이다』고 불길한 예고를 했다.
대만 聯合報의 朱立熙기자는 본사의 외신부데스크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내 후임을 선정할 때는 심장과 호흡기가 강한 사람을 골라주십시오』

민정당, 수습책 마련에 분주

가락동 연수원에서 21일 하루 종일 열린 민정당 의원총회에서는 의원들로부터 여러 가지 불만이 터져나왔다. 그 한 예로, 형제복지원 사건에 책임을 져야 할 金周浩 부산시장이 농림수산부장관으로 승진 전보된 사실이 지적됐다.
李鍾贊 奉斗玩 李世基 金正禮 洪性宇 의원 등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여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21일 의총이 있기 전 2~3일 동안 민정당 의원들은 각 상임위 별로 모임을 가졌었다. 서울 출신 의원들은 이틀에 한번꼴로 모임을 가져 李春九총장으로부터 「주의」를 받기도 했다. 다른 지역 출신 의원들도 알게 모르게 모임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의총이 끝난 후 서울 출신 의원들은 따로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우리가 직선제를 건의하는 선언을 하자』며 책상을 치고 운 의원도 있었다. 이 모임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李鍾贊 奉斗玩 南載熙 金正禮의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출신 의원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李贊赫의원이 대표로 盧대표에게 전달키로 했고 李의원은 盧대표를 만나 건의를 했다. 모임에서는 또 『우리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엔 독자선언을 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서울 출신 의원들이 모이고 있는 같은 시간, 앰배서더호텔의 한 방에서는 金泰鎬사무차장, 玄鴻柱 崔秉烈 康容植의원 등이 머리를 맞대고 의총에서 나온 여러 안(案)을 검토하고 있었다. 金泰鎬차장은 중간에 앰배서더호텔을 나와 당정회의가 열리고 있던 프라자호텔로 갔다. 이때 李春九총장과 李漢東총무는 국회에서 민주당과 총장·총무회담을 가지고 있었다. 李총장은 이 회담을 마치고 당사에 돌아왔다가 오후 늦게 프라자호텔로 가서 金潤煥 청와대 정무수석 등과 당정회의를 가졌다.
오후 7시30분 崔秉烈 康容植의원이 盧대표 집으로 향했다. 盧대표는 李丙琪보좌역과 함께 집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8시 프라자호텔에서 회의를 마친 李春九총장과 金潤煥수석이 盧대표 집으로 향했다. 비슷한 시각 安武赫 안기부장이 특별보좌관을 데리고 盧대표 집에 도착했다.
이렇게 모인 여권 수뇌들은 설렁탕을 먹으면서 밤 10시30분까지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는 국회해산·총선안(案) 등이 논의됐다고 한다. 6·29 盧泰愚선언의 핵심부분은 잠깐 논의됐을 뿐이었다. 李春九총장, 金泰鎬차장, 李丙琪보좌역은 盧대표 집에 남아 새벽 3시까지 논의를 가졌다.

두 전직 대통령의 충고

22일 오전 9시10분경 민정당의 盧泰愚대표는 당사에 나와 李春九사무총장 등 간부들과 약40분간 「시국수습안」을 협의한 뒤 청와대로 출발했다. 대통령과의 면담을 끝내고 11시15분께 당사로 돌아 온 盧대표는 9층 회의실에 마련된 기자간담회장에 들어왔다. 그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여러분들이 큰 기대를 걸고 나를 기다렸을텐데…』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연 뒤 10여분 간 면담 내용을 설명했다.
盧대표는 『근일내에 각하께서 난국수습을 위해 좀더 광범위한 원로인사 및 각당 대표를 만나서 진지한 의견을 듣고 종합적인 수습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그는 또 『그쪽의 요구도 있었지만 본인이 대통령께 여러 사람을 만나는 일환으로 金泳三총재도 만나 여야가 아무 조건없이 얼굴을 맞대고 나라의 어려움을 수습하는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열망이란 점을 설명드렸다』고 밝혔다.
盧대표가 설명한 면담 내용의 핵심은 결국 全대통령과 金총재의 회담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데 있었다.
22일 오후 全斗煥대통령은 尹潽善, 崔圭夏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빙, 시국수습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22일 여야 영수회담 추진 등 난국수습을 위한 움직임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속에서 전국적으로 시위건수·규모는 가라앉았다. 다만 광주에서는 1만명이 넘는 학생·시민들이 금남로 등지에서 철야시위를 벌였다. 연세대생 2천여 명은 저녁에 교문을 박차고 나와 1백50여 명의 전투경찰을 포위, 무장을 해제시킨 뒤 빼앗은 장비들을 불태웠다. 가장 평화로운 시위가 벌어진 곳은 제주도였다. 1948년의 4·3사건이란 쓰라린 역사를 간직한 제주도에서는 학생과 경찰이 폭력과 최루탄을 쏘지 않는 데 합의, 이틀째 평화스러운 가두시위를 벌였다.

金총재, 대행진 연기 간청

국민운동본부가 요구한 4개항 요구에의 응답 시한인 22일 낮, 金泳三총재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때까지 정부측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그 뒤에라도 회답이 있을 것 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23일에 평화대행진의 일자·방법 등이 발표되는 것만 남아 있었다.
金총재는 오전에 명동성당에서 金壽煥추기경과 만났다. 면담 도중 盧泰愚민정당 대표가 여야 영수회담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발표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평화대행진은 일단 유보돼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金총재는 곧 모 음식점으로 달려가 宋建鎬 李愚貞 文東煥 韓勝憲씨 등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들을 만났다.
金총재는 대회발표를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공동대표들은 안된다고 대답했다. 양측간에 오간 대화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이미 23일 발표하기로 결정된 이상 연기할 수 없으며, 국민의 힘을 보이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대회 전에 4·13조치를 철회했다면 몰라도 이제는 변경될 수 없다. 국민들이 혼선을 빚게 될 것이다.
―내일 아니면 모레 영수회담이 있다. 그 자리에서 全대통령이 획기적인 민주화조치에 합의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럴 경우 6·26 대행진을 해서는 곤란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26일 한다고 발표는 하되, 그러나 영수회담의 결과에 따라 안 할 수도 있다는 유보조항을 달겠다.
金총재·공동대표 회동이 있은 뒤 印名鎭대변인은 『언론에 보도된 여권의 태도가 확실하다면 23일 오전 공동대표 상임집행위 연석회의에서 결정키로 한 국민평화대행진의 구체적 날짜·시간 등의 결정을 추후로 미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印대변인은 또 『국민평화대행진의 날짜가 원래 내정된대로 26일로 결정되더라도 정부·여당이 보도된 대로의 민주화 조치를 실시한다면 이를 취소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단소 조항」문제를 놓고 이날 밤 상집위·공동대표 긴급 연석회의가 열렸다. 민주당측의 요청이었던 만큼,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고 있는 민주·민추의 공동대표와 상집위원이 거의 다 나왔다. 崔炯佑 朴容萬 黃明秀 朴永祿 金顯秀 朴鍾泰 薛勳 金榮百 韓英愛 金道鉉씨 등.

운동본부, 유보조상 싸고 격론 거듭

이들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내일 평화대행진의 일자·구체적 행동요강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는 날이다. 그러나 여성단체로서는 「영수회다에서 4개항의 요구조건이 수락됐다고 판단되면 평화대행진을 연기할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아 발표하자는 의견이다.
―4개항의 요구조건이 수락되었는가 안됐는가를 판단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복잡 미묘할 뿐 아니라, 한마디로 「불가능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4·13조치 철회 조항을 놓고 볼 때, 단순히 개헌논의를 재개한다는 것만으로 4·13이 철회됐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盧대표가 후보 사퇴를 해야 철회된 것인가.
구속자 석방문제도 그렇다. 어느 범위까지 석방되어야 요구조건이 관철된것인가. 6·10대회 이후의 구속자만인가 아니면 4·13 이후의 구속자인가. 또는 5공화국 출범이후의 구속자인가.
―내일이나 모레 열리는 영수회담에서는 분명 민주화가 합의된다. 그 민주화 조치는 여러분들이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내용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마당에 金총재의 입장이나 운신의 폭을 제한하지 않을 의도라면 「대행진 강행」 발표는 현명치 못하다고 본다. 우리는 대행진의 연기를 요망하지만 이미 확정된 사항이니 연기가 힘들 것이다. 단지 4개항의 요구조건이 관철되면 대행진을 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명시해주기 바란다.
―아까도 말이 나온 것이지만 민주당은 어떤 근거에서 4개항이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는가. 믿을 만한 객관적 정황이라도 있는가.
―영수회담을 통해 민주화가 다 될텐데, 만일 이때 평화대행진 강행을 발표하면 괜히 혼란을 일으키는 것밖에 더 되는가.
―얘기를 듣고보니 의아해진다. 청와대회담에서 『개헌논의가 재개되더라도 반대하지 않겠다』는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4·13조치의 철회가 아니다. 盧대표의 대통령 후보자 지명이 철회되어야 한다.
―민주당을 너무 몰아친다. 공당의 총재가 정식 요청하는 것이라면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민주당 의사를 그렇게까지 무시할 수 있는가.
―유보조항 넣느니 마느니 하는 문제 갖고 시간을 끌어 봐야 해답이 안 나온다. 굳이 단서라고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본문에 내용을 집어넣으면 될 것 같다.

비표 안 달기로 미리 결정

이 안이 전격적으로 받아들여 짐으로써 길고 긴 회의가 끝났다. 이튿날 발표된 운동본부의 성명문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국민평화대행진에 앞서 정부가 민주당 金泳三총재와의 회담을 통해 전국민의 민주화 요청에 대해 이를 약속하고 실질적 행동으로 보여준다면 온국민과 더불어 적극 환영하고 지지할 것이다」
23일 저녁 金총재 비서진에서는 다음날의 영수회담에 대비한 준비자료를 만들어 金총재에게 주었다. 이 자료에는 金총재가 운을 떼는 방법도 적혀 있었다. 그 시나리오에 따르면 金총재는 全대통령과 악수를 한 뒤 『여기는 아마도 서울에서 공기가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최루탄 가스 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니 말입니다』고 우스개를 하게 돼 있었다. 청와대에서 비표를 달지 않고 버티도록 건의한 것도 이 시나리오였다.
23일 오후 부산에선 6월10일 이후 처음으로 가두시위가 없었다.
여야 영수회담이 결정된 23일에도 광주에서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도심부를 누볐다.
이날 오후 3시30분께부터는 광주 신흥 택시 소속 운전기사 1백50여 명이 택시 1백여 대를 금남로 4가 일대에 세운 채 이색적인 연좌시위를 벌였다. 운전기사들은 『최근 광주시내에 퍼져있는 신흥택시와 관련된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금남로에 모이기 전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경적과 폭발음 시위를 하여 자신들의 반정권적 입장을 분명히 했었다. 이들 기사는 『신흥택시 기사가 전남대 교수 2명을 태우고 가다가 교수들이 시국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광주 경찰에 신고했다는 소문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우리 기사들도 시민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그때 중앙교회 안에 있던 시위학생들을 찾아가 뜬소문으로 신흥택시 5대가 시위군중에 의해 부서진 것에 대해 해명해 달라고 했다.

청와대에서 이미 결렬로 평가

24일 全대통령과 金총재가 점심을 같이 들면서 3시간 동안의 영수회담을 갖는 동안 청와대 귀빈 대기실에는 朴英秀 대통령비사실장, 金潤煥 정무수석비서관, 金泰龍 민주당 대변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도 3시간 동안 시국전반에 관해 상당히 「깊은 얘기」를 나눴다.
金泳三 민주당 총재가 영수회담을 끝내고 청와대 귀빈 대기실로 들어서자 金泰龍 대변인이 따라붙었다. 金총재는 혼잣말처럼 『합의된 게 아무 것도 없어』하고 말했다. 金대변인이 『그럼 결렬이군요?』하고 묻자, 金총재는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는 것이다.
金총재, 朴英秀 실장, 金潤煥 정무수석 등이 입회한 가운데 金대변인과 李鍾律 청와대 대변인이 회담의 속기 내용을 정리했다. 金총재가 『내가 4·13조치를 철회하고 대통령 직선제나 선택적 국민투표를 받아들이라고 제시했으나,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盧대표와 국회에서 합의하라고만 했다』고 말했다. 金수석비서관이 『사실상 철회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까?』하고 되물었다. 金대변인이 이 말을 받아 『철회를 하려면 분명하게 「철회」라고 못박아야지 사실상 철회는 또 무업니까?』고 이의를 제기했다. 金대변인과 金수석 등은 이 문제를 놓고 15분 정도 논란을 벌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金총재는 『金대변인의 말이 맞다』며 논전을 중지시켰다.
金泳三총재는 오후 2시54분쯤 대기중이던 의원 당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상기된 표정으로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에 도착했다. 金총재는 곧바로 내외신기자 80여명이 대기하고 있는 기자회견장에 들어와 『자세한 것은 金泰龍 대변인이 설명할 것』이라며 항목별로 간단하게 회담 내용을 소개했다.
『대통령과 金大中의장, 나 셋이서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얘기해보자, 원한다면 盧泰愚대표가 참석해도 좋다고 제의했으나 대통령은 완강히 반대했다. 사면 복권도 마찬가지로 반대했다』
『회담에서의 호칭은 나는 「대통령께서」로 全대통령은 「金총재께서」로 했다』
金총재는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가끔 대통령을 「당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金총재는 비표를 다는 문제를 놓고 승강이를 벌인 사실도 공개했다. 대통령 경호실측이 비표를 달라고 하자 金총재는 『당신들이 이래서 국민의 마음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이 金泳三이 얼굴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세계가 다 안다. 당신들이 관례라고 하지만 나쁜 관례는 고쳐야 한다』고 주장, 비표를 달지 않고 대통령을 만났다는 것.
『4·13조치는 철회됐다고 보는가?』란 질문에 金총재는 『나는 철회하라고 했지만 철회되지 않았다』고 했다.
수십명의 외국기자들은 金총재의 성명이 통역없이 진행되자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하다가 『트란슬레이션!』하고 항의성 고함을 치기도 했다.

「대화 왜곡 발표」 주장

金총재와 金대변인은 오후 3시로 예정된 정부회의를 늦춰가며 3시30분부터 외신기자들을 위해 별도로 회담내용을 설명했다.
金총재는 외신기자 회견이 끝난 후 이미 소집돼 있는 정무회의에 참석, 영수회담 결과를 설명한 뒤 『오늘 회담은 결렬된 것으로 본다』는 평가를 제시했다. 金총재는 의원들의 의견 개진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체 발언이 없어 무거운 침묵만 흐르자 대변인이 「결렬」 설명을 발표키로 하고 5분만에 산회했다.
민주당이 정무회의를 열어 여야 영수회담을 결렬이라고 규정하자 李鍾律 청와대 대변인은 金泰龍 민주당대변인과의 통화를 시도했다. 李대변인과 金대변인은 24일엔 연락이 닿지 않았고 25일 오전에야 통화가 됐다. 金대변인은 자신이 없는 동안 李대변인으로부터 전화가왔다는 얘기를 듣고 일부러 기자들이 있는 가운데 李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李대변인은 『청와대 회담은 관례상 청와대에서만 발표하도록 돼 있는데 청와대 발표가 있기도 전에 민주당에서 결렬 선언을 한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했다. 金대변인은 이에 대해 『결렬된 것을 결렬이라고 한 것이 뭐가 나쁘냐. 관례라고 하지만 나쁜 관례는 고쳐야 하고 합의가 없었으면 따로 발표하는게 당연하다』고 반박했다.
『결렬 선언이 너무 성급했다』는 李대변인의 「아쉬움」 표시에 대해서도 金대변인은 『우리도 할 얘기를 충분히 다했다는 데 대해선 의미를 부여했으나 합의사항이 없었으니 결렬 아니냐』고 주장했다. 金총재는 24일 오후 청와대에서 발표한 영수회담 대화 내용에 대해 『내용이 왜곡됐다』며 불만을 넘어 분노감을 표시했다. 金총재는 『우선 전체 대화에서 내가 全대통령보다 오히려 더 많은 얘기를 했으나 全대통령이 80%를 얘기한 것처럼 됐을 뿐만 아니라 내가 강력하게 요구한 것을 부탁한 것처럼 실제 내용과 다르게 발표했다』고 강조했다. 또 『나는 감사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부연했다.
金총재는 이날 밤 늦게 金泰龍대변인에게 대화내용을 정리 25일 아침에 발표하도록 긴급 지시했다. 金대변인은 이에 따라 25일 별도의 대화록을 공개했다. 민주당측이 공개한 대화록중 「축소되거나 생략됐다」는 대목은 『비상조치나 계엄령 등을 선포하면 사태가 악화될 뿐이며 절대로 수습은 안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일부 야권 인사들은 비상 계엄령을 선포해야 이 정권이 빨리 무너진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盧대표 극비리에 청와대 방문

민정당 당직자들은 민주당이 간단하게 여야 영수회담을 결렬로 규정하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金총재가 단정적으로 결렬이란 표현을 한 것은 이틀 앞으로 다가온 평화대행진에 추진력을 제공하기 위한 전략이란 해석이 있었다. 李春九 사무총장은 『4·13은 사실상 철회된 것이다. 더구나 야당이 주장해온 6·10 관련 구속자 석방과 金大中씨 연금해제도 약속하지 않았는가』고 반문하면서 민주당을 비난했다. 이날 신문·방송은 정부·여당의 배경 설명 등을 수용, 「4·13조치의 사실상 철회」라고 제목을 뽑았으나, 민주당은 『그런 중대사는 金총재와의 회담에서 명시적으로 밝혔어야 했다』면서 「결렬」이라고 밀고 나갔다. 외신기자들에게는 결렬을 「진전이 없었다」는 뜻의 「노우 프로그레스」(no progress)로 표현, 설명해 주었다.
이런 혼란 상태 속에서 盧대표는 이날 오후 긴급당직자 회의를 주재한 뒤 비밀리에 청와대를 방문, 全대통령과 시국 수습책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청와대 방문사실은 기자들도 눈치채지 못했고, 6·29 선언 뒤에 비로서 알려진 것이었다.
이날 자정, 영수회담의 효과가 최초로 나타났다. 경찰이 金大中의장의 집을 포위하고 있던 병력을 철수시킨 것이었다. 金大中의장은 집으로 몰려온 1백여 명의 기자들에게 『나는 연금중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감격을 느꼈는데 그것은 바로 6·10대회 이후 나타난 국민의 거대한 힘이다. 이런 국민을 갖고 민주화는 물론, 통일,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적 진출도 못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전투경찰의 애절한 편지

6월24일 「어느 용기없는 기동 경찰관」이 보낸 「우리의 견해」라는 편지가 국민운동 전남도 본부에 배달되었다. 이 편지에는 전투경찰관의 고민이 절절이 담겨져 있었다. 『저희들은 돌과 화염병은 두렵지 않습니다. 내동생, 내 누이들에게 최루탄을 발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가슴이 뒤틀리는 회한을 느낍니다. 데모 현장에서 할아버지, 꼬마들까지도 최루탄을 쏘지 말라고 할 때 저희들의 마음 속은 눈물로 가득합니다. 대통령 각하의 영단을 기대합니다. 야편에서 정치하시는 분들도 체면 같은 것 버리고 서로 대화해야 합니다. 너무 몰아붙이면 상대방에서도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대응하여 수십만이 희생된 다음에 당신들의 손에 대권이 쥐어지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근무 아닌 다른 일이라면 신명을 바쳐 일하겠습니다…』
6월24일 일간지의 한 정치부 기자는 한탄했다.
『민심이 너무 빨리 바뀌고 있어 도저히 기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다. 기사의 예측이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이 정도의 타협안은 민심에 먹혀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마다 전부 배척되고 있다. 민심의 이반속도는 무서울 정도다』
한 고위 공직자는 기자들에게 솔직한 표현법을 썼다.
『국민들의 요구가 날로 에스컬레이트돼 걱정스럽다. 바지를 벗으니, 이제는 팬티까지 벗으라 한다. 이러다간 완전히 벌거숭이가 될 때까지 요구하고, 또 요구할 것 같다. 그럴 바에야 초장에 강하게 대처하자는 생각도 있다는 것을 유의해 달라』
6월24일. 강남의 술집들은 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밤 10시에 기자가 어느 카페식 술집에 들어갔더니 「오늘의 첫손님」이란 것이었다. 6·10시위 이후엔 손님이 격감했는데, 『이런 비상시국에 술이나 마시는 것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느냐』는 자숙 분위기 때문이란 것이 여주인의 해설이었다. 묘하게도 6월사태 기간에는 강도·절도·강간 등 파렴치 범죄의 발생도 줄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범죄꾼들이 시위현장으로 나갔기 때문이란 풀이와, 『천둥을 칠 때는 말도 조심한다』는 옛말처럼 국가의 위기에 처하여 범죄자들도 행동을 삼가고 있기 때문이란 해석이 있었다.

아테네식 직접 민주주의시대로

25일 온 나라의 관심은 하루 앞으로 다가온 평화대행진에 집중 되었다. 金泳三총재는 『적어도 1백만 명이 거리로 나올 것이다』고 장다했다. 최대 관심사는 시위인과 숫자였다.
25일 청와대에서 받은 경찰의 정보도고는, 6월26일의 대행진이 6월10일 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은, 2·7추도의 정도의 시위가 될 것이란 예상이었다.
6·26대행진에 인파가 많이 몰리면 정부가 제시한 「사실상의 4·13철회」에도 국민이 만족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고 인파가 줄면 정부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사표시로 해석되어 정국은 수습단계로 넘어갈 것으로 관측되었다.
6·10시위 후 한국은 직접 민주주의 시대로 진입한 감이 있었다. 광장·성당·거리·골목 등 도심의 곳곳에서 수백, 수천 명이 참석한 시민 대토론회가 열리는가 하면, 시위에 몇 명이 참석하느냐가 정국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분위기였다. 국회 등 장내 정치가 민주주의를 수용하지 못하니 민의(民意)는 거리로 나왔고, 시위자의 머리수가 가장 권위있는 판정 기준이 돼 버렸다. 25일 오후에 한국을 떠난 미국무부 시거 차관보는 김포공항에서 기자 회견을 가졌다. 계엄령 선포 등 군부 개입의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힘주어 말했다.
『미국의 입장은 지극히 분명하다(crystal clear). 우리는 어떤 종류의 군사력 행사도 반대한다』
시거 차관보는 그런 뜻을 全대통령에게 분명히 전달했다고 말했다.

새 구호-『직선제로 독재타도』

치안본부는 26일 오전 평화대행진이 열릴 예정인 서울 등 전국 34개 지역에 6만 명의 진압병력을 배치했다. 서울의 7개 집결지 주변엔 1백70개 중대 2만5천 명을 투입, 3중 차단망을 구축했다.
26일 오후 3시경부터 연세대학에서는 출정식이 열리고 있었다. 약 3백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3일 전에 약2만 명이 모였던 것과 비교해서 그런지 한산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사진 기자는 『오늘 평화 대행진은 아무래도 실패작일 것 같은데』라고 얘기했다.
출정식을 진행하는 학생대표들도 약간은 불안한 모양이었다. 한 학생은 『우리의 친구들이 여기에 없다고 실망하지 맙시다. 지금 이 시간에 카페에 있는 친구들도 우리와 생각은 같을 것입니다』고 했다.
학생들은 이틀 전에 있었던 여야 영수회담은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발 물러나면 독재의 쇠사슬을 연장시키는 것이 됩니다. 영수회담이 있었던 그날밤 영등포에서는 여전히 최루탄이 터지고 우리는 쫓겨야 했습니다. 삶의 터전에서 보장되지 않는 자유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날 학생들은 「직선제로 독재타도」 등 새 구호를 연습했다.
한 학생대표가 행동수칙을 설명했다. 집결지에 대해선 국민운동본부와 협의가 있었던 것 같았다. 5시50분까지 명동에 모여 최종집결지인 파고다 공원까지 갔다가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되면 청와대로 행진하고, 불리하면 퇴계로를 거쳐 서울역으로 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노래는 일반시민들도 따라 부를 수 있는, 아리랑, 아침이슬, 우리의 소원, 애국가 등을 불러달라고 했고, 길거리에 붙일 소자보와, 구호를 낙서하는 데 필요한 2백30원 짜리 매직 펜슬을 꼭 갖고 나가달라는 당부도 있었다. 학생들은 기세를 돋우기 위해 「와!」 소리를 몇 번 외쳤다. 여름 날 오후의 나른하던 교정이 쩌렁 울렸다.

경적시위가 분위기 잡아

오후 4시40분쯤 무교동 민추협사무실이 들어 있는 빌딩 앞 길에서 경찰은 처음으로 최루탄을 터뜨려 민주당원들과 시민들을 종로와 청계천 쪽으로 해산시켰다.
이틀 전의 영수회담으로 대화국면이 전개될 듯했으나 「거리의 진실」은 따로 있다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5시30분께 9층에 설치된 마이크를 통해 울려나오던 金총재의 대회사가 끝난 직후 프라자호텔 문 앞에 몰려 서 있던 시민들을 향해 사과탄이 대여섯 개 날아갔다. 박수 한번 치지 않은 순수한 구경꾼들이었다. 그 속에는 정보수집차 나온 기관원들도 많이 섞여 있었는데 호텔 로비안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5시40분 북창동. 학생들이 골목으로 몰려들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에서마다 학생들이 우루루 쏟아졌다. 흰 가운을 입고 가방과 소독수 물통을 든 의과대학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곳곳에서 학생들은 얇은 비닐 뭉치를 들고 학생·시민들에게 눈가리게 용으로 잘라 주고 있었다. 짜장면을 배달할 때 덮어씌우는 데 쓰이기도 하는 이 비닐로 눈을 가리고, 입을 마스크로 막으면 웬만한 최루탄가스에는 견딜 수 있다. 이날 학생·시민들이 가장 많이 쓴 방어용구가 이것이었다. 물안경은 눈을 짓눌러 인기가 떨어졌다.
6시 정각 남대문시장 부근. 애국가 합창소리와 함께 지나가던 각종 차량이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경적 소리는 전보다 훨씬 넓게 오래 이어졌다. 이 소리는 흩어져 다니는 시위자들의 마음들을 시민과 함께 통합시키는 심리적 효과가 있었다. 경적시위는 결정적으로 이날의 시위 분위기를 가열시켰다. 경적 속의 애국가가 끝나자마자 함성, 구호 그리고 꽝! 꽝! 꽝!…. 뿌리는 유인물이 눈처럼 흩날리고, 손수건·태극기가 나부끼고, 정신을 혼돈시킬 정도로 경적소리는 시끄럽게 계속되고, 곳곳에서 쫓고 쫓기는 발자국과 「와!」하는 함성이 고층건물 사이에서 증폭되어 시청-신세계 백화점-서울역 부근의 도심으로 번져나갔다.
한국은행 앞의 남대문 제3파출소 부근에선 워키토키 전경을 독려하는 한 경사의 목소리가 유난히 힘이 있었다.
『오늘은 밀리면 안 돼!』
파출소엔 벌써부터 시위자들이 속속끌려 들어오고 있었다. 40대 목사, 의과대학생들, 시민들… 이들은 파출소 안에서도 기가 죽지 않고 경찰관들에게 대어들었다. 목사라는 40대 사나이는 경찰관들을 뿌리치고 후다닥 달아나다가 다시 잡혀 왔다.
6시20분 롯데쇼핑 앞 간선도로. 수십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시민들의 합세를 권유했다. 시민들은 움직이지 않고 박수만 간간히 보냈고 지나가던 차들은 경적으로 호응하고 있었다.
6시40분, 퇴계로 쪽의 명동거리에서 화염병과 돌이 날고 있었다. 퇴계로쪽 출구를 가로막은 전경들을 향해, 주로 1~2학년생으로 보이는 1백여명의 대학생들은 보도블록을 깨던지고, 그 한구석에서는 화염병을 만들고 있었다. 보도블롤을 깨는 팀, 운반하는 팀, 던지는 팀이 따로따로였다. 양쪽은 가운데 약 50m를 전장으로 비워놓고 던지기 시합만 계속했다.

외국인 보는 데서 무차별 구타

7시10분, 서울시경 부근 빌딩 벽 곳곳에는 「민중판화」들이 나붙거나 판화를 가슴에 대고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이 많았다. 판화는 농민·노동자·학생·지식인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구두 발자국이 찍혀 있고 최루가스 가루가 묻은 판화들도 더러 붙어 있었다.
7시20분. 조선호텔 앞 소공동 거리에는 5백여 명의 젊은 시위대가 약 20분동안 길 중앙을 차지, 구호를 외쳐댔다. 상대는 전경이 아니라 사복조진압부대였다. 나아가 비교적 많아 보이고, 몸집이 좋으며, 장발이 많아, 그때까지 보이던 사복조와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었다. 7시30분께 이들 사복조가 최루탄을 던지면서 시위대를 덮쳤다. 던질 것도 없는 시위군중은 조선호텔쪽으로 달아났다. 호텔 경비원들이 가스마스크를 차고 문앞에 버티고 있다가 피신해 들어가려는 군중을 막았다. 서너명이 사복조에 붙들렸다. 사복조는 중인환시리에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국내외 사진기자 너댓 명이 몰려가 이 장면을 찍었다. 그래도 구타는 계속되었다. 한 시민은 완전히 뻗었다. 사복조가 업고는 어디로 옮겨갔다. 어느 40대 사진기자가 『야 이 새끼들아, 때리긴 왜 때려!』라고 호통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한 취재기자가 구타가 진행중인 속으로 달려가 수첩을 들이댔다.
『적을려면 적어 봐!』
건장한 사복이 그 기자의 팔뚝을 치면서 소리쳤다.
한 서양기자가 달려오더니 『이 사람들이 정말 경찰이냐』고 물었다. 호텔로비로 피해 들어가는 시민까지 나꿔채 외국인들이 보는 속에서 무차별 구타를 일삼는 이들에게 어떤 건물에서 『야 이 군사정권의 주구들아!』하는 욕설이 내리 꽂혔다. 그쪽으로 수십명의 사복조가 우루루 달려갔다.
한 사복조는 조선호텔 입구 한 구석에 숨어 있는, 데이트하러 나온 듯한 20대 남녀를 보고는 『빨리 돌아가!』라고 고함을 쳤다. 두 남녀가 구석에서 나오자, 한 사복은 물을 뿌리고 있던 호텔 종업원으로부터 호스를 빼앗아 이 두 남녀에게 물세례를 주었다. 두 사람은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이 되었으나 겁에 질린 표정일 뿐이었다.

석기시대의 전쟁터 같은 서울역

6·26평화대행진과 같은 대규모 시위는 넓은 지역에 걸쳐 벌어지므로, 기자들은 전체적인 모습을 잡기가 매우 어렵다. 자기가 맡은 지역의 시위 모습으로 전체를 추측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월간조선 취재팀은 시위의 전체상을 파악하려고 콜택시를 타고 오후 8시부터 2시간 동안 시위 지역을 둘러보았다.
동대문까지의 종로통에서도 수백명 단위의 시위대가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응원하는 인파로 인도는 메워졌고, 경적호응은 그 어느때 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종로통이 사람들로 꽉찬 느낌이었다. 특히 동대문 일대는 사람 꽃밭이었다. 이화여대 부속병원쪽 언덕바지엔 흰옷 입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땅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몰려 있어 함박꽃이 핀 것 같았다. 서울운동장 일대는 시위대가 거리까지 점거하고 있었다. 콜택시 운전사도 신이 나서 경적을 마구 울려댔고, 시위대는 박수를 보냈다. 우리는 꼭 무대 속으로 뛰어든 배우 같은 기분이 들었다.
8시30분, 취재반을 태운 콜택시는 퇴계로와 회현 고가도로를 거쳐 서울역 북쪽을 지나는 고가도로상으로 진입했다. 고가도로 위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남대문 일대는 장관이었다. 서울역 앞 광장과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한 약 2km의 아스팔트 전장이 펼쳐져 있었다. 힐튼호텔, 용산쪽, 남대문쪽, 서울역사 쪽에 수천명 단위의 시위군중이 뭉쳐 있고 그 중앙에서는 석기시대의 전쟁과 같은 돌·화염병·최루탄 투척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실 비 데밀과 같은 영화감독이 좋아했을 스펙타클이었다. 시위군중이 우- 몰려가 돌을 던지고 달아나면 로마 검투사 같은 전경들이 우루루 반격해 가고, 흩어졌던 시위군중이 다시 뭉쳐 공격을 되풀이해오곤 했다.
고가 도로는 차량으로 꽉 막혀 있었다. 시위대가 올라오더니 돌멩이를 아래로 던지기 시작했다. 이들을 소탕하러 전경들이 쳐들어왔다. 이번에 그 전경들을 향해 밑에서 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고가도로에서 고립돼 버린 수십 명의 전경들은 최루탄을 다 썼는지, 날아온 돌을 다시 주워 시위대에게 던졌다. 서울역 구내로 들어간 시위대의 구호 소리가 석양을 받아 성채 같이 보이는 서울역사와 어울려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녁 9시. 치안본부 앞을 지나 신문로로 접어드니 이곳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마련된 야외공원의 벤치에는 젊은 남녀가 한가롭게 앉아 그들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고, 차량통행도 거침이 없었다. 거대한 도시에서는 참으로 여러 가지 삶이 가능한 것이다.
26일 밤10시께 서울역 앞 삼화고속 주차장 근방에선 희한한 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근처의 영세상인들이 시위대에게 사 준 콜라·사이다 병이 비어지자 이곳을 지나가던 포니 승용차 주인이 차에서 휘발유를 빼내 병에 기름을 채워 주었다. 여학생들은 옷을 찢어 마개를 만들고 대학생들은 불을 붙여 전경들에게 던졌다. 얼마 뒤 다른 시민들이 몰려와 이를 제지했다.

운동권 문화의 종합 전시장

밤10시30분 영등포역 부근. 경찰은 한때 1만5천명까지 모였던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수백발의 최루탄을 쏘았고, 그 잔류가스는 암흑천지로 변한 이 일대에 내려 깔려 거대한 가스실을 만들었다. 눈을 가리고 마스크를 해도 보행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밤11시20분 충정로 지하철역 입구 노상. 큰 태극기를 든 15명의 학생들이 1백여명의 시민들을 끌어 모아 애국가를 같이 부른 뒤 시국토론회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왜 개헌을 해야 하는가 등을 시민들에게 설명했고, 시민들의 질문을 받아 대답도 해주었다. 어느 학생은 대답이 막힐 때 답답한 표정을 지었으나 시민들은 박수로써 곤혹스런 분위기를 넘겨버렸다. 시민들은 슬리퍼를 신고 나온 애기 업은 아주머니, 할아버지, 국민학교생 등 다양했다. 전경 공백지대에서 이 토론회는 밤12시 넘어까지 진지하게 계속되었다. 대규모 격렬 집회보다 더 진한 감동을 준 장면이었다.
이날 서울 시내는 운동권 문화의 종합 전시장으로 변했다. 대학생들은 매직 펜과 스프레이로 벽, 아스팔트, 지하철구내, 버스 바깥면 등등 곳곳에 구호를 휘갈겨 썼다. 수많은 대자보·소자보가 등장했고, 판화까지 동원, 도시의 벽을 장식했다. 곳곳의 노상 토론회는 바로 옆에서 최루탄이 터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하늘을 찌르며 치솟는 수천, 수만의 팔뻗음과 비장하면서도 서정적인 노래들은 이날의 서울 도심을 「살벌한 축제상」으로 변모시켰다.
6월26일 서울 경찰은 전에 없이 기동성 있게 대처하여 사태를 장악했다. 6월18일과 같은 집단적인 항복은 없었고, 늘 시위대를 쫓는 입장에 있었다. 최루탄 발사를 자제하겠다는 내무부장관은 최악의 난사로 나타났다. 시위군중이 6월10일이나 18일보다 훨씬 늘었는데도 그런 대처가 가능했던 것은 그 전 며칠간 시위가 소강상태를 이루어 전경이 충분한 휴식을 취한데다가 상부로부터의 독전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26일엔 사복조 사나이들이 쇠파이프를 베로 둘둘 말아 들고 다니며 시위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도 마구 두들기는 모습이 시내 도처에서 목격되었다.
어느 이탈리아 기자는 이 사복조 중에는 「갱스터」(깡패)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면서 한국 기자에게 『혹시 죄수들을 위장시킨 것이 아니냐「고 캐묻기도 했다. 한국 기자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해도 이탈리아 기자는 믿으려들지 않았다. 6월26일의 시위에는 노동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전보다 많이 끼여 있었다. 시위가 더 계속됐다면 이들이 대거 참여했을 것이고, 그때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됐을 것이다.

우려에서 희색으로 돈 「본부」

6월26일 「평화대행진」 결행 시각이 다가오면서 국민운동본부 관계자들은 초조한 마음이 없지 않았었다. 규모가 6·10과 6·18 때보다 커야 한다는 데 대한 심리적 압박감이 상당했다고 한다. 『운동본부는 늘 「비폭력 평화적」이라는 말만 하는데, 언제까지 비폭력으로 나갈 거냐. 학생들은 매번 경찰들한테 당하고만 있다』는 전화가 자주 걸려와 과격한 양상이 전개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었다.
본부는 기독교회관 3백12호실과 NCC사무실 3백7호에 상황실을 설치했다. 3백12호는 서울 상황, 3백7호는 전국 상황을 맡았다. 李敦明변호사 李吉再 상집위장대행, 印대변인, 실무파견간사 11명, 상집위원3~4명이 상황실에 남았다. 1차 집결지로 되어있는 광화문 동대문 시청앞 안국동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시장 등에는 각각 「지도위원」이 파견되어 있었다. 첫 보고가 올라온 것은 오후 8시쯤. 상황실은 아연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2면의 벽을 메운 상황판에는 시각별로 간단한 경과, 참여 인파, 특이 사항 등이 기록됐다.
전남 완도에서는 3천군민 중에 1천명, 안동에서는 10만 시민 중 2만이 참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성남에는 5만에서 10만 인파로 보인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오히려 더럭 겁이 나기도 했다고 한다. 광주, 군산 등의 상황도 연이어 전해졌다.
11시경, 상황실의 관계자들은 서서히 안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밤12시 후 해서는 「이긴 싸움」이라는 판단이 섰다. 광주에서는 40만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는데 처음은 믿기질 않았다.
6·10이나 6·18 때도 마찬가지였만 6·26 대행진에서도 학생들, 특히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가 협의회」(서대협)의 적극적인 호응이 큰 힘이 됐다고 운동본부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다.
학생들과 국민운동본부와는 긴밀한 사전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비교적 온건한 노선을 걷고 있는 서대협은 「혁명으로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민민투 계열과는 달리 국민운동부의 노선을 지지하며 본부의 결정사항에 적극 동조했다는 것이다.

신문이 「시민승리」 판정

6·26평화대행진의 전국 참여 인원에 대해 운동본부는 1백80만명, 경찰은 5만8천명, 일부신문은 서울 4만, 광주 5만, 부산 4만, 기타지역 7만 등 20여만명이라고 주장했다. 시위자와 응원자의 구별이 어렵기 때문에 시위통계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시위에 동조하는 쪽에선 많이, 반대하는 쪽에선 줄여 잡으려 하므로 시위 인파집계는 통계의 영역이 아니라 가치판단의 영역인 것이다. 어쨋든 이 평화 대행진의 참여 인원수가 최대였다는 것은 분명했다. 경찰은 경찰관서·시청·민정당 지구당사 등 52곳이 불타거나 파괴되었다고 발표했으나 주요신문들은 일제히 「인파는 늘고 과격은 줄었다」는 제목을 달았다. 「목청 큰 『성공』, 어색한 『안도』」라는 제목도 있었다. 이런 제목이 6·26의 성적평가서가 되었다. 6월사태를 종합, 정리, 평가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 6·26시위에 대해서는 결정적으로 국민과 야권에 유리한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아스팔트 위에선 지고 지면에선 이겼다』고 어느 시위자는 말했다. 아스팔트 위에선 늘 쫓기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 시민들이었지만 신문은 시민들의 팔을 들어주었다는 얘기였다. 6·26대행진의 메시지는 국민들이 「4·13의 사실상 철회」 정도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는 단호한 비토 선언이었던 것이다. 27일 아침 청와대 비서들은 언론기관에 전화를 걸어 직접 시위인파를 물어보기도 했다. 경찰이 보고한 인파와 신문에 난 인파가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7일 아침 서울 광화문에 있는 어느 사무실에서는 직원들이 모여 앉아 간밤의 시위에 대하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어느 직원은 사복조의 시민 구타에 흥분, 『양떼 사이로 늑대를 풀어 놓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다른 직원은 수만명이 뒤엉켜 일대 공방전을 벌였던 서울역의 공중전화 박스가 유리창하나 깨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점, 시위를 끝내고는 멀쩡하게 직장으로 돌아가 또 열심히 일하는 점을 들어 『위대한 국민이다』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한 간부는 『과잉진압이고 뭐고 이제는 별 의미가 없게 된 것 같다. 어제 일로써 이미 대세는 완전히 결정되었다. 결말이 곧 지어질 것으로 본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날 오후, 李丙琪민정당 대표 보좌역은 盧대표 집에서 모종의 협의를 마친 뒤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선언문 초안 작성에 들어갔다. 이때 모 교수가 李보좌역과 함께 초안을 작성했다고 한다. 李보좌역이 자필로 초안을 썼다.
다음날은 일요일인 28일. 盧대표는 이날 종일 집에 들어 앉아 있었다. 李보좌역은 오전에 당사로 나가 잠깐 작업을 했다. 이때 모기관 책임자로부터 李보좌역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작업 다 끝났는가. 다 됐으면 한 부 보내달라』고 했다. 李보좌역은 이날 밤 그에게 복사한 1부를 보냈다.
이날 저녁 청와대 경호실장으로부터 盧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경호실장은 『盧대표께서 청와대에 좀 오셔야겠습니다. 각하께서 찾으십니다』라고 했다. 盧대표는 『집 주위에 기자들이 많이 몰려 있어서 곤란하다』며 넘겼다.

6·29발표 직전에 대통령 면담설

6·29선언은 6·26대행진에 대한 화답이었다. 6·25대행진이 인파 격감으로 실패했다면 6·29는 나오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것이 재야쪽의 시작이다. 6·29선언이 盧泰愚대표의 완전히 일방적인 단독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盧대표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7월13일자)와의 회견에서 『내가 그 결정을 내리기 전에 대통령과 상의한 적은 없었다. 나는 대통령께서 나의 제안을 수락하리라고 확신했으나 그 결심과정은 매우 외로운 것이었다』고 말했다.盧대표는 7월4일 뉴욕 타임스의 클라이드 해버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그가 全대통령의 허락을 받고 6·29선언을 했느냐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군부내 실력자들과의 의논은 없었으나 그의 조치가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것임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盧대표 측근에서는 盧대표가 6·29선언 이전에 全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6월24일 밤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29일 새벽이 아니면 28일 밤에 청와대 바깥의 안가(安家)에서 全대통령과 盧대표가 만났고 이 자리에서 盧대표가 6·29선언의 전문이나 요지를 전달했을 것이라는 설이 최근에는 유력해졌다. 이 면담은 盧대표가 허가를 받는다기보다는 선언 내용을 통고하는 성격이었으리라고 한다. 盧대표가 全대통령으로부터 정식 허락을 받는 등 관례적인 의사결정과잉을 거친 것은 아니고, 그 자신의 주도로써, 全대통령의 명시적 반대없이 선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盧대표는 30일 아침 李漢基총리, 安武赫 안기부장, 朴英秀 실장, 金潤煥 정무 수석 등을 모처로 초청, 아침 대접을 하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이날 오전 盧대표는 청와대에 들어가 全대통령을 면담했는데 악수할 때 『각하,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6·29선언은 盧대표의 정치적 생명을 건 일대 도박이었다. 盧대표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딸(시카고 대학 재학중)은 나를 무조건 지지합니다만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달라요. 아들은 때로는 매우 비판적이지요. 아들과 이야기 해보면 세대차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발표 이후, 아들은 처음으로, 「아버지를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인간에 대한 신뢰심이 생겨』

그날 盧대표에게 박수를 보낸 것은 그의 아들뿐만은 아니었다. 金泳三총재는 민추협 사무실에서 그 뉴스에 접하자마자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金총재는 『중대한 결단으로 이를 환영한다』고 했다. 통역을 맡은 金正源보좌역이 『위대한 결단』(Great Determination)이라고 통역하자 金총재는 『위대한이라고 하면 안돼!』라고 주의를 주었다. 뉴욕 타임스의 해버먼 기자가 『그러면 스몰 디터미네이션입니까?』라고 물어 폭소가 터졌다.
이날의 가장 감동적인 코멘트는 金大中 민추협 공동의장으로부터 나왔다.
『盧대표의 발표를 듣는 순간 인간에 대한 신뢰심이 번뜩 떠올랐다. 그토록 억압하던 사람들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신선한 생각이 들었다』
金大中의장의 盧대표 등에 의해서 대표되는 주도세력에 의해서 사형집행 일보 직전까지 갔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金의장의 이 오전 코멘트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金의장은 이날 오후엔 냉정한 평가로 돌아섰다.
29일 오후 2시30분 金大中의장의 응접실엔 해버먼기자 등 약 30명의 외국기자들이 모였다. 감색양복을 입은 金의장이 자리에 앉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金의장이 싱긋 웃으며 영어로 『아임 레디』(I」m Ready)라고 하자 질문공세가 시작되었다. 金의장은 영어로 대답했다. 어휘선택이나 문법이 아주 정확한 영어였다. 발음은 다소 한국적이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더욱 진지하게 비쳐졌다.
金의장의 대답은 기사화하기 좋게끔 정확, 명료했다. 金의장은 지난해의 불출마선언이 아직도 유효한 것인가를 묻는 기자 질문에 대해 『나는 대통령이 될 의사(Intention)가 없다』고말한 뒤 지난해의 선언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의 기자회견 때도 金의장은 『나는 민주화에 관심이 있을 뿐 대통령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고 했었다.
한 외국 기자가 『金泳三총재를 대통령후보로 밀겠느냐』고 물었을 때 金의장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바 없다』고 간단히 잘라 말했다.
金의장은 6·29선언은 국민들의 힘이 盧대표에게 압력으로 작용하여 그런 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역할에 대하여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도 金의장은 『우리 국민의 힘이 미국정부의 태도를 변화시켰다』고 하여 공을 국민한테 돌리는 논리를 전개했다.
기자가 金大中의장 집에서 무교동 민족문제연구소로 오니 金泳三총재 사무실에선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KBS와 MBC 텔리비전 기자와 金총재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두 방송국을 「언론기관 아닌 정부의 선전기관」으로 규탄, 시청료 안내기·뉴스 안 보기 운동을 벌였던 당의 총재가 인터뷰를 하고 있어도 별로 이상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이날은 누구든지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장 평화스러운 혁명

盧대표의 성명서는 반정부 인사들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 출판인은 「저는…」이란 겸손한 표현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어느 변호사는 『법률교과서를 읽는 기분이 든다』면서 『야당총재의 강경한 성명같다』고 했다. 한 신문기자는 『언론에 대한 심판은 독립된 법원과 국민만이 할 수 있다는 대목이 썩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일부 외국언론은 6·29선언을 「盧대표에 의한 쿠데타」니 「명예혁명」이니 하고 추켜 올렸다. 외국언론은 타협의 전통이 약한 한국에서 정권측으로부터 큰 양보가 나왔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미 국무부의 한 당무자는 『우리는 한국정부가 야당의 요구를 50%쯤 받아줄 것으로 예상했는데, 발표를 보니 1백10%나 받아준 셈이다』고 말했다.
타임지는 이번 변화가 순전히 한국인의 「피플 파워」 덕분에 생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타임지는 약20일간 계속된 시위 속에서도 사상자와 사물(私物)피해가 그토록 적었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지적하면서 「현대사의 민중혁명 중에서 이번처럼 유혈과 혼란이 적었던 적은 일찌기 없었다」고 했다.
6·29선언을 계기로 「盧泰愚붐」이 며칠간 신문과 방송을 뒤덮은 뒤 국민들의 감동은 서서히 식어갔다. 오히려 불안해진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6·29선언으로 권력의 구심점은 대통령, 盧대표, 양金씨등 네 갈래로 다원화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권력의 그늘에 익숙해온 한국인들은 권력의 중심부에 일시적인 공백이 왔던 1980년의 봄을 상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마음을 비웠다』 『직선제만 되면 대통령에 불출마한다』고 말하던 양金씨가 80년 봄 그때처럼 또 다시 대통령에의 야망을 불태우지 않을까 하여 과거의 아픈 상처가 되살아났던 것이다.
많은 시민·학생들은 6·29선언으로 盧泰愚대표의 결단이 부각되고, 상대적으로 시민·학생에 의한 6월시위의 의미가 희석되는 데 대해 불만이 커졌다. 7월3일 연세대학교 대토론회에 모인 1만5천명의 대학생·시민들은 거의가 6·29선언을 「민중의 힘 앞에서의 굴복」 또는 「정권연장을 위한 일시적 호도책」이라고 보는 쪽이었다.

『한열아! 가자, 이제, 광주로』

7월9일의 李韓烈군의 장례식과 추모행렬은 6·29선언에 대한 학생·시민들의 답장이자 한달간 계속된 한국드라마의 제1장이 끝나는 장면이었다.
『장준하 열사―』 『김세진 열사―』
文益煥목사가 민주화를 위해 몸바친 25명의 열사이름을 외치자 연세대 교정을 꽉 메운 7만 군중속에서는 오열이 새어 나왔다. 이어서 李韓烈군의 어머니는 裵恩深여사가 마이크를 잡고 흐느끼면서 절규했다.
『살인마들은 물러가라! 현정부는 물러가라! 한열아, 다 잊어버리고 가거라. 이 많은 청년들이 너의 피맺힌 한을 풀어줄 거야. 안되면 내가 풀겠다. 한열아, 가자, 광주로―. 한열아, 가자! 이제 광주로 가자!』
수만명의 조객들 속에서도 흐느낌이 번져갔다. 9시5분께 서울대 李愛珠교수(체육교육학과)가 영력식장 앞 광장에서 춘 한풀이춤은 출정을 앞둔 전사들 앞에서 더 어울릴 만한, 칼춤같이 용약·전진하는 격렬한 에너지의 발산이었다. 추모행진은 1백만의 시민·학생들이 공동제작한 거대한 종합 예술작품이었다. 거기엔 시각·청각 예술, 그리고 맹렬한 동작과 아름다운 질서가 있었다.
준수한 李군의 사진, 李韓烈군이 한손으로 책을 잡고, 한 손으로는 군사정권의 상징을 쥐어짜며, 전경들을 무릎꿇린 장면을 그린 4×2m 가량의, 극장간판과 비슷한 붉은 그림, 구호가 적힌 수백개의 붉고 노랗고 흰 만장의 대열, 북소리·징소리, 꽃으로 뒤덮인 관과 영구차, 그 뒤를 따르는 각양각색의 한국인들, 거리와 건물을 뒤덮은 연도의 추모인파, 쏟아지는 박수… 그것은 장례 행렬이 아니라 축제행렬이었다.
오전 9시30분 장례 행진이 시작되어 오후 3시께 다연발 최루탄 세례를 받고 해산될 때까지 5시간30분 동안 행렬 속에서는 한번도, 단 1초도 구호나 노래가 멈춘 적이 없었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타는 목마름으로」 「산 자여 따르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은 이날의 배경음악이었고, 터지는 절규와 함성은 부서지는 파도소리였다.

아크로폴리스가 된 시청광장

이날 인파는 모두의 예상밖이었다. 하긴 6월10일 이후의 시위인파 예상은 한번도 맞은 적이 없었다. 정부측 예상은 물론이고 운동본부나 학생들의 예측도 훨씬 뛰어넘은 것이 시위 인파였다. 한번 불붙은 민중의 거대한 에너지가 가진 관성의 크기는 모여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다.
이날 추모행렬은 길이가 6km쯤 되는 엄청난 사람의 강물로 변했다. 인도의 추모·구경 인파까지 합쳐서 1백만 인파라는 것이 언론의 추산이었다. 한국역사상 최대의 인파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왜 거리로 나왔던가.
단순한 구경거리로 삼은 이들도 있었다. 장례행렬을 봐 두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 시민도 많았다. 구호를 한번 더 외치고, 못 다 친 박수를 한번 더 치기위해 몰려든 사람들도 많았다. 생각의 각론이야 어찌되었건, 총론은 하나였다. 이 땅의 민주화는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명령이란 생각, 그리고 그 민주화는 李군과 같은 비극을 마지막으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원이었다.
반(反) 권력의 도시 부산의 종철이와 민중봉기의 도시 광주의 한열이가 치른 피의 대가를 끝으로 이제 우리도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가질 만큼 되었다는 생각도 거기에 분명히 있었다.
장례행렬, 그 자체가 민주주의였다. 호르라기 불고 채찍질하는 제복은 하나도 없었지만 거의 자동적인 협동과 질서는 찡한 감동이었다. 어떤 관료와 어떤 제복이 그토록 아름다운 질서를 창조할 수 있었을까. 북소리·징소리·흐느낌·박수·노래·절규·웃음… 그 모두가 제멋대로, 그러나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대열에 끼였거나 이 대열을 구경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한 말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였다.
정오 직전에 사람의 강물은 저수지가 된 서울 시청앞 광장으로 흘러 들었다. 약 3만 평의 이 저수지를 꽉 메운 인파는 그 뒤 3시간 동안 이 일대를 옛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로 만들었다.
곳곳에서 토론회가 벌어졌다. 곳곳에서 구호와 합창이 터져나왔다. 곳곳에서 붉은 낙서가, 곳곳에서 대자보·소자보가 탄생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격문이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곳곳에서 대학생들은 담배꽁초와 휴지를 줍고 있었다. 「타도」 「규탄」 「살인」 「혁명」 「기만」 「축출」 「단죄」 「주구」 등등 광장을 지배하는 말과 글은 격렬했지만 행동은 질서·건설·평화·논리·화해였다.

6·29선언에 대한 반동

이윽고 10만 인파의 요구는 하나로 수렴되었다.
『조기게양!』
시청 옥상에 걸린 태극기를 향해 그들은 두 시간 동안 애타게 『조기게양!』을 호소했다. 프라자 호텔과 프레지던트 호텔, 나중엔 코리아나 호텔의 태극기는 반기로 내려졌지만 시청은 관료기구답게 딱딱하게 버티었다. 몇몇 시민은 원숭이처럼 물통(管)을 타고 옥상에 올라가려고 했다. 응원박수도 효험없이 중도에서 포기하거나, 힘이 빠져 오히려 시청옥상에서 내린 밧줄에 구조되기도 했다. 어느 청년이 시청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려 하자 군중은 『비폭력!』을 외쳐 끌어내렸다. 시청 안에는 전경들이 대기 상태로 들어가고, 예비군이 소집되었다. 시 공무원도 조기게양을 해야 한다고 쑥덕거렸다. 시장, 부시장이 없어서 그런지 아무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제 조기게양은 10만 인파의 체면이 걸린 쟁점이 되었다. 2시간여 동안, 시청이 자발적으로 반기게양을 해주기를 바라던 시민들은 이윽고 오후 2시 조금 지나 시청으로 몰려 들어가 태극기를 반기로 끌어내렸다. 시청사 안으로 몰려 든 군중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난 전경들의 분별력도 이날의 작은 감동이었다.

또 다시 최루탄 세례, 그러나…

이날 인파는 뚜렷한 메시지를 갖고 거리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의 구호와 박수, 전단 등으로 미루어 그 메시지는 6·29선언이 현정권이 준 시혜가 아니라 민권의 승리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과 미국의 내정간섭에 대한 비난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6·10 시위가 朴鍾哲군 고문치사와 4·13에 대한 반발이었고 6·18이 최루탄에 대한 분노였다면, 6·26은 정부의 미온적인 수습책에 대한 거부권 행사였고 7·9 대인파는 6·29의 올바른 평가와 실천 요구이기도 했다.
조기게양의 성공으로 고무된 시민, 학생들은 오후 2시30분께부터 『청와대로 가자!』면서 광화문으로 방향을 돌렸다. 동아일보 앞을 가로질러 수천 명의 전경들이 네 대의 페퍼 포그차의 엄호를 받으며 시위대열을 막았다. 수천과 수만의 팽팽한 대치. 고층 건물위에서 내려다 보던 어느 시민은 『이 인파에는 최루탄이 아니라 기관총을 쏘아도 별 수 없겠다』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다닥… 다연발 최루탄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자욱한 연기, 흩어져 달아나는 시위군중의 대궤주, 비명, 욕설… 2분도 안돼 인파로 뒤덮였던 태평로 거리는 무인지경으로 변했다. 페퍼포그차가 신발, 안경이 흩어진 거리를 돌면서 소독약을 뿌리듯 최루가스를 내뿜었다. 태평로 일대는 거대한 가스실로 변했다.
『오늘 당장 이 정권을 끝장냅시다』고 외쳤던 시위자들은 권력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또 민중의 열정이 단호한 물리력 앞에서는 허무할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아름다왔던 대행렬의 결말로서는 참으로 원통하고 아까운 모습의 피날레였다. 이제 단 한번의 손질로써 완성될 참이었던 청자항아리가 와장창 깨지는 것 같은 아픔과 불길힘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그날 저녁 동숭동 흥사단 건물 앞에는 추도회 행사에 참여하러 온 3천여명의 학생들이 광화문에서의 참패를 설욕하려고 보도블록을 깨고 있었다. 길이 5백m에 걸친 거리가 순식간에 돌밭으로 변했다. 현명하게도 경찰은 접근하지 않았다. 밤 8시50분쯤 정보과 형사 3명이 탄 스텔라 승용차가 학생들 속으로 들어왔다가 붙들렸다. 형사 3명은 학생들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고 스텔라는 돌세례로 박살이 났다. 흥분한 학생들은 차를 뒤집어 놓고 기름을 끼얹었다. 불을 당기려 하는데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 회장 李仁榮군(22·고려대 국문과 4년)이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타나 『불을 질러서 안 될 이유 다섯 가지를 설명드리겠다』고 했다.
『불을 지르자』 『안 된다』로 시민·학생들은 한 30분간 매우 민주적인 노상 토론회를 가졌다. 결론은 안 지르는 것으로 났다. 「태평로에서의 실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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